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 탄두리
에르네스트 판 데르 크바스트 지음, 지명숙 옮김 / 비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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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감을 크게 만들고 싶어한다. 

 무대 중앙에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길 원하지 그 바깥 어둠에 가려진 채로 조용히 박수만 치는 관객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네델란드 작가 에른스트 환데르 크봐스트의 소설, '마마 탄두리'는 이런 존재감에 대한 소설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여긴다. '마마 탄두리'는 작가의 엄마를 가리킨다. 이 소설은 실제 엄마를 그대로 형상화한 자전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그녀는 인도 사람이다. 이뤄지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을 간직한 채, 간호사로 네델란드에 왔다가 작가의 아빠가 첫 눈에 반하여 오랫동안 구애를 한 끝에 결혼하여 네델란드에 머무르게 되었다. 보통 이방인은 이 곳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다른 이보다 더 타인에 대해 신경쓰며 그 사회에 잘 섞여들기 위해 가급적 자신의 존재감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편인데, 우리의 마마 탄두리는 전혀 그렇지 않다. 어디에 있든 자신의 고향 땅이나 다름없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존재감을 마치 확성기를 입에 대고 부는 것처럼 마음껏 과시하는 것이다. 주로 인도 전통 요리를 만들 때 사용하는 화덕을 가리키는 '탄두리'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작 두 개의 여행 가방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네델란드로 왔으면서도 온 동네 사람들이 죄다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탄두라 화덕에 닭고기를 구워대는 게 바로 그녀인 것이다. 소설은 아들인 작가가 듣거나 보았던, 엄마가 자신의 존재감을 남들에겐 민폐가 되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한껏 발산하는 모습을 다양한 에피소드로 담아낸다. 실제로 만난다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것이지만 소설이 가져다 주는 적당한 거리가 유머를 자아내기도 한다.




 어쨌든 마마 탄두리는 그런 식으로 평생 자신의 존재감을 가감없이 나타내며 살아왔다.

 네델란드인 아버지는 전립선 암의 권위자로 저명한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엄마 앞에서 꼼짝 못하며 거의 그림자처럼 살아왔다. 작가는 그렇게 존재감 강한 엄마와 별로 없는 아빠 사이에 있었다. 이건 지적 장애 탓으로 어디로 가든 엄마와 똑같이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큰 형, 아쉬르바트와 얌전하여 아빠만큼 자신의 존재감을 그닥 드러내지 않는 둘째 형 요한 사이이기도 했다. 작가는 원래 아주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시도 때도 없이 고래고래 울부짖어 인도 가족들이 '투투 베이비'라는 별명마저 지어줄 만큼. 그렇게 그 또한 원래는 엄마의 궤도 위에 있을 존재였으나 두 사람을 통해 점점 거기서 이탈해 나간다. 하나는 볼리우드 배우인 샤르마 이모부고 다른 하나는 헤르버르트 삼촌이다. 샤르마 이모부는 수없이 많은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진 못했지만 그 배후에 있더라도 누구보다 더 크게 자신의 존재감을 발휘한 인물이다. 그것을 통해 작가는 굳이 자신이 내세우지 않아도 그렇게 누군가의 등 뒤에서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존재감을 보란듯이 내세우는 사람 이상으로 크게 나타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건 아빠를 다시 보게 되는 길이 되기도 했다. 엄마에 가려 한없이 작은 존재감을 가진 아빠였지만 사실 엄마가 일으킨 모든 소동과 분란의 뒷감당을 중재하고 해결한 사람은 정작 아빠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테오에게 임금을 계산해주었다. 그동안 많은 인부들에게 그렇게 뒷손질을 해온 것처럼. 그는 노상 어머니와 칠공들, 배관공들, 목수들 그리고 청부업자들 사이에 끼어들어 쌍방을 화해시키곤 했다. 법정 소송으로까지 끌고 간 사건도 있었다. 아버지는 전립선암 연구의 많은 시간을 이런 일들에 허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p. 250 ~ 251)


 존재감은 그렇게 말이 아닌 행동으로, 성과가 아닌 역사로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란 걸, 작가는 깨달은 것이다. 헤르버트르 삼촌 또한 존재감은 타인의 인정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나다워질 때 형성되는 것이라는 걸 알게 한다. 누가 정해준 삶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구축한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나갈 때 자기 존재감이란 영토는 제국이 되는 것이라고. 


 작가는 이 두 사람이 열어준 문을 통해 엄마의 식민지에서 나올 수 있었고 작가라는, 그의 입장에선 독립국 선언이라고 해도 좋을, 정체성을 드디어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그토록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냈지만 그 끝에 결국 무엇이 있는지 엄마보다 더 강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자스린 이모를 통해 적나라하게 목격한 탓이기도 했다. 그건 바로 슬픔이다. 우리가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동기의 궁극엔 상대방의 인정을 통한 타인과의 연결에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일방적 드러냄을 연결은 커녕 오히려 고립만 심화시킬 뿐이었다. 고독의 우리에 유폐시켜서 나날이 자기가 바라는 것과 전혀 다르게 자꾸만 줄어드는 자신의 존재감을 마주하게 할 따름이었다. 남는 것은 처량한 기만이었다. 빈 주머니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마치 그런 일이 전혀 없는 양 더욱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는 것에서 진하게 풍겨 오는...


 나는 침대로 가서 그녀 곁에 앉아 그녀의 얼굴을 본다. 눈 아래 거무스름한 반점들, 그녀에게도 있는 솜털들. 그 순간, 나는 내가 느낀 아픔이 무엇이었는지 깨닫는다. 슬픔. 마치 우리 어머니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아버지도 자식들도 없는 외톨이 어머니를. 마무리되지 않은 텅 빈 집에서의 고독. 그녀의 무한대에 가까운 자존심이 파놓은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누구도 그녀를 위해 해결해주지 않는 문제들 속으로 점점 더 깊게 가라앉는 일.(p. 256)


 작가는 그 애처로움을 확인하고 '마마 탄두리'의 세계에서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마마 탄두리'는 어쩌면 우리도 늘 하고 있을 고민과 맞닿아 있다. 사실 '마마 탄두리'와 같은 유혹을 많이 받기도 한다. 그렇지 않아도 SNS가 발달하고 자신의 삶을 더욱 손쉽게 타인에게 노출할 수 있게 되면서 더욱 커져버린 유혹이다. 오죽하면 지금 사회를 과시 사회라고도 부르겠는가. 그런데 바깥에 드러낼 수 있는 것들은 언제나 위계 질서를 가질 수밖에 없고 가장 꼭대기에 있지 않는 이상 늘 상대적으로 불만족과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결국 한없이 엷어져만 가는 자신의 존재감을 체득한 가운데 어떻게 하면 나도 저 사람처럼 강한 존재감을 가질 수 있을까 고뇌하게 될 뿐이다. 악순환이다. 


 당신도 이런 상황을 겪었다면 '마마 탄두리'는 작가가 몸소 그랬듯, 그 악순환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기대하는 방식은 아닐 수 있다. 이 책이 정말 권하고자 하는 것은 샤르마 이모부와 헤르버르트 삼촌처럼 존재감에 대한 집착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이니까 말이다. 과시가 아니라 고유한 내면에 충실한 가운데 점차로 다듬어지는 나를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 홀로 존재하는 개성이 아니라 타인과 공존하는 가운데 여러가지 색깔 중 하나로 고요하게 드러나는 개성을 소중히 여기는 것.

 '마마 탄두리'는 바로 그런 것들에 당신이 군침을 흘리도록 유혹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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