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러리 퀸의 제3기라고 흔히들 말하는 '라이츠빌 시리즈'는 그렇게 태어났다. 말하자면 이는 엘러리 퀸의 뼈아픈 반성의 산물이다. 당연히 라이츠빌 시리즈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엘러리 퀸은 뒤늦게 사건에 뛰어드는 존재가 아니다. 사건의 처음부터 함께 한다. 이 말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해결사 보다는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더욱 많이 한다는 것이다. 사건의 처음부터 그는 보고 쓴다. 더이상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의 모습은 그에게 없다. 심장이 없는 듯 보였던 차가운 논리만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공감을 한다. 인간적인 공감을. 타인들이 왜 그러는지 현상 보다 그 동기를 더 헤아리려 한다. '라이츠빌'에서 엘러리 퀸은 무엇보다 따뜻한 심장을 지는 인간으로 나타난다. 더이상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건의 진실을 찾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되도록 사건이 일으킨 아픔에서 치유되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걸 위해서는 자신이 아는 진실을 묻어 둘 수도, 밝힐 수도 있는 인물, 그것이 바로 엘러리 퀸이다. 놀랍게도 그는 사랑도 한다. 이제까지 보여주었던 초식남의 모습은 '라이츠빌'에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 엘러리 퀸은 더쉴 해밋의 저 비아냥 거리는 질문에 이 작품을 통하여 제대로 대답한 것이다. 나도 성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그것이 '라이츠빌'이다. 진정 성숙한 어른이 된 엘러리 퀸을 만날 수 있는 시리즈. 그 첫 작품이 되는 '재앙의 거리'는 '라이츠빌'이 간직한 모든 것을 선명히 드러내고 있다. 앞으로 완전히 달라진 엘러리 퀸을 보게 될 것이라는 강력한 선언과도 같은 작품이다.
모두가 평가하듯이 '재앙의 거리'가 그 많은 엘러리 퀸이 등장하는 작품 중에서 세 개의 베스트 안에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터닝 포인트'를 너무도 선명히 드러낸데다 마치 얼마나 반성을 많이 했는 지를 보여주려는 듯 완성도와 깊이까지 나무랄 데가 없기 때문이다.
1942년에 나온 '재앙의 거리'의 미국 초판본 표지.
엘러리 퀸이 라이츠빌에서 임대한 주택이자 사건의 주된 배경이 되는 '재앙의 집'이 그려져 있다.
소설 '재앙의 거리'를 처음 여는 챕터의 제목은 의미심장하게도 '엘러리 퀸, 미국을 발견하다.'다. 2차대전의 와중에서 엘러리 퀸은 마치 이제야 미국을 발견했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아예 그 스스로 미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라이츠빌은 시골이다. 그는 지금까지 뉴욕이라는 거대 도시에 있었다. 드보르작은 미국 여행에서 도시를 체험하고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활력이 너무나 경이로워서 '신세계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만큼 미국의 도시는 이성이 열어젖힌 '신세계'였다. 이성이 가져다 줄 진보의 표상이었다. 그 도시들 중 뉴욕은 가장 선두에 있었다. 엘러리 퀸은 그렇게 이성이 가장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었던 뉴욕에서 한적하고 다소 고립된 시골 '라이츠빌'로 온 것이다. 그 곳은 건국 초기의 모습이 그대로 간직된 것 같은 그렇게 시간이 멈춰버린 곳이다. 바로 이러한 라이츠빌을 두고 엘러리 퀸이 '미국을 발견하다'라고 한 것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미국이라는 것을 재음미 해보겠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이성에 대한 맹신과는 다른 관점에서...
왜 그가 라이츠빌로 온 것일까? 그 이유는 작품에 드러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는 여기서 장기간 머무르면서 소설 같은 걸 쓰기로 작정한 듯 하다. 부동산에 들러 장기 임대할 주택을 알아본다. 페티그루라는 중개업자가 한 집을 소개한다. 이 마을을 세운 라이츠빌 가문이 곧 결혼할 신혼 부부를 위해 만든 집이라 한다. 집을 둘러보고 마음에 들었던 엘러리 퀸은 계약하기로 한다. 한데 퀸이 소설가라는 걸 듣자마자 혹시 소설 쓰는 데 도움될 지 모르겠다면서 집에 얽힌 비밀을 말해준다. 그 집은 라이츠빌 마을에서 '재앙의 집'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 집에 살려고 했었던 이들에게 하나같이 비극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애초에 살려고 했던 신혼부부는 남편이 갑자기 사라져 그러지 못했고 그 뒤에 이 집을 임대하려던 사람은 갑자기 죽었다.
미국 초기의 모습을 간직한 듯 보이는 라이츠빌에서 거주할 집은 이제 안전하지 못하다. 집은 재앙의 공간이 되어 버렸다. 이건 어쩌면 엘러리 퀸이 바라보는 현대의 미국인지도 모른다. 초창기 영국의 청교도들이 종교의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왔을 때, 그들이 바랐던 것은 무엇보다 자유와 가족의 안전이었을 것이다. 미국은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엘러리 퀸은 '재앙의 집'을 통해 넌지시 반문한다. 결국 미국이 해왔던 것은 안전해야 할 집을 재앙의 공간으로 만든 것 뿐이지 않느냐고.
그럼 처음부터 문제는 이 집에 있었던 거였구나. 엘러리는 생각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이 사건은 어디서든지 집과 연결되어 있다. 재앙의 집... 앨러리는 맨 처음 이 말을 만들어 낸 신문기자가 혹시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p. 177)
엘러리 퀸은 이제 왜 지켜져야 할 집이 도리어 재앙의 공간이 되어버렸는지 그 이유를 탐색한다. 이전과는 달리 따스한 심장을 지닌 관찰자로서...
마치 역사를 복기하기라도 하듯, 3년 전 미스터리하게 실종되었던 남편이 돌아오고 내내 그를 기다렸던 애인 노라와 다시 결혼하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원래 그들의 신혼집이었으므로 엘러리 퀸은 주저없이 양보하고는 라이츠빌 저택에 기거한다. 그러다 막내딸과 친해지고 우연히 그 막내딸을 통해 로라의 남편 짐이 썼으리라 추정되는 음모의 편지를 발견한다. 그 편지에는 아내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그 도움을 여동생에게 요청하고 있었다. '라이츠빌'은 이런저런 소문들이 금방 확산되는 곳이기에(아가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이 있던 마을과 비슷하다. 이 역시 전후 탐정 소설의 한 특징이 아닐까 싶다.) 엘러리 퀸은 집안의 명예를 위해 일단 덮어두자고 말한다. 타자의 처지를 먼저 생각하는 엘러리 퀸의 모습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편지에는 할로윈, 크리스마스 그리고 새해에 비소를 아내에게 먹이겠다고 되어 있는데 크리스마스까지 그대로 노라가 비소를 먹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다 드디어 새해. 엘러리 퀸이 빈틈없이 짐을 감시하고 있는 와중에 짐이 노라에게 건네준 칵테일을 당시 이미 와서 함께 기거하고 있었던 짐의 누이동생이 대신 마시고는 그만 죽는다. 그리하여 수사는 시작되고 그동안의 짐이 보여준 수상쩍은 행동들과 결국 비밀로 묻어두었던 짐이 쓴 음모의 편지마저 드러나면서 그는 주요 용의자로 체포된다.
'재앙의 거리'의 또다른 페이퍼백 표지. 중요한 인물들이 나와있기에 인용해 본다.
위의 두 여자가 바로 노라와 짐의 여동생이다. 안경을 쓴 검은 머리의 여성이 짐의 아내 노라이고 칵테일 잔을 가져가려는 금발의 여인이 바로 죽은 짐의 누이동생이다. 그림은 새해에 있었던 그 사건의 결정적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아래 철창게 갇힌 남자가 '짐'이다.
이게 '재앙의 거리'의 주된 사건이다. 이것만 읽으면 엘러리 퀸이 그다지 활약할 일이 없을 것 같다. 일단 범행이 예고된 데다 그 범인이 주된 용의자로 지목되고 또한 정작 엘러리 퀸 자신이 범행 당일 그 범인을 놓치지 않고 감시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 결말의 해결은 '역시 엘러리 퀸이로군!' 할만한 것을 마련해두고 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이 정작 추구하는 건 그 해결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보다는 이 소설의 작중 인물이 말했듯이 '광기의 40년대를 사는' 미국인들의 초상을 바로 가까이에서 보게 하는 데 더 주력하는 작품이다. 이는 막내딸 퍼트리샤의 다음과 같은 절규에서 드러난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해질 수 있을까요? 엄마 친구들은 누구 하나 전화 한통 걸어주지 않고 뒤에서 험담만 해요. 엄마가 나가던 모임 두 곳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했구요. 마틴 아주머니까지도 전화를 안 해요."
"판사님의 부인 말이군요." 앨러리는 중얼거렸다.(p. 193)
'재앙의 거리'는 그토록 눈부신 이성의 신세계라 여겼던 미국이 사실은 바로 가까이에서 통제할 수 없는 광기가 도처에서 거세게 숨쉬고 있는 곳이었음을 드러낸다. 집조차 안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재앙은 거기에 있었다. 이는 라이츠빌 마을을 건립한 라이츠빌 가문마저도 그 광기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에서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그렇게 미국 초기에 그들을 지탱해주었던 이성이 이제 더이상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재앙의 거리'에서 엘러리 퀸이 차지하는 위치는 그래서 이전과 달라졌고 그만큼 대안을 구현시킨 존재가 되었다. 그의 이성은 이제 범죄와 싸우지 않고 진실과 상관없이 부풀어 오르는 소문과 싸운다. 불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도 같은 소문들. 소설에서 소문들은 대부분 단편적인 인상이나 정보들임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제대로 관찰하지도 않고, 헤아려 보지도 않은 채 덮어놓고 '믿어' 버린다. 하지만 앨러리 퀸은 누구보다 많이 관찰하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소문의 주체들은 자신들 입장만 생각하는 데 비해서 앨러리 퀸은 관찰과 헤아림 모두 어디까지나 타자를 중심에 두고 하려고 든다. 그렇게 이 소설엔 소설에 표현된 그대로 '두 세계의 전쟁'이 있다.
새롭게 변화된 '라이츠빌 시리즈'는 그 전쟁을 치르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그 전쟁의 와중에서 구현된 엘러리 퀸의 모습을 통해 더이상 재앙의 집이 아니라 진정한 집으로 만드는 대안을 찾으려 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바라본 '재앙의 거리'의 모습이지만 '라이츠빌 시리즈'가 미국이라는 것 자체를 질문과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명백하다. 이같은 변화에 대해 비아냥 거렸던 더쉴 해밋이 과연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하다. 알려진 바가 없어 추측밖에는 할 수 없지만 분명 '어느 정도는 그래 퀸 당신도 이제는 제법 인간다워졌군.'하고 만족하지 않았을까 싶다.
무엇보다 여기서 엘러리 퀸은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PS. 원래 새로 발간되는 '재앙의 거리'의 리뷰였는데 책이 검색되지 않아 구간에 남겼더랬습니다. 이제 검색되기에 여기에도 복사해 둡니다.(기본의 리뷰에 추천해 주신 분들이 계셔서 삭제는 못하겠더군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중복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