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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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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네스뵈, 노르웨이의 스릴러 작가인 그를 미국의 언론들은 스티그 라르손이 없는 지금 이제 노르딕 느와르의 왕이라 부른다.

사실 노르딕 느와르라는 명칭 자체도 스티그 라르손과 요 네스뵈 때문에 생겨난 것이기도 했다. 그만큼 영미 미스터리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는 해닝 만켈로 인해 전 세계에 관심을 불러 일으킨 노르딕 느와르에 있어서 진화의 한 극점으로 인정되었다. 깊이에 비해 속도감과 긴장이 떨어졌던(스티그 라르손 조차도!) 노르딕 느와르를 영미의 스릴러 못지 않게 늦출 수 없는 몰입도와 속도를 가져다 준 작가가 바로 요 네스뵈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긴 밤을 보내기 위한 소일거리론 괜찮지만 분주한 일상으로 짧은 밤을 보낼 수 밖에 없는 도시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닌가'란 평가 조차 들었던 노르딕 느와르에게 '스릴러의 새로운 바람'이라며 영미 언론의 높은 관심마저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단지 그것 뿐이었다면 '왕'이라는 칭호는 붙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그 재미 만큼 깊이 역시 있기 때문이다. 요 네스뵈가 특히 그의 주력 무기라 할만한 해리 홀레 시리즈를 통해 그려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노르웨이라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허위'다. 그는 자신의 국가에 대해 단적으로 '조용한 사회'라고 부른 적이 있다. 그 '조용함'이란 말 그대로 차분하다거나 안정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말은 일종의 반어법이다. 조용할 수 없는 사회인데 조용하다는 그런 의미로 쓴 말이라는 것이다. 요 네스뵈는 우리가 노르웨이에 대해서 가지는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행복지수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라는 이미지를 여지 없이 파괴시킨다. 그가 그려내는 노르웨이는 특별하지 않다. 그야말로 자본주의 국가라면 다 가지고 있는 모든 부조리와 그로인한  첨예한 갈등들로 뒤범벅된 진흙탕인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그 모든 더러운 진창들을 순백의 눈으로 뒤덮듯,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 처럼 '조용한 사회'라고 스스로 치장하고 있으니 네스뵈는 그것을 비판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는 요 네스뵈의 최고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이 작품 '스노우 맨'에 있어서도 그대로 관통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겉으로 보이는 것 처럼 일부일처제가 아닙니다. 최근 스웨덴의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들의 15퍼센트에서 20퍼센트 정도가 자신이 아버지라고 믿거나 짐작하는 사람이 친부가 아니라고 합니다. 무려 20퍼센트나요! 다섯 명중 한 명 꼴이죠! 거짓된 삶을 사는 겁니다.(p.23)"

 

  주인공 해리 홀레는 라디오를 통해 이것을 듣는다. 그리고 바로 곰팡이를 제거하는 사람의 방문을 받는다. 그는 곰팡이 제거가 왜 필요한지 말한 뒤 이렇게 덧붙인다.

 "곰팡이와 같은 공기를 호흡하는 바람에 병에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몇 년씩 시름시름 앓는데도 딱히 원인도 없고 다른 식구들은 멀쩡하니까 건강염려증 환자라는 핀잔만 듣죠. 그러다가 병균이 벽지와 플라스틱을 먹어치웁니다.(p.26)"

 

  이처럼 요 네스뵈가 그리고 있는 노르웨이의 모습은 여기서 확실히 드러난다. 노르웨이는 다섯 명 중의 하나가 보이는 것 처럼 진실하지 않은 거짓과 속임수의 삶을 살고 있는 나라이며 보이지 않는 곰팡이가 알게 모르게 집을 망치고 삶을 망치고 있는 나라라는 것을.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진실을 아예 몰랐을 수도 있고 그저 삶과 타협하기 위해 짐짓 모른척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위선과 기만이 가져오는 것은 파멸 뿐이다. 내버려 둔 곰팡이가 집 전체를 망치고 삶을 끝장내 버리듯이... 해서 네스뵈는 곰팡이 제거자가 되기로 한다. 진실을 더이상 모르쇠하지 않고 만천하에 밝히기로 작정한 것이다. 해리 홀레는 바로 그것을 위해 태어났다. 노르웨이를 뒤덮은 위선과 기만의 곰팡이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네스뵈는 해리 홀레가 장차 곰팡이 제거자의 운명을 걸을 것이라는 걸 바로 다음의 곰팡이 제거자의 말로 분명히 선언한다.

 

  "저 혼자 일할 겁니다.(p.26)"

 

 

 

  노르딕 느와르에 있어서 탐정들은 모두 고독하다. 이것은 하나의 일반론이다. 해닝 만켈의 발란더도 스티그 라르손의 리스베트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경찰이라는 조직에 몸을 담고 있든 아예 해커라는 범법자이든 상관없다. 그들은 무조건 혼자다. 이건 물론 고독이라는 우수를 독자들에게 전해주기 위함이 아니다. 사실 그들에게 고독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고독은 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필연의 운명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싸워야 하는 것은 단순히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범죄란 사회가 은폐한 진실이 드러나는 계기일 뿐이다. 범죄란 사회가 이제 더이상 감출 수 없는 한계에 다다랐다는 증표이며 때문에 결국 그들 고독한 탐정들에게 있어 사회가 깊숙이 숨겨둔 진실의 모습인 미노타우르스에게로 안내하는 아리아드네의 실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그들이 결국 싸우는 것은 범죄자로 인격화된 사회 전체이다. 오랜 시간 위선과 기만속에 축적시켜 왔던 부조리와 갈등 그리고 그로 인한 아픔. 그들은 결국 그것을 밝혀내어 사회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홀로일 수 밖에 없다. 사회가 개인에게 새겨 놓은 모든 사회로 부터 주입된 가치관으로 부터 자유로워야 하니까. 사회가 덧 씌운 색안경이 아닌 오로지 자신만의 눈으로 그 모든 진실들을 목격해야 하니까. 그래서 홀로고 홀로이어야만 한다. 그들이 슈퍼히어로라서가 아니라 사회의 가장 진실한 기록자가 되기 위하여...

 

 

   또한 그 이유로 네스뵈는 '가족'에 집중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혈연에 기반한 가장 강한 유대로 결속된 집단이다. 그 가족을 생각할 때 우리가 느끼는 감상은 우리가 우리가 속한 사회를 바라볼 때 느껴지는 감상과 비슷하다. 가정의 혈연이 '모국'이라는 국적으로 이어지고 여기에 같은 언어, 같은 지역이라는 공감대는 그것을 강화한다. 흔히 가족이란 걸 떠올릴 때 느껴지는 감상은 타국에서 자신의 나라를 떠 올릴 때 느껴지는 감상과 유사하다고 한다. 우리는 왜 가족을 떠올릴 때 먼저 감상주의에 빠지는 것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같은 핏줄'이라는 것에서 오는 유대이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이 한 사회의 성원 또한 그 비슷한 유대감을 사회에 대하여 가진다. 사실 가족은 사회화의 1차적 기관으로 사회가 한 육체와 의식에 새기고 싶은 이념들은 모두 가족을 통해 유포되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은 그대로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 그러므로 한 가족의 거짓을 다루는 것은 바로 사회의 거짓을 다루는 것이 된다. 가족 내부에 깊숙하게 감춰진 진실이란 그대로 사회가 은폐한 진실의 은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네스뵈는 가족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미국의 하드보일드 작가 로스 맥도널드와 비슷하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계승자라고도 불리는 로스 맥도널드는 이전의 하드보일드 작가들과는 달리 자신의 작품의 중심에 '가족'을 가져온 첫번째 작가다. 1960년 그의 전성기 때 나온 작품들의 대부분은 모두 한 가족의 오랫동안 은폐된 진실들을 드러내는 데 맞춰져 있다. 문제는 그렇게 드러난 가족의 진실들이 모두 1950년대 미국이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을 때는 주목하지 않았던 그렇게 수면 아래로 감춰진 진실들이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사실 로스 맥도널드가 드러내는 진실들은 오로지 경제적 풍요 또는 사회적 성공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버리거나 감추었던 그런 갈등이요 상처였고 아픔이었다. 그렇게 그는 1950년대의 미국인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아메리카'가 그다지 이상적이지도 모범적이지도 않은 사회였음을 폭로한다.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다만 우리가 그것이 겉으로 꾸민 휘황찬란한 외관에 시선을 빼앗긴 나머지 그 이면에 있는 그늘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란 걸 맥도널드는 알린다. 요 네스뵈가 해리 홀레를 통해서, 특히 이 작품 '스노우 맨'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도 바로 이것이다. 1950년대의 미국과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노르웨이. 바로 그 위선과 기만의 포장지를 뜯어내기 위하여 그는 사실은 사회적 갈등이 깊숙히 침윤되어 있는 곳이나 혈연이라는 이유로 마치 없는 것 처럼 위장되어 있는 곳의 대표적인 상징으로써 '가족'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스노우 맨'에 새겨진 의미이기도 하다.

 

 

 

 

  '스노우 맨'은 겨울이 그 어느 곳 보다 긴 노르웨이에게 있어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노르웨이에 존재하는 가정 만큼이나 흔할 것이다. 더구나 '스노우 맨'은 단란한 가정의 상징물 같은 것이기도 하다. 집 앞에 세워있는 눈사람에게서 그 가정이 문제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것을 느끼기가 더 쉽다. 왜냐하면 눈사람은 이제 우리들에게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 굳어진 인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의 '사회적 약호(code)'라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바로 그 '눈사람'이 범인의 잔혹한 살인이 있을 것이라는, 그렇게 진실하지 못한 가정을 파괴할 것이라는 예고장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 표면이 주는 느낌과는 완전히 다른 이면의 의미로 말이다. 눈사람 자체는 굳어진 이미지로 인해 더 이상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우리 시각의 한계를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눈사람은 그대로 '노르웨이'라는 그 겉에 드러난 이미지 때문에 정작 그 진실된 면모는 보지 못하는 것의 상징도 된다. 앞서도 말했듯 노르딕 느와르에서 범죄란 결국 사회가 은폐한 진실이 드러나는 계기다. 이 소설의 눈사람 역시도 그와 똑같은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네스뵈는 눈사람을 노르웨이에 대한 하나의 총체적 상징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눈사람 자체에 집약되어 있는 것과도 같이 표면과 이면의 이율배반성은 이 '스노우 맨'에 있어 주제의 핵심이자 또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네스뵈는 소설에서 보여지는 이야기 전개의 표면에 그 주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반대 쪽에 이야기의 주제를 담는다는 것이다. 앞서 인용했던 라디오 멘트는 사실 이 소설에서 벌어진 범죄의 이유와 모습을 집약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혈연이 아닌 자들끼리의 집합, 거짓과 기만으로 이루어진 가정... 주로 그런 가족들이 범죄의 표적이 된다. 이렇게 보자면 사실 이 이야기의 주제가 마치 그러한 불륜들을 처벌함으로써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해 나가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여긴다면 그건 표면에 너무 집착한 까닭이다. 눈사람과도 같이 표면의 이야기가 주는 인상에 굳어진 나머지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보다 본질적인 주제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포일러를 피해 내용의 언급 없이 바로 핵심으로 뛰어들자면 사실 네스뵈가 이 소설에서 본래 말하고 싶은 것은 불륜의 죄악시, 간통으로 부터의 가족의 보호 따위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 자체를 의심하며 부정한다. 사실은 거꾸로 그러한 범죄자를 통하여 그 범죄자가 가지고 있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신봉 만큼 우리 역시도 가족이라는 것에 그러한 맹목적인 믿음, 집착이 있지 않느냐고 꼬집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네스뵈가 정말 보여주려 하는 진심이다. 때문에 이 소설에서 이루어지는 해리 홀레의 로맨스(스포일러상 이 정도만 언급한다.)야 말로 네스뵈의 핵심인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이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네스뵈의 전제를 먼저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는 왜 가족을 하나의 의심스러운 이데올로기로 바라보는 것인가? 그것은 혈연 자체로 비롯되는 배타성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더 상세히 설명하기 전에 '노르딕 느와르'가 왜 사회 전체와 겨루려는 것인가에 대한 보다 확실한 대답을 하고자 한다. 해닝 만켈, 스티그 라르손 그리고 네스뵈까지 그들이 스웨덴을 의심하고 노르웨이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바로 복지국가의 부작용이라고도 할만한 흔히 '외국인 혐오증'으로 말해지는 파시즘의 잔재 때문이다. 최근 통계에도 나왔지만 이 북구 유럽에 있어서 극우주의의 확산은 정말로 놀랄만한 기세이다. 그들의 성공한 복지국가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막대한 세금 부담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렇게 그 나라의 국민들은 성공한 복지국가를 이룰 때 까지 오래도록 희생해 온 것이다. 그 나라는 그렇게 그들의 피와 땀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뒤늦게 그 나라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전혀 거기에 대한 희생 없이 오직 그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자라난 복지국가란 나무로 부터 복지란 열매만 따 먹는다. 국민들에게 그 외국인들은 오로지 무임승차자로 보일 뿐이다. 때문에 '외국인 혐오증'이 성장하는 것이다. 헤닝 만켈은 1991년 그의 데뷔작 '얼굴없는 살인자' 때 부터 스웨덴 사회에 만연된 외국인 혐오증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었다. 사실 노르딕 느와르가 그와 같이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노르딕 느와르는 태어났을 때 부터 그렇게 점점 가시화되고 있는 파시즘과 싸워왔던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그대로 스티그 라르손이 계승했고 네스뵈의 작품 역시도 이 흐름을 따르고 있다. 즉 여기서 네스뵈가 의문시하는 혈연 하나로 존속되는 가족은 사실상 '외국인 혐오증'의 은유인 것이다. 네스뵈 그에게는 결혼으로 출발한 가정이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은 그렇게 나라란 오로지 그 나라에서 태어나고 함께 해온 국민들로만 채워져야 한다는 주장이나 똑같은 것이며 사람의 마음은 변할 수 있고 성격 차이로 도저히 같이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럴 때 가족이니까 억지로 잡아두고 포기하게 하는 것은 그 나라의 국민이 아니라고 해서 미워하고 배척하는 외국인 혐오증이나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바로 그 노르웨이에 확산되고 있는 파시즘을 에둘러 비판하고 경계하기 위하여 이러한 거짓 위에서 존재하는 가족들을 등장시켰던 것이다. 바로 그 거짓 위에서 존재하는 가족들이 사실상 애정이 끝났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 만으로 '카드로 만든 집' 과 다를 바 없는 가족을 고수하고 지키고 있었듯이 이 '외국인 혐오증'것 역시도 단순히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고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외국인들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것이니 정작 바로 그 가정에서 범죄자라는 괴물이 태어나게 되었던 것 처럼 이 외국인 혐오증도 역시도 결국엔 그와 같은 괴물을 태어나게 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스노우 맨'이 정말 뛰어난 작품인 이유는 이 작품에 녹여낸 네스뵈의 우려가 정말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얼마전 우리들이 충격 속에 들었던 오슬로의 정부 청사에 폭탄 테러를 해서 8명을 숨지게 하고 바로 뒤이어 우토야 섬에서 캠프에 참가한 69명을 무차별 총기 난사로 사살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그 어마어마한 학살을 저질렀던 이유의 근본에 바로 이 외국인 혐오증이 자리잡고 있었다. 혈연의 순수성을 고집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파시즘이 가져오는 것은 결국 이와 같은 끔찍한 비극 뿐이다. 나치가 가져온 유태인 학살은 파시즘의 본성상 파시즘이 있다면 반복될 수 밖에 없는 비극인 것이다. 그래서 네스뵈는 이러한 비극을 미연에 막고자 가족도 얼마든지 사정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것이며 사실은 때가 되었을 때 그 변화를 먼저 긍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 소설 '스노우 맨'을 통해 역설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읽는 '스노우 맨'의 이야기이다.  노르딕 느와르 전체에 결쳐 오래도록 이어져 온 싸움이기도 하다. 하지만 헤닝 만켈은 너무 어두웠고 스티그 라르손은 안타깝게도 너무 일찍 떠나고 말았다. 네스뵈는 천착하는 주제의 깊이와 매서움은 변하지 않았으나 어둡지 않고 영미의 베스트셀러 스릴러 만큼이나 빠른 속도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로 독자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이 책은 밀레니엄 만큼이나 '블랙홀'이다. 그만큼 잡을 첫 순간을 주의해서 결정해야 한다. 마치 미드 '24시'를 보는 것 처럼 장장 619 페이지에 이르는 이야기를 도저히 중간에서 그만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재미 만큼이나 천착한 주제의 선명성 또한 빛을 발한다. 아마 이 소설을 읽고 네스뵈의 다음 해리 홀레 시리즈를 거부하기란 참으로 힘들 것이다.

 

 

                                                                                        "스노우 맨을 잡아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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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3-12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헤르메스님께서도 <스노우맨>을 읽으셨군요! 저는 이 책을 딱 받고는 깜짝 놀랐어요. 어쩐지 박스가 왔더라 생각했더니 무지하게 두꺼운 책이더군요. 값이 비싼데 이유가 있었어요. 일단은 너무 읽을 책이 많아 책상위에 고이 모셔두었는데 곧 꺼내읽어야 겠어요.
전부터 부러웠는데... 대체 헤르메스님께서는 어떤 바탕에 사진을 찍으시는 겝니까! 저는 찍고자 해도 집 바닥은 낡은 장판이라 안예쁘고, 책상은 좁아서 다른 물건들이 보이고... 영 찍을데가 없어서 그냥 알라딘 이미지로 대체하곤 합니다. 제게도 저런 무궁무진한 배경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ICE-9 2012-03-12 22:26   좋아요 0 | URL
정말 추천이에요. 두께가 제법 되지만 아마도 정작 읽게되면 그런 건 문제가 안될거에요. 그런데 잔인한 장면이 좀 나오는데 소이진님이라면 괜찮겠지요?^ ^
제 영업비밀을 말씀드리자면 전 LP 커버 위에 놓고 찍는답니다. 스노우맨 배경의 그림은 그룹 유라이어 힙의 앨범 커버에요. 로저 딘이 그렸죠. 그렇게 소장하고 있는 LP를 재활용하고 있어요^ ^ 이번엔 마침 소장한 레고가 스노우 맨 분위기에 어울리는 것 같아서 특별히 더 연출시켜 본 거구요. 하다보니 이게 더 재밌더라구요 하하^ ^

김동준 2017-07-04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말로만 ˝읽어보겠다˝ 하지 말고, 주말에 무료한 시간을 보낼때 그리 나쁘지는 않을것 같아서 다행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