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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이야기 11 - 초한쟁패, 엇갈린 영웅의 꿈 ㅣ 춘추전국이야기 11
공원국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대학 다닐 때, 중국 역사 강의를 들었다. 그 때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게 기억난다. 춘추 전국 시대에 활동했던 사람들의 삶을 잘 살피면 앞으로 살아가는 데 많이 도움이 될 거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춘추 전국 시대가 두 가지 점에서 오늘날과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저마다 생존과 정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무한 경쟁 시대라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타고난 태생이 아니라 개인이 가진 능력이 모든 것을 좌우했던 시대라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춘추 전국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들의 면면을 잘 살피고 헤아리면 분명 그와 비슷한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데 꽤 많은 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당시 나는 춘추 전국 시대를 그저 공자가 유세를 하던 때 정도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교수의 그런 말씀은 꽤나 흥미로웠고 그 때부터 춘추 전국 시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찾기란 어려웠다. 교수님은 사마천의 '사기'를 훌륭한 텍스트로 추천해 주셨지만 '사기'를 읽어본 분은 아시겠지만, 특히 열전은 인물 별로 나열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지라 얼른 명쾌하게 정리하기가 다소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춘추 전국 시대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 싶은 바람은 못 다 이룬 꿈으로만 남았다. 그러다 사는 게 바빠 그 미련조차 깡그리 잊고 있을 무렵, 불현듯 인터넷 서점 광고로 한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공원국 작가의 '춘추 전국 이야기'였다.
제목을 보자마자 예전의 열망이 삽시간에 환기되면서 그 책을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을 갖게 만들었다. 요모조모 살펴보니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갔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집필한 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내가 찾고 있었던 바로 그 책이었다. 2010년에 첫 선을 보인 이 책은 시리즈로 계속 나오다 어느덧 8년의 세월이 흘러 드디어 올해 11권으로 대단원의 막까지 내린 참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어떻게 이 책의 존재를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가진 바람에 비해 턱없이 모자랐던 관심을 타박하면서 난 얼른 이 책으로 뛰어들었다. 이번에 읽은 책은 11권, 그러니까 마지막 권이다. 부제는 '초한쟁패'로 진이 망할 무렵에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이 중국의 패자를 두고 자웅을 겨루었던 때를 담고 있다. 나는 '초한지'를 언젠가 꼭 한 번 읽어봐야지 마음 먹고 있을 정도로 항우와 유방에게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목구멍 아니 호기심이 포도청이라 이 책부터 만나기로 했다.
사실 11권이 담고 있는 시간은 엄밀히 말해 '춘추 전국'이 아니다. 춘추 전국 시대는 진나라의 통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국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대해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으리라. 저자도 그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던 듯 하다. 책 머리에 왜 이 책을 써야만 했는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원래는 진나라의 통일로 춘추 전국 이야기가 끝났어야 하지만 굳이 이처럼 한 권의 책을 더 더하면서 그것도 진나라가 갈가리 쪼개지고 유방에 의해 다시 한으로 통일되는 시대의 이야기를 하게 된 연유엔 사실 한 인물이 있었다. 첫 권의 주인공인 관중에 필적할만한 인물이 이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하는데, 작가는 그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인물이야 말로 자신이 왜 춘추 전국 이야기를 썼는지, 그 주제를 집약해서 보여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춘추 전국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보이고 싶었던 이상적인 군주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고 그가 세운 나라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 그나마 가장 바람직한 체제의 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야 그는 꼭 그 이야기를 하여야만 하였다. 그 인물이 바로 유방이다. 본디 결말이란 작가의 주제가 한껏 드러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권에서 이렇게 유방과 한 나라를 통하여 8년 간 계속해온 춘추 전국 이야기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는지 전면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라 할만 하며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가진 영웅과 체제 그리고 역사에 대한 시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사마천의 '사기'와 함께 보면 더 좋을 것 같아 찍어 본 사진입니다.
'춘추전국이야기'를 읽고 '사기'를 읽었는데 '사기'의 내용을 훨씬 더 쉽고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책은 진시황의 둘째 아들 2세가 이사와 조고의 음모로 장자인 형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진나라 말기의 시간으로 시작의 문을 연다. 나라는 하늘이 정해주지 않은 자가 간사한 무리의 협잡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인지 국운은 쇠퇴하여 당장 내일 멸망한다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 되어 있다. 무릇 나라가 이렇게 되는 이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사해서 따지고 보면 결국 그 자리에 있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 온갖 간사한 꾀와 아첨하는 세치 혀로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조고가 그랬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왕위의 정당한 후계자를 죽음으로 몰았으며 덜 떨어지고 조고만큼 자기밖에 모르는 2세를 왕위에 앉혔다. 위가 그러니 아래 또한 어떻게 바르겠는가? 똥에 똥파리가 꼬이듯 대저 꾀와 아첨으로 흥한 자 곁에는 그와 비슷한 무리가 모이게 마련이다. '회남자'에게 이르기를 나라가 망하기 가장 손쉬운 길은 상 받을 자가 벌을 받고 벌 받을 자가 상을 받으면 된다고 했는데, 이 때의 진나라가 그와 같았다. 이러한 나라는 백성의 신뢰를 금방 잃게 되니 곧 진승과 오광 같은 자들이 나왔다.
진승과 오광. 그들은 정말 가진 것 하나 없는 무지렁이 백성이었다. 죄마저 지어 진나라 수도로 압송되어 가던 도중, 진승과 오광은 어차피 죽을 거 이름이나 남겨 보자면서 사람을 모아 난을 일으켰다.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자가 아무런 준비 없이 일으킨 봉기 임에도 불구하고 삽시간에 많은 사람이 호응하여 그 아래로 모인 것을 보면 나라가 백성에게 얼마나 신망을 잃었는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진승이 사람을 불러 모은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이 말을 우리들 대부분은 국사 교과서를 통해 고려시대 노비 만적이 난을 일으키며 했던 것으로 알고 있을 테지만 실은 그 말의 원래 저작권은 진승의 것이었다. 진승의 난은 결국 성공하여 많은 영토를 차지하고 진에게 커다란 위기를 안긴다. 그러나 옛 초나라 사람들이 진승을 왕으로 추대하자 그는 그만 안주하고 더이상 전쟁 선봉에 나서지 않는다. 저자는 그것을 진승의 대단한 패착으로 평가한다. 신념이 아니라 더이상 이대로 못살겠다고 일어난 난이요 사람들이 모인 이상 그 마음이 변질되지 않고 바라는 세상이 올 때까지 지속되기 위해선 흔들리지 않게 잡아줄 구심점이 필요한데 그래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의 불씨가 되어준 진승은 전장의 선봉이 되어야 했다. 사람들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따를 수 있도록. 하지만 큰 눈으로 천하를 도모하기 보다 자기 잇속에 빠져버렸고 그 때문에 모처럼 평범한 백성에 의해 타올랐던 혁명의 불길 또한 중원 모두를 불태우진 못했다. 진승이 자기 잇속만 챙기자 그를 따르던 이들 역시 진승의 명을 받아 정벌하러 나갔던 무신이 진여와 장의의 간계로 진승의 명을 어기고 조나라 왕이 되었듯 자기 잇속만 챙겼던 것이다.
이는 큰일을 도모할 때 자신이 언제 나아가고 언제 물러가야 하는지에 대한 소중한 교훈이 된다. 항우와 유방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항우와 유방은 진승과 달리 자신의 전쟁에서 항상 선봉에 섰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잘 알듯, 항우는 졌고 유방은 이겼다. 전쟁에서 승패란 모두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지만, 그래도 궁금증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과연 무엇이 승패를 갈랐던 것일까? 항우와 유방은 태생부터 많이 달랐다. 쉽게 말해 항우는 고귀한 신분에 기골 장대한 육체하며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유방은 미천한 신분에 가진 것도 거의 없었다. 항우는 일찌기 장수로 이름을 날렸지만 유방은 건달로 지내다가 겨우 말석의 벼슬 하나 얻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천하는 끝내 유방의 차지가 되었으니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항우는 결코 하지 못했던 보다 더 큰 대의를 위해 기꺼이 자기 것을 희생하는 마음가짐이었다. 항우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오만했고 자신의 한계와 단점을 인정하지 않았던 반면, 유방은 늘 자신의 장점 보다 결점을 더 많이 생각했고 사람에 대해 항상 겸손하게 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것은 챙기려 하지 않았고 언제나 득실을 따져야 할 때마다 이해 관계 보다 대의를 중시했다. 결국 나 보다 더 큰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유방으로 하여금 천하를 손에 쥐게 했던 것이다.
이는 진나라의 재상 이사를 봐도 알 수 있다. 이사는 진시황을 도와 춘추 전국을 끝내고 통일한 뛰어난 재상이다. 원래 그는 장량만큼 현명한 책사였지만 진나라가 통일하고 높은 벼슬 자리에 오르자 그만 거기에 깊이 안주한 나머지 조고의 세치 혀에 어리석게 놀아나 결국 진나라도 패망하고 자신과 가문 또한 멸문 당하게 만든다. 진승도 그랬고, 항우도 그랬듯 모두 자신이라는 따스한 이불속을 절대 벗어나려 하지 않은 결과였다.
오로지 유방만이 유일하게 이불 속을 박차고 뛰쳐 나갔다. 그래서 비록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세상이라 하여도 더 가까이 보듬어 안으려 노력했다. 궁극적으로 그런 자세가 유방을 천하의 제왕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지략과 무예 모두 유방을 월등하게 앞섰지만 결국 유방에게 배신당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한신 또한 이불 속이 주는 온기에 취해버린 자였다. 그만한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헛되이 삶을 잃어버리고 만 것은 괴철의 충고를 깊이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괴철은 그런 일이 있기 훨씬 전에 한신에게 '토사구팽'을 이야기 하며 너무 뛰어난 사람은 바로 그 뛰어남이 군주에게 위험이 되어 시대가 평안하게 되면 살아남지 못하게 되니 지금 한신의 나라로 항우와 유방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하는 쪽으로 나아가라고 권했지만 새겨듣지 않았다. 자신의 재능과 현재 상황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모험 보다 안주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보자면 결국 자신을 얼마나 던질 수 있느냐가 승패를 좌우하는 것 같다.
'11권'의 역사는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신을 내려놓고 더 멀리 볼 수록 승리의 여신에게 안길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아마도 이런 유방의 면모가 저자로 하여금 유방을 관중과 같은 뛰어난 존재로 평가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진과 한의 싸움은 인간의 복합성을 재정의 하는 싸움이었고 한과 초의 씨움은 제왕이 되고자 하는 이와 패자로 만족하고자 하는 이의 싸움이었다.(p. 16)
'춘추 전국 이야기'의 마지막 권은 역사란 궁극적으로 자신을 얼마나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잘 알려주는 책이었다.
아무리 커다란 나라를 다스리고 또 아무리 천하의 대권을 두고 다퉈도 본질적으로는 우리가 늘 일상에서 마주하는 문제들을 대할 때 취하는 태도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보다 큰 것을 위해 자신을 얼마나 잘 통제할 수 있느냐가 성공 여부를 좌우했던 것이다. 나의 것을 많이 내려놓고 더 많은 사람과 더 큰 세계를 품에 안을수록 성공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것은 마치 손을 쥐고 펴는 것과 같았다. 내 것을 지키려 움켜쥐는 손은 주먹 안의 협소한 공간밖에 가지지 못하지만 내주려 손을 활짝 벌리면 하늘 전체를 받칠 수 있듯이 말이다. 이제야 왜 대학 교수님이 오늘을 살아가는데 정말 필요한 지혜는 춘추 전국 시대에서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지 잘 알겠다. 앞에 한 말을 그냥 들었다면 난 전혀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승과 항우, 이사와 한신 그리고 유방의 구체적 삶을 통해 여실히 느끼고 나니 마음에 깊이 와 닿지 않을 수 없다. 유방은 큰일을 본격적으로 도모하기 직전 도망자의 몸이 된 적이 있는데 그 때 자신의 길을 가로막은 뱀을 칼로 베어버렸다고 한다. 당시의 사람들은 장차 그가 진을 멸망시킬 계시라 여겼으나 지금 드는 생각으론 유방이 베었던 뱀은 바로 자신이 아닐까 한다. 자신의 욕망, 이해 관계, 이기심 같은 것들. 진승과 항우 그리고 이사와 한신을 보니 결국 자신의 길을 가로 막았던 뱀은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말이다. 내게도 그런 뱀이 있다. 지금까진 그 뱀을 못 본척 하고 비켜가거나 살살 달래기만 했는데 유방의 이야기를 한껏 겪은 지금 이제는 베어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미루는 것도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것 역시 책을 통해 똑똑히 보았으니.
무협지를 읽는 것만큼 재밌고 흥미진진한 역사서였다. 그러나 항우와 유방이 활약했던 시대보다 더 많은 알게 된 건 바로 '사람'에 관한 것이었다. 역사가 무엇보다 사람의 일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답을 알고 싶다면 '춘추 전국 이야기'를 벗해보시라 권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