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중력의 사람들
발레리아 루이셀리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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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릇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무게를 지닌다. 무게는 중력의 반향이다. 존재는 중력의 자장 안에서 실존을 이룬다. 유령은 둥둥 떠다닌다. 그들에겐 무게가 없다. 중력의 자장을 벗어나 있다. 유령은 무중력의 존재다. 실수가 아닌 허수의 존재다. 실용주의에 물든 우리들은 실존이 아닌 이런 존재들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유령은 그저 우리에게 불안과 공포만 가져다 줄 뿐, 실제 사는 데는 아무 도움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죽음을 인식시키고 영원히 살 것만 같은 우리들의 생각에 찬물을 끼얹으며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에 엄연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때문이다. 근대의 역사란 죽음을 생활에서 몰아내는 역사였다. 중세엔 묘지들이 마을의 중심인 교회 옆에 있었지만, 근대가 되면서 죽음을 연상시키는 묘지들은 쉽게 찾아갈 수 없는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공동묘지가 그렇듯이. 중세는 '메멘토 모리'가 유행어였고 삶은 죽음을 통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이었지만, 근대 이후 죽음은 오로지 피해야만 할 것이 되었고 느닷없는 종결로 황망한 아픔만 가져다 줄 뿐인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죽음의 잔영인 유령도 그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 햄릿의 유령과 70년대 미국의 대표적인 괴담인 아미타빌의 유령은 얼마나 다른가? 아미타빌 유령은 오직 선별과 배쳑을 통해 형성된 근대 생활 방식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햄릿의 유령은 체제가 은폐한 진실을 알려주는 진실의 목소리였으나 아미타빌의 유령은 그저 충격과 공포만 있는 괴물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다시금 햄릿의 유령으로 돌아가려는 작품이 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가장 독창적이고 지적이며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평가받는 멕시코 여성 작가 발레리아 루이셀리가 처음으로 쓴 장편, '무중력의 사람들'이다. 마치 작가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여성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는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편집자다. 그녀가 다니는 출판사는 아주 영세한 규모로 잘 알려지지 않은 라틴 아메리카 작가를 발굴하는 것을 주된 업무로 한다. 그것을 위해 그녀는 매일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케케묵은 먼지 가득한 장서들을 뒤진다. 망각이라는 지층 저 아래 묻혀버린 작가라는 존재들 사이를 떠돌아다닌다는 점에서 그녀에게 도서관이란 묘지나 다름없다. 그는 늘 덧없이 사라져간 삶들과 가까이 있고 때문에 유령은 친숙한 존재다. 아니, 그녀 스스로 죽음을 바라고 있다. 아무런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없는 그녀에게 자신의 실존이란 그저 뜻없이 배회하고 있는 유령인 것만 같아서 차라리 이럴거면 완전한 종지부를 찍고 싶은 것이다. 그녀가 멕시코 태생의 무명 시인 오웬이 살았다는 건물 옥상에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죽은 나무'에 마음이 꽂혀서는 몰래 집으로 가져오기까지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그녀의 염원을 나타낸다. 그녀는 어느 날 자신의 상사 화이트에게서 시인 에즈라 파운드 일화를 듣는다. 지하철에서 얼마 전 죽은 친구의 유령을 우연히 보게 된 그는 별안간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삶의 절대적인 허무를 절감하는데, 그렇게 자기 발 밑으로 벌어진 공허의 싱크홀 위에서 그는 거기로 빠지지 않기 위해 시를 쓰는 것으로 버틴다. 바로 그것이 그녀에게 영감을 주어, 썰물의 해변에 서 있는 것과도 같이 발 아래로 쓸려가는 모래처럼 차츰 붕괴되어가는 자신의 삶을 글쓰기로 지탱할 생각을 한다. 그녀는 오웬이란 유령에 대해 쓰고 그것이 자기 삶에 남긴 여파를 기록한다. 그 과정의 채록이 바로 '무중력의 사람들' 전체 이야기다. 유령이 저 바깥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령이 중심이고 삶이 그것을 기점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그렇지만 이 소설은 우리에게 익숙한 스타일로 전개되지 않는다. 일관된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며 많고도 얼른 종잡을 수 없는 다양한 이야기로 산포된다. 주인공의 실제 삶과 허구의 이야기가 경계없이 뒤섞이며 주인공의 실제 경험 또한 과연 진실인지 아니면 꾸며낸 것인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어느 것이 실제이고 어느 것이 허구인지 가늠하는 기준은 작중 인물이 실존의 무게를 지닐 때다. 작가는 독자에게 그 무게를 느끼게 하기 위해 등장인물이 우리처럼 땅을 단단히 발로 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여러 설정을 한다. 개인의 역사를 만들고 땀내가 느껴질만큼 그의 일상을 세부적으로 형성한다. 이 소설엔 그런 게 느슨하거나 아예 없다. 뚜렷한 상황 설명 없이 그저 목소리로만 남아 다른 이야기 중간에 삽입된다. 마치 유령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출현하는 것처럼. 실존을 이루는 배경은 점점 사라지고 우리는 어느새 라디오를 듣는 것처럼 목소리만이 전부인 세계에 처하게 된다. 유령들의 영토로.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유배인 것은 아니다. 주인공이 글쓰기를 통해 그런 세상을 창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란 주체가 되는 행위이다. 삶 속에서 우리의 주체란 온전히 우리가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규격으로 만들어 놓은 주체란 옷에 우리의 몸을 억지로 끼워맞추는 것에 불과하다. 일상에서 느끼는 우리의 답답함과 목마름은 바로 거기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지금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은 아니라는 것에서 말이다. 그런데 글쓰기는 온전한 나로 있게 한다. 남이 규정한 내가 아닌, 나 스스로 고유한 나를 정립하는 여정이 된다. 그래서 소설에서 글을 통해 창조된 유령들의 대지는 비로소 그녀가 진정한 주체로 주권자가 되는 국가라고 해야 하리라. 중력이라는 외부가 부여한 실존이 아니라, 자신이 실존을 부여하며 그로 인해 의미와 진리가 형성되는 게토. 소설의 세계는 그렇게 일변한다. 이를 통해 발레리아 루이셀리는 햄릿의 유령처럼 유령이 불안과 공포의 징후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재단하고 규정하는 체제가 숨긴 진실을 드러내고 그것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만드는 새로운 목소리로 바라보고 그것을 자신의 소설 속에서 충실히 재현한다. 허구가 그저 무용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 숨결이 되고 진짜 자신이 될 수 있는 거름이라는 것을 말이다. 문득 우리가 소설을 즐겨 읽게 되는 것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단순히 이야기가 주는 재미의 탐닉이 아니라 유령과 허구에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있기에.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허구의 이야기가 쾌락의 대상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산에 오를 때마다 실존의 잔영이지만 온전히 내 것은 아닌 메아리를 만들고 듣는 것을 즐겨하는 것과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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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보쟁글스
올리비에 부르도 지음, 이승재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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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부터 실례인지 모르겠지만, 먼저 질문이 있다. 혹시 팀 버튼의 영화 '빅 피쉬'를 좋아하시는지? 물론 아예 영화 자체를 못 보신 분들도 있고, 2003년에 나왔으니 봤어도 내용이 전혀 기억이 안 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은 잠시 제쳐두고, 오직 영화를 아시고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이 소설 '미스터 보쟁글스'도 정말 좋아할 것이라고. 그리고 이 두 작품이 다 마음에 드신다면 당신은 나의 동지(同志)라고.(물론 이 자격은 얼마든지 사양하셔도 된다.)



 '빅 피쉬'와 '보쟁글스'는, 읽어보면 바로 아시겠지만 비슷한 점이 많다. 한 단어로 말하라면, 이렇게 표현하겠다. '상상의 전복'이라고! 해산물 전복(全鰒)이 아니라 뒤집는다는 뜻의 전복(顚覆)이다.


 '빅 피쉬'는 허풍선이 남작의 부활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허풍을 떠는 아버지가 주인공인 영화다. 아들은 처음엔 아버지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현실이라 믿지만, 점점 자라면서 그것이 결국 허풍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와의 관계마저 소원해진다. 영화는 그런 아들이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하려 부모님 집으로 오는 것에서 시작된다. 영화는 주의깊게 그런 아들의 귀환이 현실 세상에서, 아버지가 주관하는 환상 세계로의 전입임을 표현한다. 그러자 다시금 아버지의 거짓말이 생명력을 얻고, 아들은 아버지가 말한 것이 정녕 환상인지 아니면 진실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 아버지 최후의 순간 제대로 목도하게 된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결코 환상이 아니었음을. 그렇게 영화는 상상에게 최종 승리를 건네주며 끝마친다.


 '보쟁글스'는 최종 승리 따윈 없지만, 상상과 현실이 치열하게 대립한다는 점에서 '빅 피쉬'와 맥을 같이 한다. 소설은 '빅 피쉬'와 마찬가지로 아직 아이인 아들이 화자 역할을 맡는다. 아들은 아직 미성년이란 점에서 더욱 두 세계 사이에 걸쳐 있는 존재라는 게 두드러지는데, 그 두 세계란 다름아닌 그의 가족이 중심을 이루는 환상 세계와 학교가 중심이 되는 현실 세계다. 여기서의 환상이란, 문자 그대로의 환상은 아니다. 정말은 작위적인 환상이다. 즉 주인공의 가족들이 현실 따위 가볍게 무시하고 자신이 창조한 환상에 푹 빠져 그 환상을 진짜 현실로 여긴다는 의미다. 이것은 그들이 어리석어서도, 미쳤어도 아니다. 오직 자신들의 투철한 신념에 따른 결과일 뿐. 그들은 상상과 현실 사이엔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마찬가지로 거짓 역시 진실과 얼마든지 등가 교환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 그들의 상상이 그들에겐 곧 진정한 현실이라는 말이다.


 반면 학교는 정확히 그와 반대다. 아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계를 뒷받침하는 질서는 학교에서 아무런 힘을 못쓴다. 아들은 곧 거짓말쟁이가 되고 정신 나간 녀석이 된다. 가족 사이에선 왕자님이나, 학교에선 얼간이에 불과하다. 매일 마다 다양하게 바뀌는 어머니의 이름이, 학교에선 오로지 하나의 이름으로 고정되듯이, 가족에선 온갖 거짓과 상상으로 풍성했던 현실도 학교에선 생선 가시처럼 좁고 종잇장처럼 얄팍해져 버린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이해하는데 딱 도움이 될만한 책이 있다. 바로 존 버닝햄의 그림책, '지각대장 존'이다. 



아침 학교 등교길에선 자신의 상상 속에서 존재감이 한없이 컸던 존이 현실 질서를 뜻하는 학교에 편입되자 더없이 작고 초라해져 버리는 모습은 그대로 '미스터 보쟁글스'의 아들과 같다. 그래서 아들은 이 두 세계의 충돌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이제 아들의 부모는 선택을 해야 한다. 상상이냐, 현실이냐? 무엇을 택할 것 같은가? 나는 바로 이 선택 때문에 이 소설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올해의 인상적인 소설 중 한 편으로 기꺼이 꼽고 싶을 정도다.


 부모는 상상을 택한다. 아들이 학교를 당장 그만두게 하는 것이다. '미스터 보쟁글스'는 이렇게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 기꺼이 상상의 구름 속으로 뛰어드는 소설이다. 여기서는 현실이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현실 세계에선 상상이 압도 당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 소설에선 현실이 오히려 상상에게 압도된다. 물론 현실이 상상을 가만 내버려두는 것은 아니다. 세금으로 역습을 감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조차 상상은 굳건히 자리를 보전하며, 성인이 된 아들은 기꺼이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려 한다. '빅 피쉬'의 아들과 똑같이.


 '미스터 보쟁글스'는 원래 니나 시몬의 노래 제목으로, 거기서는 고독과 피로에 찌들어 핏기라곤 하나도 없는 현실에 춤으로 기분 좋은 혈색을 되찾아 주는 존재다. 경쾌한 스텝으로 단조로운 일상에 리듬을 주고, 율동으로 묘지의 침묵만이 존재하는 삶에 만발한 화원의 생기와 숲의 활력을 만드는 존재인 것이다. 바로 상상이 하는 일의 은유다. 우리는 언제부터 거짓을 그냥 거짓으로만 생각했을까? 왜 거짓이 지닌 다른 가능성, 이 꽉 막히고 무조음의 현실 세계에 창문을 만들어 다른 세상을 엿보게 하며, 다양한 변주의 선율을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까? 상상 없는 현실은 그저 한없이 초라하고 빈약할 뿐인데.


 '미스터 보쟁글스'는 어느새 우리가 잊었거나 외면해 버렸던 상상의 힘을 다시금 복권시키려 한다. 그리고 설득한다. 기꺼이 그 힘에 도취되어도 좋다고. 그런 의미에서 '미스터 보쟁글스'를 한 번 더 정의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상상의 전복(全福)'이라고. 이 전복은 해산물도, 뒤집는다도 아니다. 완전한 행복을 뜻하는 전복(全福)이다.



 p.s 원래는 '상상의 전복(顚覆)' 뒤에 가스통 바슐라르나 쥘베르 뒤랑이 말한 상상의 힘에 대하여 죽 썼지만 본말전도일 정도로 쓸데없이 사설만 길어져 생략하고 말았다. 굳이 이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혹시 상상이 어떤 힘과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이 두 분 학자의 안내와 도움을 받아보시라는 뜻에서다. 말하자면, 동지의 배려(同志)랄까. (그 자격을 사양하셨다면 포교의 일환이라 생각하셔도 무방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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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3 0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3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쩌다 대가족, 오늘만은 무사히!
나카지마 교코 지음, 승미 옮김 / 예담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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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카지마 교코의 '어쩌다 대가족, 오늘만은 무사히'를 읽었습니다. 딱히 누가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 가족의 가장 류타로 입장에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네요. 그는 70대의 전직 치과 의사로, 지금은 현직에서 물러나 아내 하루코와 함께 느긋하게 노후를 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근심거리가 하나 있는데요. 그건 바로 막내이자 장남인 가쓰로 입니다. 가쓰로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 서른인 지금까지 내내 방에만 칩거하고 있는, 흔히 말하는 히키코모리 입니다. 류타로는 그런 가쓰로를 자기 인생의 오점이라 여기고 있지요. 늘 생각하는 것은 하루라도 빨리 집에서 내쫓고 싶다 뿐입니다. 하지만 막상 가쓰로와 얼굴을 마주하면 그 말이 잘 안 나옵니다. 그래서 '내일은, 내일은...' 하면서 뒤로 미루기만 하고 있지요. 그러나 곧 그것마저 약과에 불과한 상황이 류타로에게 닥쳐오고 맙니다. 가쓰로의 두 누나들이, 그러니까 출가시켰던 그 딸들이 갑자기 모조리 이제 집에서 살겠다면서 들어온 것입니다. 첫째 딸, 이쓰코는 남편의 사업이 망했어요. 그래서 모든 걸 잃었고 가족 모두가 갈 곳이라는고는 아버지 집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둘째 도모에는 이혼을 했습니다. 그토록 아이를 가지려 노력했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그 때문에 부부 사이도 소원해진지 오래여서 그만 20살의 개그맨과 잠깐 바람을 폈는데 그것이 결국 이혼으로 이어지고만 거죠. 도모에는 설상가상으로 임신까지 해버렸는데요. 남편과는 그렇게도 생기지 않던 아이가 잠깐의 외로움을 달래려 만났던 남자와는 단번에 생겨버렸으니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죠. 하지만 진짜 아이러니는 류타로와 하루코입니다. 이제 좀 자녀 부양에서 벗어나 그동안 못했던 것을 하며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려 하는데 느닷없이 다시 또 자식들에게 치이게 되었으니 말이죠. 그것을 대변하듯, 부부의 침실까지 자식들에게 내어줬습니다. 변화는 급격하게 일어납니다. 지금까지의 조용한 일상은 더이상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집안 내 사람들이 늘어난만큼 그들이 만들어내는 바람으로 류타로와 하루코의 일상은 정말 바람 잘 날이 없게 되었으니까. 류타로가 입버릇처럼 내뱉는 이탈리아어, 'Troppo tardi'의 뜻처럼, 그가 바라는 노후를 즐기기엔 이미 늦어버린 것이죠.


 소설은 2008년에 나왔습니다. 2007년에 미국에서 일어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여파로 일본이 경제적으로 참 어려웠던 시기에 쓰여진 소설인 것입니다. 당시 일본엔 류타로 가족처럼 갑자기 당하게 된 파산, 주거지와 늘어난 생활비의 압박 때문에 자녀들이 부모의 집으로 들어가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걸 일본에서는 '불황형 대가족'이라 부르기도 했다는군요. 바로 그런 상황을 소설은 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다 대가족'은 한 시대의 단면을 그린 세태 소설이라 할 수 있겠네요. 라고 했지만, 이것은 100% 제 창작. 원래는 편집부가 나카지마 교코에게 대가족 이야기를 하나 주문해서, 현대 일본에서 대가족이 생길 만한 상황을 상정하다 보니 이렇게 쓰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역자 후기에서.


 그럼,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떨까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뚜렷한 경향은 1인 가구의 증가 입니다. 지금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7% 정도 된다고 해요. 2020년에는 무려 30%에 육박하게 될 것이란 예측도 있더군요. 지금 젊은 세대가 스스로 '오포세대'라고 한다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죠. 하지만 갈수록 어려워지는 우리나라 경제 상황이 이것마저 어렵게 만들지 않을까 합니다. 소득 대비 주거 비용이 계속 치솟고 있는 데다, 물가 대비 소득 격감으로 아무래도 독립에 따르는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되면 어쩌겠어요?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부모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야죠, 뭐. '캥거루 가족'은 부모의 자식 사랑이 넘쳐서가 아니라, 이렇게 점점 더 암흑의 핵심 가까이 가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이 가져온 결과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 상상을 하면서 읽으니 결코 남의 이야기로 다가오지 않더군요. 저야 물론, 현재는 독립 유지 상태 입니다만 앞으로도 죽 그렇게 되리라 섣불리 장담할 수는 없죠. 인생엔 언제나 듣도 보도 못한 반전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요. 만약 내가 그런 상황이 된다면 우리 집은 어떨까 상상하니 조금은 더 소설 속 상황에 몰입하게 되더군요.


 류타로 가족의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자면 암담 하기가 이를 데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카지마 교코는 이전에 우리나라에 나온 나오키 수상작 '작은 집'이 그랬듯이 소설의 분위기를 전혀 어둡게 몰고 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밝고 긍정적으로 그리죠. 특히 히키코모리 가쓰로(이름이 비슷해서 자꾸 '가쓰오'로 치게 되네요. 여름이라서 다행이에요. 늦가을이나 겨울에 읽었다면 계속 가쓰오 우동이 먹고싶어졌을테니)의 로맨스는 오돌뼈마저 오들오들할 정도였어요. 사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겉모습으로는 류타로 부부가 자식 복이 없어 말년에 고생하는 것 같지만 실상 자식들의 모습을 보면 그렇지 않거든요. 특별히 나쁜 사람도 없고, 다들 자신의 인생을 자기가 알아서 척척 잘 헤쳐 나가는 타입(type)입니다. 류타로가 가장 오점이라 여기는 가쓰로 조차 그래요.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자기 앞길을 잘 닦아나가고 있지요.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가족 중에서 가장 착실하게 노후 대비를 하고 있지 않나 생각되네요. 그러니 류타로의 근심은 근거가 없고, 이런 면에서 소설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태도에 대해 넌지시 알려주는 것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건 바로 믿어주는 것이겠죠.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가능성을 자신의 잣대로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것. 그들도 자신의 삶의 어엿한 주체라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것. 뭐, 지극히 짧은 제 소견으론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부디 제가 집으로 귀환할 때도 제 부모님이 이렇게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책 싸들고 나가라면 심히 난감할 것 같습니다. 이사할 때, 사다리차도 도망가는 책 짐이라.


 어쨌든 나카지마 교코 특유의 소란 가운데 평정, '풍파 중심에서 웃다'가 잘 드러난 작품입니다. 부담없이 유쾌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죠. 가족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이 소설이 주는 덤이구요. 요즘은 '어쩌다'라는 말이 유행이더군요. 내가 상대하는 세계가 너무 커져버렸고, 그것에 휩쓸리다 보니 준비도 없이, 대책도 없이 지금의 상황에 맞딱드리고 말았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결국 세상 일이든, 가족 일이든 예습해 보는 것처럼 필요한 일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굳이 읽어야 할 이유를 대라고 하신다면, 그런 예습을 하는데 마춤한 책이라고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캥거루 가족이 이제 곧 보편이 될 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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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의 50가지 그림자
F. L. 파울러 지음, 이지연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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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기발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아주 먹음직스럽게 노릇노릇 구운 통닭을 표지로 하고 있는 '치킨의 50가지 그림자'는 제목에서 바로 알 수 있듯이, 얼마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E.L 제임스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패러디 하고 있다. 그것도 표지처럼 실제 통닭으로! 읽다보면 도대체 이런 기막힌 생각을 한 작가가 누굴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데, 하여 이름을 살펴보면 F.L 파울러. 하하하! 작가 이름조차 패러디다. E의 다음 알파벳을 쓴 F.L 이라니! 이것만 봐도 가명일 게 분명한데,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페이지에 보면 이름은 가명이며, 작가의 정체는 베일에 싸여 있다고 나와 있다.



 비밀의 작가. 패러디. 그런 책 치고는 책의 만듦새가 꽤나 좋다. 양장본에다 요리책인지 소설인지 혼동될 정도로 많이 들어간 컬러 화보까지. 어쩌면 닭 요리책으로 알고 이 책을 구입한 사람도 있지 않을까?


 (무려 이 책엔 치킨집 전단지까지 들어 있었다. 잠시 황금가지가 출판시장이 너무 열악한 관계로 치킨으로 사업을 확장했나 하는 생각도 했다. 하하...)


 (제목의 '치킨의 50가지 그림자'는 50가지 치킨 요리라는 뜻도 들어있지 않을까 한다. 소설은 이렇게 요리에 따라 하나씩 단락을 이루고 있으며 각 단락의 시작마다 이번엔 어떤 요리가 되는 지를 보여주는 사진이 저렇게 나온다. 사진이 꽤나 식욕을 돋구기에 이 소설을 밤에 읽는 것은 위험하다.)


 단락마다 말미엔 진짜 닭 요리 레시피까지 나오고 있으니. 때문에 누군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하, 이거 색다른 요리책이로군. 야한 소설처럼 만들었잖아!" 이런 본말전도가 충분히 예상될 법한 완성도다. 솔직히 나도 내가 소설책을 읽었는지, 요리책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표지에 작가 자신이 '요리책을 패러디했습니다'라고 하니까 소설책이겠거니 생각하는 것일 뿐. 그러나 정말 집중해서 탐독했던 것은 레시피였다. 사진의 요리가 하도 먹음직스러워 만들어 먹고 싶어 미칠 것 같았으니까.


 어쨌든 작가가 소설이라고 방점을 툭 하고 찍어주고 있으니까 거기에 맞춰 생각해 본다면, 이 책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공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페미니즘적으로 보자면 불편한 이야기였다. 계급적으로 캔디 같은 여성이 커다란 재력을 지닌 남자에 길들여져 점점 SM의 세계로 빠져드는데, 거기서 보여주는 여성의 모습이 노예에 가까운 수동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성의 쾌락을 자신의 쾌락으로 여기는 매저키스트가 된다. 닭이 요리사의 욕망에 맞춰 요리되는 것과 같다.


 파울러는 요리가 가지고 이러한 일방향, 재료는 그저 그것을 다루는 자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측면을 가져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세계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그 소설의 주인공 여성처럼 닭은 의인화 되어 식스팩 남성 요리사에게 묶이고, 찢기며, 파헤쳐지는 것이다.   그 과정을 파울러는 엄청나게 관능적으로 묘사하며 여성의 닭은 요리되는 모든 순간을 자신의 쾌락으로 경험한다.


 손에 쥔 16플라이 노끈 다발로 봉긋이 솟은 내 가슴살을 스치며 그가 묻는다. 천연섬유 노끈이 건드리는 감촉이란 놀랄만큼 관능적이다. 내 가장 깊숙한 곳, 가장 은밀한 그 곳이 더없이 맛있게 오므라든다.

 "몰라요." 내가 숨결만으로 말한다.

 "몰라요. 그리고?" 그가 위협하듯이 재우친다.

 "모릅니다. 요리사님."

 그가 귤 한 개를 집어서 서서히, 서서히 내 아래쪽 구멍에 들이밀어 이윽고 그것이 내 속에서 완전히 묻힌다. 아, 꽉 찬 느낌. (p. 46)


 (인용한 부분은 바로 이 로스트 치킨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다. 소설 부분이 끝나면 바로 이렇게 그 요리의 정체와 그것을 만드는 레시피가 공개된다)


  듣기로 SM적 세계는 과잉된 연극성의 세계다. 자신이 맡은 배역에 따르는 연기에 얼마나 충실할 수 있느냐에 따라 느낄 수 있는 흥분의 강도가 결정된다. 때문에 연기를 위한 상세한 규칙이 그 세계엔 존재한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잘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과정과 단계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과 단계엔 연기하는 자에 대한 배려는 없다. 배역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자신이 어떤 성향을 가졌던 주어진 배역에 자신을 길들여야 한다. SM 세계의 규칙은 궁극적으로 주체가 가진 고유한 본질을 희석시키고 소멸시키는 과정이다. 남는 것은 배역 뿐이다. 본말전도가 그 세계를 유지시키는 핵심 동력이다.


 SM 세계의 각 과정과 단계에 존재하는 세부적 규칙은 요리의 레시피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니 소설에 이런 식으로 레시피가 삽입되는 것도 그냥 재미를 주기 위해서는 아닌 것이다. 아마도 SM적 세계가 더없이 인위적이며, 그것도 배역을 정하고 연기를 강요하는 한 사람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일방적인 세계라는 것을 암시하는 뜻도 있지 않을까 싶다. 역시나 이 레시피엔 닭의 의지가 전혀 개입할 수 없다. 그는 오로지 레시피에 따라 해체되고 다시 조립될 뿐이다. 그리고 그 레시피를 고른 자는 어디까지나 요리사다. 하지만 당하는 여성인 닭은 그것을 자기 파괴의 과정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요리되는 동안 자신이 더욱 맛있게 되어가는 것에 끝도 없는 희열을 느낀다.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쾌락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녀는 오로지 요리사의 욕망대로 되고 있을 뿐이다. 그 희열의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의 소멸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조차 환희로 간주한다. 요리사에게 맛있게 먹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요리사의 욕망과 일치시킨다. 욕망의 일치는 순종의 궁극이다. 그것은 레시피의 매 단계마다 요구되는 자기 부정을 통한 순종에 따른 결과다. 어째 종교의 순교와도 닮아 보인다. 순교 역시 종교에서 요구하는 끊임없는 자기 부정을 통해 도달하는 궁극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종교도 SM적 세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꽤 재밌게 즐겼다. 밤마다 허기를 몰고와 고통스럽긴 했지만.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 대한 제법 매서운 공격이었고, 공격의 방식이 재치 넘치는 패러디라 더욱 효과적으로 보였다. 너무나 외로운 밤, 외로움을 달래려 술 한잔 걸쳤다면 후식으로 읽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공자님 가라사대,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는 두 가지로 식욕과 성욕이라 하셨는데 이 책은 그 두 가지를 하나는 확실하게, 다른 하나는 은근히 채워주고 있으니까.


 좀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나도 요리를 꽤 즐기는 편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요리가 가진 애로틱한 면에 대해선 별로 생각해 본 적 없다. 음식이 성애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영화  '아메리칸 파이'나 우리나라 영화 '몽정기'를 비롯하여 자주 봤지만 그저 웃어 넘겼을 뿐, 둘을 연결 짓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 책은 본격적으로 연결하여 재현하고 있는지라,(한 마디로 내가 그 세계에 푹 담겼다가 나온 고로 )앞으로 요리할 때마다 언뜻 떠오를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삼계탕이다. 앞으로 복날이 오면 난 언제나 그랬듯이 삼계탕을 만들어 먹을 터인데, 그것을 묶을 때 아무래도 이 소설의 장면이 생각날 것 같다. 이것, 참.


 (어쩌면 이렇게 묶어 버릴 지도, 왠지 이제 생닭을 보게 되면 Tie me up, Tie me up 하는 속삭임이 들려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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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3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7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의딸 2016-05-13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이 좋긴하나 식욕은 똑., 떨어지네요. ㅠㅡ

ICE-9 2016-05-17 22:50   좋아요 0 | URL
식욕이 떨어지는 게 다행이지 않을까 싶어요. 전 허기가 져서 정말 죽겠더군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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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모신 하미드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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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신 하미드는 파키스탄 출신 작가다.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출간되는 그의 작품이고, 원래는 세번째 작품에 속한다. 그의 이름은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바 있는 두 번째 작품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로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이 책은 2012년에 우리나라에 나왔는데 번역한 왕은철의 후기를 보면 '2013년에 발표할 예정인 소설로 '신흥 아시아에서 엄청난 부자가 되는 법'이 어떤 소설일지 자못 기대된다'는 말이 나와있다. 제목에 사소한 차이가 있다. '엄청난'이 '더럽게'가 되었다. 보통 Rich와 같이 쓰면 '엄청난 부자'로 해석하니까 어떤 단어를 쓰든 틀린 것은 아니다. 중의적 의미로 보면 될 것 같다. 어쨌든 소설은 정말로 2013년에 나왔다. 2016년인 이제서야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조금은 늦은 셈이다.


 그냥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 작품은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와 함께 읽으면 보다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판단하게 된 것은 두 작품이 가지는 차이점 때문이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파키스탄인으로 미국에서 살았던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을 충분이 반영하여 미국이라는 외부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반면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은 파키스탄으로 상정되는 아시아에 있는 국가 내부에 일어난 일을 담는다. 전자는 외부인의 시각으로, 후자는 내부자의 시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각의 차이는 공교롭게도 인칭의 변화와 맞물리는데,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나'라는 1인칭의 소설인 반면, '떠오르는'은 당신이라는 2인칭의 소설이다. 외부자의 시각에서는 1인칭이었던 소설이 내부자가 되니 2인칭으로 바뀐 것이다. 나는 이 변화가 중요하고 이것이야말로 소설 '떠오르는'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핵심적인 열쇠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 소설이 왜 하필이면 '자기계발서'를 패러디한 형식을 취했는지와도 상관있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나'라는 주인공이 미국인으로 상정되는 한 사람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혹시 알베르 까뮈의 '전락'을 읽어보셨다면 그와 똑같은 형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읽다보면 제목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가 주인공이 아니라 실은 듣고 있는 미국인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그 미국인은 9.11에 대한 그의 반응 때문에 그를 암살하러 온 사람으로(그래서 그는 인종에 대한 근본주의자다.) 그의 고백을 들으면서 죽일까 말까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9.11 이후 전면적으로 대두 되었던 미국과 타자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 '나'가 바로 그 타자이며 그 타자의 내면을 오롯이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소설이 추구하는 바다. 다시 말해 이런 말을 들려주는 것.


 "당신네들은 파키스탄인 모두를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라고 상상하면 안 돼요. 우리가 당신에 미국인들 모두를 변장한 암살자라고 상상하면 안되는 것처럼 말이죠. (...) 나는 당신이 내 얘기의 일부를 불쾌하게 생각했다는 건 알아요. 그렇다고 악수를 청하는 내 손을 거부하지 않기를 바라요."(주저하는 근본주의자, p. 160)


 외부자의 시각과 1인칭은 그를 위한 설정이었다.


 "떠오르는"은 내부로 들어왔다. 소설의 주인공은 이제 '당신'으로 불린다. 파키스탄 같은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나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했고 사랑은 이루지 못했으나 부자는 된 이의 일대기를 건조한 어조로 담고 있는 이 소설에서 그 인물은 내내 '당신'으로 호명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계발서'의 형식을 슬쩍 취한다. 이것은 어떤 효과를 노린 설정일까?


 '주저하는'은 타자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떠오르는'에선 그런 목소리가 더이상은 필요하지 않다. 파키스탄은 온전히 타자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모신 하미드에게 '타자'란 미국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타자를 말한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에 포섭되지 않은, 그래서 고유의 가치관과 독립된 문화로 하나의 거울처럼 신자유주의를 비춰 스스로 자신의 기형적인 모습과 한계를 자각시키는 존재다. '주저하는'은 그 거울을 세웠다. 그런데 '떠오르는'에서는 거울 자체를 문제삼고 있다. 과연 그 거울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말이다. 다시 말해, 모신 하미드는 이런 질문을 소설을 통해 검증해보는 것이다.

 '파키스탄은 미국에게 진정한 타자가 될 수 있는가?'


 미국의 진정한 타자가 되려면 파키스탄이 신자유주의에게서 자유로워야 한다. 하지만 내부의 시각으로 본 결과, 결론은 부정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무엇보다 이 소설이 자기계발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자기계발서 자체가 신자유주의로 인해 비로소 출현하게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는 신자유주의를 낳은 학자들의 이론을 점검하면서 그들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이 한 개인을 1인 기업가로 만드는 것이라는 알게 되었다. 즉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하나의 회사처럼 여기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설령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발생한 위험도 사회의 책임이 아니라 한 개인의 책임으로 쉽게 전가시킬 수 있다. 그들이 못 사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력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것이 신자유주의가 원하는 바였다. 사회적인 것을 철저히 분쇄하여 모조리 개인화 시키는 것. 그렇게 되면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계급 혁명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바로 지금 우리 사회처럼.


 자기계발서는 그 일환이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읽는 사람을 한 개인으로 보도록 만들었으며 자신이 처한 상황 모두가 스스로 초래한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그것은 노력하면 원하는 결실을 얻으리라 달콤하게 속삭였지만 본심은 결코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게 계속 시야의 중심을 자신에게만 두어서 결과적으로는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눈길이 향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봉사했다. 솔직히 자기계발서는 소위 말하는 돈없고 빽없는 99%의 노예들을 위한 것이었다. 1%에겐 자기계발서 따위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번에 드러난 로스쿨 부정 입학 사건을 보라. 요즘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취업을 위해 다시 큰 돈을 들여 취업 스킬을 가르쳐주는 학원에 나간다고 한다. 자기소개서는 어떻게 쓰고 면접은 어떻게 하고 등등을 학원에서 교육받는데, 로스쿨을 들어갈 때에 든든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것은 전혀 배울 필요가 없다. 그저 자기소개서에 이렇게만 쓰면 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검사장인 아버지를 보면서 법과 정의가 어떻게... 블라블라' 이러면 합격이다. 아버지나 가족의 직업이 합격의 원천인 것이다. 그러니 자기계발서 따위가 왜 필요하겠는가?


 결국 자기계발서는 노예의 도덕을 유포한다. 라캉 식으로 말하면 '대타자'에게 나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자문하도록 하여 그들이 원하는 인간형이 되는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이중 사고를 하게 만드는 것과 유사하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식으로 서로 상반된 가치를 한 개인에게 별 비판 없이 수용토록 하는 것이 이중 사고가 아니던가. 자기계발서는 그런 것을 조장하고 결국엔 '신자유주의'라는 '빅브라더'에게 봉사토록 만든다. 9.11 이후 미국의 애국자법이 미국인들에게 '자유는 곧 감시'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듯이.


 바로 이런 자기계발서 형식을 빌려왔다는 것이 파키스탄이 제대로 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은 자기계발서의 말들을 소제목으로 하고 있는데 정작 소설에선 그것이 보장하는 성공과 행복을 하나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허위와 기만의 말일 뿐이다. 주인공의 행복은 그런 말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신만의 감정에 충실했을 때에 비로소 찾아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주저하는'에서도 핵심이었다. '떠오르는'에서도 그러한데 그래서 모신 하미드에게 '사랑'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은, 고린도서 13장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이, 타자 중심이다. '떠오르는'은 가족 이야기까지 나와서 사랑이 가지는 타자 중심의 성격을 강조한다. 모신 하마드는 사랑에서 진정한 구원의 거울상을 찾고 있는 지도 모른다. 소설이 보여주는 바 그대로 파키스탄 역시도 거울의 역할을 할 수 없다면 이제 그 거울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타자 중심인 사랑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각의 경로이다.

 과연 이 거울이 제대로 정초될 수 있을 것인지, 지금의 나로서는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런 의미에서 얼른 다음 소설이 나왔으면 좋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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