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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먹는 나무
프랜시스 하딩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평점 :
품절
프랜시스 하딩의 '거짓말을 먹는 나무'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영국 아마존에서 18주 연속 1위를 했다고 하는데, 그럴만해 보인다. 19세기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이지만 단순한 환상 소설은 아니다. 남성 중심 사회가 가하는 억압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숨기고 오직 남성 사회가 원하는 모습을 연기해야만 했던 여성의 모습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이야기는 이러하다. 소설이 시작되면 주인공 소녀 페이스의 가족이 베인이란 섬으로 떠나고 있다. 페이스의 아버지 에라스무스 선더리는 목사로 자연 과학자로도 유명한데 특히나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그가 발견한 화석 때문이었다. 그게 보통 화석이 아니라 날개 달린 인간의 화석으로 그러니까 천사의 존재를 입증하는 화석이었기 때문에 높은 명성을 얻었던 것이다. 그 화석을 발견했던 것이 원래 페이스였기에 그녀 역시 '화석의 소녀'로 짧게 유명해졌다. 그런데 그 화석이 그만 가짜라는 게 들통나고 삽시간에 과학자의 치욕이 된 아버지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피해 달아나듯 베인 섬을 찾았던 것이다. 마침 그 섬의 치안 판사 앤서니 람베트가 초청해 주었다. 아직 본토에서의 일이 섬까지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페이스의 가족은 섬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다. 아버지는 재기를 노리고 다시 연구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섬 사람들도 아버지의 일을 알게 되고 마침내 가족 모두가 혹독한 냉대를 당한다.
페이스 모녀가 다가가는 순간 가게들은 일제히 문을 닫아버렸다. 케이크 가게 여자 주인은 프랑스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머틀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 척했지만 다른 사람들 말은 잘도 알아듣는 것 같았다. 작은 약제상 주인은 너무 바쁜지 페이스 모녀가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p.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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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좌절은 심화하고 페이스가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모습을 점점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러다 아버지가 자신을 도와 달라는 말에 단둘이 밤바다를 헤쳐 나가 한 동굴로 가게 된다. 그 동굴에 아버지가 몰래 숨겨 놓은 '거짓말 먹는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실제로 거짓말을 먹고 산다. 나무에 대고 거짓말을 하면 나무가 마치 포자를 퍼뜨리듯 마을로 퍼져나가 사람들 사이에 소문으로 떠돌게 된다. 나무가 거짓말을 먹으면 열매 하나가 생기는데, 그 열매는 먹는 이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진실을 보게 만들어 준다. 뭐랄까? 거짓을 먹어 진실로 승화시키는 나무 같다. 어쨌든, 그렇게 거짓말 먹는 나무를 보고 온 다음 날 아버지가 절벽 중간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아버지와 함께 집까지 돌아온 페이스는 왜 아버지가 다시 바다의 절벽으로 가서 죽었는지 납득하지 못한다. 죽음의 정황상 자살이 추정되지만 페이스의 엄마 머틀은 자신의 미모를 사용하여 관련자들을 유혹, 남편의 죽음을 자살이 아닌 사고사로 만들려 애쓴다. 그런데 페이스는 아버지가 죽은 현장 부근에 손수레 하나를 발견한다. 분명히 그 날 밤에 아버지와 함께 집까지 끌고 와서 온실 옆에 놓아둔 손수레였다. 그것이 어떻게 다시 아버지가 죽은 곳에 있게 된 것일까? 페이스는 직감한다. 아버지가 집에서 살해당했으며 아버지를 살해한 누군가가 손수레에 아버지 시체를 옮겨와서 절벽에서 떨어뜨린 것임을. 이제 페이스는 그동안 착한 소녀 연기 하느라 마음 속에 꼭꼭 억눌려 왔던 또 하나의 자아, '마녀 하피'를 해방시키려 한다.
페이스는 마음속에 수많은 의문을 안고 있었고, 그 의문은 나무상자 속의 뱀처럼 똬리를 튼 채 온몸을 비틀고 있었다. (...) 페이스의 마음속에서 그것은 이름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가 그것에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이유는 그러면 그것이 그녀에게 더많은 힘을 휘두르게 될까 봐 두려워서였다. 그것은 중독이었다. 페이스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페이스는 항상 그걸 포기했지만 진정으로 그런 적은 없었다. 그것은 세상이 아는 페이스와는 정반대였다. 착한 페이스, 든든한 페이스, 믿음직스럽고 따분한 페이스(p. 21)
그녀는 더이상 착한 소녀가 아니다. 아버지를 살해한 사회와 싸우는 투사다. 그것을 위해 그녀는 아버지가 물려주신 '거짓말 먹는 나무'의 힘을 적극 이용하려 한다. 아버지가 유령이 되어 마을을 떠돌고 있다는 거짓말을 비롯, 필요한 거짓말들을 마을에 퍼뜨린다. 그런데 아버지의 연구 자료를 노리는 이들이 있다. 믿었던 삼촌이 그들과 협력하여 페이스가 숨겨 놓은 아버지의 비밀 노트를 찾아서 가져가려 한다. 그들은 왜 아버지가 감춰둔 자료를 노리는 것일까? 그 이유와 사람들의 정체는 놀라운 반전 속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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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먹는 나무'는 이런 이야기다. 줄거리는 이렇지만 속을 더 뜯어 들여다 보면 이 이야기는 19세기 남성 중심 사회에 포박된 여성들이 자신의 자유와 생존을 걸고 힘껏 싸우는 분투기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페이스만이 아닌 것이다. 소설 처음엔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여 이기적인 욕구를 채우는, 그래서 더없이 속물적으로 보였던 페이스의 어머니 머틀이나 아버지를 파멸로 몰아간 최후의 흑막이 되는 존재 또한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여성으로써 최선을 다해 버티고 싸우고 있었다는 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다. 정말은 여성 스스로 독립과 자존을 쟁취하려는 투쟁의 서사이다.
소설에서 거짓말은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여성들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생존과 지속을 위하여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숨기고 남자들이 바라는 모습을 연기하고 위장하는 것으로의 거짓말이다. 다른 하나는 그런 여성들이 싸워야 할, 여성을 억압하고 남성에게 순종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해 진리처럼 위장하여 유포하는 남자들의 거짓말이다. 소설엔 많은 자연과학자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여성이 차별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정당화 한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 그것들이 모두 여성에 대한 두려움과 남성의 옹졸한 자존심 때문에 나온 거짓 서사라는 게 밝혀진다. 압권은 페이스의 아빠다. 페이스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신뢰한다. 비록 화석이 가짜라는 게 밝혀졌어도 페이스는 아버지를 믿고 세상이 오해하는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그렇게 믿었던 아버지는 페이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네가 아들이라면 언젠가는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고 가족의 재산을 늘려서 그 은혜에 보답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딸은 절대 그러지 못해. 넌 절대로 명예롭게 군대에 복무할 수도 없고, 과학 분야에서 명성을 얻을 수도 없고, 성직이나 의회에서 명성을 얻을 수도 없고, 일을 해서 잘 살 수도 없어.
어차피 넌 평생 내 지갑을 털어가는 짐밖에 안 돼. 네가 결혼한다고 해도 지참금 때문에 우리 집 재산이 크게 축날 거다. 넌 하워드를 그렇게 깔보면서 말하지만 네가 시집가지 않으면 언젠가는 하워드가 널 거둬주길 빌든가 집도 절도 없이 쫓겨날 거야. (p. 147)
이것이 세상의 진실이었다. 페이스는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거짓말에 그동안 속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죽음은 그동안 페이스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거짓말이 죽는 것이기도 하다. 그 죽음과 더불어 '거짓말을 먹는 나무'가 페이스의 것이 된다는 게 의미심장 하다. 왜냐하면 그 나무는 남성 중심 사회가 철저하게 감추는 진실을 페이스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이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스포일러가 되기에 설명하는 건 생략하기로 한다.)
페이스는 힘이 세지 않았지만 전에는 누구도 그 점을 이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위협이 항상 존재했다는 걸 알았다. 그녀와 같은 여자들에게 보이는 미소, 정중한 인사, 친절한 배려에는 그 위협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걸 가리고 있던 베일이 찢겨지고 진실의 추악한 면이 유감없이 드러난 것이다.(p. 430)
페이스는 소설 후반에서 그 나무가 혹여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 나무'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선악과 나무가 아담이 하자는 대로 반려 동물처럼 따르기만 했었던 이브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립의 존재로 각성시킨 것처럼 여성에게 독립적인 의지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브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뱀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그렇게 거짓말은 남성의 권위만 존재하던 세계를 붕괴시키고 여성과 남성이 대등한 동반자가 되는 세계를 창출시켰다. 그런 뱀을 페이스는 반려동물로 기르고 애지중지 한다. 이런 페이스의 모습은 그녀가 이브의 계승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새롭게 밝혀지는 또 하나의 진실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페이스의 엄마 머틀에 관한 것이다. 소설 내내 내세울 것이라고는 오직 미모 밖에 없는 지극히 속물적인 인간으로 나오는 머틀은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는 게 남편의 죽음 뒤에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여긴 전쟁터야, 페이스! 남자들만 전쟁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야. 세상은 우리에게 무기도 주지 않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된다고 하지. 하지만 우리는 싸우지 않으면 이대로 죽게 될 거야.(p. 434)
그러니까 그동안 머틀이 보여준 모든 행태는 사실 그녀만의 방식대로 치른 전투였던 것이다. 머틀은 페이스보다 더 일찍 남성 중심 사회의 거짓을 보았고 거기에 대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해 대처해 온 것이었다. 그렇게 머틀이 닦아 온 길을 페이스도 이제 걷게 될 것이다.
단순한 판타지 소설이 아니었다. 남성과 여성, 서로 다르게 쓰이는 거짓의 중의적 의미를 차용하여 독립과 자존으로 나아가는 여성의 성장을 판타지의 설정과 절묘하게 배합하여 성공적으로 재현한 작품이었다. 이야기도 꽤 몰입감이 있어 작가의 이야기 끌어가는 솜씨 역시 만만치 않았다. 프랜시스 하딩은 처음 만나는 작가인데, 이 정도의 내공을 목격하고 보니 그녀의 다른 작품 역시 만나고 싶어진다. 그녀의 데뷔작 '깊은 밤을 날아서'는 다행히 벌써 번역되어 있었다. 일단 그것부터 만나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