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풀 다크니스 -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3-2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3
캐미 가르시아.마거릿 스톨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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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의 '뷰티풀' 4부작중 두번째 작품인 '뷰티풀 다크니스'는 상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주인공 커플인 이선과 리나가 자신이 껴안아버린 상실을 어떻게 딛고 이겨나가는지 거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선은 어머니를 잃었고 리나는 메이컨을 잃었다. 이선의 어머니는 이선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빛과도 같은 존재였고 그건 리나에게 메이컨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삶의 길을 환하게 밝혀주는 빛과도 같은 존재들을 이선과 리나는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2부의 제목이 '다크니스'인 것이다.

 

 그렇게 사라져 버린 빛... 어디로 가야할지 분명히 보여주는 그 빛이 사라지고 그들의 여정에 어둠이 찾아온 것이다. 홀로 밝혀진 빛을 안심하고 따라가던 사람들이 막상 그 빛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자신이 지금 디디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 길이 없어 혼란스러울 것이고 이제 어디로 가야 제대로 가게 될지를 몰라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렇게 빛의 사라짐은 미래만이 아니라 현재마저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리고 그렇게 드리워진 어둠의 장막 아래에서 어둠 속에서 미로를 헤메이는 자가 늘 의혹과 불안속에 가까스로 선택을 하듯이 그렇게 모든 관계를, 모든 상황을 판단해야 한다.

 

 '뷰티플 다크니스'는 바로 그러한 혼돈과 불안의 여정이다.

 

 요즘은 영 어덜트 판타지가 대세이다. 얼마전 개봉한 '헝거게임'도 그렇고 이미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트와일라잇'도 그렇다. 갑자기 이렇게 십대들을 주인공으로 한 판타지가 인기를 끌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여기엔 어떤 미국의 역사적 경험이 큰 워인이 된 것 같다. 즉 정치적으로는 2001년에 세계무역선터가 테러를 당해 붕괴된 9.11 사태 때문이고 경제적으로는 2008년의 서브프라임으로 초래된 금융위기가 그 원인인 것 같다. '왜 하필이면 이 두 개인가?'라고 묻는다면 보다 궁극적으로 이 두 사건이 모두 그 때까지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가 끝났다'라는 선언아래 그 무엇보다 우월하고 안정적으로 구가되고 있던 체제가 더 이상 확실하다거나 믿을만한 것이 아님을 미국인들에게 깨닫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두 사건으로 인해 문득 미국인들은 자신이 디디고 서 있는 땅이 단단한 대지가 아니라 속으로 자꾸만 무너지고 있는 모래 늪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넘쳐나는 불확실성 앞에서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모든 확실한 것들은 대기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고 이제는 그 어디서도 현실을 굳건히 지탱해 줄 반석을 찾을 수 없다는 불안만이 남은 것이다. 아마도 바로 그 불안의 징후를 영 어덜트 판타지들이 제대로 잡아내고 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인기를 얻고 있는게 아닐까 싶다.

 

 

 이것은 주로 영 어덜트 판타지들이 디스토피아를 주 무대로 가져온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뷰티풀 다크니스'의 저자 케미 가르시아 처럼 교사인 작가의 작품 '매치드'도 전체주의의 디스토피아를 가져왔고 최근에 나온 '퓨어' 역시 대폭발로 멸망해버린 뒤 불구와 기형의 인간들로 넘쳐나는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이 희망이라곤 전혀 찾아볼 길 없는 디스토피아에서 유일하게 구원의 빛을 가져오는 존재들은 주로 십대들이 맡게 되는데 그래서 이 디스토피아는 어른들이 망쳐버린 지금의 현실 자체를 은유한다고 볼 수 있으며 십대들이 주로 구원의 존재가 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기성세대의 가치관이 아닌 새로운 세대의 가치관으로서만이 이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타개해나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인 것 같다. 문제는 이 구원의 존재들이 보여주는 행태가 주로 타자에의 포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영 어덜트 판타지에서 강조하는 것은 나와는 전혀 다른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타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노력만이 지금 이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선언이다.

 

 이러한 타자의 받아들임은 '뷰티풀 다크니스'의 전작 '뷰티풀 크리쳐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던 주제이기도 하다. 거기서 미국 남부의 폐쇄된 마을 '개틀린'에서 전혀 낯선 존재인 리나를 이선은 유일하게 받아들이는 존재가 되는데 작가들은 의미심장하게도 늘 자유를 찾아 개틀린을 떠나고 싶어했던 이선의 꿈이 비로서 리나라는 완전히 낯선 존재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지게 만든다. 즉 그 리나로 인해 개틀린이 이선이 생각해왔던 대로 옛날부터 하나도 변하지 않은 단일의 고정적인 공간이 아니라 그 내부에 기이하고도 신비한 비밀을 많이 가지고 있는 그래서 변화무상한 세계의 중심임을 밝혀지는 것이다. 그렇게 '뷰티풀'의 작가 캐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톰은 구원이 여기가 아닌 저기 그렇게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타자를 나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거기에 있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렇게 세계를 바꾸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두되 그 안에서 개인의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이 영 어덜트 판타지에서 보여지는 또 하나의 주류적 경향이라 할 수 있는데 아마도 이 뷰티풀 3부작은 그러한 경향의 대표작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의 작품이 상실을 그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주목된다.

 

 

 

 전작에서 그렇게 사랑했던 이선과 리나는 그 상실로 인해 관계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 더구나 리나는 자신의 빛이었던 메이컨의 죽음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까지 있어서 더욱 혼란을 겪게 된다. 그래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리나는 스스로 어둠이 되려고도 한다. 작가들이 이렇게 상실을 가져오는 것은 디스토피아적 판타지를 그리고 있는 작품들과 어느정도 궤도를 같이 한다. 즉 더 이상 기성세대의 생각들은 새로운 대안을 가져올 수 없다는 확신이다. 이선을 가르쳐온 어머니, 리나를 인도해온 메이컨이 죽는다는 것은 아마도 이 같은 확신을 반영하는게 아닌가 싶다. 즉 이 두 작가가 이번 작품에 상실을 가져온 것은 이선과 리나가 그들만의 힘으로 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올 새로운 빛을 찾게하고자 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상실의 성격이다. 즉 상실은 과연 메워져야만 하는 구멍인 것일까 하는 것이 정작 여기서 물어야 할 질문이다.

 

 이 상실은 이선에게 그리고 리나에게 어머니와 메이컨이 다 같이 보다 확실한 것을 보여주는 빛이었다는 점에서 확실성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선과 리나가 그토록 방황하는 것은 바로 이 확실성을 찾고자 함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확실성은 굳이 찾아야만 하는 것일까?

 

  지젝은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라는 책에서 데카르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주체는 오로지 불확실성 위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고 말한적이 있다.  즉 '나는 의심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히치콕의 영화 '의혹'의 여주인공 리나(공교롭게도 이 작품의 여주인공과 이름이 같다. 그래서 특별히 언급한다.)가 남편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의혹과 불신 가운데서도 바로 곁에 그 진실을 확실히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그 확실성이 도래하는 것을 지연시키며 의혹과 불신을 지속시키는 것을  예로 들어 이렇게 설명한다.

 

 "공식적으로" 주체는 필사적으로 확실성을 찾으려고 그를 갉아먹고 있는 의심의 벌레에 대한 치료약을 제공해줄 명백한 해답을 찾으려고 분투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하려고 하는 진정한 재앙은 바로 이 해결이며, 최종적이고도 명백한 해답의 출현이며 바로 그 때문에 그는 그의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이고 동요하는 지위를 끊임없이 고수하는 것이다.( 지젝의 책. p.137)

 

  그런데 왜 주체는 불확실성을 지속시키기 위해 이렇게 확실성을 지연시키는 것일까?

 

  주체는 자신의 우유부단을 고집하고 선택을 연기하는데, 이는 양자택일의 한 쪽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쪽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상실을 두려워하는 것은 의심 그 자체, 불확실성이며, 모든 것이 아직 가능하고 그 어떤 선택항들도 제외되지 않은 열린 상태이다.(같은 책, p. 138)

 

  그러니까 무한히 많은 잠정적인 대안들을 늘 가능성의 대지 위에 무성하게 자라도록 놓아두기 위하여 그 모든 것을 단번에 쓸어버릴 하나라는 확실성을 밀쳐내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것이 '뷰티풀 다크니스'가 상실을 하나의 테마로 가져온 이유라고 생각한다. 어둠의 미로 속에서 그 어둠이 가져다주는 모든 소리와 감촉 그리고 그것이 불러 일으키는 모든 생각들을 모든 대안의 가능성으로 담아두는 것. 바로 이것을 위해서 말이다. 아마도 이것이 이왕에 이 작품이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모두 지워버리고 그 그라운드 제로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하려고 했다면 더 걸맞는 선택일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은 늘 확실한 진리를 찾으려 추구해왔으며 그것도 오로지 하나의 진리만을 고수하려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획일적이 아닌 모든 가능성이 그대로 대등하게 무성한 안개꽃들 마냥 존재하길 원하는 이 작품에 있어서는 그것을 배척하고 상실을 궁극적으로 껴안는 것은 당연한 선택인 것이다. 이것은 세계를 궁극적으로 단일한 어둠으로 만드는 종말에 대한 표현을 이렇게 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리브, 저 사람들 뭘 하는거야?" 내가 속삭이듯이 물었다.

 "결정의 달을 부르고 있어." (p.492)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일어난 많은 비극은 다름아닌 늘 하나의 진리만을 인정하고 그렇게 확실성을 갖고 오려다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가진 확실성은 타자를 배쳑하게 하지만 불확실성은 타자를 포용하게 한다. 그 불확실성이 나의 것 역시도 하나의 잠정된 그저 가능한 생각에 다름아님을 인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뷰티풀 다크니스'가 지금 영 어덜트 판타지가 보여주는 대로 새로운 세대의 전혀 새로운 가치관에서 비롯되는 구원을 추구한다면 이 작품이 찾고 있는 구원의 모습은 아마도 환한 낮이라기 보다는 밤이 될 것이다. 그것도 무수한 별들이 수놓인 그런 밤. 그 멀리 있는 작은 별들 하나가 다 저마다 대안이 되고 가능성이 되는 그런 밤 말이다.

 

 내가 이 작품의 마지막에서 문득 그리게 된 것은 그런 밤이었다.

 이 다음의 이야기가 어떻게 또 이어질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뷰티풀 4부작'은 1년마다 발간된다. 3부에서 이어질 이야기를 보기 위해서는 다시 또 1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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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6-19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오랜만이어요.
오랜만인데 갑작스레 질문. 디스토피아가 뭐에요?
죄송해요. 이렇게 멍청한 사람이라서 ㅎㅎㅎㅎ

ICE-9 2012-06-19 23:20   좋아요 0 | URL
무슨 말씀을요^ ^
디스토피아란 유토피아의 반대말이에요. 그러니까 유토피아가 쉽게 말해 모든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를 말한다면 디스토피아란 그것과 완전 반대인 가장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세계를 말하는 것이죠. 인간이 그를 둘러싼 세계로 인해 행복해지고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세계로 인해 억압받고 고통받는 세계 그것이 디스토피아랍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조지 오웰의 '1984' 같은 작품이 전형적인 디스토피아 소설들이죠. 대답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

이진 2012-06-19 23:24   좋아요 0 | URL
오, 대답 너무 잘되었어요. 작품 예까지 들어주시니 금상첨화군요.
오랜만에 외국 소설을 읽어보고 싶네요. 요즘 통 한국 소설로만 읽어 놓으니 스릴러와 추리에 대한 감각이 떨어졌어요. 뭐, 원래 감각이 없었지만. 스노우맨 읽고 싶은데 너무 두꺼우이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