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 - 상
오타 아이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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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트너' 라는 일본 드라마가 있습니다.

 2000년부터 방영을 시작하여 현재 16번째 시즌으로 지금도 방송되고 있는 명실상부한 일본 형사 드라마의 대표작으로 등극한 작품이죠.




 이번에 나온 '범죄자'는 드라마 '파트너'의 각본가(8번째 시즌부터 참여)인 오타 아이가 2012년에 발표한 데뷔작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일본추리작가협회상' 후보에 오른 바 있었던 '잊혀진 소년'에 이어 두 번째로 소개되는 작품입니다. 공교롭게도 주인공들이 같아요. '잊혀진 소년'에서 인상 깊었던 활약을 보여주었던 소마 형사와 청년 슈지 그리고 전직 방송국 PD였던 야리미즈가 두 작품 모두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저처럼 '잊혀진 소년'을 읽고 '범죄자'를 읽는다면 그들의 과거를 읽게 되는 셈입니다. '잊혀진 소년'에서 찰떡 같은 팀 플레이를 보여주던 그들이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되었나를 바로 '범죄자'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아직 '잊혀진 소년'을 읽지 않으셨다면 '범죄자'부터 읽을 것을 권해드리고, '잊혀진 소년'을 읽으신 분들도 마찬가지로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이 '도원결의'를 하게 되는 계기인 사건이 무척이나 흥미롭거든요.


 '범죄자'는 시작이 아주 강렬합니다.



 슈지가 클럽에서 우연히 만난 아렌이란 여성에게서 메일 하나를 받습니다. 내일 오후 2시까지 진다이지 역 남쪽 출구에 있는 역 앞 광장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처음 만났던 그 날은 다짜고짜 메일 주소를 달라고 해서 준 것이 인연의 전부였기에 열 일곱살 때부터 건설 일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쉬지 않았던 슈지는 근무까지 빼먹고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로 나갑니다. 평일 오후의 한산했던 역 앞 광장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상인 풍모의 남자와 노부인 그리고 주부로 보이는 여자와 자신보다 뒤늦게 도착한 여대생까지 합해 다섯 뿐. 그런데 여대생이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아 갑자기 나타난 다스베이더와 함께 무차별 칼부림 학살이 시작됩니다. 눈 앞에서 다섯 사람이 순식간에 잔혹하게 살해당한 것을 본 슈지는 그 자신도 살인마에게 희생당할 뻔 했지만 기지를 발휘해 간신히 목숨을 건집니다. 한 편, 현장으로 출동한 소마 형사는 원래 무차별 칼부림 범죄는 동기도 없고 용의자 특정도 어렵기 때문에 해결에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는 것인데 사건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범인의 신병이 확보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놀랍니다. 범인은 근처 공용 화장실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다량의 헤로인을 투약하여 이미 숨져있는 상태였습니다. 주변엔 학살에 썼던 흉기며 복장이 있어 그가 범인이란 걸 말해주고 있었고 결국 약에 취해 그토록 엄청난 학살을 벌인 것으로 충격적인 사건은 일단락 되었습니다.


 그러나 간신히 살아남아 병원에서 치료 받고 있는 슈지에게 낯선 남자가 나타나 이런 말을 함으로써 사건은 중대한 변화의 계기를 맞습니다. 슈지가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그는 자기 얼굴을 알아보았고 달려와서는 다른 네 사람은 무사한지 물었고 죽었다고 대답하자 절망에 빠진 남자가 쥐어짜낸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 달아나. 가능한 한 멀리 달아나."(p. 57)

 "앞으로 열흘. 열흘만 살아남으면 안전해. 살아남아. 네가 마지막 한 명이야."(p. 58)


 남자가 슈지의 얼굴을 먼저 알아보고 다가왔다는 것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슈지는 자신이 당한 사건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 뭔가 다른 흑막이 있다는 걸 예감하고서 그의 말대로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친구 집에서 한동안 기거 하기로 합니다. 소마 역시 사건에 이상한 점이 있다고 느낍니다. 범인이 정말로 약에 취해 무차별 살인을 하기로 작정했다면 겨우 다섯 밖에 없는 한적한 역 광장이 아니라 사람으로 북적한 거리를 고르는 게 합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부 고발로 조직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소마의 의혹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결국 소마 혼자서 사건의 진실을 쫓게 됩니다. 그러다 슈지가 며칠이 지나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면서 집에 들렀다가 암살자에게 죽을 뻔하게 된 걸 구해주면서 소마는 역시 자신이 의심했던 대로 사건엔 다른 진실이 있으며 그것이 온전히 밝혀질 때까지 슈지를 자신의 친구인 야리미즈의 집에서 보호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해서 소마와 슈지 그리고 야리미즈가 한데 만나게 된 것입니다.


 과연 슈지가 자신도 모르게 연루된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도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아무런 접점도 없고 죄를 짓지도 않은 다섯 명의 목숨을 무자비하게 빼앗은 것일까요? 241 페이지 분량의 티저북이지만 그 내막을 짐작케 할 단서는 어느 정도 나와 있습니다. 한 방송국의 오래도록 장수한 다큐 프로그램을 폐지시켜 버린 '멜트페이스 증후군'이 그 중 하나죠. 얼굴이 녹아내린다니, 이름부터 무시무시한 이 증후군은 '원인 불명의 고열이 나다가 안구를 포함한 안면 조직이 차례차례 괴사하는 무서운 병으로, 괴사 조직을 절제해야 하기 때문에 얼굴에 심각한 손상이 남는다.(p. 169)'고 합니다. 이토록 끔찍한 증후군은 특히 갓난 아이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는데 그것이 특정한 시기의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갓난 아이들이 감염으로 마구 희생되었다고 하니까 얼른 얼마 전 우리나라의 이대 목동 병원에서 일어난 신생아 집단 사망 사건이 떠오르는군요. 주사제를 무려 25년 동안 나눠쓰는 등 환자 위생을 위한 비용을 아끼려는 병원의 탐욕과 그만큼 환자 위생에 관심이 없었던 의료진의 무책임이 불러온 참사였죠. 아마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어쩌면 이것에서 어떤 분들은 저처럼 소설 '범죄자'가 1960년대 초에 독일에서 일어난 유명한 약물 사건 떠올리지도 모르겠어요. 캐나다의 영화 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영감을 받아 '스캐너스' 란 영화를 만들기도 했던 '콘테르간' 말이죠. 



 산모의 입덧을 완화시켜준다고 하여 독일을 비롯하여 일본까지 꽤나 팔린 이 약은 탈리도마이드 성분 때문에 이 약을 복용한 산모들이 사지가 아예 없거나 극단적으로 짧은 기형아를 낳게 만들었죠. 그 수가 전 세계적으로 1만 2천명 이상이라 현대 의학이 가져온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일본에도 이 사건이 일어났던만큼 오타 아이가 그 사건에 영감을 받아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닐까 싶어지기도 합니다. 어쨌든 소설 초반부터 등장하는 국회의원이자 정치 실세인 이소베 미쓰타다가 사사키 구니오란 인물로 인해 위기를 느끼고 있고 그의 수행비서이자 최측근인 핫토리 역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열흘밖에 안 남았다고 하는데다 그것이 이소베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제약 회사 때문인 걸 보면 허무맹랑한 상상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자면 과연 '파트너' 각본가가 쓴 소설 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파트너' 역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무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잇속만 밝히는 사회 권력층을 비판하는 면모가 강하게 나타났던 작품이었으니까요. 일본 미스터리는 흔히 미스터리 풀이에만 집중하는 '본격파'와 사회 비판을 위해 미스터리를 빌려오는 '사회파'로 나뉘는데, '범죄자'는 티저북만 읽고 이렇게 결론내는 건 무모하다고 생각되지만, 그래서 '아마도'란 단서를 굳이 달고 말한다면 후자에 속하지 않을까 합니다. '잊혀진 소년'은 온전히 '사회파' 쪽이었기에 이런 심증이 더욱 굳어지는군요.


 이렇게 써놓고 보니 읽고계신 분들은 티저북에 꽤 많은 정보가 나온 것처럼 여길 수도 있으실 것 같네요. 그러나 실은 '범죄자'가 두 권으로, 그것도 1권은 656페이지이고 2권은 536페이지인 방대한 분량이라 티저북의 내용은 고작 20%에 불과합니다. 아직 남아 있는 80%에서 이 이야기가 또 어떻게 뒤집어질지는 알 수 없는 것이죠. 그건 그렇고 20%만으로도 이렇게 흥미를 돋구는데, 80%는 또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쟁여져 있을지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네요. 


 물론 무차별 학살 사건의 진실과 희생자들이 가진 접점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지만 여기에 더하여 과거에 자신의 실적을 위해 친한 친구를 비극에 빠뜨렸던 경찰관을 만나 경찰에 대해 불신을 가득 가지고 있는 슈지가 소마에게 어떻게 마음의 문을 여는 지도 궁금하고 '잊혀진 소년'에 나왔던 것처럼 야리미즈와 슈지가 어쩌다 합심하여 흥신소를 열게 되는지도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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