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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드레스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끝을 알 수 없는 작가.
그가 바로 피에르 르메트르이다.
이게 결말이겠거니 싶으면 어느 순간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나고 그 열린 문으로 들어선 순간! 그 결말은 또 다른 출발로 이어진다. 그렇게 진실과 거짓이 능수능란하게 뒤바뀌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자리를 서로 바꾸며 해결이 오해로, 비극이 희극으로 마구 반전되는 작가 그가 바로 피에르 르메트르이다. 그가 다시 찾아왔다. 여름 미스터리 독서계를 뒤흔들었던 수작 '알렉스'에 뒤이어 그와는 스탠드얼론인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로 돌아온 것이다. 이 작품 역시 피에르 르메트르에게 있어 '플롯의 귀재'라는 별명은 여전히 마땅함을 보여준다. 더구나 이 소설은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완벽한 대칭적 구도마저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소설의 처음 부분에 나오는 여주인공이라고 할만한 소피가 자신이 보모로서 돌보는 레오가 죽었을 때 그를 품에 안고 마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처럼 절규하는 부분이 소설의 가장 마지막 이제 과거와는 완전히 결별한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했기에 상징적으로는 죽었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는 딸과 아버지의 대화 부분과 서로 댓구를 이루는 것 처럼 소설 속의 모든 에피소드들이 정확히 자기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마치 정교하게 쌓아올려진 블럭과도 같이 그 미세한 부분조차 정확한 계산으로 이쪽으로나 저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맞추어진 것을 보노라면 흡사 매우 공정한 심판관을 보는 듯 하다. 아니, 사실 르메트르 그는 심판관이다. 말하자면 매우 최소화된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이 소설은 일종의 권투시합과도 같다. 소피라는 여자와 프란츠라는 남자가 맞부딪히는 총 4 라운드의 권투시합. 바로 그 시합의 심판이 작가 르메트르이며 독자인 우리들은 관객인 것이다.
ROUND 1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라운드는 소피의 절규로 부터 시작된다. 자신이 돌보는 여섯 살 밖에 안되는 레오가 죽었기 때문인데 소피는 혹시 자신이 죽이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과거에도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마다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확신하지는 못한다. 다만 정황상 자신이 범인이 아닐까 의심될 뿐이다.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전남편도 그런 식으로 죽었다. 그래서 소피의 정신은 온전하지 못하다. 잦은 건망증에 기억 상실증 그리고 시도때도 없이 몰려드는 불안에 겹쳐지는 사랑을 잃은 탓에 번져 나오는 우울증까지. 자신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상태다. 그래서 그녀는 진실을 확인할 생각도 않고 달아난다. 겨우 안정을 찾았나 싶었던 그녀의 삶은 다시금 불안한 도피자의 정처없는 유랑 속으로 떨어진다. 작가 르메트르의 매의 눈 같은 날카로운 필치는 이러한 소피의 마음 한 조각까지 모두 남김없이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손에 잡힐 듯이 세세하게 확인하게 된다. 그녀의 영혼이 지금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를...
그래서 뒤이어 그녀와 관계했던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이제 그녀의 의심은 우리들에게도 전염된다. 혹시 정말로 그녀가 레오를 죽였을지 모른다 생각하는 것이다. 그녀는 무려 8개월 동안이나 도피한다. 하지만 경찰의 추적은 점점 조여오고 최종적으로 신분을 세탁해 완전히 달아나려 한다. 신분을 세탁할 가장 좋은 방법은 결혼이다. 그래서 그녀는 상대를 찾는다. 물론 영원히 결혼할 생각은 없다. 필요한 때까지만 살 작정이다. 그 기한이 지나면 남편은 소피에 의해 폐기되어야 한다.
이렇게 1 라운드는 오로지 소피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우리는 르메트르가 선택한 3인칭 관찰자 시점 때문에 관찰자로 머무르면서 남김없이 드러내는 르메트르의 필치를 따라 소피가 지금 어떤 존재인지 그 모든 것을 보게 된다. 그런 우리에게 소피는 그야말로 병든 영혼이며 세상으로 부터 격리되어 마땅한 가해자로 보인다. 그리고 순결한 희생자가 그녀 앞에 도래한 순간 2라운드가 시작된다.
ROUND 2
2 라운드에서 시점의 주인공이 바뀐다. 뿐만아니라 서술 스타일 역시 달라진다. 2 라운드에서 우리가 보게되는 것은 일기다. 프란츠라는 남자의 것으로 놀라운 것은 쓰여있는 시점이 소피의 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전이라는 것이다. 프란츠는 일기에 우연히 소피를 보고 자신이 포기했던 계획을 다시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그녀를 스토커처럼 따라다녔다고 쓴다. 단순히 따라다닌 것만 아니라 치밀한 계획하에 그녀의 삶을 조금씩 파괴하기까지 한다. 일기는 그러한 파괴의 기록이다. 그녀를 육체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다. 일부러 물건을 숨겨서 소피로 하여금 스스로 건망증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고 사람들로 부터는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히게 한다. 프란츠는 점점 강도를 높여 그녀를 히스테리에 빠지게 하고 결국 그녀의 삶을 뿌리 째 파괴해 버린다.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라운드에서 우리는 이제 새로운 진실을 알게 된다. 소피가 왜 그렇게 병든 영혼이 되어버렸는지 그 이유에 대한 진실이다. 그것은 소피 탓이 아니었다. 그 배후에서 그녀가 모르게 그녀의 삶을 유린한 프란츠 때문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프란츠는 왜 소피에게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일까? 그 긴 세월에 걸친 프란츠의 치밀하고 집요한 파괴 계획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우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잔혹한 프란츠의 행위를 보며 저절로 이런 의문을 떠올리게 된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1라운드와 2라운드에 대해서만 말하자.
'알렉스'에서 분명히 느낄 수 있었지만 피에르 르메트르는 그냥 평범한 스릴러 작가는 아니다. 그건 이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왜 1 라운드와 2 라운드의 서술 스타일을 바꾸었던 것일까? 문제는 1 라운드의 소피는 가해자인 줄 알았는데 피해자였다는 점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신적 문제는 사실은 프란츠가 의도한 결과였다. 진정한 가해자는 바로 2 라운드의 프란츠였다. 그런데 이렇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자리를 서로 바꾸는 것 말고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한 가지는 1 라운드와 2 라운드의 서술 스타일이 정확히 문학의 역사에 있어서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은 순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문학의 역사로 보자면 그 서술 스타일은 1인칭에서 3인칭으로 흘러왔다. 그것은 근대가 되고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사람들에게 하나의 이야기가 널리 읽힐 수 있게 되어 결국 소설이 발명된 것과 일치하는데 사실 바로 여기에 3인칭 시점으로 변해야 했던 까닭이 있다. 보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의 접근이 자유로워짐으로 인해 그 이야기들이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에 있어서도 공감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야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확실히 수신자 하나만 놓고 썼던, 그렇게 1인칭이 주가 될 수 밖에 없었던 내간체와는 달랐다. 그렇다면 많은 이들에게서 공감을 이끌어내려면 어떡해야 하는가? 그것은 아무래도 한 가지 밖에는 없다. 이야기가 진실인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일어났던 일의 기록처럼 여기게끔 하는 것이다. 진실은 개인의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모두 무릎 꿇릴 수 있는 만능열쇠와도 같은 것이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임을 알려줄 수 있는 서술 방법이 고안된다. 그것이 바로 3인칭 서술 이었다. 3인칭이 1인칭과 달리 사람들에게 보다 진실로 다가갈 수 있는 건 그것에는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3인칭을 읽을 땐 그들이 직접 본다고 생각하지 누군가의 필터로 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1인칭을 읽을 때는 언제나 '나'라고 하는 이의 눈을 통해 들여다본다고 여기게 된다. 즉 보다 더 객관적일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3인칭을 읽으면 보다 진실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나아감은 보다 진실에 가깝게 나아가는 것이었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문학의 역사에서 서술 스타일이 발전했던 그 까닭과 그럴 수 있게 한 원인이 모두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에서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된다. '1 라운드'에서는 진실이 '2 라운드'에서는 관찰이 주가 되어 나타나지 않았던가. 더욱 놀라운 것은 소피 마음의 작은 한 조각까지 남김없이 보여주었던 그 매의 눈처럼 날카로웠던 르메트르의 필치마저 작가 자신의 정교한 계산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3인칭 시점이 객관적 진실을 담보하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더욱 선명히 각인시키려는 의도로 말이다. 물론 그것은 독자들의 뒤통수를 내려치기 위함이다. 그 세세하게 묘사되었던 것 하나까지도 남김없이 누군가의 설정이요 의도된 효과였음을 드러내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진실이라 믿었던 것은 '2 라운드'에서 전면적으로 펼쳐지는 누군가의 관찰과 개입의 효과에 지나지 않았다. 진실을 향해 나아갔던 역사는 소설에서는 거꾸로 퇴보했다. 그 어떤 진실도 누군가가 만들어낸 환영일 수 있었다. 아니 사실은 우리 역시도 3인칭을 읽으면서 어떤 진실을 본다고 생각했기 보다는 다만 그러한 관습적 믿음만을 소비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우리는 스스로의 것이든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것이든 아무튼 그러한 작위가 만들어낸 판타지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셈이다.
바로 이 작위적 판타지. 진실로 보이게끔 설정된 환영.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르메트르는 1 라운드를 그렇게 공들여 소피의 심리를 3인칭 객관적 시점으로 묘사하다가 2 라운드를 1인칭 시점의, 소설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단계의 스타일로 바꾸어 썼던 것이다. 근데 왜 갑자기 '진실로 보이게끔 설정된 환영'이 툭 튀어나오는 것인가? 이게 바로 르메트르가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려 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어 접근하고 있는 것. 프로이트를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 라캉에 의해서 모든 문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으로도 말해졌던 것. 그것이 바로 작위적 판타지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건 바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다. 이 소설의 저변을 도도히 흐르고 있는 것은 바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다. 그것의 근거는 너무도 많다. 스포일러를 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말하자면 소설 첫 부분 부터 소피는 '유사 엄마의 자리'에 서 있다. 레오의 시신을 안고 절규하는 소피의 모습은 그대로 아들 예수의 시신을 안고 절규하는 성모 마리아를 조각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을 가져와 모성으로서의 소피를 더욱 구체화한다. 그런데 프란츠가 소피를 그토록 괴롭히는 것은 자신의 엄마와 관계가 있다. 좌절된 엄마를 향한 그의 욕망을 소피를 통해 대리 충족시키려는 것이다. 소피와 프란츠의 관계에 있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것이 '돌봄'이라는 것도 한 근거가 된다. 사실 이 소설의 대부분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돌보는 얘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러한 '돌봄'이 많이 나온다. 서로 상처입히고 죽이기만 하는 스릴러 장르로서는 상당히 이채로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독특한 설정 역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를 드러내는데 있다. 소피와 프란츠는 그 욕망의 삼각형 안에서 여러 번 자리를 이동한다. 소피는 딸이었다가 엄마이기도 하고 프란츠는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소피의 욕망도 프란츠의 욕망도 오디이푸스 컴플렉스가 늘 그렇듯이 충족되었다가 좌절되고 대리 만족으로 변질되기를 반복한다. 오디이푸스 컴플렉스에서 중요한 것은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상징계의 개입이다. 아들은 2자 관계에서 아버지의 개입으로 인한 3자 관계에로의 변화로 결국 자신은 엄마의 욕망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아버지의 권위를 받아들이게 된다. 유사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해서나마 엄마의 욕망 대상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바로 그 권위의 받아들임이 상징계의 개입을 통해서 일어난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언어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받아들일 때 그 아버지가 이루는 모든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서를 진리라 여기고 그것에 자신을 적응시켜 나간다. 그것이 주체화의 과정이다. 진짜 자기 주체는 아니가 아버지가 설정한, 하지만 그 사회를 살아가려면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주체이다. 만들어진 주체. 진실이라 여기게끔 설정된 환영에 지나지 않는 주체. 이것은 그대로 '1 라운드'에서 보여준 소피와 일맥상통한다.
바로 그렇게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는 오디이푸스 컴플렉스가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 우리가 이 근대라는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을 보여주는 그런 소설이다. 그런데 그것은 2 라운드에서 알게되듯 진실이 아니다. 그건 다만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환영에 불과하다. 거짓의 놀음. 그 안에서 우리는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니는 욕망을 이루러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고 있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분명히 보여준다. '1 라운드'에서의 소피와 '2 라운드'에서의 프란츠처럼 우리가 주체가 되면 될 수록 왜 스스로에게서 더 소외될 수 밖에 없는지를. 그건 바로 우리에게 주체가 되도록 강요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 자체가 누군가의 의도로 만들어진 거짓 환영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오디이푸스 컴플렉스, 그 뿌리에 자리잡은 본성은 오로지 허위와 기만 뿐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욕망을 이루려고 하면 할 수록, 그렇게 주체가 되면 될 수록 늘어나는 것은 오로지 자기 파괴 뿐이다. 소설의 결말은 더욱 분명히 그것을 보여준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 스포일러상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못하겠고 단순히 말하자면 그것은 완전히 타자의 자리에 서는 수 밖에 없다. 소설의 결말이 보여주는 것 처럼 내가 아닌 '나'가 되는 것이다. 어차피 지금의 나란 오디이푸스 컴플렉스가 만들어낸 환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속 나로 남아 있어서는 자기 소외의 여정에서 달아날 수 없다. 지금의 나를 벗어나 완전히 다른 자의 위치에 서는 것. 그것만이 그 파괴의 여정에서 발을 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결국 '1 라운드'에서 소피의 도피 여정이 보여주는 의미도 이것이다. 거기서 소피는 소피 아닌 자가 되기 위해 계속 달아나는데 그 여정은 결코 자기를 포기하는 여정이 아니라 정말은 오히려 본래의 자기 자신에게로 다가가는 여정인 것이다. 이것은 특히 '2 라운드'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집요하게 소피를 추적하는 프란츠의 여정과 대비되어 더욱 뚜렷이 강조된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이런 식으로 구성과 내용의 모든 조각들을 가지고서, 그것도 아주 흡인력 있는 이야기로 이 오디이푸스 컴플렉스 안에서 만들어 놓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의 자아라는 것이 과연 정말 '나'인지 아니면 '남'에 의해 설정되어진 한낱 거짓된 환영에 지나지는 않는 것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다소 투박하게 말하자면 표면적으로 이 소설은 한 여성의 진정한 자신의 모습 찾기라고 할 수 있지만 보다 깊은 쪽에선 소피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지금 내가 진짜라고 여기고 있는 내가 누군가로 부터 설정된 나일수 있다는 가능성을 통해 타자의 위치로 옮겨가 나를 다시 한 번 스스로 재설정해보도록 하는 소설이다. 놀랍도록 빨리 읽히지만 그런 면에서 기억에서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