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프라우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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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동성과 중립성 차이는 뭐죠?

 수동성은 공경이죠. 수동적이라는 건 자신의 의지를 내주는 겁니다. 중립성은 초당파적이에요. 스위스인은 중립적이지, 수동적이진 않죠. 우리는 어떤 편을 들지 않아요. 우린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거울이죠.(p. 33)


  독일어로 '가정주부'를 뜻하는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의 소설 '하우스프라우'는 제목 그대로 안나라는 가정주부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원래 미국인이지만 남편을 따라 스위스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그리 된 게 얼마 되지 않아서 그녀에겐 스위스의 모든 것이 낯설다. 아는 곳도 없고, 아는 친구도 없다. 그녀는 너무나 낯선 땅에 이식된 한 포기 식물처럼 자신에게 익숙한 과거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이제 새로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이식된 식물'이란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실은 현재 그녀가 처한 상황을 문자 그대로 정확하게 나타내는 말이다. 그녀는 스위스와 가정이라는 현실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존재인 것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그것을 분명히 한다. 이렇게.


 안나는 운전하지 않았다. 운전 면허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세계는 교통수단이 들고 나는 일정에 따라서 빡빡하게 제한되었다. 안나의 남편인 브루노와 시어머니인 우르줄라가 버스가 운행하지 않는 곳까지 얼마나 기꺼이 데려다주려는지에 따라서. 안나의 다리가 얼마나 잘 움직이는지, 얼마나 멀리까지 걸을 수 있는지에 따라서. 하지만 안나가 가고 싶은 만큼 다리가 버텨 주는 일은 드물었다.(p. 11~12)


 이처럼 그녀는 진실로 이식된 식물이다.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마저 억눌려 있다. 지극한 수동성의 존재. 그것이 바로 안나다. 수동성.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내면을 이루는 핵심이며,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의 그녀를 이루고 있는 수동성의 집착을 오롯이 외부의 강요로 해석하는 것도 곤란하다. 어느 정도는 내부의 호응이기 때문이다. 억지가 아니라 자발적 선택. 안나는 스위스에서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질렀다. 그의 이름은 스티브. 너무나 미국적인 이름을 가진 그는, 그 이름답게 안나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버리고 미국으로 가버렸다. 안나도 스티브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이식된 식물이라 그러지 못했다.



 소설엔 그 스티브가 이미 부재한 상태로 나온다. 안나는 잃어버린 사랑 속에서 상처를 혀로 핥고 있는 고양이처럼 허덕이고 있는 중이다. 상심과 절망이 깊고도 깊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버리려 한다. 스스로 빛을 꺼버리고 어둠이 되려 한다. 그렇게 수동성을 원한다.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독일어를 배우고 다른 남자들도 만난다. 그러나 이 행위들이 수동성의 포기인 것은 아니다. 그녀와 불륜을 저지르는 아치는 그녀와 함께 독일어를 배우는 스코틀랜드인이다. 독일어와 불륜, 두 영역이 중첩된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아치는 그녀에게 폭력적이다. 안나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존중과 배려가 전혀 없는, 오직 자신만의 쾌락을 추구한다는 뜻에서 폭력적이다. 이것은 안나가 생리 중일 때 아치가 억지로 그녀와 관계를 맺는 장면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피가 사방에 흐르고 닦을 것이 주위에 없자 아치가 양말 하나를 벗어 안나에게 건넨다. 안나는 너무나 수치스럽지만, 자신도 모르게 '미안해'라고 말하고 안나가 양말로 몸을 닦는 동안 아치는 웃는다. 이런 관계가 어찌 능동적일 수 있으랴. 그렇지 않아도 섹스에 대해 안나는 이렇게 말한다.


 안나는 섹스를 좋아하면서도 좋아하지 않았다. 필요하면서도 필요하지 않았다.섹스와 그녀의 관계는 그녀의 수동성과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고 싶다는 난공불락의 욕망에서 우러난 난해한 동반자 관계였다. 그리고 원해진다는 것에 대한 욕망. 그녀는 누군가에게 원해지고 싶었다.(p. 62)


 누군가 자신을 원한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하는 섹스. 그렇게 섹스도, 불륜도 실은 수동성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독일어 역시 그렇다. 낯선 언어를 배우는 데 있어 자의가 개입될 여지는 거의 없다. 모든 언어는 나름의 확고한 의미와 문법 체계를 가지고 있다. 배우려는 이는 무조건 자신을 거기에 맞춰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어를 배우는 것 역시 '이식'의 또 다른 표현이다. 아치가 독일어와 불륜의 공집합인 것은 바로 거기서 연유한다. 안나는 이식에 순응한다. 그저 하염없이 수동적인 존재가 되려 애쓴다. 삶에 그 어떤 낙관도, 희망도 없으므로. 그 결과, 그녀는 모든 것을 잃는다. 조금이라도 능동적이 되었다면, 조금이나마 잃어버린 사랑에 미련을 갖지 않았더라면, 놓치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들이다. 커다란 비극에 이어, 더 커다란 상실이 찾아오고 그 때서야 안나는 자신이 정말 배워야 했던 언어가 무엇이었는지 깨닫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언어를 안나가 찾아가는 정신과 상담의인 메설리 박사로 부터 듣게 될 것이다.


 작가는 독일어를 배우는 것과 정신과 상담의와 상담하는 것을 유사하게 만든다.

 안나가 새로운 독일어를 배우듯, 자신이 알고 있는 말들의 진정한 뜻에 대하여 메설리 박사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독일어를 습득하는 것과 똑같이 메설리 박사로부터 말의 참된 의미를 하나 하나 배워간다. 저자가 원래 시인이라 그런지, 언어가 가진 이면이 새롭게 부각되는 장면이 많다. 아마도 이 모든 과정이 뜻하는 것은 타인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말을 찾아야 한다는 게 아닐까 싶다. 말은 모호한 것을 구체화 시키는 힘이 있다. 그만큼 존재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한다. 스티브와 안나가 만날 때, 스티브는 줄곧 빛에 대해 말했다. 스티브, 그는 안나에게 불의 존재였고, 빛의 존재였다. 안나는 스티브란 항성을 맴도는 행성이었다. 그 항성이 사라졌고, 안나는 자신에게 다시는 빛이 찾아오지 않으리라 여겼고 자멸을 선택했다. 그러나 메설리 박사는 빛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이라 말한다. 빛이 다가와 자신이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이 어둠을 물러가게 하지는 못한다고, 스스로 그 어둠을 관통하여 빛을 찾아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바로 그 빛을 향한 걸음을 언어가 도와줄 것이었다. 자신만의 언어가. 어차피 스티브가 준다고 여겼던 빛 또한 거짓에 불과했다는 게 밝혀지기도 하니.


 의식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그 결과는 고립이에요. 진짜 관계 대신에 상상한 관계만 가지게 되죠. 의식적 삶 속에 몸을 담그지 않게 될수록, 당신의 그림자는 더 검고 짙어지죠.(p. 347)


 '하우스프라우'는 자신이 놓쳐버린 것에 대한 너무 많은 미련 때문에 현재 지켜야 할 것마저 파괴해 버린 여인의 이야기였다. 상실에 낙담하여 창살 아래 갇힌 것을 선택한 결과 영원히 빛의 야외로 나가지 못하게 된 여인의 이야기였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남이 우리를 가두는 것보다 스스로 자신을 가두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장본인이 누군지도 모른 채, 그저 갇혔다는 그 사실만 가지고 아파한다.


 가라앉지 않을 배가 대양의 바닥에 내려앉기도 하고 로켓이 항상 재진입에 성공하지는 못한다. 사랑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미래를 약속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는 그녀가 사랑했던, 혹은 사랑했다고 말했던 모든 남자들을 잘못 판단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잘못 판단했다. 그녀는 이야기가 한창 진행되는 중간에서야 자신의 삶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와 자기를 혼동해 버렸다.(p. 397)


 섣부른 판단에 따른 수동성은 삶에 대한 겸손이 아니라 오만의 표현이다. 무작위와 예측 불허로 넘쳐나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재단하고 단정해선 이렇게 되리라는 자기만의 결론 끝에 나온 부동(不動)이니까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빠져나가기가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실은 내가 가진 오만의 한기로 더욱 두터워지는 얼음 감옥인데, 나갈 방도를 내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다른 곳에서만 찾고 구하고 있으니.


 행해질 수 없는 행위들이 있어요. 고치는 게 불가능한 결과가 있고.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은 너무 늦게 그런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이죠.(p. 238)


 '하우스프라우'는 불륜과 성애가 나오고 한 여인의 파멸을 그리지만(마지막 문장은 그녀의 죽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오히려 내게는 성장 소설로도 보였다. 견뎌야 할 겨울을 외면해선, 봄조차 향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맞다. 타산지석의 의미로 한 말이다. 어쨌든 지금의 난 그 겨울을 제대로 견뎌내기 위해서라도 혹시 내게도 나 자신이 만든 감옥이 있지는 않은지 찬찬이 살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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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8-10 0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동 공격성이란 단어가 있어요. 내면에 공격성이 들끓지만 그러한 공격성을 표출하기보다 책임을 회피하는 등의 소극적인 방식으로 반항하는 성격을 말하죠. 수동성을 단순히 의지없음으로 보기 쉽지만 수동성에도 매우 다양한 플러스 알파를 생각해 볼 여지가 있죠. 헤르메스님 리뷰를 읽으면 안나는 수동성에 대해 내부에서 적극적인 호응이 있다고 하시니 그녀는 수동 공격성에 더 가까운 거 같네요.

ICE-9 2017-08-10 19:31   좋아요 1 | URL
아, 그런 용어가 있었군요. AgalmA 님 말씀대로 수동성 내부에도 다양한 결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존재가 겉보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네요. 정말로 안나의 소극성은 내부에 쟁여둔 공격성이 왜곡되어 발현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생각해 볼만한 좋은 지점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AgalmA님이세요^^

AgalmA 2017-08-11 02:09   좋아요 1 | URL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 읽다가 알게 된 내용이에요. 헤르메스님도 읽어보시면 도움받을 정보 많으실 책이죠^^

ICE-9 2017-08-11 11:05   좋아요 0 | URL
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책 추천은 언제나 감사한 일이죠^^

희선 2017-08-11 2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죽음을 나타내는 말이 있다니, 앞으로 살아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죽다니... 지난달부턴가 사람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이룰 수 없는 게 없어서, 괴로워서, 힘들어서... 이 책하고는 상관없지만, 여전히 왜 그럴까 싶습니다 모든 것에서 달아나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는 것 같은데... 누군가 죽고 나서 시간이 지났을 때 그걸 알게 되면, 그 사람 몸은 다 썩어서 이제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이건 책을 보면서도 하는군요 좀 이상한 생각일까요 썩어서 흙으로 돌아간다 해도 사라지는 건 아니다는 말도 있더군요 그 말도 맞는 것 같습니다


희선

ICE-9 2017-08-13 21:15   좋아요 0 | URL
최근에 끌로드 샤브롤이 감독한 영화 ‘마담 보바리‘를 다시 봤습니다. 엠마 보봐리 역시 이 소설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사랑한 모든 것에 배신 당하고 더이상 믿을 것도, 기댈 곳도 없어지자 스스로 비소를 먹어 생을 마무리 지으려 하지요. 소설의 주인공 여성의 심리가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아직 운이 좋아 그런 지경까지 가 본적은 없습니다만 정말 엠마나 안나처럼 모든 것에 배신당하고 잃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세상에 무슨 미련이 남을까 싶기도하네요.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 보다, 더이상 세상에 자신을 매어놓을 게 없기 때문에 훌쩍 날아가버리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