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로라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비라 캐스퍼리 지음, 이은선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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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혹이란 말은 이 책을 위해 아껴두어야 했었나 보다.

 드디어 읽었다. 비라 캐스퍼리의 '나의 로라'. 범죄 소설이 남자들만의 전유물이던 1940년대. 거기에 대항하듯 힘겹게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한 세 명의 여성 작가가 있었으니 그녀들이 바로 '고독한 곳에'의 도로시 휴즈, 안타깝게도 로스 맥도널드의 아내로 더 유명한 마거릿 밀러 그리고 바로 이 비라 캐스퍼리다. 그래도 마거릿 밀러는 단편으로, 도로시 휴즈는 재작년에 나온 대표작 '고독한 곳에'로 만나봤지만 비라 캐스퍼리는 내내 미싱링크였다. 트로이카중 하나의 바퀴가 여전히 채워지지 않고 있으니 그 독서의 여정이 어쩐지 비틀거릴 수 밖에 없었는데 드디어 오토 프레밍거가 영화로도 만들어 유명한 대표작 '나의 로라'가 번역되어 나온 것이다.  


 그렇게 읽은 나는 감히 첫 문장을 저렇게 썼다. 하지만 진실이다. 이 책은 나를 매혹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아구타카와 류노스케의 '나생문'을 닮은 구성 때문도, 히치콕 감독의 걸작 '현기증'을 연상시키는 설정 때문도 아니다. 온전히 문장 때문이다. 남자의 하드보일드(혹은 느와르든지 간에)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문장들. 하지만 한없이 보드라운 실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는 것처럼 그보다 더욱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문장들. 여성 특유의 감수성이 아니라면 길어내지 못했을 언어들 말이다. 그것이 내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이마를 쳤다간 졸도할지도 몰라서 무릎을 쳤다. 남자의 하드보일드. 거기엔 과한 생략이 있다. 아, 대상이 편중되어 있다는 말을 빠뜨렸다. 거기의 생략은 편식을 한다. 풍경은 골고루 먹는 대신에 사람의 마음은 하나만 먹는다. 탐정인 자신의 것만. 남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만 남성의 하드보일드는 그걸 그대로 독자들에게 들려줄 마음 따위 없다. 독자들은 어디까지나 탐정(혹은 형사든)이 먼저 씹어준 것만 삼키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아기새처럼 그가 주는 것만을 받아 먹었다. 그리고 자고로 하드보일드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드보일드가 우리를 매혹시켰던 것은 말 그대로 하드 보일드, 삶은 달걀의 단단한 껍질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조석으로 변해도 그만은 그 껍질처럼 변하지 않아야 했다. 그 한결같음이 우리가 느낀 매력이었다. 작가들은 잘 알았다. 독자인 우리들이 정말은 어디를 보는지. 세상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탐정 자신이란 걸. 그러니 생략해야했고 생략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그래서 여성 작가의 하드보일드(혹은 느와르든지 간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얼른 드는 우려가 있었다. 여성 작가들이 과연 그런 껍질을 줄 수 있는가였다. 거기엔 어떤 단호함이 필요했기에, 그걸 남자들만의 특성이라 지레짐작한 우리들은 때로는 이러다가 곰살갑게 구는 탐정을 만나는 게 아니냐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하지만 도로시 휴즈와 마거릿 밀러는 그런 우리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남성들 이상으로 단단한 하드보일드를 쓸 수 있음을 그녀들은 증명했다. 그럼, 비라 캐스퍼리는?


 그녀는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왔다. 그러고는 남자들이 만든 규칙 따위 깡그리 날려버렸다. 우리들이 익히 알던 하드보일드(혹은 느와르든지 간에)는 산산이 흩어져 재가 되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그녀의 짖궂은 미소 밖에는 없었다. 어안이 벙벙한 우리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혀 다른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주지!"


 그게 문장이었다. 남자의 탐정들은 언제나 닫아두었던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내면 심리를 활짝 열어 놓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선 거기 생겨나는 풍경을 확 낚아채는 표현이 정말 뛰어났다. 청새치처럼 펄쩍 뛰어올라 그대로 가슴에 와 콕 박혔다. 둔탁한 기분 좋은 통증을 느끼게 했다. 압권은 로라의 내면을 말할 때이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나는 일기다운 일기를 쓰지 못한다. 내 삶을 하루에 한 줄로 요약해 그달 16일에 아침상을 차린 것과 17일에 어떤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을 동급으로 만드는 것은 체질상 맞지 않는다." 혹은 "셸비가 너무 잘생겨서 다들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아니냐고 따졌다. 셸비의 외모가 흠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호해주어야 할 기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또는 어쩌면 비라 캐스퍼리 자신의 고백이 아닐까 싶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 하며.


 잘못한 쪽은 셀비가 아니라 나였다. 완벽한 생활을 완성하는 도구로 그를 이용했고,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사랑 놀음을 벌였고 물주의 존재를 온 세상에 알리려고 은색 여우 털 재킷을 입고 다니는 잘 나가는 창녀처럼 보란 듯 그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미혼으로 삼십 대를 맞이하려니 불안해서 그를 사랑하는 척, 엄마 같은 마음으로 아끼는 척, 14K 금담뱃값을 선물하는 만용을 부렸다. 바람을 피웠을 때 속죄의 뜻을 담아 아내에게 난초나 다이아몬드를 선물하는 남자처럼.

 그런데 그 비극적인 사건으로 그럴듯했던 포장이 모두 사라지자 우리는 수익률 좋은 새로운 품종을 탄생시키기 위해 선택된 두 종류 채소처럼 열정이라고는 없는 관계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연인이었다. 그나마도 이제 끝났지만(P. 253) 


 도무지 70년의 시차를 느낄 수 없는 현대적 감수성에다 세련된 표현들. 그래서 더욱 이런 범죄소설에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였던 그것들인데 하지만 내 예상을 깨고 너무나 미스터리에 잘 어울리고 있었다. 같은 치정극을 아침 드라마 형식으로 보다가 뉴웨이브 스타일의 미니시리즈로 본 것과 같았다. 보쌈에 처음 김치를 넣었을 때와 같이 완벽하게 어울리면서 또 색다른 맛을 주는 새로움은 늘 환영받기 마련이다. 아니,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라면 매혹도 아깝지 않다.


 하지만 문장만 가지고 얘기하는 건 비라 캐스퍼리에게 억울한 일이 될 것이다. 문장만으로 승부하는 작가구나 여기실 분들도 계실테니. 그러니 그런 선입견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책에서 비라 캐스퍼리가 새겨 놓은 것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 이 소설은 미스터리이고 어디까지나 범인 찾기가 주종이니 스포일러를 피하는 의미에서 이렇게 시작해 본다.   


 괴테는 오직 여성적인 것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구원이란 것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를 낙원으로 데려가는 게 아니다. 실은 저 헐벗은 황무지로 내모는 것이다. 익숙함과 안정감을 주는 모든 세계가 해체되고 헐벗은 몸으로 텀블위즈가 굴러다니는 황량한 대지를 마주하는 것. 그것이 괴테가 말하는 구원이다. 이 때 그는 구약에 나오는 인류 최초의 여성 이브를 떠올리고 있다. 아담을 유혹하여 낙원인 에덴에서 매일의 힘겨운 노동이 없으면 생존마저 불가능한 척박한 땅으로 추방당하게 만든 이브. 그 때부터 여성은 불길한 존재였다. 성경만이 아니다. 그리스나 인도 신화를 비롯하여 동서양을 막론한 모든 신화에서도 우리는 자주 여성을 위협적이거나 불길한 존재로 그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여성들은 괴물의 외피를 둘러써야 했다. 한 때는 노래에 홀릴 경우 죽음만이 기다릴 뿐인 세이렌으로 또 어떤 때는 남자들로 하여금 인간을 포기하고 돼지가 되게끔 만드는 키르케로. 그렇게 그녀들은 늘 남성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하며 유혹과 위협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사실은 그게 바로 여성들을 불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언제나 남성들이 군림하는 사회라는 배 저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편의 질서로는 규정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로서. 그래서 괴테는 구원으로 여겼다.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자극제이기 때문에.

 그만큼 타자로서의 여성성 앞에서 남성들은 무력해질 수 밖에 없고 괴물이 된 여성들의 강한 힘이란 그 무력함을 거꾸로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용맹한 오디세우스와 그 부하들이라 하더라도 솜으로 귓구멍을 틀어막고 수동적으로 유혹에 저항하는 것만이 고작이었듯 말이다.


 그런데 그 무력감을 남성들에게 가져온 것이 바로 정체불명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여성들은 영원한 수수께끼라고. 맞다. 그것이 여성들 힘의 원천이었고 불길함의 근원이었다. 피라미드 앞을 지키고 있는 스핑크스도 암컷이었다. 그는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수수께끼를 내었고 대답하지 못하는 이를 잡아먹었다.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공포를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디이푸스가 대답하자 스핑크스는 자살을 한다. 힘의 근원을 상실했다는 것의 과격한 표현이다. 물리친 오디이푸스는 왕이 된다. 정체불명의 절대적 타자인 여성성이 제거되었으니 남성들만의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버나드 쇼는 '피그말리온'을 썼다. 거기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흔히들 말하는 '젠더'로서의 여성이다. 여성의 존재는 분할된다. 거기엔 식민지가 된 영토와 독립적인 영토가 공존한다. 그 정확한 경계는 알 수 없지만. 젠더는 자살한 스핑크스의 무덤이요, 그렇지 않은 곳은 여전히 수수게끼로 남아있는 세이렌의 영역이다. 여성의 신체란 전쟁터다. 그 둘 사이의 전선이 나날이 새로 새워지고 있는. 그건 남자들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녀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매일 공세를 취한다. '여성답다'는 말의 폭력으로, 혹은 이미지로서. 태고적의 이야기와 똑같이 남성이 원하는 여성상을 내면화시켜 길들이려는 상징화 작업이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진다. 지금 여성은 거꾸로 된 세이렌이다. 온갖 가짜 세이렌 노래 소리에 포박되어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세이렌.

 왕자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어 공주.


 인어 공주는 그러한 젠더로의 여성, 과연 그 끝에는 뭐가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투명하고 가벼운 공기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인어 공주의 언니들은 왕자의 심장을 찌를 칼을 쥐어주는 것이다. 존재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온전한 가치를 여전히 지니고자 한다면 그 단호한 결별의 몸짓만이 유일한 해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로라'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로라는 살해당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정작 이야기는 그 로라가 아닌 그 로라를 통해 만난 남자들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를 지금의 로라로 만든 레이데커와 주검으로써 로라를 처음 만나게 된 형사 맥퍼슨. 레이데커는 자신이 아는 로라를 말하고 맥퍼슨은 수사를 통해 알게 된 로라를 말한다. 그 남자들이 화자가 된 세상에서 로라는 죽어있다. 레이데커라는 남자에 의해 만들어졌고 맥퍼슨이라는 남자에 의해 파악된 로라는 공기로 변해버린 인어공주였다. 그런데 돌연 로라가 부활한다. 죽었던 로라가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알고보니 살해당한 건 전혀 다른 로라였다. 그렇게 두 명의 로라가 존재했다. 죽은 로라와 산 로라. 죽은 로라는 남자 없이는 못 살던 존재였다. 정확히 길들여진 세이렌, 수수께끼를 잃어버린 스핑크스였다. 하지만 산 로라는 달랐다. 그는 그녀를 알고 있었던 모든 이들의 생각에서 비껴나간 존재였다. 아무도 그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 모든 남자들의 이해를 넘어선 존재였다. 그녀는 자유라는 의미를 남자와는 전혀 다르게 정의하며 이렇게 말한다.


 제가 생각하는 자유는 달라요.(...) 저에게 자유란 한심하고 쓰잘머리 없는 일상을 유지하고, 습관을 내 스스로 조절하며 주체적으로 사는 거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P. 151)


 이렇게 비라 캐스퍼리는 로라라는 '죽은 로라'와 '산 로라'로 신체를 양분한다. 지금의 여성이 정확히 젠더와 그렇지 않은 수수께끼의 영역으로 나뉘는 것처럼. 그 남성 사회에 포섭되지 않는 산 로라에게 비라 캐스퍼리는 의미 심장하게도 자신의 목소리마저 허용한다. 남자들만이 떠들던 그 세계에 그 대등한 참여자로서 산 로라는 자기 목소리로 당당히 말하며 그 순간 남자들의 세계는 붕괴된다. 말들은 거짓이 되고 권위는 억압으로 지혜로운 권고라 여겼던 것들은 모두 질투와 옹졸함의 소산이었음이 밝혀진다. 여성이 제 목소리를 얻고 자신의 두 발로 서려고 하자 남자의 세계가 초라한 민낯을 드러내며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마침내 인어 공주가 왕자의 가슴에 단도를 꽂은 것과도 같이. 소설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남자의 항복 선언으로 끝난다.


 그 어떤 남자가 그녀를 향해 독기를 발산하더라도 그녀를 멸하지 못하리라(P.333)


 '나의 로라'는 이런 이야기다. 남성 질서에 포획되지 않는 여성이 어떤 힘을 가질 수 있는지, 아니 정확히는 여성 스스로 그 존재 가치를 보유하려면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그것도 40년대에. 그녀는 세이렌에게 진짜 자신의 힘을, 스핑크스에게는 절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인어 공주에게는 단검을 쥐어주려 한다. 이것은 그녀가 있었던 문학판이든, 영화판이든 글쓰는 여자들은 흔히 제인 에어에 나오는 다락방에 갇힌 미친 여자처럼 소외시키던 모든 남성 중심 세계의 경험이 낳은 결기다. 오래 시간이 지났지만 그 결기의 예리함은 전혀 무뎌지지 않았다. 아니, 그럴 리도 없다. 아직도 세이렌들을 기화시키려 드는 남성적 질서는 여전하므로.


 모든 여성이 '인형의 집'에 나오는 노라가 아니라 '나의 로라'에 나오는 로라가 될 때까지 싸움은 계속된다. '나의 로라'는 여전히 현재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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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2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4 0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4-02-15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는 여자한테 넘어갈 수 있지만 여자는 남자한테 넘어가지 않기도 합니다 이성의 유혹이라고 해야겠군요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여성을 위협스럽고 불길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는 말을 보니 생각난 겁니다^^

이런 것도 생각나는군요 부부 가운데서 아내가 죽고 남편 혼자 남았을 때는 힘들어하고 오래 못 살지만, 남편이 먼저 죽고 아내가 남았을 때는 그럭저럭 살아가고 오래 산다는 게

1940년에 앞으로 여성이 어떻게 될까 내다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그것도 있겠지만 그때부터 단단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겠죠


희선

헤르메스 2014-02-24 03:22   좋아요 0 | URL
희선님 죄송해요. 제가 그만 너무 늦게 확인했네요. 요즘은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어요. 저만 정신이 없는 것인지 ㅠ ㅠ...
'팜므파탈'이라는 것 자체가 여성에 대한 남성의 두려움을 대변한 존재죠. '메데이아' 같은 것만 봐도 알겠지만 근대에 들어와 특별히 생기게 된 것도 아니고 이미 그리스 신화부터 그러한 남성의 두려움을 대변한 존재들은 있어왔죠. 그러다 기독교가 강력한 부권을 형성하고 있을 무렵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가 말기에 종교개혁 같은 것이 서서히 떠오를 때쯤, 그렇게 그 부권이 흔들릴 무렵 마녀로 부활했고 근대에 들어와서도 역시나 남성 질서가 흔들리던 대공황 시기와 더불어 팜므파탈 장르가 또다시 유행하게 되었죠. 질서가 흔들릴 때 잇달아 남성의 두려움을 대변한 존재들이 이렇게 부활한다는 것 자체가 제겐 흥미롭고 아마도 그 시각에서 '나의 로라'를 바라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



아이리시스 2014-03-04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뜸하시네요, 헤르메스님! 표지가 핑크라 저도.. 엘릭시르에서 출간되는 시리즈가 구색맞추기 좋아서 저도.. 리뷰 먼저 읽는것도 좋네요. 어떻게 지내세요?

헤르메스 2014-03-09 15:46   좋아요 0 | URL
아이리시스님 이렇게 찾아오시고 일부러 안부까지 물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최근에 이사를 하느라 준비에 뒷정리까지 마치느라 들어올 여유가 없었답니다. 거기다 이사 후유증으로 아직도 몸이 아파서요. 이사, 하면 할수록 점점 힘드네요ㅠ ㅠ
이번에 이사하면서 책정리를 다시 했는데 엘릭시르는 역시 함께 꽂아놓으니 보기가 좋더군요. 번역도 깔끔하고. 오래도록 계속 나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시리즈입니다^ ^

2014-03-13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4 0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