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옳다 -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정혜신 지음 / 해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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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년에 꼭 한권 이상의 심리학 서적을 읽으려 노력한다. 심리학 서적을 읽어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책을 펼치지만, 심리학 서적을 읽고 나면 나 자신에 대해서 깊이 성찰했다는 위안을 얻는다.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라는 책도 그러한 책이다. 학부모와 학생을 상담해야하는 일이 많은 나로서는 효과적인 상담을 위해서 이 책을 선택했지만, 책에 빠져들면서 공감 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어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정혜신은 이책에서 공감의 위력과 공감의 방법을 자세히 서술한다. 공감은 상대방의 마음의 문을 여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공감은 곧 준중을 뜻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유가족과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에게 상담활동을 해온가 '정혜신의 적정 심리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책을 내 놓았다. '적정 심리학'을 달리 말하면 '실전 심리학'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전쟁과 같은 현장에서 그녀가 내놓은 절규를 살펴보자. 


1. 우리를 진단하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은 '왜 우리는 아픈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보통의 사람들이 고단한 우리 현실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그러나 정혜신은 '존재'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부와 인기를 한몸에 거머쥔 연예인들이 공황장애를 겪는 이유도, 오랜 세월 인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지혜를 얻었을 것으로 보이는 노인들이 태극기 부대가 된 이유도, 청년 고독사가 벌어지는 이유도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자기 소멸의 벼랑끝에서 벌어지는 아픈 사건들이라 정혜신은 진단한다. 

  그렇다. 우리는 빠르게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다시 정보화 사회로 성장을 일궈왔다. 농업사회의 전통적 공동체는 해체 되었다. 도시라는 낯선 곳에서 우리는 지연과 학연에 의지해서 고립을 피하고 안정을 찾으려했다. 그러나, 사회의 변화는 더욱 빨라졌다. 원자화된 개인은 현대 도시의 정글에서 고독히 살아남아야했다. 그러면서 존중받지 못하고, 군중속의 이름없는 한사람으로 쓸쓸히 고립되어간다. 그 고립이 심할수록 쉽게 태극기 부대에 합류하기도하고, 고독사하기도한다. 이에는 청년도 예외가 아니다. 강북에 비해서 강남에서 청년 고독사가 비율이 더 높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가장 부유한 곳에서 가장 고독한 존재가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이러한 원자화된 개인들은 자기 소멸의 벼랑끝에서 공황장애를 얻기도한다. 그러하다면, 정혜신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을 무엇으로 보고 있을까? '당신이 옳다.'는 공감이라 제시한다. 우선 위기에 처한 우리가 우리에게, 아니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응급처치는 무엇일까?


2. 심리적 응급처치 방법

  정혜신은 심리적 응급처치 방법을 알려주기 전에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무관심의 문제를 지적한다. 어느 한사람이 죽어도 이에 무관심한 우리 사회에 누군가는 응급처치를 해야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나서기 보다는 전문가들에게 맡기려한다. 정혜신은 이를 '일상의 외주화'라고 말한다. 자격증이라는 제도를 만든 이유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려 만들었는데, 오히려 자격증 있는 사람만 사람을 살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자격증은 우리 일상의 외주화를 정당화하고 이에 의존하는 가장 좋은 제도가 되어버렸다. 피흘리며 쓰러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응급처치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해야한다. 여기에는 자격증이 필요치 않다. 

  정혜신은 현대 정신과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진다. 일상적인 우울증조차도 질병으로 규정하고 약으로 이를 쉽게 해결하려는 아닐한 모습에 질문을 던지며 기본으로 돌아올 것을 절규한다. "감정은 내 존재의 핵이다."라고 말하며 정신병으로 규정하고 약을 먹기 보다는 감정이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분임을 받아들이라는 상식적인 말을 한다. 우리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감정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존재가 희미해지는 이웃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강하게 몸부림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들의 극단적인 선택을 막기 위한 가장 중요한 응급처치 방법은 "'나'가 또렷하게 돌아올 때까지 그의 '나'가 위치한 바로 그곳을 강하게 압박"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는 따뜻한 감정에 관심을 갖는 질문을 건넬것을 제안한다. '충고, 조언, 평가, 판단' 즉, 충조평판하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에 집중하며 경청하라 말한다. 

  상대방의 감정에 관심을 갖는 것! 그의 존재에 관심을 갖는 것이 우리들 가까이에 있는 존재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임에도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고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다. 교사 첫발령을 중학교로 받았을 때 일이다. 학교에서 유난히 목소리가 크고 쾌활한 기술선생님이 계셨다. 부인과 사별하고 자녀를 키우며 살았는데, 전혀 우울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날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서도 발견되었다. 그 선생님의 장례식장을 지키면서 자살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선생님은 밝은 모습의 선생님이라 어느 누구도 우울증을 앓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존재에 관심을 갖았다면 자살을 막을 수 있었다는 미련이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다. 그렇다면,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공감의 힘에 대해서 살펴보자. 


3. 공감의 정석

  정혜신은 사람을 살리는 결정적인 힘이 바로 '공감'이라 말한다. 공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감해야할까? 과녁을 정확히 맞혀야한다. 세상사에서 그 자신으로 초점을 맞추어야한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 보다는 달을 가리키는 그를 보아야한다. 그렇다고 "칭찬이나 좋은말 대잔치와는 다르다."때로는 잘못된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어야한다. 그렇게 상대방에게 공감을 하다보면, 그의 마음의 문이 열린다. 마치 문이 존재 자체라면, 문고리는 감정이며, 문고리를 돌리는 힘은 공감이 된다. 이 공감이 피흘리고 상처입은 그에게 공감은 썩은 부위를 도려내는 매스이자, 상처부위를 치유하는 연고가 된다. 

  마음과 행동은 별개이기에 범죄자라도 공감을 해준다. 바꿔말하면 감정이 옳다고 행동까지 옳은 것은 아니다. 범죄자에게 공감을 해며 그 행동뒤의 마음을 물어볼 수는 있지만, 그의 행동을 정당화해줄수는 없는 것이다. 

  정혜신이 제시한 공감의 방법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아니, 우리의 상식에 기초해있다. '모모의 시간여행'이라는 소설에서도 모모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상대방의 말을 들어준다. 상대방은 스스로 말을하며 모모에게 공감을 얻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간다. 이러한 모모의 상담방법은 우리가 상담연수를 받을 때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상담의 절차와도 일맥상통한다. 경청을 통해 공감해주고 이를 통해서 상대방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안내해주는 상담자의 역할을 정혜신은 '공감'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하고 있다. 인생의 정답은 멀리 있지 않다. 일상속에 정답이 있다. 상대를 이해한다고 그의 행동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절교할 용기도 필요하다는 지적은 친절하지만 단호한 교사가 되라는 조언과도 일맥상통한다. 진리는 우리 주변에 있었다. 


4. 나를 보호하기.

  상담을 하고 나면 기운이 쪽빠진다. 나의 머리는 엄청난 과부하로 복잡해져있다. 그러하기에 전문 상담사분들이 존경스러울 때가 많다. 일명 '전이'라는 현상이 나타나서 상대방의 감정을 나도 느끼게 되어 괴로움을 겪는다.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려 물에 뛰어 들었다가 같이 허우적되는 듯한 기분을 여러번 느낀다. 이러한 위기에 자신을 보호할 방법은 무엇일까?

  정혜신은 상대방에게 공감하면서 자신을 보호할 방법의 출발점을 우리는 모두 개별적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시작한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모두 존중 받아야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부모라 할지라도 결혼, 진로와 같은 개별적 존재로 준중받아야할 부분을 침해할 수 없다. 또한 갑을 관계에서도 존중받아야할 개별적 존재인 나를 중심에 두고 행동해야한다. 그리고 때로는 관계를 끊는 것도 좋은 해결책이 된다. 부모라는 이유로 헌신을 요구해서도 안된다. 자식이라할지라도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가 져야한다.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자만이 타인을 구해줄 수 있다. 스스로를 구해줄 수영도 하지 못하는 자가 무모하게 물속에 뛰어든다면, 친구도 죽고 스스로도 죽게 된다. 

  정혜신이 상담과정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제시한 원칙들은 철학자 강신주가 대중강연에서 말한 '단독성'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각자가 존중받아야하는 단독적 존재라면 그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가 져야한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같이 가슴 아파할 수는 있지만, 그에게 손을 내밀수는 있지만, 그 고통에서 오롯이 벗어나야할 책임은 그에게 있다. 그가 존중받을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일에 주인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5. 공감의 장애물 걷어차기

  정혜신은 진정한 공감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걷어차는 방법을 소개한다. 정혜신은 먼저 '다정한 전사'가 되라고 조언한다. 누구나 존중받아야하는 존재라는 점을 유념하며 무엇에 다정하고 무엇에 전사가 되어야하는지 명확히 분별하라고 조언한다. 감정에는 고정된 좋고 나쁨이 있을 수 없으며, 감정은 나를 점검하는 신호란점을 명심하자. 가까운 연인이 결혼하고 나서 부부싸움을 하고 심하면 이혼을 하듯이 가까운 사람이기에 더욱 공감이 힘들다. 충족되지 않는 사랑의 욕구는 더욱 심해지기에 가까운 사람에게 더욱 관심을 갖자. 가까운 사람에게 관심을 갖기에 앞서 혹시 내 안에 남아 있는 컴플렉스가 있는지 점검하자. 내 안에 있는 나의 컴플랙스를 먼저 치유해야만 타인의 감정에 귀 기울일 수 있다. 그리고 잊지 말자. 우리는 개별적 존재이다. 단독적 존재이다. 개별성을 지우는 집단적 사고에 맞서고, 유형과 조건으로 사람을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 "한 사람의 외형적 무엇에 압도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진정한 공감이 가능하다. 

  정혜신이 제시한 진정한 치유를 가로막는 방해물 중에 "나중에 후회하거나 힘들다고 하지마라."라는 말이 있음을 확인하고 무척 충격을 받았다. 내가 학생들에게 많이 해왔던 말이다. 문과와 이과 선택, 선택과목 변경시에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이 말을 덧붙였다. 너의 선택이니 중간에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해주었던 말이 학생들의 퇴로를 막는 말이었다. "사람은 자기가 안전하다고 느껴야 자신이 놓인 상황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볼 수 있다."는 정혜신의 지적에 뼈가 아파왔다. 학교에서 다음 학년의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언제까지나 학생의 과목변경을 들어줄 수 없다. 이것은 현실적인 이유이다. 그렇다하더라도 "나중에 후회하거나 힘들다고 하지마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말을 해야할까? "너의 선택이 현명한 선택이기를 선생님도 바란다."라고 말하면 될까?


6. 이제 실전이다. 

  효과적인 공감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정혜신은 진심으로 궁금해야 질문이 나온다고 말한다. 아들의 애인을 물어 보듯이 관심을 갖고 질문하자. 상대방과 똑같은 감정을 느낒 않아도 된다. 상대방의 "마음을 받아 안는것 그것을 바탕으로" 그의 "존재 전체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공감이다." 이러한 공감을 할때 반드시 '나'에 대한 공감을 해야한다. 먼저 자신을 치유하지 못한다면 타인을 치유할 수 없다. 나의 사과가 필요하다면 상처받은 아이에게 온 체중을 실어 사과하자. 부모, 교사, 상사라 할지라도 잘못을 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서 진정으로 사과하자. 상대를 위한다는 핑계로 '총조평판'은 하지 말자. 때로는 거짓 공감도 위대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공감하자. 

  상담연수를 받았을 때, 교수님이 하셨던 말이 있다. "천명의 아이를 잡아먹어라." 천명의 아이를 상담하면서 상담의 노하우를 쌓아가라는 말이다. 처음부터 탁월한 상담가가 될 수는 없다. 훌륭한 상담가가 아니라고 상담을 회피하면 영원히 초보자로 머물수밖에 없다. 끊임 없이 상담하며 끊임 없이 배우고, 끊임 없이 갈고 닦자. 그것이 좋은 상담가가 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시중에는 수많은 심리학 서적이 있다. 재미있고 유익한 정보로 가득찬 심리학 서적이지만, 우리 생활에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라는 책은 '공감'이라는 키워드로 현실 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상담의 방법을 제시했다. 물론, 정혜신이 제시한 공감의 방법과 공감의 필요성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다른 심리학 책에서, 상담 심리 연수에서 들어왔던 정보였다. 그러나 그때는 '공감'이라는 두글자가 가슴 깊이 들어오지 않았다.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라는 책을 통해서 '공감'이라는 두글자가 나의 가슴이 깊이 새겨졌다. 우리는 준중 받고 싶어하는 존재이기에 공감을 원한다. 공감을 통해서 타인에 관심을 갖고 그와 소통할 수 있다. 이 책을 사춘기 자녀와의 갈등으로 괴로워하는 수많은 학부모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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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이야기 3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3
김명호 지음 / 한길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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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여름은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 스리즈와 함께 보내고 있다. 계획하지 않았지만, 김명호의 흥미진진한 중국인 이야기 속에 빠져들어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땅도 드넓고 사람도 많다. 다양한 중국인들이 드넓은 중국 대륙에서 펼치는 이야기는 한권에 담을 수 없는 드라마이다. 너무도 많은 인물들이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그중에서 책을 덮고도 잊을 수 없는 깊은 인상을 준 인물들의 이야기를 해보자. 


 '중국인 이야기3'의 시작은 중국과 타이완의 통일과 관련된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타이완은 중국과 통일을 추구하는 외성인과 타인완 독립을 추구하는 본성인으로 나뉜다. 김명호는 타이완 독립을 추구하는 본성인의 목소리는 철저히 배제한채, 통일을 추구하는 외성인의 이야기만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타이완을 중국의 일부로 보는 시각을 저자가 가지고 있어서인지, 단순한 서술상에서 발생한 우연인지는 모르겠다. 

  암튼, 김명호는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자'라는 주제로 덩샤오핑과 위유런을 소개하고 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사후, 1인자로 등극하면서 개혁과 개방을 이끌어낸 지도자이다. 그는 중국과 타이완의 통일을 바라며, 타이완의 모든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미국의 타이완 투자는 계속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하나의 나라에 두개의 체제를 의미하는 '일국양제'가 가능하다는 주장이 이 시기부터 나오기 시작한 셈이다. 덩샤오핑이 말한 '일국양제'는 현실에서 무너지고 있다. 홍콩이 바로 그 증거이다. 홍콩 시민의 민주화요구는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그렇다면 덩샤오핑이 타이완에게 했었던 일국양제의 약속은 타이완을 속이기 위한 사탕발림 발언에 불과했을까?

  덩샤오핑이 정치적으로 타이완과 통일을 위한 한걸음을 나아갔다면, 정신적인 통일을 위해서 노력한 사람은 위유런이다. 중국과 타이완 사람들이 쑨원 다음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위유런이다.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유명하지만, 우리에게는 생소한 인물이다. 그는 중국과 타이완의 통일을 위해서 노력했다. "조국을 두 동강 낸, 못난 조상 소리 들을 생각하면 진땀이 난다."고 말하며 중국 대륙을 바라볼 수 있도록 가장 높은 산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했다. 그의 유지를 받들어 타이베이에서 가장 높은 관음산에 그가 묻혀 있다. 타이완 인은 이것도 모자라서 해발 3,997미터 옥산 정상에 대륙을 향해 위유런의 동상을 건립했다. 그가 죽자 "심지어 건달들까지도 위유런의 '망대륙'을 노래하기 시작했다."고 김명호는 서술하고 있다. 

  김명호는 철저히 타이완 독립을 주장하는 본성인의 목소리는 배제하고 있다. '중국인 이야기3'을 읽으면, 타이완의 모든 사람들이 통일을 바라는 것 처럼 오해를 하기 충분하다. 그러나, 중국이 중화패권주의를 내세우며 '전랑'외교를 구사하면 할 수록 중국의 반감이 높아진다. 중국에 대한 반감이 높아질수록 타이완 독립을 주장하는 본성인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진다. 일국양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타이완인들은 중국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하는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위유런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나의 중국이 올은 것일까? 타인완 독립도 타당한 주장일까? 중국은 우리의 이웃이기에 타이완과 중국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며 우리의 의견을 준비해야한다. 중국이 이 질문에 대답을 요구할 날이 다가오고 있으니 말이다. 

  중국에 대한 비호감이 높아져가는 이유는 중국의 '전랑'외교 때문이기도하지만, 또하나의 이유는 코로나19가 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믿음이 전세계에 퍼져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부정할지라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코로나 19가 중국 우한에서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다. 중국 관영매체는 코로나19 위기로부터 우한을 구하기 위해서 달려가 수많은 의료진의 활약상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서 선전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의 안위보다는 생명을 살려야한다는 의료인의 사명감을 가진 영웅이 그 이전에도 있었다. 1910년대 중국 동북 3성에서 활약한 페스트 사냥꾼 우롄더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우롄더는 페스트를 잡기 위해서는 쥐를 잡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서구 의학계의 통념을 깨고, 세계 최초로 폐페스트를 발견했다. 호흡기에 의해서 페스트가 전염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롄더가 발견했음에도 동양인 의사에 대한 편견으로 백인들은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헌신적 노력으로 동북 3성에 급속도로 퍼진 페스트를 잡아낼수 있었다.1937년 일본군의 중국침략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우롄더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이를 뿌리치고 말레이시아 벽촌에 돌아와서 화교들의 열대병을 치료하닥 생을 마감한다. 조국을 위해서 중국으로 달려와 수많은 생명을 살려고, 명예를 소중히 여겼지만, 명예를 쫓지 않은 영웅 우롄더를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우롄더는 중국만의 영웅이 아니다.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이 땅의 수많은 우롄더가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수많은 우롄더가 우리 주변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영웅을 기억해야한다. 

  '중국인 이야기2'에서는 홍색 연예를 살펴보면서 너무다도 얽히고 설킨 그들의 연예 이야기에 혀를 내둘렀다. '중국인 이야기3'에서도 중국인들의 자유로운 연예이야기가 등장한한다. 그중에서 후스의 이야기는 짜증날 정도로 복잡했다. 우리는 후스는 신문화운동을 주도한 지식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장동슈라는 본부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웨이런쓰라는 백인여성과 친척인 차오페이셩을 비롯한 쉬팡등의 다양한 여성과 사랑을 나누었다. 때로는 한꺼번에 두명 이상의 여성과 연예를 하기도했다. 본부인과 이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장동슈에게 이혼을 요구하자 장동슈는 칼을 들고 잠자고 있는 아들들을 죽이려하자 후스가 싹싹빌었기에 이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후스는 몸은 결혼상태였지만, 마음은 이미 이혼한 상태였다. 이런 천하의 바람둥이를 보면서 그를 비난하는 나자신을 발견했다. 이것은 후스의 비도덕적인 모습에 분노해서일까? 아니면 나도하지 못한 일들을 그가 하는 것에 대한 부러움 때문일까? 암튼, 후스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진 것은 분명하다. 

  주체할 수 없는 바람끼 때문에 후스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진 인물이라면, 루신은 형제간의 의가 상한 이유가 궁금해서 궁금증을 자아내는 인물이다. 루신 3형제는 사합원에서 각각 가정을 이뤄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루신과 동생 저우쭤런은 철천지 원수가 되어 갈라섰다. 그 원인에 대한 다양한 설들이 있다. 루신이 동생 부부의 모습을 밤에 훔쳐보았기 때문이라는 주장과 저우쭤런의 헤픈 씀씀이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어느 팟캐스트에서는 루신과 저우쭤런의 부인 사이에 어떠한 문제가 원인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무리한 추측을 할 필요는 없다. 

  난 이 이야기에서 고슴도치 가족의 지혜를 떠올렸다. 추운 겨울에 고슴도치는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한다. 너무 가까우면 고슴도치는 서로의 가시에 찔려 상처를 받는다. 너무 멀면 겨울 추위에 고통을 받아야한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해야하는데 루신의 삼형제는 사합원이라는 너무도 좁은 공간에 모여살면서 서로의 가시에 찔렸다. 노자는 이를 '허(虛)'라고 표현했다. 그릇은 빈공간이 있어서 쓰임새가 있다. 방도 빈공간이 있어 방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우리에게도 적당한 빈공간이 필요하다. 서로의 가시에 찔리지 않고 우리가 우리로 기능하기 위한 적당한 공간이 필요하다.



  김명호는 40년 가까이 중국을 연구했다. 그에게 중국은 놀이터였다. '중국인 이야기' 스리즈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과 그들의 이야기는 즐기면서 중국을 연구한 그가 아니라면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그중에는 중국과 북한의 끈끈한 인연을 소개한 부분도 있다. 김일성을 '조선족 김일성'이라 부르는 중국인 역사학자의 주장을 알고는 무척 놀랐다. 그러면서도 다민족 국가 중국의 입장에서는 김일성을 '조선족'이라고 부를 수도 있음이 이해갔다. 어느 시각에서 역사를 발보느냐에 따라서 동일한 사건, 동일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김명호는 '중국인 이야기'를 통해서 중국인의 색다른 관점과 이야기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중국인 이야기' 4권에는 어떠한 이야기가 펼쳐질지 벌써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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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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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옥이라는 장소는 억압의 장소이다.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여 고통을 주는 장소이다. 그러나, 세상이 나의 자유를 빼앗아 고통을 주려할지라도, 나의 내면의 자유까지 빼앗지는 못한다. 감옥을 '대학'이라고 말한 고 김대중 대통령,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통해서 주옥과 같은 글들을 남긴 고 신영복 선생은 감옥에서 영혼의 자유를 지켰다. 감옥이라는 고통의 공간에서 영혼의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서 처절한 노력을 한 빅터 프랭크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통해서 제3의 심리학을 탄생시켰다. 감옥에서 절망하지 않고 영혼의 자유를 지키려 노력한 소설이 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가 바로 그 책이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어떻게 수용소에서 영혼의 자유를 지켰을까?



  빅터 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읽었을 때, 수용소가 군대와 너무도 유사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인상은 알렉신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책 곳곳에서 먹는 것에 집착하는 모습이 묘사되어있다. 죽한 그릇을 더 먹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 그릇과 숫가락까지 싹삭 핱는 모습에서 수용인들의 배고픔이 읽혔다. 그리고 군복무 시절,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팟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초코파이 하나를 먹기 위해서 가지도 안던 교회를 다녔다. 그런데, 휴가를 나오면 그렇게도 맛있어 보였던 초코파이에 눈길이 가지 않는다. 수용소와 군대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했고, 그러한 억압속에서 생존이라는 너무도 기본족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본능에 집착했다. 

 이 책의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도 역시 생존이라는 본능에 집착했다. 그러나, 본능에만 집착하는 동물이 되지는 않았다. 소련 공산당이 그를 동물 취급하며 수용소라는 우리안에 갖아두었지만, 이반 데니소비치는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최소한의 규칙을 만들었다. 수용소에서 식사를 하면서 모자를 벗었으며, 뇌물을 주어 좀더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뇌물을 주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뇌물이라는 것을 줘본 적도 없고 받아본 적도 없다. 수용소에 들어와서도 그짓만은 끝내 배우지 못했다." 이것이 이반 데니소비치가 동물취급을 받으면서도 인간성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이다. 

  수용소에서 혹은 군대에서 동물 취급을 받는다. "너희는 전쟁에서 한번 써먹기 위해한 소모품이야"라는 당직사관의 말을 들으면서도 소모품이 되기 싫었다. 사수가 되어 부사수에게 경계근무에 나설 준비를 하라고 했다. 나는 재발리 PX에서 먹을 것을 사가지고 왔다. 부사수에서 지금 당장 먹으라며 먹을 것을 주었다. 경계 근무지에서 경계근무 원칙을 부사수에게 외우도록 했고, 그러지 못하면 무척이나 면박을 주었다. 당직사관이 경계근무에서 복귀하는 우리에게 물어볼 것이 뻔하기에 경계근무 2시간 동안 부사수를 교육시킬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미안해서 부사수에게 물었다. 내가 밉지 않냐고.... 부사수는 의외의 말을 했다. 근무지에 가기전에 맛있는 먹을 것을 주어서 오히려 좋았다며 부사수는 웃었다. 그랬다. 먹을 것에 집착하는 동물적 본능에 우리는 충실했다. 그러면서도 나 혼자만 먹는 동물이 되기 싫어서 부사수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먹을 것을 나눠먹는 인간적인 모습에 부사수는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수용소에서도 군대에서도 우리는 인간으로 존재하려 노력했다. 

 수용소와 군대가 괴로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담배한대를 피우며 상념에 잠기며 안정감과 즐거움을 느낀다. 추운 수용소에서 작업을 하기 전에 난로를 쬐며 몸을 녹인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난로가 없어도 이 순간의 자유로움이란 너무도 행복한 것"이라며 이 순간을 즐긴다.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순간의 행복을 잃지 않는다. 이 모습은 빅터 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볼 수 있었던 수용소에서 수용자가 찾는 조그마한 즐거움과 너무도 일치하는 모습이다. 물론, 교회에 나가서 초코파이 하나를 얻어 먹으며 행복해하던 우리들도 마냥 행복했다. 아무리 극한 상황이라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현실이 아무리 좋더라도 희망을 잃는다면 지옥을 맛보는 것과 같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하루를 마감하며 "그렇다. 오늘 하루는 왠지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그래서 그런지 마음도 들떠서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라며 행복감에 취한다. 누구에게는 수용소 혹은 감옥이 하루도 있기 싫은 지옥일 텐데, 이반 데니소비치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 벌이는 강압과 통제 속에서 내면의 자유와 행복을 느끼고 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사형 선고를 받고 나서 감옥에서 독서를 통해서 엄청난 지식을 얻었고, 고 신영복 선생은 사형 선고를 받고 나서 풀려날 수 있다는 기약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고전을 읽으며 마음 수양의 장으로 감옥을 이용했다. 일체유심조라했던가! 나의 심지가 굳을 수록 외부의 강압에 맞서 승리할 수 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자전적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얇지만, 절대 얇지 않은 책이다. 스탈린치하의 소련 수용소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탁월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책에 1962년 소련에서 발표되었고, 1964년 레닌 문학상 후보에 추천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1974년 소련에서 추방되기 전까지 작가로 소련에서 생활을 했다. 우리는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기억하고 있다. 만약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와 같은 소설을 펴낼 수 있었을까? 북한이라는 곳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들이 소련에서는 가능했다. 그것이 그나마 소련과 북한의 차이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마음 한켠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쌓여져갔다. 러시아 출신의 한국인 박노자는 대중강연에서 소련시절 자신의 추억을 솔직하게 말했다. 빵을 구하려면 줄을 서야했지만, 소련시절 문화생활을 영위하며 공동체(미르) 속에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꼈던 아련한 추억은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소련에 대한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반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 비친 소련의 그야말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의 제국이다. 박노자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기억하는 소련의 모습은 너무도 다르다. 물론, 소련의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났던 박노자와, 조국 전쟁에서 제2급 훈장 및 붉은별 훈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반소 선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8년 교정 노동형을 선고받은 솔제니친이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 수는없다. 과연, 누구의 기억이 현실에 존재했던 소련의 실제 이미지에 가까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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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 3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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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 김용옥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마치 니체처럼 기독교는 도올 김용옥이 뛰어 넘어야할 커단란 산줄기였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자에게 강한 독설을 퍼부으면서도 기독교 연구에 수많은 저작을 남겼다. 니체가 '안티크리스트'라는 책을 쓰면서 참된 크리스트인이 되기를 촉구했듯이, 도올 김용옥은 수많은 크리스트교 저작을 통해서 참된 크리스찬은 어떠해야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는 이런 점에서 도올 김용옥의 탁월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2권에 이어서 3권을 1년 이상 읽었다. 하루에 한장 혹은 일주일에 한장, 그것도 안된다면 1달에 한장을 읽었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고, 이제 그 대장정을 마친다. 

  도마 복음은 예수의 언행이 이루어진 상황에 대한 설명이 없이 예수님의 말씀만을 모아 놓았기에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한 문헌이다. '논어' 처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에, 어떠한 관점에서 읽느냐에 따라서 서로 다른 진리를 얻을 수 있다. 도올을 통해서 내가 얻은 진리를 소개하겠다. 


1. 우리 모두 길잃은 양이 되자. 

107장

 Jesus said,  (중략) "One of them, the largest, went astray. He left the ninety-nine and sought the one until he found it. After he had gone to this trouble, he said to the sheep, 'I love you more than the ninety-nine."(예수께서 가라사대, (중략) 백마리 중에 가장 큰, 그 한 마리가 무리를 떠났다. 목자는 아흔아홉마리를 버려두고 그 한마리를 찾을 때가지 헤매었다. 그리고 이 모든 수고를 끝내었을 때, 목자는 그 양에게 말했다. '나는 아흔 아홉마리보다도 너를 더 사랑하노라!'


  크리스찬들은 자신을 양에 비유하고 크리스트교를 믿지 않는 사람을 길잃은 양으로 비유한다. 성경에 나와있는 이야기가, 도마복음에는 놀랍게도 길 잃은 양에 대한 칭찬으로 묘사되어 있다. 대중의 무리 속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양들보다는 무리에서 떨어져서 방황하고 도전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하는 큰 양을 예수는 더 사랑했다. 무리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길을 찾으려하는 모습은 청소년 시기, 자신의 부모에게서 독립하여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는 학생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미운 7살, 방황하는 청소년 시기에 뇌가 발달하면서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가 부모의 입장에서는 말안듣고 속썩이는 말썽장이 자식의 모습이겠지만, 사실은 도마 복음에서 사랑받는 커다란 양의 모습이었다. 

  도마 복음 속의 예수는 말하고 있다. 99마리의 양들처럼 순응하고 도전하지 않는 삶보다는 도전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하라,  모험을 즐겨라! 


2. 천국은 이땅위에 있다.  

113장

  His followers said to him, "When will the kingdom come?" "It will not come by watching for it.  (중략) Rather the kingdom of the father is spread out upon the earth, and people do not see it."(그의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가로되, "언제 나라가 오리이까?" "나라는 너희들이 그것을 쳐다보려고 지켜보고 있는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오지 않는다. (중략) 차라리, 아버지의 나라는 이 땅 위에 깔려 있느니라,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니라."

51장 (전략) "What you look for has come, but you do not know it."(너희가 기다리는 것은 이미 와 있노라. 단지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할뿐이니라.)

52장 (전략) "You have disregarded the living one who is in your presence and have spoken of the dead"(너희가 너희 면전에 있는 살아 있는 자를 보지 아니하고, 죽은 자들만을 이야기하는 구나!)


  수많은 크리스찬들이 나에게 전도를 하면서 죽어서 천국가려면 교회나오라고 말한다. 죽어서 천국가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라는 그들의 말이 나에게는 강한 반감을 주었다. 내새를 위해서 현새를 희생하라는 그들의 논리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개똥받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말처럼, 저승보다는 이승에서 행복한을 추구하는 것이 값지지 않을까? 

  그런데, 도마 복음속의 예수님은 철저히 현세에 천국이 있다고 강조한다. 천국이 언제 올 것이냐는 추종자들의 말에, 아버지의 나라, 즉 천국은 이 땅위에 깔려 있다고 말한다. 얼마나 거룩한 말인가!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에서도 주인공 남매는 파랑새를 찾아서 헤메지만, 파랑새는 남매 곁에 있었다. 단지 파랑새를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 도마복음 속의 예수님도 천국은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요, 물속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네 안에 있고 네 밖에 있다. 이 땅위에 깔려 있지만, 단지 사람들이 이를 보지 못할 뿐이다. 

  대학에 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에 가니 취직해야 행복할 줄알았다. 취직하니 결혼해야 행복할 줄알았다. 결혼하니 아이가 다 자라면 행복하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는 우리를 보고 나이드신 할머니분들은 "저 때가 행복할 때인데, 그때는 몰랐어"라는 말을 하셨다. 맞다. 행복은 지금 우리 옆에 있다. 단지 우리가 행복을 몰라볼 뿐이다. 내세이서, 다음생에서, 지금 이순간이 지나고 나서 행복을 찾으려는 어리석은 모습을 버리자. 행복은 이 땅위에 깔려 있다. 단지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3. 일부 눈먼 목사를 위한 조언 

34장 

Jesus said, "If a blind man leads a blind man, both of them will fall into a pit"(예수께서 가라사대,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서울의 어느 목사와 신도가 신자들을 현혹시켜 광화문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결국 코로나 19가 유행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는 언론 보다가 연이어서 등장했다. 도마 복음 속의 예수님은 그들을 '눈먼 자'라고 말할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수많은 신도들을 코로나19 감염의 위험속에 빠뜨린 눈먼 목사와 눈먼 신도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할까? 자신의 눈으로 성경을 읽지못하고,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기에 눈먼 목사의 설교를 듣고 구덩이에 빠지는 눈먼자들의 모습을 보며, 예수님은 눈물흘리지 않을까?


4.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

31장

Jesus said, "A prophet is not acceptable in the prophet's own town; a doctor does not heal theose who know the doctor."(예수께서 가라사대,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의사는 그 의사를 아는 자들을 고치지 아니한다.)


  이 말은 너무도 공감이 가는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녀석들은 지금의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렸을 적 그대 그대로의 내가 지금도 계속 되리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지금의 이 사람이 미래에도 이러한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지금의 이사람이 과거에도 이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이라는 엄청난 시간 속에서 잠시 만난 일부분이 그사람 이생의 전부인냥 생각한다. 그러하기에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선지자와 탁월한 의술을 가진 의사가 자신의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러니컬한 일들이 벌어진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에 휩싸여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변화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지금 만난는 이 사람도 그사람의 인생속에서는 한낱 찬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유념하자. 그사람의 변화가능성, 성장가능성을 인정하자. 



  도마복음 속의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이해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너무도 이해되지 않아서 이해하지 않은 채로 넘긴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101장의 내용이다. 


  "Whoever does not hate father and mother as I do cannot be a follower of me, and whoever does not love father and mother as I do cannot be a follower of me. For my mother gave me falsehood, but  my true mother gave me life."(내가 증오하는 것 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를 증오하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든지 나의 도반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 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지아니 하는 자는 누구든지 나의 도반이 될 수 없다. 나의 엄마는 거짓을 주었지만 나의 참된 엄마는 나에게 생명을 주었다.)


  101장의 내용을 당신은 이해할 수 있는가? 유교 문화권에 사는 우리에게는 긍정할 수 없는 표현이다. 도올 김용옥은 "세속적 엄마가 문자 그대로 거짓을 준다는 뜻은 아닐것"이라고 설명했지만, 101장의 예수님 말씀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다른 문화권에서 단편적인 말씀만이 기록되어 있는 도마복음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도마복음이라는 백사장에서 나의 인생을 함께할 조약돌 한두개를 주었다면, 나름 의미있지 않은가! 그래, 도마 복음과의 기나긴 여행이 끝났다. 이제 새로운 책을 찾아서 새로운 길을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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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이야기 2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2
김명호 지음 / 한길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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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1'을 읽고 중국인 이야기2를 읽기로 마음 먹었다. '중국인 이야기1'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의 나열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면, '중국인 이야기2'는 6개의 주제로 이야기를 묶으려는 노력이 보였다. 물론, 김명호 작가의 성격이 주제별로 이야기를 묶는데 별로 취미가 없는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만약, '중국인 이야기'를 8권 혹은 그이상 출판하려 했다면, 각권마다 부제목을 정하고 그 안에서 주제별로 이야기를 묶어야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명호는 그러지 않았다. 서문에서 그가 말했듯이, 중국은 그의 놀이터였다. 놀이를 하는데 순서와 규칙이 필요없다. 그것은 김명호가 중국이라는 놀이터에서 노는데 거치장 스러울 뿐이다. 반면, 그 놀이터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로서는 김명호의 서술방식이 불친절해보일 수도 있다. 그래, 불친절한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2' 놀이터에서 놀아보자. 


  2권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중국혁명을 이야기할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속속들이 펼쳐졌다는 점이다. 국부 쑨원이 일본 망명 시절 대정객 이누카이 쓰요시와 나눈 대화가 흥미롭다. "가장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라고 쑨원에게 질문했더니, 쑨원은 "혁명"이라 대답했다. 이누카이 스요시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짓자, "여성"이라 대답하고, 마지막으로 "책"이라고 대답했다. 쑨원을 비롯한 장제스의 여성편력은 너무 노골적이기도 했지만,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이기도 하기에 중국의 국부 쑨원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했다.

  쑨원과 장제스뿐만 아니다. 5. 사랑과 혁명 편에서는 일명 '붉은 사랑'의 노골적인 면들이 드라마처럼 펼쳐졌다. 유교로 대표되는 봉건적 사랑에서 벗어나, 서구의 자유주의적 사랑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식 사랑이 뒤범벅된 '붉은 사랑'은 정말 혼란스러웠다. 도표를 그려가며 남녀관계를 이해해야할 정도였다. 도표를 그리는 것이 귀찮아서 그들의 '붉은 연애'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넘어갔다. 마치 3류 아침드라마를 보는 것 처럼, 사랑과 배신이 뒤엉켜버린 사랑이야기는 인간의 냄새가 났다. 3류 아침드라마를 욕하면서 보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친구의 애인을 빼앗고, 혹은 빼앗기고 술로 고통스러워하던 우리들 이야기도 바로 3류 아침드라마속 이야기의 일부분이다. 

 남녀간의 사랑은 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의 부모와 얽힌 갈들으로 이어진다. 화류병을 앓고 있고, 본부인과 첩, 정식부인은 아니지만, 부인처럼 살고 있는 여성이 있는 장제스와 결혼하겠다는 막내딸을 쑹자수의 부인은 어떠한 심정으로 대했을까? 그리고 자신이 전재산을 아낌없이 혁명사업에 지원했던 쑨원에게 자신의 딸을 빼앗긴 쑹자수는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당시 쑨원은 49세 자신의 둘째 딸은 22세였다. 무려 27살의 나이차가 난다. 일본에 가서 쑨원을 만나 악담을 했지만, 결국은 무뤂꿇고 세번절을하며 딸을 잘 부탁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혁명의 와중에도 그들은 사랑을 나누었다. 누가 보기에는 불륜이었고, 누가 보기에는 혁명을 아름답게 수놓은 세기의 사랑이었다. 역사책에는 빠져있는 그들의 사랑을 생각하며 혁명은 붉은 색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꼽아본다. 

  내가 한국사람이다보니, 중국 역사책을 읽으면서도 한국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눈이 초롱초롱해진다. 6.25전쟁 시기 김일성과 펑더화이가 주먹질을 했다는 소문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같은 사회주의 혈맹이기에 중국과 북한은 사이가 좋을 듯했지만, 소련과 중국이 사이가 나쁘듯이, 중국과 북한도 좋기만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소규모 전투만 해봤던 김일성이, 6.25전쟁을 제대로 지휘할 수 없었고, 이로인해서 대규모 전쟁을 지휘했던 백전노장 펑더화이와 김일성의 다툼은 있을 수밖에 없다. 남침을 했다가 쪽박 차게된 김일성과 무모한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 덕에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한 펑더화이가 주먹질을 했다면 누구의 주먹이 더 강했을까? 중국도 어리석은 전쟁을 적극 반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6.25전쟁의 발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현명한 이웃을 두지 않았다면, 현명하지 않은 이웃이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도록 적극적인 조언은 했어야했다.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2'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몇몇을 빼놓고는 그 이름을 외우기도 힘들다. 그들이 얼키설키 뒤엉킨 역사는 흥미와 혼란을 동시에 주었다. 그뿐만 아니다. 한 인물을 단순하게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가지 면을 가진 인물도 많았다. 특히 차오쿤이라는 인물은 돈을 주고 총통직을 샀다. 그렇다면 부패하고 무능할 것이라 상상한다. 그런데 "정식 교육은 못 받았지만 도량이 넓었"고 "세계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영수의 품격을 갖춘"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더욱이 그는 관상쟁이의 말에 빠져서 3류 창기 류펑웨이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았고, 그로 인해세 세상의 조롱꺼리가 되었다. 그런데, 3류 창기 류펑웨이는 단순한 인물이 아니었다. 일본군의 괴뢰수반이 되지 말라고 차오쿤을 설득한 것고 그녀이며, 차오쿤이 죽자 장제스가 거액의 위로금을 보냈지만, 거절하고 일본인 문상객은 받지 않은 것도 그녀이다. 평면적 인물이라기 보다는 입체적인 인물들이다. 이러한 역동적인 인물이 있기에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 스리즈를 읽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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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7-22 11: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시리즈 정말 좋아합니다
근현대 중국사 인물 평전으로도 손색이 없는 책인것 같습니다(소설보다 재밌는)

강나루 2021-07-22 11:51   좋아요 2 | URL
맞아요
게다가 재미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