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헌터
요 네스뵈 지음, 구세희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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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부터 정말 읽고 싶었던 작가였다. 

                          요 네스뵈

 노르웨이의 작가 요 네스뵈. 최근 밀레니엄의 스티그 라르손 때문에 더욱 각광을 받게 된 노르딕 느와르에 있어서 영미 비평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가로 꼭 선정되는 작가이자 벌써 부터 워싱턴 포스트나 월 스트리트 저널등 미국의 주요 일간지에 그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기사나 인터뷰가 종종 실리는 등 많은 관심을 받고 있으며 비평가들 사이에선 스티그 라르손이 죽고 없는 지금 그 인기를 대신 차지할 가장 유력한 작가로 꼽히는 작가이건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정식으로 그의 소설이 소개된 적이 없어 아쉬웠는데 이번에 드디어 살림에서 그의 소설이 나오게 되었다. 물론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해리 홀레' 시리즈가 아니라서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무슨 상관인가? 지금 나온 스탠드 얼론 '헤드헌터'도 왜 영미 소설계에서 네스뵈가 그토록 각광을 받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작품이었는데 말이다.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링컨차를 탄 변호사와 해리 보슈 시리즈로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질 대로 알려진 마이클 코넬리는 THE REDEEMER를 읽고나서 정말 충격이었고 이제 네스뵈는 새로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며 해리 홀은 자신의 새로운 영웅이다라고 말했고 THE REDEEMER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자신의 심장 박동을 위험한 수준까지 고동치게 만들었던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 코넬리가 이렇게 까지 극찬하는 작품이라니 정말 읽고 싶어 마구 애가 탈 정도다. 

   네스뵈는 스티그 라르손과 더불어 이른바 노르딕 느와르의 진화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노르딕 느와르의 좋았던 점들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특유의 느린 진행을 과감히 개선하고 영미 스릴러 만큼 빠른 전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한없이 처지고 우울하기만 하던 분위기를 적당히 가감하여 유머스러운 분위기도 연출한다는 점에서 또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르딕 느와르 특유의 첨예한 비판 의식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예리한 냉소적 시선마저 더해졌으니 더욱 더 그렇다. 

  어쩐지 오랜 기다림 끝에 읽은 소설이고 거기다 이제 막 소개되는 작가라 어쩔 수 없이 칭찬만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또 그대로 허언만은 아님을 소설을 직접 읽어본다면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네스뵈는 언젠가 자신의 고국 노르웨이가 속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복지국가들을 두고 '조용한 사회'라 부른 적이 있었다. 물론 그건 일종의 냉소가 섞인 반어법적 표현이었다. 즉, 겉으로는 조용하고 평온한 사회처럼 보이지만 그건 그냥 기만이고 치장에 불과할 뿐 내부적으로는 온갖 부조리와 모순이 들끓는 곳임을 에둘러 말하기 위한. 베르코르의 소설 제목 처럼 일종의 '바다의 침묵'이라고나 할까? 내부적으로는 수많은 물결이 움직이고 요동마저 치고 있지만 늘 잔잔히 너울거리는 수면만을 보여주는 그 바다처럼 네스뵈는 자신의 나라들이 사실은 그렇게 이중성을 띠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그 이중성, 그 '조용한 사회'의 이면에 가리워진 본성을 파헤치는데 주력한다. 사회가 쓴 기만의 가면을 벗기고 사실은 약자의 희생으로 지탱되는 야수와도 같은 그 사회의 맨얼굴을 보여주려는 작가이다. 네스뵈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짐 톰슨의 내 안의 살인마(KILLER INSIDE ME)를 꼽았는데 그 작품 역시도 평범한 남자의 가면을 쓴 사이코패스의 연쇄살인마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 이중성의 테마가 그에게 본질을 이루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그는 두 작가를 언급했는데 다른 한 사람은 블라디미르 나브코프 이다.)

  그 드러냄의 대표작이 바로 해리 홀 시리즈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소설 '헤드헌터'도 사실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이중성은 여기서도 여전히 테마이다. 그것은 주인공 자체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제목인 헤드헌터는 바로 주인공의 직업이기도 하다. 그는 그 업계에서 이름을 널리 떨치고 있는 유망주다. 하지만 168CM라는 작은 키의 그는(주인공이 이렇게 키가 작은 것은 네스뵈가 그 자신 해리 홀과는 완전 반대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새로운 작품을 쓰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해리 홀은 193CM의 거구다.) 아마도 그 키로 어떤 컴플렉스라도 가지고 있었던지, 그 작은 키가 주는 약점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아주 매력적인 여성과 결혼을 했고 그 여성이 원하는 최상의 행복을 가져다 주기 위하여 늘 아낌없이 돈을 쓰는 바람에 만성 재정 적자에 허덕인다. 그래서 그는 부업을 하나 갖는데 그것은 헤드헌터 대상자를 인터뷰할 때 얻게 된 정보를 바탕으로 그들이 가진 미술품을 훔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낮에는 평범한 직장인 밤에는 도둑으로 활동하며 늘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인공에 체화된 이중성의 모습은 사실 자본주의에게 보내는 네스뵈의 냉소라 할 수 있다.  좋은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고래로 부터 사회가 보다 더 질적으로 잘 살기 위한 필수적인 일이었고 그래서 인성을 중시했으나 자본주의에 들어와서는 단순히 돈만 잘 벌면 인성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기능적인 머리'로 그 의미가 축소되고 말았다. 철저하게 분업화된 자본주의는 그에 맞게 인재를 뽑는데 있어서도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분업화된 영역에 잘 맞는 사람인가만을 따지는 것이다. 즉 사람에다 옷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옷에다 사람을 맞추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본주의도 네스뵈가 보기에 그리 공정하게 운용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주인공 자신이 정작 생계를 유지시켜 나갈 수 있는 것이 일종의 약탈인 범죄이듯 그렇게 자본주의 역시도 사실은 누군가로 부터 약탈해야만 그렇게 범죄를 통해서만 유지되고 있는게 아니냐고 냉소를 보내는 것이다. 뭐, 어쩌면 보다 단순한 이유일수도 있다. 해리 홀이 형사이기 때문에 그 반대인 범죄자로 주인공을 설정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반문은 그가 결정적으로 모든 난관에서 헤어나게 해 줄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그 범죄에서 훔치게 되는 미술작품이 바로 루벤스의 '칼리돈의 멧돼지 사냥'이라는 점에서 여지없이 깨어진다. 

  루벤스의 '칼리돈의 멧돼지 사냥'은 그야말로 이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집약해놓은 것과 같은 작품인데 가급적 스포일러를 피하면서 네스뵈가 이 작품에 넌지시 찔러넣은 숨은 저의를 말하자면 칼리돈을 거의 폐허로 만들었던 그 멧돼지가 사실은 누군가가 보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즉, 멧돼지가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니라 아르테미스에 의해 의도적으로 파견된 일종의 징벌의 천사라는 점이다. 소설을 읽고나면 이 그림이 얼마나 탁월하게 소설의 내용을 함축해서 보여주고 있는가 놀라게 될 것이 분명하지만(멧돼지에게 상처를 입히는 유일한 여성 영웅 아틀란타의 존재 또한 너무도 절묘하다.) 아무튼 이 그림은 단순히 인물의 형상화를 너머 소설에 나오는 바대로 아르테미스는 미국으로 그녀가 보낸 멧돼지는 바로 미국이 퍼뜨리고 있고 노르웨이가 따라가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걸 암시하게 위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가장 전위적 위치라 할 수 있는 헤드헌터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이 아주 부유하게 됨으로써 자신을 그 모든 경제적 곤란에서 벗어나게 해 줄 구원이 신자유주의 자체의 상징인 멧돼지에게서 온다는 점에서 더욱 확고해진다. 결국 멧돼지가 가져온 것은 칼리돈의 파멸이었다. 즉 이 그림 때문에 단순히 해리 홀의 반대되는 인물의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약탈을 그 자체의 본성으로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정확히는 신자유주의)를 고발하기 위해서였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최근에 '헤드헌터'는 노르웨이에서 영화화되었다

  깜짝놀랄 반전도 있고 한번 잡게 되면 그냥 내처 끝까지 읽게되는 진짜 '페이지터너'이지만 이렇게 깊이를 우려내는 솜씨 또한 만만치 않은 작가가 바로 네스뵈다. 이런 저력이 있는 작가이기에 영미 소설계에서 그토록 주목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한다. 아무튼 이 소설은 말로만 듣던 그의 명성이 그저 허명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다. 지리한 장마비로 뭔가 기분전환이 필요하다면 아니면 지금 가장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노르딕 느와르의 그 진화된 현재형이 궁금하다면 꼭 접해보시기를 권해드리고 싶다. (사실 많은 분들이 읽으셔서 제발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가 마구 나왔으면 좋겠다. 마이클 코넬리가 저토록 침을 튀기며 칭찬하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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