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풀 다크니스 -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3-2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3
캐미 가르시아.마거릿 스톨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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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의 '뷰티풀' 4부작중 두번째 작품인 '뷰티풀 다크니스'는 상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주인공 커플인 이선과 리나가 자신이 껴안아버린 상실을 어떻게 딛고 이겨나가는지 거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선은 어머니를 잃었고 리나는 메이컨을 잃었다. 이선의 어머니는 이선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빛과도 같은 존재였고 그건 리나에게 메이컨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삶의 길을 환하게 밝혀주는 빛과도 같은 존재들을 이선과 리나는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2부의 제목이 '다크니스'인 것이다.

 

 그렇게 사라져 버린 빛... 어디로 가야할지 분명히 보여주는 그 빛이 사라지고 그들의 여정에 어둠이 찾아온 것이다. 홀로 밝혀진 빛을 안심하고 따라가던 사람들이 막상 그 빛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자신이 지금 디디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 길이 없어 혼란스러울 것이고 이제 어디로 가야 제대로 가게 될지를 몰라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렇게 빛의 사라짐은 미래만이 아니라 현재마저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리고 그렇게 드리워진 어둠의 장막 아래에서 어둠 속에서 미로를 헤메이는 자가 늘 의혹과 불안속에 가까스로 선택을 하듯이 그렇게 모든 관계를, 모든 상황을 판단해야 한다.

 

 '뷰티플 다크니스'는 바로 그러한 혼돈과 불안의 여정이다.

 

 요즘은 영 어덜트 판타지가 대세이다. 얼마전 개봉한 '헝거게임'도 그렇고 이미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트와일라잇'도 그렇다. 갑자기 이렇게 십대들을 주인공으로 한 판타지가 인기를 끌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여기엔 어떤 미국의 역사적 경험이 큰 워인이 된 것 같다. 즉 정치적으로는 2001년에 세계무역선터가 테러를 당해 붕괴된 9.11 사태 때문이고 경제적으로는 2008년의 서브프라임으로 초래된 금융위기가 그 원인인 것 같다. '왜 하필이면 이 두 개인가?'라고 묻는다면 보다 궁극적으로 이 두 사건이 모두 그 때까지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가 끝났다'라는 선언아래 그 무엇보다 우월하고 안정적으로 구가되고 있던 체제가 더 이상 확실하다거나 믿을만한 것이 아님을 미국인들에게 깨닫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두 사건으로 인해 문득 미국인들은 자신이 디디고 서 있는 땅이 단단한 대지가 아니라 속으로 자꾸만 무너지고 있는 모래 늪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넘쳐나는 불확실성 앞에서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모든 확실한 것들은 대기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고 이제는 그 어디서도 현실을 굳건히 지탱해 줄 반석을 찾을 수 없다는 불안만이 남은 것이다. 아마도 바로 그 불안의 징후를 영 어덜트 판타지들이 제대로 잡아내고 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인기를 얻고 있는게 아닐까 싶다.

 

 

 이것은 주로 영 어덜트 판타지들이 디스토피아를 주 무대로 가져온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뷰티풀 다크니스'의 저자 케미 가르시아 처럼 교사인 작가의 작품 '매치드'도 전체주의의 디스토피아를 가져왔고 최근에 나온 '퓨어' 역시 대폭발로 멸망해버린 뒤 불구와 기형의 인간들로 넘쳐나는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이 희망이라곤 전혀 찾아볼 길 없는 디스토피아에서 유일하게 구원의 빛을 가져오는 존재들은 주로 십대들이 맡게 되는데 그래서 이 디스토피아는 어른들이 망쳐버린 지금의 현실 자체를 은유한다고 볼 수 있으며 십대들이 주로 구원의 존재가 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기성세대의 가치관이 아닌 새로운 세대의 가치관으로서만이 이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타개해나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인 것 같다. 문제는 이 구원의 존재들이 보여주는 행태가 주로 타자에의 포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영 어덜트 판타지에서 강조하는 것은 나와는 전혀 다른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타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노력만이 지금 이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선언이다.

 

 이러한 타자의 받아들임은 '뷰티풀 다크니스'의 전작 '뷰티풀 크리쳐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던 주제이기도 하다. 거기서 미국 남부의 폐쇄된 마을 '개틀린'에서 전혀 낯선 존재인 리나를 이선은 유일하게 받아들이는 존재가 되는데 작가들은 의미심장하게도 늘 자유를 찾아 개틀린을 떠나고 싶어했던 이선의 꿈이 비로서 리나라는 완전히 낯선 존재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지게 만든다. 즉 그 리나로 인해 개틀린이 이선이 생각해왔던 대로 옛날부터 하나도 변하지 않은 단일의 고정적인 공간이 아니라 그 내부에 기이하고도 신비한 비밀을 많이 가지고 있는 그래서 변화무상한 세계의 중심임을 밝혀지는 것이다. 그렇게 '뷰티풀'의 작가 캐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톰은 구원이 여기가 아닌 저기 그렇게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타자를 나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거기에 있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렇게 세계를 바꾸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두되 그 안에서 개인의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이 영 어덜트 판타지에서 보여지는 또 하나의 주류적 경향이라 할 수 있는데 아마도 이 뷰티풀 3부작은 그러한 경향의 대표작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의 작품이 상실을 그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주목된다.

 

 

 

 전작에서 그렇게 사랑했던 이선과 리나는 그 상실로 인해 관계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 더구나 리나는 자신의 빛이었던 메이컨의 죽음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까지 있어서 더욱 혼란을 겪게 된다. 그래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리나는 스스로 어둠이 되려고도 한다. 작가들이 이렇게 상실을 가져오는 것은 디스토피아적 판타지를 그리고 있는 작품들과 어느정도 궤도를 같이 한다. 즉 더 이상 기성세대의 생각들은 새로운 대안을 가져올 수 없다는 확신이다. 이선을 가르쳐온 어머니, 리나를 인도해온 메이컨이 죽는다는 것은 아마도 이 같은 확신을 반영하는게 아닌가 싶다. 즉 이 두 작가가 이번 작품에 상실을 가져온 것은 이선과 리나가 그들만의 힘으로 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올 새로운 빛을 찾게하고자 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상실의 성격이다. 즉 상실은 과연 메워져야만 하는 구멍인 것일까 하는 것이 정작 여기서 물어야 할 질문이다.

 

 이 상실은 이선에게 그리고 리나에게 어머니와 메이컨이 다 같이 보다 확실한 것을 보여주는 빛이었다는 점에서 확실성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선과 리나가 그토록 방황하는 것은 바로 이 확실성을 찾고자 함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확실성은 굳이 찾아야만 하는 것일까?

 

  지젝은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라는 책에서 데카르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주체는 오로지 불확실성 위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고 말한적이 있다.  즉 '나는 의심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히치콕의 영화 '의혹'의 여주인공 리나(공교롭게도 이 작품의 여주인공과 이름이 같다. 그래서 특별히 언급한다.)가 남편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의혹과 불신 가운데서도 바로 곁에 그 진실을 확실히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그 확실성이 도래하는 것을 지연시키며 의혹과 불신을 지속시키는 것을  예로 들어 이렇게 설명한다.

 

 "공식적으로" 주체는 필사적으로 확실성을 찾으려고 그를 갉아먹고 있는 의심의 벌레에 대한 치료약을 제공해줄 명백한 해답을 찾으려고 분투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하려고 하는 진정한 재앙은 바로 이 해결이며, 최종적이고도 명백한 해답의 출현이며 바로 그 때문에 그는 그의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이고 동요하는 지위를 끊임없이 고수하는 것이다.( 지젝의 책. p.137)

 

  그런데 왜 주체는 불확실성을 지속시키기 위해 이렇게 확실성을 지연시키는 것일까?

 

  주체는 자신의 우유부단을 고집하고 선택을 연기하는데, 이는 양자택일의 한 쪽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쪽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상실을 두려워하는 것은 의심 그 자체, 불확실성이며, 모든 것이 아직 가능하고 그 어떤 선택항들도 제외되지 않은 열린 상태이다.(같은 책, p. 138)

 

  그러니까 무한히 많은 잠정적인 대안들을 늘 가능성의 대지 위에 무성하게 자라도록 놓아두기 위하여 그 모든 것을 단번에 쓸어버릴 하나라는 확실성을 밀쳐내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것이 '뷰티풀 다크니스'가 상실을 하나의 테마로 가져온 이유라고 생각한다. 어둠의 미로 속에서 그 어둠이 가져다주는 모든 소리와 감촉 그리고 그것이 불러 일으키는 모든 생각들을 모든 대안의 가능성으로 담아두는 것. 바로 이것을 위해서 말이다. 아마도 이것이 이왕에 이 작품이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모두 지워버리고 그 그라운드 제로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하려고 했다면 더 걸맞는 선택일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은 늘 확실한 진리를 찾으려 추구해왔으며 그것도 오로지 하나의 진리만을 고수하려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획일적이 아닌 모든 가능성이 그대로 대등하게 무성한 안개꽃들 마냥 존재하길 원하는 이 작품에 있어서는 그것을 배척하고 상실을 궁극적으로 껴안는 것은 당연한 선택인 것이다. 이것은 세계를 궁극적으로 단일한 어둠으로 만드는 종말에 대한 표현을 이렇게 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리브, 저 사람들 뭘 하는거야?" 내가 속삭이듯이 물었다.

 "결정의 달을 부르고 있어." (p.492)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일어난 많은 비극은 다름아닌 늘 하나의 진리만을 인정하고 그렇게 확실성을 갖고 오려다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가진 확실성은 타자를 배쳑하게 하지만 불확실성은 타자를 포용하게 한다. 그 불확실성이 나의 것 역시도 하나의 잠정된 그저 가능한 생각에 다름아님을 인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뷰티풀 다크니스'가 지금 영 어덜트 판타지가 보여주는 대로 새로운 세대의 전혀 새로운 가치관에서 비롯되는 구원을 추구한다면 이 작품이 찾고 있는 구원의 모습은 아마도 환한 낮이라기 보다는 밤이 될 것이다. 그것도 무수한 별들이 수놓인 그런 밤. 그 멀리 있는 작은 별들 하나가 다 저마다 대안이 되고 가능성이 되는 그런 밤 말이다.

 

 내가 이 작품의 마지막에서 문득 그리게 된 것은 그런 밤이었다.

 이 다음의 이야기가 어떻게 또 이어질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뷰티풀 4부작'은 1년마다 발간된다. 3부에서 이어질 이야기를 보기 위해서는 다시 또 1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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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6-19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오랜만이어요.
오랜만인데 갑작스레 질문. 디스토피아가 뭐에요?
죄송해요. 이렇게 멍청한 사람이라서 ㅎㅎㅎㅎ

오드득 2012-06-19 23:20   좋아요 0 | URL
무슨 말씀을요^ ^
디스토피아란 유토피아의 반대말이에요. 그러니까 유토피아가 쉽게 말해 모든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를 말한다면 디스토피아란 그것과 완전 반대인 가장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세계를 말하는 것이죠. 인간이 그를 둘러싼 세계로 인해 행복해지고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세계로 인해 억압받고 고통받는 세계 그것이 디스토피아랍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조지 오웰의 '1984' 같은 작품이 전형적인 디스토피아 소설들이죠. 대답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

이진 2012-06-19 23:24   좋아요 0 | URL
오, 대답 너무 잘되었어요. 작품 예까지 들어주시니 금상첨화군요.
오랜만에 외국 소설을 읽어보고 싶네요. 요즘 통 한국 소설로만 읽어 놓으니 스릴러와 추리에 대한 감각이 떨어졌어요. 뭐, 원래 감각이 없었지만. 스노우맨 읽고 싶은데 너무 두꺼우이 ㅠㅠ
 
수비의 기술 1 NFF (New Face of Fiction)
채드 하바크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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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드 하바크의 소설 '수비의 기술'은 일단 독특했다.

 지금까지 야구를 소재로 한 소설과 영화를 많이 보아왔지만 유격수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또 오랜만이기도 했다. 이 소설은 근래에는 보기 힘들었던 미국 대학생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독서 경험이 일천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에릭 시걸의 '닥터스' 이후로 온전히 대학 생활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춰 진행되는 소설은 처음 만나는 것 같다.(그 에릭 시걸 또한 이미 타계했으니 세월이 얼마나 흐른 것인가.) 그렇게 독특했고 또 오랜만에 재회하는 세계인지라 솔직히 열광적으로 읽었다. 정말 유격수를 뜻하는 영어 'shortstop'처럼 짧은 보폭으로 진행되는 그렇게 빠르고 경쾌하게 진행되는 문체라서 더욱 그럴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수비의 기술'은 무슨 이야기인가?

 

 야구 이야기인가? 주요한 소재이긴 하지만 아니다. 사랑 이야기인가? 그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이 소설은 뭔가 하나가 부족한 자들의 이야기이다. 주요한 등장인물 헨리, 그를 웨스티시 대학으로 데려와 정말 하고 싶은 야구를 마음껏 하게 해주는 슈워츠, 그 웨스티시 대학의 총장 어펜라이트 그리고 그녀의 딸 펠라 그 모두가 똑같이 뭔가가 부족한 그래서 결국엔 충족되지 못한 것 때문에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헨리는 그 자신이 동경하는 최고의 유격수 아파리치오(이 사람은 헨리가 거의 성경처럼 여기는 '수비의 기술'을 쓴 전설의 유격수이기도 하다. 헨리는 이 책을 읽으며 최고의 유격수가 되기를 꿈꾸었으며 지금은 거의 근접한 상태다. 물론 아파리치오는 실제 인물은 아니며 당연히 '수비의 기술' 또한 가공의 책이다.)와 타이 기록을 이루려는 직전에 어이없는 실책을 범한다. 슈워츠는 헨리를 끌어와 야구로 성공시켜 준 장본인이지만 정작 그의 미래는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 사랑 역시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 한다. 어펜라이트는 진짜 소망은 멜빌 같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지만 논문을 쓸 때는 그리도 자주 찾아오는 '백열 상태'가 정작 소설을 쓸 때는 찾아오지 않아 포기하고 만다. 그 뒤 그는 학문적으로 성공해서 지금처럼 대학 총장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여전히 되지 못한 작가에 대해서는 미련을 안고 있다. 그의 딸 펠라는 십대 때 이미 자신의 학교 강사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바로 실패를 하고 그에게서 달아나 웨스티시로 돌아온다. 그녀가 그 어린 나이에 결혼한 진짜 이유는 그녀가 어펜라이트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펠라의 사랑은 정말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존재를 찾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결국 그녀의 전남편 데이비스와 현재의 남자 친구 슈워츠를 거치지만 '털보에서 털보로 옮겼을 뿐' 여전히 그녀가 바라는 사랑을 얻지는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렇게 소설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들 모두는 각자가 바라마지 않았으나 결국엔 채워지지 못했던 것들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 부족함이 두려움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헨리의 경우가 그렇다. 헨리는 슈워츠의 미래를 위한 시도가 모두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는 기적을 만드는 사람이라 여겼던 슈워츠가 그렇다면 자신 역시도 그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계속 실책을 범한다. 그 첫 실책은 아파리치오의 기록에 가장 접근하던 날 자신의 룸메이트이기도 한 오웬의 얼굴에 잘못하여 공을 던져 버린 일이다. 결국 오웬은 그 공을 맞고 병원에 실려 입원하게 되는데 여기서 채드는 아파리치오와 오웬을 절묘하게 결합시킨다. 사실 이 '접합'의 묘미가 바로 채드 하바트의 소설이 가진 가장 커다란 매력이기도 한데 아무튼 채드는 여기서 왜 아파리치오와 오웬을 헨리의 송구로 묶어두는 것일까? 그것도 좌절의 시초가 되는 송구로 말이다. 그것은 아라파치오와 오웬이 이 소설에서 사실은 모두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모두 다다르고 싶으나 오히려 그 남은 거리로 인해 더욱 불안감을 부채질할 뿐인 존재인 '이상(이를테면 플라톤의 '이데아'와도 같은)' 그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헨리와 아파리치오의 관계는 어펜라이트와 오웬의 관계와 같다. 때문에 어펜라이트와 오웬의 동성애는 사실 다르게 보아야 한다.

 

  즉 아파리치오가 되기 위해 헨리가 야구에 기울이는 온갖 노력과 마찬가지로 어펜라이트의 오웬에 대한 사랑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왜 채드가 헨리가 결정적으로 아파리치오의 기록에 접근하려던 그 때 어펜라이트 역시 자신이 동경하는 오웬을 보려고 같은 구장에 있도록(그것도 어펜라이트 자신의 치부라 할만한 딸 펠라가 달아나 집으로 오는 그 시간에) 공들여 설계하는지 이유가 드러난다. 채드는 드러낸다. 헨리가 자신의 이상에 근접할 때 어펜라이트 역시 자신의 이상에 똑같이 근접하고 있음을. 결정적으로 헨리의 잘못된 송구는 어펜라이트가 자신의 이상, 오웬과 직접적으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다. 이를테면 헨리가 어펜라이트로 하여금 오웬에게로 데려다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헨리의 그와 같은 실책은 좌절의 시초가 되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가 지금 서 있는 웨스티시 자체가 사실은 좌절의 땅이었다. 그 대학이 숭배하는 멜빌이 작가로서 한창 좌절을 겪다가 떠난 절망의 순례 가운데 찾아 온 곳이 바로 웨스티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절망의 순례 여정을 발견한 것은 바로 어펜라이트였다. 그리고 그 발견으로 어펜라이트는 성공한 학자가 된다. 말하자면 멜빌의 좌절이 어펜라이트를 키웠듯이 이제는 헨리의 좌절이 어펜라이트를 키우는 것이다. 결국 멜빌이 어펜라이트가 다가가고자 했던 대상이었음을 볼 때 그 멜빌과 헨리가 어펜라이트에게 똑같은 경로로 기회를 준다는 것은 곧 어펜라이트가 염원하는 오웬이 헨리가 염원하는 아파리치오와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아파리치오와 오웬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헨리의 야구도 어펜라이트의 동성애도 사실은  이상과 현실이 가지고 있는 차이가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을 말하기 위해 나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동성애적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오웬과 어펜라이트가 처음으로 신체적 접촉을 했을 때 어펜라이트가 보여주는 반응일 것이다. 오웬을 만나기 전까지 평생을 이성애자로 살아온 어펜라이트는 그 자신 열망하긴 하였으나 처음으로 동성과 깊은 신체적 접촉을 나누게 되자 그 낯선 이질감에 당혹스러워한다. 바로 이 당혹감이 오웬과 어펜라이트의 관계가 정말을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낸다.

 

 소설은 그렇게 모자람 그리고 거기로 부터 비롯되는 두려움을 그리지만 섣둘리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안고 사는 용기라고 말한다. 1부 밖에는 읽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더 길게 말할 수는 없으나 아마도 그래서 채드 하바크는 첫 머리에다 웨스티시 대학의 응원가를 삽입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 기운을 북돋아요. 나의 친구들이여

용기를 잃지 마요

용감한 우리 하푸너스가

공을 쳐내고 있으니

 

- 웨스티시 대학교 응원가 -

 

 

 

 

 다른 얘기로,

 아파리치오와 오웬이 이렇게 '이데아'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일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 여기의 등장인물 또한 일련의 과정으로 재배치 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 이를테면 헨리가 이제 막 필드로 뛰어드는 초심자라고 한다면 슈워츠는 거기서 좀 더 나아간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며 펠라는 슈워츠가 원했던 미래를 한 번 얻었으나 그것이 가짜의 것임을 깨달았다는 의미에서 그 슈워츠 보다 더 나아간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어펜라이트는 예순이라는 나이나 그의 학문적 성과나 총장이라는 직위로 보아 직선의 가장 끝자리에 온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일직선상의 성장과정과도 같다.

 

 무리하게 이렇게 일직선상에 놓아두는 것은 이 소설에 은연중 드리워진 한 가지 맥락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 맥락이란 다름아닌 이것은 바로 작가로서의 채드 하바크 자신에 관한 얘기라는 것이다.

 

 

 채드 하바크는 이 소설 '수비의 기술'을 쓰기 위해서 자그만치 10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문제는 이 소설이 그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는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작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셈인데 그렇다면 그 10년의 세월은 그대로 그가 이 첫 소설을 세상에 출산하여 진정한 작가가 되기까지 겪은 산통의 과정이라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정말 채드 자신이 이러한 산통의 과정 자체를 소설에 담으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그 근거를 나는 일련적으로 배열 가능한 등장인물들에게서 찾는다. 즉 이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연속적 흐름이 그대로 채드 하바크가 이 소설을 쓰면서 작가가 되어가는 과정 자체가 아닐까 여기는 것이다. 그렇게 이 소설의 주된 얘기가 되는 헨리의 아파리치오 되기는 사실 채드 하바크의 작가 되기의 얘기인 것이다 라고 나는 의심한다.


 근거가 없지는 않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그가 할 줄 아는 것이란 수비였다. 그는 짧은 평생 내내 배트에 맞은 공이 튀어 나가는 모양, 각도와 회전을 연구했다. 오른쪽으로 꺾어야 할지, 왼쪽으로 꺾어야 할지, 날아오는 공이 앞에서 높게 솟아오를 것인지, 땅을 쏜살같이 강타하며 굴러갈지 미리 알아내려는 노력이었다. 그는 깔끔하게 공을 잡아냈다. 예외 없이. 그리고 언제나 완벽한 송구를 해냈다. 예외 없이. 그럼에도 감독들이 그를 2루에 세우겠다는 뜻을 거두지 않거나, 아니면 벤치에 버려둘 때가 있었다. 그 지경일 만큼 피골이 상접하고 못 봐주게 처량한 몰골이었다.(p. 19 ~ 20)


 이걸 채드가 하버드 재학 시절부터 꾸준히 글을 썼다는 것을 감안하고 읽으면 이 문장을 써 내려갈 때의 채드의 심정이 어땠는지 마치 손에 잡힐 듯 다가오는 것 같다. 즉 (물론 전적으로 내 느낌일 뿐이지만) 그는 스스로 자기는 이미 작가로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도 그걸 알아주지 않는다는 어쩌면 그걸 쓸 때 진짜 했을지도 모를 투정 아닌 투정을 여기다 슬며서 버무려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더하여, 소설가가 되지는 못하였지만 작가로서 성공한 어펜라이트가 새삼 오웬이라는 남자에게 끌리게 된 계기도 여기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어펜라이트가 오웬에게 끌렸던 것은 그의 에세이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젊은 청년의 에세이에 녹아든 우아함과 광범위한 독서에 감탄했다.(p.142)


 채드는 오웬에 대한 어펜라이트의 매혹이 무엇보다 텍스트적이었음을 강조한다. 이렇게 보면 소설에서 내내 보여지는 오웬의 묘사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채드는 오웬을 그 누구보다 박학다식하며 책벌레로 묘사한다. 그는 야구 경기를 할 때 조차 비글호 항해기에 빠져있다. 그의 말투 역시도 구어체 보다는 문어체에 가깝다. 헨리와 처음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가 사귀고 있는 애인에 대해 말하는 부분을 보라. 그는 마치 논문을 쓰듯이 대화를 한다. 채드가 이렇게까지 묘사하고 있으니 여기엔 분명 의도가 있다. 난 그 의도가 바로 오웬이 하나의 텍스트적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즉 독자들이 그를 하나의 인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종의 살아있는 텍스트, 의인화된 텍스트로 봐 주길 원해서 말이다. 왜 채드는 구태여 오웬을 일종의 의인화된 텍스트로 만드는 것일까? 그 오웬이 가장 작가적 정점에 이른 어펜라이트의 애정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그 이유는 드러난다. 오웬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베아트리체라는 것을. 베아트리체는 파우스트의 인생을 완벽하게 만들어 줄 마지막 남은 이상적인 퍼즐 조각이었다. 어펜라이트에게 그 퍼즐 조각은 쓰지 못했던 소설이다.


 그는 왜 오웬에게 휘트먼을 읽어주려 했던 것일까?

 휘트먼은 살아 생전 거의 평가를 받지 못했던 시인이다. 즉 그 휘트먼은 소설가가 되지 못했던 어펜라이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웨스티시라는 그 좌절의 땅에서 오웬은 그러니까 어펜라이트가 정말은 쓰고 싶었던 바로 그 소설, 그 완성된 이상적인 텍스트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펜라이트는 자기도 그 이유를 모른 채 마구잡이로 빠져드는 것이다. 즉 어펜라이트가 오웬에게 끌리는 이유는 동성애적 욕망 때문이 아니다. 사실은 멜빌 같은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기에 가져버린 소설가에로의 미련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베아트리체를 욕망했던 파우스트도 그 바탕엔 결국 미련이 존재하지 않았던가. 어펜라이트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오웬을 통해 미처 쓰지 못했던 소설을 다시금 쓰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채드는 예리하게도 오웬과 어펜라이트가 첫 깊은 신체적 접촉을 하는 순간 19세기 빅토리아 소설처럼 그것을 묘사한다. 소설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 시기를 말이다. 거기다. 어펜라이트와 오웬의 만남 또한 텍스트 읽어주기로 채워나간다.


 그렇게 채드는 어펜라이트의 사랑을 작가가 완벽한 작품을 쓰고 싶다는 욕망에 빗대어 얘기하고 있으며 바로 그 욕망은 작가가 되기 위해 열심히 '수비의 기술'을 썼던 그 자신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수비의 기술'은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모노로그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헨리가 웨스티시 대학에서 처음 보게 된 멜빌 동상의 묘사가 흥미롭기 그지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멜빌은 작가인 채드 자신이 가장 도달하고 싶은 이상의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동상이 서 있는 웨스티시가 사실은 멜빌이 작가로서 좌절하고 있을 때 방문한 곳이며 그래서 멜빌의 글로 넘치는 웨스티시 자체는 좌절의 글쓰기 현장이라는 것이다. 바로 거기서 이제 초심자 작가로서 온 헨리는 멜빌 동상에게서 이상한 친근함을 느끼는데 그런데 그 동상의 실상은 이랬다.


 동상은 교정을 등지고 서 있는 바람에 몸 뒤에 채찍질 자국처럼 나 있는 균열과 균열 안에 가득 찬 이끼를 행인들에게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 때문에 헨리는 처음부터 뒤죽박죽인 제 머릿속 고민까지 겹쳐서 이 동상이 몹시 고독한 인물로 느껴졌다.(p. 47)


 이 멜빌의 동상 자체가 채드 하바크가 글을 쓰면서 느낀 작가의 모습 자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게 늘 도달하려고 헨리처럼 어마어마하게 노력하지만 균열은 늘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터지고 또 그 균열이 주는 한계 때문에 두려움에 젖어들어 결국은 고독하게 빈 페이지를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작가의 운명을 그는 바로 여기에 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이 소설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채울 수 없는 모자람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채드 자신이 작가가 되기위해 나아갈 때 마다 느꼈던 균열과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말하자면 '수비의 기술'은 이렇게 작가 자신의 내면과 맨 위에서 말했던 외면의 얘기가 절묘하게 접합된 소설이다.

앞서도 이 소설의 가장 커다란 매력은 '접합'이라고 말했다. '접합'이란 바깥의 세상과 내면의 움직임을 절묘하게 배합시키는 것을 말한다. 채드 하바크는 그것을 자주 보여주는데 이를테면 어펜라이트가 오웬을 보려 야구장으로 갔을 때 거기 헨리를 스카우트하려고 살펴보고 있던 스카우터와의 얘기가 그렇다. 스카우터는 헨리를 스카우트 하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하지만 그건 또 어펜라이트가 오웬을 유혹 그렇게 스카우트 하는 것과 접합되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접합'은 교착된 평행세계를 드러낸다. 이 소설은 두려움을 지우는 소설이 아니라 그것을 안고 가는 가운데 용기를 주는 소설이라 했다. 바로 그 용기가 접합을 통해 결부되어진 이면의 세계를 바라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이 접합에 대한 수수께끼는 2부를 다 훑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 그럼, 2권에서 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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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 -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개정증보판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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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란 이제 기록이 아니라 발굴이 되었다.

 더 이상 왕조 같은 지배계급을 중심으로 하거나 전쟁이나 혁명 같은 거대한 사건 중심이 아니라 그들에게 관심의 스포트라이트를 갖다대느라 상대적으로 가리워졌던 그래서 더 왜곡되기도 했었던 역사적으로 무시되어졌던 존재들에게 다시금 빛을 찾아주고 목소리를 가져다 주어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대낮의 환한 광장으로 인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날 역사의 소명이 된 것이다. 지배계급이 존재했었던 곳엔 어디에서나 그렇게 역사의 관심에서 소외된 자들이 존재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도 서양의 역사 못지않게 공식적 기록에 그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고 지금 역시도 온전히 관심과 인정을 받지 못한 존재들이 상당한 것이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궁녀가 아닐까 한다.

 

 

 현재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임중인 신명호의 '궁녀'는 오래도록 빛을 받지 못하여 무지의 베일에 가리워져 있었던 궁녀들의 삶을 제대로 복원해보려 한 저작이다. 그가 새삼 잊혀진 궁녀들의 삶에 주목했었던 것은 여성들의 급속한 사회적 지위 향상과 더불어 조선시대 내내 억압받았던 여성상을 새롭게 조명해보려는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는데 그 재조명의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대비, 왕비, 후궁, 궁녀등 궁중 여성들이 될 것이라 한다. 왜냐햐면 조선은 그 무엇보다 왕조국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중 여성들의 경우 지금도 그것을 재현한 사극들에서 잘 드러나듯 자칫 그 권력의 추구와 흥미본위의 선정성에만 집착해 그 삶의 진정한 모습이 왜곡될 위험을 많이 안고 있다. 신명호는 그래서 역사소설이나 영화 그리고 드라마에 의해 왜곡될 위험을 우려해 학문적 탐구가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번에 나온 '궁녀'는 바로 그러한 신명호의 문제의식에서 태어난 산물인 것이다.

 

 책은 총 6장에 걸쳐  진행되는데 첫째 장은 오래도록 역사의 관심을 받지 못해 공식적인 사료가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궁녀들의 삶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지 그 방법론을 논하고 둘째 장은 궁궐에서 그저 그림자들로만 존재하는 궁녀이기에 혹 우리의 선입견은 그녀들의 삶이 그대로 단일한 무채색의 삶이지 않을까 생각하기 쉬운데 이 장은 궁녀들의 삶이 전혀 그렇지 않음을 그러니까 파란만장한 다채로운 빛으로 가득한 것이었음을 특기할만한 궁녀들 개인의 삶을 통해 드러내는 장이다. 신명호가 하필이면 두번째 장에서 이러한 개개 궁녀들의 삶을 통해 다채로운 궁녀의 삶을 보여주는 이유는 이러한 다양한 삶의 모습을 통해 독자의 흥미를 일으킨다는 점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아무리 궁녀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오로지 왕조에 대한 충성이라는 보편적 이념으로만 움직였던 존재들이 아니라 그 이전에 보다 근본적으로는 개인의 욕망을 성실히 추구했던 존재들임을  밝히기 위해서다. 조선 왕조가 건국 당시 부터 개인들의 욕망을 억누르고 보편적인 이념만을 추구하려 했던 나라임은 조선의 기틀이 되는 근본 사상을 다졌던 정도전이 경복궁의 침전을 '강녕전'이라 이름붙인 연유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그 강녕전의 의미는 바로

 

  왕이 밤에 조용히 황극을 닦으며 식욕, 색욕, 권력욕 등 인간의 원초적 욕망들을 잠재워야 한다는 의미였다.(p. 9)

  (여기서 '황극'이란 인간의 원초적 욕망들이 생겨나기 전의 중용 상태를 말하는데 즉 황극을 닦음이란 어디로나 치우치지 않도록 편견과 아집을 버리고 공평무사한 중립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렇게 조선은 처음부터 개인의 원초적 욕망을 무화(無化)시키는 것을 이념으로 출발한 나라였다. 그렇게 모든 존재들을 보편이라는 광막한 장막으로 덮으려 한 나라였다. 하지만 신명호는 그 왕조의 중심에 있어서 누구보다 그 보편적 이념에 봉사했어야 할 궁중 여성들조차 무엇보다 개인의 원초적 욕망을 추구했던 존재들임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궁중 여성들의 존재 자체가 보편적 이념과 개인적 욕망 사이의 투쟁을 의미하는 상징이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동안 궁녀의 실제 삶이 그동안 역사적으로 전혀 조명받지 못했다는 것의 환유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그 궁녀들의 삶이 그토록 조명받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개인의 욕망 보다는 어디까지나 보편적 이념을 중시했던 조선 때문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가리워졌던 궁녀들의 삶을 복원하는 것은 그렇게 보편적인 이념의 그늘아래 웅크리고 있어야 했을 개인의 욕망들을 복원하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바로 그래서 신명호는 자신의 저서 '궁녀'를 욕망을 비롯하며 개인적인 삶의 실현을 밑그림 삼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3장과 4장 그리고 5장은 그 개인으로서의 '궁녀'의 삶에 있어서 바탕을 이루는 조건들을 그려낸다. 즉 3장에서는 궁녀의 선발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4장에서는 궁녀들의 조직이 어떻게 구성되고 움직이는지 그리고 5장에서는 그들의 업무와 라이프 스타일을 밝히는 것이다. 이 모든 궁녀들의 삶의 조건들을 다 그려내고 난 뒤 드디어 마지막 6장에서 가장 개인의 원초적 본능이라 할만한 궁녀들의 성과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의 순서는 그냥 무심히 배열된 것이 아니라 지금 궁녀의 역사를 복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와 관련하여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보편적 이념의 정수라 할만한 정도전의 강녕전에서 그 중심에서 오히려 개인의 원초적 욕망 충족에 충실하는 궁녀들의 삶까지 이르는 여정은 그야말로 보편적 이념이 결국은 개인의 원초적 욕망에 의해 패배하는 여정인 것이다. 결국 우리는 궁녀들의 삶을 통하여 궁녀들 삶 자체의 모습 뿐만이 아니라 이념이 아무리 강고하게 억누른다고 해도 개인의 원초적 욕망은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이로써 역사가 다시금 보편이란 이름아래 지워진 개인들의 삶을 발굴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깨닫게 된다. 개인은 그 자체 삶으로서 완전한 것이며 그 개인을 자꾸만 부족한 존재로 만들어서 길들이려 드는 보편적 이념은 그야말로 억압적 가설이거나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궁녀'의 역사란 그저 지나간 역사의 흔적이 아니라 오늘의 생생한 역사로 다시금 음미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즉 궁녀들의 삶이란 사회라면 언제나 존재할 수 밖에 없는 보편적 이념과 개인의 원초적 욕망 사이의 대립을 제대로 되새겨 볼 수 있는 현장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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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6-10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이번 책은 제목과 표지부터 강렬하네요.
리뷰도 짧고 강렬하고. 마침 책 사려는데, 음 읽어볼까.
<채홍>을 읽었더니 이제 궁녀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번쩍 뜨입니다요 ㅋㅋ

오드득 2012-06-10 22:58   좋아요 0 | URL
후후, 사실 마지막 장에 '채홍' 얘기가 나와요. 읽으면서 소이진님이 읽으면 좋아하겠다 생각도 했더랬죠^ ^ 그런데 정말 오랜만이에요. 제가 너무 들르지도 못하고 그랬죠? 곧 찾아갈게요^ ^

프레이야 2012-06-11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관심가길래 마음에 찜해뒀는데 님의 리뷰 읽고는 바로 담아갑니다.^^

오드득 2012-06-13 02:47   좋아요 0 | URL
앗. 프레이야님 감사합니다.^ ^
저는 꽤 만족스럽게 읽었는데 프레이야님도 만족하실 수 있으시면 좋겠네요^ ^
 
슬로우 - 무한경쟁 시대를 넘어서기 위하여
플로리안 오피츠 지음, 박병화 옮김 / 로도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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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4년 영국의 화가 조셉 말러드 윌리엄 터너는 '비 증기 그리고 속도'라는 그림을 발표했다. 그의 나이 70세에 그린 이 그림은 기차 여행중 기차의 빠른 속도로 인해 유리창에 그려지는 빗방울의 모습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그 속도감으로 인해 달라지는 세계의 인상을 이렇게 화폭에 옮겨 놓은 것이었다.

 

 터너의 그림에서 보듯 근대에 들어와 놀랄만큼 빨라진 속도는 사람들에게 경이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체험이었고 단시간에 보다 멀리까지 가게 함으로써, 그렇게 그들의 세계를 보다 확장시켰으므로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그 때부터 사람들은 빠른 것을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새삼 시간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루 걸릴 거리를 한 시간만에 갈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작은 시간 단위들이 중요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사람들의 생활은 이제 하루, 반나절 이런 단위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빨라진 속도에 맞춰 시간 혹은 분 더 나아가서는 초 단위까지 나뉘게 되었다.

 

 그렇게 지금 우리 일상을 장악하고 있는 시간 테이블은 근대에 들어와 나타나게 된 일종의 발명품이었고 그것을 정형화시킨 이는 바로 미국의 프레데릭 테일러였다. 테일러는 1910년대 당시까지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던 생산 공정에 표준화를 가져온 이로 유명하다. 그것이 가장 최초의 정형화된 일련의 공정이었으므로 '테일러주의' 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테일러는 생산 공정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공정을 세부적으로 단계를 나누어 그 순서에 따라 노동자들에게 단순 반복 작업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숙련성'을 노동자에게서 박탈하였고 그래서 보다 쉽게 노동자들을 교체 가능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아무튼 테일러는 그 단순 반복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시간을 분단위까지 잘게 나누어 시간표를 짰는데 바로 그러한 시간의 분할이 오늘날 자본주의 시간적 생활양식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원인과 결과란 종종 되먹임의 과정이다. 원인이 촉발시킨 결과가 다시 그 원인을 가속화시키는 동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분과 초 단위까지 관리되기에 이르자 생활의 속도 역시 더욱 빨라지게 되었다. 시간 여행에 대한 영화를 보게 되면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그것도 과거의 사람이 현재의 도시로 왔을 때 반복적으로 보여지는 장면이다. 그것은 과거에서 온 여행자가 자신의 시대에서는 도무지 볼 수 없었던 빠르게 움직이는 자동차의 행렬을 놀란 표정으로 보게 되는 장면이다. 왜 영화들은 자주 이것을 묘사하는가? 바로 이 속도의 체험, 가속화된 시간의 체험이 과거의 사람에게 무엇보다 시간적 단절의 느낌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의 시간 리듬이란 근대와는 달라서 보다 더 긴 시간 단위 그러니까 하루나 한달 어쩌면 계절을 주기로 흘러갔으니까 말이다.

 

 말하자면 '가속화'란 어디까지나 근대에 의해 창출된 이른바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각을 우리는 독일의 다큐멘터리 작가 플로리안 오피츠의 '슬로우'란 책에서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시간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경향이 점점 심해지는 이유는 요즘 부쩍 늘어난 시간 관리 상담가라는 사람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시간 인식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가 계속해서 빨라지고 있기 때문에 일어잡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아끼려는 개인의 노력은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간 문제를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로 보는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많지 않습니다.(P.89)

 

 

 

 

 오피츠의 '슬로우'도 이와 같이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속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 아니 이 책 자체가 오피츠가 살면서 가지게 된 하나의 의문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그 의문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든 한 번은 떠올려 보았을 그런 의문이다. 즉 '왜 이렇게 시간에 쫓기듯이 살아야 하는걸까?' '시간을 벌려 바쁘게 살아가는데도 휴식은 커녕 왜 더 바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바쁘게 지내야 하는 걸까? 대체 여기에 해결책은 존재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다.

 

 기술적 발달로 절약한 시간이 어디로 갔는지는 간단하게 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손편지 하나 쓰는 것보다 이메일을 작성하는 것이 두 배는 빠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하루에 편지 10통 쓰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면 이제는 30분이면 이메일을 10개 쓸 수 있죠. 그런 30분의 여유가 생깁니다. (...) 하지만 실제로도 그럴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이메일을 10개가 아니라 50개 60개씩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빼앗기게 되는 겁니다. 결국 우리는 시간을 잃어버린 셈이지요. (...) 우리는 이메일 기술의 발달로 시간을 벌었지만 그만큼 읽고 처리해야 할 뉴스도 많아졌기 때문에 이를 도로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신기술의 발달로 얻는시간 보다 뉴스의 양이 훨씬 더 빨리 늘어나기 때문입니다.(P. 73~74) 

 

 

 그렇게 단순히 오피츠 개인의 의문이란 것을 넘어서 어쩌면 사회 보편적 의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의문들을 말 그대로 오피츠 스스로 풀어나가는 과정을 담은 것이 바로 이 책 '슬로우'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다큐멘터리를 염두에 두고 쓰여졌기 때문에 인터뷰가 중심이다. 책은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파문처럼 보다 확장되는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즉 1장 '우리는 왜 불안하게 쫓기며 살까?'가 개인 차원의 시간 관리 문제를 다뤄 개인적 차원으로 접근해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을 밝혀낸다면 2장 '속도와 경쟁에 집착하는 세상'은 거기서 보다 확장되어서 사회적 차원을 다루는데 즉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 사회가 이미 구조적으로 가속화 사회이기 때문임을 드러낸다.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 논리가 시간을 부족하게 만드는 겁니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시간은 곧 돈이고 돈은 늘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이유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속도를 늦추는 것이 불가능한 겁니다. 우리를 몰아세우는 것은 비단 자본주의나 경제만은 아닙니다. 경쟁 논리도 한 몫 거들죠. (...) 바로 이 경쟁 논리가 이 사회를 이끄는 원동력이며 이 경쟁 논리 때문에 인간은 불안에 빠지게 됩니다. 언제가는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 세상이 조금씩 빨리 돌아가고 있으며 우리도 그에 맞춰 빨라져야 한다고 느끼지요. 하지만 빨라진 속도는 이제 활동의 자유를 가져다주지도 못하고 자기 발전에 대한 희망도 심어주지 못합니다. 압박은 점점 심해지는데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느낌은 가질 수 없지요. (..) 우리는 속도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 이런 구조에서는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빨라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P.112 ~ 113) 

 

그리고 3장 '행복과 속도, 그 대안을 찾아서'는 이미 구조로 자리잡은 가속화 사회에서 과연 그 속도에서 해방되어 보다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진정한 여유를 가질 수 있는지, 그 대안을 탐색한다. 이 모든 과정은 오피츠 개인의 체험으로 접속되어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한 경험과 함께 보다 직접적으로 그 문제를 독자로 하여금 느끼게 한다. 누구나 한번쯤 해 보았을 의문에다가 그 과정이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의 해답 찾기 과정이기 때문에 별로 어렵지 않게 그리고 마치 내 문제 처럼 그 여정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장점이다. 그래서 오피츠의 고민과 더불어 첫 페이지를 읽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앞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책이다. 거기다 대답의 추구 대부분이 인터뷰로 이루어져 있는지라 각 사람들의 체험을 통하여 보다 더 생생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점이다.

 

  이 책은 특정한 대안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사람들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주된 이유이기도 할 것 같다. 그들의 육성으로 생생한 체험들을 들으면서 독자 자신이 자기에게 맞는 대안들을 찾아 가도록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이 꼭 건네는 충고는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한계를 알아라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얼마든지 멀티태스킹을 할 수 있다는 과욕을 부리지 말 것을 경고한다. 바로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식의 내겐 한계가 없다는 과신이 속도의 강박을 불러온다고 한다. 그래서 엄연히 존재하는 육체의 한계를 무시하는 바람에 결국은 신체와 정신의 피로만 가중시킨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진정한 '슬로우 라이프'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자기 절제'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겸허히 내 한계를 인정하고 거기에 맞춰 삶을 꾸려나가는 것. 그렇게 스스로 제동 장치를 두는 것. 이것이 가장 필요한 자세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단 이것은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사회 역시도 이러한 제동 장치가 필요한데, 오늘의 거대한 위기를 초래한 신 자유주의가 바로 그러한 제동장치가 없는 체제였기 때문에 이 '자기 한계의 긍정에서 나오는 절제'라는 제동 장치는 정말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가속화는 장기적인 안정이 보장될 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 안정은 다시 제동 장치의 기능이 원활할 때 보장되지요. 최근 수 십년간 지속되는 신자유주의는 이 제동장치를 체계적으로 제거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안전도 사라졌죠. 신자유주의 정치는 처음부터 자본의 흐름뿐 아니라 교육제도와 노동시장에서도 제동장치를 제거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제동 효과가 있거나 유연성을 제한하는 모든 것. 그리고 자본이나 상품, 투자의 흐름을 방해하는 모두 제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P. 132)

 

 '슬로우'는 한번쯤 삶이 가진 바쁜 속도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본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느림'을 추구하는 책이 아니라 '속도'라는 것을 전혀 다르게 보기를 제안하는 책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지는 속도의 강박은 삶의 충실에 대한 강박과 맞닿아 있었다. 즉 우리가 그렇게 분초를 다투며 바쁘게 시간을 메우는 것은 그것이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보냈어'라고 느끼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속도의 집착이 삶을 보다 충실하게 만들어준다고 여겼다.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거기서 주로 성공한 엘리트들의 삶은 자주 회사의 복도를 부단히 이동하는 가운데 정신없이 말을 주고 받는 장면으로 묘사되곤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충실은 삶이 가진 시간의 아주 작은 단위조차 허투르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슬로우'는 그것이 일종의 강박이며 오해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당신이 정말 물어야 할 질문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느 만큼의 속도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어느 만큼의 속도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바람직한 삶을 위해서는어느 만큼의 속도가 필요한가? 무엇이 삶의 질을 높여주는가?" 입니다.(p. 137)

 

 말하자면 '슬로우'는 바람직한 삶을 위해 당신으로 하여금 제대로 질문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책이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제대로 된 해답은 늘 제대로 된 질문이 있는 가운데 있어왔다는 건 불변의 진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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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6월이다.

 올 봄 이사할 때만 해도 그리도 멀리 느껴지던 계절이었는데

 어느새 성큼 다가와버린 듯 하다.

 하긴 무더위는 이미 시작되어 버렸지만...

 이런 나날에 무엇보다 나를 살맛나게 하는 건 역시 장르소설이다.

 해서 이번 신간 추천 페이퍼는 오로지 장르에 대한 편애 만으로

 채워볼까 한다.

 

 

 

  온다 리쿠가 요네자와 호노부의 최고의 작품이라 평가하기도 했던 '부러진 용골'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지난 겨울 이 작품의 수상 경력을 보았을 때 부터 기다리던 작품이었다.

 

 제64회 일본 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2012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

 2012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1위.

 2012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2위

 29011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2위... 등등

 작년은 거의 '부러진 용골'의 해였다고도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화려한 수상 경력도 경력이지만 마법이 횡행하는 판타지적 세계를 배경으로 '추리'라는 본격을 가져온 설정이 참으로 독특해 보인다. 전작 '인사이트 밀'이나 '덧없는 양들의 축연'에서 거의 장르를 가지고 마음대로 노는 듯 해 보였던 호노부인지라 그가 이 작품에서는 또 어떻게 판타지와 본격 추리를 주무를지 자못 기대가 크다. 물론 판타지와 정통 추리의 혼용은 호노부가 처음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마술사가 너무 많다'로 유명한 랜달 개릿이 이미 제대로 보여준 바 있으니까. 하지만 개릿은 서양 작가고 호노부는 동양 작가인지라 같은 세계를 형상화한다지만 동양인만의 독특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이 무더위에 가장 벗하고 싶은 작품이다.

 

 

 

 

  네델란드 작가하면 얼른 떠 오르는 것은 '천국의 발견'으로 유명한 하리 멀리쉬이다. 장르 소설로 보자면 역시 작년엔가 서극이 유덕화를 주인공으로 영화로 만들기도 했던 당나라 때 실제로 유명했던 판관 디 공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를 내 놓은 로베르토 반 훌릭이다.

 '디너'의 작가 헤르만 코흐는 이번에 새로이 소개되는 네델란드 작가이다. 모두 여섯 편의 작품을 썼다고 하는데 아직 단 한 편도 소개된 적은 없으므로 '코흐'는 이 작품을 통하여 처음 만나는 것이다. 아이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중대한 결정을 내리려 그 부모들이 모여 저녁식사를 한다는 내용인데 에라스무스나 스피노자에서 보듯이 네델란드 특유의 회의주의가 도덕적 딜레마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 대해선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요리가 나오는 작품을 좋아하기에 선택한 소설이기도 하다. 맛있는 요리들의 향연이 펼쳐진다면 무더위마저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입가심용으로 맥주는 필수겠군...) 

 

 

 

 

 펠레빈의 '벌레처럼'을 읽은 사람이라면 펠레빈의 이 책을 그대로 지나치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오래전에 읽은지라 희미한 기억이긴 하지만 카프카의 변신 저리가라 할 정도로 곤충과 인간의 경계를 말끔히 지워버리면서 소련 붕괴 후의 러시아를 그렸던 그 소설은 분위기와 독특한 문체만으로도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오몬 라'는 그런 그의 첫 작품이라고 하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이다. 그 첫 발자욱이 어떤 자국을 남기는지 정말 궁금하다. 

 

 

 

 

 

 

 

  이 작품은 일단 픽션이 아니다. 논픽션이다. 그러니까 상상의 허구적 세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진짜 존재하는 사실의 세계를 그린다. 그렇게 1960년대 미해결로 남은 12개의 괴이한 사건들에 대해서 기록한 책이 바로 이 '일본의 검은 안개'인 것이다. 1960년대는 68혁명이나 흑인해방운동이나 히피즘 등 전 세계적으로 이데올로기들이 첨예하게 들끓던 그런 시기였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전공투로 대표되는 좌파와 보수 우익의 전선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마츠모토 세이초는 바로 그 시기를 12개의 해결되지 못한 그렇게 검은 안개로만 남은 사건들을 통하여 바라보는 것이다. 기자 출신의 사회파의 거장 답게 그는 이 모든 사건들 집요하게 추적하고 그리고 해결을 위한 나름의 가설을 세운다. 이 모든 것은 또한 혼돈으로 점철되는 60년대의 일본 자본주의를 해부하여 진실을 포착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세이초의 작품을 정말 좋아하는 나이지만 이런 이유로 더욱 읽고 싶은 작품이다. 그가 그려내는 혼돈으로 얼룩진 시대의 공기, 그 필치 아래 압축된 밀도 속에 깃들어있을 서로 충돌하는 정념들의 아우성이 정말로 궁금하다.

 

 

 

 

  권여선 작가의 15년만의 작품이다. 레가토는 음악 용어로 둘 이상의 음을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라하는 뜻이다. 아마도 소설에서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삶이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듯 하다. 그렇게 이 소설은 30년전의 과거 그러니까 80년대를 호출한다. 그런 의미에서 천운영 작가의 '생강'과 비슷한데 고문기술자의 내면을 경유하여 과거와 오늘을 레가토로 보여주었던 '생강'과 달리 이 작품은 정확히 그 반대에 위치하고 있는 운동권 써클을 통해서 레가토를 연주한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괴물로 살았던 자와 인간으로 살려고 했던 자들의 양쪽 시선 모두를 아우르며 80년대를 다시 한 번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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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6-05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 정말정말 이상한것 있죠. 이번 신간 추천 페이퍼에 들어있는 책들은 왠지 눈에 다 익어요. 권여선의 <레가토>는 벌써 몇년전에 본 책같고, 세이초의 <일본의 검은 안개>는 두세달 전에 본 책 같아요. 다른 분들 소설 추천 페이퍼 읽으면서 의아해했었는데 헤르메스님도 이렇게 꾸미셨군요. 나도 추천 페이퍼 쓰고싶다. 그땐 참 귀찮았었는데, 지나서야 후회가 되네요. 잘 쓸걸.

오드득 2012-06-08 11:23   좋아요 0 | URL
와! 소이진님 왠지 정말 오래간만인 것 같아요.^ ^
소이진님 눈에 다 낯익어 보인다는 건 이 책들이 모두 5월달 신간들이라서 그럴까요. 그만큼 시간이 빠르게 흘러서 오래도록 본 것 처럼 느껴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표지 때문에? 음, 저도 궁금해 지는데요.^ ^ 이번 달은 집계를 해보니 저번과는 달리 책들이 꽤 고루 표를 받았더군요. 그래서 정말 어떤 책이 될 지 모르겠더라구요. 소이진님의 페이퍼도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저도 참 아쉽네요. 다음엔 꼭 보게되기를 바랄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