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불길했던 전조는 전작의 무대가 '교차로'였다는 데서 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절대 만나서는 아니 될, 그렇게 영원히 평행이어야 할 두 세계가 문득 루크레티우스의 빗방울 처럼 만나게 되는 장소, 교차로. 때문에 옛사람들이 교차로를 그리 상서롭지 못한 곳으로 여긴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승과 저승이 만나는 곳.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의 세계로 건너올 수 있는 곳. 따라서 로마의 탈영병들은 가장 불길한 것의 상징이었던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했음은(탈영병은 더이상 로마 사회에서 산자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십자가 형이란 이미 죽은 자인 그들을 그들의 고향으로 보내준다는 의미가 강했다.) 당연했다. 로버트 존슨이 악마를 만나 락을 탄생시킨 것도 '교차로' 였다. 아니 그 이전부터 교차로는 자주 사람들에게 악마가 출몰하는 장소로 믿어졌다. 현재 미드 슈퍼내추럴에서 딘과 샘이 교차로에서 악마를 소환해 만나는 것도 단순히 로버트 존슨만의 일화를 가져온 것만은 아니란 얘기다. 그렇게 교차로란 융 식으로 원형적으로 불길한 장소이다. 하지만 그 '불길함'은 대체 어디서 연유하는 것인가?  메리 더글러스는 언젠가의 글에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정체성의 변화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녀는 그것을 '머리카락'을 들어 이렇게 설명한다.  

 

머리카락은신체의 일부일 때는 머릿기름을 바르고, 빗고, 매우 정성들여 치장하는 등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지만 일단 잘려나가자마자 '쓰레기'가 되며 명시적이고 의식적으로... 대변, 소변, 정액, 땀 등의 오염 물질과 연결된다. 

 

   사람의 몸에 있었을 때와 떨어져 나갔을 때 이렇게 머리카락이 완전히 극단의 다른 대접을 받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것이 바로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많은 문화권에서 머리 모양을 바꾸는 것은 하나의 정체성에서 다른 정체성으로 넘어가는 통과의례의 바꿀 수 없는 부분(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p.51))으로 여겨져 왔다. 그렇게 떨어진 머리카락을 우리가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우리가 버렸던 과거의 정체성의 잔여물이기 때문인 것이다. 메리 더글러스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으로 인한 소멸이 아니라 그렇게 없는 상태로 바뀌는 그 '자체'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글러스의 말을 따른다면 교차로에서 느껴지는 저 '불길함'의 정체는 아마도 우리의 정체성을 바꾸려 위협하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심농의 '교차로의 밤'에서 교차로가 주는 불길함은 그저 사건이 거기서 일어나서가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어떤 변화가 엄습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가 바로 정체성에 타격을 줄 것임을 은밀히 발언하는 것이다. 과연, 거기서 매그레는 낮 동안 억압되어 있던 한 여인을 만난다.(여기서 제목의 '밤'이 에고(낮)의 장악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현실로 뛰쳐나오는 '이드'의 시간을 말하는 프로이트적 의미임은 굳이 따로 말하지 않아도 무방할 것이다.) 

 

  WHO'S THAT GIRL? 

 

  세익스피어에게 '여성'이란 기억의 존재였다. 왕이 숨기고 싶은 진실을, 사회가 은폐시키고 싶은 죄를, 역사가 지우고 싶어하던 비극을 세익스피어의 여성들은 때로는 그 마음에 때로는 그 몸에 새기고 있던 기억의 존재였다. 그래서 그녀들은 남자들에게 소유의 대상이었으며 심판의 거울이었다. 거트루드는 클로디어스에겐 자신의 안전을 위해 반드시 곁에 두어야 할 기억이지만, 햄릿에게는 심판을 위해 소환시켜야 할 기억인 것이다. 

  심농의 '교차로의 밤'을 영화로 만들었던 장 르느와르에 이르면 여성은 이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애시당초 자신의 부인을 영화배우로 출연시키기 위해 영화 감독이 된 그답게  여성은 애정의 대상이지 세익스피어 처럼 소유나 망집의 대상이 아니다. 사랑은 무엇보다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고 믿는 르느와르는 '교차로의 집'에서도 그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뛰어난 편집을 보여주는 '교차로의 밤'에서 르느와르가 특히 공을 들이는 것은 교차로에 있는 세 집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때로 그는 한 집씩 차례로 번갈아가며 보여주는 걸 즐겨하는데 거기서 그가 나타내고 싶은 것은 그 집 하나하나가 당시 프랑스 계급을 상징토록 관객에게 느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교차로의 집들을 통하여 귀족 계급, 신흥 부르조아 계급,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담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 집에 기거하는 여성들에 대한 묘사다. 거기서 르느와르는 여성이 그 각 계급이 속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이 되도록 만든다. 무엇보다 그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은 바로 여성들의 옷차림이다. 르느와르는 계산적으로 하층 계급으로 내려갈 수록 옷의 노출이 점점 커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귀족이나 신흥 부르조아지 여성들은 옷으로 전신을 감싼 채 등장한다. 그네들의 살결은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혹은 그 아래일 수록 그 드러나는 살결의 부분은 훨씬 많아진다. 이 모든 것을 통한 르느와르의 발언은 명확하다. 여기서 '옷'이란 바로 개인의 자유를 가두는 사회의 인습, 규율, 억압의 상징인 것이다. 그럼으로 노출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더 자유롭다는 의미인 것이다. 때문에 르느와르는 '교차로의 밤' 후반 가장 중요한 장면인 매그레와 엘세의 장면에서 지금까지 해 온 것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거기서 엘세는 소설과는 달리 거의 벗거나 혹은 속옷만 입은 모습으로 매그레에게 담담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르느와르는 비로소 매그레와 엘세과 공감가능한 대등한 인간관계가 되었다는 듯이 같은 크기로 화면에 담는다. 둘 사이는 더이상 수사관과 용의자가 아닌 것 같다. 사실 보면서도 지금 매그레가 하고 있는 것이 수사인지 아님 연애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장 르느와르의 '교차로의 밤'은 심농의 그것보다 보다 더 급진적으로 사회 비판을 가하기 때문에 이렇게 보면 르느와르는 엘세를 마치 들라크루아의 프랑스혁명을 이끄는 여신과 거의 비슷한 이미지로 연출하고 있음도 느끼게 된다. 르느와르에게 있어 여성은 이렇다. 그녀는 자유로 이끄는 존재다. 그럼으로써 사람을 진정 해방시키는 존재다. 그 벽창호 같은 매그레의 마음 마저 허물어뜨릴 정도로... 

 
                                                                    -  장 르느와르의 영화 '교차로의 밤' 중에서

   

  그렇다면, 심농은?

  교차로는 단순히 프랑스 자체를 모두 담기위해 선택된 공간만은 아니었다. 심농이 일부러 교차로를 무대로 삼은 것은 어쩌면 그 '불길함'을 강조하기 위한 의미일 수도 있다. 메리 더글러스에 따르면 그 불길함은 바로 정체성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누구의 정체성의 그토록 위협을 당하기에 심농은 특별하게 '교차로'를 그 무대로 삼았던 것일까? 답은 물론 소설 자체에 나와있다. 바로 '매그레'인 것이다. 우리는 엘세를 대면하는 매그레에게 뭔가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는 듯한 낌새를 불현듯 느낀다. 어쩌면 개인적인 느낌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장 르느와르의 영화를 보고 그렇게 느낀 것이 나만은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매그레의 포커 페이스는 제대로 그 속내를 보여주고 있지 않으나 우리(나와 장 르느와르)는 분명 그의 눈빛으로 뭔가 유혹을 받고 있음을 느낀다. 누가 굳어진 중년의 마음에 촉촉한 단비를 뿌리고 있는가? 그건 바로 '엘세(Else)'다. ELSE... 이 얼마나 재치있는 작명인가? 프랑스에서 여성을 가리키는 ELLE에서 'L'  하나만 'S'로 바꾼, 거기다 영어로는 '다른'이란 뜻마저 가지고 있는. 그러니까 심농은 이미 이름에서 그 의도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즉 '엘세'는 하나의 개체의 이름인 고유명사가 아니라 융의 '아니마'와도 같이 여성 자체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인 것이다. 바로 그 '여성성'과의 근접 조우 상태에서 매그레는 흔들리는 것이다. 즉 그는 유혹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심농에게 있어 여성은 유혹의 존재로 나타난다. 그야말로 뱃사람을 노래로 홀려 익사시켰던 그 유혹의 '세이렌'인 것이다. 

 

   '세이렌의 유혹' 이라는 기표 

 

   
   그것은 매그레에게 어떤 유혹으로 다가오는가? '교차로의 밤'에서 우리는 그 정체를 똑똑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네델란드 살인사건'에서 심농은 그 유혹의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생폴링앵에 지다'에서 그 자신의 죄를 고백했듯이 이번에는 자신의 삶 속에 끈질기게 남아있던 그 유혹(심농은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에게 만 명의 여자와 관계를 가졌다고 고백한적이 있었다.)의 정체에 대해서 고백한다. 아마도 그 때문에 '생폴리앵에 지다'에서 문득 벨기에로 소환당했듯이, '네델란드 살인사건'에서도 더 북쪽의 네델란드로 역시나 불현듯이 소환당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도 파리에서 최북단 '델프제일'로. 언어도 통하지 않고 완벽하게 고립된 그 곳에서 매그레는 그와 똑같이 사회로 부터 고립된 채 바다로 향한 열망을 억누르고 숨죽이며 살아야했던 '포핑아'라는 남자의 존재와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열망은 그리 오래 잠들어있지 못했는데 그건 젊은 여자 리번스의 유혹 때문이었다. 그녀는 포핑아에게 내내 자신을 데리고 여기에서 달아나 달라고 조른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기묘한 점 하나를 보게 된다. '포핑아와 리번스'의 관계가 어쩐지 '교차로의 밤'에서 '매그레와 엘세'의 관계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중년의 남자와 젊은 여자의 교제라서만은 아니다. 그 보다는 '엘세'와 '리번스'라는 기표가 가지는 의미 때문이다. 물론 '엘세'는 심농의 소설이 아닌 장 르느와르의 영화에서 나타난 '엘세'이다. 그녀의 기표와 '리번스'의 기표는 사실 동일하다. 모두 자유 혹은 해방의 상징인 것이다. 즉 장 르느와르에서 엘세가 매그레를 그가 가진 사회적 굴레로 부터 빠져나오게 만드는 역할을 하듯이, 리번스 역시 포핑아에게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기표인데도 장 르느와르와 심농은 서로 그 기표를 다르게 받아들인다. 장 르느와르는 그걸 그대로 '자유 혹은 해방'의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심농은 그것을 '유혹'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르느와르는 다가오는 엘세를 피카소의 '해변을 달리는 두 여인' 처럼 기꺼이 맞아들이지만  심농은 주저한다. 그는 선뜻 리번스의 손을 잡지 않는다. 그는 뒤로 물러서며 거기서 서성인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것이 옳은 길인가? 그 너머에서 계속 세이렌의 고혹적인 노래 소리는 들려오지만 그는 기둥에 단단히 결박당한 오디세우스 처럼 거기로 움직이지 못한다. 아니, 그는 오디세우스가 그랬듯이 붙들려 있고 싶어한다. 그 기둥에. 그가 단단히 결박되어 있는 기둥이 바로 '일상'인 것이다. 

 

  전작 '생폴리앵에 지다'에서 원죄 처럼 가지고 있는 한 죽음에 대한 죄의식으로 부터 달아나기 위해 기꺼이 맞아들였던 '일상'이라는 것이 이렇게 또 다시 나타난다. 바로 이 ('생폴리앵에 지다'에서 비롯되어진) '일상'에 대해 결박되고 싶은 욕망 때문에 심농은 르느와르 처럼 유혹에 있는 그대로 몸을 맡기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애시당초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일상은 남들과 똑같이 그저 단순하게 영위하게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과거의 죄책감으로 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애써 취하려 연거푸 들이켜 부었던 꼬낙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선택이 아니라 차라리 열망이라고 해야 옳다. 살기 위해서 그는 일상의 갑옷을 입은 것이다. 생존을 위한 열망은 아무래도 꿈을 위한 열망 보다는 그 크기와 지속면에서 압도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심농은 모든 걸 접었다. 포핑아도 그랬다. 하지만 결국 포핑아는 살해 당한다. 그가 그토록 머무려고 했었던 집에 조차 들어가지 못한 채. 그가 죽은 것은 결국 그가 유혹에 굴복당했기 때문이었다. 세이렌의 노래 소리에 그가 결박을 풀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이것이 과연 정말 살인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왜일까? 심농의 무의식에 흐르는 하나의 진실을 알게 된 지금 혹시 자신의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포핑아를 더 큰 유혹이 되기 전에 심농 스스로 '살인'을 빙자하여 지워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인가... 아무래도 이건 진실일 것이다. 포핑아는 아마도 정말은 심농에 의해서 살해당했을 것이다. 그렇게 매그레는 처음 부터 범인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내내 반복하는 말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는 정말 그대로의 진실이 아닐까! 그는 그렇게 해서 창조주의 살인을 짐짓 눈감아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매그레가 바보가 되어야 했을 만큼 유혹은 그토록 치명적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를 우리는 그 다음 작품 '선원의 약속'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선원의 약속'은 유혹이 얼마나 치명적이며 또한 파괴적인지 그래서 거기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단단히 스스로를 그 일상이라는 기둥에다 결박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것은 '누런개'에서 발아되어 '교차로의 밤'에서 성장하여 이제 '네델란드 살인사건'에서 불현듯 '세이렌의 섬'으로 떠올라 버린 그렇게 해서 스스로에게 하나의 커다란 유혹이 되어버린 '여성'이라는 기표에 관하여 심농 스스로 그것에 더욱 더 저항하고 일상에 자신을 단단히 결박하기 위하여 만든, 일종의 자기 방어용 작품이다. '선원의 약속'은 놀랍도록 감성에 차 있고 한 편으론 남성의 우울 마저 진하게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지만 그 근저에 흐르는 것은 유혹에 대한 경계다. 그 경계심이 하도 커서 어쩐지 '선원의 약속' 표지 처럼 커다란 닻을 자신이 지금 딛고 서 있는 일상의 바닥에다 꽂아두려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는 매그레의 아내 마저 등장시켜 일상의 틀을 더욱 견고히 하려 한다. 하지만 그의 무의식의 한 켠은 내내 스스로에게 보내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와 유사한 관계들이 이그러지고 깨어짐을 통해 그것들이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끊임없이 속삭인다. 때문에 주 배경이 '바닷가 해안'이 되는 것은 정말 상징적이다. 심농이 그 아무리 커다란 닻을 일상에다 박아두고 싶어도 그야말로 '경계'의 공간. 늘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뛰어들지도 못하고 머무르지도 못한다. 세이렌의 노래 소리는 끊이지 않고 결박한 끈은 언제까지 튼튼하게 있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늘 갈망을 커다란 성게 마냥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 하는 상태. 그 진퇴양난... 하지만 지금 나는 매그레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심농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 틀렸다. 난 지금 당신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인 당신을. '누런개'에서 '선원의 약속'까지 당신이 읽었다면 당신도 보게되었을 것이다. '포핑아'에게서도 그 배, 오세앙호의 선장에게서도, 르 클랭슈에게서도 그리고 그 모든 것에서 씁쓸히 자신의 분신들을 음미하는 매그레에게서도 바로 그들과 똑같은 갈망과 번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당신 자신의 모습을. 그렇다. 이건 남의 얘기가 아니다. 바로 당신의 얘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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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트 그렌스 형사 시리즈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지난 7월 22일 영국 범죄소설 작가 협회, 즉 CWA에서 그 해의 비 영어권 최고 장편소설에 주는 THE INTERNATIONAL DAGGER가 발표되었다. 수상작은 안데슈 루슬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그들의 세번째 작품 'THREE SECONDS'였다. 이미 수상 경력이 화려했던데다 뉴욕타임즈에서 이 책에 대한 리뷰(제목이 '라르손이 지핀 불 더욱 타오르게 하다'였다)를 따로이 할 만큼 이미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은데 이 수상으로 이제 그 평판은 결정적이 되었다. 놀랍게도 만켈과 라르손과 똑같이 스웨덴 작가다. 게다가 라르손이 밀레니엄 1부 '용문신을 한 소녀' 로 수상하기 바로 한 해 전에 자신들의 데뷔작으로 이미 그 '글래스키 상(북유럽 최고 장르문학상)'을 수상한 바도 있었다. 마치 스웨덴의 은둔 고수를 하나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흥미로웠다. 그런데 때마침 글래스키 상을 수상했던 바로 그 데뷔작이 국내에 출간되었다. 그 작품이 바로 2005년에 나온 '비스트' 이다. 

 

  '비스트'는 표지에서 어느정도 추정되듯이 아동 성폭력을 주 테마로 하고 있다. 도입부 부터 아홉살 동갑내기 두 소녀를 유혹하여 무참하게 폭행 살인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이야기가 시작되면 그 범인은 이미 검거되어 재판까지 끝난 채 교도소에서 복역중이다. 그러던 중 치료를 위해 밤에 호송 도중 그가 탈출한다. 뒤늦게 경찰은 그를 잡기 위해 수색을 펼치지만 이미 그는 또 하나의 아이를 옛날과 똑같이 폭행하고 살해한 뒤이다. 아이의 이름은 '마리' 아이는 최근 이혼한 아빠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빠 프레드리크는 오로지 딸 아이 하나만을 삶의 유일한 의미로 알고 살아가던 남자였다. 하지만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아이 앞에서 그에겐 이제 다른 하나가 오로지 그를 살아가게 해 줄 삶의 의지가 된다. 그것은 바로 '복수' 그는 스스로 '마리'의 죄값을 묻기 위해 범인을 찾아 나선다. 

 전직 저널리스트(만켈도 라르손도 모두 저널리스트 출신이었는데, 루슬룬드는 스웨덴 국영방송에서 사회부 기자로 활동했었다.) 출신과 전직 범죄자 출신의 의기 투합이라는 기묘한 조합으로 구성된 이 공동 작가의 데뷔작을 단순히 오로지 독자의 감각을 사로잡을 목적으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소재로만 버무린 비정한 복수극 정도로만 생각하면 정말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이 소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아동 성폭력 살인이라는 굉장히 자극적인 소재를 사용한 것도 단순히 독자의 관심을 잡아두겠다는 게 목적이 아니다. 아무튼 그 오해를 풀기 전에 일단 이 책의 독특한 서술 스타일에 대해 먼저 말해보려 한다. 이 소설의 스타일은 해닝 만켈과도 다르고 스티그 라르손과도 다르다. 아마도 같은 스웨덴 작가로서 '비스트'와 가장 비슷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작가라고 한다면 '웃는 경관'으로 우리 나라에도 소개된 마이 슈발과 펠 바르가 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스웨덴 범죄소설의 신대륙을 열였던 그 전통에게로 회귀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안데슈 루슬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이 '비스트'에서 보여주는 것은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게 하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소설의 거대한 서사에 함몰되지 않은 채 저마다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 세상이 그렇듯 모두가 각자 자신만의 고립된 인생 살이를 해 나가지만 결국 모이고 모여 역사가 되듯이 '비스트'도 이와 똑같이 등장인물 각자의 생각과 행동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서사'를 이루는 것이다. 즉 이것은 여러 가지 목소리가 각자의 색깔로서 한데 모여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모자이크 그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비스트'의 스타일은 모자이크적이다. 따라서 여기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주인공도 없고 조연도 없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서사의 흐름에 따라 주연도 되고 조연도 되는 것이다. '비스트'를 읽는 우리들은 그러니까 마치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그 천사와 같은 것이다. 천사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유영해 다니다가 자신의 손가락을 사람의 머리에 대면 그 생각을 읽을 수 있는데 우리 역시도 '비스트'의 세계를 유영하면서 마치 손가락을 등장인물의 머리에 댄 것 처럼 그 생각들을 읽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스타일을 취하면서 굳이 그렇게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소재를 사용해야 했던 것일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범죄 소설이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그러니까 이제 앞서 말했던 그 오해를 본격적으로 풀 시간이 된 것이다. 궁극적으로 루슬룬드와 헬스트럼이 왜 이런 모자이크적 스타일을 사용하게 된 것일까? 바로 그 이유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소재의 선택은 관계가 있다. 이 둘 모두가 사용된 이유는 '비스트'가 독자들에게 본질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타자를 심판할 수 있는가?" 

  바로 이 때문에 작가들은 가장 많이 대중의 분노를 일으킬 수 있는 아동 성폭력 살인 이라는 소재를 사용한 것이다. 즉 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특히나 만일 당신이 그에게 자녀를 희생당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를 묻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우리의 대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을 것이다. 더우기 그 부모라 한다면.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 소설 속 프레드리크 처럼 사적인 처벌도 얼마든지 수긍한다고. 사실 어느 부모가 희생당한 아이의 복수를 위해 범죄를 처단하는 아비를 욕할 것인가? 소설 속 한 형사마저(그 역시 똑같이 아버지이다.)  이렇게 울부짖는데 말이다. 

  이 일을 하면서 항상 저 자신이 이 사회에 쓸모 있는 인간이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요. 아마 개중에는 잘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정말이지 아닙니다! (...)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앉아서 선생을 감시하고, 선생이 10년 동안 수감될 곳으로 호송해가야 하는 저 자신이 얼마나 수치스럽게 느껴지는지 말입니다. 솔직히 제가 경찰치고 거의 욕을 안 하는 편이긴 하지만 정말... 지금 이 상황은 정말 씨발, 완전히 미친 짓입니다!" 

   경찰은 프레드리크가 그 범죄자를 처단한 것을 정의롭다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범죄자가 되어 처벌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이 그야말로 부정의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그는 법을 수호하는 경찰이지만 오히려 법이 전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울부짖는 것이다. 심판은 언제나 정의와 관계된 문제다. 우리는 타자를 심판할 때 그것이 정의롭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루슬룬드와 헬스트럼이 '비스트'에 그렇게 공분을 일으킬 자극적 소재를 사용한 것은 그 '심판의 즉각성'을 문제삼기 위함이다. 보통 그런 케이스의 경우 우리는 종종 너무도 쉽게 타자를 심판하지 않는가. 아마도 이러한 경향 때문에 비스트의 작가들은 일부러 가장 분노를 자아내고 바로 심판의 칼날이 날아드는 이런 소재를 택하여 그렇게 즉각적이고 단정적인 심판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우리들로 하여금 생각케 만드는 것이리라.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심판할 수 있는 것일까? 행여 우리가 제대로 심판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냥 그대로 남아있게 될 것인가? 어쩌면 또 다른 누군가를 아프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등등의 수 많은 질문들이 '비스트' 내부에 존재하는 여러 목소리들에서 흘러나와 어쩔 수 없이 우리의 귓가로 스며든다. 읽으면서 우리들은 정말로 타자를 심판하는 것에 관하여 다시금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내 톨스토이가 한 단편의 제목으로 썼던 그 말을 떠 올리게 될 것이다. 

   "신은 진실을 알지만 그러나 때를 기다리신다." 

   심판의 쉽지 않음은 우리의 정보가 딱히 부족해서도 인식 능력이 모자라서만은 아니다. 거기엔 또 하나의 제약 사유가 있음을 작가들은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사람과 사람이 모여 이루어진 사회 자체가 가하는 제약이다. 과연 언제나 사회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했던 스웨덴 작가 출신답게 그들은 하나의 심판이 그대로 행해졌을 경우 일으키게 될 예측 못할 사회 전체로 일어나는 파급효과가 어떻게 심판을 어렵게 만드는지 또한 잘 보여준다. 여기서 그들이 왜 스타일을 굳이 '모자이크적'으로 했는지 그 이유가 돌연 드러난다.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민감한 주제에 대해 여러 다양한 목소리들을 독자에게 들려 줌으로써 독자에게 보다 가능한 모든 견해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심판이 그렇게 쉽지 않음이 바로 사람과 사람이 담쟁이 덩굴 처럼 얽혀 하나의 긴밀하게 짜여진 네트워크 같은 사회라서 어떤 하나의 결정이 마치 '나비효과' 처럼 사회 전체에 무시하지 못할 파급 효과를 미치기 때문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쉽고도 간결한 문체에 여러 등장인물들이 각자 삶의 한 토막을 그대로 가지고 나와서 보여주기에 전혀 지루함이 없이 몰입해 읽을 수 있었던 소설이었는지라 조금은 가볍게 접근하려 했다가 큰 코 다쳤다. 데뷔작이지만 루슬룬드와 헬스트럼이 주제를 녹여내는 내공은 만만치 않았고 또한 은근히 깔려있는 주제가 진지하기 그지 없어 왠지 스릴러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회학 보고서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났다. 그러고 보니 여기엔 주 소재인 아동 성폭력 말고도 동성애 같은 다른 사회 차별적 요소들도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보다 핵심적으로 비스트는 그 '심판'의 근저에 깔린 '차별'자체를 다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라는 사실이 너희는 우리보다 저열하다로 곧장 연결되는 그런 '차별' 말이다. 바로 그 차별이 파시즘의 토대임을 볼 때 우리는 여기서 '비스트'의 작가 루슬룬드와 헬스트럼이 파시즘과 작품을 통해 맞서 싸웠던 해닝 만켈과 스티그 라르손의 경향을 그들 역시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쉽게 읽히지만 만만치 않은 깊이와 여운을 맛보게 해 준 작품. 그들의 후속작이 정말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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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트레크 저택 살인 사건
쓰쓰이 야스타카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마츠모토 세이조로 대표되는 사회파 미스터리에 거의 장악되다시피 하던 일본 미스터리계에 다시금 본격(일본에서는 정통 미스터리를 '본격'이라 이른다.)의 부흥을 가져와 '신본격의 기수'라 이름 받은 아야츠지 유키토는 그의 신본격의 신호탄이자 데뷔작 '십각관의 살인'의 서두에서 작중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최신의 과학 수사기술이 명탐정들의 활약을 다 가져가 버렸다고. 맞는 말이다. CSI를 보라. 아무리 홈즈 같은 명탐정이 있더라도 거기 어디에 콧배기를 조금이라도 들이밀 여지가 있는가 . 바로 곁에 있더라도 CSI 대원들 그 누구도 명탐정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들에게는 심문이니 대질 조차도 필요없다. CSI의 모토는 그거다. '제대로 된 과학적 수사 기술만 있다면 증인도 자백도 필요없다.'라는 것. 그들이 종종 용의자를 부르는 것도 사실은 DNA를 얻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다. 

  현대에서 명탐정이 설 자리는 그렇게 좁아졌다. 때문에 명탐정을 등장시키고 싶은 작가는 어쩔 수 없이 '클로즈드 서클'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폭풍 속에 고립된 섬, 폭설 속에 고립된 산장 아니면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데뷔작 처럼 화산폭발로 인해 고립된 캠프 이렇게 말이다.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그렇게 해서 과학이라는 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 두뇌의 지적인 능력으로만 주어진 미스터리를 풀 수 있도록 말이다. 명탐정의 존재는 미스터리의 재미가 바로 지적 유희에 있음을 의미한다. '십각관의 살인' 첫 머리에서 유키토 했던 말 그대로 '자극적인 논리 게임'인 것이다. 

  이 게임을 위해서 미스터리 작가와 독자들은 그동안 '톰과 제리'식의 게임을 해왔다. '제리'인 미스터리 작가들은 계속 독자들의 '허'를 찌르기 위해 참신한 트릭들을 개발해왔고 독자들은 거기에 속지않기위해 점점 교활한 '톰'이 되어야했다. 하지만 역시 아직은 뉴튼식 물리법칙에 지배를 받는 세상. 그 세상의 한계 때문에 작가가 만들어낼 수 있는 트릭들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때로는 가스통 루르의 '노랑방의 비밀'이나 존 딕슨 카의 '황제의 코담배 케이스' 처럼 심리적 트릭을 개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도 무한히 개발될 수는 없는 법. 결국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이 시작이 되었고 아야츠지 유키토 자신 역시 데뷔작에서 써야 했던 '서술 트릭'이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유키토의 작품 뿐 아니라(십각관의 살인, 미로관의 살인 정도가 해당될 것이다. 두번째 작품 시계관의 살인은 물리적 트릭을 쓴다.)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에서 그 맛을 보았고 더하여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에 이르러서는 서술 트릭의 극한을 체험한 바가 있다. 

 '섬을 삼킨 돌고래' '최후의 끽연자'를 통해서는 그 풍자적인 재능을 '시간을 달리는 소녀' '파프리카'를 통해서는 그 SF적 역량을 여실히 느끼게 해줬던 IQ 178의 진짜 천재 쓰쓰이 야스타카의 그 수많은 작품중 단 세 개 밖에는 없다는 미스터리 작품이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을 때 난 두 가지에 놀랐다. 하나는 쓰쓰이 야스타카가 미스터리도 썼구나 하는 사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결말 부분이 봉인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봉인판은 세 번 만났는데 그 첫번째가 앞서 말했던 '살육에 이르는 병'으로 그건 띠지로 전체가 다 봉인된 형태였고 다른 하나가 북스피어에서 나온 빌 밸린져의 '이와 손톱'인데 그것은 결말 부분이 봉인된 상태였다. 지금 얘기하는 소설 '로트레크 살인사건' 역시도 결말 부분이 봉인되어 있는 형태다. '봉인'은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기막힌 트릭이길래 이렇게 일부러 봉인까지 시켜놓았을까 하는 기대감. 과연 그 기대감으로 한껏 고양되어 눈에 힘을 주고 쓰쓰이 야스타카가 펼쳐 보이는 미스터리의 세계로 들어갔다.  

  

  제목 '로트레크(아마도 로트렉을 일본식으로 표기한 것 같다)' 처럼 이 소설의 화자는 여덟살 때 사촌의 우연한 실수로 크게 다쳐 그만 하반신이 영원히 성장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남자다. 그의 나이 28세 때, 그는 예전엔 자기 집 소유였으나 부친의 회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팔아버린 한 독일인 사업가가 지은 커다란 별장으로 초대된다. 거기에는 요코미조 세이지의 '옥문도' 처럼 아리따운 세 처자와 그녀들의 부모가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거기서 제1 제2 제3의 흉악한 살인이 일어난다. 독자의 임무는 '나'가 보여주는 사건의 정경을 잘 따라가면서 그 '범죄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문장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사건의 얼개를 밝혀준다. 잠재적 용의자들의 관계, 건물의 구조, 흉기의 존재까지. 일부러 숨기거나 미스디렉션을 유도하는 부분은 별로 없다.

  그렇게 모든 것이 공정하다. 동기도 파악 가능하고 모두 권총 살인인지라 깔끔하다.  즉 야스타카는 가장 주가 되는'트릭'만 빼고는 공정한 지적 스포츠가 되기 위하여 녹스의 십계명을 잘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트릭이 가져다 준 반전의 효과가 꽤나 커서 어쩌면 '이게 뭐야! 반칙 아냐!' 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솔직히 나도 범인을 맞히긴 했지만 이런 기발한 트릭은 정말 처음이다. 새삼 쓰쓰이 야스타카의 솜씨에 놀란다. 하지만 내 경험에 의하자면 야스타카는 절대 반칙을 쓰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에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했던 말을 토대로 추리를 했고 결국 두 번을 다시 꼼꼼이 읽고서야 봉인을 뜯기 전에 어느정도 트릭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건 지적 논리 게임을 좋아한다면 한 번 도전해 볼만한 게임인 것이다. 어떤가? 로트레크의 포스터들이 가득한 이 저택으로 한 번  초대되어 오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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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2011-08-18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격 미스터리 소설은 트릭의 종류를 모르고 읽는 게 제일 낫다고 생각합니다만. 로트레크 저택 살인사건의 트릭을 비롯하여 서평 자체에 몇몇 작품의 트릭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네요. 저는 위에 나온 책을 다 읽었으니 상관없지만 모르시는 분이 이 서평을 읽고 나면 소설의 재미가 반감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서평에서 지적하신 책들을 읽으신 분이 이 책을 읽으면 미리 대비를 하겠죠. 깜짝 놀랄 진상이야말로 이 책의 묘미이니, 제목과 내용에 수정을 해 주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오드득 2011-08-18 13:11   좋아요 0 | URL
리뷰 쓸 때는 트릭의 종류 정도는 밝혀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사실 트릭의 종류를 알면 더욱 더 미스터리 풀기에 매달리게 하는 동기 유발이 될 수 있으니까요.)만 말씀을 듣고 보니 아무래도 수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수정 했습니다. 무엇보다 리뷰가 읽는 이의 기쁨을 빼앗아서는 안되니까요. 말씀 감사합니다.^ ^
 
[스틸라이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스틸 라이프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박웅희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솔직히 두근거리며 첫장을 넘겼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재림이라는 말마저 듣는 작품이라하니 그동안 맛보지 못했던 고전 미스터리적 재미를 듬뿍 맛볼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왠지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듯한 작은 시골 마을 '스리 파인즈'는 그 자체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의 작은 시골 마을로 여겨졌고 그렇게 내게는 그야말로 '클로즈드 서클'로 보였다. 배경 설명과 주요 용의자들이 될 인물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듯한(그렇게 독자에게 스스로 미스터리 해결을 위한 예비지식을 제공하는 듯한) 첫 장이 지나가고 이 소설에서 명탐정이 될, 캐나다에서는 이미 범죄 해결로 이름이 놓은 가마슈 경감과 왠지 왓슨역을 할 것만 같은 '니콜(결국 그 기대는 뒤에 가서 처참히 무너지지만)'의 소개가 있고나서 드디어 새벽의 한 숲길에서 남에게 원한이라고는 티끌 만큼도 지지 않을 듯한 선하디 선한 할머니 제인 닐이 시체로 발견된다. 

 해설을 제외하고는 총 457페이지에 이르는 이 소설에서 그 십분의 일 길이의 정도에 이렇게 시신이 발견되었으니 내심으론 남아있는 저 많은 분량 동안 아마도 제2, 제3의 살인이 있을 것이라 짐작되었고 예상대로라면 내 관심은 이제 제인 닐이 아니라 그러한 살인자를 은폐하고 있는 마을 '스리 파인즈' 자체에게로 옮겨질 예정이었다. 그렇게 범죄자를 찾아내는 것과 동시에 그 마을이 감추고 있는 비밀이 또 무엇인지 추리해나가는 재미가 더해질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 루이즈 페니는 왜 마을이 '스리 파인즈'인지 알려주는데 그것이 바로 신대륙에 와서 더더욱 위협을 받는 왕당파들을 위한 보호처라는 뜻이라니 예감이 맞아지는 것 같고 뭔가 독립의 역사와도 관계있을 것 같아 책장을 넘기는 손은 더욱 더 빨라질 것이었다. 

 캐나다의 여류 작가 루이즈 페니의 2005년도 데뷔작 '정물화'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스틸 라이프'는 만일 나처럼 그런 기대를 했다면 읽으면서 조금은 실망할 수 밖에 없는 소설이다. 그러니까 순수 미스터리적 재미만을 추구했다면 이 책은 그 남은 십분의 구 동안 도무지 나오지 않는 후속 살인, 능력자 가마슈 경감의 부지런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진척이 없는 수사, 거기다 조금은 반칙 처럼도 느껴지는 사건의 현장 등등 상당히 지루할 수가 있다. 특히나 영미 미스터리식의 빠른 속도에 길들여진 분들이라면 그것이 마치 KTX를 타고 지나간다고 한다면 '스틸 라이프'는 자전거를 타고 하염없이 느릿느릿 지나간다는 느낌을 더더욱 받게 될 것이다. 사용된 무기는 흥미롭지만 트릭이나 범인 감추기가 그렇게 또 뛰어나지 않아서(처음에 예상했던 사람이 결국 범인으로 밝혀져서 개인적으로 좀 아쉬웠다. 뭔가 다른 작가의 계책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작 결말의 해결에서 아무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었던 것도 아쉬웠다. 그리고 미스터리라면 무엇보다 명쾌하게 해결하는 명탐정의 매력 또한 돋보여야 하는데 이 소설에서 명탐정 역할을 맡고 있는 가마슈 경감이 그런 매력을 보여주지 않아 또 아쉬웠다. 아마도 오랜만에 아가사 크리스티식의 고전추리의 재미를 맛볼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에 그 아쉬움이 더 컸던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일 전혀 사전 정보없이 보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다. 이 소설은 미스터리에 너무 치중하지 않고 본다면 이야기를 끌어가는 속도도 괜찮고 문장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무엇보다 번역이 좋아서 그것을 잘 살려내고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사실 작가는 미스터리 보다는 제목 '정물화' 그대로 '스리 파인즈'라는 마을 자체를 작품에다 온전히 담아내는데 더 치중한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살해당한 제인 닐이 마지막으로 그렸던 그림 '박람회 날' 처럼 말이다. 닐은 친구 티머가 죽은 날이기도 한 박람회 날을 그림으로 그렸는데 그녀는 거기에 그 마을 사람 모두를 변형하여 집어 넣는다. 그렇게 페인도 마을 사람 모두를 생생히 독자에게 전달해 주는데 더욱 더 주력한 듯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루이즈 페인은 왜 미스터리적 재미를 상쇄해가면서 까지 그 마을 자체를 온전히 담아내려 했던 것일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관해서 흥미로운 것이 바로 소설 속에 수많은 관계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피터와 클라라의 관계, 루이자와 티머 그리고 제인 닐의 관계 그리고 가마슈 경감과 이제 막 그에게로 배속된 신참 니콜의 관계까지. 루이자 페인이 전해주고 싶은 주제에 맞춰 보자면 특히나 가마슈 경감과 니콜의 관계가 흥미로운데 초반 니콜은 유명한 가마슈 경감과 함께 일하게 되어 기뻐하지만 후반에 가서는 갈수록 일으키는 불협화음으로 인해 예상과는 달리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니콜은 뭔가 자기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버렸음에 기막혀 하는데 이처럼 루이자 페인이 '스리 파인즈'에 이리저리 얽힌 관계들을 통하여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그 '변화'다. 

  이렇게 보면 그녀가 왜 하필 제목을 정물화라는 뜻인 '스틸 라이프'로 했는지도 이해가 된다. 아시다시피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잔은 과히 '정물화'를 통해 현대미술 자체를 탄생시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같은 사과를 100번도 넘게 그리곤 했는데 그것은 모두 순간 순간 흩어져 버리는 '진실'을 그림 속에 붙잡아두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그는 하나의 시간 밖에는 간직할 수 없는 그림에다 그 '시간'이라는 흐름 자체를 담으려 했던 것이다. 바로 그렇게 '변화'자체를 2차원적인 평면에다 담으려 했던 것이다. 루이자 페인이 이 소설 '스틸 라이프'를 통해 하고자 하는 것도 세잔이 정물화를 그릴 때 하고자 했던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제목 마저도 '스틸 라이프'인 것이다. 이것은 단적으로 소설 속 가마슈 경감과 유일한 책방 주인 머나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머나는 가마슈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 대다수는 변화에 잘 적응해요. 그게 우리의 생각일 때는 말이죠. 하지만 외부에서 부과되는 변화는 일부 사람들을 일시에 혼란에 빠뜨릴 수 있죠. 알베르 수사가 정곡을 찌른 것 같아요. 인생은 상실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상실에서, 책이 강조하고 있듯이 자유가 나와요.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변화는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고 우리가 적응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행복해질 거에요.(P.204) 

 페인은 이렇게 '스리 파인즈'를 중심으로 얼기설기 엮어지는 관계들을 통해서 변화에 대처하는 그들의 자세를 묘사한다. 그리고 그 모든 대처의 모습들을 제인 닐의 '박람회 날' 그림 처럼 모조리 다 담아내는 것이다. 마치 제목은 정물화 이지만 세잔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브뤼겔을 따르고 있는 듯이 말이다.  

 

 

           브뤼겔의 '십자가를 진 예수' -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는 예수의 역사적인 사건을 그리고 있지만 정작 주가 되어야 할 예수는 어디에 있는지 찾기조차 힘들 지경이다. 개인적으로 페인의 '스틸 라이프'도 이와 마찬가지라 본다. 주가 되어야할 미스터리가 각자가 변화에 대처하는 모습들을 온전히 담아내려 한 까닭에 제대로 그 맛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해져 버렸다. 남은 건 그 모든 마을 사람들의 잔상뿐. 그래서 내게 '스틸 라이프'는 브뤼겔적이다. 

 

  결론지어 말하자면 기대치의 문제다. 그러니까 어떤 기대로 이 책을 잡았느냐에 따라 그 만족도 역시 달라질 것이 틀림없다. 미스터리적 재미를 추구했다면 재미를 좀 보지 못할 것이고 순수하게 문학적 읽기의 재미를 추구했다면 감성적이며 섬세한 묘사에다 인물을 묘사하는 솜씨 또한 맛깔나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뭐, 나는 완전 전자의 기대감으로만 읽은 탓에 재미를 못 보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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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over 2011-08-16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틸 라이프가 정물화라는 뜻이었군요...

오드득 2011-08-19 01:04   좋아요 0 | URL
네. 이프리트님 리뷰도 잘 읽었습니다.^ ^
 
데몰리션 엔젤 모중석 스릴러 클럽 28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박진재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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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태어난 사립탐정 장르물은 공황 이후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왔다. 그래도 가장 대표적인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역시 세 명의 작가라 하겠는데, 바로 더쉴 해미트, 레이먼드 챈들러, 로스 맥도널드다.

 더쉴 해미트가 차디차고 냉정하며 타산적인 자본주의적 인간의 전형을 주로 드러낸다면 레이먼드 챈들러는 해미트의 냉정한 관찰자적인 입장을 여전히 유지하긴 하지만 소설에서 범죄로 드러나는 미국 자본주의의 부조리와 그로 인한 고통에 대해 감정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보다 인간적인 색채를 가미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 편 로스 맥도널드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영향 안에서 사건의 무대를 대부분 사회화의 가장 1차적 기관이라 할만한 가정에 국한하여 미국 자본주의에게 팽배한 온갖 모순을 가정 내부의 치정 사건으로 여과하여 보다 집약적으로 드러내었다. 현재 미국에서 나오는 사립탐정물은 대체로 (아마도 어쩌면 지나친 일반화일수도 있겠으나) 이 세 개의 지류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미키 스필레인의 마이크 해머가 더쉴 해미트라면 로렌스 블록의 매튜 스카더나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와 제나로가 레이몬드 챈들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로스 맥도널드의 계승자는? 


  그가 바로 지금 소개하려는 책의 저자인 로버트 크레이스다. 그의 유명한 시리즈 엘비스 콜은 1987년 레이거노믹스가 한창 붕괴되기 시작할 때 등장했다. 30년대의 '공황'이 샘스페이드와 필립 말로우를 태어나게 했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80년대의 위기가 엘비스 콜을 태어나게 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경제적 위기가 닥치면 그 아픔이 가장 절실히 드러나는 곳은 가정이다. IMF 때의 우리나라처럼 2008년 서브프라임의 미국 처럼 그렇게 곳곳에서 경제적 위기에 의해 파탄나는 가정이 속출했다. 때문에 레이먼드 챈들러의 '리틀 시스터'에 감명을 받아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였지만 결국 로스 맥도널드의 뒤를 잇게 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 탓이 아닌가 한다. 사립탐정물이 하나의 '관찰물'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로버트 크레이스는 주로 가정의 변화를 관찰한다고 하겠다.

  내가 여기서 사실은 이 책과 별로 상관도 없는 엘비스 콜 얘기를 하는 까닭은 지금부터 얘기하려는 이 책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즉, 엘비스 콜에서 보여준 로버트 크레이스의 작품 세계의 중심이 어디까지나 '가정'이라는 것이 이해되어야만 앞으로 내가 하게 될 '데몰리션 엔젤'에 대한 리뷰가 다소 설득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근거 같은 것으로써 먼저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2000년에 나온 이 작품, '데몰리션 엔젤'은 크레이스에게 있어 여러모로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87년부터 99년까지 여덟 권의 시리즈로 이어져 왔던 엘비스 콜에게서 벗어난 가장 최초의 '스탠드 얼론'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처음으로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것. 그리고 형사를 주인공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새로운 시도란 종종 관점의 변화 그 자체로 연결되기 마련인데 그가 99년 엘비스 콜 시리즈의 8번째 작품 ‘L.A. Requiem’을 내고 나서 1년도 채 안되어 이 모든 시도를 했던 이유는 뭘까? 그런데 그는 바로 다음 해 2001년에 또 다시 또 하나의 스탠드 얼론 ‘호스티지’를 내어 놓는다.(이 소설은 브루스 윌리스의 주연으로 영화화되어 우리나라에도 개봉된 바 있다.) 이번엔 인질협상가를 주인공으로 조직의 자금을 세탁하고 있던 한 가정의 가장이 관찰의 주 대상이 된다. 그렇게 그는 또 여성에서 남성으로 넘어갔고 ‘아버지’의 문제를 다룬다. 이렇게 하필 L.A. Requiem을 내고나서 두 권의 무대와 무대 속 세계는 공유하지만 전혀 다른 인물들이 나오는 스탠드 얼론을 연속적으로 낸 까닭은 뭘까?  

 

                                            

  L.A. Requiem 얘기를 잠깐 해 보자. 혹시 당신이 조 파이크 팬이라면 이 작품은 무엇보다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작품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엔 조 파이크가 어떻게 자라났는지 그의 어린 시절과 그와 LA경찰이 왜 사이가 안 좋은지 그리고 어쩌다 조 파이크가 그렇게 도통 알 수 없는 남자가 되었는지 그 고통의 근원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그에게도 있었던 여인의 얘기마저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엘비스 콜이 잠깐 잠깐 흘렸던 조 파이크에 대한 얘기들이 궁금했던 분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그런 작품이다. L.A. Requiem은 파이크가 중심이다. 그렇게 하나의 원초적인 남성성에 대한 얘기다. 그렇다면 바로 뒤이어 나온 ‘데몰리션 엔젤’은 바로 그 가정의 또 하나의 동반자로서의 ‘여성성’에 대한 얘기가 아닐까? 아마도 그렇게 전혀 반대의 얘기이기 때문에 크레이스는 그 시점에 무리를 해서라도 그렇게 많은 새로운 시도를 했던 것이 아닐까? 소설을 읽어보면 이 의문들의 대답이 긍정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 최초의 스탠드 얼론 ‘데몰리션 엔젤’은 여주인공 스타키의 상실한 여성성-되찾기의 소설인 것이다. 그러니까 L.A. Requiem, 데몰리션 엔젤, 호스티지. 이 세 작품은 가정을 이루는데 있어 필수적인 자리 하나씩을 각 작품별로 살펴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늘 추구해왔던 ‘가정’에 대한 관심이 보다 넓게 그만큼 깊이 확장된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째서 ‘데몰리션 엔젤’이 스타키의 여성성-되찾기의 소설인지 살펴본다.

  스타키, 그녀는 3년 전에 2분 45초간 죽었었다. 당시에는 폭발물 처리반이었던 그녀는 연인이자 동료인 ‘슈가’와 함께 형편없는 솜씨의 사제폭탄을 해체하러 나섰다. 시시한 농담거리도 안 되는 가벼운 해체 작업이었지만 갑자기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폭탄이 폭발하는 바람에 그의 연인은 죽고 그녀 역시 그렇게 죽었다 간신히 살아났다. 하지만 그 폭발로 상실된 것 연인만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육체에도 파편들이 날아와 그 날의 고통을 아주 깊이 새겨놓았던 것이다. 그것도 주로 ‘여성’을 나타낼 수 있는 부분에. 그래서 그녀는 다시는 수영복을 입지 못한다. 여기서 가장 심하게 다친 곳이 바로 가슴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자신이 가장 잘하고 자기에게 적합하다고 여기는 폭발물 처리반에서 내처져 현재의 CCS로 옮기게 된다. 그러니까 그 폭발은 사실 스타키의 거의 모든 것을 다 가져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폭발’은 그녀에게 엄청난 고통이자 상실로 여전히 남아있다. 이미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삶은 포기했으며 늘 타가메트와 진토닉이 아니면 일상마저 제대로 버텨나가지 못할 수준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내 그 폭발의 순간에 붙잡혀있다. 상처의 극복을 위해서 정신과 의사는 그것과 마주할 용기를 내야한다고 말하지만 스타키는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한다.

  표면상으로 보면 스타키의 고통은 ‘연인의 죽음’ ‘육체에 새겨진 상흔’이랄 수 있겠지만 심층적으로 보자면 그녀를 3년간 그 지독한 고통의 늪으로 빠뜨렸던 것은 바로 그 폭발로 인해 그녀가 ‘여성성’ 자체를 상실했기 때문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크레이스는 여기에 대한 단서를 많이 제공하고 있는데 우선 ‘연인의 죽음’을 보자면 그 연인의 이름이 내내 풀 네임이 아니라 ‘슈거(SUGAR)’로 불린다는 점이 그렇다. 왜 크레이스는 하필 연인의 이름으로 남자의 이름으로는 잘 쓰이지 않는 ‘SUGAR’를 붙였을까? ‘SUGAR’는 보통 여성의 이름으로 많이 등장하는데 이렇게 보자면 스타키가 ‘SUGAR’와의 추억을 떠올리는데 있어 이성적 접촉의 그 어느 한 순간도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거기다 ‘SUGAR’는 프랑스 혈통이다. 미국에서 프랑스는 종종 ‘여성적’인 것으로 여겨지곤 하지 않는가. 무리한 해석일수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을 볼 때 우리에게 가능한 해답 하나는 그 때 그 폭발로 잃어버린 연인 ‘SUGAR’는 일종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타키는 자신의 연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 연인으로 상징되는 여성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육체에 깊이 남겨진 상흔’을 생각하면 더욱 더 그렇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크레이스는 특히 가슴에 난 상처가 가장 깊었다고 일부러 표현까지 하고 있으니까. 거기다 스타키가 3년 만에 처음으로 폭탄을 마주하고 감상을 고백하는 장면은 이러한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한다. 

이것이 그녀가 사랑하는 일의 일부였고 늘 사랑해온 것이었다. 이것이 그녀의 비밀이었다. 폭탄을 만질 때, 손에 폭탄 조각을 들고 있을 때, 손바닥에 조각을 놓고 주먹을 쥘 때 그녀는 폭탄의 일부였다. 폭탄은 퍼즐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볼 수 있는 좀 더 큰 전체의 한 부분이 되었다. 어쩌면 다나의 말이 맞았다. 3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는 폭탄과 단둘이 있게 되었고,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P.197)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헤아림’이다. 즉 스타키에게 있어 폭탄의 해체는 그 만든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인 것이다. 과연 그녀는 폭탄을 해체하면서 미스터 레드가 어떠한 인물인가를 점점 알아간다. 여성성에 대해 섹슈얼리티 이론을 따르든 젠더 이론을 따르든 ‘헤아림’ 혹은 ‘이해’는 그야말로 여성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즉, 그녀가 폭발물 처리반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다시금 그녀가 잃어버린 여성성을 회복하고 싶은 염원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잭 펠과의 로멘스도 단순히 재미만을 위해서 작품에 부가된 것은 아닌 것이다. 펠과의 만남은 스타키가 여성성을 되찾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스타키가 결국 3년전의 그 비극적 사건을 마주하기로 결심하게 되기 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더욱 흥미로워진다. 스타키는 어떻게 그토록 피하려만 들던 3년전의 사건을 마주할 결심을 하게 되었나? 크레이스는 그 과정을 이렇게 풀어간다. 3년 동안 전혀 어떤 남자와도 사귀지 않았던 그녀가 처음으로 자기 집으로 펠을 초대한다. 둘 사이에 저녁 먹고 사건 얘기하는 것 말고는 별 다른 게 오고가진 않는다. 다음 날 스타키는 마직과 함께 찾아낸 테넌트의 비밀 작업장을 찾아 떠난다. 거기서 스타키는 마직의 이런 고백을 듣게 된다. 

  이제 내가 원하는 걸 얘기할게요. 나는 결혼하고 싶어요. 나보다 키 큰 사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원해요. 그 사람이 하루 종일 소파에서 뒹굴고, 내가 맥주를 갖다바쳐야 하고, 새벽 3시에 방귀 소리를 들어야 하더라도 집에 누군가 있었으면 해요. 난 크래커 먹는 두 아이 외에 같이 지낼 사람이 없다는 게 신물이 나요. 젠장 난 그렇게나 결혼하고 싶은데, 애들은 천오백 미터 밖에서 내가 오는 모습을 보고 뛰어와요.(P.248)

 
  그리고 테넌트의 비밀작업장을 찾아가지만 별다른 수확을 얻지는 못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그녀는 그녀가 주문한 3년 전 자신에게 일어났던 그 폭발 장면이 녹화된 비디오 테이프를 돌려볼 결심을 한다. 이 과정을 언뜻 보면 왜 그녀가 그 테이프를 돌려볼 결심을 했는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기엔 아무런 결정적 계기도 없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아직 펠을 깊숙이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테넌트의 작업장에서 별달리 얻은 것도 없다. 그런데 왜 대관절 그녀는 그러한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난 ‘데몰리션 엔젤’에서 그가 보여주는 능수능란한 이야기의 전개 때문에 정말 천재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무엇보다 여기서 그의 천재적인 문학적 역량을 느낀다. 마직은 왜 하필 거기서 그 고백을 했던 것일까? 그녀는 계속해서 두 아이에 대한 저주에 찬 말을 쏟아내는데 왜 그렇게 했던 것일까? 단순한 이야기의 흐름일 뿐이라면 크레이스를 너무도 모르는 말씀이다. 그는 그렇게 허투르게 어떤 에피소드든지 삽입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게 거기 있는 것은 반드기 거기에 있어야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라이프니츠식 우주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중요한 건 마직의 ‘두 아이’이다. 보다 깊은 의미에서 이것이 아직은 독립적이지 못한 그래서 미성숙한 남자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고백 앞과 뒤에 나란히 존재하는 두 남자 펠과 테넌트를 보자. 펠은 이미 한 번 스타키 앞에서 혼절하는 바람에 그녀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사람이다. 그렇게 독자의 눈에 펠은 완벽한 남자라기 보다는 어딘가 보호가 필요한 아이같은 존재로 인지된다. 크레이스는 종종 이것을 강조한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이 정도만 말해둔다.) 그럼, 테넌트는 어떠한가. 크레이스는 재치있게도 이름 자체에서 이미 이 남자가 미성숙한 인물임을 드러낸다. 크레이스가 ‘세입자’라는 이름을 그에게 붙여준 이유는 그가 내내 엄마가 물려준 유산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는 것임을 은연중에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렇게 두 남자 모두 ‘엄마’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마직의 두 아이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문제는 마직의 고백 전엔 스타키는 펠을 집 안으로 받아들였고(집이란 종종 그 주인의 자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는가) 그 후엔 테넌트의 비밀작업장 방문을 통하여 테넌트의 ‘엄마’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말하면 이제 왜 스타키가 그 테이프를 볼 결심을 하게 되는지 이해가 가리라 생각된다. 여기에 크레이스가 은밀히 깔아놓은 연속적인 과정을 눈치챈다면. 그렇다. 이 과정은 연속적이다. 펠을 집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스타키가 엄마가 되는 것을 말함이다. 하지만 그 때 별다른 오고감 없이 스타키는 펠을 몰아낸다. 그것은 그녀가 엄마가 되었지만 아직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 뒤 마직이 고백을 한다. 그 고백을 통해 스타키는 자신이 펠을 받아들였던 그 진정한 의미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방문한 테넌트의 비밀 작업장에서 숨겨졌던 엄마의 존재를 찾아내는 것은 그 깨달음으로 인해 스타키 역시 ‘엄마’로서의 여성성을 자각하게 된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 모든 것이 은밀하지만 연속적으로 스타키에게 여성성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인 ‘모성’을 깨닫게 하는 과정이었으며 때문에 여성성을 회복시키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 자각이 있고나서야 그녀가 그 비디오테이프를 볼 결심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를 반증한다. 그렇게 그녀는 여성성을 회복한다. 더하여 무엇보다 크레이스가 준비한 소설의 결말 자체가 그 모든 여정이 스타키의 여성성 되찾기의 과정이었음을 웅변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자세한 묘사는 생략하고 단적으로 이 상황에 대해 말해주는 슬라보예 지젝의 말을 빌러 표현해 본다. 아마도 읽지 못하신 분들은 아리송하실지라도 이미 읽으신 분들은 그것만으로도 이해가 가실 것이다. 지젝의 이 말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에 나온다. 아닌게 아니라 읽으면서 지젝이 읽으면 좋아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목도 일부러 그렇게 뽑았다. 

여자의 '자리'는 틈새의, 심연의 자리이며, 그 자리는 '남자'가 그것을 채울 때 비가시적이 되는 것이다. (P.115)

 

  리뷰라는 것의 길이의 경제상 이 정도에서 '여성성-되찾기'로서의 '데몰리션 엔젤'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칠까 한다. 보다 많은 이야기가 있어야 하겠지만 그동안 리뷰를 써 온 경험으로 볼 때 너무 길면 아예 시선에서 조차 벗어날 수 있는 위험이 있음을 알게되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시선 속으로 들어가려면 이 정도에서 조금 무모하고 급작스럽더라도 마무리하는게 나을 듯 하다. '데몰리션 엔젤'은 그의 이야기 다루는 솜씨가 어느정도 경지에 이르렀는지 정말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캐릭터를 빗는 솜씨나 독자의 관심을 전환시키는 솜씨 그러면서도 긴장감을 극도록 유지한 채 끌고가는 솜씨가 정말 빛을 발하고 있다. 크레이스의 팬으로서 이번 여름 정말 벗해야할 소설로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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