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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평점 :
감옥이라는 장소는 억압의 장소이다.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여 고통을 주는 장소이다. 그러나, 세상이 나의 자유를 빼앗아 고통을 주려할지라도, 나의 내면의 자유까지 빼앗지는 못한다. 감옥을 '대학'이라고 말한 고 김대중 대통령,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통해서 주옥과 같은 글들을 남긴 고 신영복 선생은 감옥에서 영혼의 자유를 지켰다. 감옥이라는 고통의 공간에서 영혼의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서 처절한 노력을 한 빅터 프랭크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통해서 제3의 심리학을 탄생시켰다. 감옥에서 절망하지 않고 영혼의 자유를 지키려 노력한 소설이 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가 바로 그 책이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어떻게 수용소에서 영혼의 자유를 지켰을까?
빅터 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읽었을 때, 수용소가 군대와 너무도 유사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인상은 알렉신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책 곳곳에서 먹는 것에 집착하는 모습이 묘사되어있다. 죽한 그릇을 더 먹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 그릇과 숫가락까지 싹삭 핱는 모습에서 수용인들의 배고픔이 읽혔다. 그리고 군복무 시절,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팟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초코파이 하나를 먹기 위해서 가지도 안던 교회를 다녔다. 그런데, 휴가를 나오면 그렇게도 맛있어 보였던 초코파이에 눈길이 가지 않는다. 수용소와 군대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했고, 그러한 억압속에서 생존이라는 너무도 기본족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본능에 집착했다.
이 책의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도 역시 생존이라는 본능에 집착했다. 그러나, 본능에만 집착하는 동물이 되지는 않았다. 소련 공산당이 그를 동물 취급하며 수용소라는 우리안에 갖아두었지만, 이반 데니소비치는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최소한의 규칙을 만들었다. 수용소에서 식사를 하면서 모자를 벗었으며, 뇌물을 주어 좀더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뇌물을 주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뇌물이라는 것을 줘본 적도 없고 받아본 적도 없다. 수용소에 들어와서도 그짓만은 끝내 배우지 못했다." 이것이 이반 데니소비치가 동물취급을 받으면서도 인간성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이다.
수용소에서 혹은 군대에서 동물 취급을 받는다. "너희는 전쟁에서 한번 써먹기 위해한 소모품이야"라는 당직사관의 말을 들으면서도 소모품이 되기 싫었다. 사수가 되어 부사수에게 경계근무에 나설 준비를 하라고 했다. 나는 재발리 PX에서 먹을 것을 사가지고 왔다. 부사수에서 지금 당장 먹으라며 먹을 것을 주었다. 경계 근무지에서 경계근무 원칙을 부사수에게 외우도록 했고, 그러지 못하면 무척이나 면박을 주었다. 당직사관이 경계근무에서 복귀하는 우리에게 물어볼 것이 뻔하기에 경계근무 2시간 동안 부사수를 교육시킬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미안해서 부사수에게 물었다. 내가 밉지 않냐고.... 부사수는 의외의 말을 했다. 근무지에 가기전에 맛있는 먹을 것을 주어서 오히려 좋았다며 부사수는 웃었다. 그랬다. 먹을 것에 집착하는 동물적 본능에 우리는 충실했다. 그러면서도 나 혼자만 먹는 동물이 되기 싫어서 부사수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먹을 것을 나눠먹는 인간적인 모습에 부사수는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수용소에서도 군대에서도 우리는 인간으로 존재하려 노력했다.
수용소와 군대가 괴로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담배한대를 피우며 상념에 잠기며 안정감과 즐거움을 느낀다. 추운 수용소에서 작업을 하기 전에 난로를 쬐며 몸을 녹인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난로가 없어도 이 순간의 자유로움이란 너무도 행복한 것"이라며 이 순간을 즐긴다.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순간의 행복을 잃지 않는다. 이 모습은 빅터 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볼 수 있었던 수용소에서 수용자가 찾는 조그마한 즐거움과 너무도 일치하는 모습이다. 물론, 교회에 나가서 초코파이 하나를 얻어 먹으며 행복해하던 우리들도 마냥 행복했다. 아무리 극한 상황이라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현실이 아무리 좋더라도 희망을 잃는다면 지옥을 맛보는 것과 같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하루를 마감하며 "그렇다. 오늘 하루는 왠지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그래서 그런지 마음도 들떠서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라며 행복감에 취한다. 누구에게는 수용소 혹은 감옥이 하루도 있기 싫은 지옥일 텐데, 이반 데니소비치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 벌이는 강압과 통제 속에서 내면의 자유와 행복을 느끼고 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사형 선고를 받고 나서 감옥에서 독서를 통해서 엄청난 지식을 얻었고, 고 신영복 선생은 사형 선고를 받고 나서 풀려날 수 있다는 기약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고전을 읽으며 마음 수양의 장으로 감옥을 이용했다. 일체유심조라했던가! 나의 심지가 굳을 수록 외부의 강압에 맞서 승리할 수 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자전적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얇지만, 절대 얇지 않은 책이다. 스탈린치하의 소련 수용소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탁월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책에 1962년 소련에서 발표되었고, 1964년 레닌 문학상 후보에 추천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1974년 소련에서 추방되기 전까지 작가로 소련에서 생활을 했다. 우리는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기억하고 있다. 만약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와 같은 소설을 펴낼 수 있었을까? 북한이라는 곳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들이 소련에서는 가능했다. 그것이 그나마 소련과 북한의 차이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마음 한켠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쌓여져갔다. 러시아 출신의 한국인 박노자는 대중강연에서 소련시절 자신의 추억을 솔직하게 말했다. 빵을 구하려면 줄을 서야했지만, 소련시절 문화생활을 영위하며 공동체(미르) 속에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꼈던 아련한 추억은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소련에 대한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반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 비친 소련의 그야말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의 제국이다. 박노자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기억하는 소련의 모습은 너무도 다르다. 물론, 소련의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났던 박노자와, 조국 전쟁에서 제2급 훈장 및 붉은별 훈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반소 선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8년 교정 노동형을 선고받은 솔제니친이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 수는없다. 과연, 누구의 기억이 현실에 존재했던 소련의 실제 이미지에 가까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