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읽고 난 뒤,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하나의 의문이었다. '줄리언 반즈는 독자에게 무엇을 전하기 위해 이런 소설을 썼을까?'하는 것. 일단 이번에 나온 2015년 작, '시대의 소음'은 '혁명' 교향곡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러시아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줄리언 반즈가 주목하는 시점이 좀 심상치 않다. 연대기 순이 아니라 그의 생애 중 가장 고난에 처했던 세 시기만 뚝 떼내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 독재 치하에서 작곡 활동을 했다. 스탈린의 통치에 조금이라도 거역하면 제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던 이들도 반역 혐의로 처형 당하던 시절이었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적어도 현재의 안락을 조금이나마 더 오래 누리고자 한다면 당이 원하는 음악이 아니라 개인이 바라는 음악을 할 수는 없었다. 해선 안 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 밥만 먹고 살아지던가? 예술가 역시도 아무리 위험이 눈에 뻔히 보이더라도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적인 이상(理想)을 작품에 구현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래서 했다. 자신만의 예술적 비전(vision)으로 형상화한 음악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은 꽤나 유명한 오페라 '므젠크스의 맥베스 부인'이다. 



 '므젠크스의 맥베스 부인' 오페라 공연 모습


여기서 그는 자신이 늘 하고자 했었던 전위적인 음악 스타일을 목초지에 양을 방목하듯 마음껏 풀어놓았다. 음악이 당연히 전보다 훨씬 난해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당, 정확히는 스탈린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므라빈스키가 지휘한 모스크바 공연에 참석했던 스탈린은 오페라 공연 도중에 불쾌감을 표시하고는 나가버렸다. 이것이 쇼스타코비치에게 커다란 위기를 불러왔다. 그 전까지 이 음악에 상찬을 아끼지 않던 소련의 모든 비평가들은 스탈린의 불만을 기점으로 모두 악평으로 돌아섰고 작곡가에 대해 맹비난하기 시작했다. 당에서도 곧장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의심하며 그가 음악으로 봉사해야 할 민중을 배신하고 오직 현실과 유리된 음악의 아름다움만 추구한다고 하면서 서슴없이 당시로서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형식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붙여버렸다. 마치 스탈린의 뜻이 소련 전체의 뜻인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러한 당의 낙인은 귓가 바로 곁에서 울리는 파멸의 전주곡이나 다름 없었다. 모처럼 개인의 신념에 따라 날개 짓 한 번 했을 뿐인데 찾아 온 것은 날개를 꺾는 것도 모자라서 목덜미를 움켜쥐고 다시는 우는 것조차 못하게 만드는 폭력이었다. 그들의 손아귀 안에서 쇼스타코비치는 두려움 가운데 헐떡이며 오직 죽음만을 생각했다. 그러나 죽을 수 없었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죽을 수 있는 용기가 부족해서였다. 그는 소시민이었다. 결코 우리와 다르지 않게 어느 정도의 우유부단함과 또 어느 정도의 비겁함을 공유하고 있었다.


 작곡 중인 쇼스타코비치


 '그래, 굽히자. 어차피 살아야 한다면 그들의 뜻대로 춤춰주자.'. 이처럼 우리가 일상 속에서 조직의 뜻에 따라 불의인 것을 잘 알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혀야 할 때 흔히 품게 마련인 굴종의 그 언어들을 그도 되뇌었다. 그리하여 다음 작품은 철저하게 그들 아니 전적으로 스탈린 취향에 맞는 곡을 썼다. 너무나 쉬어서 귀에 착착 감기는 음악을. 그것이 바로 아이러니 하게도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교향곡 5번, '혁명'이었다. 아니, 모든 것이 아이러니였다. 혁명이란 무엇보다 불의의 시대에 저항하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실현시키는 행위이지만 그것을 제목으로 가진 이 음악은 자신의 모든 독립적인 의지를 포기하고 그저 철저하게 타협하고 순응한 산물이었으니까. 이것은 스탈린에게 보내는 그의 항복 선언이요, 다시는 뜻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충성의 서약이었다. 다행히 그의 맹세는 받아들여져 그는 '므젠크스의 맥베스 부인'으로 잃어버렸던 것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쩌면 '혁명'에 담긴 아이러니는 그의 의도였을 수 있다. 아이러니에는 이와 같은 힘이 있으니까.


 아이러니는 - 어쩌면 가끔씩은, 그는 그러기를 바랐다 - 시대의 소음이 유리창을 박살낼 정도로 커질 때조차 -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지킬 수 있게 해 줄지도 모른다.(p. 127)


이것이 바로 소설의 첫 부분 '층계참에서'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위기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의 발목을 부여 잡는 두 번째의 덫이 곧 닥쳐온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나를 나로 있게 만드려는 모든 유혹을 뿌리쳤고 나락과 파멸의 빌미가 될 그 어떤 행동도, 인연도 하거나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나 커져 버린 그의 명성이 그리고 그가 인류의 자유를 구현하는 예술가라는 것 때문에 뒤따르게 되는 시대의 요구로 인해 또 한 번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번엔 소련이 아니라 서방 세계다. 그것도 소련과 정반대의 자리에서 개인의 자유를 가장 잘 구현하고 있다고 선전하던 미국. 바로 거기서 열리는 세계 평화를 위한 문화 과학 회의에 쇼스타코비치가 당의 요구로 소련의 대표가 되어 거기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혁명'을 쓴 대가였다. 그러나 그로서는 결코 받고 싶지 않은 답례였다. 그 회의에 참석한 자신에게 어떤 질문이 쏟아질지 너무나 명약관화 했으므로. 더구나 자신과 다르게 일찌기 자유를 찾아 소련을 져버리고 미국에 망명한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그 회의를 주관하고 있지 않았던가? 나보코프는 자신의 망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스트라빈스키가 파시즘을 비판하기 위해 지은 무조음악에 빗대어 이렇게 물을 것이 뻔했다. "스탈린의 독재 체제를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자신의 명성에 걸맞는 진실을 말한다면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의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질문을.


 세계 평화를 위해 열린 문화 과학 회의에서 연설 중인 쇼스타코비치


 그렇게 쇼스타코비치는 다시 한 번 마주한다. 자신의 내면에서 고유한 신념에 따라 우러나오는 외침들을 가로 막거나 깡그리 지워버리는 시대의 소음들을. 여기서 제목의'시대의 소음'이 과연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분명해진다. 그것은 저마다 다른 생각과 신념에서 발현되는 개인의 목소리들을 억누르고 오직 체제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단 하나의 소리만 존재하도록 하는 현실을 빗대고 있는 것이다. 소음이라 표현한 것은 그 소리가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소음은 우리의 이해를 바라지도, 대화의 여지를 남기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의지만 관철할 뿐이다. 모든 선동적인 연설과 구호가 그러하듯이.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정녕 시를 쓰고 싶다면 모든 것들이 침묵한 밤에 자기 내면의 고유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충고한 바 있다. 이처럼 예술은 누구와도 같지 않은 독자적인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예술을 존립시키는 생명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그것에 반하는 시대의 소음 속에서 번민하고 고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술가의 삶은 결코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명성이 높아지고 그 성취가 클수록 더욱 그는 자신의 삶에서 소외된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만큼 추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바라는 것과 시대가 원하고 강요하는 것 사이에서 예술가는 언젠가는 이쪽 저쪽으로 때로는 위태로울 정도로 갈지자 걸음을 걷게 된다. 방황은 필연적이다. 그 때도, 지금도. 예술가의 숙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바로 그러한 모습을 줄리언 반스는 쇼스타코비치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금일까? 바로 오늘의 시대 역시 예술가에게 시대적인 책무를 다하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석학들이 지금을 '거대한 후퇴'의 시대라 부른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강대국과 제3세계를 막론하여 곳곳에서 과거 회귀의 정황들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가 증가하고 가부장제 문화가 다시금 융성하려 하고 있으며 권위주의가 다시금 고개를 들고 파시즘이 은밀히 퍼져 나간다.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어떤 이는 말했다. 지금의 정세가 세계 제 2차 대전의 발발 당시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짙고도 깊은 어둠의 밤이 점점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시대가 암울할 수록 사람들은 예술가들에게 원한다. 점점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제대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밝혀달라고, 암흑 속에서 상처받는 자신들의 영혼을 헤아리고 절박하게 구원을 바라는 우리들의 목소리를 대신해 외쳐달라고 말이다. 오늘의 예술가들은 그런 부름을 받고 있다. IS의 무자비한 테러 앞에서, 날로 심각해지는 우익화의 흐름 속에서 그리고 첨예해지는 인종 간, 국경 간 갈등을 마주한 가운데 받는 부름이다. 참여의 부름이요, 선봉에 서라는 부름이다. 그러나 개인이 지기엔 버거운 부담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적 이상이나 가지고 있는 신념과 겹치면 다행이나 그렇지 않으면 오로지 번뇌와 갈등의 총량을 늘릴 뿐이다. 그렇다고 하여 외면할 수 있는가? 그럴 수도 없다. 예술을 통하여 시대를 좀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도 예술의 신이 부여한 엄연한 임무다. 예술의 신 아폴론은 치유와 정화의 신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뮤즈를 인도하는 아폴로'를 썼던 스트라빈스키는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음악의 신이 나타나 내게 음악을 위해 죽어줘야겠다고 요구하면 응해야 할 것 같다'라고.


카라얀이 지휘하고 베를린 필이 연주한 스트라빈스키의 '뮤즈를 인도하는 아폴로' 음반


 줄리언 반스의 대답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온전히 자기 희생을 선택 할 수는 없었나 보다. 스트라빈스키 보다 훨씬 더 자신의 자유와 신념을 위해 갈등하고 분투했던 쇼스타코비치에게 자신을 의탁해 소설을 쓴 것을 보면 말이다. 이처럼 쇼스타코비치는 반스 자신의 분신이며 '시대의 소음'은 시대가 점차 암울해짐에 따라 점점 더 부과되는 사회적 책임으로 인해 차츰 깊어져 가는 반스 자신의 내적 고민이 한껏 반영된 산물이다. 그만큼 그의 내면이 짙게 투영되어 있기에 소설 속 쇼스타코비치의 내면이 생동감을 얻는지도 모른다. 더우기 반스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견해는 접어둔 채, 오직 쇼스타코비치의 영혼만 충실히 재현하고자 한다. 독자로 하여금 시대와 격한 불화를 겪고 있는 그의 내면에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지 온전히 경험토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은 비록 그가 위대한 작곡가라 하여도 평범한 사람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아서 역시나 보통의 사람인 우리들에게 더욱 살갑게 다가오도록 만든다. 내 생각엔 이것이야 말로 이 소설이 지닌 가장 뛰어난 점이다. 쇼스타코비치를 나와 그리 먼 존재로 여겨지지 않도록 한다는 것. 문득 생각해 보면 그의 고민 역시 그렇게 멀어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비록 예술가는 아니지만, 살다보면 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과 원하는 자유가 바깥 세계와 부딪히는 경험을 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반스만이 아니라 독자인 우리도 자신의 감정을 깊이 투영하여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고민도, 갈등도.


 아마도 그 때문에 줄리언 반스는 이런 식으로 썼을 것이다. 그가 원했던 것은 독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정답을 주는 건 아니었으리라. 그랬다간 자신의 견해로 독자의 자유로운 사유를 억압하는, 그렇게  하나의 시대의 소음만 배출할 뿐일 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사유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그가 정했던 목표는 생각할 있는 자료들을 많이 주는 , 자신의 자유와 신념을 고수할 없게 만드는 현실적인 난제들 속에서 번민하고 갈등하는 영혼의 충실한 재현이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그 과정을 독자들이 온전히 경험하고 그를 통해 자기 나름의 대답을 구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 글 처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렇게 된 데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단단히 한 몫 한다. 3부인 '차 안에서'가 이를 증명한다. 두 번의 위기로도 모자라서 그는 다시 또 곤란을 겪는데, 이제는 당이 단 한 번도 당적을 가지지 않았던 쇼스타코비치에게 당에 가입하여 당원이 되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좀 더 나은 내일이 오리라는 희망 속에서 비참한 나날을 견뎌왔다. 그러나 인내의 결과 도래한 것은 자신의 자유와 신념을 포기하라는 더욱 강도가 높아진 요구일 뿐이었다.  이것은 소설의 소 제목들로 암시된다. 1부의 '층계참에서'와 2부의 '비행기에서'를 지나 3부의 '차 안에서'에 이르기까지 그는 점점 더 좁은 공간 속에 갇히는 것이다. 3부는 그야말로 쇼스타코비치가 체제와 시대의 볼모가 되었음을 보여 준다. 가득한 시대의 소음 속에서 원래 자신이 내고자 했던 목소리마저 변질되고 왜곡되어 이제 어느 음이 진정 자기가 낸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본다.  '시대의 소음'을 듣지 않기 위해 개인적 구원의 열망을 담아 내놓은 음악들이 시대의 논리와 강요에 의해 그저 또 다른 하나의 소음이 되어가는 것을. 너무 오래 살아서 스스로에게 큰 실망을 겪었던 그에게 남은 단 하나의 소망은 오직 죽는 것 뿐이었다. 그 죽음을 통해 자신의 음악이 해방되는 것 뿐이었다.


 이처럼 두 번의 커다란 위기에도 불구하고 내내 은밀하고 소소하게나마 지속되었던 자신의 자유와 신념을 위한 투쟁은 늘 패배로 이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조금의 용기가 남아 있었다. 적어도 음악과 그것에 헌신을 맹세한 자신의 영혼은 구할 수 있는. 아니, 남아 있었다는 표현은 잘못 되었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분명 자유와 신념을 포기하고 당에 가입했을 테니까. 그러므로 용기가 자라났다고 해야 하리라. 어째서 과거에 없던 것이 지금 생겨났는가? 아마도 그것은 가늘게나마 부단히 이어져 온 그의 저항과 투쟁 덕분이라고 아닐까 싶다. 한 사람의 삶에 존재한 어떤 것이든 그냥 사라지는 것은 없다. 그 무엇이든 반드시 자취를 남긴다. 계속 했으면 계속한 만큼, 헌신 했으면 헌신한 만큼 그것은 삶의 성장을 위한 자양이 된다. 후반의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은 분명 그런 것을 보여준다. 번뇌와 갈등도, 저항과 투쟁도 결코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랬기에, 쇼스타코비치의 마지막이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닐까?


시간이 흐를 것이고 음악학자들이 논쟁을 계속한다 해도 그의 음악은 자기 힘으로 서기 시작할 것이다. 전기뿐 아니라 역사도 희미해져갈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는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교과서 속의 말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른다. 때에도 여전히 가치가 있다면- 여전히 들어줄 귀가 있다면- 그의 음악은 ... 그냥 음악이 것이다. 그는 떨고 있는 학생에게 음악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다. 답이 질문자의 머리 깃발에 대문자로 쓰여 있었어도 여학생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답할 없는 것이 정확한 답이다. 음악은 결국 음악의 것이니까.(p. 257)


 반스는 비록 정답은 주지 못했지만 희망은 주었다. 당신이 오늘 어떤 걸음을 걸었든, 설령 그 걸음이 패배의 궤적이라 하여도 전혀 무의미 하지 않다고 말이다. 다만 그 걸음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우리가 보지 못하고 마냥 부정적 의미로 생각하는 것은 시대의 소음에 너무 지나치게 휘둘린 결과라는 말도 아울러.


보이저 2호


 그러고 보니, 이런 게 떠오른다. 1977년에 발사 되어 지금은 태양계를 지나 한창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고 있는 보이저 2호에 대한 것이다. 언젠가 만날 외계인과의 소통을 위해 거기엔 음악 하나가 실려 있다. 바로 '바하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이다. 앞에서 인용한 문장은 이 음악을 떠올리게 한다. 위의 문장이 말한 것과 같이 모든 시대의 소음이 소리를 잃고 한낱 활자가 되었을 때조차 여전히 우주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을 음악을. 그것도 시대 만이 아니라 인간과 전혀 다른 종이 가진 문화마저 초월하여 그 어떤 소음에도 방해받지 않고 진실된 소통의 순간을 가져다 주리라 믿는 음악이 말이다. 이보다 더 쇼스타코비치의 믿음이 옳다고 증거하는 것이 어디 있으랴.


 때문에 나는 쇼스타코비치의 믿음에 슬쩍 투영하고 있는 반스의 낙관에 기꺼이 판돈을 걸고 싶다. 오늘을 이루는 모든 걸음에 절대 무가치 한 것은 없다고 믿으련다. 고민도, 갈등도 모두 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소음에 귀를 막듯 섣불리 해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음악은 모든 음이 제대로 연주될 때 아름다운 선율이 된다. 어떤 음이 나쁘다고 해서 생략하고 좋은 음만 연주한다면 아무리 훌륭하게 작곡된 음악도 소음이 될 뿐이다. 삶도 다르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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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8-01 0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만 생각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테지만, 식구가 있다면 그러기 힘들겠죠 쇼스타코비치도 자신보다 식구를 생각해서 스탈린이 바라는 음악을 썼군요 그런 일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죠 한번 어느 한쪽을 고르면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쇼스타코비치를 탓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건 음악가만 그런 건 아니겠군요 쇼스타코비치를 보고 만약 자신이라면 어떡할까 하는 생각을 하겠네요 지금이라고 그런 일이 없는 건 아니겠습니다


희선

ICE-9 2017-08-01 03:18   좋아요 1 | URL
무언가를 얻거나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자유와 신념을 포기하고 굽히는 일은 현재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죠. 저 역시 살면서 수차례 겪었구요. 그런 굴종의 경험을 그동안 좋지 않은 것으로만 여겼는데, 이 소설을 읽고나니 이제 달리 헤아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네요. 어떤 패배의 기억이라 하더라도 패배일수록 쉽게 이뤄진 것은 없어서 거기에 반드시 과정이 있고 또 어려운 것인 만큼 치열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나 자신이 가장 많이 내게 충실한 시간일 수도 있는데, 단순히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해서 모두 무용한 것으로 버려둔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시대의 소음‘은 그런 시간일수록 더 헤아림의 탐침을 깊이 내리고 오래 살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제게 넌지시 묻고 있더군요. 반성의 응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레삭매냐 2017-08-01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리뷰 패권주의자 !!!

7월을 5분 남기고 쓰시다니 반칙입니다.

ICE-9 2017-08-01 19:39   좋아요 0 | URL
아니, 월마트급 사장님께서 겨우 구멍가게 지분 밖에 안되는 저에게 패권이라 하시면 ㅠ ㅠ
구멍가게니까 생존을 위해서라도 24시간 영업을 하는 것이죠...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