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현대 미국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폭력적인 미국의 서부시대와 현대의 미국, 그리고 암울한 핏빛으로 덥힌 미래의 미국의 모습까지 마치 살아서 경험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내는 작가입니다. 그리고 그 암울한 세상 속에서도 인간의 사랑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작가입니다. 올해는 코맥 매카시가 꼭 노벨상을 수상해서 우리에게도 많이 읽혀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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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은감이 있지만 밀란 쿤데라가 노벨상을 수상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오래 전에 수상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작가인데... 시대의 폭력성과 그 폭력성 속에서 한 인간으로서 존재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뛰어난 소설가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도 그의 소설을 읽어야 할 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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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 인 윈도 모중석 스릴러 클럽 47
A. J. 핀 지음, 부선희 옮김 / 비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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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내가 본 것이 항상 실재 상황이고, 내가 기억하는 것이 항상 진실이라고 언제나 확신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힘든 상황에 놓이고 이로 인해 몸이 아프거나 여러 가지 스트레스로 압박을 받을 때는 정신이 혼미해질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 내가 보고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의심이 들 때가 있다. '그땐 내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잘못 봤나 보다!' '그땐 내가 너무 스트레스가 많아서 왜곡되게 생각했나 보다!'라고 넘길 때가 많다. 심지어 주변 사람까지 그렇게 말할 때가 있다. 그래도 나는 내가 본 것을 끝까지 믿어야 할까.

 

[우먼 인 윈도] 속의 여주인공은 흔히 말하는 '광장공포증'을 겪고 있는 '애나'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한때 잘나가는 소아 정신과 의사였지만, 지금은 어떤 사건의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문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오직 혼자 집 안에 갇혀서 창문으로만 세상을 내다본다. 남편과 딸아이와도 별거 중이어서 오직 전화로만 대화한다. (사실은 전화로 대화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 부분은 나중에 밝혀진다) 하루 종일 커튼으로 창문을 가리고, 오직 니콘 카메라의 망원 렌즈를 통해서 이웃집들을 들여다보는 것이 유일한 바깥세상과의 통로이다. 때로는 인터넷의 SNS를 통해 이웃들을 들여다본다.(이것 역시 가상 공간이라는 의미나 빼면 창문으로 바깥세상을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는 하루 종일 혼자서 스릴러 고전영화를 보고 의사가 준 여러 가지 약물을 절대로 함께 먹지 말라는 술과 함께 여러 신경안정제들을 먹으며 하루를 보낸다. 극도로 폐쇄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유일한 친구가 생긴다. 이웃집에 이사 온 알리스타 러셀과 제인 러셀의 가정을 반듯한 소년인 이선이라는 아이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그녀의 집에 이사 선물을 전해 주러 왔다가 그녀와 대화를 한다. 이선은 대화 중에 친구들과 떨어져 먼 곳으로 혼자 왔다며 갑자기 외로움을 드러내며 눈물을 흘린다. 그녀는 그런 이선에게 잃어버렸던 정신과 의사로 직업의식과 함께 모성애를 느낀다. 그리고 그에게 따스하게 대한다. 얼마 후 이선의 어머니인 제인 러셀도 그녀의 집을 방문한다. 그리고 병이 발병한 후 처음으로 타인과 오랜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한다. 그런데 얼마 후 우연히 러셀의 집의 창문을 보다가 제인이 칼에 찔리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녀는 급하게 911에 신고를 하고 제인을 살리기 위해 집 밖으로 뛰어나가지만 광장 공포증으로 인해 순간 정신을 잃게 된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의사와 형사, 그리고 이웃집의 러셀과 아들 이선까지 아무 일이 없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분명히 칼에 찔린 것을 보았던 제인 러셀이라는 사람은 전혀 다른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녀가 알던 제인 러셀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으로 판명된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헛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광장공포증으로 신경 안정제와 여러 가지 약물을 와인과 함께 먹으며 하루 종일 고전 스릴러를 보는 여자가 본 것을 누가 믿겠는가?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이제 그녀도 자신이 본 것을 의심하게 된다.

 

"락트인 증후군 원인으로는 뇌졸중, 뇌간 상, 다발성경화증, 독극물 등이 있다. 신경학적 증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과적인 증상이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말 그대로 감금되어 있다. 문은 잠겼고, 창문은 닫혀 있다. 빛이 무서워서 웅크리고 있는 동안, 공원 건너편에서는 한 여자가 칼에 찔렸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암도 그 사실을 모른다. 나를 제외하고는. 가족과 별거 중인 데다, 술에 절어 세입자와 섹스를 해대는 나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아웃 사람들에게는 내가 이상해 보이겠지. 형사들은 농담하는 줄 안다. 의사는 특이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물리치료사는 나를 그저 가여운 사람으로 여긴다. 갇혀 있는 여자, 영웅도 탐정도 아니다. 나는 갇혀 있다. 세상 밖에." P 338

 

이 책은 뉴욕타임스에서 40주 동안 베스트셀러로 1위를 한 작품이다. 게리 올드먼과 같은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있어서 곧 개봉할 예정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이유를 알 것 같다. 소설은 현대인의 심리를 매우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잔혹한 환경에 의해 상처받고 세상과 사람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며 스스로를 가두어 두고 있는 현대인의 심리를 너무 잘 표현하고 있다.

 

"병원에서는 내가 쇼크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쇼크는 두려움이 되었다. 두려움은 변형되어 공포가 괴었다. 그리고 필딩 박사가 등장할 때쯤, 나는 극심한 광장공포증을 앓고 있었다. 박사는 그렇게 간단하고 효율적인 단어로 내 상태를 표시했다. 나는 이 집이 제공하는 익숙한 경계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나는 저 거대한 하늘 아래에서, 외계의 야만의 땅에서 이틀 밤을 보냈기 때문이다." P 456

 

소설을 읽는 동안 스스로를 가두고, 술과 약물, 그리고 과거의 상처에 의해 스스로 무너져가고 있는 한 여성의 심리를 내밀하게 접하게 된다. 그리고 내 안에도 이렇게 무너져가고 있는 마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마저 잃어버리면 스스로 무너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유명한 철학적인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말한 데카르트 역시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실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쩌면 악마가 모든 것을 환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비록 내가 환상을 보고 있더라도, 그것을 보고 생각하는 나란 존재는 결코 부정할 수 없다고,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는 이상 자신이 존재하며, 그 존재만큼은 진실이라고 확신을 했다. 그리고 자신이 진실이라면 자신이 보고 있는 것도 진실이라고 믿게 되었다.

 

소설을 읽으며 결국 나마저 나를 믿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 봤다. 상황이 어떠할지라도,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라고, 그럼에도 내가 나만은 나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나마저 나 자신을 믿지 못힌디면 결국 마지막 기둥마저 무너져 내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아의 붕괴일 것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끝까지 자신이 본 것을 믿었다. 남들이 계속해서 자신이 본 것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스스로에게도 확신이 없는 순간에도, 그녀는 자기 자신을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져 가는 스스로를 일으켜 세운다. 그런데 정말 그녀가 본 것이 진실이었을까. 궁금한 사람은 소설을 읽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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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패망사 - 태평양전쟁 1936~1945 걸작 논픽션 17
존 톨랜드 지음, 박병화.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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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이가 자기보다 훨씬 키가 크고 덩치도 있는 상대에게 달려든다. 그리고 무작정 주먹을 날린다. 그 대가로 망신창이가 되도록 두드려 맞지만,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그는 계속해서 상대를 향해 달려든다. 상대는 차츰 그 상대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 눈빛에서 공포까지 느낀다. 그럼에도 상대는 그를 꺽어 놓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을 향해 무모하게 돌진했던 일본과 그 일본을 응징해야 했던 미국의 상황이 아닐까?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으로 돌진했을 때 과연 일본은 스스로도 미국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일본제국 패망사]라는 책은 열자마자 그 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일본의 광기를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번역되기 전부터 [THE RISING SUN]이란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다. 태평양 전쟁에 관심이 있어서 오래전부터 이 책을 읽고 싶은 욕구가 있었는데, 이번에 번역이 되어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분량과 막대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구입하게 되었다. 이 책은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끓어오르는 기점이 되는 1936년부터 일본이 패망하는 1945년까지의 기록을 다루고 있다. 페이지만 무려 1400페이지이다. 그럼에도 이 책의 첫 장을 열자마자 그 안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일본은 잔혹한 군국주의의 광기가 뿜어져 나왔다. 책장을 열고 처음 접하는 사진들은 태평양 전쟁의 잔혹한 사진들과 일본의 광기 어린 군국주의의 사진들이다. 그리고 바로 일본의 군국주의가 폭주하는 1936년의 상황으로 전개된다.

 

일본의 태평양전쟁의 과정은 다큐멘터리나 책을 통해 여러 번 접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태평양 전쟁의 과정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본질을 다루고 있다. 물론 저자인 '존 톨런드'는 일본의 군국주의와 무모한 팽창주의를 지적하면서도 시종 일본에 우호적인 필치로 글을 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는 일본이 왜 그렇게 무모한 전쟁으로 폭주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매우 세밀하고 깊이 있게 접근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대부분의 서양인은 도조 장군과 일본 지도자들이 히틀러나 그의 군대보다 더 나을 것이 없으며 마땅히 무슨 벌이든 받고 불행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뒤 일본은 정신적, 경제적으로 완전히 망가진 재난에서 벗어나 세계 국가들 사이에서 다시 존중받는 지위를 회복했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하다. 전쟁 중에 번번이 야만족처럼 행동한 나라와 그 국민을 우리가 어떻게 존중하고 칭찬하게 되었단 말인가? 대체로 일본인의 시각으로 본 이 책은 그런 의문과 함께 아시아의 지형을 바꿔놓은 전쟁을 둘러싼 물음들에 대한 필자의 답변이기도 하다. 캘리포니아 정도의 크기밖에 안 되는 나라가 무엇 때문에 진주만을 공격했고 열 배는 더 강한 적과 죽기 살리고 싸우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행동을 했단 말인가?" (P 37)

 

이 책의 1936년의 황도파로 불리는 육군의 젊은 장교들의 반란 사건(2.26사건, 또는 쇼와 유신이라고 부르기도 함)으로 시작한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점령하고 만주국을 세운 후, 나름 아시아의 강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다른 유럽 열강들처럼 국제공항으로 인한 서민층들의 가난과 자원의 빈곤으로 인해 허덕이고 있었다. 이와 함께 소련과 중국 공산당의 남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육군 장교들을 중심으로 부폐한 관리를을 암살하고, 군인 중심의 군국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은 며칠 만에 무산되었지만, 이 사건 이후 일본의 핵심 권력은 대부분 육군 장교들에게 주어지고, 일본 안에는 군국주의적 야망이 자라나게 된다. 그리고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알려진 베이징 근교의 일본군과 중국군의 충돌로 인해 중일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진행하는 과정을 보면 겉으로는 아시아를 서구의 열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아시아 전체가 다 잘 살게 한다는 대동아 정책을 주장하며,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난징학살같이 30만 명을 학살하고 강간하는 무자비한 폭력성이 존재한다. 아마 이것이 일본을 본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건일 것이다. 일본의 지도부는 중일전쟁의 과정에서 적당한 선에서 중국정부와 전쟁에서 타협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쟁의 맛을 본 일선 군인들은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질 정도로 폭주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 안정을 위협하는 두 가지 맹독 - 게코쿠조와 기회주의-이 다시 나타났다. 중국에서 또 한 번의 큰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육군대신 스기야마가 협상의 문턱을 높여버렸다. 그런 다음 중국 북부 주둔군 사령관이 예기치 않게 고노에와 참모본부의 특별 명령을 거스르고 베이징에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는 일이 벌어졌다. - 중략- 장제스가 진정으로 협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 내린 고노에는 평화를 위한 지름길을 택하고 '일본의 이상을 공유하는' 중국인들과 거래하기로 결심했다. 1938년 1월 16일 그는 '제국 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협상을 중단할 것이며 협력을 원하는 새로운 중국 정권의 출범과 성장에 의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P 120)

 

그러나 폭주를 막을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특히 중일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일본은 중국에서의 철수를 결심한다. 그런데 하필 그때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고, 히틀러에 의해 영국과 프랑스가 무력화된다. 그러자 일본은 중국에서 철수하기는커녕 중국을 넘어 동남아 지역까지 욕심을 낸다. 저자는 이것을 일본의 기회주의라고 부르고, 이 작전을 '버스를 놓치지 마' 정책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의 전쟁이 1940년까지 질질 끌자, 일본 참모본부는 그해 안에 완전히 승리하지 못하면, 병력을 차츰 철수시키고 중국 북부에 공산주의를 막을 방어부대만 남겨놓기로 비밀리 결정했다. - 중략 - 히틀러의 손쉬운 승리에 도취된 일본군 지도부는 생각을 바꿔 '버스를 놓치지 말자!'라는 구호를 채택했다. 프랑스가 패배하고 영국이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상황에서 석유 및 기타 절박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로 진격할 때가 다가왔다. - 중략- 기회주의적인 태도가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며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갔다. 한때, 중국에서 물러나는 것을 감수했던 일본군은 유럽에서 히틀러가 얻은 갑작스러운 행운에 유혹을 받고 동남아시아의 자원으로 눈길을 돌렸다." (P 132)

 

물론 이렇게 파국으로 폭주하는 일본에 대한 견제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집단 광기 앞에서 이성적인 목소리는 쉽게 묻혀 버렸다.

 

"버스를 놓치지 마! 정책을 입안한 군국주의자들은 전쟁을 원하지도 않았고 예견하지도 못했다. 프랑스가 패배하고 영국이 자체의 생존을 위해 전투를 벌이는 상황에서 일본에게 인도차이나는 고무와 주석, 텅스텐, 석탄, 쌀 등의 자원이 넘치는 '길바닥에 놓인 채 누군가가 주워가기만을 기다리는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 중략- 이 모든 일이 진행되는 동안 마쓰오카의 반발이 있었다. 또 대본영에서 생각이 더 깊은 사람들은 앵글로색슨 국가와 알력을 빚을 것을 예건 하기도 했다. 이 일로 육군 참모총장인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황은 눈물을 흘리며 사직했다." (P 136)

 

이런 과정은 진주만 공습까지 그대로 반복되며 이어진다. 군국주의 집단들이 ABCD국가(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와 전쟁을 통해 태평양으로의 영토를 확대하려고 하고, 미래를 보는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이에 제동을 걸려한다. 그러나 한 번 폭주한 군국주의자들은 결국 6척의 항공모함에 300대가 넘는 전투기를 싣고 진주만을 폭격한다. 이 과정에서 도조 총리대신이나 야마모토 함장 같은 군구주의자들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폭주하게 되고, 결국 일본을 나락에 떨어뜨리게 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일본의 군국주의의 폭주를 근원을 두 가지로 보고 있다. 하나는 하극상이라고 부르는 게코쿠조이다. 젊은 육군장교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서 (할복의 형태로 자주 나타남) 폭주하고, 지도부나 정치인들은 마지못해 동조하는 과정이다. 흔히 말하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폭주하는 기관차에 올라타는 형식이다. 아마 지금의 일본인의 정서의 대부분에도 이런 분위기가 팽배할 것이다. 아베 총리가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동조하며 따라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회주의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일본의 탐욕이다. 겉으로는 양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기회만 되면 승냥이처럼 먹이를 향해 달려든다. 심지어는 그 먹이가 당장은 맛이어 보이지만, 독이 될 것이 분명해도 무조건 달려든다. 당장의 탐욕을 막을 집단적 이성이나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만주사변, 중일전쟁, 동남아 침략, 진주만 공습 등으로 일본 군국주의가 폭주한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겉으로는 매우 공손하게 보이지만, 조금의 허점만 보이면 승냥이처럼 먹잇감을 향해 달려드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일본의 태평양 전쟁의 원인과 과정을 깊이있고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매우 중요한 책이지만, 동시에 일본이라는 나라 속에 감추어진 본성을 이해하게 하는데 매우 귀중한 책이다. 전체적인 책의 분위기에서 저자는 미국적인 시각에서 일본에 대해 친근감을 가지고  쓰고 있다. 아마 일본의 진짜 적은 미국이 아니고 소련이었고, 미국이 조금만 더 양보했으면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대신 일본이 소련을 견제했을 거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런 저자의 시각은 현대 미국이 일본에 가지고 있는 시각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다만 대상이 소련에서 중국으로 바뀌었을 뿐) 그럼에도 저자는 나름 일본의 행동 근본에 있는 그들의 본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많은 자료와 그들의 문화를 통해 왜 그들이 그렇게 무모한 결정을 내렸는지를 깊이 있게 접근을 한다. 이것이 현대 일본을 이해하는데 너무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한일 갈등이 극에 다다르고 있는 이 시기에 우리가 이 책을 꼭 읽어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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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아메리카나 1~2 - 전2권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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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설 중의 하나가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일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피츠제럴드 생전에는 별로 인기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에 인기 있는 있는 작가였던 피츠제럴드의 작품이 왜 그렇게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았을까? 개인적으로 [위대한 개츠비]가 바로 1920년대 미국 사회의 계층 문화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소설이나 영화는 때로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아메리카나]를 읽으며 문뜩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의 작품은 과연 나이지리아에서 인기가 있을까? 이렇게 사실적으로 나이지리아 사회를,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욕망을 그려내고 있는데도 과연 나이지리아에서 읽힐까?'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이 소설은 아디치에의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은 후 읽기 시작했다. 아다치에는 나이지리아의 현대 여성작가이다. 많은 사람이 그녀를 페미니즘 작가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녀의 소설에는 단순히 여성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나이지리아나 아프리카 사람, 더 나아가 흑인들의 전체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이 책도 마찬가지이다. 한 여성이 나이지리아에서 모두들 동경하는 미국의 유학 생활을 시작한다. 그녀는 마치 화려한 도시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자신을 잃어가지만, 스스로의 정체성을 발견하며 점점 자신을 찾아간다. 이 과정에서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찾아가는 부분도 언급하지만, 주된 내용은 아프리카인으로서, 더 나아가 나이지리아 인으로서 자신을 찾아가는 부분이 더 주를 이룬다.

 

소설의 초반부는 나이지리아에서 미국으로 유학 와서 타인이 보기에 비교적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페멜루라는 여성의 시각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프린스턴에서 시간강사이지만 교수직으로 일하고 있다. 처음 미국으로 유학을 온 아프리카 여성들은 그녀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그녀는 나이지리아를 그리워하고, 나이지리아에서 사랑했던 첫사랑인 오빈제라는 남성을 못 잊어 한다.

 

"그녀의 영혼 속에는 납덩이가 있었다. 벌써 꽤 오래전부터 그녀는 아침마다 피로, 암울, 이성의 무너짐을 느끼는 병을 앓아 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찾아온 형태 없는 갈망, 모양 없는 욕망, 자신이 살 수도 있었을 또 다른 삶에 대한 찰나적 몽상이 몇 달에 걸쳐 서로 뒤섞이면서 사무치는 향수가 되었다. 그녀는 나이지리아 웹 사이트, 페이스부의 나이지리아인들, 나이지리아인들의 블로그를 미친 듯이 찾아 헤맸다. 그런데 클릭할 때마다 나오는 것은 또 한 명의 젊은이가 미국이나 영국에서 학위를 따 가지고 최근 금의환향하여 투자 회사, 음반 제작사, 패션 브랜드, 잡지사 혹은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를 시작하려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 남녀들의 사진을 본 그녀는 마치 그들이 자신의 손을 비틀어 열고 그 안에 있던 것을 뺏어 가기라도 한 것처럼 무딘 상실감을 느꼈다. 그들은 그녀의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지리아는 그녀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이 되었다." (1권, P 17)

 

나이지리아에서 살고 있는 오빈제의 시각에서 묘사되는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영국 유학 후 나이지리아의 거물의 부정한 일을 봐 주며 나름 성공을 거머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마치 신기루처럼 여긴다.

 

"레키 고속 도로에 들어서자 빗줄기가 약해지면서 차들이 빠르게 움직였고 잠시 후 게이브리얼은 오빈제네 집의 높고 검은 대문 앞에서 경적을 눌렀다. - 중략 - 모든 방이 시원할 테고, 에어컨 통풍구는 조용히 흔들리고 있을 것이며, 부엌은 카레와 타님의 향긋한 냄새로 가득할 것이고, 아래층에는 CNN이 틀어져 있는 반면, 위층 텔레비전에는 카툰 네트워크가 틀어져 있을 것이며, 이 모든 것에는 어느 구우의 침해도 받지 않은 풍요의 분위기가 스며 있을 것이었다. 그가 차에서 내렸다. 걸음걸이는 뻣뻣하고, 다리는 천근만근이었다. 그는 몇 달 전부터 자신이 성취한 모든 것 - 가족, 집, 자동차, 은행 계좌 - 때문에 붕 뜬 듯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고 때때로 모든 것을 핀으로 찔러 바람을 빼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그는 더 이상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한 번도 확신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의 자기 인생을 정말로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좋아해야 마땅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인지를." (1권, P 43)

 

그리고 소설은 나이지리아에서의 이페멜루의 성장기를 다룬다. 반복되는 쿠데타에 혼란스러운 나이지리아의 상황, 정상적인 사회생활이나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상류층의 사람들은 모두들 미국에서의 삶을 꿈꾼다. 그녀는 아버지의 퇴직 이후 겨우 학교를 다니는 상황이었지만, 이런 상류층과 어울리게 되고, 누구보다도 미국의 삶을 꿈꾸는 오빈제를 만나다. 그녀는 오빈제를 만나 사랑하고 함께 미국에서의 삶을 꿈꾸지만, 고모의 권유를 오빈제보다 먼저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을 시작한다.

 

막상 미국에 도착하자, 미국은 그녀가 꿈꾸는 곳이 아니었다. 나이지리아에서 장군으로 불리는 남성의 애인이자, 잘 나가는 의사였던 고모는 3-4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겨우겨우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페멜루 역시 등록금을 내재 못해서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진다. 그러다가 겨우 백인 남자 친구를 만나서 그 밑바닥에서 탈출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미국인들이 아프리카너나 흑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선 속에 스스로를 옭아매는 자신을 비롯한 아프리카너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블로그에 올리며 나름 미국의 차별 문화를 비판하지만, 어느새 자신 역시 그런 문화 속에 빠져 버려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다시금 나이지리아로, 오빈제에게로 돌아가는 꿈꾼다.

 

아디치에의 소설은 우리에게는 낯선 나이지리아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러기에 나이지리아의 낯선 환경과 문화 종교, 종족들을 이야기할 때마다 낯선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진다. 그런데 소설을 읽으면서 이 낯섬 속에서 점점 우리와 닮아있는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철저한 가부장적인 문화, 남녀 차별의 문화, 계속되는 쿠데타와 부패, 그 부패 속에서 성공하는 사람들과 몰락하는 사람들, 현실도피를 위해 미국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 그리고 막상 미국에 도착하자 자신들이 꿈꾸었던 미국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하는 사람들, 나이지리아에 돌아온 유학생들이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성공하는 모습들. 이 모든 것들이 한국 사회와 너무나 닮아있다. 거친 나이지리아의 환경과 검은 피부색에 대한 묘사 속에서 한국 사회의 모습들을 발견할 때마다 느끼는 낯설고도 묘한 동질감과 이질감이 소설을 읽는 내내 기분을 묘하게 한다. 마치 한 번도 맛보지 못한 낯선 음식을 먹으면서 이물감을 느끼는 것 같다. 이 음식을 맛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거북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이 소설은 이렇게 사회적이고 문화적이거나 인종적인 이야기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의 주된 뼈대는 이페멜루와 오빈제의 사랑 이야기다. 각자가 서로의 삶에서 허상을 쫓아가다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 주된 흐름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그러기에 문화나 인종 문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흥미 있게 소설을 읽어갈 수 있다. 이것이 이 소설을 더 멋지게 장식해 주는 장식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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