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일, 병신년 삼월 초 열흘. 달빛은 교교하니 밤도 야심한 삼경(三更) 즈음에 소생은 드디어 로마제국쇠망사를 다 읽고야 말았다. 연이나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아하’ 하는 도터지고 박터지는 깨우침은 차마 없더라도 ‘탁’하며 무릎치는 경쾌한 소리 정도는 있어야 마땅할 것이관대, 소생은 역시 축생이라 무슨 허기가 지는지 다만 ‘쭙쭙...쩝쩝...’거리는 입맛 다시는 소리밖에 나오질 않았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그 깊은 밤에.
도도하게 흐르는 장강과도 같은 이 책을 언제부터 읽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롱롱롱타임어고는 확실하다. 뒤져보니 2015년 3월 25일자 페이퍼에 4권 520쪽을 읽고 있다는 기록이 최초의 기록이다. 좋게 말하자면 우공이산의 정신으로 읽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읽었고, 여름날의 호숫가에서도 읽었고, 가을의 공원 벤취 위에서도 읽었으니,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이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의 사랑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적으로 읽었다.(무슨 소린지...) 그렇다 세월가는대로 읽었다. 우공이산이라니 우습다. 이산(移山)은 커녕 부질없는 삽질만 헛되이 분주했다. 아이고 허리야...
1권 694쪽, 2권 561쪽, 3권 554쪽, 4권 581쪽, 5권 635쪽, 6권 664쪽. 어쨌든 대단하다 3689쪽을 읽었다니 말이다. 스고이데쓰. 하도 오랫동안 읽어서 그동안 뭘 읽었는지 무슨 내용인지 기억은 하나도 안나고 무슨 특별한 느낌이나 감상도 없다. 한심하다면 한심하다. 뭐 소생의 독서가 대충 다 이 모양이다. 다만 축생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작을 읽어내었다는 데에 깊은 의미를 두기로 했다. 왜 이런 거 있지 않은가 “어머머머머, 이거 왜 이러세요. 제가 이래봐도 <로마제국 쇠망사>를 다 읽은 사람이에요....아니....돼지예요...음....”
민음사는 이 쇠망사 6권이 ‘국내 최초 영한대역 완역본’이라고 자랑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기번의 저작 원본에는 각주가 원래 8300여개가 있었고(이른바 ‘기번의 잡담’ 혹은 ‘기번의 수다’라는 것이다.) 민음사가 번역 대본으로 삼은 버리(J.B.Bury)판에는 4700여개로 줄었는데 민음사는 이중에서도 본문 이해에 큰 필요가 없는 350여개는 번역을 생략했다고 ‘일러두기’ 및 ‘후기’에서 실토하고 있다. 그러면서 영어판을 제외한 어느 판보다 각주를 많이 번역했기 때문에 ‘감히 완역판이라고 자부하고 싶’다는 것이다. 더불어 소생도 사실을 토설하자면 완독이라 할 수 없다. 각주를 다 읽지는 못했다. 각주는 거의 반 밖에 읽지 않은 것 같다. 350여개나 생략했다고 하는데도 각주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읽으려고 하면 본문 흐름이 번번이 끊어지고 해서 읽다 말다 했던 것이다.
읽을 때마다 잊어버리고 마는데 이 책이 사실은 쓰여진지 꽤 오래된 책이다. 1776년에서 1788년에 걸쳐서 간행되었으니 230년도 훨씬 넘은 책이다. 아시겠지만 내용은 서기 2세기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서 시작하여 서로마 제국의 멸망, 동로마 제국의 창건, 신성로마제국의 건국, 투르크에 의한 동로마제국의 멸망까지 약 1400년간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로마제국의 역사를 최초로 개관한 역사서로 평가받고 있다.
기번은 대장정의 마지막에 와서 자신이 이 오랜 여정을 처음 구상했던 그때를 회상하고 있다. “거의 20년동안 내 삶의 즐거움이자 활력이었던 이 작품을 집필할 생각을 처음 품은 것은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폐허에 서 있을 때였다.” (6권 664쪽) 그렇다. 온전하게 보존된 유적이나 화려하게 복원된 유물보다 우리의 감흥과 영감을 더욱 자극하고 충동하는 것은 어쩌면 ‘폐허’인지도 모른다. 그 폐허가 품고있는 어딘지 안타깝고 쓸쓸한 몰락과 쇠망의 정취인지도 모른다. 눈 밝은 이들은 이끼 낀 초석들, 부러져 뒹구는 신전 기둥들 사이의 그 쓸쓸한 폐허 속에서도 지난날의 찬란했던 번영과 영광의 흔적을 찾아 낼 수 있을지니, ‘맥수지탄(麥秀之嘆)’의 고사가 옛 시인의 허사는 아닐 것이다.
끝으로 각 권 뒷 표지에 인쇄된 각계 각층의 어마무시한 헌사를 옮겨본다. 다만 한가지 첨부하자면, 기번은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에 대한 평가에서는 야박해서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을 쓴 스티븐 런치만 경 같은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기번에게는 비잔티움은 추잡한 미신의 막간극에 불과한 무시되어 마땅한 존재였다’
<제1권 뒷표지>
로마 제국 쇠망사를 읽는 동안 에드워드 기번은 언제나 나에게 북극성 같은 길잡이였다. 기번의 정신은 모든 저명한 서구 역사가들 중에서 일찍이 유례가 없을 만큼 강력하고 눈부시다. 기번은 역사를 탐구하고 서술하면서 역사 분야뿐 아니라 그 어느 문학 장르의 작품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걸작을 만들었다. - 아놀드 토인비
<제2권 뒷표지>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서술된 독특한 역사서다. 1400년에 걸쳐 서서히 멸망해 가는 대제국의 역사를 치밀한 묘사와 탁월한 해석으로 하나하나 짚어 간 이 웅편거작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간의 악덕들이 장강의 물결처럼 펼쳐진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권력욕과 성욕, 뒤틀린 심성과 모자라는 지성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제위 찬탈, 골육상잔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기번은 이토록 불완전한 인간이 자신의 불완전선을 무릅쓰고 쌓아올린 인류사 최대의 영광으로 로마사를 조망하고 있다. 때문에 이 책은 역사서이면서도 단순한 역사 서술을 뛰어넘는 문학 작품으로서 독자적인 인간관과 세계관을 보여주는 불후의 고전이다. - 이인화
<제3권 뒷표지>
기번은 역사의 바다를 항해하는 항해사다. 아마도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인물일 것이다. 그의 글은 마치 잘 건조된 배를 보듯 웅장하고 정교하고 듬직하다. 200년 전에 출간되었음에도 <로마제국 쇠망사>는 지금도 여전히 우뚝 서 있다......그는 인간 성취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으며, 그가 서술한 로마 제국의 쇠망은 작금의 세상을 뒤흔들 격렬한 변화를 암시하고 예고한다는 점에서 그는 표지판이기도 하다. - E.M. 포스터
<제4권 뒷표지>
기번은 고대와 근세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그는 이 야만의 세기들이 보여 주는 음울함과 무질서함의 깊고 넓은 수렁을 눈부시게 오간다. - 토마스 칼라일
로마 제국 쇠망사를 읽기 시작한 순간 나는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문장에 즉시 압도당했다. 나는 게걸스럽게 기번의 책을 탐독했다. 한 장을 다 읽으면 뿌듯한 마음에 바로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서 아주 즐겁게 읽었다. 심지어는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주석에도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 윈스턴 처칠
<제5권 뒷표지>
기번과 함께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위대한 예술가를 잘 보호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기번은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들을 균형감각을 잘 갖추어 가며 볼 수 있게 해 준다. 여기서는 압축하고 저기서는 확장한다. 그는 순서와 사건을 바꾸어 놓고, 강조하고, 생략하기도 한다...... 그는 가장 많은 자원을 가진 엔터테이너이다...... 우리는 부드럽게 위아래로 흔들리는 목마에 올라타 몇 시간이고 로마 제국 쇠망사를 읽다가 어는 순간 목마가 땅을 떠났음을, 날개 달린 준마를 타고 있음을 알고 퍼뜩 놀란다. 큰 원을 그리며 하늘을 나니 아래로 유럽이 펼쳐진다.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흘러간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 버지니아 울프
<제6권의 뒷표지>
기번에 대해서는 그가 자평했듯이, 근면과 엄밀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게 그가 지닌 것이었다...... 하지마나 역사를 쓰려면 무언가 더 필요하다. 글이 읽을 만해야 하며, 스타일과 의도에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기번은 그 기념비적인 책의 품위에 어울리는 스타일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균형, 양감, 대조를 갖추고 있다. 기번은 이런 종류의 스타일을 전복적이고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구사한다. 그건 어디서 배운 걸까?...... 여기서는 우리는 타키투스에 이르게 된다. - 로널드 사임
로마제국쇠망사 완주를 축하하며 황송하옵게도 '로마의 원로원과 인민'이 소생에게 황금월계관을 보내왔다.
소생은 그동안 '로마의 원로원과 인민' 수호에 불철주야 헌신한 간담에게 영광과 기쁨을 돌렸다.
아래 사진은 로마의 폐허, 포룸 로마눔 지역이다. 카피톨리누스 언덕과 필타누스 언덕 사이에 위치한 이 지역은 제국의 정치, 경제, 행정, 종교의 중심지였다. 각종 신전, 회당, 원로원 의사당, 최고신관 관저, 각종 집무소 등이 즐비하던 곳이다. 세계를 지배하던 제국은 사라졌고 그 수도는 폐허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