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불길했던 전조는 전작의 무대가 '교차로'였다는 데서 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절대 만나서는 아니 될, 그렇게 영원히 평행이어야 할 두 세계가 문득 루크레티우스의 빗방울 처럼 만나게 되는 장소, 교차로. 때문에 옛사람들이 교차로를 그리 상서롭지 못한 곳으로 여긴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승과 저승이 만나는 곳.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의 세계로 건너올 수 있는 곳. 따라서 로마의 탈영병들은 가장 불길한 것의 상징이었던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했음은(탈영병은 더이상 로마 사회에서 산자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십자가 형이란 이미 죽은 자인 그들을 그들의 고향으로 보내준다는 의미가 강했다.) 당연했다. 로버트 존슨이 악마를 만나 락을 탄생시킨 것도 '교차로' 였다. 아니 그 이전부터 교차로는 자주 사람들에게 악마가 출몰하는 장소로 믿어졌다. 현재 미드 슈퍼내추럴에서 딘과 샘이 교차로에서 악마를 소환해 만나는 것도 단순히 로버트 존슨만의 일화를 가져온 것만은 아니란 얘기다. 그렇게 교차로란 융 식으로 원형적으로 불길한 장소이다. 하지만 그 '불길함'은 대체 어디서 연유하는 것인가? 메리 더글러스는 언젠가의 글에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정체성의 변화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녀는 그것을 '머리카락'을 들어 이렇게 설명한다.
머리카락은신체의 일부일 때는 머릿기름을 바르고, 빗고, 매우 정성들여 치장하는 등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지만 일단 잘려나가자마자 '쓰레기'가 되며 명시적이고 의식적으로... 대변, 소변, 정액, 땀 등의 오염 물질과 연결된다.
사람의 몸에 있었을 때와 떨어져 나갔을 때 이렇게 머리카락이 완전히 극단의 다른 대접을 받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것이 바로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많은 문화권에서 머리 모양을 바꾸는 것은 하나의 정체성에서 다른 정체성으로 넘어가는 통과의례의 바꿀 수 없는 부분(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p.51))으로 여겨져 왔다. 그렇게 떨어진 머리카락을 우리가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우리가 버렸던 과거의 정체성의 잔여물이기 때문인 것이다. 메리 더글러스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으로 인한 소멸이 아니라 그렇게 없는 상태로 바뀌는 그 '자체'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글러스의 말을 따른다면 교차로에서 느껴지는 저 '불길함'의 정체는 아마도 우리의 정체성을 바꾸려 위협하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심농의 '교차로의 밤'에서 교차로가 주는 불길함은 그저 사건이 거기서 일어나서가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어떤 변화가 엄습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가 바로 정체성에 타격을 줄 것임을 은밀히 발언하는 것이다. 과연, 거기서 매그레는 낮 동안 억압되어 있던 한 여인을 만난다.(여기서 제목의 '밤'이 에고(낮)의 장악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현실로 뛰쳐나오는 '이드'의 시간을 말하는 프로이트적 의미임은 굳이 따로 말하지 않아도 무방할 것이다.)
WHO'S THAT GIRL?
세익스피어에게 '여성'이란 기억의 존재였다. 왕이 숨기고 싶은 진실을, 사회가 은폐시키고 싶은 죄를, 역사가 지우고 싶어하던 비극을 세익스피어의 여성들은 때로는 그 마음에 때로는 그 몸에 새기고 있던 기억의 존재였다. 그래서 그녀들은 남자들에게 소유의 대상이었으며 심판의 거울이었다. 거트루드는 클로디어스에겐 자신의 안전을 위해 반드시 곁에 두어야 할 기억이지만, 햄릿에게는 심판을 위해 소환시켜야 할 기억인 것이다.
심농의 '교차로의 밤'을 영화로 만들었던 장 르느와르에 이르면 여성은 이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애시당초 자신의 부인을 영화배우로 출연시키기 위해 영화 감독이 된 그답게 여성은 애정의 대상이지 세익스피어 처럼 소유나 망집의 대상이 아니다. 사랑은 무엇보다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고 믿는 르느와르는 '교차로의 집'에서도 그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뛰어난 편집을 보여주는 '교차로의 밤'에서 르느와르가 특히 공을 들이는 것은 교차로에 있는 세 집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때로 그는 한 집씩 차례로 번갈아가며 보여주는 걸 즐겨하는데 거기서 그가 나타내고 싶은 것은 그 집 하나하나가 당시 프랑스 계급을 상징토록 관객에게 느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교차로의 집들을 통하여 귀족 계급, 신흥 부르조아 계급,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담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 집에 기거하는 여성들에 대한 묘사다. 거기서 르느와르는 여성이 그 각 계급이 속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이 되도록 만든다. 무엇보다 그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은 바로 여성들의 옷차림이다. 르느와르는 계산적으로 하층 계급으로 내려갈 수록 옷의 노출이 점점 커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귀족이나 신흥 부르조아지 여성들은 옷으로 전신을 감싼 채 등장한다. 그네들의 살결은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혹은 그 아래일 수록 그 드러나는 살결의 부분은 훨씬 많아진다. 이 모든 것을 통한 르느와르의 발언은 명확하다. 여기서 '옷'이란 바로 개인의 자유를 가두는 사회의 인습, 규율, 억압의 상징인 것이다. 그럼으로 노출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더 자유롭다는 의미인 것이다. 때문에 르느와르는 '교차로의 밤' 후반 가장 중요한 장면인 매그레와 엘세의 장면에서 지금까지 해 온 것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거기서 엘세는 소설과는 달리 거의 벗거나 혹은 속옷만 입은 모습으로 매그레에게 담담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르느와르는 비로소 매그레와 엘세과 공감가능한 대등한 인간관계가 되었다는 듯이 같은 크기로 화면에 담는다. 둘 사이는 더이상 수사관과 용의자가 아닌 것 같다. 사실 보면서도 지금 매그레가 하고 있는 것이 수사인지 아님 연애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장 르느와르의 '교차로의 밤'은 심농의 그것보다 보다 더 급진적으로 사회 비판을 가하기 때문에 이렇게 보면 르느와르는 엘세를 마치 들라크루아의 프랑스혁명을 이끄는 여신과 거의 비슷한 이미지로 연출하고 있음도 느끼게 된다. 르느와르에게 있어 여성은 이렇다. 그녀는 자유로 이끄는 존재다. 그럼으로써 사람을 진정 해방시키는 존재다. 그 벽창호 같은 매그레의 마음 마저 허물어뜨릴 정도로...
- 장 르느와르의 영화 '교차로의 밤' 중에서
그렇다면, 심농은?
교차로는 단순히 프랑스 자체를 모두 담기위해 선택된 공간만은 아니었다. 심농이 일부러 교차로를 무대로 삼은 것은 어쩌면 그 '불길함'을 강조하기 위한 의미일 수도 있다. 메리 더글러스에 따르면 그 불길함은 바로 정체성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누구의 정체성의 그토록 위협을 당하기에 심농은 특별하게 '교차로'를 그 무대로 삼았던 것일까? 답은 물론 소설 자체에 나와있다. 바로 '매그레'인 것이다. 우리는 엘세를 대면하는 매그레에게 뭔가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는 듯한 낌새를 불현듯 느낀다. 어쩌면 개인적인 느낌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장 르느와르의 영화를 보고 그렇게 느낀 것이 나만은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매그레의 포커 페이스는 제대로 그 속내를 보여주고 있지 않으나 우리(나와 장 르느와르)는 분명 그의 눈빛으로 뭔가 유혹을 받고 있음을 느낀다. 누가 굳어진 중년의 마음에 촉촉한 단비를 뿌리고 있는가? 그건 바로 '엘세(Else)'다. ELSE... 이 얼마나 재치있는 작명인가? 프랑스에서 여성을 가리키는 ELLE에서 'L' 하나만 'S'로 바꾼, 거기다 영어로는 '다른'이란 뜻마저 가지고 있는. 그러니까 심농은 이미 이름에서 그 의도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즉 '엘세'는 하나의 개체의 이름인 고유명사가 아니라 융의 '아니마'와도 같이 여성 자체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인 것이다. 바로 그 '여성성'과의 근접 조우 상태에서 매그레는 흔들리는 것이다. 즉 그는 유혹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심농에게 있어 여성은 유혹의 존재로 나타난다. 그야말로 뱃사람을 노래로 홀려 익사시켰던 그 유혹의 '세이렌'인 것이다.
'세이렌의 유혹' 이라는 기표
그것은 매그레에게 어떤 유혹으로 다가오는가? '교차로의 밤'에서 우리는 그 정체를 똑똑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네델란드 살인사건'에서 심농은 그 유혹의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생폴링앵에 지다'에서 그 자신의 죄를 고백했듯이 이번에는 자신의 삶 속에 끈질기게 남아있던 그 유혹(심농은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에게 만 명의 여자와 관계를 가졌다고 고백한적이 있었다.)의 정체에 대해서 고백한다. 아마도 그 때문에 '생폴리앵에 지다'에서 문득 벨기에로 소환당했듯이, '네델란드 살인사건'에서도 더 북쪽의 네델란드로 역시나 불현듯이 소환당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도 파리에서 최북단 '델프제일'로. 언어도 통하지 않고 완벽하게 고립된 그 곳에서 매그레는 그와 똑같이 사회로 부터 고립된 채 바다로 향한 열망을 억누르고 숨죽이며 살아야했던 '포핑아'라는 남자의 존재와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열망은 그리 오래 잠들어있지 못했는데 그건 젊은 여자 리번스의 유혹 때문이었다. 그녀는 포핑아에게 내내 자신을 데리고 여기에서 달아나 달라고 조른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기묘한 점 하나를 보게 된다. '포핑아와 리번스'의 관계가 어쩐지 '교차로의 밤'에서 '매그레와 엘세'의 관계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중년의 남자와 젊은 여자의 교제라서만은 아니다. 그 보다는 '엘세'와 '리번스'라는 기표가 가지는 의미 때문이다. 물론 '엘세'는 심농의 소설이 아닌 장 르느와르의 영화에서 나타난 '엘세'이다. 그녀의 기표와 '리번스'의 기표는 사실 동일하다. 모두 자유 혹은 해방의 상징인 것이다. 즉 장 르느와르에서 엘세가 매그레를 그가 가진 사회적 굴레로 부터 빠져나오게 만드는 역할을 하듯이, 리번스 역시 포핑아에게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기표인데도 장 르느와르와 심농은 서로 그 기표를 다르게 받아들인다. 장 르느와르는 그걸 그대로 '자유 혹은 해방'의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심농은 그것을 '유혹'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르느와르는 다가오는 엘세를 피카소의 '해변을 달리는 두 여인' 처럼 기꺼이 맞아들이지만 심농은 주저한다. 그는 선뜻 리번스의 손을 잡지 않는다. 그는 뒤로 물러서며 거기서 서성인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것이 옳은 길인가? 그 너머에서 계속 세이렌의 고혹적인 노래 소리는 들려오지만 그는 기둥에 단단히 결박당한 오디세우스 처럼 거기로 움직이지 못한다. 아니, 그는 오디세우스가 그랬듯이 붙들려 있고 싶어한다. 그 기둥에. 그가 단단히 결박되어 있는 기둥이 바로 '일상'인 것이다.
전작 '생폴리앵에 지다'에서 원죄 처럼 가지고 있는 한 죽음에 대한 죄의식으로 부터 달아나기 위해 기꺼이 맞아들였던 '일상'이라는 것이 이렇게 또 다시 나타난다. 바로 이 ('생폴리앵에 지다'에서 비롯되어진) '일상'에 대해 결박되고 싶은 욕망 때문에 심농은 르느와르 처럼 유혹에 있는 그대로 몸을 맡기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애시당초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일상은 남들과 똑같이 그저 단순하게 영위하게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과거의 죄책감으로 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애써 취하려 연거푸 들이켜 부었던 꼬낙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선택이 아니라 차라리 열망이라고 해야 옳다. 살기 위해서 그는 일상의 갑옷을 입은 것이다. 생존을 위한 열망은 아무래도 꿈을 위한 열망 보다는 그 크기와 지속면에서 압도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심농은 모든 걸 접었다. 포핑아도 그랬다. 하지만 결국 포핑아는 살해 당한다. 그가 그토록 머무려고 했었던 집에 조차 들어가지 못한 채. 그가 죽은 것은 결국 그가 유혹에 굴복당했기 때문이었다. 세이렌의 노래 소리에 그가 결박을 풀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이것이 과연 정말 살인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왜일까? 심농의 무의식에 흐르는 하나의 진실을 알게 된 지금 혹시 자신의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포핑아를 더 큰 유혹이 되기 전에 심농 스스로 '살인'을 빙자하여 지워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인가... 아무래도 이건 진실일 것이다. 포핑아는 아마도 정말은 심농에 의해서 살해당했을 것이다. 그렇게 매그레는 처음 부터 범인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내내 반복하는 말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는 정말 그대로의 진실이 아닐까! 그는 그렇게 해서 창조주의 살인을 짐짓 눈감아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매그레가 바보가 되어야 했을 만큼 유혹은 그토록 치명적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를 우리는 그 다음 작품 '선원의 약속'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선원의 약속'은 유혹이 얼마나 치명적이며 또한 파괴적인지 그래서 거기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단단히 스스로를 그 일상이라는 기둥에다 결박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것은 '누런개'에서 발아되어 '교차로의 밤'에서 성장하여 이제 '네델란드 살인사건'에서 불현듯 '세이렌의 섬'으로 떠올라 버린 그렇게 해서 스스로에게 하나의 커다란 유혹이 되어버린 '여성'이라는 기표에 관하여 심농 스스로 그것에 더욱 더 저항하고 일상에 자신을 단단히 결박하기 위하여 만든, 일종의 자기 방어용 작품이다. '선원의 약속'은 놀랍도록 감성에 차 있고 한 편으론 남성의 우울 마저 진하게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지만 그 근저에 흐르는 것은 유혹에 대한 경계다. 그 경계심이 하도 커서 어쩐지 '선원의 약속' 표지 처럼 커다란 닻을 자신이 지금 딛고 서 있는 일상의 바닥에다 꽂아두려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는 매그레의 아내 마저 등장시켜 일상의 틀을 더욱 견고히 하려 한다. 하지만 그의 무의식의 한 켠은 내내 스스로에게 보내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와 유사한 관계들이 이그러지고 깨어짐을 통해 그것들이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끊임없이 속삭인다. 때문에 주 배경이 '바닷가 해안'이 되는 것은 정말 상징적이다. 심농이 그 아무리 커다란 닻을 일상에다 박아두고 싶어도 그야말로 '경계'의 공간. 늘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뛰어들지도 못하고 머무르지도 못한다. 세이렌의 노래 소리는 끊이지 않고 결박한 끈은 언제까지 튼튼하게 있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늘 갈망을 커다란 성게 마냥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 하는 상태. 그 진퇴양난... 하지만 지금 나는 매그레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심농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 틀렸다. 난 지금 당신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인 당신을. '누런개'에서 '선원의 약속'까지 당신이 읽었다면 당신도 보게되었을 것이다. '포핑아'에게서도 그 배, 오세앙호의 선장에게서도, 르 클랭슈에게서도 그리고 그 모든 것에서 씁쓸히 자신의 분신들을 음미하는 매그레에게서도 바로 그들과 똑같은 갈망과 번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당신 자신의 모습을. 그렇다. 이건 남의 얘기가 아니다. 바로 당신의 얘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