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몰리션 엔젤 모중석 스릴러 클럽 28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박진재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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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태어난 사립탐정 장르물은 공황 이후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왔다. 그래도 가장 대표적인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역시 세 명의 작가라 하겠는데, 바로 더쉴 해미트, 레이먼드 챈들러, 로스 맥도널드다.

 더쉴 해미트가 차디차고 냉정하며 타산적인 자본주의적 인간의 전형을 주로 드러낸다면 레이먼드 챈들러는 해미트의 냉정한 관찰자적인 입장을 여전히 유지하긴 하지만 소설에서 범죄로 드러나는 미국 자본주의의 부조리와 그로 인한 고통에 대해 감정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보다 인간적인 색채를 가미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 편 로스 맥도널드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영향 안에서 사건의 무대를 대부분 사회화의 가장 1차적 기관이라 할만한 가정에 국한하여 미국 자본주의에게 팽배한 온갖 모순을 가정 내부의 치정 사건으로 여과하여 보다 집약적으로 드러내었다. 현재 미국에서 나오는 사립탐정물은 대체로 (아마도 어쩌면 지나친 일반화일수도 있겠으나) 이 세 개의 지류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미키 스필레인의 마이크 해머가 더쉴 해미트라면 로렌스 블록의 매튜 스카더나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와 제나로가 레이몬드 챈들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로스 맥도널드의 계승자는? 


  그가 바로 지금 소개하려는 책의 저자인 로버트 크레이스다. 그의 유명한 시리즈 엘비스 콜은 1987년 레이거노믹스가 한창 붕괴되기 시작할 때 등장했다. 30년대의 '공황'이 샘스페이드와 필립 말로우를 태어나게 했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80년대의 위기가 엘비스 콜을 태어나게 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경제적 위기가 닥치면 그 아픔이 가장 절실히 드러나는 곳은 가정이다. IMF 때의 우리나라처럼 2008년 서브프라임의 미국 처럼 그렇게 곳곳에서 경제적 위기에 의해 파탄나는 가정이 속출했다. 때문에 레이먼드 챈들러의 '리틀 시스터'에 감명을 받아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였지만 결국 로스 맥도널드의 뒤를 잇게 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 탓이 아닌가 한다. 사립탐정물이 하나의 '관찰물'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로버트 크레이스는 주로 가정의 변화를 관찰한다고 하겠다.

  내가 여기서 사실은 이 책과 별로 상관도 없는 엘비스 콜 얘기를 하는 까닭은 지금부터 얘기하려는 이 책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즉, 엘비스 콜에서 보여준 로버트 크레이스의 작품 세계의 중심이 어디까지나 '가정'이라는 것이 이해되어야만 앞으로 내가 하게 될 '데몰리션 엔젤'에 대한 리뷰가 다소 설득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근거 같은 것으로써 먼저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2000년에 나온 이 작품, '데몰리션 엔젤'은 크레이스에게 있어 여러모로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87년부터 99년까지 여덟 권의 시리즈로 이어져 왔던 엘비스 콜에게서 벗어난 가장 최초의 '스탠드 얼론'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처음으로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것. 그리고 형사를 주인공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새로운 시도란 종종 관점의 변화 그 자체로 연결되기 마련인데 그가 99년 엘비스 콜 시리즈의 8번째 작품 ‘L.A. Requiem’을 내고 나서 1년도 채 안되어 이 모든 시도를 했던 이유는 뭘까? 그런데 그는 바로 다음 해 2001년에 또 다시 또 하나의 스탠드 얼론 ‘호스티지’를 내어 놓는다.(이 소설은 브루스 윌리스의 주연으로 영화화되어 우리나라에도 개봉된 바 있다.) 이번엔 인질협상가를 주인공으로 조직의 자금을 세탁하고 있던 한 가정의 가장이 관찰의 주 대상이 된다. 그렇게 그는 또 여성에서 남성으로 넘어갔고 ‘아버지’의 문제를 다룬다. 이렇게 하필 L.A. Requiem을 내고나서 두 권의 무대와 무대 속 세계는 공유하지만 전혀 다른 인물들이 나오는 스탠드 얼론을 연속적으로 낸 까닭은 뭘까?  

 

                                            

  L.A. Requiem 얘기를 잠깐 해 보자. 혹시 당신이 조 파이크 팬이라면 이 작품은 무엇보다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작품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엔 조 파이크가 어떻게 자라났는지 그의 어린 시절과 그와 LA경찰이 왜 사이가 안 좋은지 그리고 어쩌다 조 파이크가 그렇게 도통 알 수 없는 남자가 되었는지 그 고통의 근원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그에게도 있었던 여인의 얘기마저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엘비스 콜이 잠깐 잠깐 흘렸던 조 파이크에 대한 얘기들이 궁금했던 분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그런 작품이다. L.A. Requiem은 파이크가 중심이다. 그렇게 하나의 원초적인 남성성에 대한 얘기다. 그렇다면 바로 뒤이어 나온 ‘데몰리션 엔젤’은 바로 그 가정의 또 하나의 동반자로서의 ‘여성성’에 대한 얘기가 아닐까? 아마도 그렇게 전혀 반대의 얘기이기 때문에 크레이스는 그 시점에 무리를 해서라도 그렇게 많은 새로운 시도를 했던 것이 아닐까? 소설을 읽어보면 이 의문들의 대답이 긍정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 최초의 스탠드 얼론 ‘데몰리션 엔젤’은 여주인공 스타키의 상실한 여성성-되찾기의 소설인 것이다. 그러니까 L.A. Requiem, 데몰리션 엔젤, 호스티지. 이 세 작품은 가정을 이루는데 있어 필수적인 자리 하나씩을 각 작품별로 살펴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늘 추구해왔던 ‘가정’에 대한 관심이 보다 넓게 그만큼 깊이 확장된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째서 ‘데몰리션 엔젤’이 스타키의 여성성-되찾기의 소설인지 살펴본다.

  스타키, 그녀는 3년 전에 2분 45초간 죽었었다. 당시에는 폭발물 처리반이었던 그녀는 연인이자 동료인 ‘슈가’와 함께 형편없는 솜씨의 사제폭탄을 해체하러 나섰다. 시시한 농담거리도 안 되는 가벼운 해체 작업이었지만 갑자기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폭탄이 폭발하는 바람에 그의 연인은 죽고 그녀 역시 그렇게 죽었다 간신히 살아났다. 하지만 그 폭발로 상실된 것 연인만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육체에도 파편들이 날아와 그 날의 고통을 아주 깊이 새겨놓았던 것이다. 그것도 주로 ‘여성’을 나타낼 수 있는 부분에. 그래서 그녀는 다시는 수영복을 입지 못한다. 여기서 가장 심하게 다친 곳이 바로 가슴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자신이 가장 잘하고 자기에게 적합하다고 여기는 폭발물 처리반에서 내처져 현재의 CCS로 옮기게 된다. 그러니까 그 폭발은 사실 스타키의 거의 모든 것을 다 가져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폭발’은 그녀에게 엄청난 고통이자 상실로 여전히 남아있다. 이미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삶은 포기했으며 늘 타가메트와 진토닉이 아니면 일상마저 제대로 버텨나가지 못할 수준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내 그 폭발의 순간에 붙잡혀있다. 상처의 극복을 위해서 정신과 의사는 그것과 마주할 용기를 내야한다고 말하지만 스타키는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한다.

  표면상으로 보면 스타키의 고통은 ‘연인의 죽음’ ‘육체에 새겨진 상흔’이랄 수 있겠지만 심층적으로 보자면 그녀를 3년간 그 지독한 고통의 늪으로 빠뜨렸던 것은 바로 그 폭발로 인해 그녀가 ‘여성성’ 자체를 상실했기 때문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크레이스는 여기에 대한 단서를 많이 제공하고 있는데 우선 ‘연인의 죽음’을 보자면 그 연인의 이름이 내내 풀 네임이 아니라 ‘슈거(SUGAR)’로 불린다는 점이 그렇다. 왜 크레이스는 하필 연인의 이름으로 남자의 이름으로는 잘 쓰이지 않는 ‘SUGAR’를 붙였을까? ‘SUGAR’는 보통 여성의 이름으로 많이 등장하는데 이렇게 보자면 스타키가 ‘SUGAR’와의 추억을 떠올리는데 있어 이성적 접촉의 그 어느 한 순간도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거기다 ‘SUGAR’는 프랑스 혈통이다. 미국에서 프랑스는 종종 ‘여성적’인 것으로 여겨지곤 하지 않는가. 무리한 해석일수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을 볼 때 우리에게 가능한 해답 하나는 그 때 그 폭발로 잃어버린 연인 ‘SUGAR’는 일종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타키는 자신의 연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 연인으로 상징되는 여성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육체에 깊이 남겨진 상흔’을 생각하면 더욱 더 그렇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크레이스는 특히 가슴에 난 상처가 가장 깊었다고 일부러 표현까지 하고 있으니까. 거기다 스타키가 3년 만에 처음으로 폭탄을 마주하고 감상을 고백하는 장면은 이러한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한다. 

이것이 그녀가 사랑하는 일의 일부였고 늘 사랑해온 것이었다. 이것이 그녀의 비밀이었다. 폭탄을 만질 때, 손에 폭탄 조각을 들고 있을 때, 손바닥에 조각을 놓고 주먹을 쥘 때 그녀는 폭탄의 일부였다. 폭탄은 퍼즐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볼 수 있는 좀 더 큰 전체의 한 부분이 되었다. 어쩌면 다나의 말이 맞았다. 3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는 폭탄과 단둘이 있게 되었고,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P.197)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헤아림’이다. 즉 스타키에게 있어 폭탄의 해체는 그 만든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인 것이다. 과연 그녀는 폭탄을 해체하면서 미스터 레드가 어떠한 인물인가를 점점 알아간다. 여성성에 대해 섹슈얼리티 이론을 따르든 젠더 이론을 따르든 ‘헤아림’ 혹은 ‘이해’는 그야말로 여성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즉, 그녀가 폭발물 처리반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다시금 그녀가 잃어버린 여성성을 회복하고 싶은 염원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잭 펠과의 로멘스도 단순히 재미만을 위해서 작품에 부가된 것은 아닌 것이다. 펠과의 만남은 스타키가 여성성을 되찾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스타키가 결국 3년전의 그 비극적 사건을 마주하기로 결심하게 되기 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더욱 흥미로워진다. 스타키는 어떻게 그토록 피하려만 들던 3년전의 사건을 마주할 결심을 하게 되었나? 크레이스는 그 과정을 이렇게 풀어간다. 3년 동안 전혀 어떤 남자와도 사귀지 않았던 그녀가 처음으로 자기 집으로 펠을 초대한다. 둘 사이에 저녁 먹고 사건 얘기하는 것 말고는 별 다른 게 오고가진 않는다. 다음 날 스타키는 마직과 함께 찾아낸 테넌트의 비밀 작업장을 찾아 떠난다. 거기서 스타키는 마직의 이런 고백을 듣게 된다. 

  이제 내가 원하는 걸 얘기할게요. 나는 결혼하고 싶어요. 나보다 키 큰 사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원해요. 그 사람이 하루 종일 소파에서 뒹굴고, 내가 맥주를 갖다바쳐야 하고, 새벽 3시에 방귀 소리를 들어야 하더라도 집에 누군가 있었으면 해요. 난 크래커 먹는 두 아이 외에 같이 지낼 사람이 없다는 게 신물이 나요. 젠장 난 그렇게나 결혼하고 싶은데, 애들은 천오백 미터 밖에서 내가 오는 모습을 보고 뛰어와요.(P.248)

 
  그리고 테넌트의 비밀작업장을 찾아가지만 별다른 수확을 얻지는 못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그녀는 그녀가 주문한 3년 전 자신에게 일어났던 그 폭발 장면이 녹화된 비디오 테이프를 돌려볼 결심을 한다. 이 과정을 언뜻 보면 왜 그녀가 그 테이프를 돌려볼 결심을 했는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기엔 아무런 결정적 계기도 없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아직 펠을 깊숙이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테넌트의 작업장에서 별달리 얻은 것도 없다. 그런데 왜 대관절 그녀는 그러한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난 ‘데몰리션 엔젤’에서 그가 보여주는 능수능란한 이야기의 전개 때문에 정말 천재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무엇보다 여기서 그의 천재적인 문학적 역량을 느낀다. 마직은 왜 하필 거기서 그 고백을 했던 것일까? 그녀는 계속해서 두 아이에 대한 저주에 찬 말을 쏟아내는데 왜 그렇게 했던 것일까? 단순한 이야기의 흐름일 뿐이라면 크레이스를 너무도 모르는 말씀이다. 그는 그렇게 허투르게 어떤 에피소드든지 삽입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게 거기 있는 것은 반드기 거기에 있어야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라이프니츠식 우주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중요한 건 마직의 ‘두 아이’이다. 보다 깊은 의미에서 이것이 아직은 독립적이지 못한 그래서 미성숙한 남자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고백 앞과 뒤에 나란히 존재하는 두 남자 펠과 테넌트를 보자. 펠은 이미 한 번 스타키 앞에서 혼절하는 바람에 그녀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사람이다. 그렇게 독자의 눈에 펠은 완벽한 남자라기 보다는 어딘가 보호가 필요한 아이같은 존재로 인지된다. 크레이스는 종종 이것을 강조한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이 정도만 말해둔다.) 그럼, 테넌트는 어떠한가. 크레이스는 재치있게도 이름 자체에서 이미 이 남자가 미성숙한 인물임을 드러낸다. 크레이스가 ‘세입자’라는 이름을 그에게 붙여준 이유는 그가 내내 엄마가 물려준 유산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는 것임을 은연중에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렇게 두 남자 모두 ‘엄마’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마직의 두 아이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문제는 마직의 고백 전엔 스타키는 펠을 집 안으로 받아들였고(집이란 종종 그 주인의 자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는가) 그 후엔 테넌트의 비밀작업장 방문을 통하여 테넌트의 ‘엄마’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말하면 이제 왜 스타키가 그 테이프를 볼 결심을 하게 되는지 이해가 가리라 생각된다. 여기에 크레이스가 은밀히 깔아놓은 연속적인 과정을 눈치챈다면. 그렇다. 이 과정은 연속적이다. 펠을 집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스타키가 엄마가 되는 것을 말함이다. 하지만 그 때 별다른 오고감 없이 스타키는 펠을 몰아낸다. 그것은 그녀가 엄마가 되었지만 아직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 뒤 마직이 고백을 한다. 그 고백을 통해 스타키는 자신이 펠을 받아들였던 그 진정한 의미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방문한 테넌트의 비밀 작업장에서 숨겨졌던 엄마의 존재를 찾아내는 것은 그 깨달음으로 인해 스타키 역시 ‘엄마’로서의 여성성을 자각하게 된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 모든 것이 은밀하지만 연속적으로 스타키에게 여성성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인 ‘모성’을 깨닫게 하는 과정이었으며 때문에 여성성을 회복시키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 자각이 있고나서야 그녀가 그 비디오테이프를 볼 결심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를 반증한다. 그렇게 그녀는 여성성을 회복한다. 더하여 무엇보다 크레이스가 준비한 소설의 결말 자체가 그 모든 여정이 스타키의 여성성 되찾기의 과정이었음을 웅변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자세한 묘사는 생략하고 단적으로 이 상황에 대해 말해주는 슬라보예 지젝의 말을 빌러 표현해 본다. 아마도 읽지 못하신 분들은 아리송하실지라도 이미 읽으신 분들은 그것만으로도 이해가 가실 것이다. 지젝의 이 말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에 나온다. 아닌게 아니라 읽으면서 지젝이 읽으면 좋아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목도 일부러 그렇게 뽑았다. 

여자의 '자리'는 틈새의, 심연의 자리이며, 그 자리는 '남자'가 그것을 채울 때 비가시적이 되는 것이다. (P.115)

 

  리뷰라는 것의 길이의 경제상 이 정도에서 '여성성-되찾기'로서의 '데몰리션 엔젤'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칠까 한다. 보다 많은 이야기가 있어야 하겠지만 그동안 리뷰를 써 온 경험으로 볼 때 너무 길면 아예 시선에서 조차 벗어날 수 있는 위험이 있음을 알게되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시선 속으로 들어가려면 이 정도에서 조금 무모하고 급작스럽더라도 마무리하는게 나을 듯 하다. '데몰리션 엔젤'은 그의 이야기 다루는 솜씨가 어느정도 경지에 이르렀는지 정말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캐릭터를 빗는 솜씨나 독자의 관심을 전환시키는 솜씨 그러면서도 긴장감을 극도록 유지한 채 끌고가는 솜씨가 정말 빛을 발하고 있다. 크레이스의 팬으로서 이번 여름 정말 벗해야할 소설로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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