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의 종말 - 탐욕이 부른 국가 이기주의와 불신의 시대
스티븐 D. 킹 지음, 곽동훈 옮김 / 비즈니스맵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오늘 한국은행이 무려 6년 반만에 기준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리뷰가 작성된 시점이 금리 인상한 날이었습니다^^;)

 이는 양적 완화가 더이상 없을 것이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양적 완화'란 중앙 은행이 금리 인하로도 경기 부양이 안 될때 시장에 직접 개입하여 자본의 유동성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금리 인상이란 곧 양적 완화의 종결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해가 거듭될수록 경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인데도 국민들이 그것에 대해 어떤 제동 조치를 요구할 때마다 그것으로 이익을 보고 있는 자들이 그 목소리를 무마하기 위해 자주 이용하는 두 가지 이론이 있었다. 하나는 '낙수 효과'요, 다른 하나는 '양적 완화'였다. 낙수 효과는 경제 정책이 오로지 대기업과 가진 자들 위주로 펼쳐지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였다. 많이 가진 이들이 더 많이 벌면 넘쳐 흐른 물처럼 아래 사람들이 그 떡고물을 받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양적 완화'는 주로 불경기일 때 돈을 많이 풀면 모두의 주머니로 고루 들어가 쓸 돈이 생겨나니 경기가 살아난다는 논리로 돈을 마구 풀어 집값과 전셋값이 해마다 올라 주거 불안정으로 가뜩이나 심란한 판인데 물가마저 도무지 내려갈 줄 모르니 실질 임금이 자꾸만 하락하는 것으로 인한 대중의 불만을 누그려뜨리는 데 일조했다.

 

 낙수 효과는 거짓이었다는 게 애시당초 판명났지만, '양적완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들렸는데 이조차 거짓이었다는 걸 바로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금융 관련 저널리스트이자 현재 영국 하원 재무위원회 특별 자문이기도 한 스티븐 D 킹(호러 소설의 대가로 유명한 '스티븐 킹'과는 혼동하지 말자.)이 집필한 '세계화의 종말'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단언한다. '양적 완화라는 프로그램은 주식이나 국채, 회사채 등의 금융 자산 가치를 높이고 세계의 자산 귀족들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설계된 것(p. 253)'이라고 말이다. 이 주장을 그동안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각국의 통화 정책과 국제 자본 흐름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예리하게 분석하면서 말하기에 설득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드디어 '양적 완화'를 거두겠다는 분명한 신호이기도 한 오늘의 금리 인상이 더욱 반가웠고 이 글 첫머리에 언급까지 하고 말았다. 그런 사정으로 이 책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전에 이런 통찰을 가져다 준 것에 대한 감사부터  먼저 표하고 싶다. 





 그래서 '세계화의 종말'은 과연 어떤 책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TPP(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 탈퇴와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인 '브렉시트'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한창 가속화되고 있는 '세계화' 붕괴의 현상을 상세하게 관찰하고 이것이 왜 일어났는지 또 이런 추세는 정녕 바람직한지를 과거 역사와 오늘의 현실을 두루 고찰하여 상세하게 알려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시사적인 문제들과 돌아가고 있는 경제 상황에 유독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이 책이 정말 유용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요즘 세계 문제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다양한 동기와 분야로 펼쳐지기에 거기서 어떤 일관된 움직임을 간파한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경제 분야도 마찬가지다. 한 나라의 경제가 전 세계 경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데다 워낙 자본의 국제적인 이동이 활발하고 무작위적이라 지극히 복잡하여 여기서도 내게 유용한 정보들을 찾아 취합한다는 게 절대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책은 마냥 엉킨 실타래와 같은 전 세계의 정치와 경제 상황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직접 경험한 것이기에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오늘의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헤아려 다가올 미래를 제대로 대비하기 위함이다. 스티브 잡스가 그토록 강조했던 '인문학적 통찰'의 요지 또한 그것이 아니었던가? 미래에 대해 제대로 예측하고 올바르게 대처하려면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를 잘 헤아려야 한다는 것 말이다. 이 책이 그렇다. 그런 것을 가능케 한다. 그리하여 다가올 미래를 가늠하고 나름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만든다.


 어떻게 그렇게 만드냐고?

 워낙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는 책이라 자세하게 설명하기엔 이 한정된 지면으로 곤란하다. 그러므로 이 책이 독자들에게 주려는 기본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이 기본적 태도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어떤 이념이나 상황을 접할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판단이나 행동에 있어서 바람직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태도란, 쉽게 풀이해 말하자면, 이면을 보려는 노력이다. 눈앞에 보이는 부분이 전부라 여기고 자기 생각으로 쉽게 받아들이지 말고  스스로 의심하고 조사하여 그것이 내 앞에 도래하게 된 과정이나 아래 놓여 있는 동기도 살펴 이면에 감춰진 내막도 헤아리려는 태도. 바로 그것이다. 앞에서 내가 낙수효과나 양적완화를 말했던 것도 이와 관련있다. 그 둘은 이면에 깃든 내막을 짚어보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쉽사리 속아 넘어간 대표적인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정말 저자는 그런 것을 우리에게 주려 한다.

 그러므로 제목인 '세계화의 종말'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이 책은 세계화가 종말로 치닫고 있는 상황을 거의 해부학자의 시선으로 세밀하게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세계화'가 이제 쓸모없는 개념이 되었으니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 책이 더욱 주력하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계화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는 아니었다는 것, 다시 말해 이처럼 왜곡되고 본말이 전도된 세계화 관념을 우리의 뇌리에서 불식(拂拭)하고 보다 올바른 세계화의 관념을 심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우리의 시각 교정이다. 그는 이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이분법적 사고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에 대한 것도 그러하다. 그동안 우리는 '세계화'와 자국의 이익 보호를 위한 보호무역을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느 하나를 취하면 어느 하나는 버려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세계화를 원하는 사람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는 모든 조치에 대해 무작정 반대했고 국내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계화에 대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두 오직 한 쪽만 보고 생각했기에 나타난 결과였다.


 스티븐 D 킹은 그동안 인류 역사에 있었던 세계화 노력을 설명하면서 그 어떤 국면에서도 이면엔 전혀 다른 것이 존재했다는 것을 소상하게 보여준다. 특히 '브레튼우즈 체제'에 대한 부분이 그러하다. 세계 제2차 대전으로 인한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44년, 44개국이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 모였다. 이 회의 결과 전후 경제와 금융의 세계화를 위한 초석이 될 세 개의 제도가 탄생했다. 바로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그리고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이다. 이는 세계 경제의 일원화로 나아가는 커다란 발걸음이었으나 이를 주도했던 미국의 속셈은 사실 그것에 있지 않았다. 저자에 따르면 그 때 미국이 의욕적으로 브레튼우즈 체제를 만들려했던 이유는 단 하나 다시는 세계에 영국과 같은 제국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데 있었다. 다시 말해, 미국에 이익이 되지 않는 패권국가의 출현을 막으려는 자국 이기주의의 발로였다. 이처럼 세계화의 모든 국면엔 사실 국가 이기주의가 있었다.

 

 그것을 저자는 현재 세계화의 가장 대표적인 존재인 '다보스 포럼'이 열리는 곳이 실은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유명한 소설 '마의 산'에 등장하는 다보스의 요양원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면서 실은 '다보스 포럼'의 실체가 그 요양원의 다음과 같은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꼬집는다.


 그들은 온종일 먹고, 생각하고, 발코니에 앉아 휴식 치료를 하면서 동료 환자에게 욕정을 느끼고, 기막히게 얇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다른 폐병 환자의 성적인 장난 소리를 듣고, 가끔 흉부 엑스레이를 찍고 기흉에 걸린 허약한 폐로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고, 많은 경우 불가피하게도 마침내 죽음이 다가왔음을 실감한다.(p. 132)


 '세계화'나 '다보스 포럼'이나 모두 우리는 하나라고 소리치며 저마다 이타주의적으로 행동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내면엔 이런 개인주의와 이기적인 면모만 가득했던 것이다.


 이것은 현재도 이뤄지는 공정 무역이라는 미명 하에 강대국이 약소국에 가하는 경제 개방 압력에서도 허다하게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장하준 교수가 '사다리 걷어차기'란 책에서 잘 설명했듯이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강대국이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은 사실 개방을 거부하고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온갖 정책적인 조치를 취한 데 있었다. 수입품에 많은 관세를 매기는 굳건한 보호무역주의와 외국과의 경쟁에 뒤처진 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등 그런 정책들이 오늘의 강대국을 만든 것이었다. 때문에 강대국들은 자기가 경험한 바 약소국들이 어떻게 해야 부강해지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약소국들이 그렇게 행동하면 자신에게 결코 이로울 게 없다. 완전히 개방시키는 것이 자신에게 더 이롭다. 더 많은 자본과 권력 그리고 발달된 기술을 가진 강대국이 약소국과의 경쟁에 있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대국이 공정한 무역을 해야 한다면서 약소국이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는 것은 한 마디로 강대국이 이익을 획득하는데 장애가 되는 방해물들을 스스로 제거하라는 요구에 불과하다. 그들이 말한 공정의 진짜 의미는 불공정이었고 그들이 말한 '세계화'란 자기보다 약한 국가가 거기에 속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모든 노력들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교묘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그래프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50년부터 2000년까지 전 세계 지니계수를 측정한 그래프다. 지니계수는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며 클수록 불평등 정도가 높다. 세계화는 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심화할수록 세계적인 불평등 정도도 더 심해졌다는 게 그래프로 분명히 확인된다. 세계화는 그것을 찬양하는 사람이 주장하듯 평평하지 못한 운동장을 평평한 곳으로 만드는 게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더욱 기울게 했을 뿐이다.


 이렇게 모든 '세계화'의 발자취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이렌의 노래'가 은밀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여기서 굳이 신화적 존재를 언급하는 것은 저자 자신이 국가의 이익을 신화와 역사의 재해석이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와 역사는 하나의 의미로 해석되지 않으며 설령 그것이 된다고 한들 항구하지도 않는다. 시대가 변하면 신화와 역사의 해석도 달라진다. 그러니 이것이 진리다 하고 내세우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세상에는 영원한 '국제 공동체' 같은 건 없다. 대부분의 경우 국가들은 불확실하고 때로는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서 자기 이익대로 행동하며, 일시적인 동맹을 맺고 몇 주나 몇 달, 몇 년, 때로는 몇십 년까지도 유지하지만, 동맹이란 언젠가는 깨지기 마련이다. 한편, 각 나라의 이익을 규정하는 것은 그 나라의 신화와 역사이며, 또한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신화와 역사의 재해석이다. 20세기가 막 시작될 때 영국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대영 제국은 경이와 자부심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가 시작될 때 영국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대영 제국은 부끄러움의 원천에 가깝다.(p. 146)


 그건 곧 세이렌의 노래에 현혹되는 것과 같다. 그 노래에 무작정 도취되면 남아 있는 것은 죽음 뿐이다. '세계화'나 '이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저 눈 앞의 친절한 미소와 들리는 허황된 말만 믿고 무턱대고 뛰어들면 자신을 기다리는 건 끝내 파멸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저자가 국가 이익마저 실은 신화와 역사의 해석에 불과하다며 누군가의 해석을 고분고분 받아들이지 말고 언제나 그 이면을 살피고 헤아리려 노력하라고 독자에게 누누이 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한다. 이것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역사와 오늘의 현실을 낱낱이 파헤쳐서 길어낸 소중한 교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훈은 작가가 서문에 제시한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하고 싶은 여섯 개의 명제에도 깃들어 있다.


첫째, 지금까지 주류 경제학은 경제적인 진보로 국경이 없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했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세계화는 얼마든지 반대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둘째, 세계화를 증진시킨다고 믿었던 과학 기술이 오히려 세계화를 파괴할 수도 있다.

셋째, 경제 성장이 국가 간 불평등을 감소시키는 반면 국가 내 불평등을 증폭시키는 현상은 한 국가가 국제적 생활 수준에 비추어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욕망과 국내의 사회, 경제적 안정 추구 사이의 긴장 또한 필연적으로 고조시킨다.

넷째, 21세기의 거대한 이민 물결이 국내 안정을 해칠 수 있다.

다섯째, 세계화 진전에 기여했던 국제 기구들이 신뢰를 잃어간다. 

여섯째, 세계화엔 한가지 버전만 있는 게 아니다. 냉전 시대가 두 열강이 경쟁하는 시대였다면 21세기는 19세기 제국주의 경쟁 때처럼 다수 열강이 경쟁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p. 12 ~ 13에 나온 것을 개인적으로 정리함.)


 여기서 우리는 이 명제들이 무언가에 대한 반대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 명제들이 반대하는 것은 사실 지금까지 세계화를 긍정하고 그 추세가 더욱 심화할 것이라 주장했던 자들이 제시했던 근거들이다. 그렇게 그들은 국가들이 세계화를 통해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국경을 기꺼이 포기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런 세계화 흐름을 과학기술이 통신과 고통을 한껏 발달시켜 가속할 것이라 내다 보았으며 국제적으로 경제가 성장하면 자연히 국내의 불평등도 해소될 거라며 세계화를 찬양하기 바빴다. 또한, 거센 이민의 물결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한없이 유동적인 것으로 만들어 새뮤얼 헌팅턴이 예언했던 '문명의 충돌'을 조소 거리로 만들 것이라 여겼고 앞으로는 국제기구가 국가보다 더 강한 힘을 가져서 열강들이 과거처럼 약소국에 큰소리를 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잘 보여주듯 이 모든 것은 현재 하나도 들어맞고 있지 않다.


 그런데 저자가 단순히 그 지지와 근거들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핵심 명제들을 만들었다고 보이진 않는다. 여기엔 그보다 훨씬 깊은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저자가 자신의 핵심 명제를 굳이 세계화와 그 심화의 근거들에 대한 반박으로 형성한 것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은 양면을 가지고 있으니 그 이면까지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이면을 헤아릴 때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 얼마나 달리 해석되는 지는 이 책 곳곳에서 목격하게 되지만 특별히 3부, '21세기의 도전'이 압권이라고 생각된다. 거기서 세계화를 더욱 진전시킬 것이라 여겨졌던, 이민과 테크놀로지 그리고 돈이 실은 거꾸로 점점 더 강하게 세계화를 파괴시킬 것이라는 걸 참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앞에 보는 것을 단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여기저기서 우리를 현혹하고 판단을 착란하게 만드는 가짜 뉴스와 정보들이 횡행하는 요즘엔 더욱 그렇고 말이다.


 물론 이 책이 당부하는 세계화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그대로 그 반대에 있는 국가의 이기주의적 면모를 대할 때도 당연히 가져야 하는 태도다.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섣불리 응원 또는 비난을 하기 전에 그 근저에 가로 놓여 있는 동기와 목적은 무엇이며 또 그것은 어떤 과정을 거쳐 구체적 모습을 이루었는지 부터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선동으로 장차 어떠한 위험을 초래할지도 모르고 무작정 '브렉시트'를 찬성한 영국 민중처럼 나중에 더 뼈아픈 후회를 남길테니까 말이다.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정책 결정자들은 돈이 한 나라의 경제적 부담을 다른 나라로 떠넘길 수 있는 수단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짓을 자꾸 할수록 세상은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분열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승자 독식의 양상을 더욱 인식할수록 점점 더 세계화를 뒤로 돌리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p. 258)


 세계화이든,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든, 어느 것을 대하더라도 섣부른 예단으로 낙관이나 비관을 하기보다는 주어진 상황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쉽게 굴하지 않고 그나마 잔존하는 긍정적인 가능성을 활용하여 최대한 바람직한 대안을 찾거나 만들어가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가 '세계화의 종말'을 쓴 궁극적인 동기도 바로 그런 사유와 실천의 움직임에 대한 희구에서 나왔을 것이다. 미래란 저절로 떨어지는 감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형성하고 있는 것에서 발아되고 결국 그것이 모이고 쌓여 구현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오늘의 현명한 생각과 행동이 현명한 미래를 낳는다. 분명 '세계화의 종말'은 그런 미래를 출산하는데 좋은 산파가 되어줄 것이다.


 어떤 이에게 공정이 다른 이에겐 불공정이었듯, 누군가에게 종말도 또 다른 누군가에겐 시작일 것이다. 다가올 세상이 부디 많은 이들에게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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