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막의 게르니카
하라다 마하 지음, 김완 옮김 / 인디페이퍼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앙리 루소 화가가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작품을 두고 두 큐레이터의 치밀한 머리 싸움을 보여주었던 '낙원의 캠퍼스'의 작가, 하라다 마하가 새로운 작품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암막의 게르니카'란 작품입니다. '암막'이란 검은 장막을 뜻합니다. '게르니카'는 표지에도 나와있듯이, 파블로 피카소의 유명한 그림이죠. 



 피카소의 고향인 스페인은 한창 내전 중이었습니다. 군부 프랑코가 1933년 선거를 통해 집권한 공화파 정부의 개혁 정책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벌어진 내전이었죠.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하여 에스파니아의 많은 지식인들은 당연히 공화파 정부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독일 히틀러와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의 무력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국가적인 지원을 유일하게 얻을 수 있었던 곳은 프랑스였지만, 프랑스 역시 섣불리 개입했다가 역으로 독일의 침공을 받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내전과 되도록 거리를 두려 했기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기만 했죠. 그러던 1937년 4월 26일. 공화파 지지자들의 거점이었던 '게르니카'를 독일 공군이 무차별 폭격하여 무려 1,600명의 시민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나고 맙니다. 이런 사정은 2016년에 발표된 영화 '게르니카'를 보면 잘 나와 있으니, 이것을 보시면 게르니카의 비극을 더욱 잘 아시게 될 듯 합니다.


 그 때, 파리에서 만국 박람회 때 발표할 작품에 매진하고 있던 파블로 피카소는 언론을 통해 그 소식을 접하고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조국에서 그토록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으니 당연했겠지요. 자신의 예술이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게 될까봐, 아직 공공연히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지 않은 피카소였습니다만, '게르니카 사태'를 계기로 드디어 자신의 생각을 작품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게르니카' 입니다. 세로 약 350cm, 가로 약 780cm의 크기에 모노크롬으로 그려진 게르니카는 스페인관 맨 앞자리에 전시되어 만국박람회를 찾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게르니카의 비극을 생생하게 알리는 동시에 인류가 전쟁을 그만두고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웅변했습니다. 여기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지요. 하루는 독일군 장교가 게르니카 그림을 보러 와서는 피카소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당신이요?" 그러자 피카소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당신들이요." 이 소설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게르니카'는 그렇게 태어났고 이후 내내 폭력과 전쟁을 고발하고 자유와 평화를 염원하는 목소리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만국 박람회 전시가 끝난 뒤, 그림의 거처를 두고 파블로 피카소가 한 선택 때문에 더욱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는 '게르니카'가 프랑코가 지배하는 스페인이나 독일 나치의 손아귀로 들어가 그림이 지닌 반전의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도록 아예 그림을 그로부터 절대 안전할 수 있는 미국에다 맡겨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했습니다. '스페인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돌아올 때 돌려달라'고. 바로 이 선택과 당부 때문에 '게르니카'가 가지는 반전과 평화의 상징은 보다 더 확고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다시 한 번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적이 있습니다. 바로 2003년, 콜린 파월이 UN에서 이라크 공습을 개시하며 기자 회견을 연 때였습니다. 콜린 파월은 그 기자 회견을 UN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실에서 했는데, 거기엔 '게르니카'가 가진 평화의 목소리를 기리기 위해 '게르니카'의 태피스트리가 원본과 똑같은 규격으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월이 방송이나 보도 사진으로 그 그림이 보이지 않도록 장막으로 가려버린 것입니다. '암막의 게르니카'라는 소설 제목은 바로 이 사건에서 나온 것이죠. 아무래도 전쟁을 선포하는 자리에 강한 반전 메시지가 담긴 그림이 같이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게 좀 꺼림칙했던 모양입니다만 오히려 그로인해 더 큰 논란을 일으키고 더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게르니카'는 다시 한 번 사람들의 뇌리 속으로 들어왔고 자신이 지닌 반전과 평화에 대한 염원을 되새기게 했습니다.


UN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실 전경입니다. 원래는 이렇게 보이는 게르니카를 장막으로 가려버린 것이죠. 현재는 없습니다.

 2009년, UN이 건물 보수를 할 때 영국에 이송한 후로 내내 거기에 있다고 합니다.


 하라다 마하의 '암막의 게르니카'는 이 두 사건, 그러니까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리는 것'과 '파월이 기자 회견 당시 게르니카 태피스트리를 가린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피카소가 직접 등장하는 과거의 사건과 9. 11 이후의 현재가 서로 교차하면서 진행하는 구성인 것이죠. 과거와 현재 이야기 모두 이야기를 끌어가는 중심 인물이 있습니다. 모두 여성입니다. 과거에선 실제 피카소의 연인이자 게르니카 작업 모두를 촬영했던 '도라 마르'라는 여성이 중심이고, 현재에선 어릴 때 게르니카를 실제로 보고 그림에 매혹된 뒤로 평생 피카소를 연구했고 9.11 때 사랑하는 남편을 테러로 잃은 후, 더욱 '게르니카'가 가진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그림을 전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뉴욕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 '요코'라는 여성이 중심입니다. 


 도라 마르는 '우는 여인'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 옆에 있는 그림은 소설에서 언급되는 도라 마르의 초상화 입니다.


 하라다 마하는 도라 마르와 요코를 주축으로 과거와 현재의 게르니카 이야기를 번갈아 전개시키면서 '게르니카'에 얽힌 기구한 사연과 어둔 시대일수록 더욱 잃지말아야 할 예술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스릴러 형식을 취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런 요소는 다소 부족한 편입니다. 그러나 그림 '게르니카'에 관심이 많고 거기에 얽힌 사연들이 궁금하다면, 이 소설은 정말 좋은 벗이 되어줄 듯 합니다. 아마도 하나의 그림이 가지는 의미와 역할이란 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다는 것만큼은 분명 느끼시지 않을까 합니다.


 거기다 하라다 마하가 왜 하필 지금에 와서 이 소설을 썼는지 생각해보면 더욱 읽어야 할 작품으로 생각됩니다.

 이 소설은 2016년에 발표되었습니다. 그 때의 일본을 생각하신다면, 하라다 마하가 왜 게르니카를 소재로 소설을 썼는지 그 동기가 어느 정도 짐작되실 것 같습니다. 그 때의 일본은, 물론 지금의 일본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베 정권에 의해 한창 전쟁 가능 국가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전쟁 포기가 핵심인, 흔히 말하는 평화헌번 9조를 개정하려고 엄청 노력했었죠. 군비 증강을 통한 일본 재무장이 여기저기서 획책하고 있었습니다. 하라다 마하는 바로 그러한 일본의 움직임에 분명한 경고를 보내고 아베 정부의 선동을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무력화시키기 위해 '암막의 게르니카'를 쓴 것입니다. 하라다 마하에겐 지금의 일본이 바로 전쟁 선호를 위해 게르니카를 가려버린 암막이었던 것이죠. 그러니 소설의 내용 어느 하나 무심히 들어오지 않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역시 김정은와 트럼프의 자존심 싸움 때문에 평화가 위협받고 있으니까요. 이런 미치광이 놀음에 현혹되어 섣불리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암막의 게르니카'를 통해 '게르니카' 그림이 가진 의미를 다시금 깊이 돌아봐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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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이유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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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장 밝은 것은 가장 어둔 그늘을 만들기 마련이다. 한 여름에 불현듯 찾아오는 태풍처럼.

 그렇게 영국에서 팔리는 범죄 소설 중 1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 존 리버스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 '치명적 이유'는 시작부터 명백하게 대비되는 두 개의 시간을 보여준다. 누군가 죽음으로 가는 시간과 동시에 에든버러의 연중 최고 행사인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모두가 하나되어 웃고 떠드는 동안에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처형당하고 있었다. 머리, 팔꿈치, 무릎, 발목에 한 발씩, 그렇게 여섯 발의 총알을 맞아. 존 리버스는 시체를 보자마자 알아차린다. IRA가 주로 배신자를 처형하는 방식인 '식스팩'이라는 것을.

 누군가 그것을 모방해 자신의 조직을 배반한 이를 처단한 것이다.


 그 처형 방식을 알아보았다는 이유로 존 리버스는 테러 조직 수사를 전담하는 팀으로 차출된다. 자신을 별로 환영하지 않는 그 곳에서 그는 수사해야 한다. 한 편, 그는 리어리 신부에게서 개인적인 부탁을 하나 받는다. 에든버러에서 가장 거칠고 위험한 동네인 '가르-비'에 그 곳 청소년을 선도하기 위해 센터 하나를 만들었는데, 최근 그 센터 운영 방식이 이상해졌다고 한다. '가르-비'는 카톨릭인 구교와 개신교인 신교의 갈등이 극심한 지역으로 적어도 청소년만은 종교적 갈등에서 자유롭도록 만들기 위해 센터를 지었는데 요즘 카톨릭 아이들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러니 어찌 된 사정인지 알아보고 이대로 카톨릭 아이들이 센터로 올 가능성이 계속 없다면 운영자에게 폐쇄토록 하라고 리버스에게 당부한다. 그러나 이 일 역시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가장 거친 동네에 사는 아이들답게 아이들이 리더인 데이비 수터를 중심으로 완강히 저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곤란한 것은 그것 뿐만이 아니다. 처형 당한 남자의 신원이 밝혀졌는데, 놀랍게도 전작에서 리버스가 감옥으로 보낸, 리버스에겐 배트맨의 조커라고 해도 무방할 악당 캐퍼티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캐퍼티는 즉시 부하들을 보내, 아들을 죽인 범인의 정보를 알려달라고 요구한다. 자신이 직접 복수하겠다고 말이다.


 이러한 삼중고 속에서 리버스는 사건 해결에 나선다. 그러면서 목도한다. 스코틀랜드에 여전히 남아있는, 그것도 아주 치열한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종교적 갈등을.

 그 갈등은 리버스를 군대에 가도록 만든 1969년에 처음 일어났던 모습 그대로였다.


 어둠 속에서 불붙은 유리병들이 날아다녔다. 넝마조각으로 만든 심지에서는 휘발유가 튀었다. 화염병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증오는 웅덩이가 되어 번져나갔다. 사적 감정이 담긴 공격은 아니었다. 대의명분을 위한 행위였을 뿐.

 다 자신들의 명분이 키운 소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나름의 보호 방식, 검은 택시들, 총기 밀반입, 이상과는 많이 동떨어진 사건들. 그 모든 것이 통제력을 잃은 상태였다.(p. 117)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라졌다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건 그저 축제의 환한 빛에 잠시 가려졌을 뿐이었다.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어쩌면 축제야말로 기만이었을지 모른다. 사람들이 축제의 빛에 현혹되어 실존하는 갈등을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그렇게 해서 뭐가 남았나? 아무 것도 없었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증오도 그대로였고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도 그대로였다. 균열은 그런 기만의 축제로 메워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증거가 바로 식스팩 처형을 당한 남자의 시신이었다. 이제 존 리버스는 그것이 지금까지 항존하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작가가 소설 속 수사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바로 그것이다. 혐오와 증오로 상대방을 죽음까지 몰고 가는, '치명적 이유'를.


 "우리가 여기 온지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죠?" 그가 물었다.

리어리 신부가 미간을 찡그렸다. "이 세상에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자그마한 어떤 변화라도 이끌어내기에는 우릭 너무 미약해요."

"지금 주머니에 폭탄을 숨기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요. 우리 모두는 이곳에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어요."

"폭탄 테러범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를 막을 방법을 얘기하는 거예요."

"경찰로 살아가는 것 말이죠?"

"솔직히 저도 제가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p. 34 ~ 35)


 개인적인 느낌으론, 지금까지 나온 존 리버스 시리즈 중에 가장 사건의 규모가 크고 스릴이 넘치는 것 같다. 처음부터 폭발하는 장면이 나오더니 후반에 가면 이야기가 아예 질주한다. 이 시리즈의 첫 작품은 한없이 우울하고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한 마디로 꽤나 정적이었다. 그러나 '치명적 이유'는 전혀 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완전히 역동적이다. 존 리버스만 해도 그렇다. 우울에 젖을 겨를도 없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부서를 옮기고 도시를 오고가며 다른 여자도 만난다. 죽는 사람도 너무 많다. 살해 방식도 몹시 잔인하다. 여기저기서 갈등이 터져 나온다. 리버스는 지금 사귀는 여자 친구와 갈등을 일으키고, 경찰 내 외부도 갈등이 일어나며, 캐퍼티까지 가세해 치열의 강도를 높인다. 차갑다는 것은 분자의 움직임이 적다는 뜻이다. 뜨겁다는 것은 분자의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것이다. 너무나 움직임이 많기에 당연히 이 소설은 뜨겁다. 나로썬, 이토록 뜨거운 존 리버스는 처음이었다. 마치 영화 'LA 컨피덴셜'을 보는 기분이었다. 새로웠고 그래서 좋았다. 어쩌면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뜨거운 갈등인 종교 갈등을 다루고 있기에 소설마저 그 갈등의 온도를 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존 리버스는 과연 치명적 이유를 찾는가? 찾는다. 그러나 스포일러가 되기에 세세하게 말할 수 없다. 다만 그 이유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존 리버스의 말로 대신할까 한다.


 "난 당신 같은 사람들이 무서워요." 리버스가 냉담한 톤으로 말했다. 진심이었다. 콜록거리는 다드 수터는 열 명의 캐퍼티보다도 훨씬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바뀌지 않고, 말도 통하지 않는 타입. 누구도 그의 정신을 건드릴 수 없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운영진이 모두 퇴근해버린 가게나 다름없었다.(p. 368)


 이 소설에서 존 리버스는 이런 자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미 죽어버린 것을 뜯어먹는 하이에나처럼, 이미 전쟁은 끝났는데 여전히 전쟁이 있다고 믿으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나라에서도 어버이 연합 노인들이나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혹은 안철수와 같이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 오로지 자기만 옳다는 생각에 타인을 위해 자신이 변할 생각은 조금도 않고 무작정 이기려고만 드는 사람들. 내가 입히는 상처와 아픔은 보지 못하고 애오라지 자기가 입은 것만 보는 청맹과니들.

 그것이 바로 죽음을 양산하는 '치명적 이유'라는 것을 화염의 온도 속에서 존 리버스는 깨닫는다. 그건 그대로 리버스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였다.

 특히 연인 페이션스와의 관계에서.


 이언 랜킨은 재밌게도 리버스와 페이션스의 관계를 통해 여전히 뜨거운 종교 갈등의 본질적인 이유와 그것을 해결하는 대안을 넌지시 암시한다. 소설 초반에서 리버스는 자신의 취향을 자꾸만 바꾸려고 하는 페이션스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 그런데 리버스 자신의 마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만 소중하며 그걸 곧장 드러내는 변호사 캐롤라인 때문에 아주 난처해진다. 그것을 통해 깨닫게 된다. 사랑이란 자신을 조금씩 더 덜어내고, 타인에게 더 맞춰주는 노력이자 과정이라는 것을. 종교 갈등을 해결하는 게, 본질적인 면에 있어 이 사랑과 그리 다르지 않다. 때문에 소설의 마지막이 페이션스와 함께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뭐, 그건 바로 전작 '검은 수첩'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쩌면 페이션스가 등장한 뒤로, 사실 존 리버스의 이야기의 알맹이란 잠시 그녀를 떠났다 다시 돌아오게 되는 이유에 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여러 이유로 결별하고 또 재회하니까. 다만 그 사랑을 끝장내는 치명적 이유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적어도 늘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맞춰준다면 거기에 이르진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 이 소설이 무슨 연애학 개론 같네. 하기사 그렇게 읽어도 상관 없을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 읽든 '치명적 이유'는 속이 든든한 느낌을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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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9-21 2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글에서도 뜨거움과 흥분이 뚝뚝 느껴져서 뭐지, 뭐야 하면서 따라 읽었네요^^

ICE-9 2017-09-26 20:42   좋아요 0 | URL
하하, 제 열기에 감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뜨거움과 거리가 먼 일상인지라 글로나마 한 번 가져보고 싶었어요^^
 
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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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독서란 언제나 의문에서 비롯된다'82년생 김지영' 그랬다지금까지 여성이 당하고 있는 차별과 억압의 현실을 그린 작품은 많았다그런데도 ‘82 김지영 마치 인제야 그런 현실에 처한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작품이 나온 것만 같은 반응을 받고 있었다 책을 읽었던 주위의 많은 여성이 ‘맞아맞아 연발했고 남자도  읽어봐야 한다면서 앞다투어 내게 권했다노회찬 의원이  책을 영부인에게 선물하고 금태섭 의원은 200권을 사서 동료 의원들에게 돌렸다는 보도도 접했다온라인 서점 베스트셀러 순위의 가장 높은 곳을 오래도록 차지하고 있기도 했다어째서이런 소설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궁금했다아무래도 ‘82년생 김지영만이 가지고 있는 뭔가 새로운 게 있나 보다 생각되었다그것도 압도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김지영과 만나야 했다흡사 소설 마지막에 나오는 남성 정신과 의사처럼 그녀의 삶을 읽어나갔다.

 

 일단 김지영의 삶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그녀가 겪은 차별소외부당함두려움외로움우울은 그녀만의 것은 아니었다이런저런 풍문이나 소설 혹은 드라마와 영화로 많이 접해본 것이었다우리나라 여성  누구라도 김지영이   있었다지영의 엄마와 정신과 의사 아내의 삶이 김지영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듯이소설 자신도 그것을 암시하고 있었다간간이 인용하는 통계가 그러했다유독 김지영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그녀의 삶은 사실 우리나라 여성의 삶이 가진 보편적인 양태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그러나 솔직히 고백하건대 역시도, 너무나 낯익은 풍경이어서 따분했어야  텐데도  이국의 땅에 처음  관광객처럼  모든 광경이 아주 새롭게 다가왔다그런  반응이 나조차 낯설었다 그래도 페미니즘 책을  읽은 편이라고 자부하지 않았던가그런데도  이리 처음 들여다보는 것만 같은 기분일까이처럼 소설에 대한 의문은 나에 대한 의문으로 전이되었고 결국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소설은 지금까지 나온 비슷한 주제의 소설과 다른 층위를 재현하기 있기 때문이라고.

 

 다시 말해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부분이 달랐다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위해 거창한 서사를 담지 않았다여성 차별을 이야기하는 소설들은 흔히 남성 중심 사회와의 갈등이나 대립을 전면에 내세웠다그러다 보니 소설은 자연히 일상보다는 사건 중심으로 돌아갔고 그러한 갈등과 대립이 있어야만 보이는 여성 차별의 거시적인 면만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런 위치에 있는 여성만이   있는 특수한 경험이었다그러다 보니 그것과 별로 연관이 없는 대다수 여성은 구경꾼이 되기에 십상이었고 더욱이 그런 위치에 있어야 공감할  있는 갈등과 대립이었기에 자신의 삶과 유리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공감보다는 흥미연대보다는 선망을 낳았다작품 세계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현실을 돌아다 보면 여성이 받는 부당한 차별은 온데간데없고 그런 여성이 되지 못한 자신의 못나고 부족함만 곱씹게 했다.


 그러나  소설은 반대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흔한 일상으로 들어갔다삶의 가장 낮은 층위에 재현의 시선을 갖다 대어 날마다 미시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부각했다일상이었고 보편이었기에 우리나라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었고 그래서 누구도 구경꾼으로 있을  없었다모두 억압과 차별을 받는 당사자가 되었다김지영만의 일이 아니라 바로  일이 되었다. 자연히 자신의 못남과 부족함을 되새기도록 하는  아니라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응시하도록 만들었다 시선 속에서 그동안 당하면서도 그러 줄조차 몰랐 일들이아픔을 막연히 느낄지언정 미처 언어로 자아낼 수는 없었던 것들이 마침내 얼굴을 찾고 목소리를 가졌다자기의 삶으로 경험한 일이었기에 다른 누구의 말에 기댈 필요도 없었다자신의 언어로 충분히  일을 규명하고 아픔의 연유 또한 구술할  있었다나는 이 소설에 대한 많은 여성의 공감이 바로 여기서 연유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다른 누구의 언어도 아닌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삶을 통찰하고 증언할  있게 되었다는 것이 공감의 진정한 초상이라고.


 여성이야 그렇다 치고 나는 왜 이 이야기를 새롭다고 느낀 것일까? 그건 지금까지 내가 너무 거시적 차원에만 경도되어 있었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흔하게 범하는 생각의 오류가 하나 있다. 바로 거시적 차원의 문제가 해결되면 미시적 차원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오류다. 진실은 오히려 반대다. 미시적 차원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거시적 차원의 문제도 비로소 해결된다. 자신의 삶 속에서, 일상 속에서 내 생각과 태도가 변하지 않으면 거시적 차원 역시 바뀌지 않는 것이다. 억지로 바꾼다 해도 일상적 차원에서 태도 변화와 실천으로 뒷받침 하지 않으면 언제고 다시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사회를 바라보면서 어떤 것이 정말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나부터 바꾸어야 한다. 개인, 그가 영유하는 일상이 아무리 작고 사소하더라도 거대한 변화의 파문을 일으킬 소중한 첫 동심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저마다의 삶이 도미노의 첫 조각이다. 거기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을 잊고 있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나의 삶, 일상이라는 것을. 책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작가 역시 그것을 알기에 이처럼 보통의 삶, 일상이라는 미시적 차원으로 들어간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제야 그것을 보았고 여기에 대하여 사실은 내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영의 할머니나 아버지까진 아니더라도, 나도 지영의 남편만큼은 여자들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것도. 나는 그렇게 상처가 되는 말들을 별생각도 없이 얼마나 쉽고 태연하게 남발해 왔던가? 소설 속 어떤 순간은 내가 가해자의 위치에 있었던 적도 있어서 더 남모를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그런데도 여태껏 잘못한 것을 몰랐다니. 진짜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이런 사소한 편견,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차별, 습관처럼 내뱉는 말들, 잘못이라는 걸 모르기에 무한정 쌓이기만 하는 이것들이 결국 여성에게 불필요하고 부당한 희생을 강요하는 가부장제 질서를 떠받치는 토대가 되니까 말이다.


 하루는 심야 상영을 보고 밤늦게 걸어서 집으로 왔다. 버스마저 끊긴 시간이라 도로는 조용했고 당연히 인적마저 드물었다. 분주한 일상에만 있다가 고요하고 한적한 길을 걸으니 기분이 참 좋았다. 걸으며 콧노래마저 흥얼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만일 내가 여자라면 어땠을까? 그래도 즐기면서 걸었을까? 아닐 것이다. 김지영이 고등학생일 때 같은 학원 다니는 남학생에게 당할 뻔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앞에 놓인 거리는 오로지 불안과 공포만 가득했으리라. 그러고 보니 같은 모임 여성분이 이런 말을 했던 게 기억난다. 집에 혼자 살면 시켜 먹는 것도 무섭다고. 더구나 배달하는 남자들이 자기들끼리 여자 혼자 사는 집 정보까지 공유한다고 하니 너무 무서워서 시켜먹는 것은 생각도 못 한다고 했다. 세상에 음식 배달시키는 것을 무서워하는 남자는 없다. 남자라면 당연히 하는 일이 여자에겐 불안과 공포가 되어, 할 수 없는 일이 되다니. 이런 상황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난 아무래도 차별이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것은 누가 주었는가? 남자다. 더 엄밀히 말하면 문화라 할 것이다. 그런 짓을 저질러도 엄중한 처벌이 내려지지도 않고 피해자만 불쌍하게 된다는 믿음이 사회에 널리 퍼져있어서 그리된 것이니 말이다. 그런 믿음을 주는 문화를 바꿔야 하고 그 문화의 변화를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과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 한 사회의 문화란 알고 보면 그에 속한 개인이 가진 생각과 태도의 총합과도 같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변화라고 했지만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 향방이 명확해야 들을만한 말이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소설에서 들을 수 있다. 소설 후반에 나오는, 김지영의 삶을 오롯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내를 통해 절절하게 경험까지 했는데도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전혀 변하지 않는 정신과 의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의 시선이 변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타자의 처지보다 더 우위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타인을 볼 때, 칸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목적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 모든 것을 자신을 중심에 놓고 보기에 시선의 변화 역시 없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지영이 차별과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다 비슷했다. 모두가 자신의 마음, 욕망만 고려했다. 명절날에 지영이 시어머니가 그러했고, 보육은 부부가 함께 져야 할 책임인데도 자신이 도와준다고 생각하고 있던 지영의 남편도 그러했으며, 지영이를 겁탈할 뻔 했던 고등학교 때의 남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카페에서 지영을 두고 '맘충'이라 비아냥거렸던 남자 회사원들도 그러했다. 물론 이 리스트는 여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지영이 다니던 회사에서 발생한 몰래 카메라 사건에 연루된 동료 남자 사원들을 비롯하여 손자만 위했던 지영이 할머니도, 딸을 낳으면 어쩌나 하는 지영이 엄마의 말에 "말이 씨가 된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자'라고 했던 지영이 아빠도, 남자라고 집안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 지영이 남동생도, 지영이 엄마가 자신을 위해 꿈을 희생한 것을 알면서도 정작 도움은 남동생에게만 줘 버렸던 지영이 외삼촌들도 있다. 모두가 나보다 상대를 중심에 놓고 생각했다면 소설에 새겨진 고통의 길이는 훨씬 줄어들었을 터였다.


 그러고 보면 소설 초반에 나오는 빙의된 것만 같은 지영의 모습이야말로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진정한 대안의 형상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거기에는 타자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주는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은 타자에게 결코 자신을 내어줄 리 없는 이들에겐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해 본 적도 없고 가능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던 모습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보는 이들의 생각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 틈을 통하여 비로소 지영의 참된 모습을 바라보게 했다. 소설의 순서는 그러한 지영의 모습이 없었다면 그녀의 생애 또한 듣지 못했을 것이라는 걸 암시하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하나의 태도가 변하면 그것은 여파를 만든다는 것을 내용과 형식 양면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이러니 '대안의 형상'이라는 표현이 그리 무리 있어 보이지 않는다. 소설 역시 그것이 되고자 하는 것 같다. 빙의가 존재의 전적인 겹침인 것을 고려한다면 지영의 전 생애를 한 폭의 두루마리처럼 쫙 펼쳐서 삶 전부를 바라보게 한 것도 어쩌면 독자 또한 지영의 존재에 빙의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소설을 읽는 행위 자체가 타자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경험이 되도록 말이다. 그것이 무엇보다 문화를 바꾸는 소중한 첫 걸음이기에. 내 솔직한 소감이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었고 헤아리지 못한 것을 헤아리게 되었다. 타자의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면 체득할 수 없는 것들이라 생각되기에 그리 말했다. 이 책으로 내디딘 첫 발걸음을 단단히 기억해두려 한다. 읽으면서 느꼈던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다시는 갖지 않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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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쁜 쪽으로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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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의 기록처음엔 그렇게 보였다 나쁜 쪽으로’(동명 제목인  책에서  처음 나오는 단편을 말한다.) ‘천국에서라는 전작에서 천국으로 그려졌던 뉴욕의 일상을 담는다그러나 그곳마저 더는 천국이 아니다작가는 그곳을 마치 천국처럼 묘사한다주인공 여자가 사랑하고 매달리는 남자를  거리가 아무것도 없던 때에 와서 이제는 중심이 된,  마디로 신과 같은 존재로 그리는 것을 보면 그렇다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그와 만날  없다사실 그녀는  남자도천국으로 알았던  거리도 믿지 않는다거리는 내내 그녀에게 구원의 역이 있다고 말하지만그녀는 알고 있다역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지도와 표지판 모두가 쇼윈도에 전시된 화려한 상품들만큼이나 현란한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녀는 천국이 있다는 믿음 속에서  곳에 닿고자 열심히 걸어가는 사람들과 달리 나침반의 자침과도 같이 천국에 맞춰져 있는, 자신이 지닌 양의 주광성 죽인다스스로 음의 주광성 되려 한다이제 그녀는 ‘ 나쁜 쪽으로’ 걷는다이어지는 이야기는 절망의 심화 과정이자 그것을 낳은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의 추적이기도 하다. 여기서 김사과가 말하는 천국의 의미는 보다 명확해진다이것은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다세속적 의미의 천국이다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욕망하는 모든 것의 구현이자 본향(本鄕)으로써의 천국인 것이다그래서 미국이다누가 뭐래도 자본주의 하면 미국이니까 말이다아마도  천국이라는 말은 미국을 가리키는 말이자 비아냥하는 은어이기도  천조국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천국엔 무엇이 있는가? ‘ 나쁜 쪽으로 주인공 여자처럼 오욕뿐이라는  알면서도 매달릴만한 무언가가 과연 존재하는가그것을 알아보는  1부의 이야기다

 

 이제야 하는 얘기지만, ‘ 나쁜 쪽으로 단편집이다. 2011년과 16 사이에 여러 지면에 발표한 7개의 단편과 2개의 미발표 단편이 실려있다. 1  , 2  , 3 2이렇게 담겨 있다. 1부가 ‘천국 이야기라면, 2부는  하나의 ‘천국 되려 하는 이곳 현실의 이야기다. 3부는  모든  뒤섞여 정확히 어디가 어딘지   없는 곳의 이야기며 결국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를 찾을  없어 유령이 되어버린 자들의 실체 없는 목소리다김사과는 사람을 허망하면서도 이기적인 욕망의 노예로 만들고 서로 진정한 소통과 관계를 단절하여 한낱 수단으로 전락시키고야 마는 자본주의를 꾸준히 공격해왔다그런데  공격의 양상이 달라졌다지금까지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테러가 물리적인 것이었다고 한다면 여기서는 정신적인 것이라   있다무작정 외부에서 치고받기보다는  내부로 들어가서 양파 껍질을 까듯   근원의본질적인 면을 파헤치려 하기 때문이다.


 물론 1  편의 이야기는 얼른 보면 아무런 연속성이 없어 보인다그러나 단편마다 언급하는 음악과 미술 소재가  단편들이 실은 시간상으로 역순되는 시대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처음  나쁜 쪽으로 70년대에 유행한 펑크라는 음악 장르가 나왔다이어지는 샌프란시스코 60년대를 주름잡았던 히피의 메카이다 단편의 주인공 남자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로지 감각할  있는 물질적인 면만 중시했는데 이제  영혼을 헤아리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물질의 집착에서 벗어나 정신 추구했던 히피 그대로다다음의 ‘증기그리고 속도 자본주의의 시원(始原)이라   있는 근대가 창출한 가장 대표적인 변화를 포착한 풍경화다 그림은 기차를 처음   터너의 충격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터너가 받았던 충격과 보았던 기세 그대로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을 많이 그리고 급격하게 변화시켰다무엇보다 직업이 없으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없게 되었다이것이 이전 중세와 가장 많이 다른 점이었다사람의 본질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그의 전부를 좌우했다마치 이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단편은 실업자 등장시키고 돈이 없어 남에게 빌붙을 수밖에 없는 주인공에게 아시아 창녀라는 소리까지 듣게 만든다그녀의 남자 친구가 하필이면 포르투칼 국적인 것도 눈에 띈다. 포르투칼 하면 가장 먼저 유럽이 아닌 다른 대륙에 식민지를 만들어 자본주의를 유포시킨  마디로 근대의 첨병(尖兵) 같은 국가가 아니던가이처럼  단편은 근대의 시간을 슬그머니 끌어들인다그리고 이런 식으로 ‘ 나쁜 쪽으로에서 ‘증기 그리고 속도까지 역순의 역사가 형성된다작가는 착란하는 피난민들 양산하고 있는 자본주의에게 그래도 희망을 걸만한 무언가가 있는지 거슬러 올라가며 탐사하고 있는 것이다애초부터 잘못된 것이기에 오늘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아니면 원래는 좋은 것이었으나 오용의 결과인지 알고자  것이다그렇게까지  결과 확인하게 되는 진실은 지극히 비관적이다근대의 시원이 되는 ‘증기 그리고 속도에서 주인공 여자와 실업자 모두 추방에 추방을 거듭하다 아무런 실체 없는 귀신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목도하니까 말이다.


 나는 궁금했다그들은 누구이며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지그들도 묻고 싶은 듯했다너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서 귀신이 되었는가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떠돌고 있는가어떤 희망을 가졌던가?


   마디로 자본주의는 애초부터 유령의 생산 운명지어져 있었다는 것이다마르크스였던가자본주의가 소외의 숙명을 가졌다고 말한 것은소외 바깥으로 내모는  뜻한다정주(定住)하는 존재를 유랑토록 하는 것이 소외다더하여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소외를 가장 격렬하게 만든다고 했다방랑의 지속이다자본주의 안에서 살아간다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그리게  궤적이다. 1부의 마지막 단편인 지도와 인간 그것을 보여준다. ‘지도가 있으면 인간이   있다 믿음 속에서 그토록 추방당하고 정처없이 헤매이면서도 지도를 찾을  있다는 희망으로 감내해왔는데 그런 희망은 다만 착란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제는 지도조차 바랄  없게  현실을 그린다.



 지도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그것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작정이다.(그렇다고 한다.) 지도가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사람들이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묻는 것이 허용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지도를 가질  있는 존재가 유령이 되었기 때문이고 지도와 소통할  있는 말을  믿게  탓이다자본주의는 그동안 사람들에게 지도였다그것은 황무지와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그래도 좋은 쪽으로 가고 있다고 말해왔다언젠가는 히브리 사람들이 그랬듯 가나안으로 가게  것이라고그러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며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은 모든   거짓이라는 사실이다현재의 착란을 제거해 주리라 믿었던 지도는 오히려 착란을 부풀리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1부의 계보는 착란이 어떻게 가중되는지 보여주는 계보이기도 하다지도는 진실을 보증하지 못했다그것은   역시 진실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마지막 단편에 갑자기 침범하여 자꾸만 늘어나는 영어는 그런 정황을 독자에게 시각적으로 보여주려는  아닐까 싶다소통의 가장 근본적인 단위가 되는 말조차 이제 착란의 먼지구름이 되었다착란의 피난민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숙명이었다작가는 그것을 태초의 시간이자 여전한 현재에서 아프게 통감한다.


 3부의 미발표 단편  개는 작가가 여전히 절망 속에 있다는 것을 확인케 한다소설가는 무엇보다 말로 지어 먹고 살아가는데  말을 믿을  없게 되었으니  통렬했던  같다세계의 에선 영어와 우리말이 착란을 일으키듯 뒤섞인 가운데 작가는  불안이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각 속에서 기록하는 것을 그만뒀다고 고백하고 마지막 단편에선 차라리 제목처럼 자동  판매 기계 되길 원한다거기의 언어들은 모두 조각나 있고  어떤 것도 일련의 이야기로 묶이지 않는다우리가   있는 것은 발굴 현장의 도자기 파편처럼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말의 더미일 뿐이다이것은 이제 이런 것밖에   없다는 고백인 걸까 아니면 그래도 말을 믿고 다시 소설을 쓰기 위해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말을 배우고 있다는 과정을 드러낸 것일까물론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착란을 정물화로 그린 것만 같은  단편은 속 시원한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다모호한 가운데 마치 자신의 착란을 내게 감염시키려 하는 느낌마저 든다.


 나름 매끄럽게 말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2부에 대한 말을 빠뜨렸는데앞서도 말했듯여기서는 미국을 모방하여  하나의 천국이 되려고 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2부도 물론 1부처럼 역순의 계보를 이룬다2  단편 ‘박승준씨의 경우 주인공 박승준이 외롭고 초라한 자신의 현실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남의 아파트 재활용 장소에서 몰래 건져  외국 유명 브랜드 정장을 입는데 그것은 미국에 견주어 우리의 고유한 정체성을 비루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모방하여  정체성을 우리에게 이식하기에 여념이 없는 씁쓸한 오늘의 현실을 나타낸다 몸에 맞지도 않고 누가 일러주지 않으면 뭔지도 모르는 남의 옷에다 억지로 걸쳐 입고 살아가는  아니냐고뒤이은 카레가 있는 책상 조금  거슬러 올라가 군부 독재의 시절을 은연중에 끌어온다약한 존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시원에서 핍박받다가 살해당하는 조선족은 그런 사건이 바로 자신이 살던 장소에서 일어났는데 아무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는 것에서 전두환이 광주 시민을 학살한 것이나 박정희가 긴급조치로 무고한 시민들을 마구 잡아들였던 것을 연상케 한다단편의 주인공은 보잘것없는 자신의 존재감을 남을 혐오하고 남에게서 혐오를 받는 것을 통해 충전시켜 나가는데(그가 즐겨 먹는 카레는  마디로 자존감을 확보하려는 수단이다강하고 널리 퍼지며 피할  없는 카레 냄새로 그는 자기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이것은 군부 독재가 자신의 허약한 정당성을 오직 증오와 혐오를 통해 이루려 했던 것과 유사하다.


 이것은  박승준씨의 경우 같은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지 이유를 보여준다빈약한 자존감과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낼  없는 용기의 부족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오로지 타인에게 기대어 형성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단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침묵하는 고시원처럼 군부 독재의  극단적인 억압과 감시의 경험은 주체가 자립할 힘을 빼앗아 버렸고 공백이 되어버린 내면에서  이상 자기 존립의 근거를 찾지 못하게  사람들은 타인을 통해 충전해야 했다주인공이 마지막에 카레가 되어 누군가의 입에서 으깨어져 그와 완전한 하나가 되기를 소원하는 것처럼.


 마지막 이천칠십X 부르조아 6 암시하는 시간대가   거슬러 올라간다단편이 비록 과거와 현재미래가 마구 뒤썪여 있긴 하나귀족 계급이 존재하고 도포자락이 나오며 말로 왕래할 뿐만 아니라 두루마리로  서찰이 오간다는 점에서 독자로 하여금 분명히 일본에 의해 자본주의가 한창 이식되던 시절의 조선 말기를 떠올리도록 하기에 하는 말이다뭐랄까모방의 시원이 되는 시간대를 담은 느낌이다주인공 민정남은 검시관인데 서울 장충동에 있는  도로에서 발견된  사체 때문에  유력 자본가 가문의 자제인 엘리자베스 수지 윤과  알란 정의 연애에 끼어들게 된다그러나 진심어린 사랑의 밀어인  알았던 서찰은 사실 탐욕에 물든 흉계였고 본의 아니게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했던 민정남 또한 파멸하게 된다그가 그렇게  것은 말이 진실을 보증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그가 마지막에 보게 되는 신비한 홀로그램 정원은 진실이 완벽하게 보증되는 세계였다 풍경을 위해 목숨도 바칠  있을 만한하지만 그조차 환영이었다진실한 말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다만 영원한 그리움과 그에 맞먹는 무력감 속에 자리할 뿐이었다있는  다만 그런 말이 있었다는 사체.


 말과 똑같은 음을 가진 말의 사체 바로 그것을 가리키고 있었다우리가 믿을  있는 말은 죽었다는 그런 의미에서 엘리자베스 수지 윤과  알란 정이란 존재는 한편으로 미국이 자신의 위엄을 최초로 알린 해방 정국 시기우리나라를 양분했던 소련과 미국의 이데올로기 동조된 이들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이데올로기가 진실된 말을 전하기보다 진실에 상관없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말의 사체에 함유된, 진실한 말의 죽음이라는 의미는 더욱 명확해진다고 하겠다.


 모방의 태초가 되는 시간에 이미 말이 죽어 있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온전히 파악하고 드러낼 고유의 언어를 잃고 남의 시선에 맞춰진 남의 언어로 그런 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애초부터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번역해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알고보면 줄곧 소외되고 있었던 것이다이처럼 2 또한 소외의 계보를 역순으로 훑는다우리의 경우엔그렇지 않아도 착란의 계보로 점철된 ‘천국 무분별하게 모방까지 하는 바람에 혼란이  가중되었다이렇게 말하면 3부의 단편이 가진어쩌면 황당하게 보이기도 하는  파격적인 형태가 조금은 이해될지도 모르겠다3부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며 1 그리고 2부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결론이라는  강조하고 싶다.


 나는 앞서 3부에 대해 말하면서 작가가 느낀 절망의 정직한 고백인지 아니면 상황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배우기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다그러나 여기에 이르러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후자가 맞는  같다리뷰를 통해 생각을 정리하다가 나는 문득 작가가 소설 전체에 걸쳐 계속해서 불확실과 불안정 얘기하고 있다는  깨달았다. ‘ 그랬을까?’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그러다 어쩌면 부정 보다는 긍정의 몸짓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단편의 주인공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택했다나를 잃는 것을 받아들이거나(‘샌프란시스코’, ’카레가 있는 책상’, ‘이천칠십X 부르조아 6’) 혼란과 불안 속에 계속 머물렀다.(‘증기 그리고 속도’, ‘박승준씨의 경우’) 그들은 모두 ‘ 나쁜 쪽으로 주인공처럼 안정과 정답을 희구하는 무리의 행렬을 이탈하여  나쁜 쪽으로 걸어갔다스스로의 선택으로.


 이것이 눈에 들어오자 처음 읽었을 때는 무력감의 표현이자 타협과 순응으로만 보였던 모습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혼란과 불안을 기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껴안는그것을 삶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으로 삼는그런 모습을그래서 후자라고 생각한 것이다작가가 혼란과 불안 속으로 뛰어들어 수많은 의심과 질문 속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가고 있다고이런 모습은 솔직히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나는 이와 반대편이기 때문이다살면서 나는 어떻게든 혼돈과 불안을 피하려 했다느닷없이 그것과 마주할 때면  부족함과 무력함을 먼저 탓했다작가가 바라보았던 것과 같이 잃는 것을 통해 새로 얻을 가능성 따위 생각해보지 않았다어떻게 가느냐가 아니라  만큼 왔느냐가 중요한 나였다.


 그런데 소설은 ‘ 나쁜 으로 걸으라 한다작가가 그렇게 말한  아니다그냥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다그런데도  말이 뇌리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 내가 뭔가 잘못 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일까 역시 착란의 계보 속에서 아무런 의심과 질문 없이 남들이 정한 해답을 수용한  아닌가 하는 의혹으로   주위를 계속 서성이게 되는 것일까작가가 재현한 착란의 계보가 설득력이 있었기에 그가 암시한 태도 또한 받아들이고 싶어진다그동안 확실하고 굳건한 돌만 디디며 삶이란 징검다리를 건너온 내게 과연 ‘ 나쁜 쪽으로’ 걸어갈 용기가 있을지 모르겠다그래도 앞으로는 혼란과 불안 앞에서 지금까지 꼭꼭 잠궈두기만 했던 마음의 문을 말을 처음 배울  그러하듯이 천천히 열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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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원래 인용문에 페이지 숫자를 명기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전자책으로 읽어 그럴 수 없군요. 혹시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알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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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먹는 나무
프랜시스 하딩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평점 :
품절


 프랜시스 하딩의 '거짓말을 먹는 나무'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영국 아마존에서 18주 연속 1위를 했다고 하는데, 그럴만해 보인다. 19세기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이지만 단순한 환상 소설은 아니다. 남성 중심 사회가 가하는 억압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숨기고 오직 남성 사회가 원하는 모습을 연기해야만 했던 여성의 모습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이야기는 이러하다. 소설이 시작되면 주인공 소녀 페이스의 가족이 베인이란 섬으로 떠나고 있다. 페이스의 아버지 에라스무스 선더리는 목사로 자연 과학자로도 유명한데 특히나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그가 발견한 화석 때문이었다. 그게 보통 화석이 아니라 날개 달린 인간의 화석으로 그러니까 천사의 존재를 입증하는 화석이었기 때문에 높은 명성을 얻었던 것이다. 그 화석을 발견했던 것이 원래 페이스였기에 그녀 역시 '화석의 소녀'로 짧게 유명해졌다. 그런데 그 화석이 그만 가짜라는 게 들통나고 삽시간에 과학자의 치욕이 된 아버지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피해 달아나듯 베인 섬을 찾았던 것이다. 마침 그 섬의 치안 판사 앤서니 람베트가 초청해 주었다. 아직 본토에서의 일이 섬까지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페이스의 가족은 섬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다. 아버지는 재기를 노리고 다시 연구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섬 사람들도 아버지의 일을 알게 되고 마침내 가족 모두가 혹독한 냉대를 당한다. 


 페이스 모녀가 다가가는 순간 가게들은 일제히 문을 닫아버렸다. 케이크 가게 여자 주인은 프랑스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머틀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 척했지만 다른 사람들 말은 잘도 알아듣는 것 같았다. 작은 약제상 주인은 너무 바쁜지 페이스 모녀가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p. 121)



 아버지의 좌절은 심화하고 페이스가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모습을 점점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러다 아버지가 자신을 도와 달라는 말에 단둘이 밤바다를 헤쳐 나가 한 동굴로 가게 된다. 그 동굴에 아버지가 몰래 숨겨 놓은 '거짓말 먹는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실제로 거짓말을 먹고 산다. 나무에 대고 거짓말을 하면 나무가 마치 포자를 퍼뜨리듯 마을로 퍼져나가 사람들 사이에 소문으로 떠돌게 된다. 나무가 거짓말을 먹으면 열매 하나가 생기는데, 그 열매는 먹는 이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진실을 보게 만들어 준다. 뭐랄까? 거짓을 먹어 진실로 승화시키는 나무 같다. 어쨌든, 그렇게 거짓말 먹는 나무를 보고 온 다음 날 아버지가 절벽 중간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아버지와 함께 집까지 돌아온 페이스는 왜 아버지가 다시 바다의 절벽으로 가서 죽었는지 납득하지 못한다. 죽음의 정황상 자살이 추정되지만 페이스의 엄마 머틀은 자신의 미모를 사용하여 관련자들을 유혹, 남편의 죽음을 자살이 아닌 사고사로 만들려 애쓴다. 그런데 페이스는 아버지가 죽은 현장 부근에 손수레 하나를 발견한다. 분명히 그 날 밤에 아버지와 함께 집까지 끌고 와서 온실 옆에 놓아둔 손수레였다. 그것이 어떻게 다시 아버지가 죽은 곳에 있게 된 것일까? 페이스는 직감한다. 아버지가 집에서 살해당했으며 아버지를 살해한 누군가가 손수레에 아버지 시체를 옮겨와서 절벽에서 떨어뜨린 것임을. 이제 페이스는 그동안 착한 소녀 연기 하느라 마음 속에 꼭꼭 억눌려 왔던 또 하나의 자아, '마녀 하피'를 해방시키려 한다. 


 페이스는 마음속에 수많은 의문을 안고 있었고, 그 의문은 나무상자 속의 뱀처럼 똬리를 튼 채 온몸을 비틀고 있었다. (...) 페이스의 마음속에서 그것은 이름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가 그것에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이유는 그러면 그것이 그녀에게 더많은 힘을 휘두르게 될까 봐 두려워서였다. 그것은 중독이었다. 페이스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페이스는 항상 그걸 포기했지만 진정으로 그런 적은 없었다. 그것은 세상이 아는 페이스와는 정반대였다. 착한 페이스, 든든한 페이스, 믿음직스럽고 따분한 페이스(p. 21)


그녀는 더이상 착한 소녀가 아니다. 아버지를 살해한 사회와 싸우는 투사다. 그것을 위해 그녀는 아버지가 물려주신 '거짓말 먹는 나무'의 힘을 적극 이용하려 한다. 아버지가 유령이 되어 마을을 떠돌고 있다는 거짓말을 비롯, 필요한 거짓말들을 마을에 퍼뜨린다. 그런데 아버지의 연구 자료를 노리는 이들이 있다. 믿었던 삼촌이 그들과 협력하여 페이스가 숨겨 놓은 아버지의 비밀 노트를 찾아서 가져가려 한다. 그들은 왜 아버지가 감춰둔 자료를 노리는 것일까? 그 이유와 사람들의 정체는 놀라운 반전 속에서 펼쳐진다.



 '거짓말 먹는 나무'는 이런 이야기다. 줄거리는 이렇지만 속을 더 뜯어 들여다 보면 이 이야기는 19세기 남성 중심 사회에 포박된 여성들이 자신의 자유와 생존을 걸고 힘껏 싸우는 분투기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페이스만이 아닌 것이다. 소설 처음엔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여 이기적인 욕구를 채우는, 그래서 더없이 속물적으로 보였던 페이스의 어머니 머틀이나 아버지를 파멸로 몰아간 최후의 흑막이 되는 존재 또한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여성으로써 최선을 다해 버티고 싸우고 있었다는 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다. 정말은 여성 스스로 독립과 자존을 쟁취하려는 투쟁의 서사이다.


 소설에서 거짓말은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여성들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생존과 지속을 위하여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숨기고 남자들이 바라는 모습을 연기하고 위장하는 것으로의 거짓말이다. 다른 하나는 그런 여성들이 싸워야 할, 여성을 억압하고 남성에게 순종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해 진리처럼 위장하여 유포하는 남자들의 거짓말이다. 소설엔 많은 자연과학자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여성이 차별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정당화 한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 그것들이 모두 여성에 대한 두려움과 남성의 옹졸한 자존심 때문에 나온 거짓 서사라는 게 밝혀진다. 압권은 페이스의 아빠다. 페이스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신뢰한다. 비록 화석이 가짜라는 게 밝혀졌어도 페이스는 아버지를 믿고 세상이 오해하는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그렇게 믿었던 아버지는 페이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네가 아들이라면 언젠가는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고 가족의 재산을 늘려서 그 은혜에 보답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딸은 절대 그러지 못해. 넌 절대로 명예롭게 군대에 복무할 수도 없고, 과학 분야에서 명성을 얻을 수도 없고, 성직이나 의회에서 명성을 얻을 수도 없고, 일을 해서 잘 살 수도 없어.

 어차피 넌 평생 내 지갑을 털어가는 짐밖에 안 돼. 네가 결혼한다고 해도 지참금 때문에 우리 집 재산이 크게 축날 거다. 넌 하워드를 그렇게 깔보면서 말하지만 네가 시집가지 않으면 언젠가는 하워드가 널 거둬주길 빌든가 집도 절도 없이 쫓겨날 거야. (p. 147)


 이것이 세상의 진실이었다. 페이스는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거짓말에 그동안 속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죽음은 그동안 페이스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거짓말이 죽는 것이기도 하다. 그 죽음과 더불어 '거짓말을 먹는 나무'가 페이스의 것이 된다는 게 의미심장 하다. 왜냐하면 그 나무는 남성 중심 사회가 철저하게 감추는 진실을 페이스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이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스포일러가 되기에 설명하는 건 생략하기로 한다.) 


 페이스는 힘이 세지 않았지만 전에는 누구도 그 점을 이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위협이 항상 존재했다는 걸 알았다. 그녀와 같은 여자들에게 보이는 미소, 정중한 인사, 친절한 배려에는 그 위협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걸 가리고 있던 베일이 찢겨지고 진실의 추악한 면이 유감없이 드러난 것이다.(p. 430)


 페이스는 소설 후반에서 그 나무가 혹여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 나무'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선악과 나무가 아담이 하자는 대로 반려 동물처럼 따르기만 했었던 이브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립의 존재로 각성시킨 것처럼 여성에게 독립적인 의지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브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뱀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그렇게 거짓말은 남성의 권위만 존재하던 세계를 붕괴시키고 여성과 남성이 대등한 동반자가 되는 세계를 창출시켰다. 그런 뱀을 페이스는 반려동물로 기르고 애지중지 한다. 이런 페이스의 모습은 그녀가 이브의 계승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새롭게 밝혀지는 또 하나의 진실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페이스의 엄마 머틀에 관한 것이다. 소설 내내 내세울 것이라고는 오직 미모 밖에 없는 지극히 속물적인 인간으로 나오는 머틀은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는 게 남편의 죽음 뒤에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여긴 전쟁터야, 페이스! 남자들만 전쟁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야. 세상은 우리에게 무기도 주지 않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된다고 하지. 하지만 우리는 싸우지 않으면 이대로 죽게 될 거야.(p. 434)


 그러니까 그동안 머틀이 보여준 모든 행태는 사실 그녀만의 방식대로 치른 전투였던 것이다. 머틀은 페이스보다 더 일찍 남성 중심 사회의 거짓을 보았고 거기에 대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해 대처해 온 것이었다. 그렇게 머틀이 닦아 온 길을 페이스도 이제 걷게 될 것이다.


 단순한 판타지 소설이 아니었다. 남성과 여성, 서로 다르게 쓰이는 거짓의 중의적 의미를 차용하여 독립과 자존으로 나아가는 여성의 성장을 판타지의 설정과 절묘하게 배합하여 성공적으로 재현한 작품이었다. 이야기도 꽤 몰입감이 있어 작가의 이야기 끌어가는 솜씨 역시 만만치 않았다. 프랜시스 하딩은 처음 만나는 작가인데, 이 정도의 내공을 목격하고 보니 그녀의 다른 작품 역시 만나고 싶어진다. 그녀의 데뷔작 '깊은 밤을 날아서'는 다행히 벌써 번역되어 있었다. 일단 그것부터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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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9-21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너무 평범해서 큰 흥미가 없었는데 리뷰 내용을 보니 이 제목 외에 다른 걸 붙이기도 어려웠겠다 싶고 그러네요.

ICE-9 2017-09-26 20:40   좋아요 0 | URL
맞아요. 분명 다른 제목을 붙이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판타지 소설로만 알고 읽었는데 페미니즘적 메시지가 의외로 강해 좀 놀랐더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