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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쇼크 - 위대한 석학 25인이 말하는 사회, 예술, 권력, 테크놀로지의 현재와 미래 ㅣ 베스트 오브 엣지 시리즈 2
존 브록만 엮음, 강주헌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작년에 나온 마음의 과학에 이어 엣지 시리즈 두번째 책이 드디어 나왔다.
제목이 '컬처 쇼크'인데 이번엔 제목 그대로 문화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이야기 한다. '마음의 과학'만큼이나 이번에 실린 저자들의 면면도 역시 화려하다. 포문은 '총,균,쇠'로 우리들에게도 유명한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연다. 그는 흥미롭게도 '사회의 붕괴'를 테마로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가 드는 주요한 사례는 우리에게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한 '이스터 섬'이다.
일단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이스터 섬 사람들, 즉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원래 숲으로 뒤덮여 있던 섬에 정착했다. 그 섬의 숲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야자나무들이 있었다. 이스터 섬 사람들은 숲에서 나무를 베어내 카누를 만들고 땔감으로 사용했으며 석상을 운반하고 세우는 데도 사용했다. (...) 결국 그들은 숲 전체를 베어내 모든 수종을 절멸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달리 말하면 더 이상 카누를 만들 수도 석상을 세울 수도 없었다. (...) 이로 인해 식인 풍습이 전염병처럼 번지며 섬 주민의 90%가 죽음을 맞았고 그들의 사회는 붕괴하고 말았다. (p. 24)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스터 섬은 이렇게 멸망했다. 언제고 꼭 한번은 가보고 싶었던 섬이지만 전혀 몰랐던 섬의 역사였기에 흥미로웠다. 하지만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이걸 흥미 본위의 붕괴 사례로서 말한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그가 이 사례에서 주목했던 건 다음과 같은 물음이었다. "어떻게 한 사회가 전적으로 의존해 살아가던 생존 수단인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내는 재앙과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 이것 말이다.
이 책을 다 읽고나면 왜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이 질문에 주목한 이 글이 가장 먼저 나왔는지 깨닫게 된다.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여기서 우리들이 흔히 말하고 있는 이른바 '집단 지성'의 한계를 논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에게 집단 지성은 언제나(라고 까지는 비록 말하긴 어려워도) 그래도 올바른 쪽에 가까운 결정을 내린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흔히들 들고 있는 사례가 그것이다. 대충 사람들에게 평균을 짐작케하면 가장 많은 대답의 평균치가 실제 평균값하고 맞아떨어진다는 사례 말이다. 그래서 자주 사람들은 하나 보다는 둘이 , 둘 보다는 셋이 생각하는데 더 맞다는 말을 한다.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면서 자리잡게된 현상이기도 하다 아시다시피 민주주의를 이루는 주요한 원칙 중의 하나가 바로 '다수결 원칙'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말하는 이스터 섬 사례에서 보듯 집단 전체가 잘못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러고보면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의 나치 정당은 가장 많은 독일 민중의 지지를 받고 정권을 잡았었다. 그 역시도 집단의 선택이 꼭 올바르지 않음을 알려주는 좋은 사례다. 사실은 이 집단주의적 결정에 대한 불신은 고대 그리스 때부터 있었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다수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민주정을 쉽게 중우정치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보았으니까.
이번에 나온 '컬쳐 쇼크'는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터넷의 광범위화로 온갖 정보들이 너나할 것 없이 넘쳐나는 시대에, 그렇게 지식과 문화가 집단적으로 창출되고 소비되고 있는 시대가 가져온 '문화적 쇼크'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 말이다.
쉽게 말하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저번 세기말에 유행한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일종의 반격이라 할 수도 있다. 하긴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 대로 접어든 개념이니 반격이라는 말 자체가 어폐가 있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예술에 대한 제대로 된 정의를 추구하고 있는 데니스 더턴이나 문화에 대한 꼭 필요한 개념을 위해 이른바 문화 통일장 이론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는 브라이언 이노(개인적으로 가장 반가웠던 글이다. 음악이 아닌 글로 만나보는 브라이언 이노라니 얼마나 신선하던지. 그의 대담을 읽는데 문득 그의 앨범 Another green world 가 다시 듣고 싶어졌고 그래서 음반을 틀어놓고 책을 읽었다.) 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탈색화 시켜버린 문화와 예술에 다시금 구별되고 그만의 독특한 의미망을 설정해주려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이 책은 너무도 미시적으로 다원화 되어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알 수가 없고 그 모든 것이 똑같이 동시에 터져 나와 오히려 사람들을 무가치의 혼돈 속에 빠져들게 만드는 오늘날의 집단주의적 창출과 소비에 우려와 그것을 합리적으로 개선시킬 통로들을 사색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것은 재런 레니어의 '디지털 마오이즘'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글과 뒤에 실린 논쟁들이 이 책의 핵심 부분이라고 본다. 재런 레니어는 이 글은 여러가지 면에서 생각할 거리를 둔다. 직접 의미를 생산하는 자들 보다는 구글이나 우리나라의 포털과도 같이 오히려 정보를 통합하는 자들이 더욱 높은 수익을 얻고(음원 수익도 마찬가지라고 알고 있다. 창작자들 보다는 배포하는 자들이 더욱 돈을 많이 받는다.) '위키 피디아'나 '아메리칸 아이돌'의 투표와 같이 집단주의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별한 수단이나 존재는 전무하여 다만 그 과정만이 전부인 이런 상황. 그렇게 디지털 사회로 깊숙이 들어서면서 이전과는 여러 면에서 분명 달라진 지금의 현실을 그는 디지털 마오이즘으로 부른다.
'컬쳐 쇼크'는 점점 통합화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개인의 고유성을 다시금 복원시키려는 사유들이 모여있는 책이다.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글도, 예술의 의미나 문화의 의미를 추구하는 글도 사실 알고 보면 집단과 별개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할 개인의 정체성과 존재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략 2006년 전후로 나온 이 글들이 그러나 뜬금없이 제기된 것은 아니다. 사실 지금의 사회는 알고보면 저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서 보듯이 파시즘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포스트 모더니즘이 결국은 보수와 파시즘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우려는 당시 부터 존재해 왔다. 지금 유럽이나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까지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면 그들의 예언이 그리 틀린 것 같지는 않다. '컬쳐 쇼크'의 지식인들이 우려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더구나 스마트 폰을 비롯하여 디지털 환경이 더욱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사유라는 걸 하지 않게 되었다. 이 책에 실린 한 저자는 지금 사람들은 자신의 뇌를 머리가 아니라 외부의 하드웨어에 담아놓고 다닌다라고도 했다. 들뢰즈 역시 생전에 앞으로 사유 없는 무뇌아들의 사회가 될 것이라 경고한 바도 있다.
사실 지금 사회가 개성이 넘친다고 하지만 그건 어불성설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개성의 대부분은 외모에만 치중된 일종의 기성품화된 개성들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개성이란 외모만이 아닌 사유와 그에 뒷받침된 행위가 바탕이 될 때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컬쳐 쇼크'의 저자들이 건져내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이다. 지극히 그 자신만의 사유와 성찰 그리고 행동이 근거가 된 개인의 고유성.
이제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되었다. 나는 무엇을 알고, 알 수 있으며, 판단할 수 있는가? 예전에 칸트가 제기했던 인간학적 물음을 우리는 다시 해야 할 시기에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거기서 주어는 칸트와 달리 인간이 아니다. 바로 '나'다. 닥쳐오는 집단화(파시즘이라고 까지는 말하지 않겠다.)의 파도 앞에서 그렇게 계속 스스로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를 건져내 줄 유일한 구명 보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