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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쁜 쪽으로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평점 :
절망의 기록? 처음엔 그렇게 보였다. ‘더 나쁜 쪽으로’(동명 제목인 이 책에서 맨 처음 나오는 단편을 말한다.)는 ‘천국에서’라는 전작에서 천국으로 그려졌던 뉴욕의 일상을 담는다. 그러나 그곳마저 더는 천국이 아니다. 작가는 그곳을 마치 천국처럼 묘사한다. 주인공 여자가 사랑하고 매달리는 남자를 그 거리가 아무것도 없던 때에 와서 이제는 중심이 된, 한 마디로 신과 같은 존재로 그리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그와 만날 수 없다. 사실 그녀는 그 남자도, 천국으로 알았던 그 거리도 믿지 않는다. 거리는 내내 그녀에게 구원의 역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역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지도와 표지판 모두가 쇼윈도에 전시된 화려한 상품들만큼이나 현란한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녀는 천국이 있다는 믿음 속에서 늘 그곳에 닿고자 열심히 걸어가는 사람들과 달리 나침반의 자침과도 같이 천국에 맞춰져 있는, 자신이 지닌 양의 주광성을 죽인다. 스스로 음의 주광성이 되려 한다. 이제 그녀는 ‘더 나쁜 쪽으로’ 걷는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절망의 심화 과정이자 그것을 낳은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의 추적이기도 하다. 여기서 김사과가 말하는 천국의 의미는 보다 명확해진다. 이것은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다. 세속적 의미의 천국이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욕망하는 모든 것의 구현이자 본향(本鄕)으로써의 천국인 것이다. 그래서 미국이다. 누가 뭐래도 자본주의 하면 미국이니까 말이다. 아마도 이 천국이라는 말은 미국을 가리키는 말이자 비아냥하는 은어이기도 한 ‘천조국’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그 천국엔 무엇이 있는가? ‘더 나쁜 쪽으로’의 주인공 여자처럼 오욕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매달릴만한 무언가가 과연 존재하는가? 그것을 알아보는 게 1부의 이야기다.
이제야 하는 얘기지만, ‘더 나쁜 쪽으로’는 단편집이다. 2011년과 16년 사이에 여러 지면에 발표한 7개의 단편과 2개의 미발표 단편이 실려있다. 1부 네 편, 2부 세 편, 3부 2편, 이렇게 담겨 있다. 1부가 ‘천국’의 이야기라면, 2부는 또 하나의 ‘천국’이 되려 하는 이곳 현실의 이야기다. 3부는 그 모든 게 뒤섞여 정확히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의 이야기며 결국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어 유령이 되어버린 자들의 실체 없는 목소리다. 김사과는 사람을 허망하면서도 이기적인 욕망의 노예로 만들고 서로 진정한 소통과 관계를 단절하여 한낱 수단으로 전락시키고야 마는 자본주의를 꾸준히 공격해왔다. 그런데 그 공격의 양상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테러가 물리적인 것이었다고 한다면 여기서는 정신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작정 외부에서 치고받기보다는 그 내부로 들어가서 양파 껍질을 까듯 좀 더 근원의, 본질적인 면을 파헤치려 하기 때문이다.
물론 1부 네 편의 이야기는 얼른 보면 아무런 연속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단편마다 언급하는 음악과 미술 소재가 이 단편들이 실은 시간상으로 역순되는 시대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처음 ‘더 나쁜 쪽으로’는 70년대에 유행한 펑크라는 음악 장르가 나왔다. 이어지는 ‘샌프란시스코’는 60년대를 주름잡았던 히피의 메카이다. 이 단편의 주인공 남자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로지 감각할 수 있는 물질적인 면만 중시했는데 이제 그 영혼을 헤아리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물질의 집착에서 벗어나 정신을 추구했던 히피 그대로다. 다음의 ‘비, 증기, 그리고 속도’는 자본주의의 시원(始原)이라 할 수 있는 근대가 창출한 가장 대표적인 변화를 포착한 풍경화다. 그 그림은 기차를 처음 타 본 터너의 충격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터너가 받았던 충격과 보았던 기세 그대로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을 많이 그리고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무엇보다 직업이 없으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이전 중세와 가장 많이 다른 점이었다. 사람의 본질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그의 전부를 좌우했다. 마치 이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단편은 실업자를 등장시키고 돈이 없어 남에게 빌붙을 수밖에 없는 주인공에게 아시아 창녀라는 소리까지 듣게 만든다. 그녀의 남자 친구가 하필이면 포르투칼 국적인 것도 눈에 띈다. 포르투칼 하면 가장 먼저 유럽이 아닌 다른 대륙에 식민지를 만들어 자본주의를 유포시킨 한 마디로 근대의 첨병(尖兵)과 같은 국가가 아니던가? 이처럼 이 단편은 근대의 시간을 슬그머니 끌어들인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더 나쁜 쪽으로’에서 ‘비, 증기 그리고 속도’까지 역순의 역사가 형성된다. 작가는 ‘착란하는 피난민들’을 양산하고 있는 자본주의에게 그래도 희망을 걸만한 무언가가 있는지 거슬러 올라가며 탐사하고 있는 것이다.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기에 오늘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아니면 원래는 좋은 것이었으나 오용의 결과인지 알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까지 한 결과 확인하게 되는 진실은 지극히 비관적이다. 근대의 시원이 되는 ‘비, 증기 그리고 속도’에서 주인공 여자와 실업자 모두 추방에 추방을 거듭하다 아무런 실체 없는 귀신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목도하니까 말이다.
나는 궁금했다. 그들은 누구이며, 왜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지. 그들도 묻고 싶은 듯했다. 너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서 귀신이 되었는가? 왜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떠돌고 있는가? 어떤 희망을 가졌던가?
한 마디로 자본주의는 애초부터 유령의 생산이 운명지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였던가, 자본주의가 소외의 숙명을 가졌다고 말한 것은? 소외는 바깥으로 내모는 걸 뜻한다. 정주(定住)하는 존재를 유랑토록 하는 것이 소외다. 더하여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소외를 가장 격렬하게 만든다고 했다. 방랑의 지속이다. 자본주의 안에서 살아간다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그리게 될 궤적이다. 1부의 마지막 단편인 ‘지도와 인간’은 그것을 보여준다. ‘지도가 있으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그토록 추방당하고 정처없이 헤매이면서도 지도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감내해왔는데 그런 희망은 다만 착란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제는 지도조차 바랄 수 없게 된 현실을 그린다.
지도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그것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작정이다.(그렇다고 한다.) 지도가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사람들이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이 허용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지도를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유령이 되었기 때문이고 지도와 소통할 수 있는 말을 못 믿게 된 탓이다. 자본주의는 그동안 사람들에게 지도였다. 그것은 황무지와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그래도 좋은 쪽으로 가고 있다고 말해왔다. 언젠가는 히브리 사람들이 그랬듯 가나안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며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은 모든 게 다 거짓이라는 사실이다. 현재의 착란을 제거해 주리라 믿었던 지도는 오히려 착란을 부풀리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1부의 계보는 착란이 어떻게 가중되는지 보여주는 계보이기도 하다. 지도는 진실을 보증하지 못했다. 그것은 곧 말 역시 진실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마지막 단편에 갑자기 침범하여 자꾸만 늘어나는 영어는 그런 정황을 독자에게 시각적으로 보여주려는 게 아닐까 싶다. 소통의 가장 근본적인 단위가 되는 말조차 이제 착란의 먼지구름이 되었다. 착란의 피난민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한 숙명이었다. 작가는 그것을 태초의 시간이자 여전한 현재에서 아프게 통감한다.
3부의 미발표 단편 두 개는 작가가 여전히 절망 속에 있다는 것을 확인케 한다. 소설가는 무엇보다 말로 지어 먹고 살아가는데 그 말을 믿을 수 없게 되었으니 더 통렬했던 것 같다. ‘세계의 개’에선 영어와 우리말이 착란을 일으키듯 뒤섞인 가운데 작가는 이 불안이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각 속에서 기록하는 것을 그만뒀다고 고백하고 마지막 단편에선 차라리 제목처럼 ‘자동 시 판매 기계’가 되길 원한다. 거기의 언어들은 모두 조각나 있고 그 어떤 것도 일련의 이야기로 묶이지 않는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발굴 현장의 도자기 파편처럼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말의 더미일 뿐이다. 이것은 이제 이런 것밖에 할 수 없다는 고백인 걸까 아니면 그래도 말을 믿고 다시 소설을 쓰기 위해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말을 배우고 있다는 과정을 드러낸 것일까? 물론 이러한 내 의문에 대하여 착란을 정물화로 그린 것만 같은 그 단편은 속 시원한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모호한 가운데 마치 자신의 착란을 내게 감염시키려 하는 느낌마저 든다.
나름 매끄럽게 말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2부에 대한 말을 빠뜨렸는데, 앞서도 말했듯, 여기서는 미국을 모방하여 또 하나의 천국이 되려고 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2부도 물론 1부처럼 역순의 계보를 이룬다. 2부의 첫 단편 ‘박승준씨의 경우’는 주인공 박승준이 외롭고 초라한 자신의 현실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남의 아파트 재활용 장소에서 몰래 건져 온 외국 유명 브랜드 정장을 입는데 그것은 미국에 견주어 우리의 고유한 정체성을 비루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모방하여 그 정체성을 우리에게 이식하기에 여념이 없는 씁쓸한 오늘의 현실을 나타낸다. 제 몸에 맞지도 않고 누가 일러주지 않으면 뭔지도 모르는 남의 옷에다 억지로 걸쳐 입고 살아가는 게 아니냐고. 뒤이은 ‘카레가 있는 책상’은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군부 독재의 시절을 은연중에 끌어온다. 약한 존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시원에서 핍박받다가 살해당하는 조선족은 그런 사건이 바로 자신이 살던 장소에서 일어났는데 아무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는 것에서 전두환이 광주 시민을 학살한 것이나 박정희가 긴급조치로 무고한 시민들을 마구 잡아들였던 것을 연상케 한다. 단편의 주인공은 보잘것없는 자신의 존재감을 남을 혐오하고 남에게서 혐오를 받는 것을 통해 충전시켜 나가는데(그가 즐겨 먹는 카레는 한 마디로 자존감을 확보하려는 수단이다. 강하고 널리 퍼지며 피할 수 없는 카레 냄새로 그는 자기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이것은 군부 독재가 자신의 허약한 정당성을 오직 증오와 혐오를 통해 이루려 했던 것과 유사하다.
이것은 왜 ‘박승준씨의 경우’와 같은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보여준다. 빈약한 자존감과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용기의 부족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오로지 타인에게 기대어 형성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단편에서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침묵하는 고시원처럼 군부 독재의 극단적인 억압과 감시의 경험은 주체가 자립할 힘을 빼앗아 버렸고 공백이 되어버린 내면에서 더 이상 자기 존립의 근거를 찾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타인을 통해 충전해야 했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카레가 되어 누군가의 입에서 으깨어져 그와 완전한 하나가 되기를 소원하는 것처럼.
마지막 ‘이천칠십X년 부르조아 6대’는 암시하는 시간대가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단편이 비록 과거와 현재, 미래가 마구 뒤썪여 있긴 하나, 귀족 계급이 존재하고 도포자락이 나오며 말로 왕래할 뿐만 아니라 두루마리로 된 서찰이 오간다는 점에서 독자로 하여금 분명히 일본에 의해 자본주의가 한창 이식되던 시절의 조선 말기를 떠올리도록 하기에 하는 말이다. 뭐랄까? 모방의 시원이 되는 시간대를 담은 느낌이다. 주인공 민정남은 검시관인데 서울 장충동에 있는 한 도로에서 발견된 말 사체 때문에 두 유력 자본가 가문의 자제인 엘리자베스 수지 윤과 조 알란 정의 연애에 끼어들게 된다. 그러나 진심어린 사랑의 밀어인 줄 알았던 서찰은 사실 탐욕에 물든 흉계였고 본의 아니게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했던 민정남 또한 파멸하게 된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말이 진실을 보증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마지막에 보게 되는 신비한 홀로그램 정원은 진실이 완벽하게 보증되는 세계였다. 그 풍경을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을 만한. 하지만 그조차 환영이었다. 진실한 말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영원한 그리움과 그에 맞먹는 무력감 속에 자리할 뿐이었다. 있는 건 다만 그런 말이 있었다는 사체뿐.
말과 똑같은 음을 가진 말의 사체는 바로 그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말은 죽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엘리자베스 수지 윤과 조 알란 정이란 존재는 한편으로 미국이 자신의 위엄을 최초로 알린 해방 정국 시기, 우리나라를 양분했던 소련과 미국의 이데올로기에 동조된 이들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이데올로기가 진실된 말을 전하기보다 진실에 상관없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말의 사체에 함유된, 진실한 말의 죽음이라는 의미는 더욱 명확해진다고 하겠다.
모방의 태초가 되는 시간에 이미 말이 죽어 있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온전히 파악하고 드러낼 고유의 언어를 잃고 남의 시선에 맞춰진 남의 언어로 그런 것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애초부터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번역해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알고보면 줄곧 소외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2부 또한 소외의 계보를 역순으로 훑는다. 우리의 경우엔, 그렇지 않아도 착란의 계보로 점철된 ‘천국’을 무분별하게 모방까지 하는 바람에 혼란이 더 가중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3부의 단편이 가진, 어쩌면 황당하게 보이기도 하는 그 파격적인 형태가 조금은 이해될지도 모르겠다. 3부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며 1부 그리고 2부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결론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다.
나는 앞서 3부에 대해 말하면서 작가가 느낀 절망의 정직한 고백인지 아니면 상황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말 배우기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러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후자가 맞는 것 같다. 리뷰를 통해 생각을 정리하다가 나는 문득 작가가 소설 전체에 걸쳐 계속해서 불확실과 불안정을 얘기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왜 그랬을까?’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어쩌면 부정 보다는 긍정의 몸짓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단편의 주인공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더 불확실하고 더 불안정한 걸 택했다. 나를 잃는 것을 받아들이거나(‘샌프란시스코’, ’카레가 있는 책상’, ‘이천칠십X년 부르조아 6대’) 혼란과 불안 속에 계속 머물렀다.(‘비, 증기 그리고 속도’, ‘박승준씨의 경우’) 그들은 모두 ‘더 나쁜 쪽으로’의 주인공처럼 안정과 정답을 희구하는 무리의 행렬을 이탈하여 더 나쁜 쪽으로 걸어갔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것이 눈에 들어오자 처음 읽었을 때는 무력감의 표현이자 타협과 순응으로만 보였던 모습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혼란과 불안을 기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껴안는, 그것을 삶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으로 삼는, 그런 모습을. 그래서 후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작가가 혼란과 불안 속으로 뛰어들어 수많은 의심과 질문 속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가고 있다고. 이런 모습은 솔직히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이와 반대편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나는 어떻게든 혼돈과 불안을 피하려 했다. 느닷없이 그것과 마주할 때면 내 부족함과 무력함을 먼저 탓했다. 작가가 바라보았던 것과 같이 잃는 것을 통해 새로 얻을 가능성 따위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떻게 가느냐가 아니라 얼 만큼 왔느냐가 중요한 나였다.
그런데 소설은 ‘더 나쁜 쪽’으로 걸으라 한다. 작가가 그렇게 말한 건 아니다. 그냥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 말이 뇌리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 건, 내가 뭔가 잘못 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일까? 나 역시 착란의 계보 속에서 아무런 의심과 질문 없이 남들이 정한 해답을 수용한 건 아닌가 하는 의혹으로 그 말 주위를 계속 서성이게 되는 것일까? 작가가 재현한 착란의 계보가 설득력이 있었기에 그가 암시한 태도 또한 받아들이고 싶어진다. 그동안 확실하고 굳건한 돌만 디디며 삶이란 징검다리를 건너온 내게 과연 ‘더 나쁜 쪽으로’ 걸어갈 용기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앞으로는 혼란과 불안 앞에서 지금까지 꼭꼭 잠궈두기만 했던 마음의 문을 말을 처음 배울 때 그러하듯이 천천히 열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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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원래 인용문에 페이지 숫자를 명기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전자책으로 읽어 그럴 수 없군요. 혹시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알려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