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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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 세 번째로 소개되는 요나스 요나손의 소설,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은 내게 그야말로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았다. 나도 제법 장르 소설에 대한 경험이 많이 쌓인 탓에 책을 읽을 때 어느 정도는 뒷 얘기를 예측할 수 있는데 이 소설만큼은 그게 허락되지 않았다. 도대체 이 다음의 이야기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이 부분에서 무턱대고 꺼낼 이야기는 아니지만, 하여간 그래서 그간 천편일률적으로 뻔한 전개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식상하셨던 분들이라면 얼른 이 책을 손에 들 것을 권해드리고 싶다. 종잡을 수 없는 예측불허의 전개만으로도 끝까지 읽게 만드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 소설의 주인공은 킬러 안데르스가 아니다. 비록 제목에 유일하게 고유 명사로 표기되고 가장 앞에 나왔어도 얘는 조연에 불과하다. 진짜 주인공은 바로 뒤에 나오는 '그의 친구 둘'인 것이다. 이 '친구 둘'이란 하나는 남자, 다른 하나는 여자다. 얼른 커플인가 하는 생각이 드실 것도 같은데, 원래는 아니다. 둘은 주인공 남자가 점심을 먹다가 우연히 만났고, 더구나 그 때 여자는 남자에게 기도 하고 기도값을 받는 식으로 사기를 치려 했다. 그랬던 여자의 이름은 요한나 셸란데르. 전직 목사다. 그러나 지금은 설교 도중 사람의 성기 운운하는 쌍욕을 신에게 범해 강단에서 쫓겨나 노숙자 신세다. 그래서 신의 이름을 빌어 사기를 친 것이다. 사기를 당할 뻔 했던 남자의 이름은 페르 페르손. 작가 이름인 요나스 요나손 처럼 비슷한 발음의 나열이다. 그는 이 이름을 싫어한다. 그 이름을 물려준 가문에 대해 별로 좋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남자의 집안은 아주 잘 살았다. 할아버지 때만 해도 엄청 부자였다. 그 때 할아버지는 말 사업을 했다. 하지만 디젤 기관이 발명되고 자동차 산업이 활황하면서 할아버지 주력 사업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건 아버지 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시대가 가문의 앞길을 작정하고 막아서는 것처럼 하는 사업마다 시류를 잘못 만나 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현재 손님이 거의 찾지 않는 스웨덴에서 가장 음침하며 작고 허름한 호텔의 리셉셔니스트로 일하고 있다. 당연히 급료는 병아리 눈꼽만큼이고 사는 곳도 데스트 뒤에 딸린 원래는 창고로 쓰였던 작은 방이다. 사는 낙이 있을리 없다. 그에게 이름은 가문이 줄기차게 당한 불운의 겹침의 형상과도 같았다. 남은 것은 그런 이름을 가져다 준 가문에 대한 원망과 자신을 이렇게 만든 세상에 대한 복수심 뿐이다.


 요한나 셸렌데르도 다르지 않다. 그도 집안에 대한 원망이라면 페르 페르손 못지 않다. 그녀는 원래 대대로 목사인 집안 출신이었다. 그것이 여자인 그녀에겐 저주가 되어버렸다. 목사는 편견과 고집의 구현체나 다름없다. 요한나의 아버지가 그랬다. 그는 목사는 반드시 남자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가 목사가 되는 것은 불경이었다. 그런데 그만 딸이 태어나버린 것이다. 그는 딸을 태어날 때부터 원망했고, 그걸 신의 형벌이라 여겼다. 그는 딸을 용서할 수 없었고, 그 딸을 낳은 어머니도 용서할 수 없었다. 무시하는 것 정도는 귀여운 애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갖은 학대가 자행되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방치했다. 딸은 결국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목사가 되었다. 마음 속에는 아버지를 향한 원망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지만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끝내 반항 한 번 못했다. 그것이 결국 아버지의 장례식 날 터져 나오고 말았다. 아버지와 그런 운명을 허락한 신에 대한 원망이 그 날 강단 위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그래서 쫓겨 났다. 이렇게 페르와 요한나는 혈통과 세상 그리고 신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을 공유했다.


 그런 그들 앞에 '킬러 안데르스'가 나타났다. 모두가 두려워 하는 호텔 '7호실'의 손님. 만일 그가 잠에 취하는 바람에 그에게 올 의뢰비를 페르와 요한나가 맡지 않았다면 페르와 요한나의 기상천외한 사기극도 없었을 것이다. 그 의뢰비 때문에 그들은 킬러 안데르스가 한없이 가벼운 자신들의 주머니를 빵빵하게 채워 줄 '귀인'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그저 있는 것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성깔과 탁월한 폭력 기술뿐 머리는 없는 안데르센을 꼬드겨 그의 매니저가 된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팔이나 다리를 뭉개버리고 싶은 사람을 킬러 안데르스과 연결시켜 주거나 홍보를 통해 얼마간의 수수료를 받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페르의 아이디어로 스웨덴 제일의 무서운 폭력배가 되어버린 안데르손 때문에 의뢰는 쉴 새 없이 들어오고 곧 페르와 요한나의 기대대로 그들 수중에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온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전직 목사였던 요한나가 안데르스에게 무심코 하게 된 예수 이야기 때문에 안데르센은 그만 더이상 폭력을 쓰지 않으리라 결심하게 된다. 사업에 중대한 위험이 닥쳐왔다는 것을 감지한 페르와 요한나는 이미 눈도 맞고 해서 의뢰비를 사기쳐서 잔뜩 받아서는 그것만 들고 둘이 같이 튀자는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안데르스이 또 우연히 그 계획을 알게 된다. 하지만 역시 요한나의 화려한 말빨에 설득되어 같이 탈출하기로 마음 먹는다. 셋은 그렇게 튀고 의뢰비를 사기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스웨덴 최고의 범죄 조직의 수장 '백작'과 '백작 부인'은 그 대가로 그들의 죽음을 치르게 하기 위해 그들을 추적한다.


 여기까지도 흔한 전개라고 생각할 수 있다. 돈을 둘러싼 주인공 일행과 범죄자들의 쫓고 쫓기는 전개는 많이 봐 온 것이 사실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소설은 그런 식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예수를 영접하고 회심하게 된 안데르스는 교회가 보일 때마다 돈을 마구 헌금함에 집어 넣는가 하면 기부도 아끼지 않고 해 버린다. 이 사실이 전국적으로 알려져 안데르스는 여왕이 감사를 표할만큼 스웨덴에서 가장 유명한 기부 천사가 되고 그가 예수의 말씀을 따라 했다는 사실도 알려진다. 그래서 페르와 요한나는 안데르스를 목사로 내세워 헌금을 모아 가로챌 계획을 꾸민다. 처음은 세상에 대한 복수였고, 이제는 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마치 행운의 여신이 가문 대대로 불운을 선사한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이번에도 행운이 마구 작용해 그들의 계획은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마냥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왕년에 스웨덴에서 가장 좋은 교회 지기라고 자부하던 한 인물에 의해 교회 사기극이 발각될 위험에 처하고, '백작'과 '백작부인' 또한 그들의 위치를 알아낸다. 한 쪽에서는 감옥의 창살이, 다른 한 쪽에서는 죽음의 창살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과연 페르와 요한나의 사기극은 무사히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바랐던 돈을 들고 잘 달아나 꿈에 그리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순진한 희생자의 위치에 서 있는 킬러 안데르스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다면 직접 이 소설을 읽는 수밖에 없다.


 요나스 요나손은 주어진 삶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을 적극 지지하고 찬양해 온 작가다. 그의 이름을 우리나라에 처음 알린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부터 이 소설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까지 내내 그랬다. 생각해 보면 역사와 종교는 선험적으로 가장 굳어져 있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개인의 힘으로 쉽게 바꾸지 못하는 것이 바로 역사와 종교라는 말이다. 하지만 요나스 요나손은 거기에 균열을 일으킨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는 역사가 개인에 의해 새롭게 쓰여지고,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에서는 성경 말씀과 신이 전혀 다르게 응용되고 이용된다. 그렇게 역사와 종교는 더이상 인간을 지배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을 더욱 넓히는, 일종의 사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장(field)으로 바뀐다. 요나스 요나손은 그런 주체에게 간직된 역량을 무한히 펼쳐 보인다. 어쩌면 소설을 읽으면서 유쾌한 가운데 얻는 해방의 느낌은 바로 거기서 연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네가 어디까지 강해지고 넓어질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똑똑히 봐!' 나는 그것이 요나스 요나손의 소설 세계가 들려주고 싶은 진심의 모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 신자유주의로 인해 더없이 개인이란 존재가 위축된 이 시대에 그의 소설이 각광받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런 나의 말은 어디까지나 사족에 불과하다. 때로 소설은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읽을 이유가 충분한 경우가 있다. 바로 재밌다는 것. 여기에 동의한다면 이 소설을 얼른 손에 들어도 좋지않을까 싶다. 솔직히 나는 정말 재밌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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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소 충격적인 이번 미국 대선 결과는 결국 이제는 내수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듯하다.

 이번 미국 대선의 승패를 결정지은 것이 미국 백인 중산층인 것을 감안하면

 역시 이런저런 자유무역협정으로 해외에서 들여오는 값싼 수입품 때문에 미국 내 산업이 망한 것에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갈수록 붕괴되어만 가는 중산층의 불만이 이번 대선을 계기로 결집해 폭발한 것이다.

 미국은 이제 보호무역주의로 나갈 것이다.

 더이상 우리나라가 고수했던 대기업 중심의 성장 주의도 큰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경제정책을 근본부터 뒤집어 엎고 내수 진작 중심의 틀을 짜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이걸로 싸드는 이제 설치 되지 못할 것 같다. 트럼프는 먼로식의 고립 주의를 지향하므로

 중국이 아시아에서 뭘하든 별 관심이 없을 것이기에.

(이것 하나는 좋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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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6-11-09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미국은 어찌되었건 헤쳐나갈 잠재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우리나라의 지금 현재이지.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옛 속담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ICE-9 2016-11-09 16:25   좋아요 1 | URL
저도 격하게 동감합니다^^ 솔직히 무당이 수렴청정을 하고 온갖 신을 다 끌어들인 굿판을 벌이고 전봉준과 접신했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장관 후보에 오르는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가 미국을 걱정하는 것은 넌센스죠.^^
 
인민이란 무엇인가 컨템포러리 총서
알랭 바디우 외 지음, 서용순 외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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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민간인이 대통령을 조종하고 마음껏 국정 농단을 행하고 있는 와중이다 보니 '국민주권'이란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민주주의의 위기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재검토 되고 있는 말이 '국민'이라는 말이다. 학술적인 측면에서는 '국민' 보다는 '인민'이라는 말이 더 보편적으로 쓰인다. 사실 역사적으로 국민주권이 기원이 되는 것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때 시에예스나 루소는 '인민 주권'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대혁명'의 슬로건도 '우리는 인민의 의지에 의해 여기에 있다.'였다.


 원래는 국적을 초월한 개념이었는데, 우리에게선 국적에 한계지어진 개념이 된 것은 아무래도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분단 상황과 상관있을 것이다. 북쪽에 있는 정권이 공공연히 인민 정부라는 말을 운운했으니, 쓸 수 없었던 것이리라. 아무튼 알랭 바디우와 피에르 부르디외 그리고 주디스 버틀로와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여기에 사드리 키아리와 자크 랑시에르까지 가세한 오늘날의 인민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는 여섯 개의 논문이 모인 '인민이란 무엇인가'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여기저기서 현실화되고 있는 요즘에 다시금 재검토되고 재확인되어야 할 인민의 의미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알랭 바디우는 역시 과정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그답게 '인민'이란 결코 국적으로 제한 받아서도, 완성형의 의미로 받아들여서도 곤란하다고 말하며 인민이란 어디까지나 국제주의적이어야 하고 현재 있는 것이 아니라 도래할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바디우는 인민이 국가의 승인을 받고, 현재적 상태로 규정되어 그 자체로 인민 외부의 것에 대해 인민 자체가 폭력적인 상황이 되는 것을 피하려 한다. 이것은 그대로 주디스 버틀러의 논의와도 이어지는데, 그녀 역시 인민은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라 본다. 그녀는 특히나 집회와 시위가 인민의 출현 장소로 보는데, 그렇게 모두가 함께 모여 육체적인 발화로서 스스로 인민을 말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인민이 호출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버틀러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거리에 나가 지금 잘못된 것에 대해 국가에게 구체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진짜 인민(우리나라 용어로 하자면 국민)이 된다. 여섯 개의 논문에서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인민이 결코 국적으로 분리되지도 현재 상태로 고정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인민은 국적을 초월하며 더구나 현재 상태가 절대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인민이라는 개념은 필요에 따라,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공존해야 할 모두가 결국엔 하나의 인민이 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마도 이러한 석학들의 인민에 대한 정의는 최근 시리아 난민 사태로 더욱 빚어지고 있는 유럽에서의 이주민 유입으로 인한 갈등에 중요한 성찰의 지점들을 제공할 것 같다. 영국은 과거 인민의 개념에 함몰되어 외부에서 유입되는 이주민들을 같은 인민으로 보지 않으려 했고 결국 브렉시트까지 감행하고 말았다. 이주민을 받아들이는 것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독일조차 내분의 반발로 메르켈 총리가 정치적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프랑스 대혁명 시기 처음 등장한 인민은 원래 포용과 관용의 의미가 더 컸다. 그랬던 인민이 어쩌다 이렇게나 협소해져 버린 것일까? 여기에 대해 사드리 키아리는 이렇게 말한다.


 공화국의 그리고/또는 '국가정체성'의 '가치들'이 식민지 이민자 출신의 프랑스인들의 '문화들' 신앙들과 호환 불가능하다는 명목 아래, 밀려드는 이민자들을 통제하고 중단시키며, '프랑스인의' 일자리를 보존하고, 테러리즘이나 범조에 맞서 싸울 '필요성'이라는 명목 아래 인민 개념은 백인, 유럽인, 기독교인, 소위 '토박이 프랑스인'을 중심으로 좁혀졌다. 달리 말해, 이 정책은 프랑스 인민이라는 기운 빠진 개념을 가장 쉬운 곳에서,즉 비백인에 맞서 재건설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진 것이다.(p. 158)


 이렇게 지금 우리가 널리 공유하는 국적에 기반한 인민, 즉 국민이라는 개념은 객관적 진리를 쫓아 창안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뭔가에 반대하여, 누구를 배제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개념 자체에 이미 배타적인 요소들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실제 우리가 인민이라는 말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도 북측을 배제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이제 왜 여섯 명의 저자가 국적이 아닌 국제를, 현재가 아닌 미래를 인민에게 가져오려는지 이로써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작은 순수했더라도 어떤 말이든 시간이 흐르는동안 오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 말을 가지고 사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거기에 속고, 선동되어 오염된 언어를 받아들인 채 또 시간이 흐르게 되면 그것이 상식이 되고 진리로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는 그것이 도리어 원래는 공존해야 할 사람들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어떤 말이든, 무턱대고 받아들이고 쓰기 보다는 원래의 의미는 어떠한지,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는지 늘 살펴보고 성찰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인민이란 무엇인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잘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인민(국민)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달리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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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1-04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좋은 책인데 많이 안 읽히는 거 같아 아쉬웠어요. 헤르메스님 리뷰로 오랜만에 다시 만나 반갑네요^^

ICE-9 2016-11-04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갈마님은 이미 보셨군요. 말씀대로 인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습니다.^^
 



 경찰이 항의 방문하여 지금은 철거했다고 하지만

 (내일 구청에 문의해보고 가능하다면 계속 걸겠다고 한다.)

 그래도 멋지다.

 그런데 이런 시국에 이 정도 현수막도 아직 내걸지 못하는 국가인가?

 어쨌든 나이들수록 점점 더 멋있어 진다.

 나도 그렇게 나이들고 싶다.


 그런데 박근혜, 오늘 새로운 소식이 하나 들리더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바로 다음날 문체부 2차관을 불러 체육개혁을 지시했다고.

 골자는 승마.

 때는 정유라가 고등학교 3학년으로 대학 입시와 아시안 게임이 코 앞에 있던 시점.

 당시 국가대표 선출 권한을 갖고 있던 교수가 워낙 원칙을 강조하던 사람이라

 압박용으로 승마계 비리를 거론하며 개혁을 추진했다는

 당시 문체부 제2차관이었던 김종의 증언.


 정말 할 말이 없다.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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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와 느린 춤을 - 아주 사적인 알츠하이머의 기록
메릴 코머 지음, 윤진 옮김 / Mid(엠아이디)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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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면서 사람은 이런저런 많은 타격을 받기 마련이지만, 치매는 그 중에서도 가장 둔중한 타격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한 때,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기억을 온전히 그대로 가진 채로 육신이 죽는 것과 육신은 비록 살아있더라도 자신을 포함하여 살면서 가진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 중에 어느 게 더 나을까 하고. 문득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거기서 인위적으로 규정된 수명이 다해, 자신을 만든 사람을 찾아 수명을 늘리려 지구에 잠입한 안드로이드 룻거 하우어는 결국 그 일을 실패하고 수명이 다해 죽으면서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너희 인간들이 상상도 못할 것들을 봤어.

 오리온 좌의 어깨 위에서 불을 뿜던 공격함들.

 탄호이저 게이트 근처 암흑에서 명멸하던 C 광선 하며.

 하지만 이제 모두 사라지겠지.

 빗 속의 내 눈물처럼.

 죽을 시간이야.


 '블레이드 러너'에서 기억은 정체성을 의미한다. 영화는 초반부터 기억을 통해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구별하는 장면을 통해 그것을 나타낸다. 기억을 잃는 것. 그것은 곧 자신을 잃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치매는 육신은 살았어도 정신적으론 이미 죽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품위라는 게 있다. 노년의 품위란 살아온 모든 것이 어디에 이르렀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식이다. 치매는 그것을 스스로 파괴시킨다. 정말 점잖고 반듯하게 살아와 누구에게나 존경받던 사람이 치매에 걸리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쌍욕을 연거푸 내뱉고 주위 사람들에게 폭력을 서슴없이 휘두르는 등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는 모습을 몇 번 목격한 나는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나는 죽더라도 지금 가지고 있는 기억을 가진 채로 죽고 싶다. 부디 내가 아닌 다른 나가 되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운명은 사람의 뜻과는 상관없이 찾아온다.


 미국의 하비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저명한 과학자였고 미국국립보건원의 유능한 의사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미국에서 68초마다 한 명 생긴다는 알츠하이머가 찾아오고 말았다. 그것도 아직은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인 56세라는 이른 나이에 그만 알츠하이머에 걸리고 만 것이다. 치매와 알츠하이머는 약간 다르다. 치매는 정신 질환만 있지만, 알츠하이머는 신체까지 영향 받는다. 몸을 거의 못 쓰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알츠하이머는 치매의 하위 범주로 들어간다. 그토록 자신의 삶을 잘 통제하던 그가 알츠하이머에 걸리자마자 차츰 통제가 무너지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잇단 폭언을 일삼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식의 결혼식 날, 축사를 읊는 자리에서 그것과 아무 상관도 없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주구장창 늘어놓아 하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렇게 자신의 사회적 평가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가 계속되고 결국 직장에서도 밀려나 집에만 있게 된다. 그 후로 20년 동안 내내.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계속 돌본 사람이 있다. 바로 그의 아내, 메릴 코머다. 그녀로선 정말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하비가 알츠하이머에 걸렸을 때는 메릴이 그와 재혼한지(하비는 세 번째 결혼이었다.)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그러나 그녀는 점점 '내가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이 아니게 되는 그를 헌신적으로 돌본다. 호전의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고 내내 낯선 사람이 되는 그와 아주 오랜 시간을. 메릴 코머는 그 시간을 한 권의 수기로 발간했다. 그것이 바로 이 책 '낯선 이와 느린 춤을'이며, 제목은 그렇게 절로 지어지게 되었다.



 나도 치매 환자를 돌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지만, 치매를 돌보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정보가 부족하다. 가족 중의 누군가가 치매에 걸린다는 것은 살면서 당하는 가장 낯설고 황망하기 그지 없는 경험이라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쩔쩔매게 되는데, 더구나 치매의 증상도 사람마다 다 다르게 나타나기에 그것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메릴 코머도 비슷했다. 그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내 서가에는 치매 환자 돌보기에 관한 책들이 잔뜩 꽂혀 있지만 정작 내게 필요한 정보는 항상 책에서 빠져 있다. 환자의 두뇌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얽혀 있고 각기 다른 특징이 있다. 나는 치매 환자를 돌볼 때 공통되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다. (p. 16)


 그녀가 이 수기를 쓰게 된 이유도 아마 여기 있지 않을까 싶다. 그녀는 이 책에 하비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거쳐온 모든 과정을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상세하고 정확하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분명 치매 환자를 돌보는 미국의 1천 5백만 명의 보호자들 중 누군가는 자신의 수기에서 필요한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솔직히 나도 정말 동의하는 것이지만, 메릴 코머의 말대로 보호자 역시 치매의 간접 희생자로, 사회적 보호의 대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본다.


나이가 많든 적든 치매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는 뇌 질환, 충격에 따른 뇌 손상, 기억력 감퇴로 인한 만성 질환 등에 시달린다. 보호자는 치매 환자와 비슷한 입장에 놓여 있다.(p. 19)


 하지만 우리 사회는 치매 환자도, 그 보호자도 오로지 가족의 문제로 국한시키고만 있다. 그래서 짊어지게 되는 생계를 위협할 정도의 비용 부담, 가족 생활의 파괴와 해체에 대해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치매 환자를 돌보는 이의 수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 혹은 그녀가 받고 있는 돌봄으로 인한 고통을 사회에 환기시켜 그 보호를 위해 필요한 움직임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게는 개인적인 경험도 있어, 상당히 편치 않은 독서였다. 치매는 정말 무서운 병이다. 하지만 그 무서움을 옆에서 그걸 함께 지켜본 자만이 안다는 게 문제다. 지근 거리에서 치매 환자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이에게 치매는 그저 남의 일일 뿐이다. 그러니 혼자 치매 환자를 돌보며 고생하는 이에게 '어쩌겠어, 그게 자식된 도리인 걸. 자네가 참아야지.'와 같은 말을 참 태연하게 할 수 있는 것이며, 그저 개인이 감수할 문제로 치환할 뿐, 사회적으로 널리 공론화 되지도 않는 것이다. 치매 환자가 갈수록 늘어나 이제는 정말 사회 차원에서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었는 데도 말이다. 메릴 코머의 이런 말을 들으면 과연 언제까지 개인의 문제로만 남겨둘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직장일과 간병을 곡예하듯 병행하다가, 경력을 포기하고 시간제 일자리를 찾고, 어쩔 수 없이 조기에 퇴직을 하고, 스스로의 노후 준비를 위험에 빠뜨린다. 우리 중 누구도 자기자신을 순교자나 이타적인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우리가 돌보고 있는 가족은 어떻게 될 것인가? (p. 245)


치매 환자도 문제지만 보호자가 당하는 고통과 삶의 위험을 일깨우기 위해서라도 나는 메릴 코머의 이 책이 사람들에게 읽힐 필요가 있다고 본다. 치매 환자를 돌본다는 것은 정말 한 개인이 짊어지기엔 너무나 큰 짐이다. 최근엔 민간 요양소도 많이 늘어났다지만, 여전히 그 곳에 보내는 게 부담이 되는 가정도 많다. 정보도 부족하고 늘 우왕좌왕 하다가 치매 증상이 악화되거나 보호자들의 고통과 희생이 잘 이해되거나 소통되지 않아서 아니 되었을 수도 있었던 가정 붕괴가 일어나는 경우도 잦다. 국가 차원에서 치매 환자의 관리와 보호자들의 보호가 정녕 시급한 시점이다. 이 책 때문에라도 많은 분들이 문제에 통감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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