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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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 세 번째로 소개되는 요나스 요나손의 소설,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은 내게 그야말로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았다. 나도 제법 장르 소설에 대한 경험이 많이 쌓인 탓에 책을 읽을 때 어느 정도는 뒷 얘기를 예측할 수 있는데 이 소설만큼은 그게 허락되지 않았다. 도대체 이 다음의 이야기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이 부분에서 무턱대고 꺼낼 이야기는 아니지만, 하여간 그래서 그간 천편일률적으로 뻔한 전개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식상하셨던 분들이라면 얼른 이 책을 손에 들 것을 권해드리고 싶다. 종잡을 수 없는 예측불허의 전개만으로도 끝까지 읽게 만드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 소설의 주인공은 킬러 안데르스가 아니다. 비록 제목에 유일하게 고유 명사로 표기되고 가장 앞에 나왔어도 얘는 조연에 불과하다. 진짜 주인공은 바로 뒤에 나오는 '그의 친구 둘'인 것이다. 이 '친구 둘'이란 하나는 남자, 다른 하나는 여자다. 얼른 커플인가 하는 생각이 드실 것도 같은데, 원래는 아니다. 둘은 주인공 남자가 점심을 먹다가 우연히 만났고, 더구나 그 때 여자는 남자에게 기도 하고 기도값을 받는 식으로 사기를 치려 했다. 그랬던 여자의 이름은 요한나 셸란데르. 전직 목사다. 그러나 지금은 설교 도중 사람의 성기 운운하는 쌍욕을 신에게 범해 강단에서 쫓겨나 노숙자 신세다. 그래서 신의 이름을 빌어 사기를 친 것이다. 사기를 당할 뻔 했던 남자의 이름은 페르 페르손. 작가 이름인 요나스 요나손 처럼 비슷한 발음의 나열이다. 그는 이 이름을 싫어한다. 그 이름을 물려준 가문에 대해 별로 좋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남자의 집안은 아주 잘 살았다. 할아버지 때만 해도 엄청 부자였다. 그 때 할아버지는 말 사업을 했다. 하지만 디젤 기관이 발명되고 자동차 산업이 활황하면서 할아버지 주력 사업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건 아버지 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시대가 가문의 앞길을 작정하고 막아서는 것처럼 하는 사업마다 시류를 잘못 만나 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현재 손님이 거의 찾지 않는 스웨덴에서 가장 음침하며 작고 허름한 호텔의 리셉셔니스트로 일하고 있다. 당연히 급료는 병아리 눈꼽만큼이고 사는 곳도 데스트 뒤에 딸린 원래는 창고로 쓰였던 작은 방이다. 사는 낙이 있을리 없다. 그에게 이름은 가문이 줄기차게 당한 불운의 겹침의 형상과도 같았다. 남은 것은 그런 이름을 가져다 준 가문에 대한 원망과 자신을 이렇게 만든 세상에 대한 복수심 뿐이다.


 요한나 셸렌데르도 다르지 않다. 그도 집안에 대한 원망이라면 페르 페르손 못지 않다. 그녀는 원래 대대로 목사인 집안 출신이었다. 그것이 여자인 그녀에겐 저주가 되어버렸다. 목사는 편견과 고집의 구현체나 다름없다. 요한나의 아버지가 그랬다. 그는 목사는 반드시 남자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가 목사가 되는 것은 불경이었다. 그런데 그만 딸이 태어나버린 것이다. 그는 딸을 태어날 때부터 원망했고, 그걸 신의 형벌이라 여겼다. 그는 딸을 용서할 수 없었고, 그 딸을 낳은 어머니도 용서할 수 없었다. 무시하는 것 정도는 귀여운 애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갖은 학대가 자행되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방치했다. 딸은 결국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목사가 되었다. 마음 속에는 아버지를 향한 원망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지만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끝내 반항 한 번 못했다. 그것이 결국 아버지의 장례식 날 터져 나오고 말았다. 아버지와 그런 운명을 허락한 신에 대한 원망이 그 날 강단 위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그래서 쫓겨 났다. 이렇게 페르와 요한나는 혈통과 세상 그리고 신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을 공유했다.


 그런 그들 앞에 '킬러 안데르스'가 나타났다. 모두가 두려워 하는 호텔 '7호실'의 손님. 만일 그가 잠에 취하는 바람에 그에게 올 의뢰비를 페르와 요한나가 맡지 않았다면 페르와 요한나의 기상천외한 사기극도 없었을 것이다. 그 의뢰비 때문에 그들은 킬러 안데르스가 한없이 가벼운 자신들의 주머니를 빵빵하게 채워 줄 '귀인'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그저 있는 것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성깔과 탁월한 폭력 기술뿐 머리는 없는 안데르센을 꼬드겨 그의 매니저가 된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팔이나 다리를 뭉개버리고 싶은 사람을 킬러 안데르스과 연결시켜 주거나 홍보를 통해 얼마간의 수수료를 받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페르의 아이디어로 스웨덴 제일의 무서운 폭력배가 되어버린 안데르손 때문에 의뢰는 쉴 새 없이 들어오고 곧 페르와 요한나의 기대대로 그들 수중에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온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전직 목사였던 요한나가 안데르스에게 무심코 하게 된 예수 이야기 때문에 안데르센은 그만 더이상 폭력을 쓰지 않으리라 결심하게 된다. 사업에 중대한 위험이 닥쳐왔다는 것을 감지한 페르와 요한나는 이미 눈도 맞고 해서 의뢰비를 사기쳐서 잔뜩 받아서는 그것만 들고 둘이 같이 튀자는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안데르스이 또 우연히 그 계획을 알게 된다. 하지만 역시 요한나의 화려한 말빨에 설득되어 같이 탈출하기로 마음 먹는다. 셋은 그렇게 튀고 의뢰비를 사기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스웨덴 최고의 범죄 조직의 수장 '백작'과 '백작 부인'은 그 대가로 그들의 죽음을 치르게 하기 위해 그들을 추적한다.


 여기까지도 흔한 전개라고 생각할 수 있다. 돈을 둘러싼 주인공 일행과 범죄자들의 쫓고 쫓기는 전개는 많이 봐 온 것이 사실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소설은 그런 식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예수를 영접하고 회심하게 된 안데르스는 교회가 보일 때마다 돈을 마구 헌금함에 집어 넣는가 하면 기부도 아끼지 않고 해 버린다. 이 사실이 전국적으로 알려져 안데르스는 여왕이 감사를 표할만큼 스웨덴에서 가장 유명한 기부 천사가 되고 그가 예수의 말씀을 따라 했다는 사실도 알려진다. 그래서 페르와 요한나는 안데르스를 목사로 내세워 헌금을 모아 가로챌 계획을 꾸민다. 처음은 세상에 대한 복수였고, 이제는 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마치 행운의 여신이 가문 대대로 불운을 선사한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이번에도 행운이 마구 작용해 그들의 계획은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마냥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왕년에 스웨덴에서 가장 좋은 교회 지기라고 자부하던 한 인물에 의해 교회 사기극이 발각될 위험에 처하고, '백작'과 '백작부인' 또한 그들의 위치를 알아낸다. 한 쪽에서는 감옥의 창살이, 다른 한 쪽에서는 죽음의 창살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과연 페르와 요한나의 사기극은 무사히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바랐던 돈을 들고 잘 달아나 꿈에 그리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순진한 희생자의 위치에 서 있는 킬러 안데르스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다면 직접 이 소설을 읽는 수밖에 없다.


 요나스 요나손은 주어진 삶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을 적극 지지하고 찬양해 온 작가다. 그의 이름을 우리나라에 처음 알린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부터 이 소설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까지 내내 그랬다. 생각해 보면 역사와 종교는 선험적으로 가장 굳어져 있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개인의 힘으로 쉽게 바꾸지 못하는 것이 바로 역사와 종교라는 말이다. 하지만 요나스 요나손은 거기에 균열을 일으킨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는 역사가 개인에 의해 새롭게 쓰여지고,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에서는 성경 말씀과 신이 전혀 다르게 응용되고 이용된다. 그렇게 역사와 종교는 더이상 인간을 지배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을 더욱 넓히는, 일종의 사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장(field)으로 바뀐다. 요나스 요나손은 그런 주체에게 간직된 역량을 무한히 펼쳐 보인다. 어쩌면 소설을 읽으면서 유쾌한 가운데 얻는 해방의 느낌은 바로 거기서 연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네가 어디까지 강해지고 넓어질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똑똑히 봐!' 나는 그것이 요나스 요나손의 소설 세계가 들려주고 싶은 진심의 모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 신자유주의로 인해 더없이 개인이란 존재가 위축된 이 시대에 그의 소설이 각광받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런 나의 말은 어디까지나 사족에 불과하다. 때로 소설은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읽을 이유가 충분한 경우가 있다. 바로 재밌다는 것. 여기에 동의한다면 이 소설을 얼른 손에 들어도 좋지않을까 싶다. 솔직히 나는 정말 재밌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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