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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이란 무엇인가 ㅣ 컨템포러리 총서
알랭 바디우 외 지음, 서용순 외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11월
평점 :
한 민간인이 대통령을 조종하고 마음껏 국정 농단을 행하고 있는 와중이다 보니 '국민주권'이란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민주주의의 위기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재검토 되고 있는 말이 '국민'이라는 말이다. 학술적인 측면에서는 '국민' 보다는 '인민'이라는 말이 더 보편적으로 쓰인다. 사실 역사적으로 국민주권이 기원이 되는 것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때 시에예스나 루소는 '인민 주권'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대혁명'의 슬로건도 '우리는 인민의 의지에 의해 여기에 있다.'였다.
원래는 국적을 초월한 개념이었는데, 우리에게선 국적에 한계지어진 개념이 된 것은 아무래도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분단 상황과 상관있을 것이다. 북쪽에 있는 정권이 공공연히 인민 정부라는 말을 운운했으니, 쓸 수 없었던 것이리라. 아무튼 알랭 바디우와 피에르 부르디외 그리고 주디스 버틀로와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여기에 사드리 키아리와 자크 랑시에르까지 가세한 오늘날의 인민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는 여섯 개의 논문이 모인 '인민이란 무엇인가'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여기저기서 현실화되고 있는 요즘에 다시금 재검토되고 재확인되어야 할 인민의 의미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알랭 바디우는 역시 과정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그답게 '인민'이란 결코 국적으로 제한 받아서도, 완성형의 의미로 받아들여서도 곤란하다고 말하며 인민이란 어디까지나 국제주의적이어야 하고 현재 있는 것이 아니라 도래할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바디우는 인민이 국가의 승인을 받고, 현재적 상태로 규정되어 그 자체로 인민 외부의 것에 대해 인민 자체가 폭력적인 상황이 되는 것을 피하려 한다. 이것은 그대로 주디스 버틀러의 논의와도 이어지는데, 그녀 역시 인민은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라 본다. 그녀는 특히나 집회와 시위가 인민의 출현 장소로 보는데, 그렇게 모두가 함께 모여 육체적인 발화로서 스스로 인민을 말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인민이 호출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버틀러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거리에 나가 지금 잘못된 것에 대해 국가에게 구체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진짜 인민(우리나라 용어로 하자면 국민)이 된다. 여섯 개의 논문에서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인민이 결코 국적으로 분리되지도 현재 상태로 고정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인민은 국적을 초월하며 더구나 현재 상태가 절대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인민이라는 개념은 필요에 따라,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공존해야 할 모두가 결국엔 하나의 인민이 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마도 이러한 석학들의 인민에 대한 정의는 최근 시리아 난민 사태로 더욱 빚어지고 있는 유럽에서의 이주민 유입으로 인한 갈등에 중요한 성찰의 지점들을 제공할 것 같다. 영국은 과거 인민의 개념에 함몰되어 외부에서 유입되는 이주민들을 같은 인민으로 보지 않으려 했고 결국 브렉시트까지 감행하고 말았다. 이주민을 받아들이는 것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독일조차 내분의 반발로 메르켈 총리가 정치적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프랑스 대혁명 시기 처음 등장한 인민은 원래 포용과 관용의 의미가 더 컸다. 그랬던 인민이 어쩌다 이렇게나 협소해져 버린 것일까? 여기에 대해 사드리 키아리는 이렇게 말한다.
공화국의 그리고/또는 '국가정체성'의 '가치들'이 식민지 이민자 출신의 프랑스인들의 '문화들' 신앙들과 호환 불가능하다는 명목 아래, 밀려드는 이민자들을 통제하고 중단시키며, '프랑스인의' 일자리를 보존하고, 테러리즘이나 범조에 맞서 싸울 '필요성'이라는 명목 아래 인민 개념은 백인, 유럽인, 기독교인, 소위 '토박이 프랑스인'을 중심으로 좁혀졌다. 달리 말해, 이 정책은 프랑스 인민이라는 기운 빠진 개념을 가장 쉬운 곳에서,즉 비백인에 맞서 재건설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진 것이다.(p. 158)
이렇게 지금 우리가 널리 공유하는 국적에 기반한 인민, 즉 국민이라는 개념은 객관적 진리를 쫓아 창안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뭔가에 반대하여, 누구를 배제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개념 자체에 이미 배타적인 요소들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실제 우리가 인민이라는 말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도 북측을 배제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이제 왜 여섯 명의 저자가 국적이 아닌 국제를, 현재가 아닌 미래를 인민에게 가져오려는지 이로써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작은 순수했더라도 어떤 말이든 시간이 흐르는동안 오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 말을 가지고 사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거기에 속고, 선동되어 오염된 언어를 받아들인 채 또 시간이 흐르게 되면 그것이 상식이 되고 진리로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는 그것이 도리어 원래는 공존해야 할 사람들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어떤 말이든, 무턱대고 받아들이고 쓰기 보다는 원래의 의미는 어떠한지,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는지 늘 살펴보고 성찰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인민이란 무엇인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잘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인민(국민)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달리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