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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도둑 가족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6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평점 :
가족이란 무엇일까?
세상이 점점 살기가 어려워질수록 우리는 그저 믿을 곳은 가족밖에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러나 이번 추석과 같은 명절 때 함께 있다 보면 가족처럼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도 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이라면 한바탕 퍼부어주었을 일도 가족이란 이유로 꾹 참고, 남이라면 거침없이 하기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일도 가족이란 이유로 어쩔 수 없이 희생을 감수할 때 마음 속 한 켠에 기타노 다케시가 슬며시 나타나 기분나쁜 웃음을 지으면서 이렇게 속삭이는 게 들려오는 것이다.
"거 봐, 내가 뭐랬어? 가족이란 건 남이 안 보면 슬쩍 갖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했잖아."
알다가도 모를 존재인 가족.
생각해 보면 이제는 일본 영화의 거장이라고 평가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내내 가족에 대해 말해왔다. 그 시작점이라고 할만한 것은 아무래도 '아무도 모른다'(개인적으로 두 번은 절대 볼 수 없는 두 편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타카하타 이사오의 '반딧불이의 묘'. 나는 정말 이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오빠가 없을 때 어린 여동생 혼자 하루를 보내는 장면을 보며 엉엉 울었다. 그래서 도저히 두 번은 볼 마음이 안 난다. 그런데 내가 이 얘기를 왜 여기서 하고 있담?)일 것이지만 본격적인 개진은, 나 역시 그의 최고작이라 평가하는 '걸어도 걸어도'가 될 것이다. 그 때부터 그는 가족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그걸 이렇게 저렇게 여러 방향으로 굴러보며 고찰해왔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나온, 칸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좀도둑 가족'은 뭐랄까 지금까지 가족에 대해 말해왔던 것을 좀 집대성한 느낌이다. 나는 그가 소설까지 쓴 줄은 몰랐는데, 이번에 영화의 바탕이 되었던 소설이 나왔다. 어느 것이 먼저인 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영상으로 잘 담아낼 수 없는 마음의 속살들이 선명하게 나와 있어 좋았다. 가족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보다 분명하게 헤아릴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감독의 생각이겠지만.
아무튼 '좀도둑 가족'이 전하는 것을 간단히 말하자면 이것이다. 가족은 딱히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좋다. 그렇게 태어났다고 해서 가족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가족은 결과가 아니며 과정 속에 형성되며 그래서 선택으로도 얼마든지 가족은 가능하다. 이런 걸 보여주는 '좀도둑 가족'의 구성은 이러하다. 할머니 하쓰에(78세), 아들이자 집안의 가장인 오사무(47세)와 그의 아내 노부요(38세). 큰 딸인 아키(21세)와 둘째 아들인 쇼타(11세). 그리고 오사무가 데려와 가족이 되어버린 린(5)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이 가족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낸다.
첫 장면은 오사무가 아들 쇼타와 함께 평소 자주 훔치는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는 광경이다. 아버지 오사무는 아들 앞에서 물건 훔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잘 훔친다면서 자랑하는데 그건 그가 평소 가지고 있는 '가게에 진열된 상품은 아직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라는 신념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의 생각에 물들어 어린 쇼타 역시 거리낌 없이 물건들을 슬쩍한다. 아니, 가족 모두가 필요한 것은 훔쳐서 마련하는 걸 자연스러워 하기에 처음엔 절로 '뭐, 이런 가족이 다 있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별종으로써의 가족 모습은 그들이 사는 공간으로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그들의 집은 한창 재개발된 아파트 단지에 마치 고립된 섬처럼 존재한다. 주위는 온통 유행의 첨단을 걷는 신축 아파트이지만, 그들의 집만은 오래 전 처음 지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다. 그만큼 시대에 뒤떨어져 있으며 또한 그만큼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지만 읽다보면 점점 더 이 가족만큼 가족다운 가족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당장 내일 먹을 것이 늘 걱정이고 벽장 속에서 잠자야 하는 쇼타나 할머니 하쓰에와 늘 같이 잠자야만 하는 아키가 잘 보여주듯 한없이 빈궁한 삶이라 어쩔 수 없이 사소한 다툼이 있지만 그보다 더 따스하고 강한 유대감이 서로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건 린이라는 존재를 통해 한층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진짜 가족과 살았지만 가족에게 심한 학대를 당했던 린은 진짜 가족이 아닌 이 가족에게서 오히려 진짜 딸처럼 사랑을 받는 것이다. 이걸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를 통해 형성된다'라고.
뒤이어 더 커다란 가족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좀도둑 가족'이 전하고픈 진짜 주제라는 걸 확신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가족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르게 누구도 혈연으로 이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스포일러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기에 그만 밝히고 말았다. 여하튼, 오사무는 하쓰에의 아들이 아니다. 노부요는 오사무와 정식으로 혼인한 적이 없다. 아키 역시 하쓰에가 데려온 존재다. 쇼타는 오사무가 자동차에 갇힌 그를 꺼내 데려왔다. 이처럼 모두가 린과 같았다. 그들 모두 혈연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가족이란 자리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라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제목처럼 그렇게 가족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가족의 모습은 그 어떤 가족보다 더 가족답다. 따스하고 끈끈하다. 그런데 혼자 떼놓고 보면 그렇지 못하다. 믿음이 가지 않고 뭔가 모자라며 어딘가 어긋나 있다. 대표적으로 하쓰에가 그러하다. 하쓰에는 자신을 버린 남편의 집을 기일마다 찾아가 거기 살고 있는 전남편 아들 부부를 곤란하게 만들고 돈을 뜯어낸다. 그렇게 자신에게 큰 상처를 입힌 존재에게 복수한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어딘가 낯이 익다. 맞다. '걸어도 걸어도'에서 자기 아들을 죽인 이를 아들의 기일마다 억지로 불러선 곤란을 겪게 했던 어머니의 모습이다.(공교롭게도 이 때 어머니를 연기한 배우와 하쓰에를 연기한 배우가 같다. 얼마 전 작고한 키키 키린이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포스터.
이처럼 혼자는 비틀어져 있다. 강하지 못하다. 린이 그렇듯 말이다.
그런 그들을 오늘까지 버티게 만들고 괴물이 아니라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은 '함께'라는 경험, 그 속에서 절로 형성되어갔던 '가족'이었다.
존재가 아니라 선택으로 형성되는 가족.
'좀도둑 가족'은 이런 가족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잔잔한 감동 속에 보여준다. 물론 거기엔 노부요가 린을 위해 생계를 위해서 꼭 해야 했던 일을 과감하게 포기한 것처럼 결단한 것에 상응하는 정도의 사랑과 희생이 있어야 한다. 아마도 이런 것을 우리는 흔히 '책임'이라 이를 것이다. 그러므로 '좀도둑 가족'은 이런 것도 보여준다고 하겠다. 권리가 주가 아니라 책임이 주가 되는 가족을. 그리고 그럴 때야 말로 진짜 가족이라는 것을.
이런 점 때문에 나는 '좀도둑 가족'이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지금까지 영화를 통해 '가족'에 대해 사유했던 것의 집대성이라 말하고 싶다. 그리고 집대성 끝에 내놓은 가족에 대한 그의 생각은 꽤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현재 일본 사회에 보내는 메세지라고도 여겨진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 사회를 두고 자폐의 사회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 마디로 일본 사회가 너무 폐쇄적이라 타자라는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일본 사회는 타자의 존재에 대해 그걸 변화의 계기로 받아들이고 헤아리려 노력하기 보다는 위기로 단정하고 배척하여 자신의 것만 고수한다는 의미다. 그런 일본 사회의 모습은 이런 말을 하는 것과 같다.
'선택은 무슨! 존재가 전부다!'
현재 일본 우익 정부는 이것을 노골적으로 지향하고 있다.
그들이 '좀도둑 가족' 영화에 대해 히스테리에 가까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천명하고 있는 것과 완전히 반대의 것을 말하는 작품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일본 정부만이 아니다. 존재를 모든 것으로 여기는 움직임은 전세계에 나타나고 있다. 유럽에는 이주자들에 대한 차별을 대놓고 나타내는 우익 세력들이 점점 더 커지고 있으며 인종과 종교 그리고 성별에 따른 적대도 심해지고 있다. 마치 많은 이들이 태어나자마자 모든 것이 결정되어버리는 세상을 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미 인류의 역사가 저멀리 떠밀어 보낸 것을 다시 불러들이려고 하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좀도둑 가족이 살았던 시대에 뒤쳐져 보였던 공간은 거꾸로 가장 시대를 앞서 나가는 현장으로 해석되어야 하리라.) 그런 시대의 움직임에 대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좀도둑 가족'은 반대의 말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존재가 아니라 선택이라고.
존재는 과정과 행위 그리고 책임의 분여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라고.
아마도 이런 진심이 통했기에 '좀도둑 가족'이 황금종려상을 탄 게 아닐까 싶다. 나도 여기에 지지의 한 표를 보태고 싶다. 앞으로 어떤 세상이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압도적으로 짓누르는 숨막히는 세상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존재가 전부였던 중세의 어둠을 몰아냈던 르네상스의 빛은 어디까지나 인간은 태어난 모습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신념의 불길에서 나온 것이었다. 더 큰 어둠이 몰려오기 전에 '좀도둑 가족'이 소지(燒紙)가 되어서라도 빛을 더 밝혔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