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열 갈래의 길
유예진 지음 / 현암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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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짧고 프루스트는 너무 길다." 프랑스의 작가 아나톨 프랑스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해 한 말이다. 세상에 알려진 소설 가운데 가장 난해한 소설이기도 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아나톨 프랑스의 말대로 인생은 읽기에도 짧지만 이해하기에는 더욱 턱없이 짧다. 그러니 우리는 좀 더 쉽게 이해의 물가로 인도하는 책을 찾을 수 밖에 없는데 유예진의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이 그 중 아주 유용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 같다.




 다른 프루스트 안내서들과 달리 이 책은 독특하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인용했던 작가나 작품을 가지고 작가 프루스트와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길잡이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맹렬한 독서가이기도 했던 프루스트의 독서 편력이 고스란히 드러난 작품이기도 한데 유예진 작가는 바로 그것을 단서로 프루스트에게 가장 영향력을 미쳤던 10명의 작가를 선정하여 그들과 프루스트가 주고받았던 영향 관계를 세밀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프루스트 안내서보다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프루스트에 관심을 가질 정도라면 책을 좋아하는 이가 틀림없고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책과 작가에 대한 이야기만큼 관심을 끄는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예진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 마르셀의 어린 시절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고 그를 독서라는 세계로 인도했던 할머니의 세계를 당대의 여류작가 세비네 부인의 서간문을 통해 이야기하고 마르셀이 서서히 유태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을 라신의 희곡들을 통해 들려준다. 이런 식으로 유예진 작가가 특별히 언급하는 10명의 작가들은 모두 작품 속 주인공 마르셀에게 아주 깊은 영향을 미쳤던 자들이었으며 마르셀은 또한 프루스트 자신의 분신이라는 점에서 실제 프루스트에게도 굉장한 영향을 끼쳤던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여기서 그 10명의 작가들을 차례로 열거해 본다면 앞에서 소개한 2명 외에도, 프랑스 문인이라면 누구가 흠모할 수 밖에 없는 발자크가 있고 어쩌면 최초의 페미니즘 소설가일지도 모를 여류 작가 조르주 상드가 있으며 문체에 있어서 프루스트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보바리 부인의 플로베르가 있으며 프루스트에게 작가가 될 소명을 일깨워주고 실제로 잦은 작가들의 모임을 마련해 진정 오늘의 프랑스 문학의 산실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공쿠르 형제가 있다.(프랑스의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인 공쿠르 상의 그 주인공들이다.) 또한 계속 길어지기만 하는 이야기로 프루스트 자신에게 내 작품도 그의 것처럼 미완으로 남는 게 아닐까 불안감을 항상 가지도록 만들었던 말라르메가 있고 소설에만 등장하는 상상의 작가 베르고트의 모델이 된 아나톨 프랑스도 있으며(정작 이 책에는 아나톨 프랑스는 베르고트의 모델 정도로만 소개되어 있고 유예진 작가는 프루스트가 확립했던 작가론의 모델로서 베르고트를 설명하고 있다.) 발자크와 플로베르가 프루스트를 낳았듯이 그 역시 운명처럼 한 명의 작가를 태어나게 했는데 바로 그 주인공인 앙드레 지드와 프루스트를 현대적으로 되살렸으며 프루스트에 관해서라면 가장 깊이 있는 해석을 들려주는 롤랑 바르트 역시도 우리는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있다.


 결론지어 말하자면 이 책은 정말 읽을만한 책이다. 굳이 프루스트에 대해 관심이 없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냥 문학이란 것에만 관심이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 책은 꽤나 들을만한 것들을 많이 이야기해 줄 것이다. 프루스트 개인에 대해서든, 소설에 대해서든 아니면 그를 둘러싼 당대의 사회상이나 프랑스 문학에 대해서든 말이다. 그만큼 이 책은 깊이가 있으며 작가와 작품 그리고 프루스트와의 연결지점들을 텍스트와 텍스트로 엮어가는 지점들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개인적으로는 발자크와 플로베르의 문체를 비교하면서 프루스트가 자신만의 문체를 만들어 갔던 과정에 대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플로베르가 문체를 중시하는 작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구체적 맥락은 알지 못하였는데 유예진 작가 덕분에 비로소 말끔히 정리된 셈이다.


 여기에 또 하나, 작가를 꿈꾸고 있는 이들이 읽어도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예전에 프랑수아 트뤼포라는 프랑스의 영화 감독은 영화의 마니아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첫째는 그냥 영화를 많이 보는 단계

 둘째는 영화에 대해 쓰는 단계

 그리고 마지막이자 영화 마니아의 궁극적 단계는 영화를 직접 만드는 단계라고...


 이 단계는 그러나 오직 영화에만 해당되는 건 아닌 것 같다. 독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첫째는 그냥 많이 읽는 단계고 둘째는 책에 대해서 쓰는 단계며 마지막으로 궁극적 마니아의 단계는 직접 자기 책을 쓰는 것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면 프루스트가 직접 그 단계를 모두 거쳤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 그 사실을 바로 알게된다. 처음에는 그냥 책이 좋아서 무작정 많이 읽는 열정적인 독서가였는데 좋아하는 작가와 글을 읽으면서 그들의 문체를 모방하여 글을 써 보거나 평론을 하는 등 점점 책에 대해 쓰게 되고 결국엔 나름의 문학관, 작가관 그리고 문체관을 정립해 결말은 커녕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무작정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자신만의 작품을 써 나갔던 그였으니까. 이제와 하는 말인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그 첫 권이 나왔을 때 누구도 이 이야기가 이처럼 아주 길어지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본인인 프루스트조차도 말이다. 아니, 딱 한 사람이 있긴 했다. 바로 아나톨 프랑스. 그는 첫 권만 읽고도 '이것은 오래 계속될 이야기의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단정적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과연 대가들은 부분만 보고도 본질을 꿰뚫어보는 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작가 본인도 정작 보지 못했던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작품에 대한 이야기이자 작가에 대한 이야기이고 독서에 대한 이야기이자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냥 프루스트에 대한 안내서만이 아니라 꼼꼼하게 읽어보면 문학과 삶의 관계마저 엿보이는 썩 괜찮은 길잡이인 것이다. 따라서 내가 해 줄 말은 그저 한 번 읽어보시라는 것 밖에는 없다. 다 읽고나면 뭔가 분명 든든한 느낌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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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BOOn 2호 - 2014년
RHK일본문화콘텐츠연구소 편집부 엮음 / RHK일본문화콘텐츠연구소(월간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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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나 알고 있는지?
 2014년 1월부터 격월로 'BOON'이란 잡지가 나오고 있다. 폭발음의 'BOOM'이 아니다. 'BOON'이다. 유쾌함을 뜻하는 말로 '문화'의 일본어 음독인 분카에서 '분'이란 발음을 차용한 말이다. 발간한 곳은 RHK일본문화콘텐츠연구소. 즉 이 잡지는 '일본문화전문잡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무겁지 않고 '분'이라는 말처럼 가볍게, 그렇지만 가쉽이 아니라 깊이 있게 일본 문화를 뜯어보는 것. 그것이 바로 'BOON'의 정체라 할 수 있다.



 이 잡지의 창간 소식을 들었을 때, 개인적으로 반가웠다. 예전부터 일본 소설 리뷰 하면서 일본 소설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려 줄 채널 하나 정도는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실제 나오리라고 기대하기엔 우리나라 출판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나날이 책을 읽는 이들은 줄어들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 아무래도 예전만큼은 관심이 높지 않을 일본 문화에 대해 이렇게 전문적으로 다룬 잡지를 낸다는 건 무리한 도전일 것 같아서였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법인데 이번만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렇게 마치 저 위의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 것처럼 떡하니 나와 주었으니까. 더구나 이번 호는 내 눈이 더욱 휘둥그레질만한 아이템이 특집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바로 '흔들리는 대지'라는 제목의 특집이다. 분명 루치오 비스콘티의 영화에서 따왔을 제목이지만 영화에 대한 것은 아니다. 사실은 3. 11의 여파(AFTERMATH)에 관한 것이다. 아시다시피 2011년 3월 11일 동일본은 '흔들리는 대지'였다. 쓰나미가 몰려왔고 원전이 붕괴되었다. 전후 최고의 재난 중 하나였고 게다가 그건 아직도 진행 중이다. 무시무시한 방사능이 어디까지 퍼졌고 얼마나 일본을 오염시켰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생각한다. 문화라는 것도 사회라는 국물 안에 있는 건더기와 같다고. 그렇게 그것들이 속해 있는 국물이 한 번 크게 흔들리면 건더기는 아무래도 영향 받기 마련이다.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그것을 이런 말로 표현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시를 쓰는 일이 결단코 불가능하다!'

 그것이 남긴 상흔, 아픔을 무시하기란 불가능하다. 아니, 그건 작가의 태도가 아니다. 예전 풀리처 수상작이었던 사진이 논쟁을 일으켰다. 그 사진은 아프리카에서 굶어죽어가고 있던 소녀를 찍은 것이었는데 독수리가 그 소녀가 굶어죽기를 머리 맡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더욱 비극성을 강조했다. 아프리카의 처참한 현실을 제대로 포착했다고 풀리처 상까지 수상했지만 결국 작가는 거센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사진기를 치우고 소녀부터 구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비난이었다. 그렇게 죽어가는 소녀를 그저 피사체로만 본 작가에게 사람들은 '보도 기자의 사명을 버렸다.' '비인간적이다'라고 비난을 해댔고 결국 그 작가는 자살했다. 이 사건은 사람들이 작가에 대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사회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질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작가의 모습이라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라면 3. 11에 대해 어떻게든 자신의 작품에다 반영하기 마련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3. 11 이후에 나온 일본 미스터리 소설들을 리뷰할 때면 그런 입장에서 쓰기도 했었다. 물론 거기에 대해서 난 전공도 아니고 지극히 아는 바도 적었기에 자주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3.11과 그 여파에 대해서 좀 제대로 말해줄 수 있는 텍스트가 있었으면 했었다. 바로 그걸 이 'BOON' 2호에서 본 것이다. 어찌 不亦樂乎, 不亦樂乎 하지 않겠는가! 

 특집은 파트1과 파트2로 나뉘어져 있다. 파트1에는 주로 일본 드라마와 음악 그리고 '레이디코믹'에 나타난 3. 11의 여파를 추적했고 파트2에서는 후쿠오카 도미오카마치를 직접 답사하여 3. 11 이후의 일본 현실이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는 르포를 비롯 보다 문화 바깥으로 초점의 영역을 확대하여 일본 사회와 과학 그리고 사회 운동 차원에서 3. 11이 남긴 영향들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안과 밖, 모두를 폭넓게 조명해주는 특집이라 하겠다. 특집에 실린 글들은 모두 읽을만하다. 드라마 '가정부 미타'와 '아마짱'을 가지고 현재 일본이 3. 11에 대처하는 상반된 경향을 보여주는 이솔아의 글도 좋았고 3. 11 이후 음악에서 나타난 저항 운동을 보여준 임경화의 글도 좋았으며 특이하게도 레이디스 코믹에 집중해서 3. 11의 영향을 밝힌 김효진의 글도 인상깊었다. 특히 김효진의 글을 3. 11이 꽤 세부적인 장르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괴수 고질라를 중심으로 역시나 원자력에 대한 일본이 양가적 입장을 살펴보는 다카하시 도시오의 글은 괴수물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깨우쳐 주었으며 그와 연계되어 일본 과학의 입장을 서술한 서동주의 글도 흥미로웠다. 특집은 과연 특집답게 나역시 천착하고 있던 3. 11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다시금 깨닫고 알려주었다. 특집 아이템만 보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손에 들었던 나로서는 지극히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외 발견이라면 역시 소설신초와 공동으로 연재하고 있다는 히구치 유스케의 소설 '어항, 그 여름날의 풍경'이라 할 것이다. 이건 가공의 미래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지금 일본의 거센 우익화 경향을 반영하듯 좀 파시즘화된 일본을 그리고 있다. 북한의 미사일 공격으로 여론은 타자에 대한 배려를 주장하는 좌파에게 등을 돌리고 일본 우익이 지배력을 공고히 하게 된다. 그들은 재일교포가 많이 있다는 생활보호대상자제도를 폐지하고 복지의 사각시대로 갑자기 몰려나게 된 극빈자들을 저임금의 잉여노동력으로 흡수한다. 값싼 저임금 제도가 아무런 저항없이 자리잡게 되고 그리하여 저임금을 찾아 중국으로 몰려갔던 기업들이 일본으로 들어온다. 정말 터무니 없는 임금으로 과중한 노동을 해야하는 이들의 인권은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일본은 제2의 호황기를 누리고 있다. 소설은 그런 시대를 배경으로 하다. 제목의 어항은 그렇게 정말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적당히 만족하고 살고 있는 일본을 은유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소설은 그대로 현재 일본에 대한 묘사인만큼 어쩌면 히구치 유스케는 지금의 일본이야말로 '어항'이라고 여기고 있는 지도 모른다. 소설은 전반적으로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많이 풍기고 있는데 희생이 되고 있는 청년 세대와 그것을 대가로 누리고 있는 노년 세대의 시선이 서로 교차하면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 아직 2회밖에 연재되지 않았지만 지금의 이야기만으로도 뒷 이야기가 기다려지는 걸 어쩔 수가 없다.

 이외에도 나역시 번역되길 바라지만 결코 불가능할 나카자토 가이잔의 '대보살고개'에 대한 소개가 있어서 좋았고 최근 '침묵의 거리에서'를 발간한 오쿠다 히데오에 대한 글도 재밌게 읽었다. 알라딘 전자책 MD로 있다는 김재욱은 글에서 정말 만만치 않는 내공을 은근히 드러냈는데 다음엔 또 어떤 절기를 시전할 지 자못 궁금해진다.

 아무튼 너무나 반가웠던 잡지였다. 일본 문화에 대해서 나름대로 느끼고 있었던 갈증을 좀 해갈한 듯한 기분이었다. 좀 더 여력이 있다면 한 회분의 특집으로만 그치지 말고 자꾸만 가지를 뻗어나가 별도의 책으로도 만들어져 나오면 좋겠다.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오래도록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 3호도 무조건 기대하며 늘 응원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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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견디는 기쁨 - 힘든 시절에 벗에게 보내는 편지
헤르만 헤세 지음, 유혜자 옮김 / 문예춘추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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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따스하다.

고양이는 베란다에 늘어지게 누워 그 햇살을 온 몸으로 음미하는 중이다.

문턱에 앉아 발가락 끝으로 고양이 수염을 살살 간지르며 책을 읽고 있다.

헤르만 헤세의 '삶을 견디는 기쁨'을...





 문득 시선이 머문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내 인생을 바라보면 나는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또 착각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불행했던 것 같지도 않다. 사실 행복과 불행에 대해 묻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누구나 인생을 돌아보면 즐거웠던 날보다 불행했던 날이 더 오래 기억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선하고 악한 것을 제대로 느끼며, 겉으로 보이는 것 말고도 내면적이고 실질적이며 우연이 아닌 운명을 감당하는 것이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이라면 내 인생은 별로 불쌍하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사람은 사람을 외면할 수 있지만 운명은 그렇지 못하다. 오직 신만이 주관하는 외적인 운명이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면, 달콤함이든 참담함이든 내게 주어진 시간은 나 혼자 짊어지고 책임져야 한다. ('외로운 밤' 첫 부분)


 이래서 내가 헤세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내가 삶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던 것, 하지만 얼른 말로 되어나오지 못했던 것을 헤세는 이렇게 정확하게 딱 집어내 언어로 표현하고 있으니. 그래, 삶의 길을 누가 대신 걸어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힘겹게 사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다 외로운 밤을 되도록 적게 보내기 위해서는 아닐까? 사람들은 되도록 삶이 언제나 이렇게 환하고 다사로운 햇살 속에 있기를 바란다. 지금도 마음껏 햇살을 누리고 있는 한가로운 고양이처럼 되기를...


 정작 헤세는 그런 외로운 밤을 많이 보냈던 것 같다.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인간의 삶은 어둡고 슬픈 밤과 같아서 가끔 번개라도 쳐서 잠시나마 주변의 어두움을 당당하게 물리친 것처럼 보이게 해 주지 않으면 잘 견뎌 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경험이 바탕되지 않으면 쉽게 나올 것 같지 않을 문장 같다. 어린 날의 헤세는 힘겨웠던 것으로 알고 있다. 많은 두렵고 외로운 밤을 보냈던 아이. 얼마나 그런 어둔 밤을 많이 보냈으면 다른 아이들이라면 무서워서 이불 속에 들어가도록 했을 번개를 자신을 견디게 해 준 힘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굶주려서 무작정 사람을 따라오는 고양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애잔하기도 하다.




-헤세의 산문집을 이렇게 두 번째로 만난다. 표지의 그림들은 모두 헤세가 그린 그림에서 발췌한 것으로 책에는 헤세가 그린 그림들이 사이사이에 일러스트처럼 실려있다. - 


 하지만 그렇다고 헤세가 외로운 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밤을 숱하게 보낸 그이지만 오히려 그런 밤이야 말로 제목처럼 삶을 견디게 만드는 기쁨이라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그런 밤은 바쁘고 떠들석한 일상 속에서는 잘 할 수 없었던 나의 내면으로 침잠하여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깊이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는 사소한 일도 즐거워하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특별한 다른 것을 원하지 않는다.(p. 64)


 이 앞에 있는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글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있다.


 잠은 자연이 주는 귀중한 선물이자 친구이며, 피난처이고 마법사이자 나를 따스하게 위로해주는 손길이다.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잠깐 조는 정도만으로도 만족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보면 나는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렇지만 또한 평생 동안 잠 못 이루는 밤을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도 절대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p. 45)


 '삶은 견디는 기쁨'은 '힘든 밤을 지새우고, 사랑에 외면당하고, 선의를 짓밟히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위로가 되고 버틸 수 있는 힘을 주려는 시와 산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헤세에게 있어 그것은 자신을 두려움과 외로움에 떨게 했던 밤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다. 그 밤을 사랑하게 만든 것은 텅 빈 무위의 시간 속에서 낮에는 일상의 소음 속에 가려져 있었던 사물들의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는 경이였으며 그 경이감이 가져온 낯선 경험을 헤아리는 가운데 이윽고 그 전에는 내려가보지 못했던 깊은 자신의 내면 속으로 타고 내려갈 수 있게 만든 사유의 사다리였다. 헤세는 그 사유를 '한밤중에 떠나는 행군'이라고 보는 듯 하다. 그는 그걸 제목으로 시를 지었는데 거기서 그는 사유라는 한밤중에 떠나는 행군이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갈 것인지에 대해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영혼이여, 영혼이여, 준비하라!

먼 형제가 부르는 소리.

시간의 어둠 속에서

황금 계단으로 그대를 부르네.


영혼이여, 영혼이여, 신호를 받아들여라!

드넓은 광활함에 몸을 씻어라!

신이 너의 어두운 길을

환한 길로 인도하리니.

(p. 69)


 간단히 말하자면 '삶을 견디는 기쁨'은 헤세가 했던 것처럼 우리 삶을 부정적으로 여기게 만드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사랑하게 만드는 책이다. 불면, 외로움, 고통이 닥쳐왔다면 피하거나 숨고 내치려 하지만 말고 가만히 품어보라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이전에는 몰랐던 그 이면에 놓인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가벼운 감기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푹 쓰러지는 사람은 언제나 '건강하기만'한 사람들이며 고통받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다. 고통은 사람을 부드럽게도 만들고, 강철처럼 단단하게도 만들어 준다.(p. 67)


 '내게는 둘과 같은 이야기'라는 시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아픔과 쾌락은 이제 내게

하나가 되어 스며들었다.

그것이 나를 편안하게 하든, 아프게 하든

둘 다 하나가 되어 버렸다.

(p. 118)


 어떤 초연함. 무엇이 찾아오든 껍질이 없어서 신경 다발이 훤히 다 노출된 갑각류처럼 먼저 화들짝 놀라기 보다는 암탉이 알을 품듯 내부에서 천천히 헤아려 보는 것. 그 모든 것들을 다른 것도 아닌 온전한 사유의 시간으로 초대하는 것. 나는 이것이 바로 헤세가 이 책에서 들려주려는 '삶을 견디는 기쁨'이 아닌가 싶다.


 다시 밝은 빛을 보고자 한다면 슬픔과 절망을 뚫고 나가야만 한다.(p. 167)


 그러고 보니, 헤세를 읽는 데 어울리는 시간은 이런 한낮이 아니라 밤인 것 같다. 이왕이면 다락방 같은 곳에서 초생달 하나 덩그마니 뜬 밤하늘이 올려다보이는 들창 앞 앉은뱅이 책상에서 작은 스탠드 조명 하나를 켜두고 읽으면 더욱 어울릴 것 같다.


 아얏! 고양이가 엄지발가락을 깨문다. 수염을 자꾸 건드려 화가 났나 보다. 헤세의 조언대로 아프지만 이 고통도 사랑해야지. 물었던 너도 사랑하고.


 마지막으로 꼭 인용하고픈 헤세의 시


  -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


 화요일에 할 일을

목요일로 미루는 일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 나는 불쌍하다.

그는 그렇게 하면 수요일이 몹시 유쾌하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한다.

(p. 280) 


 내 말이. 역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작가라니까,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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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 1~2 세트 - 전2권 소설 조선왕조실록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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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정도전의 바람이 거세다. 정도전을 주인공으로 한 대하 드라마가 방영 중이고 그에 대한 책들도 잇달아 나오고 있다. 그 숱한 정도전에 관한 책들 중에 김탁환의 '혁명'을 들어야 한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먼저 김탁환이라는 이름에 있을 것이다. 굳이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그 이름은 이제 역사 소설에 있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 중 하나가 되었으니까. 대부분 가장 혼돈스러웠던 역사적 시기에 그 역사적 소용돌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인물들을 주로 그리면서 그들의 선택과 그 여파를 그려왔던 그의 소설들은 늘 재미와 깊이를 모두 보장한다고 정평이 나 있었던 바였다. 그런 그가 조선 건국이라는 역시나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 그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정도전을 그리고 있으니 일부러라도 들춰보지 않을 까닭이 없다.



 하지만 과연 작가의 그 이름 뿐인가? 굳이 그것이 아니라도 상관없다고 생각된다. 설사 그 이름을 괄호치더라도 이 소설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게 작가의 이름보다 더 큰 이유가 되리라고까지 생각한다. 거기에 대한 설명을 그 설명을 먼저 이렇게 시작해 보자.


  이 소설은 거대한 행보의 첫 발걸음이다. 어쩌면 아주 길지도 모를 행군을 앞두고 처음 올리는 봉화라 해도 무방하다. 현재 김탁환은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 유네스코가 세계 유산으로 인정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조선왕조실록을 모두 60권의 소설로 형상화하겠다는 바로 그 꿈이다. 정도전처럼 그도 참으로 거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제 우리도 발자크의 '인간 희극'에 버금가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을 가지게 될 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온 '혁명'은 바로 그러한 꿈의 시작인 것이다. 


  '혁명'은 제목 그대로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했을 경우 당신이 예상할 수 있는 것에서 이 소설은 살짝 벗어나 있다. 혁명이 이루어지는 그 과정 전체를 보여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에 대한 실록 기록 모두를 소설이 형상화하고 있지 않는다는 말이다. 정확히 소설이 담는 시간은 겨우 18일이다. 정도전이 새로운 나라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이성계를 만나 혁명에 대한 꿈을 심어주고 포은 정몽주와 더불어 신진사대부 세력의 주축이 되어 조선을 건국해가는 시간은 그보다 훨씬 길었지만 소설은 이성계가 낙마하고 정몽주와 정도전이 서서히 갈라지고 결국 정도전으로서는 예상 밖으로 정몽주가 이방원의 손에 참살되고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신하들의 간언에 따라 고려의 왕족인 왕씨를 모두 살해하기까지의 기간만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김탁환이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온전히 드러나는 듯 하다. 소설의 부제는 광활한 인간 정도전이지만 사실 김탁환이 보여주고자 하는 건 정도전이라는 인물이 아니다. 솔직히 여기서 정도전이란 인물은 주축이라기 보다는 관찰자에 더 가깝다고 본다. 자기가 꾸었던 원대한 꿈, 뜻이 맞은 동지들이 함께 꾸었던 커다란 이상이 권력 획득을 위한 현실 논리에 빛이 바래지고 처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관찰자.


 어쩌면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꾸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꿈의 변질이다. 현실을 이길 수 없는 이상의 무력함 같은 것. 그렇게 두터웠던 신의마저 현실적 계산 앞에서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는 씁쓸함. 


 왜 이런 말을 하느냐고?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바와는 달리 정도전과 정몽주는 서로 반발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목은 이색 아래에서 같이 동문수학 했었던 그들은 그 어떤 이보다 더 가깝게 지냈던 사이였다. 조선의 백아와 종자기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들은 나라를 새롭게 바꾸겠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 꿈을 위해 같이 노력했다. 세상 그 어떤 유대보다도 더 긴밀한 유대가 그들 사이엔 있었다. 이는 뒤늦게 그들의 관계에 동참한 이성계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됨됨이, 포부를 잘 알았고 설사 정적이 되었더라도 그 깊은 이해를 통해 서로를 포용해줄 줄 아는 그릇들이었다. 사실 정도전이 꿈꾸던 세상도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무력으로 타자를 다스리기 보다는 말로 서로를 설득하여 합의를 도출해나가는 나라. 그런 토론이 그가 꿈꾸던 재상 국가의 바탕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랬던 정도전이 흔들린다. 아무 것도 없었던 시절엔 꿈 하나로 모든 것을 믿고 의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곧 뭔가가 손아귀에 들어온다고 느껴지자 사소한 것 하나도 오해를 낳는 이유가 되고 두려움에 젖게 할 근거가 되며 해치워야 할 당위가 되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든 것인가? 꼭 이것이어야만 한다는 고집. 남의 길을 헤아리지 않는 아집. 목표의 실현이 가까워질 수록 시야는 좁아져 이제 자기 발 아래의 것 밖에는 보지 못한다. 나여야 한다. 나만이어야 한다. 조화와 균형이 주축이 된 이상은 그렇게 폐허가 되고 정도전은 끝내 지우지 못할 상처로 남을 실수를 하고 만다.


 포은 정몽주의 죽음. 그것은 지울 수 없는 얼룩이다. 정도전이 자신의 이상대로 아무리 훌륭한 나라를 세우더라도 그것은 대들보를 무너뜨리고 서까래를 부술 것이다. 그것은 내내 자신에게 물을 것이다. "이게 바로 네가 세우고자 한 나라였나? 나의 죽음을 무릎쓰고서라도?"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정도전은 내내 침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매와 망량. 소설은 자주 그들을 언급한다. 정도전은 이매망량전을 쓴다. 그 이매와 망량은 정도전과 정몽주의 관계를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이다. 같은 꿈을 꾸고 한 몸처럼 같이 활동했던 그들은 결국 한 몸은 죽고 다른 한 몸은 헛되이 살아남아 갈라진다. 정몽주와 정도전이 그랬듯이. 이매와 망량의 파국은 정도전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의 이상이 투영된 조선의 실패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다른 이를 널리 포용하지 못하는 이상은 연약한 마른 풀처럼 권력이라는 현실의 잔바람에게 쉬이 넘어지게 마련이었다. 이방원은 바로 그 차디찬, 자신 밖에 모르는 권력의 냉엄한 바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존재였다. 이방원이 조선의 미래를 장악하려 하고 있었다. 정몽주의 죽음으로 인하여 생긴 균열은 계속 커지고 있는 형국이었다. 정도전은 그것을 본다. 그리고 예감한다. 결코 다시는 온전한 형태로 그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걸. 그저 넘어지려는 대들보를 등으로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게 할 수 있는 전부란 걸. 부서지는 서까래를 그 때 그 때 임시 변통으로 수리하는 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전부란 걸. 그 뻔히 보이는 지난한 과정 앞에서 그는 모든 걸 내려두고 낙향하려 한다. 포은의 무덤을 함께 찾아가자고 했던 이성계는 포은의 길도 괜찮지 않았을까 정도전에게 묻는다. 그렇다 한들 이제 어쩌랴. 이미 늦었는 걸. 자신의 옹졸한 두려움이 모든 걸 망쳐 버렸는 걸. 그저 할 수 있는 건 나날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혁명의 적, 이방원을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 뿐.


 스산한 가을 풍경 속으로 걸어가는 나그네의 등을 거칠게 내미는 바람처럼 씁쓸함이 갈수록 고이는 이 소설은 그렇게 바래져 버린 혁명의 주검들을 어떻게 보면 부검의의 시선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었다. 거기서 거꾸로 우리들은 '혁명'이라는 걸 생각해 보게 되는 듯 하다. 타산지석이라고나 할까? 아무리 거창한 이상도 결국 남을 포용하지 않고 자신의 것만 집착하다간 속절없이 쓰러지게 마련이라는 것을. 또한 한 번 믿음을 준 이를 가볍게 여기기 보단 그 됨됨이를 믿는다면 중요한 기로의 순간 내 판단 보다는 먼저 그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의 편에서 생각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거창하게 혁명까지 나아갈 것도 없이 삶에서도 얼마든지 필요한 그 말들, 마음들을 헤아리게 된다.


 꿈은 광활했으나 거기에 걸맞는 그릇이 되지는 못했던 정도전. 김탁환의 이 소설은 결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닐 이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광활함에 대하여 반추하게 한다. 결국 진정한 혁명이란 남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꾸는 일이다. 그렇게 부단히 나의 경계를 남을 더많이 포용할 수 있게 넓혀 가는 것. 그런 의미에서 광활하게 되는 것이 곧 혁명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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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끝의 남자
백민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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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그냥 지겨운 것 같다. 쓰면서도 지금 이걸 내가 왜 쓰고 있나 생각하는 것 같다.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버렸으면 하는 것 같다. 얼른 최후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 오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 소설 왠지 그렇다. 들어가야 할 때 들어가지 않고 미적거린다. 건드려야 할 때 미처 예기치 못한 통증이 있을지도 몰라 두려운 것처럼 머뭇거린다. 어두운 골목에서 사나운 불량배를 맞닥뜨린 아이와도 같이 도망칠 재간은 없고 그냥 눈 딱 감고 얼른 그들이 딴 데로 가버리기를 바라는 형국이다. 무덤덤한 관찰자인 척 하지만 사실은 자학이다. 그는 그를 쓸모없다고 여기고 싶어서, 무력한 존재라고 여기고 싶어서, 아무 것도 안하는 존재가 아니라 할 수 없어서 못한다고 여기고 싶어서 관찰자인 척한다. 이 소설집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산책은 그러한 자학의 여정이다.('혀 끝의 남자' 단편은 인도 여행을 다루지만 다른 단편의 산책 묘사와 그리 다르지 않다. 결국 여행도 그에게 장거리 산책에 불과하다.) 백민석. 나는 그를 모른다. 이 책으로 처음 만났다. 듣자니 원래는 작품이 꽤나 폭력적이었던 모양이다. 뒤에 실린 해설에서 인용한 그의 말을 들어보면 그의 폭력은 생활의 분노에서 나왔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어렵게 산 그는 분노했었고 폭력은 그 표현이었다. 주먹은 세계라는 바깥을 향해 뻗어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자신에게로 향한다. 그는 맞기 위해 걷는다. 무너지기 위해 본다. 소진하기 위해 말한다.


 이런 느낌? (그림은 독일 출신으로 일렉트로닉 음악을 하는 MODERAT의 데뷔 앨범 커버)


 나는 혀 끝의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머리에 불을 이고 혀 끝을 걷고 있었다.

 남자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혀에서 불꽃이 일었다. 입이 바싹바싹 말라갔다. 단내가 사방으로 흘러넘쳤다. ('혀 끝의 남자' 시작 부분)


 이게 그다. 난 그렇게 느낀다. 자살할 장소를 찾는 여행자의 소설이라고... 죽기 위해 걷는다. 머리 위의 불꽃이 자신을 모조리 삼켜버릴 때까지 걷는다. 머리 위로 활활 불꽃이 타오르는 자에게 바라보는 풍경이, 만나는 사람이 무게를 갖기란, 자신의 관심을 끄는 인력을 갖기란 힘들다. 사람은 그저 남자와 여자로만 나뉠 뿐, 익명으로 간단히 처리되고 행동 역시도 뚜렷한 자취를 남기지 못한다. 사건도 공간도 다 그렇다. 그저 열차의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에 불과할 뿐이다. 빨리 잊어버리기 위해 보는 속도를 더한다. 말의 속도를 올린다. 서 있는 곳의 삶이라는 중력이 자신을 사로잡기 전에 서둘러 벗어난다. 그 곳의 그 어떤 것도 그에게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머리에서 불타오르면서 현존하는 고통은 무의미의 자각이며 그 어디서도 기꺼이 책임으로써 삶을 짊어지기에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다는 절망이다. 한 발 더 내디디면 한 뼘 더 아플 뿐이다. 내내 그것의 확인만 이어진다.


 무의미, 무의미, 무의미...


 십 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어도 내 표정은 아직도 기본형이다. 그리고 여전히 내 삶과 세계의 많은 것들이 의미 없게 느껴진다.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콘' P. 229) 


 한 때는 그렇지 않은 곳이 있었다. '폭력의 기원'에 나왔던 작은 절곳과 같은 곳이. 순수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때가.

 하지만 이제 그런 곳은 사라졌고 더이상 갈 수도 없다. 그는 미로에 빠져 버렸다. 방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곳곳에 우회로를 강요하는 바리케이트가 있었던 것이다. 그건 '폭력의 기원' 단편에서처럼 누군가에게 속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혹은 '신데렐라 게임을 아세요?'처럼 문학이라는 것도 결국엔 뚜쟁이의 수단이 될 수 밖에 없는 이 자본주의라는 사회 자체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든 지금 있는 이 곳이 부활의 날이 올 때까지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연옥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그런 세계에서 쓰는 글이란 일기와 다를 바 없다고...


 우리는 더 이상 행동이 가능하지 않을 때 일기장을 펼친다. 그래서 나도, 심각한 이 모든 질문들을 뒤로하고 우선 일기를 쓰기로 했다.('연옥 일기' P.84)


 다른 이들이 그러듯이 여기의 소설들이 자전적인 냄새가 많이 난다면 애초부터 그가 일기로 작정하고 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에게 이런 시대의 문학이란 일기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기 때문에. 왜냐하면,


 지금 돌이켜보니, 이 세계에 대한 어떤 묘사도 충분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 세계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도 충분한 것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충분치 않다. 세계가, 대상이 충분하지 않은데 어떻게 그 재현이 충분할 수가 있을까? ('연옥일기' P. 85)


 이러하기 때문이다. 결국 어떻게 하든 자기가 본 것, 느낀 것, 생각한 것 이상을 하기란 어렵고 일기를 넘어서기 어렵다. 그는 그것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래서 주제 넘는 짓을 하지 않는다. 타인의 이유를 알 수 없는 행위에 대해 끝까지 파고 들어가 아는 척 하는 것 혹은 있을 성 싶지도 않을 여인과의 깊은 교제 같은 것 따위를. 독자들이 혹할만한 이야기를 만들지도,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지도, 기승전결을 완벽하게 이루거나 인과관계를 정확히 설정하거나 하는 따위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현실에서 있을 법 하지 않은 모든 것을 거부한다. 그건 자신의 모습이 아니고 결국 누군가가 쓴 여행 가이드 대로 여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해 셋 다 동일한 저자의 여행 가이드 북을 챙겨왔고 그동안 여행 경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한국인에게 알려진 숙소며 관광지도 한정돼 있으니('혀 끝의 남자' P. 19)


 이건 그동안 주로 독서를 통해서 세계를 해석해 온 자신에 대한 비아냥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한 여자는 여행지의 실제 사정이 가이드 북과 전혀 다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역시 세상이 텍스트 대로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바로 그것이 '연옥 일기'에서 재현의 불충분이란 말이 나오게 된 이유가 아닐까? 어쩌면 그 같은 한계로 인해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콘'의 마지막 문장처럼 글쓰기에 대한 사랑을 다시 시작했는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전과 같이 다 안다는 듯이 주제 넘게는 하지 말고 일기를 쓰는 것과 같이 소박한 정도로만...


 아마도 그렇게 이건 스스로 의미라는 걸 만들어 보려는 노력의 산물일 것이다. '혀 끝의 남자'에서 신들의 나라 인도에서도 찾지 못했던 신을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에서 찾는 것도 그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재현이 불충분할 수 밖에 없는 연옥과도 같은 이 곳에서 산책과도 같은 '쓰기'란 쓰면 쓸수록 모자람만 각인시키는 고통의 여정이지만, 그래서 쓰기 싫고, 들어가기 보단 빠져 나오려고 하고, 머무르기 보단 벗어나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발끈을 다시 매고 있다. 여정은 이제 겨우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그를 좀 더 지켜보고 싶다.




 소설을 읽을 때 많이 생각났던 뮤직 비디오다. 존 홉킨스의 'OPEN EYE SIGNAL'이란 곡인데 폭력에 의한 마음의 상처를 간직하고 내내 보드를 타고 자신의 여정을 계속하는 뮤비의 느낌이 이 소설과 많이 비슷해 보였다. 처음 리뷰 쓸 때는 생각 안나더니 주말 아침에 갑자기 생각났다. 사람의 기억력은 때로 참 이상하게 작동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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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2-15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과 세상이 다른데 글은 써서 뭐 하나 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하지만 그래도 쓰고 싶어진 것인지, 이제부터는 큰 뜻보다는 작은 뜻을 위해서 쓰자인지...
자신이 깨닫기 위해서일지도...

현실과 달라도 재미있는 이야기도 좋죠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