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일격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 / 검은숲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마지막인데, 남의 눈치 볼 필요 없잖아!'

  '그렇고 말고! 그동안 우리가 취향을 얼마나 억누르고 살았냐? 이제 우리가 좋아하는 쪽으로 원없이 써볼 때도 됐지.그것으로 화끈하게 피날레 해 보자!'


 그리하여 사촌 지간인 만프레드 리와 프레드릭 다네이는 '엘러리 퀸' 시리즈 3기의 마지막 작품인 '최후의 일격'을 썼다.



 때는 1958년.

 세계 제2차 대전으로 엘러리 퀸의 신앙과도 같았던 이성은 그 신뢰를 잃었고, 언제라도 세계를 깡그리 파괴시킬 수 있는 핵무기 앞에서 금전이나 치정에 얽힌 살인 미스터리 따위는 한없이 보잘 것 없어 보이던 시절. 이제 제임스 본드나 루 아처를 찾을 지 언정 아무도 명탐정에게는 의뢰하지 않던 시절에 엘러리 퀸의 아버지 만프레드 리와 프레드릭 다네이는 쇠락해가고 있는 탐정들의 존재를 보노라면 더욱 가없이 향수에 젖을 수밖에 없는 미스터리의 황금기인 1930년대로 돌아가 엘러리 퀸에게 3기의 멋진 커튼콜을 해주려 했다. 그건 거의 30년을 함께 해 온 지기를 향한 당연한 배려이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은 엘러리 퀸이 가장 전성기 시절의 가장 전성기의 모습으로 퇴장할 수 있도록 미스터리 황금기 시절의 특징들을 '최후의 일격'에 모조리 가져왔다. 사건의 배경은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두지 않은 폭설로 고립된 저택이라는 클로즈드 서클이 되었고 저마다 동기가 있는 한정된 용의자에 출생에 관한 비밀도 얽혀 놓았다. 그리고 당시 미스터리라면 빠질 수 없는 암호문을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동요처럼 한문장씩 날마다 배달되도록 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앨런에게는 이미 얘기했었지만, 이 수수께끼에서는 흥미롭게도 12라는 숫자가 계속 반복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우리 일행은 열두 명이고요. 크리스마스 축제는 12일 동안 지내지요. 그리고 이 열두 명은 우연히도, 정말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열 두 별자리 중 각각 하나씩에 해당됩니다. 오늘 밤엔 선물이 도착했고, 함께 온 카드에 적힌 시 구절은 '12일의 크리스마스'라는 영국 캐럴을 패러디 한 것이에요! (p. 92)


 2차 대전 이후로, 라이츠빌 시리즈 이후로 찾아간 적 없었던 아주 전형적인 30년대의 공간으로 형제는 엘러리 퀸을 데려 간 것이다. 이제 마지막이니 마음껏 이성의 칼날을 휘두르라는 의미로. 과연 수수께끼는 범상치 않다. 용의자는 분명 저택 내의 인물인데 도대체 어떻게 살인을 저질렀으며 매일 수수께끼의 시가 있는 선물을 보낼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출생의 비밀까지 가세해 이중 삼중의 수수께끼 장벽이 펼쳐지지만 역시나 엘러리 퀸! 이성의 해머로 모든 수수께끼의 담벼락을 부셔버린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독자들에게 커튼콜을 하고 두 작가와 더불어 환희의 칵테일을 마시려 할 때쯤,


 "이것봐요!" 하면서 편집자가 나타난다.


 그리고 두 손으로 허리의 양쪽을 잡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보세요들. 당신들만 생각하면 어떡합니까?

 아무리 마지막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끝을 내면 책이 안 팔린단 말입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지 모르세요?  탐정이 추리로만 사건을 완벽하게 해결하는 걸 사람들은 믿지 않아요. 경탄하기는 커녕 억지스럽다고 여긴단 말이에요. 솔직히 독자들은 말이죠. 탐정의 성공을 바라지 않아요. 독자들이 정말 보고싶은 것은 탐정의 실패란 말입니다.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TV에서 원하는 프로그램을 하지 않아서 시간 때울 요량으로 읽는 그들은 처참하게 망가지는 탐정을 보며 잠깐의 우월감에 젖고 싶어 한단 말입니다. 그 잘난 체하는 탐정이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무기력하다는 것을 보고싶어 한다구요. 왜냐구요? 알만한 분들이 왜 이러실까? 그야 당연하죠. 지금의 세상은 스스로를 조소하거나 경멸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으니까요. 희망이란 사탕 보다는 절망의 씁쓸한 수액이 더 나은 겁니다. 섣부른 낙관 보다는 익숙한 절망이 자신을 조금 더 버티게 한다는 걸 아는 까닭이죠. 그러니 다시 써요. 우리에게 슈퍼맨은 필요 없어요. 독자들은 자신들과 똑같이 아프고 무기력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걸어가는 사람을 원해요. 리더인 영웅이 아니라 연민으로 연대할 수 있는 이를 말이죠. 솔직히 알고 계시잖아요? 마지막이라서 모른 척 한 것 뿐이잖아요? 안 그래요? 하지만 안 돼요. 당신들만 생각해서는. 난 이번에도 많이 못 팔면 실직할 참이라구요. 애가 셋인데 어떡하라구요? 그러니 다시 써요. 퀸이 패배하는 것으로. 패배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포기하지 않아 결국 진실을 찾아내는 쪽으로.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가 장담하건대 소송 폭탄을 맞게 해 드리죠."


 노인들은 전성기의 향수에 젖는 것만큼이나 말년에 주머니가 비게 되는 것도 두려워 한다.

 서슬 퍼런 편집자의 두 눈을 보면서 그들은 잠시 동안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퀸의 어깨를 위로의 손으로 몇 번 토닥여 준 다음 서둘러 타자기 앞으로 돌아가 결말을 다시 쓰기로 한다.


 하여 퀸은 샴페인 잔을 떨어뜨리고 그 잔은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산산이 깨어진다. 똑같이 사건 해결에 실패하고 찾아온 로맨스의 기회도 날려버린다. 퀸이 쓸쓸히 등을 돌리고 '그래, 좋은 건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라고 생각할 때, 노인들은 막 타자기로 마지막 마침표를 찍은 참이다.


 타이핑을 끝냈을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인들은 창을 보았고 하늘이 더 흐려진 것을 알았다.

 그것은 마치 세상에 더이상 명탐정을 위한 햇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잠시 눈에 물기가 어렸다.



 주의 : 편집자가 나타난 뒤의 모든 부분은 전적으로 저의 상상임을 알려드립니다.

         물론 '최후의 일격'이 퀸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진정한 퀸 시리즈는 둘의 공저라고 생각하고 이 '최후의 일격'은 사실상 그들이 같이 쓴 마지막 작품이었기에 마지막이라고 한 것입니다. 마지막의 눈의 물기는 함께 즐거이 명탐정의 이야기를 썼던 나날이 이제 끝났음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군요.

 참, 그리고 '최후의 일격'은 초역입니다.

 그리고 날개에 있는 앞으로 번역될 작품들 입니다.

 


 '수수께끼이 038사건'이 제대로 된 번역으로 나올 모양입니다.(아, 팬더추리걸작시리즈의 추억이여...)

 거기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QBI' 도 드디어 나올 모양이군요. 이것도 나온다면 초역입니다.

 아, 이런 저도 왠지 눈물이 나는 걸요... 부디 빨리 만나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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