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퍼 수집하기
폴 클리브 지음, 하현길 옮김 / 검은숲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내 컬렉션이 된 걸 환영해"(P. 74)

 

 폴 클리브의 데뷔작 '쿠퍼 수집하기'는 이 스릴러가 뉴질랜드 산(産)인 것만큼이나 독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두 가지나 되는데 하나는 위에 인용한 말처럼 이 소설이 '연쇄 살인마'를 모으는 사람의 이야기 라는 것입니다. 연쇄 살인마를 사냥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미드로도 만들어진 '덱스터'를 통하여 본 적이 있지만 정말로 그가 왜 연쇄 살인을 하며 그런 일을 하면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듣기 위해서 그냥 모으는 사람의 이야기는 이 작품을 통해 처음 듣는 것 같습니다. 이 정도만으로도 매우 흥미로운 설정이지만 이 작품엔 또 하나의 독특성이 있는데요. 그것은 보통 스릴러의 경우 쫓기는 자와 쫓는 자가 일대일로 겨루는 이를테면 '톰과 제리'식의 게임인데 반하여 이 스릴러 '쿠퍼 수집하기'는 그 구도에 앞서 말한 연쇄 살인마를 수집하는 사람이 한 명 더 끼어드는 '3파전'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지운 감독의 영화 중에 세 명의 캐릭터가 서로 물고 물리는 레이스를 펼쳤던 영화가 있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같은 게임을 보여준다는 것이죠.

 

 소설을 주로 이끌어가는 그 세 명을 잠깐 소개해 본다면,

 

 

 PROFILE NO.1 : GOOD GUY

 

  먼저 '좋은 놈'인 테이트 전직 형사가 있습니다. 그는 머리가 비상하고 범인 체포에 아주 능력있는 형사였지만 자신의 딸과 아내를 차로 들이받고 그 때문에 딸을 죽인 자를 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사사로이 처형한 일로 죄의식을 느껴 결국 형사를 그만두고 경력을 살려 사립탐정을 했으나 딸 아이는 영영 떠나버렸고 사랑스러웠던 아내는 그 사고로 거의 식물인간이 되어 요양원에 있어 그 괴로움에 거의 삶을 포기하듯 살아가다 결국 음주 운전으로 한 여자아이를 들이받고는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이제 막 풀려난 자입니다. 출감하자마자 예전 그의 형사 동료 슈로더가 그들이 살고 있는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를 가장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는, 제복 입은 사람만 살해한다고 해서 '제복살인마'란 별명이 붙은 여성 연쇄살인마 '멜린다 X'를 추적하는 걸 도와달라고 의뢰해 옵니다. 하지만 그 의뢰에 채 뛰어들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변호사 도노반 그린의 방문을 받습니다. 사실 그는 테이트가 음주운전으로 들이받았던 여자, 엠마 그린의 아버지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원수와 다를바 없는 테이트의 변호사가 된 건 그 역시 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 테이트를 직접 처단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상 죽이려는 찰라 테이트의 간곡한 설득으로 딸 아이의 생사여부를 지켜보고 결행하기로 작정하게 되었고 결국 기적적으로 딸 아이가 살아나자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죠. 그렇게 도노반 그린과 테이트는 같은 죄의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테이트의 처단을 도노반 그린만 유일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찾아와 말합니다. 엠마 그린이 사라졌으니 찾아 달라고. 그 때 살려준 빚을 그것으로 갚으라고.

 

 

 PROFILE NO.2 : BAD GUY

 

 그리고 나쁜 놈, '쿠퍼'가 있습니다. 그는 엠마 그린도 다니고 있는 대학의 범죄 심리학 교수입니다. 주로 연쇄살인마를 상담하여 정신분석을 하고 있는데 책도 한 권 저술했지만 그리 빛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도 수집하는 게 있습니다. 연쇄살인마의 신체 부위 입니다. 그는 그러한 병적인 수집욕을 범죄심리학자로서 범죄자의 심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애써 자위하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언제 돌출될지 모르는 살인 충동을 그것으로 애써 잠재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다 그 연쇄살인마의 엄지손가락을 페덱스로 받았던 날 그는 테이져를 맞고 납치됩니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 한 남자가 '내 컬렉션이 된 걸 환영해'라고 말하더니 사람을 죽일 때의 느낌을 들려줘 라고 말하죠. 가까스로 살인 충동을 억누르고 살아가는 스스로는 선량한 시민이라 여기고 있는 쿠퍼로서는 정말 미치고 펄쩍 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PROFILE NO.3 : STRANGE GUY

 

 

 쿠퍼를 가두고 광기로 몰아가는 사람. 그가 바로 '이상한 놈', 에이드리안입니다. 그는 오래도록 살인 병력을 가진 이들과 함께 정신병원에 있었고 그 때문에 연쇄살인마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관련된 책도 많이 읽은 사람입니다. 정신적 성숙은 채 자라지 못해 자신의 욕망을 어디까지 실현해야 하는지 가늠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상한 놈'입니다. 그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뿐이니까요. 책으로만은 잘 이해할 수 없었던 연쇄살인마의 병적인 심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연쇄살인마의 신체 부위를 수집하는 '쿠퍼'를 수집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에이드리안은 그 쿠퍼가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책에서 읽은 대로 그의 살인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그의 기호에 맞는 여인까지 납치해오는 성의를 보이죠. 그는 쿠퍼에게 연쇄살인마의 심리적 상태에 대해 집요하게 묻습니다. 그런데 거기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비극적인 과거와 관련된 것이었죠. 그가 쿠퍼를 수집해 알고 싶어했던 건 그 과거와 관련해서 자신의 진짜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쿠퍼는 에이드리안에게 있어 일종의 대차대조표와 같은 것이었죠. 그에게는 살인도 수집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자신이 진짜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었죠.

 

 

 소설은 이렇게 세 명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러면 떠오르는 의문은 이것이죠. 왜 작가 폴 클리브는 이런 설정을 택했던 것일까? 그러게 정말 왜 이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요? 잠시 김지운 감독의 '놈놈놈' 영화로 돌아가보죠. 아시다시피 이 영화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유명한 서부 영화 'GOOD, BAD AND UGLY'에 대한 오마쥬이기도 합니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그 영화의 배경은 미국의 남북전쟁이었습니다. 북부의 산업자본주의가 남부의 전통적인 농경자본주의를 대체하던 순간이었죠. 그렇게 현대 자본주의의 한 원형이 만들어지던 시기였습니다. 레오네는 일부러 그 시기를 가져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영화에 나오는 'GOOD, BAD AND UGLY'의 세 사람을 모두 지금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이들의 원형으로 보여주려 했던 것이죠. 거기엔 타인이 어떤 처지에 빠져있던 아무런 관심없이 ㅇ로지 자신이 원하는 돈만 추구하는 'GOOD'이 있고 자신이 원하는 돈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타인의 삶 따윈 파괴해 버리는 BAD'이 있으며 있는 거라곤 오로지 돈에 대한 저급한 욕망 밖에 없어서 신념도 없고 용기도 없어서 그저 비굴하게 이리저리 오고가면서 돈 벌 궁리만 하는, 그래서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렘의 후예라고도 할 수 있는 'UGLY'도 있습니다. 즉 레오레는 보여주려 했던 것이죠.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이 셋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김지운 감독도 비슷한 생각에서 그 영화의 설정을 가져왔습니다. 그가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은 굳이 웨스턴 틀을 가져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은유였습니다. 레오네의 미국 남북전쟁과 똑같이 일제라는 돈에 종속된 한국 사회를 나타내는. 그러니 거기에 나오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도 사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은유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많이 이상화되고 키치화되어 본래의 그 뜻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지만.

 

 아무튼, 폴 클리브가 하고자 하는 것도 레오네와 김지운과 비슷합니다. 그 역시 이 세 인물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투영하려 한 것이죠. 특히 이 '신자유주의'라는 지옥 속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을 말이죠.

 

 네, 이 소설 '쿠퍼 수집하기'는 이 지옥을 견뎌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크라이스트처치'에 대한 묘사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소설의 '크라이스트처치'는 어떠한 도시입니까? 폴 클리브는 소설 초반에 그 곳이 어떠한 곳인지 꽤나 공들여 묘사합니다. 그를 통해 밝혀지는 그 도시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그 곳은 '도살자'나 '멜린다 X'와 같은 연쇄살인마들이 활보하는 도시이고 테이트가 교도소에 4개월 가량 갇혀있는 동안 범죄율이 50%나 증가한 도시이며 엠마 그린의 사소한 친절조차 범죄로 오해되어 따귀를 얻어맞는 그렇게 타인에 대한 불신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도시였습니다. 테이트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이렇게 바로 대답할 정도로 말이죠.

 

 "이 도시 말이야. 아니, 사회라고 해야 하나? 나도 잘 모르겠어. 자넨 이 크라이스트처치를 어떻게 생각하지?"

 "이전보다 아주 나빠졌지."

 난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즉시 대답했다. (P. 21)

 

 폴 클리브는 이것만으로 부족했는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이 얼마나 지옥인지 보여주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결정타까지 날려줍니다.

 

 이제 그들은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라는 글자가 가로로 새겨진 2미터 높이의 회색 벽돌담을 지나쳤다. 이 도시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환영합니다'란 문구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누군가가 처치(CHURCH)에 스프레이로 X 자를 긋고 '도와주소서(HELP US)라고 적어놓기까지 했다.(P. 22)

 

 '크라이스트처치'는 이런 장소입니다. 그런 면에서 나중에 밝혀지는, 에이드리안도 있었던 '그로버 힐스'와 닮았죠. 겉으로는 사회의 부적응자를 요양하고 치료하는 병원이었으나 그 실상은 수감된 자들에게 가족을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그 사적인 복수를 허용해 주었던 그 '그로버 힐스' 말이죠. 그렇게 '그로버 힐스'는 '크라이스트처치'의 원형과도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늘로부터의 구원이 필요할 수 밖에요. 하지만 신은 죽었고 구원은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사적 복수의 공공연한 실행은 이것을 뜻하는게 아닐까요). 자신이 저질렀던 사적 복수로 인한 죄책감을 이제 타인을 도와줌으로써 갚으려 하는 테이트, 오로지 혼자 살아남는 것에만 전념하는 쿠퍼 그리고 사회가 가한 억압 속에서 정말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려 자기 존재의 진실을 알기 원하는 에이드리안은 어쩌면 우리의 것과도 닮아있을지 모르는 각 자가 만들어가는 그 구원의 궤적을 보여주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쿠퍼가 에이드리안에게 대차대조표였듯이 테이트, 쿠퍼 그리고 에이드리안 역시도 우리의 대차대조표인 것이죠.

 

 장장 631페이지에 걸친 여정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처음으로 접해보는 뉴질랜드산 스릴러에다 연쇄살인마를 수집하는 이야기에다 3파전으로 전개되는지라 더욱 흥미를 느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죠. 특히나 후반으로 갈수록 긴장감이 고조되어 더욱 읽을 맛이 났습니다. 그러니 이 흥미로운 '대차대조표'를 여러분도 한 번 보심이 어떨까 싶어요. 어쩌면 이 소설을 읽고나서 쿠퍼를 수집한 에이드리안이 그에게 처음했던 말을 여러분 역시도 하게 될 지 모르겠네요.

 

"내 컬렉션이 된 걸 환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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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10-06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흥미로운 설정이네요.
굉장히 독특한 부분을 집어서 말씀해주셔서, 정말 손이 절로 갑니다.
헤르메스님 서재에 들어오면 항상 꼴까닥 넘어간다니까요,, ㅎㅎ.

잘 지내고 계시죠?
작성한 글을 하나 잃어버리셔서, 속상하시겠어요... ^^

오드득 2012-10-07 23:59   좋아요 0 | URL
우와! 마녀고양이님. 또 이렇게 깜짝 방문을 해 주셨군요! ^ ^
저는 뭐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 같지만
마녀고양이님은 어떠세요? 잘 지내시고 계신가요?
요즘 마녀고양이님의 그 주옥같은 글들을 못 읽으니 너무 허전해요.
많이 바쁘셔서 그런 것이겠죠. 여유가 되실 때 꼭 글 좀 올려주세요^ ^
 

 

 

 

 

 

 

 

 솔직히 빔 벤더스의 영화들은 한 개인을 다룰 때 더욱 빛을 발한다.

 니콜라스 레이를 다루었던 '물 위의 번개'가 그랬고 오즈 야스지로에게 헌정되었던 '도쿄가'도 그랬다. 그의 영상은 아무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마치 전혀 모르는 낯선 인물을 처음 대하듯 하는 새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그 새로움 속에서 마치 이제까지 그저 정사각형의 평면으로만 알아왔던 것이 정육면체의 입체라는 것을 알게 되듯 더 깊이 그리고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번에 나온 피나 바우쉬에 대한 영화도 그러하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나 '카페 뮐러'등 그녀의 작품들을 새롭게 재현하면서 또 그녀와 함께 했던 동료들의 회고담을 통하여 드러나는 피나 바우쉬는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피나 바우쉬가 아니라 재현된 그 순간, 절대로 똑같이 반복될 수 없는 동작의 한 순간이나 공중에 떠오른 물방울의 위치처럼, 전혀 새롭게 다가온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비록 빔 벤더스의 필터를 거친 피나 바우쉬의 삶이라 할지라도 그건 빔 벤더스의 피나 바우쉬가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그 순간 우리들 자신의 피나 바우쉬라는 점이다. 당신이 피나 바우쉬를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이 영화를 통해 만나는 피나 바우쉬는 오로지 당신만의 피나 바우쉬라는 것이다. 흔히들 영화는 공감을 토대로 만들어진다고 하지만 빔 벤더스의 '피나'만큼은 여럿이 춤을 추더라도 개인들의 동작은 다 다른 피나 바우쉬의 무용처럼 피나 바우쉬와 당신만의 일대일 개인적인 대면이다.

 

 

 그것을 위해서 빔 벤더스 자신은 ;비록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지기는 하나 자신이 일종의 필터로 개입하는 것을 최소화 했다. 일단 영화는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로 전개되지 않는다. 무용과 삽입되는 회고 인터뷰는 최소한의 안내도 없이 무작위로 관객에게 던져진다. 그 앞에서 관객은 마치 무작위로 내던져진 퍼즐 조각을 대면하는 듯한 느낌마저 가지게 된다. 이러한 불친절하고 낯선 형식 때문에 이 영화는 그대로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가진다. 영화란 늘 누군가의 의식과 눈을 거쳐 만들어지기 때문에 아무래도 관객은 그의 눈과 의식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소외효과'란 관객에게 미칠 수 있는 감독의 시각과 의식을 최소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장치다. 즉 관객이 오로지 자신의 눈과 의식으로 자기만의 이야기로 영화와 대화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빔 벤더스가 이 영화에서 불친절하고 낯선 형식을 가져온 것도 그 이유였다. 이 영화는 피나 바우쉬와 당신만의 대화이며 당신만의 이야기로 이 영화를 채우라는 것이다. 그것은 회고 인터뷰에서도 잘 드러난다. 거기서도 빔 벤더스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터뷰 장면을 쓰지 않는다. 우리가 늘 보아왔던 인터뷰 장면과는 달리 이 영화에선 그들의 말과 그들의 얼굴이 따로 논다. 말은 들리는데 보여지는 얼굴은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상과 음성의 불일치는 기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말은 어디서 들려오는 것일까? 진짜 저 사람의 말이기나 할까? 하는 생각으로 영화에서 한 발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빔 벤더스가 이렇게 하는 것은 인터뷰 역시도 지금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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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드레스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끝을 알 수 없는 작가.

 그가 바로 피에르 르메트르이다.

 이게 결말이겠거니 싶으면 어느 순간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나고 그 열린 문으로 들어선 순간! 그 결말은 또 다른 출발로 이어진다. 그렇게 진실과 거짓이 능수능란하게 뒤바뀌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자리를 서로 바꾸며 해결이 오해로, 비극이 희극으로 마구 반전되는 작가 그가 바로 피에르 르메트르이다. 그가 다시 찾아왔다. 여름 미스터리 독서계를 뒤흔들었던 수작 '알렉스'에 뒤이어 그와는 스탠드얼론인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로 돌아온 것이다. 이 작품 역시 피에르 르메트르에게 있어 '플롯의 귀재'라는 별명은 여전히 마땅함을 보여준다. 더구나 이 소설은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완벽한 대칭적 구도마저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소설의 처음 부분에 나오는 여주인공이라고 할만한 소피가 자신이 보모로서 돌보는 레오가 죽었을 때 그를 품에 안고 마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처럼 절규하는 부분이 소설의 가장 마지막 이제 과거와는 완전히 결별한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했기에 상징적으로는 죽었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는 딸과 아버지의 대화 부분과 서로 댓구를 이루는 것 처럼 소설 속의 모든 에피소드들이 정확히 자기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마치 정교하게 쌓아올려진 블럭과도 같이 그 미세한 부분조차 정확한 계산으로 이쪽으로나 저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맞추어진 것을 보노라면 흡사 매우 공정한 심판관을 보는 듯 하다. 아니, 사실 르메트르 그는 심판관이다. 말하자면 매우 최소화된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이 소설은 일종의 권투시합과도 같다. 소피라는 여자와 프란츠라는 남자가 맞부딪히는 총 4 라운드의 권투시합. 바로 그 시합의 심판이 작가 르메트르이며 독자인 우리들은 관객인 것이다.

 

 

 ROUND 1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라운드는 소피의 절규로 부터 시작된다. 자신이 돌보는 여섯 살 밖에 안되는 레오가 죽었기 때문인데 소피는 혹시 자신이 죽이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과거에도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마다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확신하지는 못한다. 다만 정황상 자신이 범인이 아닐까 의심될 뿐이다.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전남편도 그런 식으로 죽었다. 그래서 소피의 정신은 온전하지 못하다. 잦은 건망증에 기억 상실증 그리고 시도때도 없이 몰려드는 불안에 겹쳐지는 사랑을 잃은 탓에 번져 나오는 우울증까지. 자신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상태다. 그래서 그녀는 진실을 확인할 생각도 않고 달아난다. 겨우 안정을 찾았나 싶었던 그녀의 삶은 다시금 불안한 도피자의 정처없는 유랑 속으로 떨어진다. 작가 르메트르의 매의 눈 같은 날카로운 필치는 이러한 소피의 마음 한 조각까지 모두 남김없이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손에 잡힐 듯이 세세하게 확인하게 된다. 그녀의 영혼이 지금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를...

그래서 뒤이어 그녀와 관계했던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이제 그녀의 의심은 우리들에게도 전염된다. 혹시 정말로 그녀가 레오를 죽였을지 모른다 생각하는 것이다. 그녀는 무려 8개월 동안이나 도피한다. 하지만 경찰의 추적은 점점 조여오고 최종적으로 신분을 세탁해 완전히 달아나려 한다. 신분을 세탁할 가장 좋은 방법은 결혼이다. 그래서 그녀는 상대를 찾는다. 물론 영원히 결혼할 생각은 없다. 필요한 때까지만 살 작정이다. 그 기한이 지나면 남편은 소피에 의해 폐기되어야 한다.

 

 이렇게 1 라운드는 오로지 소피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우리는 르메트르가 선택한 3인칭 관찰자 시점 때문에 관찰자로 머무르면서 남김없이 드러내는 르메트르의 필치를 따라 소피가 지금 어떤 존재인지 그 모든 것을 보게 된다. 그런 우리에게 소피는 그야말로 병든 영혼이며 세상으로 부터 격리되어 마땅한 가해자로 보인다. 그리고 순결한 희생자가 그녀 앞에 도래한 순간 2라운드가 시작된다.

 

 ROUND 2

 

 2 라운드에서 시점의 주인공이 바뀐다. 뿐만아니라 서술 스타일 역시 달라진다. 2 라운드에서 우리가 보게되는 것은 일기다. 프란츠라는 남자의 것으로 놀라운 것은 쓰여있는 시점이 소피의 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전이라는 것이다. 프란츠는 일기에 우연히 소피를 보고 자신이 포기했던 계획을 다시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그녀를 스토커처럼 따라다녔다고 쓴다. 단순히 따라다닌 것만 아니라 치밀한 계획하에 그녀의 삶을 조금씩 파괴하기까지 한다. 일기는 그러한 파괴의 기록이다. 그녀를 육체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다. 일부러 물건을 숨겨서 소피로 하여금 스스로 건망증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고 사람들로 부터는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히게 한다. 프란츠는 점점 강도를 높여 그녀를 히스테리에 빠지게 하고 결국 그녀의 삶을 뿌리 째 파괴해 버린다.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라운드에서 우리는 이제 새로운 진실을 알게 된다. 소피가 왜 그렇게 병든 영혼이 되어버렸는지 그 이유에 대한 진실이다. 그것은 소피 탓이 아니었다. 그 배후에서 그녀가 모르게 그녀의 삶을 유린한 프란츠 때문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프란츠는 왜 소피에게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일까? 그 긴 세월에 걸친 프란츠의 치밀하고 집요한 파괴 계획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우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잔혹한 프란츠의 행위를 보며 저절로 이런 의문을 떠올리게 된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1라운드와 2라운드에 대해서만 말하자.

 

 '알렉스'에서 분명히 느낄 수 있었지만 피에르 르메트르는 그냥 평범한 스릴러 작가는 아니다. 그건 이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왜 1 라운드와 2 라운드의 서술 스타일을 바꾸었던 것일까? 문제는 1 라운드의 소피는 가해자인 줄 알았는데 피해자였다는 점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신적 문제는 사실은 프란츠가 의도한 결과였다. 진정한 가해자는 바로 2 라운드의 프란츠였다. 그런데 이렇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자리를 서로 바꾸는 것 말고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한 가지는 1 라운드와 2 라운드의 서술 스타일이 정확히 문학의 역사에 있어서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은 순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문학의 역사로 보자면 그 서술 스타일은 1인칭에서 3인칭으로 흘러왔다. 그것은 근대가 되고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사람들에게 하나의 이야기가 널리 읽힐 수 있게 되어 결국 소설이 발명된 것과 일치하는데 사실 바로 여기에 3인칭 시점으로 변해야 했던 까닭이 있다. 보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의 접근이 자유로워짐으로 인해 그 이야기들이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에 있어서도 공감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야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확실히 수신자 하나만 놓고 썼던, 그렇게 1인칭이 주가 될 수 밖에 없었던 내간체와는 달랐다. 그렇다면 많은 이들에게서 공감을 이끌어내려면 어떡해야 하는가? 그것은 아무래도 한 가지 밖에는 없다. 이야기가 진실인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일어났던 일의 기록처럼 여기게끔 하는 것이다. 진실은 개인의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모두 무릎 꿇릴 수 있는 만능열쇠와도 같은 것이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임을 알려줄 수 있는 서술 방법이 고안된다. 그것이 바로 3인칭 서술 이었다. 3인칭이 1인칭과 달리 사람들에게 보다 진실로 다가갈 수 있는 건 그것에는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3인칭을 읽을 땐 그들이 직접 본다고 생각하지 누군가의 필터로 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1인칭을 읽을 때는 언제나 '나'라고 하는 이의 눈을 통해 들여다본다고 여기게 된다. 즉 보다 더 객관적일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3인칭을 읽으면 보다 진실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나아감은 보다 진실에 가깝게 나아가는 것이었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문학의 역사에서 서술 스타일이 발전했던 그 까닭과 그럴 수 있게 한 원인이 모두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에서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된다. '1 라운드'에서는 진실이 '2 라운드'에서는 관찰이 주가 되어 나타나지 않았던가. 더욱 놀라운 것은 소피 마음의 작은 한 조각까지 남김없이 보여주었던 그 매의 눈처럼 날카로웠던 르메트르의 필치마저 작가 자신의 정교한 계산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3인칭 시점이 객관적 진실을 담보하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더욱 선명히 각인시키려는 의도로 말이다. 물론 그것은 독자들의 뒤통수를 내려치기 위함이다. 그 세세하게 묘사되었던 것 하나까지도 남김없이 누군가의 설정이요 의도된 효과였음을 드러내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진실이라 믿었던 것은 '2 라운드'에서 전면적으로 펼쳐지는 누군가의 관찰과 개입의 효과에 지나지 않았다. 진실을 향해 나아갔던 역사는 소설에서는 거꾸로 퇴보했다. 그 어떤 진실도 누군가가 만들어낸 환영일 수 있었다. 아니 사실은 우리 역시도 3인칭을 읽으면서 어떤 진실을 본다고 생각했기 보다는 다만 그러한 관습적 믿음만을 소비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우리는 스스로의 것이든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것이든 아무튼 그러한 작위가 만들어낸 판타지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셈이다.

 

 바로 이 작위적 판타지. 진실로 보이게끔 설정된 환영.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르메트르는 1 라운드를 그렇게 공들여 소피의 심리를 3인칭 객관적 시점으로 묘사하다가 2 라운드를 1인칭 시점의, 소설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단계의 스타일로 바꾸어 썼던 것이다. 근데 왜 갑자기 '진실로 보이게끔 설정된 환영'이 툭 튀어나오는 것인가? 이게 바로 르메트르가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려 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어 접근하고 있는 것. 프로이트를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 라캉에 의해서 모든 문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으로도 말해졌던 것. 그것이 바로 작위적 판타지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건 바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다. 이 소설의 저변을 도도히 흐르고 있는 것은 바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다. 그것의 근거는 너무도 많다. 스포일러를 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말하자면 소설 첫 부분 부터 소피는 '유사 엄마의 자리'에 서 있다. 레오의 시신을 안고 절규하는 소피의 모습은 그대로 아들 예수의 시신을 안고 절규하는 성모 마리아를 조각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을 가져와 모성으로서의 소피를 더욱 구체화한다. 그런데 프란츠가 소피를 그토록 괴롭히는 것은 자신의 엄마와 관계가 있다. 좌절된 엄마를 향한 그의 욕망을 소피를 통해 대리 충족시키려는 것이다. 소피와 프란츠의 관계에 있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것이 '돌봄'이라는 것도 한 근거가 된다. 사실 이 소설의 대부분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돌보는 얘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러한 '돌봄'이 많이 나온다. 서로 상처입히고 죽이기만 하는 스릴러 장르로서는 상당히 이채로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독특한 설정 역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를 드러내는데 있다. 소피와 프란츠는 그 욕망의 삼각형 안에서 여러 번 자리를 이동한다. 소피는 딸이었다가 엄마이기도 하고 프란츠는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소피의 욕망도 프란츠의 욕망도 오디이푸스 컴플렉스가 늘 그렇듯이 충족되었다가 좌절되고 대리 만족으로 변질되기를 반복한다. 오디이푸스 컴플렉스에서 중요한 것은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상징계의 개입이다. 아들은 2자 관계에서 아버지의 개입으로 인한 3자 관계에로의 변화로 결국 자신은 엄마의 욕망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아버지의 권위를 받아들이게 된다. 유사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해서나마 엄마의 욕망 대상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바로 그 권위의 받아들임이 상징계의 개입을 통해서 일어난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언어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받아들일 때 그 아버지가 이루는 모든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서를 진리라 여기고 그것에 자신을 적응시켜 나간다. 그것이 주체화의 과정이다. 진짜 자기 주체는 아니가 아버지가 설정한, 하지만 그 사회를 살아가려면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주체이다. 만들어진 주체. 진실이라 여기게끔 설정된 환영에 지나지 않는 주체. 이것은 그대로 '1 라운드'에서 보여준 소피와 일맥상통한다.

 

 바로 그렇게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는 오디이푸스 컴플렉스가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 우리가 이 근대라는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을 보여주는 그런 소설이다. 그런데 그것은 2 라운드에서 알게되듯 진실이 아니다. 그건 다만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환영에 불과하다. 거짓의 놀음. 그 안에서 우리는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니는 욕망을 이루러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고 있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분명히 보여준다. '1 라운드'에서의 소피와 '2 라운드'에서의 프란츠처럼 우리가 주체가 되면 될 수록 왜 스스로에게서 더 소외될 수 밖에 없는지를. 그건 바로 우리에게 주체가 되도록 강요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 자체가 누군가의 의도로 만들어진 거짓 환영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오디이푸스 컴플렉스, 그 뿌리에 자리잡은 본성은 오로지 허위와 기만 뿐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욕망을 이루려고 하면 할 수록, 그렇게 주체가 되면 될 수록 늘어나는 것은 오로지 자기 파괴 뿐이다. 소설의 결말은 더욱 분명히 그것을 보여준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 스포일러상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못하겠고 단순히 말하자면 그것은 완전히 타자의 자리에 서는 수 밖에 없다. 소설의 결말이 보여주는 것 처럼 내가 아닌 '나'가 되는 것이다. 어차피 지금의 나란 오디이푸스 컴플렉스가 만들어낸 환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속 나로 남아 있어서는 자기 소외의 여정에서 달아날 수 없다. 지금의 나를 벗어나 완전히 다른 자의 위치에 서는 것. 그것만이 그 파괴의 여정에서 발을 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결국 '1 라운드'에서 소피의 도피 여정이 보여주는 의미도 이것이다. 거기서 소피는 소피 아닌 자가 되기 위해 계속 달아나는데 그 여정은 결코 자기를 포기하는 여정이 아니라 정말은 오히려 본래의 자기 자신에게로 다가가는 여정인 것이다. 이것은 특히 '2 라운드'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집요하게 소피를 추적하는 프란츠의 여정과 대비되어 더욱 뚜렷이 강조된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이런 식으로 구성과 내용의 모든 조각들을 가지고서, 그것도 아주 흡인력 있는 이야기로 이 오디이푸스 컴플렉스 안에서 만들어 놓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의 자아라는 것이 과연 정말 '나'인지 아니면 '남'에 의해 설정되어진 한낱 거짓된 환영에 지나지는 않는 것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다소 투박하게 말하자면 표면적으로 이 소설은 한 여성의 진정한 자신의 모습 찾기라고 할 수 있지만 보다 깊은 쪽에선 소피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지금 내가 진짜라고 여기고 있는 내가 누군가로 부터 설정된 나일수 있다는 가능성을 통해 타자의 위치로 옮겨가 나를 다시 한 번 스스로 재설정해보도록 하는 소설이다. 놀랍도록 빨리 읽히지만 그런 면에서 기억에서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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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철학하기 -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바꾸는 101가지 철학 체험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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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

생각만해도 왠지 벌써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고 마음이 부담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다.

그만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던 철학.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꼭 한 번 벗해야 한다고 현인들은 말씀해 오셨지만 살아보니 일부러 그런 복잡한 생각 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길을 가다 아주 예뻐보이는 철학책들이 내 옷깃을 부여잡아도  '도를 아십니까' 묻는 사람들을 피하듯  일찌감치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기 바빴던 철학...

 

 하지만...

삶이 예상대로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거나 예기치 않았던 삶이 준비한 반전을 맞이하다 보면 도대체 사는 것의 의미란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날이 사소한 불운들과 커다란 불행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겪다보면 도대체 이 모든 것들에 의미는 있기는 할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만 생각하는 삶은 근시안적이다. 그 때 그 때 닥친 일들을 헤치울 수 있을 뿐 보다 높은 곳에서 멀리 헤아리게 하지는 못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철학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부담스럽다. 뭔가 쉽게 철학이라는 것을 해 볼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라면 좋겠는데....

 

그런 당신을 위해 툭 떨어진 책...

 

 

 

 

 

 

 

 그것이 바로 로제 폴 드르와의 '일상에서 철학하기'이다.

 

 프랑스의 국제철학학교 교수를 역임했던 그는 지금까지 수많은 철학에 관련된 책을 펴냈는데 그 철학책들에겐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건 바로 철학을 난해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이 아니라 알고보면 철학이란 그렇게 어렵지 않고 현실과 단단히 결부되어 있으며 현실을 보다 더 생생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이다. 이는 로제 폴 드르와가 항상 책을 쓸 때 염두에 두는 점이기도 한데 그렇게 한결같이 이어져 온 로제 폴 드르와의 주제 의식이 가장 잘 나타난 책이 바로 이번에 나온 '일상에서 철학하기'이다.

 

 

 웃! 왠지 제목에서 부터 뭔가 난해한 게 느껴져... 하는 당신을 위해 책에 대해서 잠깐 얘기하자면...

 

이 책은 절대로 우리가 흔히 떠올리게 되는 그런 이론서가 아니다. 이 책에 가장 합당한 정의는 아마도 '놀이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여기에는 모두 101가지의 일상에서 별다른 노력없이 즐길 수 있는 철학 놀이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밑줄을 그어야 할 부분은 '별다른 노력없이'란 부분이다. 정말로 이 책에 실린 놀이들을 하는데는 별로 힘들일 필요가 없다. '상상으로 사과 깎아보기'라든가 '반짝이는 별 내려다 보기' 혹은 '소리를 줄인 채 TV 화면 보기' 같은 것이 부담을 줄 리는 없을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별 것 아닌 것으로만 보이는 이런 경험들이 과연 철학과 무슨 관계가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속단은 금물.

 로제 폴 드르와는 정말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별 것 아닌 것으로만 보이는 이러한 101가지의 경험적 놀이를 통해 분명히 철학적 경험으로 인도하고 있으니까.

 

 

 

이를테면 '상상으로 사과 깎아보기'를 보자...

로제 폴 드르와는 101가지 모든 놀이를 이야기 하기에 앞서 항상 그 놀이에 걸리는 시간과 필요한 소도구 그리고 그 효과까지 미리 설명해 두고 있는데  '상상으로 사과 깎아보기'에 걸리는 시간과 필요한 소도구 그리고 효과는 그에 따르자면 이렇다.

 

소요시간 20 ~ 30분 / 도구 없음 / 효과 집중력

 

 내가 이 놀이를 택한 건 리뷰를 쓸 때마다 내가 늘 겪었던 경험이기도 해서이다. 나는 리뷰를 쓰기 전에 보통 먼저 머리로 대강의 윤곽을 그리고 나서 실제 글로 옮긴다. 그런데 머릿속으로 글의 분명한 세부까지 다듬고 나면 슬며시 꾀가 생긴다. 이 정도로 마무리 해 놓았으면 그냥 글로 옮기기만 하면 되니까 나중에 써도 상관없겠지 하고 말이다. 그래서 미루다가 쓰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데 그렇게까지 세부적으로 다듬어 놓았던 내용이 막상 글로 옮기게 되자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걸 많이 경험했다. 그건 결코 내가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듬어 놓은 그 상태 그대로 옮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글로 실체화되려는 순간에는 뭔가가 맞지 않고 앞과 뒤가 틀어지며 균형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블럭처럼 위태위태 하기가 일수였다. 이런 반복된 경험들이 내게 있었음은 로제 폴 드르와의 바로 이 글을 읽고서야 생각났다.

 

 우리가 머릿속에서 현실을 쉽고 분명하게 재현해낼 수 있을거라는 믿음은 상당 부분 착각일 수도 있다.(p. 67)

 

 경험상 이 말은 진실이었다. 그저 옮기기만 하면 될 정도로 다듬어 놓았는데도 막상 글로 그대로 옮기기조차 쉽지 않았다. '상상으로 사과 깎아보기'란 놀이는 바로 이러한 떠올리는 것과 현실로 하는 것과의 괴리라는 재현의 어려움을 체험하는 놀이다. 그러면 이 놀이를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철학적 경험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의식에 혹은 마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착각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다. 우리는 마음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우리가 서슴없이 남들 앞에서 남의 말을 듣기도 전에 우리가 생각하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카메라처럼 정확히 현실을 모사하고 또 재현해낼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상상으로 사과 깎아보기'를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로제 폴 드르와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당신이 이 체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현실에 얼마나 불충실한지, 현실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재현하는 데에 얼마나 취약한지에 관한 것이다. 평소에는 "현실? 그쯤이야 뭐..."라고 생각하는, 유난히도 잘난척하는 우리의 정신이 말이다.(p. 70)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해 겸허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사과를 먹기 쉽게 조각내는 것처럼 각자의 마음이 소화하기 쉽게 잘라내고 다듬고 더러는 왜곡시킨 현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보다 온전히 총체적이고 진실된 현실을 담고자 한다면 우리는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야 한다. 신이 입은 하나요 귀는 두 개를 만드신 것도 마음에 본래적으로 각인된 그러한 한계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로제 폴 드르와의 '일상에서 철학하기'는 별 거 없어보이는 그런 경험들을 통해 철학적 경험들로 인도하는 책이다. 정말 놀이처럼 즐기다가 어느 순간 '돈오점수'하게 되는 그런 책이다. 상식적인 견지에서 철학은 언제나 일상의 경계 바깥에 존재한다고 생각되어왔다. 일상이 멈추는 곳. 철학은 일상에서 뚝 떨어져 나온 공간에서나 가능한 사색적인 활동으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로제 폴 드르와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의 일상이야 말로 철학적 사색을 위한 더없이 훌륭한 공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특별한 공간을 선택할 필요도,   별다른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다. 그저 한번쯤 상상해 보는 것, '뜨거운 태양 아래 배깔고 한숨 자기'나 '아무에게나 미소 짓는 것' 혹은 '헌책방에서 탐닉하기'나 '밤거리를 하염없이 돌아다니기'와 같이 평소에는 잘 하지 않았던 행동들을 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고보니 이 책에 가장 잘 어울리는 비유는 도라에몽이 가지고 있는 '어디든지 문'일 것 같다.

 

 

 

 아무리 당신이 지루한 일상 속 공간에 있다고 해도 로제 폴 드르와의 이 문을 꺼내고 들어가기만 하는 새로운 경험과 의미로 채워지는 일상을 만나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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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감히 말씀드리자면, 존 그린의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를 읽기로 생각하셨다면 일단 장소를 신중하게 선택하셔야 합니다. 가급적 버스나 지하철 혹은 강의실이나 도서관 같이 많은 사람이 있을 수 있는 장소는 피하시는 것이 어떨까 말씀드리고 싶네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솟구쳐 흘러내리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면 말이죠. 지하철에서 읽다가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리는 바람에 당황했던 경험자로서의 말이니 유념하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다'라는 말을 우리는 식상하리만치 흔히 보지만, 또 곧이곧대로 믿고 보았다가 실망한 경험도 하늘의 별들만큼이나 많지만 이 책 만큼은 그 말이 순도 100%의 진실입니다. 16세의 말기 암환자로 언제 멈출지 모르는 폐를 위해 별도의 산소통을 그림자처럼 달고 살아야 하는 소녀 헤이즐. 예정된 죽음은 피할 수 없고 모든 치료는 다만 그것을 조금 지연 시키는 것에 불과할 뿐인, 마치 사형집행일이 예정된 사형수와도 같은 그 마음의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새벽이 찾아올 때 풀잎들이 그렇듯이 저절로 마음 여기저기 돋아난 감성의 잎새에 송알송알 슬픔이 맺혀서 커지고 커지다가 그 잎새가 무게를 못 이겨 절로 눈물로 뚝 하고 떨어지게 되니까요.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던 그 날은 잔뜩 흐렸던 오후였습니다. 또 하나의 태풍이 저 아래에서 몰려오고 있다는 뉴스가 들렸던 날이기도 했습니다. 하나의 태풍이 이제 막 지나갔는데 또 하나의 태풍이 온다니. 삶은 그러한 어려운 고비의 연속인가 봅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행복한 편이죠. 아직 우리의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으니까요. 아무리 새로운 태풍이, 험난한 난관이 닥쳐와도 하얗게 비어있는 미래로 인해 내일을 다르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누구도 바꾸지 못하는 결정된 미래가 있다면. 그것도 곧 닥쳐올 것이 확실히 예정되어 있다면... 그러지 못하겠지요. 어쩌면 모든 것에 허무함을 느낄지도 모르겠어요. 만나는 사람은 먼저 이별을 예감해야 하고, 하고 있는 일들은 미처 완성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예감해야 하며,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에 없어졌을 경우 어떤 슬픔을 안고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야 할테죠. 아니 존재 자체가 이미 그들에게 부담이 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로도 지울 수 없는 힘겨움을 짙고 길게 남기기 때문에 그로 인해 늘 미안해하고 늘 아파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렇게 물을 수 밖에 없겠지요.

 

 나는 왜 태어났는가?

 왜 이런 몸으로 태어나서 사람들에게 힘겨운 고통과 끝없는 상실감만 주고 가는가?

 도대체 내가 겪는 고통 그리고 가족이 안게 되는 고통... 이 모든 고통에 대한 의미는 무엇인가?

 아니, 도대체 여기에 무슨 의미는 있기나 한가?

 

 헤이즐이 찾고자 한 것은 바로 이 질문의 대답이었습니다. 그 때 한 책이 그녀에게 빛을 가져다 주었죠. 피터 반 호텐이 쓴 소설 '장엄한 고뇌'가 바로 그 책입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 안나 역시 헤이즐 처럼 말기 암 환자였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자신과 비슷해서 그 소설을 수십번이나 반복해서 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헤이즐이 그토록이나 숭배에 가깝게 열광적으로 읽은 것은 그 책이 바로 자신의 고통에 대해 어떤 의미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장엄의 고뇌'에서 그 부분 알지? 안나가 체육 수업인갈르 하기 위해 축구장을 가로 질러 가다가 풀밭에 그대로 엎어지고 그래서 암이 신경계에 재발했다는 걸 깨닫는 거. 그렇게 일어날 수가 없어서 얼굴이 축구장 잔디에서 1인치쯤 떨어진 곳에 있는 것 같은 상태로 꼼짝 못하고 풀을 자세히 바라보다가 빛이 풀에 비치는 모습을 알게 되는..., 문장은 기억이 안 나지만 안나가 인간성이라는 건 창조의 위대함에 감탄할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을 깨닫는 휘트먼적인 계시를 받게되는 부분이었어. 그 부분 알지?"(p. 185)

 

 바로 이렇게 말입니다. 인간성이 창조의 위대함에 감탄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신경계에 재발한 암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듯이 자신에게 닥쳐온 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운명 역시도 무언가를 위한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다고 믿도록 만들었기에 열광적으로 읽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녀의 반복된 독서는 사실 자신의 삶에 무언가 의미가 있기를 바라는 갈망의 표현에 다름아니었습니다. 헤이즐은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것은 인류가 신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난 뒤 내내 현존하는 고통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물었던 질문이었고 그 대답이기도 했습니다. '신이 존재하고 성경에서 말하듯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면 어째서 고통과 죽음 같은 것을 허락하는 것이냐?'는게 그 질문이었다면 '그것을 통해서 신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계기로 삼고자 하심이다' 하는 게 당시 대표적인 대답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잘 나타난게 바로 구약 성서의 '욥기'라고 할 수 있겠죠. 이것은 기독교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신을 믿는 모든 종교들은 고통을 다 비슷하게 해석합니다. '아무 의미없는 고통은 없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헤이즐도 그렇게 믿고 싶었습니다. 열정적으로 수 십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읽을만큼 강하게! 그렇게 위안을 얻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의미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정작 그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자신은 죽어 없어지는데... 사후세계의 존재가 불확실한만큼 그 의미의 여부 또한 불확실하긴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헤이즐은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그토록 집착했던 고통과 죽음의 의미가 사실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의미에 집착해 보았자 자신은 그저 미래가 아직 결정되어지지 않은 운 좋은 이들이 삶에 대해 더욱 애착을 가지도록 봉사하는 것 뿐임을. 정확히 고통의 의미에 대한 집착은 그저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해서 내가 당하고 있는 이 불운을 좀 더 의미심장한 것으로 만들어서 그 부당함을 희석시키려는 자기 기만에 불과할 뿐임을...

 

 바로 그 집착의 무용성을 오매불망 그리워 해 온 피터 반 호텐와의 직접적 만남에서 헤이즐은 여실히 깨닫는 것입니다.

 

 헤이즐이 '장엄의 고뇌'에서 안나가 죽고 난 이후의 일들을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건 안나의 고통과 죽음이 의미가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호텐과 만나면서 지금까지 가졌던 자신의 집착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달았고 그 때문에 자신이 왜 그토록 의미에 집착했었는지 그 진정한 이유도 알게 됩니다. 바로 미래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죠. 그렇습니다. 그녀는 미래라는 게 이미 결정되어져버린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미래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미래란 다름아닌 자신이 죽고 난 뒤의 미래였습니다. 자신이 부재한 거기서 남아있게 될 사람들이 자신의 상실로 인해 겪게 될 고통이 안타까워 그들에게 조금의 위안이라도 될 수 있도록 의미를 찾고자 했던 것이죠. 그것이 안나의 죽음 이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던 진짜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그 호텐은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습니다. 신이 모든 불행에 대해 침묵하듯이 말이죠. 신이 헤이즐에게 가져다 준 불운과 마찬가지인 호텐의 폭언을 들으면서 미래는 우리가 도무지 어쩔 수 없으며 삶은 오로지 이 현재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바로 거기서 헤이즐은 숫자 '0'(삶) 과 '1'(죽음) 사이에는 무수한 무한이 있다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우리의 사랑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 수학 이야기를 할게요. 전 수학자가 아니지만 이건 알아요. 0 과  1 사이에는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습니다. 0.1도 있고 0.12 도 있고 0.112도 있고 그 외에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죠. (...) 어떤 무한대는 다른 무한대 보다 더 커요. 저희가 에전에 좋아하던 작가가 이걸 가르쳐주었죠. 제가 가진 무한대의 나날의 크기에 화를 내는 일도 꽤 많이 있습니다. 전 제가 가질 수 있는 숫자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아, 어거스터스 워터스에게도 그가 가졌던 것 보다 더 많은 숫자가 있었기를 바라요. 하지만 내 사랑 거스. 우리의 작은 무한대에 대해 내가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로 다할 수가 없어. 난 이걸 세상을 다 준다해도 바꾸지 않을거야.(p. 273)

 

 

 

  그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이란 다름아닌 수 많은 현재입니다. 헤이즐은 삶이란 바로 현재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총합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저 더 큰 총합이 있고 더 작은 총합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더 큰 총합이 허락되었으면 좋겠지만 아니라해도 이제는 상관없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총합이 아니라 그것들이 모여 이루어내는 색깔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남겨진 자들을 위해 오늘을 부정하고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의미에 집착하기 보다는 순간 순간 주어지는 현재에 최선을 다하면서 보다 많은 의미있는 추억들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보다 현명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견디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헤이즐은 그동안은 자기가 죽고 난 뒤 남겨질 어거스터스의 상실감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려고 그의 애정을 거부했었지만 호텐을 만난 다음 들른 안네 프랑크의 집에서는 드디어 어거스터스에게 열정적으로 키스를 합니다. 지금 존재하는 현재를 어거스터스와의 사랑으로 싱싱한 초록으로 채색하기 위해서... 이 안네 프랑크는 사실 '장엄의 고뇌'의 안나와 이어지고 그녀들이 모두 상실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헤이즐의 이 행위는 안나의 죽음 이후에 대해서 헤이즐 자신이 가졌던 질문에 대해 자기 스스로 대답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었습니다. 결단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문득 고 정채봉 선생님이 쓰셨던 우화 하나가 떠오르네요. 심한 바람 때문에 삼일간 배를 타지 못해 여관에서 기다리던 사람들 이야기인데 한 사람은 바람이 잦아들어 배를 타기만 기다릴 뿐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은 그 시간동안 옷을 빨고 식물을 가꾸는 등 바람을 핑계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바람이 가져다 준 비어버린 시간을 적극적으로 의미로 채워갑니다. 삼일에 불과했지만 배를 오르는 그들의 행색은 하지만 참으로 달랐습니다. 삼일 간 늘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바람에 행색이 꼬질꼬질 해져버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의미를 채웠던 사람은 깨끗한 의복에 열매를 맺은 식물마저 안고 있었죠. 이것이 바로 삶에 대한 비유임은 두 말할 필요 없을 것입니다. 현재를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될 때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가를 짧지만 이 이야기만큼 제대로 보여주는 것은 또 없다고 생각됩니다. 헤이즐은 바로 이 우화 속 '현재를 적극적으로 의미를 채우는 자'가 된 것이죠. 그러고보면 헤이즐과의 사랑을 통해 자신에게 허락된 짧은 생애를 의미있는 것으로 채워가는 연인에게 '어거스터스'란 이름을 부여한 것도 흥미롭습니다.

 

 어거스터스란 이름은 어딘가 낯이 익습니다. 바로 8월을 나타내는 '어거스트' 때문이죠. 이 두 이름이 비슷한 것은 '어거스트'라는 이름 자체가 어거스터스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터스는 로마에서 케사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자였습니다. 그는 케사르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7월'의 이름을 지은 것을 보고 자기도 질 수 없다며 '8월'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었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원래 8월은 31일이 될 수 없었는데 케사르가 31일이면 자기도 31일이어야 한다면서 아예 그 날 수 까지 31일로 바꿔버린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시간이라는 그야말로 주어진 현실을 자신의 적극적인 의지로 바꿔버린 대표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결정된 미래에 상관없이 지금 존재하는 현재에 모든 것을 거는 어거스트에게 그 이름은 참으로 합당한 것이죠. 어거스트는 자신도 암환자에다 더구나 그 때문에 한 쪽 다리까지 절단된 상태이지만 그로 인해 비관하지 않습니다. 무기력하지도 않구요. 오히려 더없이 주어진 현재를 소중하게 여기며 충실하게 삽니다. 헤이즐에게 '장엄의 고뇌'가 있다면 어거스트에게는 '새벽의 대가'가 있습니다. 한 영웅의 고군분투 대학살 생존기인 '새벽의 대가'는 모든 현재를 적극적으로 채워나가는 어거스트에게 있어 그야말로 어울리는 책입니다. 그는 친구 아이작이 당했던 실연을 보복할 수 있게끔 도와줄 뿐 아니라 마지막까지 자기 스스로 뭔가를 하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헤이즐이 어거스트에게 끌린 것도 당연하겠죠. '장엄의 고뇌'에서 찾고 싶었던 진정한 해답은 바로 어거스트가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존 그린의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는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는 책입니다. 정말 우리가 어디를 보아야 하고 무엇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지 깊이 느끼게 해 주는 책입니다. 존 그린은 그것을 보다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삶과 죽음에 있어 가장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의 영혼을 데려온 것입니다. 바로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기 위해서...

 

 이 세상을 살면서 상처를 받을지 안 받을지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누구로부터 상처를 받을지는 고를 수 있었요. 난 내 선택이 좋아요. 그 애도 자기 선택을 좋아하면 좋겠어요. (p. 325)

 

그렇습니다. 아무리 헤이즐 처럼 어거스트 처럼 그 삶이 한계지워져 있다고 해도 결국 삶은 우리의 선택으로 이루어 집니다. 그 믿음이 중요합니다. 주어진 현재가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만들어가야 하는 현재라는 사실을.  이런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에 만일 존 그린이 이 책을 선택해서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저도 그 때 헤이즐이 들려주었던 그 대답을 똑같이 들려주겠습니다.

 

  나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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