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프라우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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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동성과 중립성 차이는 뭐죠?

 수동성은 공경이죠. 수동적이라는 건 자신의 의지를 내주는 겁니다. 중립성은 초당파적이에요. 스위스인은 중립적이지, 수동적이진 않죠. 우리는 어떤 편을 들지 않아요. 우린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거울이죠.(p. 33)


  독일어로 '가정주부'를 뜻하는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의 소설 '하우스프라우'는 제목 그대로 안나라는 가정주부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원래 미국인이지만 남편을 따라 스위스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그리 된 게 얼마 되지 않아서 그녀에겐 스위스의 모든 것이 낯설다. 아는 곳도 없고, 아는 친구도 없다. 그녀는 너무나 낯선 땅에 이식된 한 포기 식물처럼 자신에게 익숙한 과거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이제 새로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이식된 식물'이란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실은 현재 그녀가 처한 상황을 문자 그대로 정확하게 나타내는 말이다. 그녀는 스위스와 가정이라는 현실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존재인 것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그것을 분명히 한다. 이렇게.


 안나는 운전하지 않았다. 운전 면허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세계는 교통수단이 들고 나는 일정에 따라서 빡빡하게 제한되었다. 안나의 남편인 브루노와 시어머니인 우르줄라가 버스가 운행하지 않는 곳까지 얼마나 기꺼이 데려다주려는지에 따라서. 안나의 다리가 얼마나 잘 움직이는지, 얼마나 멀리까지 걸을 수 있는지에 따라서. 하지만 안나가 가고 싶은 만큼 다리가 버텨 주는 일은 드물었다.(p. 11~12)


 이처럼 그녀는 진실로 이식된 식물이다.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마저 억눌려 있다. 지극한 수동성의 존재. 그것이 바로 안나다. 수동성.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내면을 이루는 핵심이며,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의 그녀를 이루고 있는 수동성의 집착을 오롯이 외부의 강요로 해석하는 것도 곤란하다. 어느 정도는 내부의 호응이기 때문이다. 억지가 아니라 자발적 선택. 안나는 스위스에서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질렀다. 그의 이름은 스티브. 너무나 미국적인 이름을 가진 그는, 그 이름답게 안나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버리고 미국으로 가버렸다. 안나도 스티브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이식된 식물이라 그러지 못했다.



 소설엔 그 스티브가 이미 부재한 상태로 나온다. 안나는 잃어버린 사랑 속에서 상처를 혀로 핥고 있는 고양이처럼 허덕이고 있는 중이다. 상심과 절망이 깊고도 깊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버리려 한다. 스스로 빛을 꺼버리고 어둠이 되려 한다. 그렇게 수동성을 원한다.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독일어를 배우고 다른 남자들도 만난다. 그러나 이 행위들이 수동성의 포기인 것은 아니다. 그녀와 불륜을 저지르는 아치는 그녀와 함께 독일어를 배우는 스코틀랜드인이다. 독일어와 불륜, 두 영역이 중첩된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아치는 그녀에게 폭력적이다. 안나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존중과 배려가 전혀 없는, 오직 자신만의 쾌락을 추구한다는 뜻에서 폭력적이다. 이것은 안나가 생리 중일 때 아치가 억지로 그녀와 관계를 맺는 장면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피가 사방에 흐르고 닦을 것이 주위에 없자 아치가 양말 하나를 벗어 안나에게 건넨다. 안나는 너무나 수치스럽지만, 자신도 모르게 '미안해'라고 말하고 안나가 양말로 몸을 닦는 동안 아치는 웃는다. 이런 관계가 어찌 능동적일 수 있으랴. 그렇지 않아도 섹스에 대해 안나는 이렇게 말한다.


 안나는 섹스를 좋아하면서도 좋아하지 않았다. 필요하면서도 필요하지 않았다.섹스와 그녀의 관계는 그녀의 수동성과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고 싶다는 난공불락의 욕망에서 우러난 난해한 동반자 관계였다. 그리고 원해진다는 것에 대한 욕망. 그녀는 누군가에게 원해지고 싶었다.(p. 62)


 누군가 자신을 원한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하는 섹스. 그렇게 섹스도, 불륜도 실은 수동성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독일어 역시 그렇다. 낯선 언어를 배우는 데 있어 자의가 개입될 여지는 거의 없다. 모든 언어는 나름의 확고한 의미와 문법 체계를 가지고 있다. 배우려는 이는 무조건 자신을 거기에 맞춰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어를 배우는 것 역시 '이식'의 또 다른 표현이다. 아치가 독일어와 불륜의 공집합인 것은 바로 거기서 연유한다. 안나는 이식에 순응한다. 그저 하염없이 수동적인 존재가 되려 애쓴다. 삶에 그 어떤 낙관도, 희망도 없으므로. 그 결과, 그녀는 모든 것을 잃는다. 조금이라도 능동적이 되었다면, 조금이나마 잃어버린 사랑에 미련을 갖지 않았더라면, 놓치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들이다. 커다란 비극에 이어, 더 커다란 상실이 찾아오고 그 때서야 안나는 자신이 정말 배워야 했던 언어가 무엇이었는지 깨닫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언어를 안나가 찾아가는 정신과 상담의인 메설리 박사로 부터 듣게 될 것이다.


 작가는 독일어를 배우는 것과 정신과 상담의와 상담하는 것을 유사하게 만든다.

 안나가 새로운 독일어를 배우듯, 자신이 알고 있는 말들의 진정한 뜻에 대하여 메설리 박사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독일어를 습득하는 것과 똑같이 메설리 박사로부터 말의 참된 의미를 하나 하나 배워간다. 저자가 원래 시인이라 그런지, 언어가 가진 이면이 새롭게 부각되는 장면이 많다. 아마도 이 모든 과정이 뜻하는 것은 타인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말을 찾아야 한다는 게 아닐까 싶다. 말은 모호한 것을 구체화 시키는 힘이 있다. 그만큼 존재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한다. 스티브와 안나가 만날 때, 스티브는 줄곧 빛에 대해 말했다. 스티브, 그는 안나에게 불의 존재였고, 빛의 존재였다. 안나는 스티브란 항성을 맴도는 행성이었다. 그 항성이 사라졌고, 안나는 자신에게 다시는 빛이 찾아오지 않으리라 여겼고 자멸을 선택했다. 그러나 메설리 박사는 빛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이라 말한다. 빛이 다가와 자신이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이 어둠을 물러가게 하지는 못한다고, 스스로 그 어둠을 관통하여 빛을 찾아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바로 그 빛을 향한 걸음을 언어가 도와줄 것이었다. 자신만의 언어가. 어차피 스티브가 준다고 여겼던 빛 또한 거짓에 불과했다는 게 밝혀지기도 하니.


 의식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그 결과는 고립이에요. 진짜 관계 대신에 상상한 관계만 가지게 되죠. 의식적 삶 속에 몸을 담그지 않게 될수록, 당신의 그림자는 더 검고 짙어지죠.(p. 347)


 '하우스프라우'는 자신이 놓쳐버린 것에 대한 너무 많은 미련 때문에 현재 지켜야 할 것마저 파괴해 버린 여인의 이야기였다. 상실에 낙담하여 창살 아래 갇힌 것을 선택한 결과 영원히 빛의 야외로 나가지 못하게 된 여인의 이야기였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남이 우리를 가두는 것보다 스스로 자신을 가두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장본인이 누군지도 모른 채, 그저 갇혔다는 그 사실만 가지고 아파한다.


 가라앉지 않을 배가 대양의 바닥에 내려앉기도 하고 로켓이 항상 재진입에 성공하지는 못한다. 사랑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미래를 약속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는 그녀가 사랑했던, 혹은 사랑했다고 말했던 모든 남자들을 잘못 판단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잘못 판단했다. 그녀는 이야기가 한창 진행되는 중간에서야 자신의 삶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와 자기를 혼동해 버렸다.(p. 397)


 섣부른 판단에 따른 수동성은 삶에 대한 겸손이 아니라 오만의 표현이다. 무작위와 예측 불허로 넘쳐나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재단하고 단정해선 이렇게 되리라는 자기만의 결론 끝에 나온 부동(不動)이니까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빠져나가기가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실은 내가 가진 오만의 한기로 더욱 두터워지는 얼음 감옥인데, 나갈 방도를 내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다른 곳에서만 찾고 구하고 있으니.


 행해질 수 없는 행위들이 있어요. 고치는 게 불가능한 결과가 있고.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은 너무 늦게 그런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이죠.(p. 238)


 '하우스프라우'는 불륜과 성애가 나오고 한 여인의 파멸을 그리지만(마지막 문장은 그녀의 죽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오히려 내게는 성장 소설로도 보였다. 견뎌야 할 겨울을 외면해선, 봄조차 향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맞다. 타산지석의 의미로 한 말이다. 어쨌든 지금의 난 그 겨울을 제대로 견뎌내기 위해서라도 혹시 내게도 나 자신이 만든 감옥이 있지는 않은지 찬찬이 살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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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8-10 0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동 공격성이란 단어가 있어요. 내면에 공격성이 들끓지만 그러한 공격성을 표출하기보다 책임을 회피하는 등의 소극적인 방식으로 반항하는 성격을 말하죠. 수동성을 단순히 의지없음으로 보기 쉽지만 수동성에도 매우 다양한 플러스 알파를 생각해 볼 여지가 있죠. 헤르메스님 리뷰를 읽으면 안나는 수동성에 대해 내부에서 적극적인 호응이 있다고 하시니 그녀는 수동 공격성에 더 가까운 거 같네요.

ICE-9 2017-08-10 19:31   좋아요 1 | URL
아, 그런 용어가 있었군요. AgalmA 님 말씀대로 수동성 내부에도 다양한 결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존재가 겉보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네요. 정말로 안나의 소극성은 내부에 쟁여둔 공격성이 왜곡되어 발현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생각해 볼만한 좋은 지점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AgalmA님이세요^^

AgalmA 2017-08-11 02:09   좋아요 1 | URL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 읽다가 알게 된 내용이에요. 헤르메스님도 읽어보시면 도움받을 정보 많으실 책이죠^^

ICE-9 2017-08-11 11:05   좋아요 0 | URL
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책 추천은 언제나 감사한 일이죠^^

희선 2017-08-11 2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죽음을 나타내는 말이 있다니, 앞으로 살아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죽다니... 지난달부턴가 사람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이룰 수 없는 게 없어서, 괴로워서, 힘들어서... 이 책하고는 상관없지만, 여전히 왜 그럴까 싶습니다 모든 것에서 달아나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는 것 같은데... 누군가 죽고 나서 시간이 지났을 때 그걸 알게 되면, 그 사람 몸은 다 썩어서 이제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이건 책을 보면서도 하는군요 좀 이상한 생각일까요 썩어서 흙으로 돌아간다 해도 사라지는 건 아니다는 말도 있더군요 그 말도 맞는 것 같습니다


희선

ICE-9 2017-08-13 21:15   좋아요 0 | URL
최근에 끌로드 샤브롤이 감독한 영화 ‘마담 보바리‘를 다시 봤습니다. 엠마 보봐리 역시 이 소설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사랑한 모든 것에 배신 당하고 더이상 믿을 것도, 기댈 곳도 없어지자 스스로 비소를 먹어 생을 마무리 지으려 하지요. 소설의 주인공 여성의 심리가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아직 운이 좋아 그런 지경까지 가 본적은 없습니다만 정말 엠마나 안나처럼 모든 것에 배신당하고 잃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세상에 무슨 미련이 남을까 싶기도하네요.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 보다, 더이상 세상에 자신을 매어놓을 게 없기 때문에 훌쩍 날아가버리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낙원남녀
나혁진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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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싸구려 질문을 먼저 해 봅니다. 추리 소설 좋아하시나요? 저는 좋아합니다. 아주 어릴 때 엘러리 퀸의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을 만난 뒤로 지금까지 계속 좋아해 왔습니다. 추리 소설도 깊이 파고들면 장르가 꽤나 다양한데 저는 그 중에서도 '본격'을 좋아합니다. 사실 이 말은 일본에서 쓰는 것인데, 쉽게 풀어 말하자면 '범인 찾기'라 할 수 있습니다. 파일로 반스 시리즈로 유명한 S.S. 반다인이 교양인을 위한 지적인 스포츠라 불렀던 바로 그것이죠. '범인 찾기'라 할 수 있는 데도 굳이 '본격'이라 쓰는 것은 역시 저의 허세 때문이겠죠. 추리 소설의 원조라 평가받는 에드거 알란 포의 '모르그가의 살인' 역시 범인 찾기였던 만큼 누구의 죄인가 밝히는 것은 추리 소설의 근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추리 소설의 황금기 때만 해도 이런 본격물이 대세였지만 지금은 꽤나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이미 역사가 오래된 지라 그만큼 설정도, 트릭도 한 번쯤은 다 써서 바닥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간혹 '범인 찾기'를 전면으로 내세운 작품을 만나면 반갑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네, 그런 작품이 나왔습니다. 때문에 구구절절 말이 많아진 것이죠. 무슨 책이냐구요? 바로 나혁진 작가의 '낙원남녀'란 소설입니다.



 나혁진 작가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첫 번째는 느와르, 두 번째는 스릴러, 세 번째는 라이트 노벨스러운 본격물이었는데 이번에는 순수 본격이군요.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달리하여 도전하는 게 좋아 보입니다. 역시 '범인 찾기' 소설답게 그런 쪽 방면으로 여왕으로 평가받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두 작품이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고 합니다. 플롯엔 '다섯 마리 아기 돼지'가, 캐릭터 구성엔 '왜 에번스를 부르지 않았지?'가 말이죠. 모티브가 된 작품을 같이 읽으며 비교해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각설하고, '낙원남녀'는 낙원아파트에서 1년 전 일어난 하나의 살인 사건과 또 하나의 살인 미수 사건의 범인을 찾는 것이 기본 스토리 입니다. 범인 찾기에 탐정이란 존재는 필수인지라 당연히 탐정이 등장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콤비를 이루는데요, 남자는 강마로, 여자는 유지혜 입니다.  이 둘이 주인공 입니다. 그래서 제목이 '낙원남녀'인 것이죠.


 유지혜는 사실 수사하게 되는 사건의 당사자 입니다. 살인 미수 사건의 피해자이니까요. 그녀는 한 기업의 비서로 일하다가 그 사건 때문에 심한 트라우마를 겪어 현재는 직장을 쉬고 창동에 있는 학원에 강사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술집에서 우연히 지혜를 본 강마로가 접근해 옵니다. 자신은 명탐정을 꿈꾸는 사람으로 그 훈련 겸, 유지혜의 사건을 꼭 해결하고 싶으니 같이 범인을 찾아내자고 말이죠. 반신반의 했던 지혜는 그가 건네 준 명함에 나와 있는 블로그를 찾아 갔다가 그가 서울대 재직 중인 로봇 공학자이며 이미 경찰이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한 번 추리로 해결한 적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결국 그와 함께 1년 전 사건의 범인을 찾아 나서기로 합니다. 공교롭게도 죽은 최순자와 지혜가 같은 낙원아파트 봉사 단체 회원이라 아무래도 그 봉사 단체가 관련된 것 같아서 회원들을 중심으로 수사해 나가게 되는데,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서라면 물 불 안 가리는 강마로와 그것 때문에 안절부절 하는 유지혜의 케미가 은근히 재밌습니다.


 이런 이야기 입니다. 뜬금없이 소개를 뚝 끊는 것은 특히 '범인 찾기'의 경우 줄거리를 시시콜콜 말하면 안 되기 때문이죠. 본격물을 대하는 최고의 자세는 사전에 아무 정보 없이 그냥 읽는 것입니다. 그래야 본인이 아무런 선입견 없이 제대로 추리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사항만 소개합니다. 제 글을 읽고 이야기가 궁금하셨다면 직접 읽어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소설은 정말 재밌습니다. 캐릭터의 묘사도 생생하고 둘 사이에 이뤄지는 앙상블도 좋습니다. 범인 찾기 과정, 범인의 트릭도 아주 현실적이라 더욱 몰입감을 높입니다. 물론 '헉!' 하는 반전도 마련되고 있구요. 한 마디로 본격에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구비되어 있으며 또한 잘 살려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저는 정말로 재밌게 읽었습니다. 그것도 한 달음에 말이죠. 장편으로는 오랜만에 만나보는 본격인데다 그것이 또한 꽤 성공적인 것이었기에 만족감 또한 컸습니다. 무더운 여름에 잘 빠진 본격만큼 좋은 것도 또 없습니다. 몰입으로 더위를 잊게 만들기 때문이죠. 바로 '낙원남녀'가 그런 시간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작가에게 바랍니다. 부디 이대로 끝나지 않게 해 주세요. 뒷 이야기가 보고 싶습니다. 기다리다 현기증이 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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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8-11 2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포가 쓴 소설 범인이 누군지 알아요 책도 읽지 않았는데 그걸 알다니, 다른 데 그게 나와서 알아 버렸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봤다면 이럴 수가 했을지... 어쩌면 그런 건 그 뒤에 다른 사람이 또 쓰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잘 생각나는 건 아니지만,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트릭은 잘 몰라도 읽다보면 범인을 짐작하기도 하는군요 짐작보다 어떻게 한 건지 같은 것도 알면 좋을 텐데 여전히 어렵네요 저는 왜 사람을 죽였을까, 그걸 더 보는군요 이런 거 본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내가 생각한 사람이 범인이라니, 하면서 마음속으로 좋아하기도 했는데...


희선

ICE-9 2017-08-13 21:21   좋아요 0 | URL
실은 희선님처럼 어떻게 보다 왜를 보는 게 전 더 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셜록은 왜 보다 어떻게만 집착하기에 인간미가 없지요. ‘왜‘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비극은 반복됩니다. 반면, 프랑스의 메그레는 어덯게 보다 왜에 더 신경씁니다. 범죄 보다는 인간에 더 눈을 두지요. 이걸 흔히 말하는 본격과 사회파의 구별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 본격은 ‘어떻게‘에 사회파는 ‘왜‘에 초점을 맞춥니다. 영국이 본격을, 프랑스가 사회파를 더 추구하게 된 것은 세계 대전의 영향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프랑스는 2차 대전 때 독일에게 점령 당했으니까요. 비극을 겪으면 아무래도 어떻게 보다는 왜에 더 신경쓸 수밖에 없겠죠. 우리의 세월호 참사가 그러하듯이.
 

이재용에게 12년 구형했다고 하는데, 담당 판사가 진경준 때 백아와 종자기 고사로 유명한 지음 어쩌고 하면서 뇌물죄를 무죄로 판결한 장본인이라 판결이 그닥 기대되지 않는다. 조윤선이 '핀셋 무죄' 된 것처럼 또 한 번 뒷 목 잡는 판결이 내려지는 게 아닐까 우려스럽다. 특검이 일을 잘 하면 뭐하나 판사들이 이 모양인데. 사법 개혁도 시급하다. 미국처럼 법관이나 검찰 고위직은 선거를 통해 뽑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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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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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고 난 뒤,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하나의 의문이었다. '줄리언 반즈는 독자에게 무엇을 전하기 위해 이런 소설을 썼을까?'하는 것. 일단 이번에 나온 2015년 작, '시대의 소음'은 '혁명' 교향곡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러시아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줄리언 반즈가 주목하는 시점이 좀 심상치 않다. 연대기 순이 아니라 그의 생애 중 가장 고난에 처했던 세 시기만 뚝 떼내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 독재 치하에서 작곡 활동을 했다. 스탈린의 통치에 조금이라도 거역하면 제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던 이들도 반역 혐의로 처형 당하던 시절이었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적어도 현재의 안락을 조금이나마 더 오래 누리고자 한다면 당이 원하는 음악이 아니라 개인이 바라는 음악을 할 수는 없었다. 해선 안 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 밥만 먹고 살아지던가? 예술가 역시도 아무리 위험이 눈에 뻔히 보이더라도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적인 이상(理想)을 작품에 구현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래서 했다. 자신만의 예술적 비전(vision)으로 형상화한 음악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은 꽤나 유명한 오페라 '므젠크스의 맥베스 부인'이다. 



 '므젠크스의 맥베스 부인' 오페라 공연 모습


여기서 그는 자신이 늘 하고자 했었던 전위적인 음악 스타일을 목초지에 양을 방목하듯 마음껏 풀어놓았다. 음악이 당연히 전보다 훨씬 난해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당, 정확히는 스탈린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므라빈스키가 지휘한 모스크바 공연에 참석했던 스탈린은 오페라 공연 도중에 불쾌감을 표시하고는 나가버렸다. 이것이 쇼스타코비치에게 커다란 위기를 불러왔다. 그 전까지 이 음악에 상찬을 아끼지 않던 소련의 모든 비평가들은 스탈린의 불만을 기점으로 모두 악평으로 돌아섰고 작곡가에 대해 맹비난하기 시작했다. 당에서도 곧장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의심하며 그가 음악으로 봉사해야 할 민중을 배신하고 오직 현실과 유리된 음악의 아름다움만 추구한다고 하면서 서슴없이 당시로서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형식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붙여버렸다. 마치 스탈린의 뜻이 소련 전체의 뜻인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러한 당의 낙인은 귓가 바로 곁에서 울리는 파멸의 전주곡이나 다름 없었다. 모처럼 개인의 신념에 따라 날개 짓 한 번 했을 뿐인데 찾아 온 것은 날개를 꺾는 것도 모자라서 목덜미를 움켜쥐고 다시는 우는 것조차 못하게 만드는 폭력이었다. 그들의 손아귀 안에서 쇼스타코비치는 두려움 가운데 헐떡이며 오직 죽음만을 생각했다. 그러나 죽을 수 없었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죽을 수 있는 용기가 부족해서였다. 그는 소시민이었다. 결코 우리와 다르지 않게 어느 정도의 우유부단함과 또 어느 정도의 비겁함을 공유하고 있었다.


 작곡 중인 쇼스타코비치


 '그래, 굽히자. 어차피 살아야 한다면 그들의 뜻대로 춤춰주자.'. 이처럼 우리가 일상 속에서 조직의 뜻에 따라 불의인 것을 잘 알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혀야 할 때 흔히 품게 마련인 굴종의 그 언어들을 그도 되뇌었다. 그리하여 다음 작품은 철저하게 그들 아니 전적으로 스탈린 취향에 맞는 곡을 썼다. 너무나 쉬어서 귀에 착착 감기는 음악을. 그것이 바로 아이러니 하게도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교향곡 5번, '혁명'이었다. 아니, 모든 것이 아이러니였다. 혁명이란 무엇보다 불의의 시대에 저항하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실현시키는 행위이지만 그것을 제목으로 가진 이 음악은 자신의 모든 독립적인 의지를 포기하고 그저 철저하게 타협하고 순응한 산물이었으니까. 이것은 스탈린에게 보내는 그의 항복 선언이요, 다시는 뜻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충성의 서약이었다. 다행히 그의 맹세는 받아들여져 그는 '므젠크스의 맥베스 부인'으로 잃어버렸던 것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쩌면 '혁명'에 담긴 아이러니는 그의 의도였을 수 있다. 아이러니에는 이와 같은 힘이 있으니까.


 아이러니는 - 어쩌면 가끔씩은, 그는 그러기를 바랐다 - 시대의 소음이 유리창을 박살낼 정도로 커질 때조차 -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지킬 수 있게 해 줄지도 모른다.(p. 127)


이것이 바로 소설의 첫 부분 '층계참에서'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위기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의 발목을 부여 잡는 두 번째의 덫이 곧 닥쳐온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나를 나로 있게 만드려는 모든 유혹을 뿌리쳤고 나락과 파멸의 빌미가 될 그 어떤 행동도, 인연도 하거나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나 커져 버린 그의 명성이 그리고 그가 인류의 자유를 구현하는 예술가라는 것 때문에 뒤따르게 되는 시대의 요구로 인해 또 한 번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번엔 소련이 아니라 서방 세계다. 그것도 소련과 정반대의 자리에서 개인의 자유를 가장 잘 구현하고 있다고 선전하던 미국. 바로 거기서 열리는 세계 평화를 위한 문화 과학 회의에 쇼스타코비치가 당의 요구로 소련의 대표가 되어 거기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혁명'을 쓴 대가였다. 그러나 그로서는 결코 받고 싶지 않은 답례였다. 그 회의에 참석한 자신에게 어떤 질문이 쏟아질지 너무나 명약관화 했으므로. 더구나 자신과 다르게 일찌기 자유를 찾아 소련을 져버리고 미국에 망명한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그 회의를 주관하고 있지 않았던가? 나보코프는 자신의 망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스트라빈스키가 파시즘을 비판하기 위해 지은 무조음악에 빗대어 이렇게 물을 것이 뻔했다. "스탈린의 독재 체제를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자신의 명성에 걸맞는 진실을 말한다면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의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질문을.


 세계 평화를 위해 열린 문화 과학 회의에서 연설 중인 쇼스타코비치


 그렇게 쇼스타코비치는 다시 한 번 마주한다. 자신의 내면에서 고유한 신념에 따라 우러나오는 외침들을 가로 막거나 깡그리 지워버리는 시대의 소음들을. 여기서 제목의'시대의 소음'이 과연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분명해진다. 그것은 저마다 다른 생각과 신념에서 발현되는 개인의 목소리들을 억누르고 오직 체제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단 하나의 소리만 존재하도록 하는 현실을 빗대고 있는 것이다. 소음이라 표현한 것은 그 소리가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소음은 우리의 이해를 바라지도, 대화의 여지를 남기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의지만 관철할 뿐이다. 모든 선동적인 연설과 구호가 그러하듯이.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정녕 시를 쓰고 싶다면 모든 것들이 침묵한 밤에 자기 내면의 고유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충고한 바 있다. 이처럼 예술은 누구와도 같지 않은 독자적인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예술을 존립시키는 생명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그것에 반하는 시대의 소음 속에서 번민하고 고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술가의 삶은 결코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명성이 높아지고 그 성취가 클수록 더욱 그는 자신의 삶에서 소외된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만큼 추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바라는 것과 시대가 원하고 강요하는 것 사이에서 예술가는 언젠가는 이쪽 저쪽으로 때로는 위태로울 정도로 갈지자 걸음을 걷게 된다. 방황은 필연적이다. 그 때도, 지금도. 예술가의 숙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바로 그러한 모습을 줄리언 반스는 쇼스타코비치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금일까? 바로 오늘의 시대 역시 예술가에게 시대적인 책무를 다하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석학들이 지금을 '거대한 후퇴'의 시대라 부른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강대국과 제3세계를 막론하여 곳곳에서 과거 회귀의 정황들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가 증가하고 가부장제 문화가 다시금 융성하려 하고 있으며 권위주의가 다시금 고개를 들고 파시즘이 은밀히 퍼져 나간다.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어떤 이는 말했다. 지금의 정세가 세계 제 2차 대전의 발발 당시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짙고도 깊은 어둠의 밤이 점점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시대가 암울할 수록 사람들은 예술가들에게 원한다. 점점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제대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밝혀달라고, 암흑 속에서 상처받는 자신들의 영혼을 헤아리고 절박하게 구원을 바라는 우리들의 목소리를 대신해 외쳐달라고 말이다. 오늘의 예술가들은 그런 부름을 받고 있다. IS의 무자비한 테러 앞에서, 날로 심각해지는 우익화의 흐름 속에서 그리고 첨예해지는 인종 간, 국경 간 갈등을 마주한 가운데 받는 부름이다. 참여의 부름이요, 선봉에 서라는 부름이다. 그러나 개인이 지기엔 버거운 부담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적 이상이나 가지고 있는 신념과 겹치면 다행이나 그렇지 않으면 오로지 번뇌와 갈등의 총량을 늘릴 뿐이다. 그렇다고 하여 외면할 수 있는가? 그럴 수도 없다. 예술을 통하여 시대를 좀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도 예술의 신이 부여한 엄연한 임무다. 예술의 신 아폴론은 치유와 정화의 신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뮤즈를 인도하는 아폴로'를 썼던 스트라빈스키는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음악의 신이 나타나 내게 음악을 위해 죽어줘야겠다고 요구하면 응해야 할 것 같다'라고.


카라얀이 지휘하고 베를린 필이 연주한 스트라빈스키의 '뮤즈를 인도하는 아폴로' 음반


 줄리언 반스의 대답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온전히 자기 희생을 선택 할 수는 없었나 보다. 스트라빈스키 보다 훨씬 더 자신의 자유와 신념을 위해 갈등하고 분투했던 쇼스타코비치에게 자신을 의탁해 소설을 쓴 것을 보면 말이다. 이처럼 쇼스타코비치는 반스 자신의 분신이며 '시대의 소음'은 시대가 점차 암울해짐에 따라 점점 더 부과되는 사회적 책임으로 인해 차츰 깊어져 가는 반스 자신의 내적 고민이 한껏 반영된 산물이다. 그만큼 그의 내면이 짙게 투영되어 있기에 소설 속 쇼스타코비치의 내면이 생동감을 얻는지도 모른다. 더우기 반스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견해는 접어둔 채, 오직 쇼스타코비치의 영혼만 충실히 재현하고자 한다. 독자로 하여금 시대와 격한 불화를 겪고 있는 그의 내면에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지 온전히 경험토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은 비록 그가 위대한 작곡가라 하여도 평범한 사람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아서 역시나 보통의 사람인 우리들에게 더욱 살갑게 다가오도록 만든다. 내 생각엔 이것이야 말로 이 소설이 지닌 가장 뛰어난 점이다. 쇼스타코비치를 나와 그리 먼 존재로 여겨지지 않도록 한다는 것. 문득 생각해 보면 그의 고민 역시 그렇게 멀어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비록 예술가는 아니지만, 살다보면 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과 원하는 자유가 바깥 세계와 부딪히는 경험을 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반스만이 아니라 독자인 우리도 자신의 감정을 깊이 투영하여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고민도, 갈등도.


 아마도 그 때문에 줄리언 반스는 이런 식으로 썼을 것이다. 그가 원했던 것은 독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정답을 주는 건 아니었으리라. 그랬다간 자신의 견해로 독자의 자유로운 사유를 억압하는, 그렇게  하나의 시대의 소음만 배출할 뿐일 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사유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그가 정했던 목표는 생각할 있는 자료들을 많이 주는 , 자신의 자유와 신념을 고수할 없게 만드는 현실적인 난제들 속에서 번민하고 갈등하는 영혼의 충실한 재현이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그 과정을 독자들이 온전히 경험하고 그를 통해 자기 나름의 대답을 구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 글 처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렇게 된 데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단단히 한 몫 한다. 3부인 '차 안에서'가 이를 증명한다. 두 번의 위기로도 모자라서 그는 다시 또 곤란을 겪는데, 이제는 당이 단 한 번도 당적을 가지지 않았던 쇼스타코비치에게 당에 가입하여 당원이 되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좀 더 나은 내일이 오리라는 희망 속에서 비참한 나날을 견뎌왔다. 그러나 인내의 결과 도래한 것은 자신의 자유와 신념을 포기하라는 더욱 강도가 높아진 요구일 뿐이었다.  이것은 소설의 소 제목들로 암시된다. 1부의 '층계참에서'와 2부의 '비행기에서'를 지나 3부의 '차 안에서'에 이르기까지 그는 점점 더 좁은 공간 속에 갇히는 것이다. 3부는 그야말로 쇼스타코비치가 체제와 시대의 볼모가 되었음을 보여 준다. 가득한 시대의 소음 속에서 원래 자신이 내고자 했던 목소리마저 변질되고 왜곡되어 이제 어느 음이 진정 자기가 낸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본다.  '시대의 소음'을 듣지 않기 위해 개인적 구원의 열망을 담아 내놓은 음악들이 시대의 논리와 강요에 의해 그저 또 다른 하나의 소음이 되어가는 것을. 너무 오래 살아서 스스로에게 큰 실망을 겪었던 그에게 남은 단 하나의 소망은 오직 죽는 것 뿐이었다. 그 죽음을 통해 자신의 음악이 해방되는 것 뿐이었다.


 이처럼 두 번의 커다란 위기에도 불구하고 내내 은밀하고 소소하게나마 지속되었던 자신의 자유와 신념을 위한 투쟁은 늘 패배로 이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조금의 용기가 남아 있었다. 적어도 음악과 그것에 헌신을 맹세한 자신의 영혼은 구할 수 있는. 아니, 남아 있었다는 표현은 잘못 되었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분명 자유와 신념을 포기하고 당에 가입했을 테니까. 그러므로 용기가 자라났다고 해야 하리라. 어째서 과거에 없던 것이 지금 생겨났는가? 아마도 그것은 가늘게나마 부단히 이어져 온 그의 저항과 투쟁 덕분이라고 아닐까 싶다. 한 사람의 삶에 존재한 어떤 것이든 그냥 사라지는 것은 없다. 그 무엇이든 반드시 자취를 남긴다. 계속 했으면 계속한 만큼, 헌신 했으면 헌신한 만큼 그것은 삶의 성장을 위한 자양이 된다. 후반의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은 분명 그런 것을 보여준다. 번뇌와 갈등도, 저항과 투쟁도 결코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랬기에, 쇼스타코비치의 마지막이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닐까?


시간이 흐를 것이고 음악학자들이 논쟁을 계속한다 해도 그의 음악은 자기 힘으로 서기 시작할 것이다. 전기뿐 아니라 역사도 희미해져갈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는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교과서 속의 말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른다. 때에도 여전히 가치가 있다면- 여전히 들어줄 귀가 있다면- 그의 음악은 ... 그냥 음악이 것이다. 그는 떨고 있는 학생에게 음악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다. 답이 질문자의 머리 깃발에 대문자로 쓰여 있었어도 여학생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답할 없는 것이 정확한 답이다. 음악은 결국 음악의 것이니까.(p. 257)


 반스는 비록 정답은 주지 못했지만 희망은 주었다. 당신이 오늘 어떤 걸음을 걸었든, 설령 그 걸음이 패배의 궤적이라 하여도 전혀 무의미 하지 않다고 말이다. 다만 그 걸음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우리가 보지 못하고 마냥 부정적 의미로 생각하는 것은 시대의 소음에 너무 지나치게 휘둘린 결과라는 말도 아울러.


보이저 2호


 그러고 보니, 이런 게 떠오른다. 1977년에 발사 되어 지금은 태양계를 지나 한창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고 있는 보이저 2호에 대한 것이다. 언젠가 만날 외계인과의 소통을 위해 거기엔 음악 하나가 실려 있다. 바로 '바하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이다. 앞에서 인용한 문장은 이 음악을 떠올리게 한다. 위의 문장이 말한 것과 같이 모든 시대의 소음이 소리를 잃고 한낱 활자가 되었을 때조차 여전히 우주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을 음악을. 그것도 시대 만이 아니라 인간과 전혀 다른 종이 가진 문화마저 초월하여 그 어떤 소음에도 방해받지 않고 진실된 소통의 순간을 가져다 주리라 믿는 음악이 말이다. 이보다 더 쇼스타코비치의 믿음이 옳다고 증거하는 것이 어디 있으랴.


 때문에 나는 쇼스타코비치의 믿음에 슬쩍 투영하고 있는 반스의 낙관에 기꺼이 판돈을 걸고 싶다. 오늘을 이루는 모든 걸음에 절대 무가치 한 것은 없다고 믿으련다. 고민도, 갈등도 모두 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소음에 귀를 막듯 섣불리 해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음악은 모든 음이 제대로 연주될 때 아름다운 선율이 된다. 어떤 음이 나쁘다고 해서 생략하고 좋은 음만 연주한다면 아무리 훌륭하게 작곡된 음악도 소음이 될 뿐이다. 삶도 다르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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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8-01 0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만 생각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테지만, 식구가 있다면 그러기 힘들겠죠 쇼스타코비치도 자신보다 식구를 생각해서 스탈린이 바라는 음악을 썼군요 그런 일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죠 한번 어느 한쪽을 고르면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쇼스타코비치를 탓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건 음악가만 그런 건 아니겠군요 쇼스타코비치를 보고 만약 자신이라면 어떡할까 하는 생각을 하겠네요 지금이라고 그런 일이 없는 건 아니겠습니다


희선

ICE-9 2017-08-01 03:18   좋아요 1 | URL
무언가를 얻거나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자유와 신념을 포기하고 굽히는 일은 현재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죠. 저 역시 살면서 수차례 겪었구요. 그런 굴종의 경험을 그동안 좋지 않은 것으로만 여겼는데, 이 소설을 읽고나니 이제 달리 헤아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네요. 어떤 패배의 기억이라 하더라도 패배일수록 쉽게 이뤄진 것은 없어서 거기에 반드시 과정이 있고 또 어려운 것인 만큼 치열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나 자신이 가장 많이 내게 충실한 시간일 수도 있는데, 단순히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해서 모두 무용한 것으로 버려둔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시대의 소음‘은 그런 시간일수록 더 헤아림의 탐침을 깊이 내리고 오래 살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제게 넌지시 묻고 있더군요. 반성의 응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레삭매냐 2017-08-01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리뷰 패권주의자 !!!

7월을 5분 남기고 쓰시다니 반칙입니다.

ICE-9 2017-08-01 19:39   좋아요 0 | URL
아니, 월마트급 사장님께서 겨우 구멍가게 지분 밖에 안되는 저에게 패권이라 하시면 ㅠ ㅠ
구멍가게니까 생존을 위해서라도 24시간 영업을 하는 것이죠... 쿨럭^^;
 
거대한 후퇴 - 불신과 공포, 분노와 적개심에 사로잡힌 시대의 길찾기
지그문트 바우만.슬라보예 지젝.아르준 아파두라이 외 지음, 박지영 외 옮김 / 살림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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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는 후퇴하고 있다. 누군가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과거의 것들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세계화를 찬양한 지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이주민을 막으려 나라의 빗장을 걸어 잠그기 바쁘다. 자신의 이익을 조금 손해 보더라도 인류 전체의 공영을 위해 힘을 쓰던 국가들은 이제 빠르게 그런 움직임을 걷어들이고 자신의 주머니가 얼마나 채워져 있는지만 신경쓰고 있다. 양극화가 도래했고 빈익빈 부익부가 흑사병처럼 거세게 퍼져나가고 있으며 인종주의가 부활하고 외국인 혐오가 증가하며 가부장주의가 활개를 친다. 시대적으로 한 물 간 것들이라 여겼던 것들이 무덤에서 부활하여 어느새 우리 옆가지 찾아와 버린 것이다.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프 당선은 이러한 거대한 후퇴를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가 되었다. 브렉시트는 유럽 연합으로 대표되는 세계화에 대한 거부였고 트럼프 당선은 포퓰리즘의 복권이었다. 그 두 사건을 많은 이들이 충격 속에 받아들였고 도대체 이 시대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하면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궁금해 했다.


 이런 우리의 의문과 불안을 알고 전 세계의 유명한 지식인들이 나섰다. '거대한 후퇴'는 세계적 석학들의 지금 시대에 대한 진단이자 이러한 난국을 파국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대안의 제시로 가득한 책이다. 



 제목의 '거대한 후퇴'는 칼 폴라니의 유명한 책인 '거대한 전환'에서 따온 것이다. '후퇴'란 말은 사회 발전과 진보로부터 멀어지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쓴 것이다. 올리버 나흐트바이란 학자는 이를 두고 '퇴행하는 현대화'라 부르기도 했다. 칼 폴라니는 놀랍게도 오늘 날의 이 후퇴를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상품이 되는 시장경제사회가 되면 분명히 거기에 대해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날 것이라 내다봤었다. 모든 것이 시장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에 반대하여 국가가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바라게 되고 그리하여 국가 주도의 복지 국가로 변해가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즉, 어떤 하나가 지배적인 상황이 되면 필연적으로 대항 운동이 일어나는데, 알고 보면 그 대항운동이란 사실 반동 운동으로 방어적으로 과거로 회귀 하려는 태도인 것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국가 주도의 복지 국가도 당연히 반동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신자유주의다. 복지국가의 전반적인 축소와 사회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모든 국가적 개입에 대한 공격을 기조로 하는.


 이런 신자유주의가 우리 시대를 지배한 것도 오래되었다. 자연히 이제 거기에 대한 대항 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2011년에 일어난 월가 점령이 대표적이다. 지난 겨울 우리나라의 촛불 집회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탄생도 세계적으로 보자면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에 기대어 오로지 제 배만 채울 줄 알았던 체제의 기득권 세력들은 모두 새로운 시대의 썰물 속에 깨끗이 쓸려가야 할 적폐세력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흐름이 무덤에 있어야 할 존재들을 좀비처럼 불러내게 된 것은 이전과 다르게 변화가 담아야 할 규모는 전 세계적으로 커졌는데, 아직 그 규모에 걸맞는 이념과 규범 체제를 마련하지 못한 데 있다. 다시 말해 지금은 전 세계적 규모의 일종의 아나키 상태라 할 만하다. 시대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대로 알려주는 좌표가 아직 미비하다 보니 기억 속에 늘 미화되기 마련인 과거의 것들이 과장, 왜곡 되어 정말 좋은 것으로 착각하고 사람들이 앞다투어 귀의하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브렉시트요, 트럼프 당선이었다.


 그렇다고 힐러리 클린턴이 대안이었던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더 끔찍한 선택일 수 있었다. 이 책에 실린 유명한 페미니스트 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이러한 사실을 통렬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무엇보다 페미니즘이나 인종 차별 반대주의 그리고 성소수자 운동 처럼 현재 신사회운동의 주류가 월가와 실리콘 밸리 그리고 헐리우드와 연합하는 것을 비판한다. 이런 식으로 인지 자본주의 즉 금융 세력과 손을 잡는 바람에 이러한 운동들이 오히려 사회 보장을 후퇴시키고 제조업과 중산층의 삶을 파괴해 온 정책들이 마련되고 집행되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그런 움직임을 진보 신자유주의라 부르고 클린턴과 오바마 정부로 구현되었다고 본다. 클린터과 오바마는 금융 세력과 손잡고 노동자의 생활 여건을 지속적으로 악화시켰다. 노조를 약하게 만들었고 실질 임금을 하락시켰으며 일자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맞벌이 가정이 증가하도록 이끌었다. 서브 프라임 사태에도 불구하고 금융 세력들이 조금도 상처입지 아니하고 계속 주머니를 든든히 채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클린턴과 오바마의 뒷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흔히 진보라 불리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착취를 교묘하고 은밀하게 했을 뿐이다. 하지만 빼앗아 간 몫도, 노동자와 빈민의 삶이 무너진 정도도 그들이 더 컸다. 트럼프에 대한 지지는 바로 그런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자신의 몫을 마구 앗아가기만 하고 조금도 돌려주려 하지 않는 금융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였다. 힐러리 클린턴은 그 세력을 대표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트럼프로 돌아섰던 것이다.


 페미니즘과 월 가는 힐러리 클린턴을 중심으로 완벽하게 담합한 유유상종 무리였다.(p. 87)


그들이 여성, 소수자 그리고 동성애자 운동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던 것도 여기에 있었다. 노동자, 빈민들이 느끼는 삶은 전혀 달라진 게 없는데 그런 운동들이 점점 부상하자 마치 사회가 꽤나 달라진 것처럼 포장되고 정작 자신들이 사회로부터 받아야 할 관심조차 받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사회가 그 운동들에 주목하는 것은 자신이 받아야 할 관심을 가로채 버린 것과 같았다. 지금 미국 민중들이 보여주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적의는 이런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의 중장년 여성들이 힐러리 클린턴 보다 트럼프를 더 많이 지지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현재도, 노후도 갈수록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 여성 지위 향상 보다 경제적 지위 향상이 더 먼저였던 것이다.


 이 책에 있는 모든 학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대안은 바로 이것이다. 진정한 좌익의 부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맑스의 계급 해방을 따르던 거대한 좌익은 무너졌다. 아무도 이제 계급 해방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석학들은 이제 거기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이념 아래에서 개별 운동이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에서 전체 운동의 맥락을 헤아리며 정말 필요한 목표를 향해 연대할 수 있도록 말이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맑스의 논문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계를 너무 빠르게 바꾸려고 했다. 이제 세계를 자기비판으로 재해석하고 우리의 책임을 검토할 때가 되었다.(지젝, p. 360)


 그러고 보니 샌더스 선거 유세 때 흑인 여성들이 샌더스의 연단을 점거해 샌더스를 몰아내고 오로지 자신들의 목소리만 쏟아내던 광경이 생각난다. 샌더스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모인 많은 이들이 그들을 비난했으나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흑인이고 여성인 점을 내세워 사람들이 '정치적 올바름'이 없다고 공격했다. 이런 식의 분리, 차이가 곧 적대가 되는 흐름을 막는 것이다. 시대의 거대한 후퇴는 박근혜와 최순실의 국정 농단이 우리나라 국민에게 그랬듯이 사람들에게 보다 본질적인 가치, 정의와 평등 그리고 공정에 관심을 갖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움직임을 이끌어 낼 것이다. 너무 낙관적인 전망인가? 그런데 지젝 역시 그런 전망을 갖는다. 그는 마오쩌뚱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며 글을 끝맺는다.


 하늘 아래 거대한 무질서가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다.(p.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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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8-01 0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라고 할까 그런 건 앞으로 가다가 뒤로 다시 돌아가기도 한다더군요 지금이 뒤로 가는 땐가 싶은 생각이 조금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 해도 예전 것이 정말 좋은지 더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때 안 좋았기에 바뀌기도 했는데... 옛날 일이기에 좋게 여기는 것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릴 때는 좋았는데,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감상에 빠지지 않아야 할 텐데...


희선

ICE-9 2017-08-10 19:37   좋아요 1 | URL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라는 말씀에 저 역시 동의해요. 아마 기성 세대들이 박정희 시대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것도 그와 연장선상에 있을 거예요. 프로이트는 이런 것을 두고 퇴행이라고 부르더군요. 현실에서 겪는 어려움이 클수록 어린 시절 처럼 자신이 아무 걱정 없이 보호받을 수 있었던 과거가 대비되어 더욱 좋은 것으로 부각되고 현실의 고난을 무시하거나 거기서 달아나기 위해 미화된 과거에 스스로 취한다고 말이죠. 퇴행하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고 과거든, 현재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는 게 보다 성숙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