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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절대 화장실에선 읽지 말 것. 너무 오래 있게 되어 민폐를 끼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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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over 2011-04-2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분은 화장실에서 읽기를 권하셨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군요. 물론 저는 화장실에서 책 읽지는 않지만요^^

ICE-9 2011-04-22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거 제 경험담이에요. 화장실에서 읽다가 저도 모르게 너무 오래동안 있어서 불평을 좀 들었거든요^ ^;
 
시학 펭귄클래식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한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아리스토텔레시의 '시학'을 읽었다. 

 하지만 '시학'은 제목처럼 시에 대한 학문을 논하는 책은 아니다. 원래의 그리스어 제목은 'POIETIKE'로 가장 뒤의 'KE'는 이른바 기술이라는 뜻의 'TECHNE'의 어미로 원래 제목에 충실하자면 시 제작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모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의 유일한 판본으로 인정받는 BEKKER 판본에 따르면 이 '시학'은 가장 마지막에 위치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BEKKER 판본(이 책 역시 이 판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역시 그러한 체계에 따라 배열되었는데 가장 처음엔 학문을 하는 방법인 'ORGANON'에 속하는 원론적인 논리학적인 작품들이 나오고 그 뒤 자연철학, 생물학 이라든지 형이상학에 관한 이론학에 해당하는 부분이 나오고 그 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치학 같은 실천학에 해당하는 작품이 나온다. 그 뒤 마지막으로 제작기술에 관한 작품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이 '시학'이다. 

 따라서 그리스 제목이나 BEKKER 판본의 체계에서도 드러나듯이 시학은 시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 시를 제작하는 기술에 대한 작품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상한 것 하나를 느끼게 된다. 시에 대한 제작 기술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오는 것은 오로지 서사시와 비극에 관한 것일 뿐, 어쩐일인지 서정시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 시대에 서정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기원전 7~6세기에 정확히 서정시가 널리 존재했었던 것이다. 당시는 '귀족정'과 평민 사이에 계급적 갈등이 있었던 시기로 따라서 '귀족정'에서 널리 유행하던 서사시는 평민이 각성을 하고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자 점점 개인의 감정을 중시하는 서정시에게 그 지배적인 위치를 서서히 내어주게 된다. 그 뒤 기원전 5세기 민주정 시대에 와서 비로소 비극이 탄생하게 되는데 그렇게 서정시는 서사시와 비극을 가교하는 역할까지 맡기도 했다.

 이렇게 분명히 서정시는 존재했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것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 바로 이것에서 이 책이 번역본으로 삼고있는 프랑스 역자 뒤퐁록과 랄로는 그래서 사실은 이 아리스토텔레시의 시학이 시 자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미메시스, 즉 '재현'에 관한 기술만을 다루고 있다고 말을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 즉, 서정시는 재현적인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시학의 '전망'속에 들어올 수 없었다는 것이다. ... 재현에 의한 거리만이 정화된 줄거리를 구성할 수 있는데 우발적으로 그리고 특이한 순간에 포착된 시인의 자아에 초점을 맞추는 서정성은 그러한 거리를 배제하는 것이다.... 요컨대 헤로도토스의 연대기와 마찬가지로 서정시에는 허구를 통한 물러섬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시학은 서정시를 무시한 것이다. 서정시에는 재현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기 때문이다.(p. 30)" 

 이렇게 뒤퐁록과 랄로가 명확히 언급하고 있듯이 시학은 오로지 재현에 관한 것이며 서정시가 언급되지 않는 것은 연대기가 시학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현적인 것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한 마디로 재현에 관한 것이며 그 방법론에 관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총 26장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의 제목이 따로 붙여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책은 '에소테리카'라고 해서 일종의 강의안 초록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이 아니라 그가 세운 뤼케이온 학원에서 강의하기 위해 쓴 것이다.(p.578) 따라서 챕터의 구별만 있을 뿐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제목이나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리뷰를 일종의 메뉴얼로 삼아 혹시 뒤에 읽으실 분들이 참고 가능할 수 있도록 그 각 장이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는지 대략 여기서 정리해 볼까 한다.(물론 뒤퐁록과 랄로는 서문 p.22 에 도표로 이것을 정리해 놓았다. 그것을 참조해도 좋을 것이다.) 

 1장 - 재현을 다루는 예술을 구분한다. 크게 서사시와 비극으로 구분한다. 

 2장, 3장 - 재현의 수단과 대상 그리고 방식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서사시와 비극 그리고 희극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그것들이 어떻게 시작되고 나뉘어졌는지 얘기한다. 

 4장 부터 본격적으로 재현에 대한 얘기가 이루어지고  6장은 시학에서 가장 중요한 챕터중 하나로 드디어 비극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그 비극에 대한 정의와 그 비극을 이루는 기본 요소들을 소개한다. 그 요소들은 줄거리, 성격, 표현, 사상, 볼거리, 노래 등이다. 7장에서는 그 근본적인 요소들중 뮈토스(줄거리)에 대한 얘기를 한다. 줄거리는 사건들의 조작이며 가장 처음이며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줄거리는 통합하는 기능을 하는데 이 기준을 인물로 둘 것이냐 아니면 행위에 둘 것이냐에 의문이 생기는데 그 대답을 이어 8장에서 이야기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재현의 동일성은 바로 대상의 동일성이며 행동의 재현인 줄거리는 그래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단일한 행위를 기준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뒤이어 9장에서 그 행위를 중심으로 어떻게 통합해야 하는가에 대해 그 기준으로서 개연성과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바로 그것이 연대기와 '시'의 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시학에서 서정시가 제외된 것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보여주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말이 나온다. 

 "시인이 시인인 것은 재현하기 때문이며 또 재현하는 것이 행동인 만큼 운율 보다는 줄거리를 만들어내는 시인이어야 한다(p.197)" 

 즉, 이 말로 보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정시를 아예 시로도 보지 않았던 것이다. 더하여 개연성과 필연성 외에 재현의 효과적인 측면에서 또 다른 특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10장에선 단순한 줄거리와 복잡한 줄거리로 줄거리의 유형화를 시도하는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바로 다음장인 11장에서 또 하나 중요한 요소인 '급전'과 '발견'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11장이 주로 설명하는 '급전'과 '발견'은 모두 반전에 속하는 것으로 급전은 뒤에 가서 행동의 효과가 완전히 뒤집히는 것을 말하고 발견은 무지에서 앎으로 옮겨가는 행동을 말한다. 10장의 줄거리의 유형화와 관련지어 말해본다면 이 급전과 발견이 존재하는 줄거리가 바로 복잡한 줄거리이고 이런 것이 없는 줄거리는 단순한 줄거리이다.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복잡한 줄거리가 훨씬 고상하고 우월한 줄거리이다. 그런데 복잡한 줄거리에는 또 하나의 요소가 더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격정적 효과이다. 이것은 파괴와 고통을 야기하는 행동을 말한다. 

 11장 까지가 비극이 가지고 있는 내부적인 요소들에 대해 얘기했다면 12장은 바로 비극의 외부적 형식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랄까 연극의 순서 같은 것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비극의 외부적 형식은 도입부(프롤로그) - 삽화(에피소드) - 퇴장(엑소더스) -합창(코러스) 이런 순서로 이루어진다. 13장에서는 다시 내부적 요소로 돌아가 두려움과 연민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줄거리 구성에 있어서 피해야 할 것들에 대해 말하고 14장에서는 두려움과 연민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긍정적 줄거리 구성에 대해 말한다. 

 15장에서는 비극의 다음 요소인 성격 

 16장에서는 발견을 그러다 다시 17장에서는 줄거리에 최대한 일관성을 부여하는 기술적인 방법에 대해 말하다가 18장에서는 그 일관성을 부여하는 대표적 방법 중 하나로 분규와 해결을 들고(모든 비극은 분규와 해결로 이루어져 있다(P.340) 비극에 있어 일관성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 서사시와 비교하여 얘기한다. 

 19장에선 개인적으로 가장 난해하다고 여겼던 표현과 사상을 

 그리고 정말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것인지 의심받고 있다는 20장과 22장까지에서는 그 표현에 있어서의 구성부분을 문법적인 측면에서 설명한다. 

 23장과 24장은 재현의 또다른 형식인 서사시에 대한 얘기를 하고 25장에서는 시를 짓는 기술에 대하여 가능한 반론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며 마지막인 26장에서는 서사시의 재현과 비극의 재현중 어느 것이 더 고귀한가에 대해서 논한다(플라톤은 서사시의 재현을 더 고귀한 것으로 보았다.) 그의 대답은 많은 제한을 가하면서 비극이 적어도 서사시 보다 열등하지는 않다고 한다.(아시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을 싫어했으므로 민주정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비극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면 그의 이러한 평가는(비록 많은 제한을 두긴 했지만) 굉장히 호의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간략하게 시학을 챕터로 나누어 정리해 보았다. 

 23장 이후 재현의 또다른 형식인 서사시에 대한 얘기는 나오는데 또 다른 하나의 형식으로 들었던 희극에 대한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작가 움베르토 에코는 서사시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면 아마 이 뒤에 희극에 대한 얘기도 있지 않았을까 해서 후에 가상의 '시학 2권'을 소재로 삼아 유명한 소설 '장미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개인적 생각으론 희극에 관한 논의는 아예 없었을 것 같다. '시학'에 보면 희극과 비극을 나누는 기준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저속하게 재현하느냐 고상하게 재현하느냐'를 들고 있는데 희극은 인간을 저속하게 재현한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뒤에 가서 줄거리 구성에 있어서 피해야 할 것으로 '저속화'를 든다. 또한 뒷부분에 가면 줄거리 구성에 있어서 두려움과 연민의 효과가 정말 중요하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희극은 그런 것을 주기는 어렵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이유들로 희극을 굳이 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하지만, '시학'은 어디까지나 강의 초안 같은 것이므로 뒷 말은 언제든지 존재할 수 있다. 늘 그렇듯이 진실은 언제나 그 너머에 있을 것이다.) 

 아무튼 위에서도 보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철저하게 미메시스, 재현에 초점을 맞추어 시학을 기술하고 있다. 흔히 모방으로 알려졌던 미메시스를 특별히 이 책에서 재현으로 굳이 강조하는 까닭은 미메시스가 단순한 따라하기가 아니라 거기에 능동적인 해석이 들어가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모사가 아니라 또 하나의 창조적 행위라는 것이다. 이러한 '재현'적 측면에서 시학을 새롭게 해석했던 학자가 2005년에 애석하게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철학자 리쾨르이다. 그의 주저이기도 한 '시간과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뮈토스와 미메시스가 가진 새로운 해석학적 지평을 열어보이고 있는 책이다.  시학을 번역하신 김한식님이 바로 이 시간과 이야기도 번역하셨는데 자신도 시간과 이야기를 읽으면서 시학에 대한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급기야는 이 책까지 번역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 역시 비슷한 동기로 시학을 읽게 되었고 사실은 리쾨르의 시간적 통합으로서의 뮈토스와 능동적인 해석적 간섭과 그 순환으로서의 미메시스를 중심으로 시학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김한식 교수님이 옮긴이 해제에서 너무도 잘 설명해 두었으므로 따로 쓸 것은 없는 것 같다.(리쾨르에 대한 부분은 꼭 읽어보셨으면 한다.) 

 고전은 늘 새롭기 때문에 고전이라는 말이 있듯이, 시학도 그런 의미에서 정말 고전이라고 할수 있다. 리쾨르가 '시간과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이 모르고 있었던 시학의 지평들을 밝혀내었듯이 또 어느 누군가가 이 시학을 잃고 놀라운 의미의 지평을 또다시 새롭게 펼쳐 보일지 모른다. 뭣보다 이 책에 딸려있는 엄청난 양의 주해가 그것을 증명한다. 주해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해석들은 읽다보면 그것들 하나 하나가 모두 시학이 가지고 있을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들을 담보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 책을 번역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김헌 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는 모두 세 가지의 방식이 지금까지 있어왔는데 하나는 '체계정합적'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발전사적' 맥락이고 마지막이 바로 '문제제기적' 해석이라고 한다. 물론 이 세가지의 방법론들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에소테리카로서 시학이 가지는 한계 즉, 논의에 있어서 상충되는 지점들이 있고 19장 후반에서 22장의 존재와 같이 같은 시학 저작으로 보기에는 좀 무리가 따르는 지점들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두고 이루어져온 방법론이다. 다시 말해 모두 작품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문제점들에 대한 나름의 해결방법인 셈이다. 이 책, 뒤퐁록과 랄로는 마지막 문제제기적 입장이다. 즉, 상충하는 지점, 어긋나는 지점들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새로운 문제제기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에소테리카로서의 이 시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완결되지 않은 사유의 흐름을 담고 있는 그릇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말에 따르면 우리는 시학을 두 가지 의미로 바라볼 수 있을 듯 하다. 첫째는 이것이 오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의 과정이라면 우리는 마치 이것을 소크라테스가 하듯이 일종의 아리스토텔레스와 나누는 대화로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통해 밝혀내려 했던 해답은 언제나 그 상대에게 있었듯이, 우리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으며 그렇게 그와 대화를 하면서 뮈토스와 미메시스를 비롯한 재현 전반에 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닌 우리의 생각들을 가다듬을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바로 그 기회와 연결되는 것인데 이것이 정형화되지 않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의 과정이라면 아직도 이 책에는 하나로 모이지 않은 혹은 오히려 반대를 지향하는 등의 많은 사유의 지류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다듬으면서 그 지류들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담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된다. 즉, 나를 새롭게 함과 동시에 작품을 새롭게하는 양면적 효과를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다. 이런 생각은 그래서 이 책을 묘하게 유혹적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아직은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사유의 지류들은 없을까 하고 찾아보고픈 지적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게 만드는 것이다.(그리고 이렇게 우리는 리쾨르가 말했던 미메시스3의 단계로 접어드는 것이 아닐런지...) 어쩌면 리쾨르도 바로 그러한 가운데 새로운 지류를 찾아낸 것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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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다스의 노예들 바벨의 도서관 9
잭 런던 지음, 김훈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 바다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솔직히 나는 이 단편집에 대해 먼저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이 단편집이 아니었다면 잭 런던이 이토록 단편에도 뛰어난 작가였다는 것을 영영 모르고 지냈을 뻔 했다. 보르헤스가 200여편에 이르는 잭 런던의 단편들에서 선별한 이 단편집은 그야말로 주옥같은 작품들로 가득한 종합선물상자이자 내가 알기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만나볼 수 있는 잭 런던의 단편집이기도 하다. 이 작품집의 단편들을 읽고 있으면 나이 40에 의문의 죽음(병사인지 자살인지 아직까지도 확실치 않다.)을 맞아버린 잭 런던이 좀 더 오래 그의 창작 활동을 계속하지 못했던 것이 그렇게 아쉽게 여겨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만큼 아주 매력적인 단편들이다. 게다가 그는 우리 나라와도 인연이 있다. 1904년 그의 나이 28세 때, 그는 러일전쟁때 종군기자로 우리 나라(당시 조선)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때 보고 느낀 것을 책으로 엮어 '조선사람 엿보기'란 제목으로 내기도 했다. 이런 인연도 있고 하니 작가가 좀 더 각별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엔 2005년에 국내에도 발간된 '암살주식회사'의 원형이 되는 걸작 단편 '미다스의 노예들'까지 있으니 굳이 보르헤스의 추천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라도 한 번 읽어보라고 추천하고픈 단편집이다. 

<- 잭 런던 , 조선사람 엿보기(La coree en feu)의 표지 

    옆에 서 있는 외국인이 바로 잭 런던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 단편집에 대해 얘기해 보자. 이 단편집은 무엇보다도 보르헤스가 선집한 단편집이므로 우리는 가장 먼저 그가 무슨 이유로 특별히 이 다섯 편을 골랐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단편집에 실린 다섯 편은 이렇다.  

  마푸히의 집
  삶의 법칙
  잃어버린 체면
  미다스의 노예들
  그림자와 섬광 

 첫번째 단편 '마푸히의 집'은 자기가 캐온 거대한 진주를 가지고 프랑스 풍의 집을 얻으려는 히쿠에루 환초에 사는 마푸이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남태평양 바다를 건너 목자재를 들여오기가 쉽지 않은지라 거래는 잘 성사되지 않고 결국은 협잡꾼에게 걸려 그 진주를 강탈당하다시피 한다. 그렇게 마푸이가 진주를 뺏기는가 싶더니 그 날 유사이래로 가장 강력한 허리케인이 그 섬에 몰아닥친다. 두번째 단편, '삶의 법칙'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그 영화에서 가족들이 겨울철 굶어죽지 않으려고 할머니를 고려장시키듯이 이 단편의 주인공 코스쿠시 노인의 운명도 같은 길을 걷는다. 이 단편은 가족들의 생존을 위해 내버려진 코스쿠시 노인이 그들이 떠나는 준비를 하는 것을 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거기서 그는  생명력 넘쳤던 젊은 날과 또 그렇게 자신 역시 생존을 위해 아버지를 버렸음을 기억해낸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기억나는 건 자신이 직접 목격했던 큰 사슴의 최후이다. 결국 집요한 늑대의 추적으로 최후를 맞이했던 큰 사슴 처럼 자신 역시 그렇게 될 것을 알고 늑대들이 몰려들었을 때 가만히 자신의 몸을 내맡기게 된다. '나라야마 부시코'의 할머니가 자신을 버리고 가는 아들에게 오히려 추우니 빨리 돌아가라고 손을 내젖는 것 처럼 자신의 죽음을 자연의 섭리라 여기는 것이다. 

 세번째 단편 '잃어버린 체면'은 문명의 정복과 야만의 복수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물결에 휘말리는 바람에 죽을 운명에 처해진 수비엔코프가 주인공이다. 그는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원주민들이 가하는 끔찍한 고문만은 피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선택권은 그에게 있지 않으니 곧 다가올 자신의 차례를 거부할 수가 없다. 끝내 그는 기지를 발휘해 단번에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리게 만든다. 대신 그 기지에 휘둘린 원주민의 추장은 그에게 놀아난 댓가를 평생 치욕으로 짊어지게 된다. 네번째 단편 '미다스의 노예들'은 한 자본가에 보내진 협박장이 중심이 된다. 그 협박장은 '미다스의 노예들'이라 스스로 칭하는 자들이 보낸 것으로 자본가의 전재산을 기부하지 않으면 그 댓가로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뺏겠다고 한다.  

 "선생도 곧 아시게 되겠지만 우리는 하나의 사업을 제안한 데 불과합니다. 선생은 윗멧돌이고 우리는 밑멧돌입니다. 그 두 개의 멧돌이 돌아갈 때 그 노동자 목숨은 갈려버릴겁니다."(p.115) 

 그저 질나쁜 농담으로 여기고 무시했으나 곧 그들이 정한 시간에 무고한 사람이 목숨을 뺏겼다는 것을 알게된다. 계속 날아드는 협박장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희생되는 사람은 늘어가고 급기야 그들은 이제 익명이 아닌 구체적으로 희생당하는 사람의 인적사항까지 알려주며 그 죄책감을 떠안겨주려 한다.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던 자본가는 자신의 어마어마한 돈과 연줄로 어떻게든 이들의 정체를 파헤치려하지만 사회 곳곳에 점조직으로 스며들어있는 이들이 존재는 여간해서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쌓이는 시체에 죄책감만 더해갈 뿐이다. 다섯째 단편 '그림자와 섬광'은 라이벌 관계에 빠져 경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두 사람에 대한 얘기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상대를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일생을 살아가는데 결국 그 어리석은 경쟁은 그들의 모두 목숨을 잃고서야 끝나게 된다. 

 간단히 다섯 편의 내용들을 정리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왜 보르헤스가 하필이면 이 다섯 편을 선정했는지 살펴보아야 할 차례다. 분명 이 다섯 편엔 공통점이 있다. 아마, 다섯 편을 직접 읽어보면 그게 분명히 느껴지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이 다섯 편이 모두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단편을 보자 거대한 진주로 집과 교환하려 했던 마푸히는 인간적 노력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한다. 그렇게 라울도 교활한 장사꾼 토리키와 레비도 비열한 방법이지만 인간적 노력으로 원하는 것을 획득한다. 하지만 그 날 그 모든 인간적 노력을 무위로 만들어 버리는 거대한 자연의 보복이 개시된다. 그 압도적인 허리케인 앞에서 인간이 했던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간다. 

  그는 이미 공포의 감정을 넘어서 있었다. 그 다음에 밀려온 파도가 그 땅을 휩쓸면서 당연히 그 인간 잔해들까지도 깨끗이 쓸어갔다. 그가 이제까지 본 어떤 파도보다도 더 거대한 세 번째 파도가 닥쳐와 그 교회당을 호수 속으로 쓸어 넣었다. 반쯤 물에 잠긴 채 바람 부는 쪽 어딘가로 떠내려가는 그 교회를 멍하니 보고 있자니 대홍수에 쓸려가는 노아의 방주가 떠올랐다.(p.38) 

그리고 마푸히가 빼앗겼던 진주는 자신이 돌아와야 할 곳을 스스로 찾아 온다. 여기 인용문에서 드러나듯이 잭 런던은 인간의 간교한 노력을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대한 자연의 심판을 허리케인을 통해 드러낸다. '노아의 방주'가 생각났다는 라울의 고백에도 나오듯이 런던은 그것을 신의 의지로 승격시킨다. 신의 의지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한낱 개미에 불과하다. 이것이 이 단편을 통해 런던이 말하려던 것이었다. 인간은 스스로 겸손해야 한다는 의미로. 그렇게 거대한 진주 역시 인간의 모든 노력과 계책을 비웃듯이 홀연히 스스로 자신의 있을 곳을 찾아 돌아오지 않는가! 바로 이 첫번째 단편에서 왜 보르헤스가 유독 이 다섯 편을 선정했는지 그 이유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이 다섯 단편이 모두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단편 역시 그토록 생명력이 넘쳤던 젊음이 지나고 노쇠해지자 족장이었던 그는 이제 가족의 거치적거리는 짐이 될 뿐이다. 그는 어릴 적 보았던 거대한 수사슴의 최후를 떠올린다. 그토록 집요한 늑대의 추적을 피해 살려고 발버둥 쳤었지만 결국은 늑대들에게 먹혀버린 사슴처럼 그 역시 사멸의 운명을 거부할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닫는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의지를 초월하는 삶의 법칙이니까. 세번째 단편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최후의 순간만 남았다"로 시작하는 단편답게, 스스로 죽을 방법을 결정할 수 없는 수비엔코프는 기껏해야 고통없이 죽을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네번째 단편 '미다스의 노예들'은 자연이 아니라 이제 인간이 만든 사회 자체도 개인의 의지를 초월한 그 무엇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계급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임금 노예'라 부른다. 그들이 자본가에게 전재산을 요구하는 이유는 지식인들이 말한대로 자신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건 자본가 계급 때문이고 자본이 없는 이상 제대로 전쟁을 치를 수 없으니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개인이 아니라 계급이고 그래서 개인이 가질수 있는 도덕관이나 사회윤리관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개인의 의지를 초월한 단체의 의지는 목적을 위해서는 아무 의미없는 살인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도덕과 상식마저 초월하여 스스로 괴물이 되려한다. 오로지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위하여. 그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한다. 

 우리는 피할 수 없는 필연적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산업적 사회적 악의 정점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해 낸 사회와 맞서고 있습니다.우리는 이 시대의 성공적인 실패작들이요 타락한 문명이 가져다준 재앙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사회적 선택이 빚어낸 존재들입니다.(p.130) 

 이들의 탄생도 활동도 모두 개인의 의지를 초월해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자였던 잭 런던의 면모가 많이 드러나 있는 이 단편에 이어 다섯번째 단편은 이번엔 '미다스의 노예들'의 표적이 되었던 '자본주의적 인간'들을 다룬다. 바로 자본주의의 동력의 핵심이라 할 '경쟁'을 조명하는 것이다. 잭 런던은 이 단편을 통해 자본주의가 미덕의 하나로 간주했던 경쟁 마저도 이제는 스스로의 의지를 넘어서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그렇게 경쟁에 완전히 지배당해 버렸던 두 남자는 결국 존재가 보이지 않거나 찰라의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림자와 섬광'은 그렇게 그 두 남자의 경쟁으로 변해버린 존재를 의미하고 이 단편은 경쟁이 인간 존재를 어떻게 지워나가는지 시각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르헤스가 특별히 뽑은 잭 런던의 다섯 단편들은 모두 인간의 연약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신의 섭리와도 같은 거대한 자연의 심판이나 속절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연의 법칙 뿐만 아니라 계급이나 경쟁 같이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산물 마저도 이제 인간의 의지를 초월한 존재가 되었다. 그런 존재들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미다스의 노예들'에서 웨이드 애츨러가 했던 고백을 되풀이하는 것 밖에는 없을 것이다. 

 다 쓸데없는 짓일세. 난 불가피한 필연에 맞서 싸울 수 없어.(p.131) 

 잭 런던의 이런 세계관은 사실 보르헤스의 세계관과도 이어진다. 아마도 그러니까 보르헤스가 특별히 선택했을 것이다. 보르헤스 역시 인간의 연약함을 강조한다. '원형의 폐허들'에서 처럼 인간은 어느 것이 환상이고 진실인지를 파악할 수 없으며 자신의 존재마저 과연 실체인지 가늠할 수가 없는 '부족함'의 존재이다. 그래서 세계는 거대한 '바벨의 도서관' 처럼 인간을 초월해 있으며 인간은 영원히 전설의 책을 찾아 그 혼돈의 도서관을 방황할 수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잭 런던과 보르헤스는 이렇게 만난다. 이 단편집의 다섯 단편은 바로 그 접점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접점'은 언제나 맛닿은 양 쪽을 모두 다 살펴볼 수 있다는 잇점을 갖는다. 그렇게 이 단편집은 우리로 하여금 잭 런던과 보르헤스 양쪽을 아울러 살펴볼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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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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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원히 잃어버린 '소년' 시절

 은희경의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를 새해 처음으로 읽었다.
몰랐는데, 5년만의 신작이라고 한다. 벌써 5년이라니? 어느새 또 그렇게 세월이 흘렀나 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 해를 넘겼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서 있던 그 날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라는 소설에 나오는 G-그리핀의 노래 가사 처럼 난 또 그만큼 소년에서 멀어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자 문득 떠오르는 이미지... 
 혹시 린타로가 감독한 ’은하철도999’ 극장판을 본 적이 있는지?
 본 적이 있다면 그 영화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지?  마지막은 이렇다.
 어쩔 수 없이 메텔과 헤어져야만 하는 철이는 이윽고 메텔이 탄 기차가 점점 멀어지자 마구 따라 뛰어간다. 애타게 메텔의 이름을 부르며... 두 눈 가득 눈물을 흘리면서... 하지만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절규하듯 소리쳐도 메텔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우주 저 편으로 사라지는 기차의 이별을 통보하는 듯한 비정한 기적소리 뿐...  

 가버린다.... 그렇게 사라진다.... 영원히...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 속에 그런 느낌이 가득찬다. 영원한 상실감... 그래서 혹시 감독인 린 타로 자신도 이 '철이'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소년 시절에 대해서 울부짖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여기서 말이지만, 린 타로의 '은하철도 999'의 극장판은 어린 시절 그 만화를 보면서 우주의 동경을 꿈꾸던, 이제는 어른이 되어 버린 그 시절의 소년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 시절 열광했었던 만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그 시절의 기분을 맛볼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메텔’은 우리가 소년시절에 한번쯤 꿈꾸어봄직 했던 이상화된 첫사랑의 ’연인’으로 ’은하철도 999’는 '소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이 모험으로 나타나 주었던 그 시절의 ’낭만’ 으로 체화된다. 그 시절 소년이었던 우리들이 어떤 것들을 느꼈는지 새삼 깨닫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우주 저편으로 가버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소설 속 '태수'처럼...
그 때문일까?
실은 나도 메텔을 애타게 부르며 울면서 달리는 철이의 모습과 저 먼 우주 속으로 가느다란 실이 되어 끝끝내 사라지는 은하철도 999를 보면서 울었던 것 같다.
 이제 우리의 소년 시절은 완전히 끝났어... 하면서... 이건 진짜다.


 때문에 나는 솔직히 이 소설 읽기가 아주 힘들었다.
여기엔 이제 내게는 다시 오지 않을 그 소년 시절이 활짝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영원히 허락되지 않을 시간들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건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연우가 아무리 힘들어도 태수가 아무리 방황해도 채영이 아무리 고독해도... 내게 느껴지는 건, 감정에 이입되기 보다는 때로는 질투심으로 까지 변질되곤 하는 부러움이 만들어 낸 거리감이었다. 딱 김종삼 시에 나오는 화려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아 든 아주 가난한 아이 같았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 덕분에 자신의 초라함만 더욱 더 강조되는...  
게다가 위로를 바란다는 연우는 내가 보기에 정말 멋진 엄마에 듬직하고 의리있는 친구에 거기다 매력적인 연인까지... 소년 시절의 우리들이 한번쯤 꿈꾸어보곤 했을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기까지 했으니, 정작 소년시절 그 무엇하나 가져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오히려 거꾸로 내가 연우에게 위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2. 대체, 누가 누구를 위로해줘야 하나?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로해줘야 하나?
 나는 완전히 폼 좀 잡으려다 무리해서는 결국 마라톤을 포기하고 '회수버스'에 실려오면서 차창 밖으로 열심히 완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치욕의 쓰라림을 느끼고 있는 재욱 딱 그 꼴인데 말이다. 그 때의 재욱처럼 그렇게 나 역시 완주를 해낸 연우에게 오히려 위로를 구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부턴, 채영의 아버지처럼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이미 입어버린 그리고 길들여져 벗기도 힘이드는 우리 세대의 하소연을 좀 하려고 한다.

 17살... 소설속 연우의 나이... 부끄럽지만 내겐 그 때의 추억이 별로 없다.
억지로 떠올려봐도 나타나는 건 그저 새벽별 보기 운동이라도 하듯 학교로 가고 다시 그 학교에서 학원으로 그리고 별도 없는 어둔 밤, 가로등 불빛을 축쳐진 어깨로 힘없이 받으며 귀가하는 그런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만 그득할 뿐이다. 가슴 설레는 '풋풋한 첫사랑'은 커녕 사진첩에 끼워두고 이따금 펼쳐보며 흐뭇해질 수 있는 추억 조차 변변찮다. 일본 영화에서 흔히 가장 눈부신 '여름'으로도 표현되곤 하는 십대 후반의 청춘이란 게 가질 수 있는 낭만은 그저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불확실한 미래에 모든 것을 걸고 엎드리면 내 상반신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는 작은 책상에 붙박히는 것 뿐이었다.
 물론 이탈과 탈주의 유혹과 욕구는 언제든 있었으나, 평범한 가정에 평범한 성격으로 태어난 죄로 그마저도 상상적으로 충족할 뿐, 부모와 선생님으로 그렇게 이중으로 둘러싼, 넘어야 할 울타리의 벽은 언제나 높았다.
 용기가 없었다고 말을 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 자신의 말이 아니라 어른들의 말을 읽고 입안에 머금고 채 되새기도 전에 서둘러 뇌리속에 새겨야 했던 우리들이 할 수 있었던게 뭐가 있었을까? 그렇게 뇌리에 새겨진 그 말들을 우리 자신의 말인양 착각하고 읊조리던 우리들이 그런 용기를 만들어내는 건 애당초 불가능했다.
 우리에 오래도록 갇히면 우리 자체가 온전한 세계가 된다.
 연우는 스스로를 '도화선이 없는 폭발물'이라고 불렀지만, 우리는 아예 불발탄이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핑크 플로이드의 영화 'THE WALL'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의 벽돌이 되어 들어갈 자리에 딱 알맞게 들어가 하나의 벽이 되는 게 전부였었다.
그렇게 재욱이 말했던 안전한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어른들이 먹기 좋은 소시지가 되는 것... 그게 흔히 '모범생'이라는 태그가 붙어지던 아이들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의 전부였다.
 그렇게 연우가 G-그리핀의 말이지만 어쨌든 그래도 자신의 말로, 관계로, 형형색색의 계절의 색깔로 채워가던 그 시기는,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우리들에게는 그저 커다란 공백에 불과했다.
 그러니, 정작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때문에 나는 소설 속 '마리'에게 더욱 더 연민을 느끼게 된다.
 '모범생'의 태그를 붙인, 좋아하는 연우와 이어지지도 못하고(그녀가 할 수 있었던 게 그저 우는 것 밖에는 없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애처롭던지.) 사실은 자신의 정답만 강요할 뿐인 엄마의 기대에 맞춰 살아야 하고 이제는 어쩌면 유일한 의지처였을 수도 있는 오빠 태수 마저 잃어버린 마리에게 내가 할 수 있다면 가능한 한 커다란 위로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오빠를 잃고 난 후의 마리는 지나가는 이야기로도 나오지 않으니, 어깨라도 토닥이려 들어올린 손을 어떻게 내려야 할 지 난처할 뿐이다.

 물론 작가가 이 소설에서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이해가 간다. 자의든 타의든 시스템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독과 아픔들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며 나 역시 연우와 채영 그리고 엄마 신민아와 재욱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어진다. 하지만 사물엔 언제나 동전의 양면이 있듯이 위로 또한 시스템 바깥 뿐만이 아니라 그 내부에 있는 자들에게도 똑같이 필요한 게 아닐까? 다행히 작가는 채영의 아버지와 마리의 속내를 밝혀 그 내부의 자들에게 까지 배려해 놓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소설은 내게 온전히 질투의 산물이 될 뻔 했으리라.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처럼 인생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다. 하지만 한 번 선택해서 간 길을 다시 되돌아 와 다시 시작하는 것은 그리 녹록치가 않다. 그렇게 한 번 잘못된 선택으로 자신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게 되면 다시 제대로 된 옷을 입기 위해 벗는 건 그다지 수월하지 않다. 그래서 주저하게 되고 결국은 틀린 것을 알면서도 길들여지게 된다. 인간의 의지는 생각보다 강하지 않고 일상의 힘은 생각보다 약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맞지 않는 옷은 누구보다도 입고 있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게 되는 일이다. 누군가 일부러 일러주지 않아도 자기에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다는 건 절절히 느낀다. 어쩌면 시스템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내부에 있는 사람들 보다 더 나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건 자기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연우도 연우의 엄마도 태수도 채영도... 물론 시스템으로 부터 이탈되기는 했지만 그건 그저 계기였을 뿐, 바깥에 머무르는 건 모두 그들 자신의 의지였다. 그들 중 아무도 시스템에 적응하려 애쓰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연우의 엄마는 말할 것도 없고, 연우의 '심드렁'이 그렇고 태수가 '영어를 섞어 쓰는 것'이 그렇다. 채영은 일부러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재욱은 남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힙합 무대를 일부러 찾아 다닌다.

 하지만 시스템 내부에 머무르는 자들의 경우, 그들에겐 애초부터 선택이란 게 있지 않았다. 마리의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 음... 꼭 선생님 지시만 기다리는 착실한 반장 같아요. 그런 애들, 자기 생각은 거의 없거든요. 정해진 정답만 열심히 찾아요. 저희 엄마도 그래서 안 행복한 거 같아요.(P. 416) 
 
그리고 채영의 아버지 고백...

 -나는 어떤 집단 속에 있으면 무조건 먼저 유리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강박부터 생깁니다.... 나한테는 생존방식이랄까요, 그렇게 안 하면 불안해요. 농촌 가난한 집의 우수한 장남, 이런 얘기 좀 상투적이긴 합니다만 그게 어쩔 수 없이 납니다....하지만 어떡합니까. 어릴 때 부터 입어온 옷이 이미 피부나 마찬가지가 돼어버린 걸. 다른 옷을 입어 볼 여유가 없었던 사람에게는 말입니다. 그 옷이 살을 파고들어 흉터가 되었다고나 할까요.(P. 439)

 이 두 사람의 말에서 보여지듯 이들에겐 자신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아예 없었다. 그들의 가능성의 영역은 외부로 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남이 입혀주는 옷을 억지로 입어야 했던 것이다. 자의라면 그나마 덜 했을텐데, 타의로 억지로 입어졌다면 그 아픔이 얼마나 더 컸을 것인가! 그 타의로 입혀진 옷을 입고  "내가 싫어하는 인간으로 늙어가는 나를 보는" 끔찍한 기분으로 살아가던 채영의 아버지는 연우 엄마의 어쩌면 그저 지나가는 말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한 마디에 그만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었던 흉중의 말을 쏟아내게 된다.
그 만큼 그 사람에게는 그냥 그런 정도의 말이라도 충분할 만큼, 진심어린 어떤 자그마한 위로라도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 위로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건 상관없이...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외부에 있는대로,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내부에 있는대로,
각 자만의 삶의 무게와 그 짓눌림에서 오는 아픔을 감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제목인 '소년을 위로해줘'의 소년은 '연우'만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 소년은 어쩌면 나를 비롯하여 아직 날아오를 수 있는 자신의 날개를 가지지 못한,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방황하는 사람들을 가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작가는 재욱의 에세이의 결말을 일부러 이렇게 맺은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궁극적으로 우주의 어린 아들, 즉 소년들이다. 서로 위로해주자."(p.389)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게 우리는 그가 어디에 서 있든 그냥 그대로 인정하고 위로해주자,
태수가 말했듯, 아픔은 겪는 각자에겐 다 그 무게가 있으니 그 원인이나 크기는 상관말고.
그냥 위로해주자.


 3. 결여의 존재들 그리고 위로

 그건 우리가 잘 나서도 더많이 가져서도 아닌, 우리 모두가 '결여'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제목도 그렇고
 재욱이 굳이 우리를 '소년들'로 지칭했던 것은 바로 이것을 또한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 같다. 
그러니까 여기서 '소년'이란 말은 또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데, 그건 날개를 가지지 못한 '결여의 존재'라는 것이다. 소설에서 비행기, 공항, 우주정거장 등등 그토록 비상과 비행에 관련된 말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아마도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으리라. 거기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역시도 '결여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연우의 가정에 아버지가 없다는 게 가장 대표적이다. 마찬가지로 연우와 채영 그리고 마리, 마리의 엄마가 자신들을 이어주는 태수를 잃는 것도 그렇다.  태수 역시도 과거 미국에서 누군가를 잃은 경험이 있으며 연우 엄마와 재우는 소설의 후반까지 내내 아슬아슬한 관계를 이어간다. 그리고 채영의 아버지와 엄마는 여전히 냉랭한 관계로 남는다. 이렇게 등장인물 모두에게서 공히 나타나는 '존재론적 결여'는 우리가 위로를 해야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된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상실한 그래서 부족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의지는 필연적이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 자체가 일으켜 세워 달라는 작은 아이가 내미는 손이 된다. 거기엔 나도 포함된다. 내 존재 자체도 누군가에게 내미는 작은 아이의 손이 된다. 때문에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길 원한다면 나 역시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이렇게 서로는 서로의 손을 잡고 부족한 결여들을 메워가면서 일어나야 한다. 이렇게 '존재론적 결여'는 잡아주는 손길, 즉 위로가 상대와 처지와 이유에 상관없이 마땅히 해야 하는 당위로 되어야 하는 것까지 요청한다.
 이러한 결여된 존재로서의 조건이 위로를 당위적으로 요청하는 것은 소설에서 연우 엄마가 자기가 가장 행복한 꿈이라고 생각한 꿈을 꾸고 난 후에 한 고백에서 잘 드러난다.

  깨어난 뒤에도 한참 동안 그대로 누워 있었어. 짧았고 조용했고 피할 수 없는 것, 결코 지속될 수 없는 것, 사라져버리는 어떤 찰나를 향해 가는 기분이 들어. 유한한 존재들을 스쳐가는 짧고 날카로운 빛... 그런걸까. 무력한 어린 존재가 그보다 조금도 나을 것 없는 무력하고 철없는 젋은 엄마에게 모든 빛은 내쏘며 전 존재를 의지하는 것. 그것을 바라보는 한없이 초라하고 피곤한 젊은 엄마의 가슴 뜨거운 찰나 같은 것. 연우야 생각해 봐. 눈물을 흘리며 내가 너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는 거야. 응. 너무 행복했어. (P. 404)

 나에게 있어 소설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이기도 한 이 독백은 그야말로 우리가 왜 서로에게 위로를 필요로 하고 위로를 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연우 엄마의 고백 처럼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전 존재를 의지하는 가련한 소년들이다. 그건 당신이 어디에 있어서건 상관없이 무슨 일을 하건 상관없이 그냥 존재 자체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무겁디 무거운 삶의 중력을 등에 지고 버텨야 하는 고독한 '아틀라스'들이다. 무거운 짐을 들고 힘겹게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는 할머니의 모습 자체가 우리의 도움을 구하는 무언의 호소이듯이 날개를 잃어버린 채 내리누르는 중력으로 버거워하는 우리 '소년'들의 존재 자체가 마땅히 위로를 받아야 할 권리도 그리고 아낌없이 위로를 건네야 할 의무도 역시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소년을 위로해줘'를 읽으며 난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소년시절을 떠 올렸고 그 상실감에 소설 속의 연우를 질투하기도 했다. 거기다 커다란 공백으로 남아있는 내 17살.  그래서 소설 속 연우의 여정은 그의 아픔과는 별도로 나 역시 '예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바라보는 가난한 아이'처럼 괴로움의 과정이었다. 그나마 마리의 얘기가 없었다면 그나마 재우의 넋두리와 채영 아버지의 속내가 없었다면 끝까지 읽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읽으면서 왠지 어느결에  바로 앞에서 길게 인용한 연우 엄마의 말처럼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모든 소년에게 진심을 담아 보내는 위로가 느껴졌다. 사실 그 대부분은 연우 엄마, 신민아에게서 온 것이지만...   
그러고 보니 왜 연우는 엄마라 부르지 않고 고집스럽게 신민아라고 부르는 것일까?   엄마라는 영역에서가 아니라 신민아라는 별개의 단독자로서 위로를 건넨다는 그런 의미일까? 하긴, 엄마라서 위로를 한다면 그건 위로에 조건을 부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위로가 전 존재적 호소이자 응답'이라는 소설의 주제에서 보자면 끝까지 신민아로 남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경구처럼 주옥같기도 했지만 공백으로 허전한 내 마음을 다독여주는 손길이기도 했다. 그래서 배는 아팠지만 소설 속에 나오는 그 누구라도 하다못해 퍼즐카페의 주인 아저씨까지 응원하고 싶어졌다.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은 마리의 뒷 얘기를 읽지 못하는 것은 그지없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모두들 마지막의 연우와 채영 처럼 봄눈을 맞으며 '돌아오지 못할 것들은 그만 보내주고(이건 나에게 하는 말 같다.) 다른 별에 온 것' 처럼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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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렌델 펭귄클래식 53
존 가드너 지음, 김전유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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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렌델은 매혹적입니다..
 하지만 난해합니다..
 씌여진 문장 하나하나는 마치 동 터오는 아침 햇살을 흠뻑 머금은
 이슬 처럼 영롱하건만, 전체를 놓고보면 그 하나하나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쩐지 온통 수수께끼로 가득찬 암호문을 받아든 셜록 홈즈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렌델은 마치 사이렌의 노래소리와도 같아서
 스스로 미로일 것 알면서도 기꺼이 그 곳에서 헤메이게 만드는군요.
 그것도 열정적으로...

 문득 정신을 차리면, 난 가드너가 촘촘히 짜 놓은 거미줄 같은
 그렌델이라는 '미로' 속에 갇혀있었습니다.
 여러 개의 출구로 보이는 듯한 길들이 각각 자신만의 가능성을 가지고
 저의 앞에 유혹적으로 열려있더군요

 저는 얼른 걸음을 떼기가 어려웠습니다. 자칫 하다가는 영원히 의미를 잃고
 헤매이게 될 것을 알기에...
 그 엄습하는 두려움 으로 테세우스를 미궁 속에서 건져내었던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습니다.

 여러 번 서성이는 걸음 속에서 불현듯 어둔 밤, 등대불에 우연히 포착된 어선과도 같이
 그런 실 같은 것을 잡았음을 느꼈습니다.
 이제 저는 걸음을 뗍니다. 그것이 이 미로속에서 날 빠져나가게 해 줄 것이라 기대하며...
 

 내가 잡은 아리아드네의 실은 바로 '시(詩)'입니다.
 그렌델로 하여금 매혹시켜버렸던 셰이퍼가 읊조리던 바로 그 '시'...
 
 그런데 시란 무엇입니까?
 저는 여기서 하이데거를 떠올립니다. 하이데거는 시를 '진리의 현현'이라고 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지었고 존재란 참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존재는 존재자들에게 가려 잘 드러나지 않는데, 그 존재가 유일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존재는 동일성을 지향하는 존재자들 너머 오로지 타자의 영역에서만 드러날 수
 있는데 그렇게 '시'라는 것 역시 절대적으로 타자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죠.
 시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아서 유한한 의미망으로 가둬둘 수 없기 때문이죠.
 완전히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미끌어지듯 빠져나가는 작은 물고기 같은 것들이 있기
 마련입니다.(소설 그렌델에서 그의 어미가 '물고기를 조심하라'고 하는 것도 어쩌면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하나의 의미로 규정할 수 없는 것. 마치 고운 모래처럼 손에 쥐면 쥘 수록 빠져나가는 것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특성을 동일성으로 보았기 때문에 바로 이 시의 특징 때문에 오로지
 존재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은 나중의 철학자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를테면 레비나스와 줄리아 크리스테바
 같은 사람들이죠.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특히 이런 시의 기능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하죠.(빈곤한 기억력 탓에 정확성을 담보하기는 어렵습니다.)
 '시란 정체성을 동일화시키려는 외부의 강요로 부터 벗어나려는 언어적 투쟁이다.'라고...

 저는 바로 이것이 그렌델을 매혹시켰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렌델은 인간의 기준에서 타자입니다.
 그건 존재론적으로 결정된 것이라 숙명적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인간의 언어를 할 줄 압니다. 그건 인간과 교감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고 그래서 그건 그에게 유혹이 됩니다.
 그렌델은 고독합니다. 어미와 함께 자신의 종족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입니다.
 고독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권태.
 그런데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인간의 무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겐 인간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구요.  농구 골대가 너무 높으면 아무도 공을 던지지 않지만
 낮으면 누구나 던져보려는 유혹을 가지듯이 그건 엄청난 유혹이죠.
 하지만 그도 압니다. 그가 절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을...
 그리고 숙명적으로 결정되어진 것을 영원히 바꾸지 못하리라는 것도...

 그래서 그는 서성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그에겐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인간에게 있어 완벽히 타자인 용의 세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인간 세계이죠.
 그것은 공간적으로도 완벽히 구분됩니다. 용의 세계는 동굴로 표상되고 인간 세계는
 연회장으로 표상됩니다. 동굴은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고 연회장은 더불어 같이 있는
 공간이죠.
 용은 모든 걸 체념하고 자신만의 동굴에 기거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곧 '너 자신을 고립시키고 너만의 정체성 속에 머물러라. 그렇게 널 인간에게
 있어 완벽하게 타자의 영역에 두고 너 자신을 불가해한 것으로 만들어라'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용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로 구별되는 이 경계는 자신만의 주체성과
 타자와 동일하려는 욕구 사이의 경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렌델에게 이것이 양자택일적으로 선택이 강요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용의 말이 이것을 잘 대변해주고 있죠.
 "가치있는 것을 찾아서 그것을 지켜라."라고
 그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 모든 존재자들은 우연일 수 밖에 없으니 너무 타자들에게
 연연해하지 말라고 설득합니다.
 물론 그렌델은 이 용의 말이 이성적으로 납득됩니다. 하지만 늦었습니다.
 그는 셰이퍼의 '시'를 이미 들어버렸으니까요.

 셰이퍼의 시를 듣고 그는 이렇게 독백합니다.
 '그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자는 세상을 바꿔놓았고, 과거를 그 그 두껍고도 비틀어진
  뿌리까지 송두리째 들어내어 변화시켰다.'라고...

 저는 여기서 그렌델이 바로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말했던 시의 힘을 느꼈다고
 생각했습니다. 외부로 부터 양자택일적으로 강요되어지는 선택으로 부터 스스로를
 미끌어지게 하고 탈주시키는 그 힘을...
 양 자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또 모두에게 속할수도 있는 그리고 그 둘을 오히려
 초월할 수도 있는 그런 힘을 말이죠...

 그래서, 그렌델은 이제 스스로 시를 씁니다.
 셰이퍼가 하프를 켜며 그의 입을 통해 시를 말하듯이...
 그렌델은 그 자신의 이빨과 손으로 사지를 찟고 낭자한 선혈을 내뿜는
 잔혹의 시를 쓰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렌델의 인간 사냥은 일종의 인간이라는 타자와의 소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셰이퍼의 시에 오르내리게 됨으로서
 인간의 역사에 편입되게 되는 것이죠.

 이 기이한 교감 방식...
 제 생각엔 이것이야 말로 가드너의 '그렌델'이 줄 수 있는 최고의 매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왜 그렌델이 셰이퍼의 죽음 이후 속절없이 최후를 맞이하는가가
 이해됩니다. 바로, 셰이퍼로 상징되어지는 '시'가 소멸했기 때문입니다.
 셰이퍼의 최후를 보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시대의 종말이다.
  이제 다시 우리는 혼자다. 버림받은 채로...'

 시가 있음으로 해서 그렌델은 자신에게 주어진 정체성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타자들과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셰이퍼의 죽음과
 더불어 시는 소멸했고 그는 인간에게 있어 완벽한 타자로만 남게되죠.
 물론 시가 사라진 이상 그는 더이상 하이데거가 말하는 영원히 불가해한 존재인
 타자가 아닙니다. 그는 이미 인간에게 포획된 타자이고 따라서 그는 동일화의
 욕구를 가진 존재자들에게 살해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자가 된 것입니다.
 존재자들은 동일화시키지 못하는 대상은 그냥 소멸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게 제가 가진 '아리아드네의 실'입니다.
 시를 통해 그렌델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게 얼마나 설득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는 아직 출구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그렌델은 어마어마한 미로로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그 숨겨져있는 무궁무진함... 걸을 수록 새롭게 변화하는 그 의미들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또 다른 가느다란 실을 찾아 헤메이게 될 것만 같은 예감입니다.
 움베르토 에코도 말했듯이 좋은 텍스트는 언제나 여러 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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