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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의 요리사들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권영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0월
평점 :
전쟁에서 먹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싸우는 일이야 말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니 잘 싸워서 전쟁에 승리토록 하려면 잘 먹여야 할테니까요. 그래서 옛날 전쟁에 대한 책을 읽어보면 언제나 장군을 괴롭히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보급로를 어떻게 적군으로부터 잘 지킬 것인가였죠. 현명한 장군은 적의 본진을 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보급로부터 끊어놓고 전투를 시작했구요. 당나라와 고구려가 혈전을 벌인 안시성 전투에서 보듯, 아무리 강한 군대라 해도 보급이 일단 끊기면 추풍낙엽이 되어 쓸려가는 것은 뻔한 운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허다하게 만들어진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이런 먹거리에 대한 것은 쉽게 무시되어 왔던 것 같습니다. 전쟁은 언제나 전투가 중심일 뿐, 그들이 뭘 어떻게 먹었나 하는 것은 그리 잘 나오지 않았죠. 그래서 이 소설이 더욱 제 눈에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후키미도리 노와키의 '전쟁터의 요리사들'이란 소설이 말이죠. 놀랍게도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그토록 많은 전쟁 관련 작품에서 여지껏 단 한 번도 다뤄지지 않았던 취사병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있었거든요. 그것도 노르망디 상륙 이후의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해서 말이죠.

이야기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있었던 1944년에 열 아홉살이던 에드워드 그린버그를 중심으로 시작합니다. 인생을 사는 낙이 먹는 것인 그는 열 일곱의 나이가 가지기 쉬운 영웅심과 모험심 때문에 군대에 지원합니다. 그러나 훈련 받던 도중 아무래도 군인이 자기 적성에 맞지 않다고 깨달은 그는 어느날 문득 조리병 모집 공고를 보고는 요리 잘하는 할머니 밑에서 내내 레시피를 자장가 삼아 들으며 자랐던 그에게 조리병은 적성에 맞지 않을까 생각하고 거기에 응모, 결국 조리병이 됩니다. 그러나 곧 후회하고 맙니다. 군대 내에서 조리병의 평가가 그리 좋지 못했기 때문이죠. 군인들에게 조리병은 흔히 '낙오자'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다 드디어 1944년. 미 육군 제101 공수사단에 배속된 그는 노르망디로 떠나게 됩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한 후에 전개됩니다. 바다가 아니라 낙하산으로 공중에서 강하하여 도착한 프랑스의 이즈빌 마을부터 시작하여 카랑탕을 지나선 연합군의 뼈아픈 실책이 된 마켓 가든 작전 수행 도중인 네델란드의 에인트호벤을 거쳐 미 육균 제101 공수사단의 가장 어려운 전투이기도 했던 아르덴에서 정점을 찍고 드디어 독일에 입성, 소설 속 최후의 거점인 쾰른에 이르기까지의 대장정이 주요 주둔지를 중심으로 모두 5장에 걸쳐 진행됩니다.


각 장마다 그린버그가 소속된 취사 부대의 조리병 일행들이 낙하산이라든가 달걀 분말가루 등 전쟁이 아니었다면 잘 만날 수 없는 소재로 이루어진 미스터리를 마주하며 과거가 불분명한 '에드'라는 조리병이 탐정이 되고 그린버그가 왓슨이 되어 그것을 해결합니다. 모든 이야기들이 실제 전쟁 상황과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어 아주 실감나게 읽혔습니다. 작가가 자료 조사를 정말 많이 했는지 후방 부대에 있는 병사들의 일상이라든가 조리병들의 주로 했던 일이나 요리하며 부대 내 인종차별 문제 등 다른 데서 잘 볼 수 없었던 내용까지 두루 있어서 더욱 재밌게 읽었습니다. 한 가지, 라디오에서 밥 딜런의 노래가 나왔다는 부분은 명백한 오류로 흠이었지만요. 밥 딜런은 41년 생으로 44년 당시는 네 살이었죠. 혹시 동명 가수가 있었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작품은 독특한 설정만으로 반을 먹고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전쟁터의 요리사들'은 제게 반은 먹고 들어간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조리병이 주인공이란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탐정이 되어 전쟁이라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미스터리를 풀어간다는 것 역시 이 책에 대한 제 점수를 50점 부터 시작하게 만든 요소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전쟁이란 지극히 비일상의 시공인데, 거기에 일상 미스터리 장르를 섞었다니 이런 용감한 시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평소 소심한 저는 점수를 주고 싶네요. 그렇지만 시도 했다는 것만으로 점수를 주는 것은 역시 비합리적입니다. 그러나 기꺼이 높은 점수를 주려합니다. 그 시도가 꽤 성공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었으니까요. 전쟁터에 어울릴만한 일상 미스터리가 나왔고 그것을 또 설득력있게 풀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전쟁이 가지고 있는 잔혹함과 비극 역시 놓치지 않았으니. 이건 뭐, 올해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 중 하나라고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네요. 그동안 너무나 비슷한 모습만 보여주는 일본 미스터리에 물리신 분들이라면 이 소설 추천합니다. '전쟁터의 요리사들'은 분명 일본 미스터리의 새로운 맛을 충분히 느끼게 할 겁니다.
후카미도리 노와키가 일본이 한창 전쟁 가능 국가로 향해 가는 이 시점에서 하필이면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소설을 쓴 이유는 명백합니다. 아베가 지금 획책하는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서죠. 이야기와 에필로그마다 세심하게 누벼져 있는 전쟁이 망가뜨리는 평범한 인간의 삶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아베의 그런 정책이 좀 더 타오르도록 만드는 연료가 이방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에 기반을 둔 자국민 우월주의인데 소설은 거기에 대해서도 분명히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지요. 아예 챕터 하나를 거기에 할애해서 말이죠. 다시 말해, '전쟁터의 요리사들'은 동시대에 대한 작가의 우려가 깊이 배인 작품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 자체가 꽤 용기 있는 발언이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작가를 응원하고 싶네요. 물론 독일이 아니라 일본을 적군으로 삼아 주인공들이 싸우는 이야기를 그렸다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최근에 나온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완전히 묘사한 것도 아니고 겨우 몇 구절로 '난징대학살'을 언급하는 바람에 우익에게서 거센 비난과 공격을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작가로서 결코 쉽지 않을 선택이었을 겁니다. 최근 일본의 분위기가 좀 그렇죠. 그래서 더욱 '전쟁터의 요리사들'을 응원하고 싶네요. 뒤이어 더 많은 용감한 발언들이 나와 일본에서 횡행하고 있는 전쟁과 무력을 향한 무분별한 광기에 찬물을 끼얹게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