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 - 조심하라, 마음을 놓친 허깨비 인생!
정민 지음 / 김영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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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하다. 애처롭다. 권력을 쥐려는 자의 모습이란 어째 하나같이 다들 이럴까? 문득 박지원이 '담연정기'에서 도하와 청장이란 새에 관해 한 말이 생각났다.


 둘 다 물가에서 고기를 잡고 사는 새다 . 먹이를 취하는 방식은 판이하다. 도하는 진흙과 뻘을 부리로 헤집고, 부평과 마름 같은 물풀을 뒤섞이며 쉴 새 없이 물고기를 찾아다닌다. 덕분에 깃털과 발톱은 물론, 부리까지 진흙과 온갖 더러운 것들을 뒤집어쓴다. 허둥지둥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부지런히 먹이를 찾아 헤메나디지만 종일 고기 한 마리 잡지 못 잡고 굶주린다.

 청장은 해오라기의 별명이다. 신천옹으로 불린다.  이 새는 맑고 깨끗한 물가에 날개를 접은 채 붙박이로 서 있다. 한번 자리를 잡으면 좀체 옮기는 법이 없다. 게을러 꼼짝도 하기 싫은 모양으로 마냥 서 있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희미한 노랫가락에 귀를 기울이듯 아련한 표정으로 수문장처럼 꼼짝않고 서 있다. 물고기가 멋모르고 앞을 지나가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날름 잡아먹는다. 도하는 고생을 해도 늘 허기를 면치 못한다. 청장은 한가로우면서도 굶주리는 법이 없다. 연암은 이 두 가지 새에 대해 설명한 후, 이것을 세상에서 부귀와 명리를 구하는 태도에 견주었다.


 이번에 나온 정민의 책 '조심' 중 '도하청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연암답게 비유가 그야말로 촌철살인이다. 연암은 이덕무에게 이것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덕무는 이 이야기를 듣고 청장이 좋아서 청음관이라고 쓰던 자신의 당호를 '청장관'으로 바꾸기까지 했다고 한다. 부귀와 권력은 진흙과 같아서 쫓으면 쫓을수록 제 몸만 더러워질 뿐이다. 그걸 우리는 오늘날 총리 후보들에게서 명약관화하게 보고 있지 않은가? 연암만이 아는 진리는 아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부귀를 쫓을수록 사람은 옹졸해지고 권력을 쫓을수록 사람은 비굴해진다. 초라함만이 늘어갈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리도 다들 경마장의 말마냥 애오라지 그걸 향해 달리는 것일까?


 채찍이 엉덩이를 때리기 때문이다. 불안이라는 채찍. 어디서도 안정을 구가할 수 없는 사회, 그것이 바로 한국의 자화상이 아니던가. 낙오에 대한 공포가 스모그처럼 천지를 뒤덮는다. 그저 빨리 달려 남들보다 얼른 차지하는 게 살길인 것 같다. 그러니 조급증이 날 수 밖에.


 이덕무는 '이목구심서'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삼전도(혹시 삼전도가 무엇인지 모를 분이 있을 지 몰라서 책에는 나오지 않으므로 간단히 설명하자면 잠실 나루 부근으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하여 9번 절한 곳이기도 하다. 훗날 '삼전도의 굴욕'이라 불렀다.)를 건너며 지었다는 시다.


 바야흐로 백사장에 있을 적에는

 배 위 사람 뒤처질까 염려하다가,

 배 위에 올라타 앉고 나서는

 백사장의 사람을 안 기다리네.


 막 떠나려는 나룻배를 향해 백사장을 달릴 때는 자기만 떼어놓고 갈까봐 조마조마 애가 탔다. 겨우 배에 올라타 앉고 나자, 저만치 달려오는 사람은 눈에 안 보이고 왜 빨리 출발하지 않느냐며 사공을 닦달한다는 것이다. (p. 164 ~ 165)


 여기에 우리 모습이 있는 것 같다. 나룻배가 나만 떼어놓고 갈까봐 다들 두려워하지 않는가? 그래서 필요도 없는 스펙 쌓느라 열심이고 통장 잔고 늘리려 열심이며 사교육을 왕창 동원하면서까지 아이들 교육에 열심인 게 아닌가? 분명 조급증이 있다. 하지만 이것을 탓할 수도 없다. 정말로 떼어버리고 가는 것이 이 사회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이덕무에 따르면 나룻배에 한 번 올라타고 나면 더이상 떼어놓고 갈까봐 조마조마 애타는 마음은 신경쓰지 않는다. 자신 또한 똑같은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다려주지 않는다. 배려는 없다. 오히려 지연되는 출발에 짜증만 날 뿐이다.


 살면서 많이 겪는다. 상황이 달라지면 사람도 달라지는 것을. 한 번 올라타면 손을 내밀기 보다 쳐내기 바쁘다는 것을. 우리의 조급증은 그러한 경험의 산물이다. 무정하게 떠나는 나룻배를 보며 백사장에 주저앉은 설움의 산물이다. 그러니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을 하는 것만이 우리의 조급증을 근본적으로 없애는 것이리라. 가까스로 배에 올라탄 사람들이 뒤쳐 오는 자를 보며 언젠가 자신도 저랬었지 생각하며 그를 위해 손을 먼저 내밀어 주는 것. '우리 다같이 가자!'고 하는 것. 그것만이 우리를 도하로 만들고, 경마장의 말처럼 만드는 것에서 벗어나는 길이리라. 이렇게 보면 완전한 타인이란 없다. 과거 언젠가 지녔던 나의 얼굴이 있을 뿐. 정녕 그 때 나는 누군가 손을 내밀어 주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그 과거의 절실했던 도움을 현재의 내가 주려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조심'을 읽고 드는 생각의 한 조각이다. 정민에 따르면 원래 '조심'이란 마음을 잘 붙들어 내 마음의 주인이 되라는 뜻이라 한다. 그렇게 내 마음을 잘 붙들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100개의 사자성어를 이 책에 담았다. 그렇다. 2012년에 나온 전작 '일침'과 비슷한 구성이다. 하나의 사자성어를 중심으로 옛 사람의 글이랑 생각과 정민의 사유가 어우러지는 것이다.


 

 흙갈색 소반 위에 깨끗한 하얀 접시 하나 놓여진 것처럼 정갈하다. 문장은 소담하고 담긴 뜻은 담백하다. 속도는 완만하여 이른 새벽 하늘이 밝아져오는 것이나 저녁에 황혼이 물들어가는 것을 보는 느낌을 준다. 천천히 완상하면 더욱 좋을 책. '일침'이 마음에 들었다면 필시 이 책 역시도 마음에 들 것이다. 읽어보니 옛 사람이 사는 모습이나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이나 별 반 다를 바 없다. 과거의 글이지만 가슴에 콕콕 박히는 말들이 어찌나 많은지. 한 번에 후루룩 읽기 보단 천천히 오래 곱씹으며 읽어야 할 것 같다. 장맛은 오래 묵혀야 한다. 이 책도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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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와 바나나 테마 소설집
하성란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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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 우리들은 젖는다. 비에 젖어 목소리를 잃었다. 진짜 언어를 모조리 잃어버린 세상에서 오로지 비만이 사나운 사자의 포효처럼 성을 내고 있다. 하늘이 낮고 무겁다. 그 많던 새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길마다 부서진 빈 둥지들이 가득했다. 누군가 젖은 신문지로 둥지를 만들어 나무에 올려주었지만 세찬 비는 그마저도 모조리 찢어버렸다. 보지마, 기억하지마, 싸우려 들지마. 비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젖은 우리들은 잇달아 올라오는 한기에 어깨를 떨며 그만 받아들일까 고민하고 있었다. 길은 점점 진창이 되고 있었다. 부와 권력을 뽐내는 차들만이 그 곳을 지나갈 수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굉장한 속도로 지나갔다. 마치 그 자체로 매정함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당연히 바퀴들은 엄청난 진흙을 우리에게 튀겼다. 더러운 오물들은 마치 양동이에 담아 퍼붓듯 한가득 우리의 얼굴과 몸에 뿌려졌다. 그 진흙으로 우리는 점점 제 모습과 제 마음을 잃어갔다. 어느새 우리는 다같은 진흙 인간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더이상 나홀로 개체가 아닌 하나의 풍경, 배경이었다. 그렇게 되자 무정하게 지나가던 차들이 우리 앞에 멈추기 시작했다. 좋은 양복에 기름기 좔좔 흐르는 얼굴의 인사들이 내려 보기 좋다면 단일의 진흙이 되어버린 우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국민'이었다. 진흙은 우리의 입을 막고 뇌도 먹어버렸다. 우리는 더이상 스스로 생각할 수 없었고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제야 비로소 '국민'이 되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누구도 우리에게 우산을 씌워주지 않았다. 그들은 그럴 필요가 없음을 잘알고 있었다. 어차피 말없는 국민에게 우산은 사치일 것이었다.

문학은 이런 우리에게 우산이 되어줄 수 있을까? 진흙을 닦아주고 우리가 제 모습과 목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신음이 아니라 비명인 우리의 미처 말이 되지 못한 목소리에 귀기울여줄 수 있을까? 요즘은 그런 마음으로 우리의 문학을 읽는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지금의 젊은 세대의 문학은 과연 어떻게 하고 있을까? 그런 의문으로 '키스와 바나나'를 읽는다. 언젠가 누군가에 대한 기억들로 짜인 태피스트리를. 비가 온다. 세찬 비가 온다. 오로지 하나의 소리만 가득한 세상이다. 사라져버린 새들, 잃어버린 말들과 마음들. 어디선가 둥지를 잃고 홀로 떠도는 그들을 위해 읽는다. 언젠가는 그 말과 마음에 들러붙은 진흙들이 지워지길 바라며 읽는다. 견뎌가는 것. 이것만이 과연 최선일까? 생각하며 읽는다. 질문은 많지만 대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오늘, 그 질문들마저 포기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읽는다. 그렇게 읽는다. 함께 비맞으며 온기를 찾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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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린 1 - 사도세자 이선, 교룡으로 지다
최성현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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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영화 '역린'이 개봉한다. 군대에서 전역하고 복귀한 현빈이 처음으로 택한 작품에다가 '다모'로 유명한 연출가 이재규의 첫 영화 감독작이기도 해서 현재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출연진도 쟁쟁하다. 정조가 가장 신임하는 내관 상책 역은 정재영, 정조를 노리는 살수의 역은 영화 '건축학 개론'에서 납득이로 유명세를 탄 조정석이(아무래도 '더킹 투하츠'의 인연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정조의 숙적인 야심가 정순왕후에는 한지민, 정조의 엄마인 헤경궁 홍씨는 김성령이 맡아 열연한다. 영화는 정조가 즉위한 지 1년이 되는 날인 1777년 7월 28일, 그 '하루'를 담는다. 그 날 밤에 정조는 홀로 책을 읽고 있다가 자객의 침입을 받는다. 실제 역사에서 일어났던 일로 이를 '정유역변'이라 한다. 들려오는 시사회 평은 그리 좋지 않다.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이 영화의 단점은 너무 지나치게 설명적이라는 것이다. 복잡한 등장인물의 관계와 그들의 과거를 설명하는 데 너무 치중해 정작 영화의 집중도를 떨어뜨렸다고 한다.


 원래 원 소스 멀티 유즈로 기획되었던지 원작 소설과 영화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제목은 동일하다. 작가는 최성현. 원작자가 영화 시나리오까지 맡았다. 이름이 어딘가 낯이 익다했더니 예전에 인상 깊게 보았던 만화 '교무의 원' 스토리 작가였다.



 그래서 약간 우려가 없지 않았다. 그 작품도 처음엔 꽤나 독특하면서도 근사한 스토리를 보여주다가 나중에 가서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작가의 특색이라면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그러면서도 그 하나 하나를 모두 실감나는 캐릭터로 빚어낸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저마다 다른 과거, 다른 사연 그리고 다른 신념들을 설득력있게 그려내기에 그들의 갈등 역시 생생하게 다가온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동시에 약점도 된다. 모든 인물에 다 스포트라이트의 몫을 떼어주려다 보니 말해야 할 사연은 많아지고 관계는 복잡해지며 결국 스토리마저 뒤엉키게 될 위험이 생기는 것이다. '교무의 원'이 그 비슷한 과정을 밟았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시사회의 평들도 수긍하게 되는 면이 있다.


 그건 어쩌면 두 권에 걸쳐 하고 있는 이야기를 한 편의 영화에다 다 담으려다 보니 하게 된 고육지책인지도 모르겠다. 등장인물이 많아 관계는 복잡하고 또 등장인물들이 왜 이러는 것인지 그 사연 또한 설명해야 하기에 스토리에 이것 저것 올려놓은 짐들이 많아 그 하중을 이기지 못하는 게 아닐까? 원작을 읽어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다. '교무의원'에서 보여주었던 후반의 혼란스러움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잘 정리되어 있고 나는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바이지만 개연성도 잘 무너지지 않는다.


 아무튼 지금 나온 것은 1권으로 영화 보다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정확히는 '사도세자의 죽음'이다. 이 소설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떻게 해서 그 자리에 있게 되었는 가를 보여준다. 정조의 목숨을 노리는 노론과 어떻게 해서 그런 관계를 갖게 되었는 지를 '사도세자'를 통해서 보여주며 조정혁이 맡은 살수는 또 어떻게 해서 살수로 자라난 것인지를 말해주며 또한 정재영이 맡은 내관 상책은 어떻게 내관이 되었는지를 이 책은 보여준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영화에 나오는 과거의 장면들이 바로 이 1권이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원작 자체는 재밌다. 사도세자가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의 뜻과는 달리 소론을 등용하여 진정한 탕평책을 펼치려 하자 누명을 쓰고 죽는다는 것을 이야기의 주된 가지로 삼고 한 편에서는 정유역변의 단초가 되는 살막(암살단)이 형성되어가는 이야기를 접붙이고 있다. 정조의 이야기는 조선 시대 중 가장 인기 있는 소재로 지금까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나 드라마 '이산'이나 '무사 백동수'등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런 사도세자와 노론의 갈등조차 딱히 새로울 것이 없지만 작가가 자신의 상상력으로 새롭게 첨가한 살막의 이야기가 자못 흥미를 돋운다. 원래 무협 스토리 작가라서 그런지 살막 부분의 이야기는 흡사 무협지를 읽는듯한 맛이 있다. 특히 초반에 나오는 사도세자의 호위 무사 황율과 나중에 살막의 우두머리가 되는 죽장검의 광백이 맞서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 연출의 호흡이 너무도 좋았기 때문에 차라리 이 쪽의 분위기와 이야기를 주된 가지로 삼는 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마저 들었다. 사도세자든, 정조든 그 쪽 중심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이미 많이 들어봤으니까 말이다. 위에서 그렇게 뜨거운 궁중 암투가 벌어질 무렵 정작 밑바닥 민초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것도 좀 색다른 맛이 날 것 같고 의미있을 것 같은데.


 뭐, 이런 아쉬움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내 작은 욕심일 뿐이고 벗하기엔 괜찮다고 보여진다. 그러고 보니 사도세자의 이야기 역시 전혀 새롭지 않은 건 아니다. 일단 늘 영조와 사도세자로 표현되던 것을 그 이름인 이선(사도세자)이나 이금(영조)으로만 계속 부른 것은 참신했고(나름 독자에게 새롭게 들리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아마 2권에서 정조도 내내 '이산'으로 나올 것이다.) 혜경궁 홍씨에 대한 해석도 이채로웠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잘 납득되지 않는 동기라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 지 궁금하다.(잘 납득되지 않는 것은 사도세자 역시 마찬가지다. 운명이 정해졌기에 그런지 인물이 다소 평면적이다. 그가 굳이 아버지와 적대하려는 이유가 개인적으로는 잘 와 닿지 않는다. 좀 세부적인 에피소드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영화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다면 소설이 그것을 명쾌하게 정리해줄 것이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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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자매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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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툭.

 도토리가 떨어진다.

 아빠는 처음으로 본 태아의 사진이 도토리를 꼭 닮았었지 생각하며

 하나를 줍는다.

 진통을 시작한 아내가 딸을 분만하고 있는 사이에...

 아빠는 그 아이에게 '도토리'란 이름을 주었다.


 아내는 환영했다. 하지만 꼭 하나를 더 낳을 것이니 도토리를 나눠서

 돈코와 구리코로 하자고 했다.

 2년 뒤, 아빠는 다시 투명한 가을 햇살 아래서 도토리를 줍는다.


 그렇게 도토리 자매가 되었다.

 아빠 손 안에 가만히 놓여진 두 개의 도토리처럼.



 2010년에 나온 요시모토 바나나의 '도토리 자매'는 이처럼 분리와 결부가 테마인 듯 하다.

태어날 때 땅에 떨어진 도토리처럼 분리되는 상황이 있고 그 아빠가 주은 도토리를 주인공이 평생 지니고 있듯이 누군가에게 혹은 세상에게 '결부'되려는 욕망이 있다.


 소설이 진행될 수록 주인공은 러시아 인형처럼 자꾸만 거듭되는 분리의 상황에 놓인다. 처음엔 엄마와 아빠가 돌아가시고, 그녀를 거둬 준 삼촌 부부와 이모 부부와도 헤어지며 처음엔 계약 비슷하게 돌보게 되었던 친할아버지와도 결국 사별하게 된다. 거기다 같은 도토리 이름을 나눠받았지만 성격은 정반대인, 하지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언니 역시 방안 세계에만 칩거하는 주인공과는 달리 바깥 세상으로만 떠돈다. 그렇게 마치 시소놀이를 하는 것처럼 주인공은 거듭 분리와 결부 사이를 오고간다. 달이 차면 기울듯이 어느 정도 결부가 되었다 싶으면 분리가 오는 형국이다. 그러면서 오똑이처럼 분리와 결부 사이에서 서서히 균형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이 '도토리 자매'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도토리 자매'의 첫 인상은 얼른 2003년에 나왔던 '막다른 골목의 추억'에서의 첫 단편, '유령의 집'을 많이 연상시킨다. 이런 저런 유사한 점이 있지만 일단 먼저 눈에 들어오는 닮은 꼴은 주인공이 가장 결부되고 싶어하는 대상과 처음으로 함께 등장하는 계기가 되는 게 바로 '요리'라는 것. '유령의 집'에서는 주인공이 만든 전골을 애인과 함께 먹었는데, '도토리 자매'에서는 주인공이 만든 '삼계탕'을 언니와 함께 먹는다. 둘 다 혼자 먹기에는 많은 양이다. 양을 덜어줄 여분의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렇게 결부되려는 욕망의 상관물이다. 이 점은 '도토리 자매'의 삼계탕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주인공은 삼계탕 재료를 사기 위해 슈퍼마켓에 들른다. 거기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와 아이를 본다. 아주 평범한 대화였지만 그래서 더욱 그녀의 인상에 남는다. 오래 지속된 관계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평범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주인공은 침대 속에서 여자와 남자가 나누는 대화도 이에 못지 않게 평범하다는 걸 알아차린다. 이제 그녀의 생각은 이런 쪽으로 연상되어 나간다.


 모두들 부모가 그리운 것이다. 그래서 연애에도 그리운 마음을 끌어들인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서도 로맨스를 추구하는 것은 나이가 들어 가면서 부모가 그리운 마음도 더 절실해지기 때문이다.(p. 16 ~ 17)


 남녀의 애정을 부모에 대한 그리움으로 주인공이 치환하는 것은 그 모두가 '함께 있다'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그 '함께 있음'의 가장 원형이 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그녀는 무언가에 이어지고 싶어한다. 누군가 혹은 세계와. 삼계탕은 그 바람의 표현이다. 그건 자신의 삶에 어떤 구심점이 있기를 바라는 소망이다. 위성이 되어 그저 그 궤도를 안정적으로 돌게 되기를 원하는.


 '그리움'은 주인공의 결부되려는 욕망을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녀가 현재 가장 그리워 하는 대상은  최근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다. 왜 그토록 그리워하게 되었나 하면 그 때가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언니와 더불어 흔히 가장 안정적인 도형이라는 삼각형을 완벽하게 이루어 살 수 있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리움의 강도는 누렸던 안정감의 강도에 비례한다. 커다란 그리움은 커다란 안정감을 향한 욕망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주인공의 고백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없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저 당혹스러웠다. 할아버지가 사라지고 정말 사라졌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멍하게 지냈다.

 아침에 불단에 향을 피우고 꽃을 바치고 나면, 할 일이 거의 없었다.

 바지런한 우리에게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다.(p. 37~38)


 '우리'라는 표현을 쓴 만큼 주인공의 언니도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주인공 못지 않게 결부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표현의 방식은 다른데 주인공이 그걸 '그리움'으로 나타낸다면 언니는 연애를 통해 나타낸다. 언니는 참 많은 남자를 만난다. 조금은 극단적인 성격의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상대가 아니면 결혼하기 싫다고 한다. 그래서 연애는 대부분 초기에 끝난다. 언니 역시 완전한 결부에 대한 허기가 있고 잠깐 동안의 연애를 통해 굶주림을 비워낸다.


 이런 식으로 바나나는 소설에서 우리 역시 가지고 있는 타인 혹은 세계에 결부되려는 욕망의 그 표현하는 방식을 주의 깊게도 모두 다뤄간다. 우리는 결부되려는 욕망을 꼭 진짜 있는 존재로 드러내지 않는다. 때로는 진짜로 있지 않은, 환영적인 것으로도 드러낸다. 그렇게 주인공의 그리움은 지금 여기에 있지 않은 대상에 대한 것이므로 환영적 반면, 언니의 연애는 어디까지나 진짜로 존재하는 남자들을 대상으로 하므로 실재적이다. 요시모토 바나나가 굳이 자매를 가져온 것은 이 같은 방식을 다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매는'도토리 자매'라는 홈페이지를 운영한다.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 그 홈페이지로 사연을 보내면 도토리 자매가 답해주는 사이트다. 이 역시 그녀들의 결부되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누군가에게 뭔가 도움이 되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사실 수면 아래엔 할아버지의 상실이 남긴 분리의 여백을 채우고 싶다는 바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외롭고 몸도 둔해져서, 뭐든 상관 없으니까 그 때 일을 떠올리고 싶다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발의 주름과 얇아진 피부를 보고 싶고, 오줌 냄새라도 좋으니까 늙은 사람의 냄새를 맡고 싶다고, 돌봐주고 싶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있어서, 언니도 그런가 싶었기 때문이다.(p. 44)


 하지만 결부되려는 욕망은 주인공의 과거가 잘 보여주듯이 계속 충족될 수 없다. 상실과 헤어짐은 필연이며 언젠가는 '홀로서기'를 각오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 '갇힌 세계'로 부터 그녀들을 끌어낼 필요가 생긴다. 언니는 한국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를 통해 삶의 균형점을 서서히 찾아간다. 실재의 궤적은 벗어나지 않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장 외부에 있을 존재를 끌어들인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다. 환영의 궤적을 벗어나지 않지만 그녀의 입자에서 보자면 가장 외부의 방법으로 균형점을 찾아간다. 그 방법이란 '역전(逆轉)'이다. 지금까지 그녀의 그리움은 실재에서 출발하여 환영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만나 첫사랑이라는 걸 느꼈지만 이후로는 영영 만나지 못했던 아이인 '무기'에 대해서만은 '환영'에서 실재로 나아간다. 어떤 슬픈 꿈을 통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죽음을 희미하게 예감하게 되고 결국 그가 이미 죽어서 세상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 무기와의 재회를 통해 주인공은 균형점을 찾는데 이렇게 보자면 요시모토 바나나가 둘 모두에게 그녀들의 가장 바깥의 것으로써, 그렇게 가장 타자적인 것을 삶의 중심추로 가져다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바나나의 소설에 있어서 이게 처음은 아니다. '유령의 집'에서도 그랬다. 거기에선 연인이 주인공이었다. 주인공 여자는 고인 물처럼 살아간 반면 남자 친구는 흐르는 물처럼 살아갔다. 그렇게 여자는 삶을 고수하는 쪽으로, 남자는 삶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다른 색채를 보였다. 이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대표적인 방식을 모두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통해 도토리 자매들 처럼 균형점을 찾아 가는데 그 가장 계기가 된 것은 남자 친구가 살고 있는 집에 불현듯 출현하는 생전에 그 집에 살았던 노부부의 유령 때문이다. 그래서 제목이 '유령의 집'이다. 그 집에서 어느날 주인공은 그 유령들이 살았던 당시 모습 그대로 일상을 영유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오래 함께 살아온 부부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유의 무심함, 초연함이 거기에 있었다. 주인공은 그 관계의 밀도에 감명받는다. 문득 삶에서 조금 힘을 빼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남자 친구를, 자신에게 있어선 변화를 받아들인다. 유령이라는 가장 타자화된 존재를 통해서.

 '도토리 자매'의 주인공도 다르지 않다. 무기를 다시 찾게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된 무기의 장례식 꿈이 그렇다. 더구나 무기 역시 '유령의 집'의 남자 친구 이와쿠라랑 많이 비슷하다. 이는 또한 이 사이에 존재하는 '사우스포인트의 연인'과도 유사하다. '화와이'라는 가장 먼 남쪽에서 부재하는 '유키히코'를 통해 주인공은 균형점을 찾아간다.



 '막다른 골목의 추억'에서 부터 '사우스포인트의 연인' 그리고 '도토리 자매'. 이 일련의 소설들은 바나나의 관심이 '자신'이라는 경계를 허무는 '타자'에 있으며 바로 거기에 삶에 복원력을 가져다 주는 '치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 문장으로 말하면 삶의 구원은 가장 먼 바다로 부터 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밀려오는 타자의 파도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자신의 경계를 흐물어뜨리며 자신의 영토를 내어주는 해변의 모래사장처럼 말이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처럼, 쾌감과 불쾌감이 다가왔다가는 사라진다. 집에 틀어박히는 시기가 있고 그다음에는 밖으로 나가고 싶은 시기가 반드시 온다. 그 반복은 파도와 같아서, 하염없이 바라만 보거나 그 한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어도, 절대 싫증 나지 않는다. 그것이 살아 있음의 유일한 기쁨이다.(p. 130)


 결국 이렇게 타자를 통하여 삶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건 어디까지나 이 순간에 존재하는 현재를 가장 충실하게 보내고자 하는 마음이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삶이란 미래의 결산을 위해 현재는 그 과정이 될 수 밖에 없는 적금이 아니라 어느 때의 현재든 그 자체로 다 의미있고 가치가 있는 예금이라 여긴다. 결국 추운 겨울이 다가올 것임을 안다면 이 생명력 넘치는 초록의 여름을 할 수 있는 한 마음껏 누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것에 불안하기 보다는 지금 내게 존재하는 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고 한다. 파도 타기를 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아도 파도 타기에 능숙한 자들은 언제나 이렇게 조언한다. '다가올 파도는 신경쓰지 말고 오직 지금 타고 있는 파도에만 집중하라.'고.


 개인적으로 여기에 약간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밝히고 싶지 않다. 이 소설은 2011년의 3.11이 일어나기 전에 나왔다. 현재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고 충실히 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쓸데없이 끼어드는 무분별한 욕망을 자제하게 만드는 순기능이 있다. 대부분 우리의 불안과 힘겨움은 실제로는 내게 별 필요도 없는, 그저 타인의 인정을 구걸하기 위한 양산된 욕망에서 비롯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3. 11 같은, 또 지금의 '세월호' 같은 파국적인 사태 앞에서도 여전히 이러한 삶적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그저 이 순간을 소중히하고 충실히 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아니, 충분함의 범주에 그저 사는 것말고 다른 무언가를 더 집어넣어야 하지 않을까? 아직 이 소설의 바나나는 그걸 경험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경험 후의 바나나를 보고 싶다. 그 때까지 여기에 대한 진짜 대화는 미뤄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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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 김민정 산문
김민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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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도 몰랐고, 어떤 책인지도 몰랐다. 난 제목에 끌렸다. '각설하고,'
이건 어떤 무모함이다.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가 오갔든지 간에 자기 할말은 하겠다는 선언. 하지만 그 무모함이 오만해 보이지 않는 건, 오리무중 속에서 자꾸만 불어나는 말의 지방들을 깔끔하게 빼버리고 해야 할 말만 담백하게 하자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각설하고'는 내 속내를 이야기하겠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이 이전의 말들은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한 예고편에 불과했다는 듯이.

 그래서일까 우승자를 발표하는 순간을 마주한 것처럼 우리는 더욱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 말이 자꾸만 인플레이션 되는 시대에 '각설하고'는 어쩌면 우리의 일상이 되어야 할 말인지도 모른다. 너무 과잉의 말들이 넘쳐나 우리를 홀리려들고 헛갈리게 만들며 길을 잃도록 하니까. 진짜 할 말을 하고 진짜 들어야 할 말만 듣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진짜 진심보다 몇 배의 거짓을 말할 수 밖에 없고 또 들어야 한다. 사는 건 단 하나의 진심을 말하거나 듣기 위해 긴 거짓의 목록을 작성하는 일이니까.

그런 말들의 환영 속에 둘러싸이다 보면 어느 순간 '각설하고'라는 말이 그리워진다. 그렇게 나오는 속내를, 진심을.

 지은이는 시인이다. 그리고 출판사 편집자. 돈이 안되는 시집들을 기획해서 마케팅 담당자로부터 지청구도 자주 듣는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시인들의 삶이란 어떨까 궁금했다. 그들은 내게 천연기념물처럼 보였다. 곧 도래할 종말 앞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존재들. 어쩌면 누구보다 지금 세월의 무게가 무거울 그들이 두 어깨로 어떻게 현실을 떠받치고 살아가는가 궁금했다. 하여 읽었다.

 그런 시인의 산문 모음이라 했다. 어디 어디 지면에 발표한 짧은 글들. 많아봐야 3페이지 안에 다 들어가는 말들. 짧은 대화를 나누듯 읽으면 되니 부담은 병아리 눈꼽만큼. 받자마자 간을 보듯 읽었는데 이런! 그만둘 수 없었다. 역시 시인의 문장이구나 감탄사가 무심코 나왔다. 말들이 빗물에 새로이 목욕을 한 조약들처럼 반짝반짝 윤이 났다. 손 안에 넣고 쥐면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질 것 같은 말들. 거기에 취해 읽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 그렇게 이 책은 내 시간을 예기치도 않게 홀라당 먹어버렸다. 간장게장이 밥도둑이라면 이 책은 시간도둑이라 할 만해, 아무렴. 때로는 이런 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거창한 깨달음도 뭔가 삶에 써먹을만한 지식 같은 것도 주지 않지만(아니, 있었을지도?) 나와 비슷한 것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어디선가 이렇게나 맑은 언어로 길어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기분좋게 읽고 가볍게 권할 수도 있는 책이다.
 각설하고, 지인의 곁에 살짝 놔둬 보는 것은 어떨까 싶기도 하다.
 책임은 못짐, AS도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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