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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 ㅣ 펭귄클래식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한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아리스토텔레시의 '시학'을 읽었다.
하지만 '시학'은 제목처럼 시에 대한 학문을 논하는 책은 아니다. 원래의 그리스어 제목은 'POIETIKE'로 가장 뒤의 'KE'는 이른바 기술이라는 뜻의 'TECHNE'의 어미로 원래 제목에 충실하자면 시 제작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모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의 유일한 판본으로 인정받는 BEKKER 판본에 따르면 이 '시학'은 가장 마지막에 위치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BEKKER 판본(이 책 역시 이 판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역시 그러한 체계에 따라 배열되었는데 가장 처음엔 학문을 하는 방법인 'ORGANON'에 속하는 원론적인 논리학적인 작품들이 나오고 그 뒤 자연철학, 생물학 이라든지 형이상학에 관한 이론학에 해당하는 부분이 나오고 그 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치학 같은 실천학에 해당하는 작품이 나온다. 그 뒤 마지막으로 제작기술에 관한 작품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이 '시학'이다.
따라서 그리스 제목이나 BEKKER 판본의 체계에서도 드러나듯이 시학은 시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 시를 제작하는 기술에 대한 작품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상한 것 하나를 느끼게 된다. 시에 대한 제작 기술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오는 것은 오로지 서사시와 비극에 관한 것일 뿐, 어쩐일인지 서정시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 시대에 서정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기원전 7~6세기에 정확히 서정시가 널리 존재했었던 것이다. 당시는 '귀족정'과 평민 사이에 계급적 갈등이 있었던 시기로 따라서 '귀족정'에서 널리 유행하던 서사시는 평민이 각성을 하고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자 점점 개인의 감정을 중시하는 서정시에게 그 지배적인 위치를 서서히 내어주게 된다. 그 뒤 기원전 5세기 민주정 시대에 와서 비로소 비극이 탄생하게 되는데 그렇게 서정시는 서사시와 비극을 가교하는 역할까지 맡기도 했다.
이렇게 분명히 서정시는 존재했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것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 바로 이것에서 이 책이 번역본으로 삼고있는 프랑스 역자 뒤퐁록과 랄로는 그래서 사실은 이 아리스토텔레시의 시학이 시 자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미메시스, 즉 '재현'에 관한 기술만을 다루고 있다고 말을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 즉, 서정시는 재현적인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시학의 '전망'속에 들어올 수 없었다는 것이다. ... 재현에 의한 거리만이 정화된 줄거리를 구성할 수 있는데 우발적으로 그리고 특이한 순간에 포착된 시인의 자아에 초점을 맞추는 서정성은 그러한 거리를 배제하는 것이다.... 요컨대 헤로도토스의 연대기와 마찬가지로 서정시에는 허구를 통한 물러섬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시학은 서정시를 무시한 것이다. 서정시에는 재현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기 때문이다.(p. 30)"
이렇게 뒤퐁록과 랄로가 명확히 언급하고 있듯이 시학은 오로지 재현에 관한 것이며 서정시가 언급되지 않는 것은 연대기가 시학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현적인 것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한 마디로 재현에 관한 것이며 그 방법론에 관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총 26장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의 제목이 따로 붙여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책은 '에소테리카'라고 해서 일종의 강의안 초록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이 아니라 그가 세운 뤼케이온 학원에서 강의하기 위해 쓴 것이다.(p.578) 따라서 챕터의 구별만 있을 뿐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제목이나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리뷰를 일종의 메뉴얼로 삼아 혹시 뒤에 읽으실 분들이 참고 가능할 수 있도록 그 각 장이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는지 대략 여기서 정리해 볼까 한다.(물론 뒤퐁록과 랄로는 서문 p.22 에 도표로 이것을 정리해 놓았다. 그것을 참조해도 좋을 것이다.)
1장 - 재현을 다루는 예술을 구분한다. 크게 서사시와 비극으로 구분한다.
2장, 3장 - 재현의 수단과 대상 그리고 방식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서사시와 비극 그리고 희극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그것들이 어떻게 시작되고 나뉘어졌는지 얘기한다.
4장 부터 본격적으로 재현에 대한 얘기가 이루어지고 6장은 시학에서 가장 중요한 챕터중 하나로 드디어 비극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그 비극에 대한 정의와 그 비극을 이루는 기본 요소들을 소개한다. 그 요소들은 줄거리, 성격, 표현, 사상, 볼거리, 노래 등이다. 7장에서는 그 근본적인 요소들중 뮈토스(줄거리)에 대한 얘기를 한다. 줄거리는 사건들의 조작이며 가장 처음이며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줄거리는 통합하는 기능을 하는데 이 기준을 인물로 둘 것이냐 아니면 행위에 둘 것이냐에 의문이 생기는데 그 대답을 이어 8장에서 이야기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재현의 동일성은 바로 대상의 동일성이며 행동의 재현인 줄거리는 그래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단일한 행위를 기준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뒤이어 9장에서 그 행위를 중심으로 어떻게 통합해야 하는가에 대해 그 기준으로서 개연성과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바로 그것이 연대기와 '시'의 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시학에서 서정시가 제외된 것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보여주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말이 나온다.
"시인이 시인인 것은 재현하기 때문이며 또 재현하는 것이 행동인 만큼 운율 보다는 줄거리를 만들어내는 시인이어야 한다(p.197)"
즉, 이 말로 보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정시를 아예 시로도 보지 않았던 것이다. 더하여 개연성과 필연성 외에 재현의 효과적인 측면에서 또 다른 특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10장에선 단순한 줄거리와 복잡한 줄거리로 줄거리의 유형화를 시도하는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바로 다음장인 11장에서 또 하나 중요한 요소인 '급전'과 '발견'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11장이 주로 설명하는 '급전'과 '발견'은 모두 반전에 속하는 것으로 급전은 뒤에 가서 행동의 효과가 완전히 뒤집히는 것을 말하고 발견은 무지에서 앎으로 옮겨가는 행동을 말한다. 10장의 줄거리의 유형화와 관련지어 말해본다면 이 급전과 발견이 존재하는 줄거리가 바로 복잡한 줄거리이고 이런 것이 없는 줄거리는 단순한 줄거리이다.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복잡한 줄거리가 훨씬 고상하고 우월한 줄거리이다. 그런데 복잡한 줄거리에는 또 하나의 요소가 더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격정적 효과이다. 이것은 파괴와 고통을 야기하는 행동을 말한다.
11장 까지가 비극이 가지고 있는 내부적인 요소들에 대해 얘기했다면 12장은 바로 비극의 외부적 형식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랄까 연극의 순서 같은 것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비극의 외부적 형식은 도입부(프롤로그) - 삽화(에피소드) - 퇴장(엑소더스) -합창(코러스) 이런 순서로 이루어진다. 13장에서는 다시 내부적 요소로 돌아가 두려움과 연민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줄거리 구성에 있어서 피해야 할 것들에 대해 말하고 14장에서는 두려움과 연민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긍정적 줄거리 구성에 대해 말한다.
15장에서는 비극의 다음 요소인 성격
16장에서는 발견을 그러다 다시 17장에서는 줄거리에 최대한 일관성을 부여하는 기술적인 방법에 대해 말하다가 18장에서는 그 일관성을 부여하는 대표적 방법 중 하나로 분규와 해결을 들고(모든 비극은 분규와 해결로 이루어져 있다(P.340) 비극에 있어 일관성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 서사시와 비교하여 얘기한다.
19장에선 개인적으로 가장 난해하다고 여겼던 표현과 사상을
그리고 정말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것인지 의심받고 있다는 20장과 22장까지에서는 그 표현에 있어서의 구성부분을 문법적인 측면에서 설명한다.
23장과 24장은 재현의 또다른 형식인 서사시에 대한 얘기를 하고 25장에서는 시를 짓는 기술에 대하여 가능한 반론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며 마지막인 26장에서는 서사시의 재현과 비극의 재현중 어느 것이 더 고귀한가에 대해서 논한다(플라톤은 서사시의 재현을 더 고귀한 것으로 보았다.) 그의 대답은 많은 제한을 가하면서 비극이 적어도 서사시 보다 열등하지는 않다고 한다.(아시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을 싫어했으므로 민주정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비극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면 그의 이러한 평가는(비록 많은 제한을 두긴 했지만) 굉장히 호의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간략하게 시학을 챕터로 나누어 정리해 보았다.
23장 이후 재현의 또다른 형식인 서사시에 대한 얘기는 나오는데 또 다른 하나의 형식으로 들었던 희극에 대한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작가 움베르토 에코는 서사시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면 아마 이 뒤에 희극에 대한 얘기도 있지 않았을까 해서 후에 가상의 '시학 2권'을 소재로 삼아 유명한 소설 '장미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개인적 생각으론 희극에 관한 논의는 아예 없었을 것 같다. '시학'에 보면 희극과 비극을 나누는 기준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저속하게 재현하느냐 고상하게 재현하느냐'를 들고 있는데 희극은 인간을 저속하게 재현한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뒤에 가서 줄거리 구성에 있어서 피해야 할 것으로 '저속화'를 든다. 또한 뒷부분에 가면 줄거리 구성에 있어서 두려움과 연민의 효과가 정말 중요하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희극은 그런 것을 주기는 어렵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이유들로 희극을 굳이 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하지만, '시학'은 어디까지나 강의 초안 같은 것이므로 뒷 말은 언제든지 존재할 수 있다. 늘 그렇듯이 진실은 언제나 그 너머에 있을 것이다.)
아무튼 위에서도 보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철저하게 미메시스, 재현에 초점을 맞추어 시학을 기술하고 있다. 흔히 모방으로 알려졌던 미메시스를 특별히 이 책에서 재현으로 굳이 강조하는 까닭은 미메시스가 단순한 따라하기가 아니라 거기에 능동적인 해석이 들어가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모사가 아니라 또 하나의 창조적 행위라는 것이다. 이러한 '재현'적 측면에서 시학을 새롭게 해석했던 학자가 2005년에 애석하게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철학자 리쾨르이다. 그의 주저이기도 한 '시간과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뮈토스와 미메시스가 가진 새로운 해석학적 지평을 열어보이고 있는 책이다. 시학을 번역하신 김한식님이 바로 이 시간과 이야기도 번역하셨는데 자신도 시간과 이야기를 읽으면서 시학에 대한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급기야는 이 책까지 번역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 역시 비슷한 동기로 시학을 읽게 되었고 사실은 리쾨르의 시간적 통합으로서의 뮈토스와 능동적인 해석적 간섭과 그 순환으로서의 미메시스를 중심으로 시학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김한식 교수님이 옮긴이 해제에서 너무도 잘 설명해 두었으므로 따로 쓸 것은 없는 것 같다.(리쾨르에 대한 부분은 꼭 읽어보셨으면 한다.)
고전은 늘 새롭기 때문에 고전이라는 말이 있듯이, 시학도 그런 의미에서 정말 고전이라고 할수 있다. 리쾨르가 '시간과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이 모르고 있었던 시학의 지평들을 밝혀내었듯이 또 어느 누군가가 이 시학을 잃고 놀라운 의미의 지평을 또다시 새롭게 펼쳐 보일지 모른다. 뭣보다 이 책에 딸려있는 엄청난 양의 주해가 그것을 증명한다. 주해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해석들은 읽다보면 그것들 하나 하나가 모두 시학이 가지고 있을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들을 담보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 책을 번역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김헌 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는 모두 세 가지의 방식이 지금까지 있어왔는데 하나는 '체계정합적'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발전사적' 맥락이고 마지막이 바로 '문제제기적' 해석이라고 한다. 물론 이 세가지의 방법론들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에소테리카로서 시학이 가지는 한계 즉, 논의에 있어서 상충되는 지점들이 있고 19장 후반에서 22장의 존재와 같이 같은 시학 저작으로 보기에는 좀 무리가 따르는 지점들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두고 이루어져온 방법론이다. 다시 말해 모두 작품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문제점들에 대한 나름의 해결방법인 셈이다. 이 책, 뒤퐁록과 랄로는 마지막 문제제기적 입장이다. 즉, 상충하는 지점, 어긋나는 지점들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새로운 문제제기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에소테리카로서의 이 시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완결되지 않은 사유의 흐름을 담고 있는 그릇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말에 따르면 우리는 시학을 두 가지 의미로 바라볼 수 있을 듯 하다. 첫째는 이것이 오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의 과정이라면 우리는 마치 이것을 소크라테스가 하듯이 일종의 아리스토텔레스와 나누는 대화로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통해 밝혀내려 했던 해답은 언제나 그 상대에게 있었듯이, 우리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으며 그렇게 그와 대화를 하면서 뮈토스와 미메시스를 비롯한 재현 전반에 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닌 우리의 생각들을 가다듬을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바로 그 기회와 연결되는 것인데 이것이 정형화되지 않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의 과정이라면 아직도 이 책에는 하나로 모이지 않은 혹은 오히려 반대를 지향하는 등의 많은 사유의 지류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다듬으면서 그 지류들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담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된다. 즉, 나를 새롭게 함과 동시에 작품을 새롭게하는 양면적 효과를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다. 이런 생각은 그래서 이 책을 묘하게 유혹적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아직은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사유의 지류들은 없을까 하고 찾아보고픈 지적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게 만드는 것이다.(그리고 이렇게 우리는 리쾨르가 말했던 미메시스3의 단계로 접어드는 것이 아닐런지...) 어쩌면 리쾨르도 바로 그러한 가운데 새로운 지류를 찾아낸 것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