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남 오빠에게 - 페미니즘 소설 다산책방 테마소설
조남주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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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출판사 '다산책방'에서 새로운 소설 시리즈 하나를 런칭한 것 같다. 바로 '페미니즘' 소설이다. 첫 시작을 연 것은 이번에 나온 '현남 오빠에게'. 단편집이다.



 이번에 '82년 김지영'으로 큰 주목을 받았던 조남주와 작년에 '쇼코의 미소'로 특히 여성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던 최은영을 비롯하여 오늘날 가장 핫(hot)하다고 할 수 있는 일곱 명의 여성 작가가 쓴 단편이 여기에 들어있다. 기존에 쓴 작품을 모은 게 아니고, 먼저 작가들에게 여성주의 소설이라는 주제가 부여되고 거기에 따라 쓴 작품을 모은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읽으면서 언뜻 일곱 작가의 백일장을 구경하는 기분도 느낄 수 있었다. 아, 왜 이 소설을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생각하는지 이유를 아직 말 안했다. 그건 뒤에 있는 책날개에 '다산책방 페미니즘 소설 1'이라고 나와있기 때문이었다. 1이라는 건, 2가 있다는 뜻이니 시리즈라 여길 수밖에. 말하고 보니 별 거 아닌 단서이긴 하다만.


 그러나 이 단편집은 결코 별 거 아닌 게 아니다. 미리 주어진 주제에 따라 집필된 단편집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나 읽을만 했다. 시작은 조남주 작가의 '현남 오빠에게'가 연다. 연인인 현남 오빠에게 청혼을 받은 여인이 1인칭 화자가 되어 왜 그 청혼을 거절하는지 밝히는 게 단편의 주된 줄거리다. '현남'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느껴지듯이, 이 여인의 메시지는 그저 한 개인의 남자가 아니라 '현대 남자' 전체라고 볼 수 있다. 그 보통의 현대 남자에게 단편은 여성의 주체적인 삶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려 들지 말라고 통박한다.


 오빠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를 돌봐줬던 게 아니라 나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었더라. 사람 하나 바보 만들어서 마음대로 휘두르니까 좋았니? 청혼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이제라도 깨달았거든. 강현남, 이 개자식아!(p. 38)


 뒤이은 최은영의 '당신의 평화'는 유진이라는 주인공의 엄마인 정순의 며느리를 맞이하면서 생긴 울화에 관한 것인데, 이 정순이란 인물은 어떻게 보면 '현남 오빠에게'에 나왔던 여성 화자가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고 현남 오빠와 결혼하여 내내 살았다면 되었을 것 같은 인물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자기 주체적인 삶을 전혀 누려보지도 못하고 그저 남성 가부장제에 매몰되어 있었던 인물. 그런 정순이 새 며느리 선영을 맞아 문득 자신의 인생에 정작 자신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울화를 하나밖에 없는 딸 유진에게 며느리에 대한 험담으로 풀려한다. 그러나 그런 엄마와 대학 때 진보 운동에 참여하면서 진보를 부르짓는 남성들마저 아무렇지 않게 여성을 차별하고 착취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의 남성 가부장제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삶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진작에 깨달은 유진은 그동안 그토록 정순을 무가치하게 대했던 할머니의 모습을 엄마인 정순이 닮으려 하자 이렇게 매섭게 비판한다.


 "그래서 할머니가 엄마에게 어떻게 했는데. 나쁘고 부당하게 대했다는 걸 엄마도 잘 알잖아, 왜 그걸 부정해. 지금 엄마 누구에게 화났어? 정말 선영씨야?"(p. 69)


 계속되는 김이설의 '경년'는 '갱년'을 '재생 혹은 다시'라는 뜻을 더 강조하기 위하여 살짝 바꾼 것으로, 그런 갱년기에 도달한 중학생 아들을 둔 중산층 엄마의 이야기다. 소설 속 내용이 다소 충격적이라 이게 정말 현실인지, 아니면 소설적인 과장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어느날 주인공은 중학생인 자기 아들이 여러 여자와 문란한 성관계를 맺었다는 말을 듣는다. 충격 속에서 아들을 닥달해 보니, 아들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엄마가 하라는 공부 잘 하고 원하는 대학 가려면 나도 숨통 트일 곳이 필요하니 거기에 대해선 간섭하지 마라'고 하면서 당당하다. 남편과 상의해도, 자식만 두둔할 뿐 어울린 여학생들이 문제지 아들은 아무 문제없다고 말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주인공은 지금 사람들에게 여자를 가르는 기준이 '골빈애'와 '되바라진 애', 두가지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윤서 엄마의 논리대로라면 성적에 목숨 건 여자아이는 되바라진 여자애였고, 성적에 관심 없는 여자애들은 아이돌이나 따라다니면서 화장이나 하는 골빈 여자애였다. 윤서도 내 딸아이도 요즘 여자애들이라는 것을 잊은 사람 같았다.(p. 111~112)


 혼란에 빠진 주인공은 이 시간이 그저 갱년기처럼 푹풍우가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저 겪고 참아내기만 하면 되는 시간이 아니라 변화를 위해 뭔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네번 째인, 최정화의 '모든 것을 제자리에'는 남성에게 당한 성폭력이 트라우마로 남은 여성의 이야기다. 자기 신체의 일부분마저 그 남자의 것으로 여겨질만큼 삶 깊숙이 자리한 상처를 그녀가 주로 하는 일인 붕괴된 빌딩 촬영을 통해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다섯 번째인 손보미의 '이방인'은 근미래의 어딘가로 남성 중심 사회에서 고립을 자처하는 여인의 이야기를 느와르 적으로 그리며 여섯 번째인 구경모의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은 회사 동료를 대신하여 여장 축제에 참여한 '표'가 축제가 열리는 고립된 섬에서 느닷없이 당하게 된 살육의 밤을 그린다. 알고보니 그 축제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여성을 성추행하거나 성폭력을 행한 가해자 남성들을 모아 피해자의 모습으로 만들어 처벌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그런 짓을 하지 않았던 표는 하지만 그런 추행이나 폭행을 보면서도 그저 내 일이 아니기에 관망했던 자로 소설은 그런 자마저 가차없이 처벌함으로써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켜만 봤던 자 역시 가해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은연 중 강조한다. 마지막은 김성중의 '화성의 아이'다. 제목에서 얼른 느껴지듯, SF다. 화성으로 쏘아올린 열두 마리 실험 동물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개가 주인공이다. 화성에 도착한 뒤, 그는 '라이카'란 개를 만나는데, 그 '라이카'란 57년에 소련에서 쏘아올린 스푸트닉 2호에 탔던 바로 그 개다. 이 두 마리의 개가 중심이 되어 인간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에서 모든 인간적인 관념에서 해방된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그려간다.


 다 소개한 김에 총평하자면, 재밌게 읽었다. 마지막 단편은 좀 모호하게 여겨졌지만 그래도 장르마저 다양하여 계속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여성의 오늘과 달라져야 할 지금의 현실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런 각성의 시간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목소리를 더 많이 만나봤으면 좋겠다. 의욕적으로 시작된 '페미니즘 소설 시리즈'에 건투를 비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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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판사판 이라고 판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가 방영중인가 본데, 제목을 잘못 지은 거 같다.
맞는 제목은 ‘개판‘이 아닐까 싶다.
우병우 관련된 건 모조리 영장 기가하는 판사도 그렇고,
구속적부심에서 김관진 풀어준 판사도 그렇고
‘개판‘이 아니라면 달리 뭐라 할 수 있을까?
오늘도 흙탕물 만드는데 여념이 없는 이런 사법부의 적폐들이 하루빨리 말끔히 청소되길 빈다.
눈은 내리는데 속은 부글 끓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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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라 불린 남자 스토리콜렉터 58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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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선가 쿨함이 마구 느껴지고 있다면, 그건 에이머스 데커가 당신 가까이에 있다는 뜻입니다.

 에이머스 데커, 이 남자 혹시 아시나요? 아신다면 당신은 전작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를 읽어보신 분이겠군요. 우리에겐 아직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세계에선 스릴러 거장의 반열에 든 미국 작가 데이비드 발다치. 놀랍게도 데뷔 하자마자 발표한 작품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과 감독을 겸했던 영화 '절대 권력'으로 만들어졌었죠. '에이머스 데커'는 그의 대표적인 시리즈의 주인공입니다. 195센티미터의 거구. 소설에서 그를 본 이들은 자주 뚱보라 부르는 그는 지금의 몸매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 대학 때 미식 축구 선수로 프로까지 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경기 도중 사고로 뇌에 커다란 충격을 받아 선수 생활을 접어야했죠. 사고가 남긴 건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머리에 받은 충격으로 뇌가 그만 과잉기억증후군에 걸려버린 것입니다. 과잉기억증후군이란 한 번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고 모조리 기억하는 증후군입니다. 수험생이라면 누구나 부러워 할 능력을 그는 가지게 된 것이죠. 하지만 그에게 이것은 결코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실은 저주였죠. 왜냐하면 형사 시절, 잠복을 나갔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아내와 딸이 무참히 살해되어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죠. 상실의 아픔은 망각에 기대어 치유되는 법인데 데커에겐 그것이 전혀 허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 1분 전에 본 일처럼 아내와 딸에 대한 모든 것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좋은 추억과 더불어 무참히 살해된 모습마저. 그것이 그를 망가뜨렸습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데커가 그 어둡고 질척한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와 다시금 삶의 의미를 찾는 이야기였죠.


 거기에 바로 뒤이어 계속되는 이번 작품, '괴물이라 불린 남자'는 그런 데커가 자신과 똑같은 일을 겪은 멜빈 마스라는 남자를 자기처럼 삶의 환한 빛으로 인도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말하니 무슨 종교 소설인가 하시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아주 빼어난 스릴러 소설로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정말 단 한 번도 손에서 놓여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흥미와 재미로 가득한 작품입니다. 줄거리를 대강 소개하면 이것을 바로 아실 겁니다.



 소설은 멜빈 마스로부터 시작합니다. 고교 시절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미식 축구 선수였던 그는 20년이 지난 현재 사형수의 몸으로 감방에 있습니다. 표지에 나와 있는, 철창에 갇힌 흑인이 바로 그인 것이죠. 왜 이렇게 급전직하의 삶을 살게 되었나? 그것은 그가 부모님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는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알리바이가 모조리 거짓으로 밝혀지는 바람에 그는 20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이제 사형 집행이 이뤄지는 날이 되었습니다. 마스가 사형을 당하려는 찰라, 갑자기 집행이 정지됩니다. 앨러바마 감옥에 수감된 또 다른 사형수 몽고메리가 마스의 부모를 자신이 죽였다고 자백한 것입니다. 오로지 경찰만 알고 외부에 전혀 공개되지 않은 사실을 몽고메리가 알고 있었기에 그의 자백이 신뢰를 얻어 마스의 사형 집행이 정지된 것입니다. 단순한 천운이었을까요?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주인공 에이머스 데커 입니다. 그는 현재 전작에서 협력한 FBI 특수 요원 보거트와 함께 있습니다. 데커의 뛰어난 수사 능력을 알아본 보거트가 장기 미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주로 유능한 외부 인사들을 모은 수사팀에 데커를 참가시킨 것입니다. 데커는 셜록에 버금가는 기억력과 추리력으로 왜 그가 이 수사팀의 에이스인가를 같은 팀의 동료 밀리건이 수사하자고 가져온 케이스의 허점을 단번에 간파하여 범인을 정확히 일러줌으로써 보여줍니다. 아마도 이 부분을 읽을 때 분명 저처럼 데커의 능력에 혀를 내두를 것입니다. 그런 데커의 눈에 마스와 몽고메리 케이스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에게 항상 죽음의 그림자를 알려주는 '일렉트릭 블루'의 뇌리 속 번쩍임과 함께 그는 이 사건에 뭔가 심상치 않은 게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하여, 데커의 리드로 수사팀은 마스가 있는 텍사스로 날아갑니다. 21세기가 된 지금도 여전히 인종차별이 횡행하고 있는 그 곳으로...


 흔히 반전이 마구 튀어나오는 것을 '반전의 반전'이라 말하는데, 이 소설이 정말 그렇습니다. 단순한 사건인 줄 알았는데 규모가 점점 커지고, 지금까지 알았던 사실과 전혀 다른 진실이 잇달아 밝혀지니까요. 그런데 이게 전혀 무리하거나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 전에 반전에 대한 단서가 다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죠. 주의 깊게 읽으면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발다치가 정말 아주 세부에 이르기까지 설정을 치밀하게 설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더군요. 정말 '와~!' 하게 되는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리도 이야기를 잘 발전시켜 나가지 하면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정녕 전 세계 80개국에 그의 작품이 출간되고 지금까지 팔아치운 것만 해도 1억 3천만부나 되는 거장으로서의 풍모를 실감했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단순히 스릴러적인 재미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마스는 가장 불쌍한 존재인데, 그의 고통과 절망을 섬세하게 표현하여 그 내면의 파란을 독자가 잘 감응하도록 하였고 그러면서도 마스와 비슷한 경험을 한 데커 사이에 공감을 통한 인간적인 우정까지 감동적으로 연출해(특히 이 둘의 마지막 장면이 참 여운이 많았습니다.) 결국 인간이란 자신을 깊이 이해해주는 누군가의 연대가 있어야만 자신의 커다란 상처에서 헤어나올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작품을 뭐라고 표현할까요? 모자라는 제 머리론 그저 시쳇말이나 다름없는 '재미와 깊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작품'이라는 것밖에는 떠오르지 않는군요. 셜록의 두뇌와 필립 말로의 감성을 가진 탐정 캐릭터를 원하셨다면 꼭 이 작품을 만나 보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에이머스 데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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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의 요리사들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권영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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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에서 먹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싸우는 일이야 말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니 잘 싸워서 전쟁에 승리토록 하려면 잘 먹여야 할테니까요. 그래서 옛날 전쟁에 대한 책을 읽어보면 언제나 장군을 괴롭히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보급로를 어떻게 적군으로부터 잘 지킬 것인가였죠. 현명한 장군은 적의 본진을 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보급로부터 끊어놓고 전투를 시작했구요. 당나라와 고구려가 혈전을 벌인 안시성 전투에서 보듯, 아무리 강한 군대라 해도 보급이 일단 끊기면 추풍낙엽이 되어 쓸려가는 것은 뻔한 운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허다하게 만들어진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이런 먹거리에 대한 것은 쉽게 무시되어 왔던 것 같습니다. 전쟁은 언제나 전투가 중심일 뿐, 그들이 뭘 어떻게 먹었나 하는 것은 그리 잘 나오지 않았죠. 그래서 이 소설이 더욱 제 눈에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후키미도리 노와키의 '전쟁터의 요리사들'이란 소설이 말이죠. 놀랍게도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그토록 많은 전쟁 관련 작품에서 여지껏 단 한 번도 다뤄지지 않았던 취사병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있었거든요. 그것도 노르망디 상륙 이후의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해서 말이죠.



 이야기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있었던 1944년에 열 아홉살이던 에드워드 그린버그를 중심으로 시작합니다. 인생을 사는 낙이 먹는 것인 그는 열 일곱의 나이가 가지기 쉬운 영웅심과 모험심 때문에 군대에 지원합니다. 그러나 훈련 받던 도중 아무래도 군인이 자기 적성에 맞지 않다고 깨달은 그는 어느날 문득 조리병 모집 공고를 보고는 요리 잘하는 할머니 밑에서 내내 레시피를 자장가 삼아 들으며 자랐던 그에게 조리병은 적성에 맞지 않을까 생각하고 거기에 응모, 결국 조리병이 됩니다. 그러나 곧 후회하고 맙니다. 군대 내에서 조리병의 평가가 그리 좋지 못했기 때문이죠. 군인들에게 조리병은 흔히 '낙오자'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다 드디어 1944년. 미 육군 제101 공수사단에 배속된 그는 노르망디로 떠나게 됩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한 후에 전개됩니다. 바다가 아니라 낙하산으로 공중에서 강하하여 도착한 프랑스의 이즈빌 마을부터 시작하여 카랑탕을 지나선 연합군의 뼈아픈 실책이 된 마켓 가든 작전 수행 도중인 네델란드의 에인트호벤을 거쳐 미 육균 제101 공수사단의 가장 어려운 전투이기도 했던 아르덴에서 정점을 찍고 드디어 독일에 입성, 소설 속 최후의 거점인 쾰른에 이르기까지의 대장정이 주요 주둔지를 중심으로 모두 5장에 걸쳐 진행됩니다.




  각 장마다 그린버그가 소속된 취사 부대의 조리병 일행들이 낙하산이라든가 달걀 분말가루 등 전쟁이 아니었다면 잘 만날 수 없는 소재로 이루어진 미스터리를 마주하며 과거가 불분명한 '에드'라는 조리병이 탐정이 되고 그린버그가 왓슨이 되어 그것을 해결합니다. 모든 이야기들이 실제 전쟁 상황과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어 아주 실감나게 읽혔습니다. 작가가 자료 조사를 정말 많이 했는지 후방 부대에 있는 병사들의 일상이라든가 조리병들의 주로 했던 일이나 요리하며 부대 내 인종차별 문제 등 다른 데서 잘 볼 수 없었던 내용까지 두루 있어서 더욱 재밌게 읽었습니다. 한 가지, 라디오에서 밥 딜런의 노래가 나왔다는 부분은 명백한 오류로 흠이었지만요. 밥 딜런은 41년 생으로 44년 당시는 네 살이었죠. 혹시 동명 가수가 있었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작품은 독특한 설정만으로 반을 먹고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전쟁터의 요리사들'은 제게 반은 먹고 들어간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조리병이 주인공이란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탐정이 되어 전쟁이라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미스터리를 풀어간다는 것 역시 이 책에 대한 제 점수를 50점 부터 시작하게 만든 요소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전쟁이란 지극히 비일상의 시공인데, 거기에 일상 미스터리 장르를 섞었다니 이런 용감한 시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평소 소심한 저는 점수를 주고 싶네요. 그렇지만 시도 했다는 것만으로 점수를 주는 것은 역시 비합리적입니다. 그러나 기꺼이 높은 점수를 주려합니다. 그 시도가 꽤 성공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었으니까요. 전쟁터에 어울릴만한 일상 미스터리가 나왔고 그것을 또 설득력있게 풀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전쟁이 가지고 있는 잔혹함과 비극 역시 놓치지 않았으니. 이건 뭐, 올해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 중 하나라고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네요. 그동안 너무나 비슷한 모습만 보여주는 일본 미스터리에 물리신 분들이라면 이 소설 추천합니다. '전쟁터의 요리사들'은 분명 일본 미스터리의 새로운 맛을 충분히 느끼게 할 겁니다.


 후카미도리 노와키가 일본이 한창 전쟁 가능 국가로 향해 가는 이 시점에서 하필이면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소설을 쓴 이유는 명백합니다. 아베가 지금 획책하는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서죠. 이야기와 에필로그마다 세심하게 누벼져 있는 전쟁이 망가뜨리는 평범한 인간의 삶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아베의 그런 정책이 좀 더 타오르도록 만드는 연료가 이방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에 기반을 둔 자국민 우월주의인데 소설은 거기에 대해서도 분명히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지요. 아예 챕터 하나를 거기에 할애해서 말이죠. 다시 말해, '전쟁터의 요리사들'은 동시대에 대한 작가의 우려가 깊이 배인 작품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 자체가 꽤 용기 있는 발언이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작가를 응원하고 싶네요. 물론 독일이 아니라 일본을 적군으로 삼아 주인공들이 싸우는 이야기를 그렸다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최근에 나온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완전히 묘사한 것도 아니고 겨우 몇 구절로 '난징대학살'을 언급하는 바람에 우익에게서 거센 비난과 공격을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작가로서 결코 쉽지 않을 선택이었을 겁니다. 최근 일본의 분위기가 좀 그렇죠. 그래서 더욱 '전쟁터의 요리사들'을 응원하고 싶네요. 뒤이어 더 많은 용감한 발언들이 나와 일본에서 횡행하고 있는 전쟁과 무력을 향한 무분별한 광기에 찬물을 끼얹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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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8 0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6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치우시 왕 1세 네버랜드 클래식 50
야누쉬 코르착 지음, 크리스티나 립카-슈타르바워 그림, 이지원 옮김 / 시공주니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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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였더라?

 어쨌든 아주 오래 전에 친구와 어릴 때 읽었던 책들에 대해 얘기하다 친구가 '혹시 어린 애가 왕이 되는 이야기 읽어봤어? 나 그거 읽은 것 같은데 기억이 안나네.' 하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났다. 왕이 되어 아이들은 어른 일을 하고 어른은 학교로 가서 공부하고 시험치는 이야기였는데, 아이라면 한번쯤 바랐던 일이 이야기에 그대로 나와있어 꽤 재밌게 읽었었다. 그러나 나도 이야기의 제목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 후, 시간이 제법 흘러 드디어 이야기 제목을 알게 되었다. 바로 '마치우시 왕 1세'였다. 작가는 아동 인권 보호를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주장하고 평생을 바쳐 활동한, 폴란드 국적의 야누쉬 코르착. 요즘 뜨고 있는 비고츠키와도 입장이 비슷한 지라 아동 발달을 공부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기도 하다. 제목을 알게 된 건, 야누쉬 코르착의 삶을 다룬 영화 때문이었다. '재와 다이아몬드'와 '대리석 남자'로 유명한 안제이 바이다가 감독한 '코르착'이 바로 그 영화다. 



 1878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난 코르착(원래 이름은 '헨릭 골드슈미트'로 '야누쉬 코르착'은 공모전에 참여하려고 만든 필명이라고 한다.)은 의사와 작가로 살아가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을 계기로 아동 인권과 복지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하게 된다. 참전 중에 전쟁 고아들의 비참한 모습을 너무나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그 결심 그대로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무려 30년 동안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을 헌신적으로 운영했다. 하지만 1939년, 커다란 위기가 닥쳐온다. 독일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한 것이다. 유태인인 코르착은 곧 체포되어 게토에 갇힌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코르착은 아이 돌보는 일을 쉬지 않았다. 이미 작가로, 아동 인권 운동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했기에 거기서 탈출하라고 여권과 은신처까지 제공하는 등 실제적으로 많은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으나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버릴 수 없다면서 그 모두를 거부하고 결국 아이들과 함께 수용소로 끌려가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특히 그가 수용소로 끌려갈 때의 모습이 인상적인데, 그 때 코르착은 자신과 함께 수용소로 끌려가는 아이들이 공포와 불안에 젖을까봐 자신이 선두에 서서 소풍을 간다고 하면서 재밌게 행진하며 걸어갔다고 한다. 그 마지막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줘,  지금도 바르샤바에 가면 그 모습이 동상으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유명한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도 바로 여기에 영감을 얻었다. 코르착은 그의 신념을 오롯이 실천한 사람으로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둘도 없는 귀감이다. '마치우시 왕 1세'는 그런 그의 깨달음과 철학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아홉 살이라는 왕위에 오른 마치우시는 모든 게 불안과 초조의 가시밭길이다. 국무총리나 장관처럼 자신을 보좌해야 할 관리들은 하나같이 '코흘리개'라고 무시만 할 뿐,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도무지 알려주려 하지 않는다. 결국 마치우시는 혼자 힘으로 왕이 무엇이며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아가는데, 거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전쟁이다. 왕국 바깥에서 우연히 사귀게 된 친구, 펠렉에게서 전쟁을 지휘하는 사령관이 바보라는 말을 듣고 왕으로써 그대로 두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따라간 그 전쟁에서 마치우시는 아무도 자신을 왕으로 봐주지 않는 가운데 보통의 아이가 되어 전쟁이 얼마나 비극적이며 어리석은 일인지 톡톡히 깨닫는다. 자신의 활약으로 세 나라와의 전쟁에 승리를 거둔 마치우시는 자신과 싸웠던 나라 중 '슬픈 왕'의 다음과 같은 충고를 듣고 전쟁 같은 어른들의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아이들 중심의 체제로 나라를 개혁할 것을 마음 먹는다.


 "전쟁에서 이긴다는 건 아무 위험한 일이에요. 그때야말로, 왕이 왜 있는지 잊어버리기 십상이지요."

 마치우시는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왕이 왜 있는데요?"

 "왕은 왕관이나 쓰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 나라 국민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떻게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요? 여러가지 개혁을 해야만 합니다."(p. 142)



 그것을 위해 마치우시는 슬픈 왕의 나라를 본받아 아이들이 참여하는 국회도 만드는 등 이전과 다른 체제로 나아가는데, 그러나 뜻대로 쉽게 되진 않는다. 민주적인 운영을 위해 만든 국회가 다양한 이해관계와 잦은 토론 때문에 자기 정책의 발목을 잡는 일이 자꾸 생기는 것이다. 거기다 이웃 나라의 스파이까지 나타나 펠렉을 교묘하게 꼬드기는 바람에 펠렉의 주도로 국회는 결국 어른들을 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키고, 아이들은 어른의 직책을 맡게 되는 법을 제정하고 만다. 그러나 어른의 일을 하게 된 아이들의 무책임함과 장난과 직업을 구별하지 못하는 행태 때문에 마치우시의 나라는 일대 혼란에 빠지고 그 틈을 노려 일전에 패배한 나라들이 다시 침공을 시작한다. 마치우시는 다시 찾아온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아이들이 다스리는 나라는 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 보는 공상이다. 이런 경우라면 보통 아이들이 나라를 맡아 다스려도 아무 문제 없으며 오히려 어른이 다스릴 때보다 더 행복해졌다는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마치우시 왕 1세'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흥미로웠다. 무책임과 방종 속에서 모처럼 아이 중심의 나라가 몰락하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야누쉬 코르착의 아이 교육에 대한 철학이 나타나는 것 같다. 이 철학은 그대로 유즘 꽤 인기를 얻고 있는 비고츠키의 것과 비슷하다. 오래도록 한국 아동 교육의 지배적 패러다임이었던 피아제는 교육에 있어 아주 개인주의적, 주관주의적 관점이었다. 그러나 야누쉬 코르착과 비고츠키는 상호주의적 관점을 취한다. 특히 어른과 아이의 상호 관계다. 아이 교육에 있어 피아제에선 간과 되었던 어른의 적절한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면이 '마치우시 왕 1세'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아이들만의 나라가 어른들이 배제되자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지만 이외에도 슬픈 왕과 마치우시의 관계 역시 이 철학을 나타내고 있다. '슬픈 왕'은 현명한 어른의 이성적인 가르침은 아이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가장 뚜렷한 존재다. 어쩌면 당시 아이 교육에 대해 완전 무관심했던 어른들이 아이 교육에 관심을 가지도록 각성시키려 이렇게 썼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른 뜻대로 아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자기 주도를 충분히 인정한 상태에서 그가 보다 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어른이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야누쉬 코르착의 말은 귀기울여 들을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추억 속의 책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너무나 반가웠다. 무엇보다 폴란드 어를 전공한 이의 번역이어서 작품을 더욱 제대로 즐긴듯한 느낌이다. 아동 인권과 교육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야누쉬 코르착의 존재를 논외로 하더라도 작품 자체만으로 어른과 아이 모두 꼭 읽어봐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마치우시 왕1세' 이야기의 가장 처음엔 이렇게 작가의 아이일 적 모습이 사진으로 나와있다. 마치우시 왕의 이야기를 쓸 때의 사진보다 정말로 왕이 되고 싶었을 때의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다른 책은 처음부터 불완전하고 덜 현명했던 어린시절은 없었다는 듯 다 자란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런 것 보다는 이렇게 아이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 아이들이 그것을 보며 자신도 이 작가처럼 장관이나 여행가 혹은 소설가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란다. 어쩌면 이것은 아주 사소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사소한 것마저 신경쓰는 데서 야누쉬 코르착의 인품이 스며나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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