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브레스트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3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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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이면 가장 많이 생각나는 작가가 바로 요 네스뵈이다. 그의 이름을 우리나라에 알린 대표작 제목이 바로 겨울하면 곧잘 떠오르는 '스노우맨', 즉 눈사람인 까닭이다. 그러고보니 눈사람 말인데, 그것은 같은 사물이긴 하지만 그냥 길바닥에 구르는 돌멩이와는 달라 보인다. 돌멩이는 그저 무심히 돌멩이로만 볼 수 있지만 어쩐지 눈사람은 그것을 만들었을 아이들의 풋풋한 동심이나 그런 동심을 다치지 않고 잘 자라나도록 한 단란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가정 같은 것들이 얼른 연상되고는 한다. 눈사람이라는 단어가 왠지 푸근하게 들리는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사물이 그냥 사물로 있지 않고 이렇게 하나의 이미지와 바로 연결되어 떠오를 때가 있다. 마치 정해진 규칙처럼 다른 이미지로는 얼른 바뀌지 않는 것들이 말이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게 마련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를 '사회적 약호(code)'라 부른다. 롤랑 바르트가 이 말을 단순히 사물에서 비롯되는 선입견이라는 게 사회적으로 정해진 것이다 정도를 말하기 위해 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바로 이런 약호들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물이나 사람 혹은 사건을 보고 해석하는 데도 영향을 미쳐 그 약호대로 보고 판단하고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생각할 때는 한없이 투명해 보이지만 사실 그것을 바라보는 눈조차 우리는 어느틈에 이식당한 사회라는 타인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쩌면 사회적 담합의 순전한 모방일 지 모른다. 혹은 나와 사회가 교섭한 결과일 수도 있다. 무릇 개성이란 것마저도 그러한 조합과 배열의 우연적 결과일지도 모른다. 사회라는 경계 안에 머무르려 하는 한 우리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진정한 나가 되려면 그 경계 바깥으로 나가야한다. 나만의 눈, 나만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하고 싶다면 '월담'은 필연적인 것이다.


 '월담'을 쓰고 읽는 것에다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그건 아마도 드러난 의미가 아니라 그 아래 그림자처럼 감추어진 이면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선 이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바로 그 이면의 발굴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적 약호가 사실은 진리가 아니며 거짓과 기만 위에 성립된 작위적 담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면의 복권이란 사회적 약호의 전복이다. 아울러 사회적으로 약호화된 나의 전복이자 동시에 진정한 나의 재건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것이야 말로 실은 요 네스뵈가 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요 네스뵈, 그는 이면의 의미를 발굴하는 작가다. 그의 대표작 '헤드헌터'에는 부자들이 남몰래 감춰두고 있는 그림들을 훔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사실은 요 네스뵈가 바로 그 주인공과 같다. 사회가 은밀하게 숨기고 있는 표상의 진짜 의미들을 몰래 가져와 온 천하에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작가라는 건, 이제는 유명할 대로 유명해진 인터뷰에서 한 말에서도 드러난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조국 노르웨이를 '조용한 국가'라 부른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렇게 사회적으로 약호화된 '조용함'의 의미는 아니다. 사실 노르웨이는 네오 나치와 같은 신우익의 부활, 날로 높아지는 빈부의 격차 그리고 외국인들에 대한 차별로 인한 갈등들로 들끓고 있다. 그런데도 노르웨이는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안정적인 복지국가의 모습만 보여지기를 고집한다. 송곳처럼 여기저기 솟아난 차별과 갈등들을 하얀 천으로 그저 살짝 덮어놓는 것과 같은 꼴을.


 요 네스뵈가 말하는 '조용함'이란 바로 이것이다. 모든 상처와 고통을 가져오는 것들을 모르쇠하는 그 기만, 혹은 그 비명 소리들을 모조리 억누르는 억압을 일컬음이다. 바로 그 덮은 하얀 천을 모조리 걷어내는 것. 그것이 요 네스뵈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스노우맨'도, '레오파드'도 마찬가지다. 내밀한 곳엔 언제나 '노르웨이'라는 사회에 대하여 발언이 있었다.

 

 해리 홀레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 '레드브레스트'는 그 경향의 출발점과도 같은 작품이다.

 

 'MY MOST PERSONAL NOVEL!'


 해리 홀레는 레드브레스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인터뷰를 들어보니 이 작품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이전 두 편과는 다르게 정말 많은 변화를 꾀하려했기 때문이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가 '다중화자'의 도입이다. 이전 작품들은 모두 해리 홀레를 중심에 놓고이야기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레드브레스트'에 와서는 해리 홀레 이외에도 화자의 입장에 서는 인물들이 많다. 지금은 보편적이 된 이 스타일은 '레드브레스트'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를 가장 힘들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2차대전 당시 독일에게 동조했다는 노르웨이의 부끄러운 역사를 소설의 중추로 삼은 것이었다. 이전의 그는 보다 국제적인 맥락에서 이야기를 다루었다. 하지만 점증하는 노르웨이 국내 문제에 대하여 더이상 발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노르웨이에 대해서 말하려 하지 무엇보다도 과거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의 문제는 모두 그 과거의 역사적 과오로부터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노르웨이의 진정한 치유를 원한다면 기필코 제대로 끼워야 할 첫 단추. 그래서 그는 노르웨이의 부끄러운 과거를 가져오려했고 진정한 성찰을 위해 조금의 가감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재현이 필요했다. 하여 그는 정말 많은 역사적 문헌들을 읽었고 참전 경험자들로부터 많은 증언을 들었다고 한다. 바로 그 과정이, 있는 그대로의 과거로부터 픽션을 구축하고자 하는 길고도 지난한 과정이 그를 힘들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었다. 거울에 비쳐보는 것과도 같이 투명한 대면만이 진정한 반성과 그를 통한 치유로 인도해 줄 터이니까. 덕분에 우리는 영화보다도 생생하게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전장의 리얼리티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회상으로 제시되는 이 전쟁 장면에서 우리는 요 네스뵈가 과연 이 소설을 위해 얼마만큼 노력했는지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가 그토록 열심히 전쟁의 기억들을 찾고 발굴한 것은 비록 그 역사가 현재 노르웨이에게 있어 부끄럽기 그지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대로 외면해서는 안되는 기억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는 그 역사적 과거를 서둘러 망각속으로 던져버리려 했다. 빨리 잊고 새출발에나 힘쓰자는 것이 노르웨이의 모토였던 것이다.


 '레드브레스트' 소설 초반, 해리 홀레는 미국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차출된다. 그리고 경호 도중, 원래 사람이 없어야 하는 곳에 정체불명의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는 테러리스트로 오인하고 그만 총을 쏘게 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미국 대통령의 경호원이었다. 해리 홀레는 자신의 총격으로 다친 그 사람에게 죄책감을 갖지만 고위 관료들은 그러지 않는다. 더우기 그 사건이 양국 외교에 좋지 않다고 판단, 서둘러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테러 위협에 제대로 대처했다는 이유로 징계는 커녕 영웅이라면서 승진시킨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이다. 그들 중 아무도 다친 미국의 경호원에게 신경쓰지 않는다. 해리 홀레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그 일을 아파하고 있는 지도 마찬가지다.


 요 네스뵈는 왜 소설 시작부터 이런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일까? 그게 바로 노르웨이가 그 전쟁의 기억들을 다루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과거는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데 방해물로 여기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서둘러 덮어버리기에 급급했던 노르웨이. 그러느라 전쟁에 참여한 자들의 영혼에 과연 어떤 상처의 나이테가 깊이 새겨져 있는 지는 보려고 하지도 않는 노르웨이의 모습인 것이다. 더우기 개인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나라에 의해 끌려가 입은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제목인 '레드브레스트'는 진홍가슴새를 뜻한다. 왜 하필이면 이 새일까? 그건 이 새야말로 노르웨이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표지를 넘기면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리고 우리들에겐 '닐스의 모험'으로 유명한) 셀마 라게르뢰프의 '진홍가슴새의 비밀' 한 대목이 나온다. 아마도 이것이 네스뵈가 '레드브레스트'라는 표상을 가져온 원천일 것이다. 이것은 동화다. 세상 모든 만물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진홍가슴새를 만든 하나님은 '진홍가슴새'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창조될 당시 진홍가슴새에겐 원래 가슴의 붉은 반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왜 자기 이름을 하필이면 진홍가슴새라 지었는지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름을 지은 장본인인 하나님에게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네가 진정한 사랑을 베풀면 네 이름에 걸맞는 모습을 가지게 될거야."라고. 그리고 세월은 흘러 진홍가슴새는 처음으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고 있었던 예수였다. 진홍가슴새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그 때문에 가슴이 아팠는데 뭔가 고통을 덜어줄만한 것이 없을까 하고 찾다가 머리에 쓴 가시관의 가시라도 뽑아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리로 가시를 뽑았는데 촘촘히 돋아난 가시들이 그런 진홍가슴새를 가만 내버려둘리 없었다. 몸 여기저기가 찔리고 가슴엔 빨간 핏물이 들었다. 그 때 예수가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천지가 창조된 이후로 그토록 너희가 갈구했으나 얻지못했던 것을 이제야 얻어냈구나!"라고.

 

  이건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뭔가 하려는 것이야말로 바로 참사랑임을 말해주는 동화이지만 물론 요 네스뵈가 그런 의미로 진홍가슴새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조용한 나라'처럼 그에게 의미란 늘 보여지는 그대로는 아닌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요 네스뵈가 이 새를 가져온 것은 과거의 역사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 노르웨이가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진홍가슴새와 똑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치에 협력한 전력'이라는 그야말로 그들의 역사에 있어서는 가시와도 같은 그것을 뽑아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무리 뽑아내고 지우려하더라도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가슴의 붉은 자국만 더욱 선명하게 만들 뿐이다. 요 네스뵈는 바로 그것을 말하기 위하여 진홍가슴새를 가져온 것이다. 아무리 망각을 위해 삼켜도 소화되지 않으며 오히려 내부의 상처가 되어 결국은 바깥에 자신을 드러내고야마는 기억임을 말하기 위하여. 때문에 노르웨이는 망각하려고 하기 보다 오히려 지워진 자들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말이다. 

 

 즉, 과거와의 진정한 대면. 


 이것이야 말로 요 네스뵈가 '레드브레스트'를 통하여 하고자 하는 말이다. 이 책은 부득불 오명속에서 지워질 수 밖에 없었던 자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물론 그들의 참전이 정당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거울에 제 모습을 온전히 비추듯 투명한 대면이 필요한 것이다. 역사의 청산이란 언제나 '오컴의 면도날'처럼 부끄럽다고, 실수라고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고 잘라내 버리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건 오로지 아무리 치욕스런 과거라 하더라도 진정으로 투명하게 대면할 때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즉 자신의 부끄러운 과오에 대한 통렬한 자기 성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레드브레스트'는 바로 그것을 하려는 소설이다 그 통렬한 자기 성찰을 위하여 지워진 자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소설, 그것이 바로 '레드브레스트'다. 것이다. 껴안고 뒹굴어야 하는 것이 설사 진창이라 할 지라도.


 하지만 소설은 계몽이 아니다. 말하고 싶은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없다. 그러면 선동일 뿐이다. 문학은 독자의 귀가 아니라 머리에 그리고 마음에 더욱 의지해야 한다. 독자 스스로 지은이가 무엇을 말하는지 헤아리고 거기에 대해 또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기꺼이 지은이와의 대화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이다. 그러므로 요 네스뵈도 그렇게 한다. 대놓고 말하기 보단 하나의 반면 교사로 보여주는 것이다. 즉 만일 그 과거를 진정으로 껴안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통해 원래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거꾸로 부각시킨다. 그럼, 이제 우리의 의문은 여기에 이른다. '진정 껴안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요 네스뵈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명확하다. '다중인격자'가 되어버린다.  

 

 소설은 처음부터 '다중인격'이라는 말이 나온다. 경호해야하는 미국 대통령을 두고 말할 때부터 말이다. 사실 이 소설은 그아먈로 '다중인격적 상황'이 지배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해리 홀레의 용의선 상에 오른 노르웨이에서 부흥하고 있는 신나치주의자들도 그렇고 지금은 스포일러상 정체를 밝힐 수 없는, 나중에 다른 작품에서 해리 홀레의 호적수가 되는 인물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외무부의 고위 관료인 브란헤우그가 대표적이다.그는 말하는 입과 하는 행동이 정말 다른 인물이다. 입으로는 나라의 국익이 어쩌고 하고 있지만 사실 그가 가장 신경쓰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욕망뿐이다. 그는 나라를 위해 써야 할 권한을 오로지 자기 욕망의 관철을 위하여 쓴다. 그리하여 나랏일을 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은 그대로 사적 정사를 위한 공간이 되고 다윗이 밧세바에게 한 것처럼 해리 홀레가 자신의 연적이 될 가능성이 높자 임무를 핑계로 나라 변두리로 쫓아버리기까지 한다. 한 마디로 표리부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요 네스뵈는 소설의 소제목으로 우리아와 밧세바까지 달아서 이를 강조한다. 다윗의 표리부동함을 보여주었던 대표적인 사건의 인물들이 바로 우리아와 밧세바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해리 홀레가 활동하는 노르웨이는 도처에 겉 모습과 속 마음이 다른 '다중인격'적 존재가 넘쳐난다. 요 네스뵈가 노르웨이를 두고 '조용한 사회' 운운하며 사실은 비아냥거렸던 것도 바로 이런 사실의 확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런 상황이다.


 이것이 바로 노르웨이가 과거와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고 무작정 지우거나 억압한 결과인 것이다. '레브브레스트'가 그리고 있는 현재 노르웨이의 모습은 바로 그 본질을 추출해서 보여주는 것과 같다. 이리하여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여기서 해리 홀레가 분투 끝에 헤쳐나가는 길이야 말로 요 네스뵈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노르웨이로 가기 위한 경로임을. '레드브레스트'는 숨겨진 '아리아드네의 실'과도 같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오로지 자신에게만 골몰하지 않고 언제든 타자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다. 미노타우루스의 미궁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서는 늘 바깥의 동정을 살필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자기를 내려놓는 것, 칸트가 말했던 대로 늘 자신의 자아를 공백으로 만들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요 네스뵈가 쥐어주고 싶은 아리아드네의 실인 것이다. 그래서 요 네스뵈는 해리 홀레를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한 곳에 있기 보다는 끊임없이 변방을, 경계 위를 헤매이게 만든다. 요 네스뵈는 해리 홀레에게서 지도를 빼앗아 버린다. 정해진 통념과 규칙대로 바라보게 할 뿐인 지도없이 방랑하게 만들어 있는 그대로의 풍경과 시간을 솔직하고 투명하게 대면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랑에서 오는 그 많은 해리 홀레의 상처와 고통은 이른바 성장통이다. 데미안에서 말했던 그대로 아브락서스가 세계로 나오기 위해서는 껍질을 깨는 아픔을 감내할 수 밖에 없듯이. 하지만 해리 홀레의 길은 그 혼자만의 길이 아니다. 미국의 영문학자 노스럽 프라이는 소설의 인물이 인간 자체를 보여주지 않고 지은이가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관념을 육화한 인물과도 같을 때, 단적으로 '아나토미'로 일컬었다. 그런 면에서 '레드브레스트'도 '아나토미'라 할 수 있다. 요 네스뵈가 현재 노르웨이에게 바라는 길을 해리 홀레의 여정에 짐지우고 있으니. 그렇게 해리 홀레는 십자가를 어깨에 매고 노르웨이의 사막을 횡단하고 있다. 바람에도 지워지지 않는 누군가를 위한 '아리아드네의 실' 자국을 길게 남기며...


'레드브레스트'는 이런 소설이다. 당신을 순례자로 만드는 소설. 아니 순례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소설. 하지만 겨울은 순례에 어울리는 계절이 아니다. 겨울의 체온은 육체를 고립시킨다. 그러나 생각은 그렇게 만들 수 없다. 오히려 생각이란 육체가 고립되면 고립 될 수록 더욱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개치기 마련이다. 한나 아렌트가 평생토록 하고자 했던 것. 그것은 육체의 몸짓만큼 사유의 몸짓 역시 의미 있고 우리에게 가치 있는 행위라는 걸 일깨우는 것이었다. 난 그걸 믿는다. 몸의 걸음만큼 마음의 걸음 역시 의미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런 계절에 보다 의미 있는 순례로 이끌어줄 이 책을 권한다. 정녕 뿌리치지 말아야 할 손길이라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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