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 - 호메이니의 삶을 통해 본 이란 현대사
유달승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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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에 대항한 국가는 비극을 면치 못한다. 세계 초강대국 앞에서 무력하기만한 약소국들을 바라보며 냉혹한 국제질서의 무자비함에 직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대국 미국에 대항하고 있는 나라들이 있다. 미국 대통령 아들 부시가 '악의 축(Axis of evil)'의 나라들이 대표적이다. 이중 이라크는 미국의 공격으로 친미 국가가 세워졌다. 북한은 미국과 종전 선언을하고 평화협정을 맺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지막 이란은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도 자존심하나를 내세우며 미국과 날선 대립을 하고 있다. 세계사 교과서에도 이란의 역사는 너무도 소략하게 기술되어 있고, 시험에도 잘 출제되지 않는다. 세계사 교과서만으로는 이란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제대로 가르칠 수도 없다. 이란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어졌다. 현대 이란을 만든 호메이니를 통해서 이란 현대사를 살펴보는 '이슬람 혁명의 아머지 호메이니'라는 책은 그래서 나의 관심을 끌었다. 호메이니를 통해서 이란의 역사를 살펴보자.


1. 서울에 테해란로가 있는 이유는?

  서울과 테해란은 자매도시이다. 이란에는 '서울로'와 '서울 공원'이 있고, 수도 서울에는 '테해란'로가 있다. 멀고 먼 나라 나라로 기억하고 있지만, 사실은 너무도 가까웠던 나라가 이란과 한국이었다. 그렇다면, 서울에 테해란로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메디나-아케메네스 페르시아-파르티아-사산왕조 페르시아사파비왕조는 이란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이란인의 조상이 세운 왕조이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서아시아를 식민지로 삼을 때, 이란을 통치하고 있었던 카자르왕조는 너무도 부패했고 무능했다. 1891년 담배 이권을 영국에 넘긴 것에 분노한 이란인들은 담배 불매운동을 전개한다. 담배 불매 운동이 성공하는데 성직자의 역할이 컸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바탕이 이미 이때부터 마련되고 있었다. 

  1921년 레자 칸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1925년 팔레비왕조를 창건한다. 팔레비 왕조는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근대화의 방식은 너무도 폭력적이었고 급진적이었다. 종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교육을 국가가 책임지는 근대교육제도를 실시했고, 여성의 베일 착용을 금지시켰다. 이는 종교인들의 반발을 가져왔다. 이어 모사데크 수상은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석유국유화 조치를 이행한다. 결국 파레비왕조가 무너질 위기에 처해진다. 이때 미국이 팔레비왕조를 도와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어 일명 '백색혁명'으로 불리는 친미 노선을 견지하자, 자주의식이 강한 이란인들의 강한 저항을 얻게된다. 미군의 치외 법권과 미군주둔, 서구화정책은 수많은 시위를 불러 일으켰고 이에 팔레비 왕조는 유혈진압을 했다. 인권 외교를 펼쳤던 카터 행정부는 인권탄압을 하고 있는 팔레비왕조를 열열히 지지했다. 이란은 '중동의 헌병'이라 불리며 충실한 친미국가로 거듭났다. 

  서아시아에 이란이 있다면, 동아시아에는 한국이 있지않은가! 모함마드 레자 샤가 폭력을 사용하여 반정부 시위를 짓밟았다면, 박정희 정권도 자신의 반대파를 잔인한 고문으로 짓밟았다. 이 두 정권이 친해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서울에 '테해란로'가 생긴것도, 테해란에 '서울로'와 '서울 공원'이 있는 것도 이러한 국제정세의 산물이었다. 

  이란과 한국과의 좋은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팔레비왕조의 폭압 통치에 반대하는 민중시위가 계속된다. 민중시위의 핵인 호메이니를 터키로, 이라크로 보냈다. 호메이니는 이라크에 있는 동안 이슬람 공화국에 대한 정치 이론을 완성했다. 호메이니의 사상은 이란으로 흘러들어왔다. 무함마드 레자 샤는 그를 멀리 프랑스로 보냈다. 호메이니의 영향력은 파리에서 세계 언론을 통해서 더욱 커졌다. 결국, 무함마드 레자 샤는 망명길에 올랐고 이란 혁명은 성공하였다. 이란은 호메이니가 제시한 이슬람 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났다. 

  팔레비왕조가 친미정권이었기에 호메이니는 미국을 좋아할리 없다. 1979년 11월 4일에 발생한 미대사관 인질 사태는 이란과 미국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이란은 반미노선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1989년 하메이니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으며, '조선-이란 친선주간'이 설정되기도 했다. 이란에 친미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란과 남한이 친선관계를 맺었다면, 이란에 반미정권이 들어서면서 북한과 이란의 관계가 좋아졌다. 

  요동치는 국제 정세에 따라서 이란과 대한민국과의 관계는 좋아지기도 했고 나빠지기도 했다. 남한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몰락하고 민주화정권이 들어섰지만, 이란은 아직까지 호메이니를 이맘으로 여기는 이슬람 공화국이 미국과 대립하고 있다. 이란은 얼마전 우리의 배를 환경오염을 시켰다는 이유로 나포했다. 이란의 속마음은 미국의 제재로 한국에 동결된 원화자금을 사용하지 못한것에 대한 항의적 성격이 농후하다. 과연 이란과 한국과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될까?


2. 미국과 이란과의 관계는 나쁘기만할까?

  호메이니는 미국을 너무도 싫어한다. 자신을 핍박했던 팔래비왕조를 지지했고, 이란을 떠난 무함마드 레자 샤의 입국을 미국이 허락하자, 미국에 대한 적개심은 하늘을 찔렀고, 젊은이들은 분노하여 이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점령하고 인질극을 벌였다. 그런데, 미국과 이란과의 관계가 마냥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미국과 이란과의 관계가 가장 좋았을 시기는 친미정권 팔레비왕조시기였다. `1978년 이드 알 피트르의 시위에서 잘레 광장의 출굴르 막고 탱크와 헬기 사격으로 2000명을 사망시킨 무자비한 사건이 발생했다. 무함마드 레자 샤의 어리석은 광기가 빛을 발한 이 사건을 인권 외교를 내세운 미국의 카터 행정부는 비난했을까? 카터 대통령의 인권외교에 기대를 걸었다면, 우리는 너무도 순진하거나 어리석은 것이다. 미국을 방문한 레자 샤의 환영회 만찬 자리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이란을 "국민들이 샤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안정의 섬"이라고 불렀다. 자국의 이익에 인권은 없었다. 오직 실리만이 있을 뿐이다.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에서 '이란 콘트라 사건'이 발생했다. NSC에서 이라크를 상태로 전쟁하던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고 그 대금 일부를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에 제공했다. 이란과 미국의 중간 무역을 이스라엘이 담당했다. 이란과 미국, 이란과 이스라엘은 견원지간이다. 철천지 원수들 사이에 이러한 밀거래가 행해졌다. 

  이란 콘트라 사건이 벌어지던 시기 이란은 이라크를 상대로 전재을 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란의 적국인 이라크를 지지했다. 미국은 팔래비왕조가 이란을 지배했을 시기에는 이라크를 테러지원국가로 규정했다. 그러나 미대사관 인질 사건 이후,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자,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모든 조치를 반대했다. 이어서 이라크를 테러지원국가에서 삭제했으며, 미국의 무기를 이라크에 보내주었다. 

  자신의 적의 적을 친구로 삼는 것은 냉혹한 국제 사회의 현실이다. 그런데, 자신이 지원하고 있는 이라크의 적국에게 다시 무기를 판매하는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이라크와 이란이 전쟁을 하는 사이에 양쪽에 무기를 팔아서 미국이 엄청난 이익을 얻는 모습은 세계 대전 시기 미국이 연합군과 추축국에게 했었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미국의 선택적 정의에 실망하고, 국제 사회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오직 영원한 실리만이 있을 뿐이다.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라는 책은 이란 현대사와 냉혹한 국제질서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과연 호메이니를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팔레비왕조의 폭압정치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정치 형태를 탄생시킨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그를 평가해야할까? 아니면, 카자르왕조와 팔래비 왕조에서 부족하지만 진행되었던 근대화를 '문화혁명'을 통해서 무효로 만들고, 아직도 차도르와 터번을 두루고 다니는 중세시기로 시간을 되돌린 인물로 평가해야할까? 

  나는 호메이니를 나쁘게만 평가할 수 없다. 이책의 들어가는 글에 저자 유달승은 이란사회의 모습에 깜짝 놀란다. 도서관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저자에게 몸이 불편하면 사원에 가서 자라고 친구가 제안한다. 사원에 가서 잠을자라? 신성한 사원에서 잠을 자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다. "사원은 힘들때 쉬는 곳"이기에 사원에서 낮잠을 자기도하고 아이들이 놀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학과장에게 청소원이 당당히 자신의 보조를 채용해 달라고 요구하고 이를 관철한다. 학과장도 청소원에게 예의를 표하고 정당한 요구를 받아준다. 신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명제를 생활속에서 실천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호메이니에 대한 평가는 좀더 시간을 두고 내려야겠다. 호메이니가 제시하고 성립시킨 '이슬람 공화국' 이란의 실험이 어떠한 결과를 만드는가에 따라서 호메이니는 탁월한 성직자이자 정치가, 혁명가로 평가될 수도 있으며, 헛된 실험으로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사람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호메이니에 대한 평가는 전적으로 이란인들이 어떠한 역사를 만들어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부디, 호메이니가 탁월한 정치가이나 성직자미염 혁명가로 평가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ps.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사산'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사산'은 조로아스터교의 사제였던 '사산'을 뜻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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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2-13 0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서는 호메이니가 무슨 악마처럼 묘사되지만 이란인들의 입장에서는 분명 영웅적인 인물이겠죠? 하지만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또 이슬람 근본주의를 내세우면서 종교적 지배의 과거로 회귀시킨 인물이기도 하고 참.... 선악의 개념으로 인물이나 역사를 볼 수 없다는게 항상 조심스럽습니다. 강나루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강나루 2021-02-13 07:18   좋아요 0 | URL
한인물을 무자르듯이 말할 수 없네요 바람돌이님 말처럼 선악의 개념으로 호메이니를 평가하기 힘드네요
 
아시아 역사 - 세계의 문명 이야기
아서 코터렐 지음, 김수림 옮김 / 지와사랑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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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시아에 살지만, 아시아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한국사로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아시아를 어떻게 아느냐는 반문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아시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서 씌여진, 아시아 역사 책이 없는 상황에서 영국 출신 역사학자 아서 코터렐이 쓴 '아시아 역사'를 집어들었다. 아시아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었지만, 잔인한 제국주의 국가 영국 출신의 백인 학자가 바라본 아시아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다. 아서 코터렐은 아시아를 균형감 있게 조감하고 있을까?


  아서 코터렐은 탁월한 시야를 가지고 아시아를 지역별로 나눠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서술하였다. 그의 폭넓은 연구는 박수를 보낼만하다. 방대한 역사서술이기에 그도 인정했듯이 개략적인 내용을 서술할 수밖에 없었지만, 유려한 필치로 가독성 높은 글을 써서 우리를 기쁘게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제국주의 국가 영국 출신의 백인이 바라본 아시아 역사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첫째, 영국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 변호하는 듯한 서술이 눈에 띈다. "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자고해도 바꿀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 표현은 셰익스피어를 높이는 표현이자, 인도를 멸시하는 표현이다. 인도를 200년 동안 식민지배하면서 고혈을 빨아먹으며 해가지지 않는 제국으로 우뚝선 영국이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는 사회를 해야한다. 영국인이 역사를 서술한다면 이에 대한 반성의 표현은 반드시 해야한다. 그러나, 아서 코터렐의 책에는 깊은 사과의 표현보다는 영국을 변호하고 지지하는 글들이 많다. 

  대표적인 표현이 세포이 항쟁을 '반란'으로 서술한 것이다. 그리고 세포이항쟁의 근본원인을 인도인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영국 동인도회사의 무지한 정책에서 찾지 않고 "(세포이 항쟁은) 사실 탄약통에 발라진 윤활유가 무엇이냐하는 문제와는 상관 없는 것이었다."라는 무지한 표현을 서슴없이 서술하였다. 아서 코터렐이 세포이 항쟁의 원인으로 제시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의 격차"로 사건의 원인을 단순화하기 보다는 동인도 회사의 인도식민지배라는 모순 자체를 비판했어야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서 코터렐이 "1786년 영국 장교의 혼혈 자녀들이 부친이 사망했을 경우 영국에 갈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을 제정한 것을 "인종차별이나 적대감 때문은 아니었다."고 변명한 것이다. 지극이 영국중심의 인종차별적 정책을 인종차별이나 적대감 때문이 아니라는 주장에 분노가 끌어오른다. 아서 코터렐은 이 법을 제정한 이유를 혼혈 사회가 수익성 좋은 고용에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고, 인도 공무에 발언권을 가진 현지 이익 단체의 출현을 우려했기 때문이라 변명한다. 그러나, 혼현인을 영국인으로 보았다면 이러한 법안 자체를 만들 수 없었다. 바로 이것이 아서 코터렐의 아시아 인식의 큰 문제이다. 

  인도가 분리 독립하는 과정에 대한 서술을 하면서도, 인도가 분리 독립할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700,000명의 사상자와 1000만명이 종교에 다라 국경을 넘어야하는 근본 원인이 바로 영국에게 있다는 사실을 그는 직시하지 못했다. 영국의 벵골분할령을 비롯한 영국의 분할 통치 정책이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갈등을 격과시켰고, 결국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리독립하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영국은 인정해야한다. 

  영국은 중국을 상대로 '아편 전쟁'이라는 야만적인 전쟁을 했다.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전쟁을 '신사의 나라'라고 주장하는 영국이 중국을 상대로 일으켰다. 중국은 임칙서를 광둥에 파견하여 아편을 단속했다. 이를 두고 아서 코터렐은 "아편제고를 어떤 보상 없이 폐기"했다고 서술했다. 분명 임칙서는 그들에게 보상을 해주었는데도 이를 제대로 서술하고 있지 않으며, 영국의 입장을 변호하기에 급급한 서술을 하고 있다. 

  둘째, 아시아에 대한 편견이 느껴지는 서술이 있다. 서구 백인들은 이슬람 포비아를 가지고 있다. 이 책에서도 이슬람에 대한 편견이 드러난다. "유일신 문제에서 만큼은 유독 빡빡하게 구는 이슬람교도"라는 서술이나, "벽창호 같은 칼리프에게"라는 표현은 객관적인 역사서술을 해야하는 학자라면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리상 이슬람이 우상숭배에 대해서 크리스트교보다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이베트남 통치가에게서 프랑스의 침략에 항거할 의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라는 감정적 표현을 아서 코터렐인 사용하고 있다. 지극히 서구 백인 우월주의가 느껴지는 표현이다. '너희들은 미개해, 그래서 식민지배를 받아야해'라는 인상을 주는 표현이다. 서양인이 쓴 역사책에 서양인의 편견이 너무도 심하게 묻어 있다. 


  학부시절 교수님이 "영국에서는 아시아인에게 학위는 주어도 아시아인이 영국의 역사를 영국인에게 가르치게 하지는 않는다."라는 말씀하신적이 있다. 왜? 그들은 그들의 역사를 아시아인이 가르치지 못하게 할까? 아시아의 관점에서 영국을 바라본다면, 영국의 역사는 도덕적으로 떳떳한 역사로 그려질 수 없다. 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반면, 우리는 한국사를 우리가 연구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지만, 세계사 만큼은 외국의 번역서적에 의존해서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세계사에 대한 우리의 학문수준이 깊지 않은 것이 근본 원인이겠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은 제법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의 눈으로 아시아를 바라보지 못하고 서구 백인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아시아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는 세계사를 우리의 눈으로 바라볼 시기가 되지 않았을까? 창밖으로 지나가는 자동차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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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 수업에 날개를 달아 줌 - 줌 기초부터 학생 중심 온라인 수업까지 - 온라인 수업 사례 90
김란 외 지음 / 테크빌교육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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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 연수도 받아보고, 관련 서적을 찾던 중 이책을 보았다. 초등학교 수준의 수업사례라 중고등학교 수업을 준비해야하는 나에게는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줌 수업을 이렇게 활용할 수 있구나! 하는 힌트를 얻은 것은 큰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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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충돌 - 세계질서 재편의 핵심 변수는 무엇인가
새뮤얼 헌팅턴 지음, 이희재 옮김 / 김영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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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붕괴했을 때,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소련은 왜? 붕괴하였는가?'라는 질문이 커다란 화두였다. 그리고, 그 시절에 공산주의가 붕괴된 이후의 세계 질서에 대한 다양한 서적들이 출간되었다. 그많은 서적 중에서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과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가장 대표적 서적이다.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책은 자본주의의 오만이 서려있는 책이라 읽을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즉,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책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싸움에서 자본주의의 승리를 만끽하기 위한 자위행위에 불과한 서적이다. 반면, 새뮤얼 헌팅텅의 '문명의 충돌'은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문명은 교류하는 것인가? 충돌하는 것인가?라는 화두를 나에게 던지며 나의 머릿속에서 '문명의 충돌'이라는 책은 자주 소환되었다.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언젠가는 '문명의 충돌'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문명의 충돌'을 한장 한장 읽어 내려갔다. 이미 고인이된 새뮤얼 헌팅턴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을 제공했을까?

 

1. 헌팅턴의 편협한 문명관

  새뮤얼 헌팅턴은 역사학자가 아니다. 당연히 문명사학자도 아니다. 그는 정치학자이다. 역사학자가 치밀한 사료 비판을 통해서 신중히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데 반해서, 정치학자인 새뮤얼 헌팅턴은 너무도 엉성한 자신의 도식으로 세계를 재단하고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다. 헌팅턴은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서 세계를 서구,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이슬람, 중화, 힌두, 정교, 불교, 일본 문명으로 나눈다. 이렇게 문명을 나누면서 문명을 나누는 기준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지극히 자의적으로 세계의 문명을 나누고 있다.

  그가 문명을 나누면서 기준을 제시하지 않다보니, 이해할 수 없는 문명들이 눈에 띈다. 그중에서 일본을 독자적인 문명으로 따로 떼어내어 구분한 것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일본을 중화문명권에 넣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헌팅턴은 일본을 독자적인 하나의 문명으로 구분하고 있다. 물론 그 이유도 서술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배웠듯이, 당나라 시기, 한자, 유교, 불교, 율령이라는 공통의 문화 요소가 성립도었다. 이러한 공통요소들은 동아시아 사람들이 만나서 한자를 이용한 필담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긴밀이 서로 문화를 주고 받은 동아시아의 특징을 이해하지 않고, 일본을 독자적인 문명으로 독립시켜 서술한 헌팅턴의 시각에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새뮤얼 헌팅턴은 왜? 일본은 독자적인 문명으로 독립시켜 서술했을까? 후쿠자와 유키치는 '탈아입구'를 왜쳤다.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며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려 혈안이된 일본의 위정자들은 서구에 유학생을 파견하면서 부디 '백인 여성'과 결혼하여 귀국하라 당부했다. 백인과 혼혈을 통해서 일본인을 개량시키려는 일본인들의 노력은 청일전쟁을 통해서 아시아의 맹주가되고, 러일전쟁을 통해서 서구 제국주의 반열에 들어선다.

  일찍이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가 서구에 소개되면서 서구인들은 일본을 서구의 기사도를 갖춘 나라로 인식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도와 맥아더도 '무사도'를 읽고 일본에 대한 호감을 갖았다. 이러한 미국내의 친일적인 흐름들이 새뮤얼 헌팅턴에게 이어져 온 것이 아닐까?

  새뮤얼 헌팅턴의 일본에 대한 과대평가는 일본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를 예측하는 부분에도 나타나있다. 헌팅턴은 일본은 자주성을 추구하는 독자적인 문명으로 전제하였기에 떠오르는 중국과 저물어가는 서구사이에서 중국을 선택할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일본의 아베정권은 트럼프에게 뒤통수를 맞으면서도 친미적인 외교를 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우리는 흔하게 보아왔다. 일본은 독자적 외교를 하기 보다는 미국에 종속적인 외교를 하였다. 그런데도 일본이 미국을 떠나 중국을 선택한다는 시나리오를 헌틴턴이 상상했다는 것은 일본에 대한 그의 무지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을 이용할 것을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 헌팅턴은 첫째, 일본의 재무장을 강화시키고, 둘째, 핵무기를 확보하고, 셋째, 아시아 국가의 지지를 둘러싸고 중국과 일본이 경합을 벌이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헌팅턴의 주장은 가능성은 낮지만, 오바마 행정부 시기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를 재편하고 일본 밑에 한국을 위치시키려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헌팅턴의 개인정 망상으로 그칠 정책이 아니란 점을 알 수 있다. 오바마 행정부를 계승한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일본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재편 정책이 재개될 가능성이 있음을 우리는 유념해야한다.

  새뮤얼 헌팅턴은 들로르의 말을 인용하여 '미래 갈등은 경제나 이념이 아니라 문화적 요인에 의해 촉발될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면서 헌팅턴은 무신론자가 증가하는 한편에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토착종교 혹은 새로운 종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젊은층은 현실을 살아가야한다. 그들에게 경제가 문화보다 영향력이 낮다고 볼 수 있을까? 경제적 요인이 문화적 요인과 결합하여 갈등을 촉발할 수 는 있으나, 문화적 요인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세상을 너무도 단순하게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젊은 층에서 무신론자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본다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경제적 요인이 아닐까?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서 갈등을 촉발 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문명'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것이 그의 주장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다. 


2.  '문명의 붕괴'가 쓰여진 이유

  편협한 문명관을 가진 새뮤얼 헌팅턴이 '문명의 붕괴'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이 나온 1990년대는 동구권이 몰락하고 소련이 해체되던 시기이다. 세계 초강대국으로 미국만이 남아 있던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에 새뮤얼 헌팅턴이 이 책을 쓴 목적을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물론 나의 개인적 분석이다.

  첫째, 미국이 절대 강자로 서기 위해서는 새로운 적이 필요하다. 소련이라는 절대악이 사라진 상황에서 새로운 악인 필요해졌다. 특히 미국을 움직이는 군산세력에게는 새로운 적은 필수적이다. 헌팅턴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민족성을 재창조하려는 민족에게는 적수가 반드시 필요하며 잠재적으로 가장 위험한 적대감은 세계 주요 문명들 사이의 단층선에서 불거진다."라고 말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적들이 반드시 필요함을 헌팅턴 스스로 이 책에서 인정한 샘이다. 악마는 자신이 악마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새로운 악마를 만들어낸다. 군산세력은 자신의 악마성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악마를 찾아야한다. 새뮤얼 헌팅턴은 그 악마를 문명에서 찾았다. 

  둘째, 냉전이 붕괴되면서 서구의 쇠락과 중국과 이슬람을 비롯한 비서구세력의 부상에 백인 서구사회가 위기감을 갖는다. 산업혁명을 주도하며 앞선 과학기술로 동양을 지배하는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서구의 절대적 힘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제 동양이 각성하면서 서구를 무섭게 추격하고 있다. 이에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미국과 서구 세력의 결속을 희망하고 있다. 추락하는 백인 중심 문명이 계속되길 바라는 그의 얇팍한 바램이 이 책의 곳곳에서 묻어난다. 

  이러한 이유에서 쓰여진 '문명의 충돌'에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문명의 적이 설정되어 있다. 바로 중국과 이슬람 문명이다. 그중에서도 새뮤얼 헌팅턴은 이슬람 문명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적대감이 도를 지나칠 정도로 강하다. 


 "전투성 화합 불능성, 비이슬람 교도 집단과의 물리적 근접성은 이슬람의 지속적 특성이다. 그리고 이것들로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이슬람 교도의 분쟁 성향(만일 이런 것이 존재한다면)을 설명할 수 있다."-359쪽


  이슬람을 전투성과 화합 불가능성이라는 '지속적 특성'을 가진 문명으로 규정짓는 것 자체가 무척 충격적이다. 적어도 하버드 대학의 교수라면 특정 문화에 대한 편견을 가지면 안되며, 가졌다하더라도 이를 드러내놓고 글로 쓰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 아니다. 이슬람세력이 아라비아반도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까지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요인은 '관용'에 있었다. 지즈야라는 인두세를 낸다면 비이슬람 교도라 할지라도 자신의 종교를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오스만 제국 시기에는 밀레트제가 실시도어 유대교는 물론이고 크리스트교도들도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용정책이 오스만제국을 강성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이슬람을 폭력의 종교로 규정하는 새뮤얼 헌팅턴에게 무척 깊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이슬람교를 믿는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데 반해서 서구의 크리스트교 신자들의 증가는 이에 따라오지 못하는 현실에서 서구 백인들은 위기감을 갖는다. 그리고 서구 대 이슬람이라는 문명의 대결구도를 구상하게된다. 이 책은 세상을 바로 보는 패러다임을 제공하는 책이라기 보다는 편협한 서구인들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책이라할 수 있다. 

  이슬람에 대한 헌팅턴의 두려움과는 달리, 2020년대에는 중국이 무서울 정도로 부상하고 있다. 미중무역전쟁이 벌어질 정도로 중국의 부상은 무서운 속도로 이뤄지고 있다. 헌팅턴은 중국의 부상에 대해서 경계심을 이 책에 나타내고 있으나, 이슬람 세력만큼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책의 430쪽에는 중국과 미국이 문명전쟁을 벌이는 가상시나리오가 적혀있다. 3류 판타지 전쟁 소설이라고 표현하기 힘들정도로 천박한 헌팅턴의 상상에 실소가 나올 정도이다. 

  헌팅턴에게, 아니 미국과 서구의 백인들에게 이슬람과 중국의 부상이 그리도 두려움의 대상인지 몰랐다. 이 책을 읽음으로서 서구의 극우 백인 지식인들의 세계관을 알게 되었다. 9개의 문명으로 세계를 나누기 보다는 미국을 대표하는 서구 패권주의와 이에 도전하는 비서구세력(러시아와 중국, 이슬람), 그리고 다수의 방관자들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보다 솔직한 태도가 아닐까? 문명이라는 외피를 씌워 자신들의 패권을 지키기 위한 패러다임을 만들려는 헌팅턴의 노력이 매우 가소롭다. 


3. 문명의 소통과 화해는 불가능 한가?

  새뮤얼 헌팅턴은 미국의 다문화주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의 책에 한부분을 살펴보자. 


  "(문화적 중추도 없는) 그렇게 이루어진 나라는 응집력 있는 사회로 오래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 준다. 다원 문화주의의 미국은 통일된 국가라기 보다는 민족들의 각축장이 될 것이다."-420쪽


  헌팅턴은 미국의 다문화주의를 비판한다. 아시아계와 이슬람 문화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가 미국에 흘러들어 만발하기를 바라기 보다는 미국이 서구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헌팅턴의 얇팍한 문화관은 하버드 대학의 교수라는 직함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한심한 수준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초강대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여러가지 이유중에 하나는 문화적 다양성이다. 에이미 추아가 쓴 '제국의 미래'에서도 소개되어 있듯이, 강대국으로 지속한 제국의 공통점은 개방성에 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일개 정치학자가 미국이 강대국으로 존속할 수 있는 힘을 무시하고 있다. 

  다원 문화주의에 부정적인 새뮤얼 헌팅턴은 한 나라의 문화 정체성을 고치는 것에도 매우 부정적이다. 


  "자기 나라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에 젖어 있는 정치 지도자는 반드시 실패한다. (중략) 정치 지도자들은 역사를 만들 수 있지만 역사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그들은 분열국을 만들 수는 있어도 서구 사회를 만들지는 못한다. 그들은 자기 나라를 문화적 정신 분열증에 감염시켜 그 수렁에서 좀처럼 빠져 나오지 못하게 만들 뿐이다."-206쪽


  새뮤얼 헌팅턴은 보편문화를 부정한다. 세계 정치는 근대화의 자극을 받으면서 문화의 경계선을 따라 재편되고, 비슷한 문화를 가진 민족과 국가끼리 뭉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기 나라의 문화를 서구식으로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새뮤얼 헌팅턴이 그토록 좋아하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급속히 서구화하였고 그결과 근대화에 성공한 사실을 헌팅턴은 무시하고 있다. 자가당착적인 편협한 문명관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같은 문화권에 있어도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헌팅턴은 보지 못하고 있다. 베트남과 중국이 같은 '중화문명권'이지만 사이가 좋지 않으며, 역사적으로 수많은 전쟁을 하였다. 같은 이슬람 문명권이지만, 이집트가 이슬람의 적인 이스라엘과 관계를 개선하는 현실을 그는 보지 못하고 있다.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고, 개 눈에는 똥만보이나 보다. 

  


  헌팅턴은 이 책에서 자신의 견해가 패러다임으로 받아주길 기대하고 있다. '문명의 충돌"을 페러다임으로 보길 바라는 헌팅턴의 주장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다면 어떤일이 펼쳐질까? 서구 백인중심의 문명이 계속되길 바라는 새뮤얼 헌팅턴의 세계관이 전세계를 뒤덮는다면 전세계는 분쟁과 대립으로 뒤덮일 것이다. 문명간의 대립과 오해는 더욱 심해져서 폭력이 폭력을 낳고, 보복이 보복을 부르는 아마게돈이 펼쳐질 질것이다. 그의 위험한 세계관이 우리의 두뇌를 점령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우리가 어떠한 세상을 만드는가와 긴밀이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평화롭고 소통하는 문명세계를 만들길 바란다면, 문명을 대립과 충돌의 관계로 바라보기 보다는 교류와 소통의 관계로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아니, 문명은 교류하기도하고 때로는 충돌하기도 했다. 만약 문명이 충돌한다면, 문명의 충돌을 막기 위한 교류와 화해의 방법을 찾는 것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제 서구 백인의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서, 화해와 공존, 번영을 바라는 우리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PS. 헌팅턴의 관점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의 글중에 일부는 마음에 들어 적어둔다. 


강력한 사회는 보편화하며 허약한 사회는 특수화 한다. 

물질적 성공은 문화적 자기 주장을 낳고, 단단한 힘은 부드러운 힘을 낳는다. - 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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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라면 정조처럼 - 정조대왕의 숨겨진 리더십 코드 5049
김준혁 지음 / 더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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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독살되었는가? 이 질문에 독살 되었다고 말하면 주류의 역사학자들에게 뭇매를 맞게 된다. 이덕일이 책을 많이 팔아 먹기위해서 주장한 것을 무비판적으로 믿는다는 비난을 받기에 딱좋다. 이덕일의 책을 많이 읽은 나로서는 이덕일을 변호하면서도 굳이 정조 독살설을 비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던 차에 문재인 대통령이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에 '리더라면 정조처럼'이라는 책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칭 정조변호라라고 말하는 김준혁 교수의 책이기에 그를 통해서 정조를 새롭게 만나고 싶었다. 시중의 자기 개발서의 냄새를 풍기는 책제목을 보며, 과연 인간 정조의 모습을 얼마나 새롭게 발견할지 궁금하다.

 

1. 정조의 개혁과 문재인의 개혁

"문재인 보유국"이라는 말이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 코로나 19 펜데믹 상황에서 초강대국 미국을 비롯한 소위 '선진국'들이 너무도 처참한 사태를 맞이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문재인 보유국"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박근혜 정권 시기 메르스 사태와 같은 대처를 코로나 19 펜데믹 상황에서 했다면 너무도 비참한 일들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인상 깊게 본 정조의 리더십은 무엇이었을까? 문재인 대통령은 정조가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경제개혁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고 한다.

  신혜통공을 실시하여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자유로운 상업발달을 도모하는 경제 개혁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용한다는 전교를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의 승지가 국왕의 전교를 대돌리며 반대했다. 마치, 조국을 비롯한 추미애, 박범계 법무장관을 임명하려하자, 야당이 무척이나 반대한 것과 유사하다. 특히, 조국 전 법무장관의 경우에는 검찰청이 상상을 초월한 고강도 압수수색을 했다. 검찰이 가지고 있었던 특권을 내려 놓는다는 것이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정조가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하는 것을 관철했듯이, 조국을 법무장관에 앉혔으며, 추다르크라 불리는 추미애와 판사출신의 박범계를 법무부 장관에 앉히며 개혁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마치 한화의 김인식 감독이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강팀들을 상대할 때, 계투 작전을 방불케하는 용인술이다. 조국과 마찬가지로 추미애와 박범계도 사소한 일들을 침소봉대하여 엄청난 부정부패를 저지른 추악한 사람으로 몰아붙인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들이 받은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신혜통공을 추진했던 채제공도 마찬가지이다. 시정잡배들이 채제공의 집에 와서 야유를 하는 무례한 짖들을 서슴치 않았다. 이러한 모든 고난을 극복해야만 개혁은 완성된다. 문재인 정권도 정조가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혜통공을 반포하여 조선의 상업을 발전시켰듯이, 검찰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우리의 검탈이 국민의 검찰로 다시 태어나길 기대한다.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을 하는데, 기자라는자들이 대통령에게 소통이 부족하다고 하자, 대통령은 "저는 반드시 기자회견만이 국민들과의 소통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통의 한 방법이죠."라고 일갈한다. 기자들의 얕은 생각으로는 자신들과의 소통이 국민들과의 소통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기자들에 대한 신뢰도가 많이 낮아졌다. 박근혜에게 질문한번 제대로 못하고,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기자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자들은 질문한번 제대로 못했다. 그러면서 기레기라는 말들이 시민들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 정권에서 질문도 제대로 못하는 기자들이 대통령에게 소통을 못한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그런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그럼, 대통령은 국민과 소통하고 있는가?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소통의 방법이 '국민청원'이다. 과거 정권에서는 상상도 못한 일들이 문재인 정권에서 벌어지고 있다. 국민이 자신의 목소리를 '국민청원'에 올리면 20만의 시민이 동의하면 청와대가 답변한다. 청와대가 해결할 수 없는 요청도 올라온다. 억울한 시민들은 자신의 억울함을 청와대가 해결은 못해도 들어주기를 소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정조가 화성행차를 하면서 수많은 격쟁을 받았던 사실을 떠올린다면 문재인 정권의 국민청원은 현대판 경쟁이요. 상언이다. 일본의 경우, 격쟁을 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한다. 다이묘에게 격쟁을 하면 다이묘는 농민의 억울함을 듣고서 그 농민을 죽여버렸다. 말그대로 목숨을 내놓아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정조대왕은 수많은 격쟁을 받아들이고, 백성의 고통을 해결하려했다. 왕의 행차를 징이나 꽹과리를 치면서 가로막고는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행위는 관점에 따라서는 무례한 일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소통의 한방법으로 정조는 활용한 것이다. 정조의 이런 소통의 방식은 맥이 끈기지 않았다. 정조의 '격쟁'은 문재인 정권에서 '국민청원'으로 부활하여 국민과 소통하고 있다. 이를 기레기들만 모르고 있다.

  김준혁 교수가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최고의 보물은 무엇일까? 김준혁 교수는 '하마석'이라 말한다. 양반이 말을 탈때, 양반은 노비를 밟고 말을 탄다. 인간이 인간을 밟는다는 것은 참으로 치욕스러운 일이다. 정조는 하마석을 설치하여 양반이 노비를 밟고 말을 타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없애려했다. 만백성을 아끼는 애민군주 정조의 모습이 빛나는 부분이다.

  오늘날의 애민정치는 어디에서 부터 시작해야할까? 코로나 19 펜데믹을 극복하고 있는 오늘을 생각해보자. 코로나 19 펜데믹 상황을 극복하는데 많은 의료인력들의 노고가 가장 크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료인력의 노고만으로는 지금의 K-방역이 성공할 수 없었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비대면 사회에서 택배 노동자의 활약이 없었다면 K-방역은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택배 노동자의 과로사 소식이 연이어 뉴스를 장식하고 있는 요즘, 택배 노동자에 대한 노동 상황을 개선하는데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아울러, 코로나 19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대한민국의 그늘진 노동현장을 들여다보고 개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애민군주 정조의 리더십을 보면서 문재인 정부가 배워야할 가장 큰 덕목이지 않을까?

 

2. 정조는 독살되었을까? 

정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정조는 왜? 죽었는가?"이다. 역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정조 독살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정조 독살설을 대중에게 퍼뜨리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바로 '이덕일'이다. 역사관련 서적 분야에서 이덕일은 엄청난 베스트 셀러를 연이어서 내놓고 있다. 억울하고 원통해하는 패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이덕일의 역사관은 한의 정서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강한 흡입력을 불러 일으킨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정조가 왕이되어 개혁정치를 추진하지만, 정순왕후로 대표되는 노론세력의 반발로 독살 되었다는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이다.

  이덕일의 "조선왕 독살사건"의 공전의 히트는 많은 강단 사학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특히 노론 중심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조선시대 전공자들은 이덕일을 열심히 비판했다. TV에 자주나오는 신00 교수는 독살설에 대해서 '조선이 그정도로 허술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역사관련 연수를 갔을 때, 충남대학교 모교수는 '어느 작가는 조선의 모든 왕들이 독살되었다는 듯이 서술한 사람도 있다.'라며 비꼬기도 했다. 정조 독살설은 이덕일을 비판하는데 빠지지 않는 단골 소재이다. 삼인성호라는 말이 있다. 한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말하면 믿지 않지만, 세사람이 말하면 호랑이가 시장에 나타났다는 말을 믿는다. 나도 정조 독살설을 믿지 않았다. 정조는 화병과 과로가 겹쳐서 죽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리더라면 정조처럼"을 읽으며 생각이 달라졌다.

  "정조는 독살 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정조는 화병과 과로사 겹쳐 죽었다는 기존입장이 왜? 정조는 독살 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바뀌었을까? 정조를 둘러싼 주변 상황이 정조 독살을 의심하기 충분했다. 정조의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영조는 정조를 효장세자에게 입적시킨다. 그런데, 효장세자가 죽은 이유를 아는가?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효장세자는 '화흉(和兇)'으로 죽었다. 무신난 이후, 소론과 남인이 영조의 대를 끊어 놓기 위해서 죽은 사람의 뼈를 가루내어 효장세자의 밥에 넣고 궁궐주변에 묻어두었다. 이러한 죽음은 효장세자로 끝나지 않았다.

  정조가 3번이나 청혼한 끝에 결혼한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의 죽음에도 석연치 않았다. 문효세자의 죽음은 홍역 때문인 것으로 추측하였으나, 문효세자가 죽은 후 2년 뒤 밝혀진 사실은 구선복에 의한 독살이었다. 문효세자의 어머니이 의빈  성씨도 구선복에 의한 독살이었다. 구선복은 누구인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 죽을 때, 사도세자의 얼굴에 침을 뱉었던 자이다. 이를 12살의 정조는 똑똑히 보았다. 그럼에도 왕이 되어 구선복을 죽이지 않았건만, 구선복은 정조가 사랑하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를 독살했다. 정조 주변에는 노론세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조를 노리고 있었다. '명의록'에는 정조가 왕세손 시절에 갑옷을 입고 잠을 잤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한나라의 왕세손이 자객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갑옷을 입고 잠을 잤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정조가 즉위하고 나서 사흘만에 자객이 궁궐에 난입한 사실만 보더라도 정조 주변에는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많았고, 정조 주변의 소중한 인물들이 독살되었다.

  정조의 죽음에도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약을 잘못 사용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나는 여기에 주목하지 않는다. 정순왕후가 기력이 좋아지고 있는 정조의 방에 들어와서 신하들로하여금 무러나게한다. 얼마후 곡소리가 난다. 정조는 "수정전"을 외쳤다. 수정전은 정순왕후를 뜻한다. 기력이 회복되고 있는 정조를 여성이 독대한다는 것은 조선시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조사후, 권력을 잡은 것은 정순왕후이다. 정조의 죽음을 통해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정순왕후이다. 그렇다면 정순왕후를 의심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가?

  결정적 증거가 없기에 노론 세력에 의해서 정조가 독살 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조와 정조를 둘러싼 사람들의 죽음은 '정조 독살설'을 허무 맹랑한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도록 만든다.

 

 

  정조는 무명옷만 입었으며, 옷이 해지거나 버선이 구멍나면 이를 버리지 않고 꿰매 입었다. 침전 영춘전이 하도 낡아 비가 오면 빗물이 스며들어 곰팡이가 피기도 했다. 조선의 모든 것이 그의 것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모두 누리려하지 않았다. 자신이 누리면 백성의 삶이 힘들어진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너무도 검소해서 방안에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다면 자신의 건강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도 알았을텐데 말이다.

  지존의 자리에 있지만 자신을 낮추며 몸으로 낮은 곳에 임하는 삶을 살았던 정조 대왕! 그의 삶을 통해서 나도 한가지를 배웠다.

 

  "일은 완벽하기를 요구하지 말고, 말은 다하려고 하지 말라!"

 

  탁월한 리더일 수록 아랫사람의 일처리가 미숙해보인다. 내가 리더에 있을지라도 절대 완벽을 요구하지 말자. 부족한 점이 있으면 리더인 내가 채워주자! 리더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면 아랫사람은 입을 다문다. 아랫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로이 말할 수 있도록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말자. 이것이 '리더라면 정조처럼'을 통해서 배운 정조의 리더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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