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책을 명화와 같이 살펴본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다. `그림 쏙 세계사` 는 그림과 세계사라는 두마리 토끼를 잘잡은 책이다. 쉬운 문채라 청소년들도 쉽게이하할 수있다. 그렇다고 얕은 내용서술 만으로 가득찬 것도 아니다. 시중의 청소년 대상 세계사 책과는 달리 깊이 있는 설명도 이뤄졌다. 세계사를 가르쳐 본 교사 출신이라서 그런지 쉬우면서도 재미 있는 서술은 이 책을 단숨에읽게 만들었다. 청소년들과 교양을 쌓고 싶어하는 일반인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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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3-14 21: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무척 흥미 갑니다!

얄라알라 2021-03-14 22: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찜하고 갑니다
 
오랑캐-주변국 지식인이 쓴 反중국역사
양하이잉 지음, 우상규 옮김 / 살림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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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역사는 중국사이다.'라고 주장하는 동북공정이 우리사회의 커다란 이슈로 대두되었던 적이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현재진형형이다. 동북공정을 처음 접했을때, 중국이 새로운 논리를 개발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중국의 동북공정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중국 땅에서 있었던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보는 관점은 이미 그 이전부터 있어왔다. 몽골이 세운 원나라도,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도, 선비족이 세운 수와 당나라도 모두 중국의 역사로 둔갑시키는 것이 중국 한족의 역사 이해방식이다. 우리의 세계사 교육은 한족이 세우지 않은 왕조 조치도 중국사에 편입시켜 가르치고 있다. 중국의 놀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우리가 이제는 중국 땅에서 있었던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는 논리에 공격대상이 되었다. 이제 중국중심의 역사관에서 탈피해야할 때가 되었다. 중국에 귀화한 내몽골 오르도스 출생의 양항이잉은 중화패권사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의 주장에 귀 기울여보자.

 

  책의 저자 양하이잉은 1964년 내몽골 오르도스 지역에서 출생했다. 그는 중국의 주변부에서 한족중심의 중심부 문화의 폭력을 경험하면서 자라났다. 그는 인류학과 고고학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역사를 바라보며 연구 활동을 했다. 1989년에 일본 유학을 가서, 2000년에는 일본에 귀화한다. 일본이라!! 일본은 한국인인 나에게는 제국주의 침략성을 포기하지 않은 나라로 비춰진다. 일본을 추월해서 G2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일본은 몹시 싫어한다. 반한 감정뿐만 아니라, 반중감정도 대단한다. 중국의 주변부에서 한족중심의 폭력을 경험한 양하이잉의 역사서술관점은 일본인의 반중감정과 쉽게 합일되었다.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의 내몽골 제노사이드를 고발한 '묘지없는 초원'이 시바 료타로상을 수상한 것은 이를 증명해준다. 이책 곳곳에 일본인 학자의 주장이 인용되었으며, 자신을 도와준 일본인 학자들에 대한 고마움이 깊게 표현되어있다. 적의 적은 친구라고 했던가! 중국 한족 문화의 폭력성을 경험한 그에게 일본은 친구였다.

 

  중국에 대한 반감은 일본인들이 china를 '지나'라고 번역하여 부르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물론, '지나'라는 용어는 '중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보다 중국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도록해준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 부르며 중화중심적 사고가 묻어나는 '중국'보다는 '지나'라는 용어가 중국을 객관화시켜준다. 양하이잉은 곳곳에서 중국중심의 역사관에 반기를 들고 있다. 때로는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는 역사에 당당하게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중원에는 태국계 하인(夏人)이 있었으며, BC13세기경에는 만주 동북쪽 수렵민인 은인(殷人)이 들어왔으며, 서족에서 유목민인 주인(周人)이 들어왔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펼치면서 이를 뒷받침할 근거를 제시하지 않아서 선듯 믿겨지지 않았다. 특히 은인(殷人)을 만주 동북쪽 수렵민이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 재야사학자들의 주장과 일치하여 신기하기도했다. 양하이잉은  "황허문명보다. 1000년이나 일찍 청동기 문명이 시작된 초원의 훙산 문명이 있었고, 훙산문명을 만든 사람들이 황허로 이주해 들어 왔다."라며 중국 문명에 훙산문명이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훙산문명을 고조선 문명으로 보고, 고조선의 문명이 중국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재야사학자들의 주장과 일치하는 점이 있다. 물론, 양하이잉은 훙산문명의 주인공을 유목민족으로 보고있고, 한국의 재야사학자들은 고조선으로 보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양하이잉은 이 책 곳곳에서 중국의 프로파간다를 공격한다. "위대한 한족에게는 수 당이 가장 번성환 왕조였다.", "원나라는 중국이 가장 광대한 영토를 보유했던 시대", "티베트와 몽골은 청나라의 일부였기에 지금도 우리의 영토"라는 중국 한족중심의 주장에 대해서, 수 당은 선비족의 국가였으며, 원나라는 몽골의 역사이며, 청나라는 여진족의 나라라고 주장한다. 중국 한족이 역사의 주인공이었던 적은 송과 명이었다. 그들은 제국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중국인들이 양하이잉의 주장을 듣는다면 무척 뼈아픈 지적일 것이다.

  양하이이은 단순히 중국 한족중심의 역사관에 반기를 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과거 역사를 통해서 오늘의 중국을 설명한다.

  "두루 천하는 모두 왕의 땅이다."라는 관념을 가진 중국이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앞세워 국토를 바깥으로 확장하는 모습을 보였듯이, 현대 중국은 세계 곳곳에 차이나타운을 형성하고, 아프리카에 인프라 투자를 나서면서 중국의 저소득층을 대량으로 이주시키는 현실과 열결시킨다. 중국의 일대일로와 중국인들이 세계 곳곳에 차이나타운을 건설하는 현상의 역사적 근원을 잘 설명하고 있다.

  중국이 파룬궁을 비롯해서 종교에 대한 탄압을 하는 이유도 양하이잉은 중국사와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중국의 역대 왕조 말기에 잦은 반란이 일어났다. 그들 반란은 종교와 관련을 맺는 경우가 많다. 백련교도의 난, 의화단 운동, 태평천국운동 등등.... 이러한 역사의 트라우마는 중국 정부에게 종교를 통제하도록 했다. 단순히 종교를 아편으로 생각하는 공산주의 사상만으로는 부족한 설명을 역사적으로 해내고 있다.

 

 

  외신을 통해서 이슬람 교도에 대한 중국정부의 탄압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종교에 대한 박해 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위구르인의 강제 결혼을 시키며 그들을 중국인화 시키려는 노력을 가혹하게 펼치는 모습도 보인다. 한족 중심의 역사 문화 패권주의는 중국이 G2로 성장하면서 더욱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다. 양하이잉이 일본으로 귀화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중국의 중화 패권주의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중국의 역대왕조는 빠른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전성기를 지나면 빠른 노쇄기를 겪는다. 지금 전성기를 맞이한 중국이, 언제 빠른 노쇄기에 접어들지 궁금해진다. 그때, 억압받았던 중국의 소수민족들은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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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심리학 - 최고의 프로파일러가 알려주는 설득과 협상의 비밀
표창원 지음 / 토네이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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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학교 현장에서 교사는 교육자로서의 역할만 할 수 없다. 때로는 부모의 마음으로 다독이기도하고, 때로는 경찰이 되어 질서를 잡아야한다. 때로는 프로파일러가 되어 학생과 심리 싸움을 해야한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학교 현장도 복잡해지고 있다. 한부모가정, 조손 가정, 맞벌이 가정이 많아지면서 교사는 가정에서 해주지 못하는 것을 해주어야만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내가 프로파일러가 쓴 책을 읽기로 마음 먹은 이유도, 교사에게 너무도 많은 능력을 요구하는 우리 학교현장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교사들 사이에서 사이코패스라고 불리는 학생을 어떻게 지도해야할지 막막함이 밀려왔다. 교육이 되지 않는 학생에게 교육자로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는 프로파일러의 지혜가 필요했다. 프로파일러 표차원 전 교수는 우리 교육에 어떠한 시사점을 줄까?

 

 

  이 책에는 프로파일러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수사기법과 면담 기법들이 소개되어있다. 단순히 범죄자를 상대할 때 사용하는 기법들을 소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표창원 전교수는 이를 비즈니스 현장에 접목시킬 수 있는지를 아울러 제시했다. 나는 여기에 교육현장에 프로파일러 기법을 접목시킬 방법을 구상했다.

  요즘, 문제적 학생들은 자신이 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교사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고서는 자신이 언제 했느냐며 오리발을 내민다. 눈물까지 흘리는 연기를 펼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했다. 항상 휴대폰이나 휴대용 녹음기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녹음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여러차례했다. 이러한 때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이 책에 소개된 다양한 프로파일러 기법들이다. 심리학 서적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이 꾀있었으나, 이 책을 통해서 새롭게 깨닫게 된 몇가지를 소개해본다.

  첫째, 사람을 설득하기 전에 시간을 설득하라. 문제아들과 면담을 할때, 면담에 실패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지금 복귀해보면, 학생을 설득하기 전에 학생보다 내가 조급해있었다.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협상을 지배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나는 놓치고 있었다. 박근혜 정권 시기, 오바마에게 일본과 관계 개선 시기를 약속한 정부가 일본과 '한일 위안부 합의'라는 엉터리 합의를 한 것을 떠올린다면, 시간에 쫓기는 협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 수 있다. 협상을 하기 전에, 설득을 하기 전에, 면담을 하기 전에 먼저 시간을 지배하자.

  둘째, 논리력을 치우자. 스스로 반대자, 공격자,비판자의 입장이 되어 자신의 논리를 비판하고 다시 그에 대한 반박 자료를 보강하자. 이는 학생면담 뿐만 아니라, 토론 수업을 진행할 때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 논리력을 갈고 닦자.

  셋째, 사이코패스로부터 나를 지키는 법을 숙지하자.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가 전해준 직장 내 사이코패스로부터 나를 지키는 법 중에서 몇가지를 선별해 가슴에 새기자.

  1. 누구에게든 지나치게 의존하지 마라.

  2. 언제나 '유사시 대비책'을 갖추어라.

  3. 위기상황에서도 결코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침착할.

  4. 긴박한 상황이 지난 후 차분히 상황을 정리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

  5. 보복하려 하지말고, 대비하고 대처하라.

  6. 금전거래 요청, 무리한 부탁은 단호히 거절하라.

  7. 반대급부에 대한 기대를 과감히 벌려라.

  8. 결코 흔즐리지 않을 '마음의 중심 기둥'에 의지하라.

  다른 유용한 프로파일러 기법들이 있지만, 지금 내가 명심하고 가슴에 새겨두어야 할 것은 위의 세가지이다. 그래, 대지에 깊게 뿌리 박은 나무처럼, 뿌리 뽑히지 말고 오늘을 살아내자.

 

 

  학교 현장에는 다양한 학생들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너무도 착해서 잘해주고 싶은 학생부터, 어찌 교복을 입은 학생이라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학교를 뒤흔드는 학생이 있다. 교사는 이들 모두에게 교육자로 행동해야한다. 교사도 인간인지라, 때로는 감정적일 수도 있다. 교사가 감정적인 행동을 하는 순간, 교사는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순식간에 약자로 전락하게 된다. 교사를 자극해서 분노하게 하고, 이를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교사를 협박하는 사례들을 바라보며, 교사로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교육자로서의 능력 뿐만 아니라, 프로파일러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언제나 냉정을 잃지 않고, 상황을 직시하며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살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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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바늘 - 세계 문화유산 약탈사
김경임 지음 / 홍익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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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 문화재 환수 프로젝트'는 반크(VANK) 동아리 학생들이 많이 선택하는 활동주제이다. 빼앗긴 우리 문화재를 소개한 플래카드를 제작하여 시민들에게 홍보하는 활동을 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대견하지만, 한편으로는 논리의 빈약함에 안타까움을 많이 느꼈다. , 우리 문화재를 환수해야한다는 당위성만을 강조할 뿐, 문화재 환수의 국제법적 당위성에 대한 논리적 증명은 부족했다. 사실 문화재 환수에 대한 지식을 전문적이면서도 재미있게 설명해줄 수 있는 책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우리 현실이다. 그러던 차에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실무 경험을 쌓은 김경임 저자의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는 책을 만났다. 재미있으면서도 전문적인 지식을 소개하는 그의 필치가 나를 책속으로 빨려들게 했다.

 

1. 문화재를 예술품으로 만들기.

학교에 세워져있던 단군상을 일부 종교인들이 우상이라며 단군상의 목을 베고, 거대한 바미안 불상을 파괴하는 탈레반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 '? 예술품으로 보지 않고, 우상숭배라며 배격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문화재를 예술품으로만 보려는 시각에는 제국주의자들의 사악한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지적하고 있다.

<밀로의 비너스>는 너무도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밀로의 비너스>는 팔이 없다. 나의 중학생 시절, 미술선생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재미있는 설명을 하셨다. ‘<밀로의 비너스>의 팔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려보았는데, 팔이 있는 것 자체가 무척 어색하여 아마도 처음부터 팔이 없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이 생각한다.'라는 미술 선생님의 설명이 그럴듯하여 <밀로의 비너스>는 원래 팔을 제작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했다.

그러나, <밀로의 비너스>는 왼팔과 사과를 쥐고 있는 왼손, 조각상의 받침대 파편이 있었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소중한 이들 문화재의 일부분을 없애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적 효과를 위해서 반쯤 매달린 왼팔을 떼어내는 야만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서구인들은 그들의 뿌리라고 하는 헬레니즘 시대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파괴하고 훼손하는 일을 서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에게 <밀로의 비너스>는 예술품이지 문화재가 아니다. 아니, 문화재가 아니어야만했다. <밀로의 비너스>상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는 받침대를 파손시켜야 <밀로의 비너스>는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그래야만, <밀로의 비너스>는 예술품으로만 남는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문화재는 학술적 가치가 없어진다. 그래야만, 제국주의 국가는 식민지의 예술품을 소유하는 것이 편해진다. 그래서 패티 거스튼블리스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화재를 예술품으로 보는 것은 문화재를 그 역사적 맥락에서 분리시키는 방법이며, 제국주의 유럽 문화가 비유럽 문화재를 소유하는 방법이기도 하다."-패티 거스튼블리스<예술과 문화유산>, <클레오파트라의 바늘>68쪽 재인용

 

역사적 맥락을 제거하고 미적 가치만 남겨놓아야 <밀로의 비너스>는 그리스의 밀로스 섬에서 뿌리 뽑혀 제국주의자의 품에 앉길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은 인류의 예술품을 소장하며 인류에게 기여한다.’고 말하지만, 진실은 인류의 문화재를 파괴하여 문화재를 단순한 예술품으로 전락시키는 죄악을 저지른 박물관이었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역사적 맥락을 제거하고 문화재를 예술품으로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인간의 사체를 모으는 야만적인 모습까지 보였다. 뉴질랜드의 토이모코(죽은 자의 머리), 호주 태즈메이니아 인골, 남아프리카의 호텐토트 비너스를 전시하고 수집한 사례는 제국주의자들이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사람의 사체는 수집과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는 인간이 고귀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기초적인 전제이다. 죽은 자의 시신은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내져야한다. 그들의 역사적 맥락에서, 그들의 역사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하고, 죽어간 그들의 사체를 더 이상 제국주의자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소장품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학교에서 있는 단군상이든, 세종대왕 동상이든 모든 인간의 창조품들은 역사적 문화적 맥락이 있다. 그 맥락을 떠나서 문화재를 논할 수 없다. 문화재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파악하며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는 보편 윤리가 자리 잡아야만 다시는 야만적인 제국주의 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2. 문화재 가치 깍아 내리기

인류 최초의 인권 문서 '키루스 칙령'의 복제품이 유엔본부 2층의 안전보장이사회와 경제사회이사회 중간의 복도에 전시되어 있다. 세계가 인정한 인권 문서가 '키루스 칙령'이다. 그런데, '키루스 칙령'도 제국주의 국가들의 검은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이란인의 조상이 건국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서아시아를 통일했다. 대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대왕은 피정복민을 관용과 포용으로 다스리겠다는 포부를 '키루스 칙령'에 담아 반포하였다. 그리고 이 '키루스 칙령'이 다시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발견 국가는 영국이고, 발견 장소는 이라크이다. 발견당시 오스만 제국이 이라크를 다스리고 있었다. 이란은 '키루스 칙령'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대영제국 박물관은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발견 장소를 기준으로 본다면, '키루스 칙령'은 이라크에 돌려주어야하고, 발견 당시 지배국을 기준으로 본다면, 지금의 '터키'에 돌려주어야한다. 그러나, 키루스 대왕을 계승한 국가는 이란이기에 대영박물관은 '키루스 칙령'을 이란에 돌려주어야한다. 그런데, 반환을 반대하는 학자들이 '키루스 칙령'을 돌려주지 않으려고 내놓은 논리가 참으로 치졸하다. 그들은 '키루스 칙령'의 가치를 깍아 내리는 방법을 사용했다.

 

"정권이 바뀌면 지도자들이 개혁을 공약하기 마련이다. 키루스 대왕의 관용 정책은 광대한 제국의 다수 이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펼친 현실적인 대안으로 실용주의의 산물일 뿐이다.

이는 피정복민을 다스리는 키루스 대옹의 채찍과 당근 정책으로, 정복자가 민심을 얻을 목적으로 발표한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이것을 인권선언이라고 믿는다면, 프로파간다의 희생자는 오늘날의 우리가 될 것이다."-30

 

현란한 문체로 '키루스 칙령'을 깍아 내리고 있는 학자에게 영국이 자랑하는 '대헌장'의 가치를 묻고 싶다. 영국 민주주의 역사에 '대헌장'의 가치는 참으로 대단하다. 그런데, '대헌장'은 귀족들이 왕을 굴복시키고 자신들의 특권을 보장받기 위해서 만든 문서이다. 이 문서를 가지고 민주주의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프로파간다이다. 그러나, '대헌장'의 가치는 이후 민주주의 역사에서 확대 해석되었다. 그에 따라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하는 문서에서 민주주의를 이루는데 기여한 문서로 가치가 상승했다. '키루스 칙령'도 마찬가지이다. 키루스 대왕이 정치적 목적에서 '키루스 칙령'을 발표했다하더라도, 오늘날의 인권발전에 기여를 하고 있다면, '최초의 인권선언문'이라 평가해도 손색이 없다. 문화재는 그 문화재가 어떠한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되느냐가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을 무시하고 '키루스 칙령'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문화재를 이란에 되돌려 주지 않으려는 꼼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키루스 칙령'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그들이 '키루스 칙령'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키루스 칙령'에 대한 모욕일 것이다.

 

3. 문화유산의 관련성 부정하기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서아시아에서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나폴레옹의 군대가 발견한 로제타석이다. 2005, 하와스 박사가 이집트가 반드시 돌려받아야할 문화재 다섯 점 중에서 가장 첫번째로 꼽은 것이 대영 박물관에 있는 로제타석이다. 샹폴리옹에 의해서 로제타석에 기록되어 있는 상형문자가 해독되면서 비로소 이집트의 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이집트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귀중한 문화재를 대영 박물관은 이집트에 돌려주지 않고 있다. 여기에 제국주의시기에 반출된 수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세계의 박물관들이 이에 호응하고 있다. 시카고 박물관장 제임스 쿠노는 이렇게 말한다.

 

"현대 이집트와 파라오 시대 이집트오의 관련은 무엇인가? 고대 유물은 이슬람 국가들이 생겨나기 훨씬 이전에 제작된 것들이다. 고대 유물을 문화재로 규정하는 국내법이나 국제법은 150년 전에 태어난 것이다. 이들 국가들은 영토 내에서 발견된, 또는 발견되었다고 믿는 고대 유물을 민족의 정체성과 자부심으로 파악한다. 민족의 유산만 중요하고 세계 문명에 대한 중요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132

 

문화재는 그 문화재를 창조한 국가가 소유하거나, 문화재가 최초로 발견된 영토의 소속국가에서 소유해야한다. 이러한 점에서 로제타석은 이집트가 소유하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의 이집트와 현대의 이집트가 관련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영국의 아더왕 전설은 현대 영국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역사와 문화는 유형무형으로 해당지역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배웠던 슐리만이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되어 트로이를 발굴한 예를 보듯이, 수천년 전의 역사와 전설은 그 후손들에 의해서 기억될 때 유형 무형의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다. 이집트인들은 이집트의 역사 현장에서 태어나고 살면서 이집트의 역사와 문화를 몸으로 채득했다. 그들이 파라오시대의 이집트와 관련이 없다는 주장은 제국주의의 유산인 약탈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얕은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시카고 박물관장 제임스 쿠노는 "민족의 유산만 중요하고 세계 문명에 대한 중요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영박물관이 내놓은 반응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집트의 문화재를 소장한 게 아니다. 세계 문명의 일부로서 이집트의 유물을 갖고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유물의 보존이다."

 

우리나라의 '외규장각도서'를 프랑스가 반환하지 않을 때도 이러한 논리를 내세웠다. 제국주의 시절 탈취한 문화재를 소장한 세계 유수의 박물관이 이러한 논리에 동조하고 있다. 그들의 논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바로 '인류 보편의 박물관 선언'을 분석해보자.

 

4. '인류 보편의 박물관 선언'의 함정.

문명국이라 자처했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이 야만인이라 취급했던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의 문화재를 약탈해서 고가에 거래했다. 나이지리아의 베닌 브론즈를 소장한 대영박물관은 "응징 전쟁"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마치 병인양요 시기, 우리가 프랑스 신부를 처형했기에 외규장각도서를 약탈한 것은 정당하다는 논리이다. 그들에게는 작물을 거래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정의는 통용되지 않는다.

제국주의라는 야만의 시대에서 벗어나, 정의와 인도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가 세계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요즘, 약탈문화재를 반환해야한다는 공감대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공유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 윤리가 제국주의 시기의 영광을 기억하는 박물관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200210, 독일 민휀에서 대영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한 세계 40개의 박물관 미술관 관장들이 '인류 보편 박물관의 중요성과 가치'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비조 클럽'이라 불리는 이들 박물관은 21세기 문명 세계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선언을 당당하게 발표했다.(물론 얕쌉한 대영 박물관은 엘긴 마블에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서명하지 않았다.)

 

"과거 취득한 문화재는 구입, 기증, 또는 파르타지를 통해서 이들을 관리해 온 박물관의 일부가 되었고, 이들을 소장한 국가의 유산의 일부가 되었다."-404

 

작물을 취득한 제국주의 박물관의 일부가 되어버린 문화재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참으로 놀라운 주장이다. 개인의 소유권을 엄청난 가치로 여기는 서구인이 약소국의 소유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마치 거울뉴런이 사라져버린 사이코패스 처럼 자신의 이익만을 중요시할 뿐, 문화재를 약탈당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약소국의 아픔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인류 보편 박물관의 중요성과 가치'라는 문서는 더욱 황당한 논리로 끝을 맺는다.

 

"박물관은 끊임없는 재해석 과정에 의해 지식을 촉진시키는 임무를 행함으로써 문화 발전의 담당자를 자임한다. 각각의 문화재는 이러한 과정에 공헌하고 있다. 따라서 다양하고 다면적인 문화재를 소장한 박물관의 차원을 제한하는 것은 모든 관람자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다."-405

 

제국주의 박물관만이 문화재를 '끊임없는 재해석 과정'을 수행할 수 있다는 오만한 주장을 하고 있다. 해당 문화재의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국가는 해당 문화재의 소유국이다. 우리나라의 '외규장각도서'가 프랑스에서 중국문서로 분류되어 훼손된 채 서고에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제국주의 박물관에서 썩어서 사라지는 수많은 문화재에 대해서 그들은 침묵하고 있다.

제국주의 박물관은 약소국에서 약탈한 '다면적인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세계의 수많은 약소국이 자국의 문화재를 보기 위해서 제국주의 박물관을 방문해야한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관광수입을 얻으며 이를 '모든 관람자의 이익'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제국주의 박물관의 이익만이 중요할 뿐, 문화재 원소유국의 이익에는 관심이 없다.

일찍이, 나폴레옹전쟁을 정리하기 위해서 빈회의가 열렸다. 이때, 국제적 차원에서 최초로 전시 약탈 문화재 반환이 결정되었고, 향후 국제 관습법으로 약탈문화재 반환이 정립되었다. 1970년 유네스코 협약, 1995년 유니드로아 협약이 체결되면서 불법 문화재의 반환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었다. 국제 관습법과 국제법이 이들 제국주의 박물관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아니, 인류 보편의 가치를 부정하고 있는 제국주의 박물관이 세계적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사실 자체가 인류의 비극이다.

 

힘이 정의라고 떼를 쓰는 일 처럼 우리를 분개하게 하는 일은 없고, 정의가 힘의 뒷받침을 받지 못해 정의로 의연히 서지 못하고 불의로 몰리는 일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다.”라는 파스칼의 말처럼, 아직 국제사회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힘 있는 제국주의 박물관이 자신을 정의라 외치고 있다. 약소국은 힘이 없어 정의로 의연히 서지 못하고 있다. 정의가 바로서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 학생들은 '반크' 동아리를 만들었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사랑과 우리 역사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 동아리 활동은 열정적이고 대견해보인다. 그러나, 반크 동아리 활동을 지켜보면서 항상 2%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학생들의 열정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탄탄한 논리가 필요했다. 학생들의 열정에 역사적, 국적법적 지식과 논리가 뒷받침되어야 보편 정의에 힘이 실린다. 이러한 의미에서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은 재미와 의미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는 책이라 평가할 수 있다. 저자 김경임이 이 책에서 약속한 대로 약탈문화재 반환 운동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관련 서적을 더 많이 저술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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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사 - 적응과 변화의 긴 여정, 1700~1922 서울대학교 중앙유라시아연구소 교양 총서 1
도널드 쿼터트 지음, 이은정 옮김 / 사계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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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의 나라 터키, 터키인들의 역사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때 마침 '오스만 제국사'라는 책이 눈에 띄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장대한 스케일의 콘스탄티노 폴리스 공방전과 전쟁터를 누비는 예니체리의 모습을 상상하며 책을 펼쳤다. 그러나, 서문에서부터 나의 기대는 산산조가났다. 저자의 의도는 오스만 제국 입문서로 이책을 저술했다. 장대한 스케일의 오스만 제국사를 알고 싶었던 나로서의 적잔히 실망했다. 그러나, 단행권으로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역사서가 거의 유일하기에 이 책을 계속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나의 기대와는 다른 오스만 제국 입문서이지만,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재미는 쏠쏠했다. 오스만 제국하면 예니체리가 생각난다. 예니체리는 데브시르메라고 불리는 어린이 공납제도에 의해서 충원되었다. 기독교 지역에서 어린이를 충당하여 교육시키고 관료와 예니체리로 선발하였다. 그런데, 세계사 교과서의 서술만 본다면 데브시르메가 오스만 제국 시기 내내 잘 운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적어도 그런 착각을 갖게한다. 그러나, 제국의 정복전쟁이 멈추면서 데브시르메 제도는 사라지게 된다. 세습의 방식으로 예니체리는 충원되었다. 수박 겉핥기식 역사교육으로 빚어진 오해를 이책이 말끔히 해결해주었다.

  오스만 제국이 유럽에 끼친 영향도 새롭게 알게되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A장조 3악장 KV331 '터키행진곡'을 들으면서도 왜?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유럽에서 이러한 음악이 작곡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하면 콘스탄티노 폴리스 공방전에서 사용된 청동대포를 기억하는 나는 오스만의 음악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오스만 제국은 군사력으로만으로 유럽을 위협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스만의 음악은 유럽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적대 여성 리더가 공중에 던지는 지휘봉을 비롯하여, 러시아와 영국 합스브르크의 군악대도 오스만의 영향을 받았다. 오스만제국은 '유럽의 병자'가 아니라, 문화 대국이었다.

   그런데, 군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화려했던 오스만 제국을 '유럽의 병자', '압제자'로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널드 쿼터트는 이를 민족주의 논리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흔히 민족이 만들어지고 국가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널드 쿼터트는 국가가 먼저 만들어지고 민족 정체성이 만들어진다고 규정한다. 1차 세계 대전 후, 서아시아를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한다. 그후, 분리 독립한 국가들은 국가 정체성 확보가 당면과제였다. 그들은 튀르크인의 악행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 민족주의를 강조했으며, 아르메니아 학살을 강조했다. 청년 튀르크당이 튀르크 민족주의를 강조했다고 주장한 것도 이러한 의도에서 일어났다. 홉스봄의 '만들어진 역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 책의 저자 도널드 쿼터트는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오스만 제국사'를 서술했다. 보통의 서양 학자들이 서구의 시작에서 제국주의적 편견에 휩싸여 제3세계 국가의 역사를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도널드 쿼터트는 그러하지 않았다. 한예로 1915~1916년에 벌어진 아르메니아 학살을 서술하면서 그리스인이 저지른 1821년 오스만 무슬림 학살, 1876년 불가리아 기독교인들이 1000명의 무슬림을 학살한 사례를 지적했다. 학살은 비인간적인 행동이지만, 이것이 오스만 제국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즉, 무슬림인 오스만은 악마, 기독교인은 피해자라는 도식에서 벗어난 서술이 돋보인다.

  60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존속했으며, 유럽을 공포로 몰아 넣었고, 커피와 음악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를 유럽에 전해준 오스만 제국에 대한 평가가 대체로 부정적이라는 현실이 안타깝다. 오스만 제국에 대한 보다 많은 책이 번역되거나 쓰여진다면 오스만 제국에 대한 편견이 사라질 것이다. 그날을 그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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