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로서의 유물론 문화과학 이론신서 33
가라타니 고진 지음, 이경훈 옮김 / 문화과학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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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구나 유머적인 정신 상태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드물게 밖에 발견되지 않는 천분이며, 수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주는 유머적 쾌감을 맛볼 능력조차 결핍되어 있다. (프로이트, <유머>, 132쪽)

ⓒ2003 문화과학사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세계 문학계가 알아주는 일본의 문예비평가이다. 스스로 '비평가'라고 불리길 자청했지만 가라타니 고진은 단순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비평가, 평론가와는 좀 차원이 다르다. 아즈마 히로키(東 浩紀)가 이 책의 '해설'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가라타니 고진이 스스로 비평가이기를 자청하는 것은 기존의 문예비평의 전통, 곧 비평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내고 동시대의 문학(의 경향)을 읽어낼 수 있었던 전통을 잃어버리고 '동업자비평' 수준으로 전락한 현실에 맞서고 저항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일본의 문화, 문학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색안경을 끼고 보게 마련인 우리나라에서조차 최근에 소개되고 있는 그의 저서들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번역서는 '덧붙이는 글' 참조).

이를 문학평론가 홍정선 교수는 문화일보를 통해 "가라타니의 저술활동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적인 학문풍토와 상당히 다른 세계다. 그는 작은 주제에 철저하게 매달리는 일본적인 아카데미즘과는 반대로 넓고 큰 문제들을 거침없이 다루는 서구적인 아카데미즘의 세계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는 문학이라는 영역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철학, 역사, 건축, 마르크시즘 등 폭넓은 세계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개방시켜왔다"고 하면서 이런 가라타니의 세계성과 열린 정신이 우리나라에서도 주목받게 된 이유일 것이라 말하고 있다. 실제로 가라타니는 일본에서는 드물게도 천황제에 반대하는 비판적 지식인 그룹에 속한다.

<유머로서의 유물론>은 이런 가라타니 고진이 1969년부터 작업해온 것들을 모아서 엮은 '평론'집이다. 그 대부분이 미국이나 프랑스 등의 잡지에 실린 원고들이라고 한다. 평론이라고는 하지만 '하나의 공간, 두 개의 19세기', '비데카르트적 코기토', '푸코와 일본', '라이프니쯔 증후군' 등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철학과 문학, 건축을 오가는 '메타담론'에 가까운 비평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편집 순서대로 읽어도 좋고 각 글마다 따로 읽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필자는 후자의 방법을 택했는데, 그건 전적으로 필자의 일본 문학에 대한 무지 탓이다.

일본 문학이나 문화에 생경한 필자에게는 그들의 작품이나 작가들이 나열되는 문학사가 다소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푸코와 일본', '라이프니쯔 증후군'과 같이 어느 정도 익숙하게 다가오는 글부터 읽는 방법을 취한 것이다. 아마도 문학보다는 철학에 익숙한 필자의 취향 탓일 것이다. 그러나 다 읽고 난 후에 생각해보니 이건 쓸데없는 선입견에 따른 선택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 글이나 단순히 철학이나 문학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학문영역을 횡단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기에.

이러한 가라타니의 방법론은 어찌 보면 푸코의 '고고학'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다만 푸코가 광기나 성, 권력 등 서구 근대사회의 메타담론에 입각해서 고고학적 계보학을 형성하고 있다면, 고진은 근대국가의 성립,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근대의 형성에 가장 가까이 있는 문학담론의 형성으로써 일본 근대의 기원을 파헤치는 수순을 밟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1980)에서 도입한 이러한 방법론을 이용해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에서는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원용, '에크리튀르'(Ecruture:문자/글말)에 대한 통찰을 얻어내고 이를 메이지(明治)시대의 언문일치 연구를 통해서 다시 데리다를 뒤집어 버린다.

언어에서 문자를 배제한 소쉬르 이래의 언어학의 음성중심주의를 데리다는 플라톤 이래의 서양 형이상학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지만 가라타니는 근대 민족의 형성과 분리할 수 없는 문제로 보는 것이다.

"근대의 민족은 각각 '세계 제국' 안에서 분절화되어 출현한다. 그것을 정치적인 국가의 측면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별도의 계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문학'에 의해, 아니면 '미학'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 64쪽)

이를 설명하기 위해 소쉬르, 야콥슨, 데리다는 물론 우리에게 생소한 토키에다와 같은 일본 언어학자들의 이름들이 나열되지만 결론은 (일본)언어(≒문학)를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분리해서 사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곧 일본만의 고유한 '표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라타니의 인식은 "푸코와 일본"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푸코가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일본에 관해 책을 썼던 (…) 하이데거로부터 코제브, 바르트,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 그들에겐 일본이란 서양 외부의, 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nowhere)이며, 그곳에 그들의 '서구' 비판이 투사되고 있다. 그 '일본'이 그들의 표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자명한 일이다. 일본인으로서도 '일본'은 중국이나 서양이라는 거울에 비친 표상이며, 그 경우의 '중국'과 '서양'은 어디에도 없는 장소이다. 그리고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통해 스스로의 문화를 비판하는 일은, 자기동일성을 확립하기 위해 가장 흔히 사용되는 수단이다." ("푸코와 일본", 107~108쪽)

다시 말하면 우리가 흔히들 다른 나라의 문화나 현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우리의 기존의 사고틀에 맞추어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가하지만 원래 '인식'이란 것의 속성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문화의 비교를 통해 보고 싶은 것은 다른 나라의 문화나 현실이 아니라 거꾸로 그 안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과도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서구 철학이나 사상을 구부러뜨리고 일본의 문학을 종횡무진 오가며 일본의 근대, 동양의 근대에 대해 파헤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일본의 것, 일본의 사상을 옹호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오늘의 일본을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드러내는 작업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히로키는 이 작업을 바로 오늘의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병'을 치유하고자 하는 흔적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일본만의 것이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바다 건너 우리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리라. 이것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하나의 '희망'으로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이것이 이 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도 못하는 짤막한 글 "유머로서의 유물론"을 책의 제목으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유머'란 '희망'의 또다른 이름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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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0
고미숙 지음 / 책세상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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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근대성의 심해를 탐사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근대 계몽기로 돌아갈 것이다. 영화 <박하사탕>의 주인공이 기차를 타고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가듯이. 물론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순연한 첫사랑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온통 역설과 아이러니로 뒤범벅된 '원체험'들이다." ('들어가는말' 중에서)

ⓒ2003 책세상
1. 우리가 여행을 다니다보면, 뜻밖의 곳에서 뜻밖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움은 종종 나 자신만의 것이거나 함께 한 동료들만의 것이 되기 십상이다. 그 아름다운 곳에서 일상의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갖다 붙이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한 아름다움은 한낱 외지인의 호들갑스러움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 사회과학적 용어로 말한다면 '외부자의 시선'이 찾아낸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동강의 생태학적 보고로서의 지위와 아름다움, 아우라지와 어라연의 아름다움 역시도 근대라는 이름으로 세련된 외부자(도시인들)의 시선이 찾아낸 '풍경'인 것이다. 그러나 아우라지를 건네주는 뱃사공의 눈에 비친 그곳은 그저 평생을 보낸 삶의 현장일 뿐일 것이다.

2. 우리가 '민비'로 알고 있는 명성황후는 90년대 들어 뮤지컬 <명성황후>를 통해 각광을 받더니 최근에는 TV사극 <명성황후>에서도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다 장렬하게 순교한 조선의 국모로 추앙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를 가장 사실적으로 서술했다는 황현의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에조차 '민비'는 한번도 개혁의 주체로 묘사된 적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민비가 대원군과의 권력투쟁을 위해 등용한 민씨 일가는 당시 대표적인 탐관오리이자 무능하기 짝이 없는 매판관리의 전형이었다. 근대 계몽기의 민족주의 매체 <대한매일신보>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민씨 일가의 부패상들이 고발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민비'가 '명성황후'라는 새로운 기호로 부각되는 현상의 근저에는 '반일=국수=지선(至善)'이라는 관념이 자리잡고 있다. 일본에 반하는 것은 무조건 애국적인 것이라는 지독한 강박증! 한국 축구는 일본 축구에 무조건 이겨야 한다(실력이 안 되면 정신력으로라도)는 지독한 애국증!

3. 나름대로 여성문제에 상당한 인식을 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자칭 '페미니스트' 여성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그 일면적 반남성적 시각에 경악을 하게 될 때가 많다. 여성해방이라는 게 결코 남성을 적으로 삼아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건 6,70년대 여성해방론자들이 서구 맑시즘과의 페미니즘 논쟁을 통해 확립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90년대 대한민국의 주류 페미니스트들은 이미 용도폐기된 '남성주적론'의 몽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가부장적 권위가 유난히 강한 남한사회의 특수성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도가 지나친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자칭 (얼치기) 페미니스트 아줌마들의 '박근혜 대통령론'으로 희화화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현준/김규항의 '그놈'들의 사회주의, '그년'들의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연상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고미숙의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가 분석하는 대상 곧 민족, 여성(섹슈얼리티), 병리학(기독교)도 철저하게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감추어온 신체적 표상의 왜곡과 굴절을 파헤치며 시작한다. 위에서 예로 든 '외부자의 시선'이나 '민비', '축구민족주의' 등도 모두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야기다.

제1장에서는 먼저 근대성의 태풍의 눈인 '민족'이라는 초월자가 대체 어떤 경로를 통해 출현했는지, 그리고 어떤 심리적 기제로 정착되어 가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국가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허상적 군주의 자리를 대체한 민족은 이제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또 하나의 초월자가 된다.

'민족'을 설명하면서 TV 드라마 <가을동화>의 예를 들며 지은이는 한(恨)의 정서가 과연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인가고 되묻는다. 남녀 주인공의 운명적 엇갈림, 어김없이 뒤따르는 삼각관계, 마지막을 장식하는 여주인공의 불치병과 죽음. 여기엔 민족이라는 '텅 빈' 기호를 한이라는 과잉 정서를 통해 메우려는 매너리즘이 개입해 있다는 얘기다. '왜 우리에게는 사랑의 능동적 환희를 통해 삶의 경계를 넓혀가는 식의 발상에 발을 딛지 못하는 것일까'고 반문하면서….

이로써 민족 혹은 그 의식은 서구라는 타자와 길항하면서 탄생한 근대적 산물임이 밝혀진다. 민족이라는 기표가 초월적 지위를 획득하면서 혈통적 순수성, 단일 민족, 서사로서의 역사라는 표상이 뒤따르게 된다.

제2장에서는 여성이 민족이라는 범주에 편입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배치가 어떻게 변환되는지를 분석한다. 부국강병을 위해 근대 계몽기는 여성의 힘을 당위로 요청한다. 이는 물론 서구 문명국가들을 맹목적으로 수용한 결과였다고 한다.

여성이 국민으로 편입된 것은 다수의 여성이 참여한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통해서였다고 한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이천만 중 여자가 일천만이오. 일천만 중에 지환(가락지) 있는 이가 반은 넘을 터이오나" "국채를 갚고 보면 국권만 회복할 뿐 아니라 우리 여자의 힘이 세상에 전파되어 남녀동등권을 찾을 것"이라는 논설 역시 여성 평등권에 대한 논의의 출발점이 어디인지, 민족주의 담론이 왜 남녀평등권을 인정했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은이는 근대에는 논리 이전의 선험적 차원에서 남녀평등, 여성해방이라는 테제가 주어졌다고 진단한다. 이제 국민으로 탄생한 여성에게는 오로지 인구 재생산의 역할과 미래의 국민이 될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주체로만 요청된다. 아울러 여성은 오직 어머니로서만 호명될 뿐 성적 주체로서의 욕망은 완전히 박탈된다. 계몽 담론 내에서 성적 일탈 전반에 대한 공격이 가해지고 매음녀, 방탕한 여인네들에 대한 마녀 사냥이 시행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한다.

제3장에서는 근대인들의 신체에 대한 표상을 장악하고 있는 근본 메커니즘으로서의 병리학을 탐색한다. 지은이는 위생과 청결을 강조하는 병리학은 한국의 근대성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김옥균, 서재필 등 근대 계몽기의 급진 개화파나 식자층에게 서구의 문명은 위생과 건강이라는 표상으로 다가온다. 건강한 인종과 국민이 곧 부국강병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옥균 등 개화파들은 변소 개량을 주장했다. 바야흐로 위생의 시대가 바로 근대였다는 것. 그러나 개화기 민중은 위생을 위해 관이 권장하는 대로 똥을 모아 놓았으나 오히려 그 악취 때문에 집값이 폭락하는 곤경에 빠졌다. 따라서 '위생이 원수이자, 위생이 곧 고생'이라는 한탄이 많았다고 한다. 몸의 청결에서 시작된 위생의 개념이 영혼도 깨끗히 씻어야 한다는 압박으로 다가왔을 때 선교사와 교회가 몰려왔다고 언급하는 대목도 아주 시사적이라 할 수 있다.

이들에게 위생은 야만과 대립되는 문명의 표지로 자리잡았고, 결국 교육과 더불어 국권회복으로 가는 필수불가결한 코스로 자리잡는다. 이러한 병과 위생에 관한 새로운 규정은 사회 전체로 확산되고, 급기야 시대를 진단하는 수사학적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고 한다. 공중보건, 운동회, 체조 등을 전국민에게 유포시켰던 근대 계몽기의 담론의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스스로를 아주 '현대적'이라고, 다시 말해서 근대를 넘어섰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통렬하게 한 방 먹인다. '당신은 전형적인 근대인'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아마도 우리 '현대인'들은 우리의 신체와 무의식에 각인된 '근대성의 표상체계'를 너무 얕잡아보았거나 아니면 감지조차 못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근대화에 대한 목마름과 지난한 투쟁 끝에 달성했다고 의심치 않는 근대적 주체인 우리의 내부가 사실은 '텅 빈' 것임을 말하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신체와 무의식에 각인된 근대성의 표상들이라는 외투를 벗겨내어 '지금, 여기에' 있는 자리를 사유하도록 만든다. 왜? '새로운 주체'를 만들기 위해!

기차는 근대인들의 표상체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호이다. 기차가 도래하면서 모든 시공간은 균질화되고 선분화된다. 결국 기차는 근대적 주체 생산의 여러 국면에 깊이 관여한, 문명의 교두보 역할을 수행했다. (169쪽)

그러나 기차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기차'의 출현과 함께. 인터넷은 우리 시대의 기차다. 그것은 20세기 초 기차가 도래하면서 시공간을 완전히 재배치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전혀 다른 시공간을 열어 젖힐 것이다. 이제 누구든 자신의 국적에 갇힐 필요가 없다. (170쪽)

네티즌은 이미 세계를 자신의 서식처로 삼는다는 점에서 세계인이다. 또 여자로서, 남자로서 자신을 고정시킬 이유 또한 사라졌다. 이제 새로운 주체를 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낯설고 이질적인 장 속에 능동적으로 뛰어들 수 있는 용기뿐이리라. (172쪽) ('맺는말' 중에서)
고미숙,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 민족 섹슈얼리티 병리학>, 책세상(2001), 4,900원

목차

1. 민족 또는 새로운 초월자의 출현
(1). 민족에 대한 원초적 질문. 두서너 가지
(2). 민족. 그 신성한 기호의 출현
(3). 한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인가
(4). 결론 - 최면술. 기억. 달라이라마

2. 여성은 어떻게 국민이 되었나
(1). 범람하는 성. 가부장제 페미니즘?
(2). "동방견문록" "고려사"를 보면
(3). 근대 계몽기와 여성의 발견
(4). 여성이 국민이 되려면?
(5). 섹슈얼리티에 관한 유쾌한 상상

3. 병리학과 기독교 - 근대적 신체의 탄생
(1). 근대의 성소들 - 목욕탕. 병원. 교회
(2). 병리학의 도래와 근대
(3). 기독교의 병리학적 구조
(4). 에필로그 - "간장선생"에 대한 단상
<오마이뉴스>에 게재되었던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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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극장, 욕망하는 영화기계
고미숙 외 지음, 수유연구실 엮음 / 소명출판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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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화로 철학한다고 해서-인용자) 예술적인 영화를 '폼나게' 해석하는 것도, 난해한 철학을 세련되게 해석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배치'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영화를 통해 낯설고 이질적인 사유를 구성하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발딛고 있는 삶을 전혀 다른 실험의 장으로 변환하는 것, 혹은 영화와 접속하여 낡고 익숙한 사유체계를 슬그머니 뒤집어 전혀 다른 용법으로 활용하는 것. 이런 측면에서 우리에게 영화란 삶의 이질성이 고동치고, 전복적인 사유가 범람하는 '철학극장'인 셈이다."('책머리에' 중에서)

영화비평이라는 것. 우리가 흔히 보는 것이지만, 어떤 영화에 대한 정보를 모아서 보여주는 것은 그 영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영화에 대한 비평과 동일시되는 현상은 그다지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사실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 마음만 먹으면 그런 정도의 정보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며, 또 상당수는 전문가 못지 않은 식견을 갖추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영화비평이 이런 식의 정보 나열과 영화감상후기 식으로 이루어진다면, 비평이 따로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2003 소명출판
<철학극장, 욕망하는 영화기계>는 영화에 대한 기존의 상투적 비평을 넘어 '영화로 철학하기'를 시도하는 일련의 흐름들의 연장선 상에 있는 글들을 모은 책이다. 곧 '필로시네마'란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해온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의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쓰여진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 영화에 대한 15개의 글들을 5개의 소주제로 분류하여 엮고 있지만 크게 보면 '욕망'이라는 테마를 둘러싼 다양한 흐름들, 곧 욕망을 억압하고 주어진 틀에 포획하려는 근대적 폭력기제들에 대한 문제제기, 그 억압을 벗어나려는 다양한 시도나 존재들에 대한 문제제기 등 궁극적으로 '욕망과 배치', '욕망과 권력'의 문제로 수렴된다.

여기서 욕망은 무언가 끈적끈적하고 부정의 이미지를 내포하는 욕망이 아니라 무언가를 생산하려는 긍정적 힘으로서의 욕망이다. 다시 말해서 욕망이란 결여된 것을 채우려는 의지라고 보는 일반화된 관점, 그리고 라캉에 의해 정교하게 발전된 개념에 반대하여, 그것은 무엇인가를 생산하려는 의지고, 따라서 생산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의 욕망 개념에 근거한 것인데, 스피노자가 말하는 '코나투스'나 니체가 말하는 '권력의지'와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는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며, 욕망은 상징계 속에서 언어적으로 구조화된다"는 라캉의 이론에 반대하여 "욕망은 그 자체로서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무의식"이라 주장한다.

곧 라캉의 욕망이 '결여' 혹은 '상실'을 통해서만 발생하는 것이라면, 들뢰즈/가타리의 욕망은 결여가 아니라 '생산'이며, 상실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긍정적 힘'인 것이다.

그런데 이 욕망은 삶의 양상이 다양한 만큼 다양한 '배치'로 존재한다. 욕망은 원래 계급의 구별도, 남성과 여성의 구별도, 동성애와 이성애의 구별도, 백인과 유색인의 구별도 인식하지 못한다. 특정한 '배치' 속에서만 욕망은 그런 것들을 중요하게 받아들인다.

따라서 욕망은 어떤 배치 속에서 작동하느냐에 따라 혁명적일 수도 있고, 파시즘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때 이 욕망은 철저하게 '권력'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인용하며, '정치(학)의 근본문제'로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대중들은 왜 그것이 마치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하는 것인가?" (자세한 것은 이 책 제4부의 <랜드 앤 프리덤> 참조)

이른바 '코드화된 욕망', 바로 권력에 길들여지고 특정한 질서에 포섭되고 그것에 의해 코드화된 욕망의 문제이다. 권력은 욕망을 억압함으로써 작동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길들임으로써 더욱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욕망하는 기계들 혹은 소수자-되기"에서 분석하고 있는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집시의 시간>, <에드우드>는 이러한 욕망을 억압하고 길들이는 사회체제의 이면에 존재하는 소수자의 삶, 소수자의 꿈을 다루고 있다.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서 클라라와 해리, 조젯이 그리는 삶의 선들은 이들의 욕망을 각기 다른 방향의 벡터를 갖는 다른 욕망과 조우하게 하고 서로 부딪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새로운 삶의 생성으로 변화시키는 흐름을 찾지는 못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욕망의 다양한 흐름들이 갖는 혁명성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대표할 조직을 생각하고 대표자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로 조직화된 욕망은 결코 혁명적일 수 없다. 욕망의 혁명성은 조직화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조직화할 수 없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와 미시정치"에서는 우리의 신체 깊숙히 각인되어 있는 억압기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성, 가족, 가부장제와 종교라는 억압기제가 작동하는 우리의 신체와 그것으로부터의 탈주.

<안토니아스 라인>을 분석하면서 단순히 페미니즘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페미니즘 너머의 세계를 응시하는, 여성이 아니라 소수자의 삶과 그것으로부터 탈주하고자 하는 욕망에 관한 것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비록 김기덕의 <섬>에서처럼 '재영토화'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할지라도 죽음조차 불사하는 탈주의 감행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근대적 권력의 몇 가지 초상"에서는 이러한 욕망과 결부되어 있는 권력의 문제, 곧 파시즘의 문제를 제기한다. 폭력을 계도하는 폭력의 문제(<클락워크 오렌지>), 일상적 메카니즘으로 자리잡은 파시즘의 문제(세 친구>), 역사 속의 파시즘 문제(<랜드 앤 프리덤>)를 동일선상에 놓고 무엇이 다른가를 반문한다.

파시즘은 광화문에 모여 '대한민국'을 외치는 붉은 악마의 물결 속에서도 존재하며, 일상적인 법체계 속에도 존재하고, 동성애자들이나 이주노동자들에게 행해지는 우리들의 까닭 모를 분노 속에서도 존재한다. 이제 파시즘은 더 이상 국가나 민족, 인종의 수준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로 파고 들어와서 우리들의 욕망 자체를 제어한다.

그렇다면, 파시즘이 이러한 미시적 수준에서 작동하고 있다면, 혁명 역시 그와 같은 수준에서 작동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욕망이 파시즘으로 변환될 수 있다면, 욕망은 또한 혁명으로 변환될 수도 있는 것이기에…. 파시즘이 현재진행형이라면 혁명 역시 현재진행형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욕망이 갖는 혁명적 성격과 잠재력이며, 또한 어떤 혁명도 욕망에 기초하지 않고선 곤란하리란 점을 깨우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혁명적 운동이란 의무나 도덕에 의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어 하는 것이란 점, 즉 욕망에 의해 하는 것이란 점을 상기해야 한다"는 말을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흔히 좌파들이 하기 쉬운 오해, "욕망은 혁명적이다"라는 들뢰즈/가타리의 명제를 욕망에 대한 무조건적 찬사로 간주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이 명제는 욕망이란 어떠한 사회 질서와도 근본적으로 충돌하고 대립할 것이란 것을 뜻하지, 욕망이 혁명을 만들거나 혁명과 동일시됨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켄 로치가 <랜드 앤 프리덤>에 관해 "Toby Banks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것은 여전히 진행형인 '전쟁기계'의 본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고병권의 분석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젊은 사람들이, 옛 경구를 빌어 말하자면, '투쟁은 계속된다'는 것, 그것은 과거 안에 매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희망합니다."(234쪽)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철학극장, 욕망하는 영화기계>, 소명출판(2002/14,000원)

목차


제1부 욕망하는 기계들 혹은 소수자-되기

구원의 길, 구원받지 못한 사랑 - 비상구는 누구에게 열렸는가 :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아직 오지 않은 민중'의 시간 : <집시의 시간>
"에드우드" - 욕망하는 영화기계들의 이름 : <에드우드>

제2부 섹슈얼리트와 미시정치

욕망, 이름, 계급의 삼중주? :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그녀들의 기계, 타자들의 공동체 : <안토니아스 라인>
욕망, 그 포획과 미끄러짐 사이 : 김기덕의 <섬>을 읽는다

제3부 기억의 그림자와 망각의 빛

그림자와 실체에 대한 철학적 물음들 : <카게무샤>
잠행, 기억에 반하는 여행 : <허공에의 질주>
'사이'의 긴장을 포기한 박쥐의 안식처 : <베트맨>

제4부 근대적 권력의 몇 가지 초상

폭력을 증요하는 폭력 : <클락워크 오렌지>
군대, 그 일상적 파시즘에 대한 사실주의 보고서 : <세 친구>
전쟁기계와 포획장치 : <랜드 앤 프리덤>

제5부 부재하는 세계의 존재론

근대, 혹은 계산 가능한 세계의 초상 : <알파빌>
'종합적 쾌락' 혹은 기계적 종합의 원리에 관한 고찰 : 이아라 리의 영화 <종합적 쾌락(Synthetic Pleasure)>
자연의 존재론과 무위의 윤리학 : <솔라리스>
<오마이뉴스>에 게재되었던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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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9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너희들이 이 편지를 읽게 될 즈음엔 나는 더 이상 너희들과 함께 있지 못할 게다. 너희들은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고 어린 꼬마들은 이내 나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빠는 소신껏 행동했으며 내 자신의 이념에 충실했단다. 아빠는 너희들이 훌륭한 혁명가로 자라기를 바란다.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혁명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 각자가 외따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점을 늘 기억하여 주기 바란다.
(체게바라가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체게바라 평전>, 실천문학사)

흔히 쓰는 표현으로 질풍노도와 같았던 80년대적 꿈과 이상이 쓰러진 자리에는 아픈 회한과 눈물만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눈물과 회한조차 돈이 된다면, 춤추는 자본의 기획으로 포섭되어 최신 유행의 상품이 되기도 한다는 걸 우리는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혁명의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이 난무하던 지난 97년, 전세계적으로 가장 각광받았던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체게바라일 것이다. 그의 사망 30주기를 추모하는 물결로 시작한 흐름은 그의 피가 묻힌 안데스 산맥에서, 그의 시신이 누워 있는 쿠바에서, 그의 죽음을 사주했던 미국에서, 심지어 생전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이 90%는 넘을 대한민국에서조차도 하나의 '유행'이었다. 대학가에 휘날리는 짙은 수염의 체의 초상화, 체의 얼굴이 붉게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거리낌 없이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이들... 그 티셔츠의 뒷면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Revolution Forever!"

헉! 내가 그걸 보고 들었던 첫 느낌의 표현이었다. 혁명을 찬양하는 그 문구가 놀라운 게 아니라 혁명조차 돈이 된다면 '상품'으로 팔아먹는, 영악한 자본의 속성이 새삼스러워서 그랬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포스트모던' 세태를 새삼 나무란들 무엇하랴. 이기와 물질에 찌든 현대인에게 어쩌면 그런 '변덕'조차 고마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혁명은 더 이상 시대의 유행은 아니겠으나, 그 혁명이 해결하려던 숙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인간의 자유와 정의를 억압하는 그 모든 현실이 있는 한…. 그런 현실 앞에서 우리도 이젠 마냥 목놓아 괴로와하기보다는 적당히 영합할 줄 아는 '솔로몬의 지혜'를 터득해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못내 아쉬운 사람들은 어떤 경로로든, 그 꿈과 이상의 복원을 기원한다. 그 꿈, 체게바라가 안데스 산맥에서 고립돼 죽어가는 순간에도 결코 놓지 않았던 그 꿈은 무엇이었을까?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체가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게릴라 대원들에게 항상 강조했던 말이다. 불가능한 꿈. 물론 이건 결코 불가능한 꿈만은 아니었다. 이걸 그는 쿠바혁명을 통해, 소수 게릴라 대원들을 이끌고 농민들의 지원을 받아가며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려 그 꿈을 실현시켜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혁명후 그는 쿠바 국립은행 총재와 재무장관을 역임하면서 혁명후 쿠바사회 건설의 핵심 브레인 역할을 했고, 뛰어난 언변을 활용해 외교관으로 나서서 전 아메리카 대륙에 혁명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그는 마침내, 그 자신이 역설한 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혁명 실현을 위해 피델(카스트로)에게 보내는 편지 한 장 남기고 볼리비아의 밀림 속으로 스며든다.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은 해방된 사회가 아니라 압제에 맞서 싸우는 볼리비아 민중들'이라는 말을 남기고...

이런 체게바라였기에 당시 미국정부는 그가 볼리비아의 안데스 산맥에서 게릴라군을 지휘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선 그의 제거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가 10월의 안데스 산맥에서 볼리비아 정규군에게 생포되고도 18시간만에 사살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재판이니 뭐니 하는 과정을 거치다간 전세계적으로 일어날 구명운동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미 그의 이름은 하나의 '신화'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체게바라를 생각하면 난 두 사람의 이름이 떠오른다. 루이 알뛰세와 레지 드브레. 현대 프랑스 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 두 사람의 이름이야 익히 들어 봤을 테고... 사제지간인 이 두 사람의 관계 속에도 체게바라는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스며든다.

전유럽을 강타했던 68년 5월 혁명의 진행 속에서 '멍청한' 각국의 사회당, 공산당 지도부는 노동자, 학생들이 주도하는 사회혁명의 열기를 승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혁명의 열기에 놀라 뒷걸음질 치다 혁명지도부로부터 배척당하는 웃기지 못할 사태로까지 이어진다(그리고 이것이 68년 5월 혁명이 미완의 혁명으로 남는 중대한 이유가 된다). 이 와중에서 노동자 학생운동의 지도부는 좌파 이론가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알뛰세의 말만은 경청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이 알뛰세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레지 드브레. 알뛰세로부터 가장 총애를 받던 그는 체게바라가 쿠바를 떠나 볼리비아의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서 있을 곳도 그곳이다'라는 듯 만류하는 알뛰세를 뒤로 하고선 체를 따라 볼리비아의 밀림 속으로 뛰어든다. '파리고등사범'의 촉망받는 철학자에서 게릴라 전사로 변신하는 것이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알뛰세는 드브레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게 된다.

"투쟁에 대한 긴급한 요구가 있지. 하지만 (...) 때로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결정적인 연구에 전념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긴요한 것일세. (...) 투쟁에서 면제된 이 시간은 결국 투쟁 자체 속에서 시간을 절약하는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네."
(L. 알뛰세, 「레지 드브레에게 보내는 1967년 3월 1일자 편지」)

전선에서 총을 들고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황에 따라 이론연구에 전념하는 게 싸우는 시간을 앞당길 수도 있는 것이니까 '니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연구를 해라'는 말이다.

그런데 난 이런 레지 드브레에게서 하나의 역사의 아이러니를 본다. 그렇게 이역만리 남의 나라에까지 찾아가 무장투쟁에 가담했던 드브레는 생포되고 난 뒤 국제적인 청원운동으로 다시 프랑스에 살아 돌아와 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그는 '이미지론'에 몰입하면서 현실운동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그러다 지난 95(?)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당 후보인 좌파의 죠스팽 대신 우파의 시라크 지지선언을 해 그의 전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체게바라 전기를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볼리비아의 산 속에서 체가 유일하게 신뢰하고 의지했던 레지 드브레, 마지막 10여 명이 남을 때까지 끝까지 저항하다 체와 함께 포로가 되었던 레지 드브레. 그는 과연 볼리비아의 안데스 산맥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이렇게 '체게바라' 라는 이름은 60년대 유럽 젊은 지성들의 이정표이자 마음 속에 진 빚으로 남아있는 이름이었다. 체 역시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선택받은 의사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뛰어난 게릴라 전략전술가로서, 뛰어난 혁명이론가로서 수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한 인텔리 출신이었기에... 그들이 머리 속으로만 그리고 있던 것을 체게바라는 몸으로 실천해 보인 것이다. 진정 60년대는 체게바라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족한지 모르겠지만 이것으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손에 다시금 '체게바라 평전'이 펼쳐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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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리라이팅 클래식 3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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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것은 '모든 가치의 전환' 그것뿐!

 

"문제는 결국 인간이다. 신의 죽음도 위버멘쉬의 출현도 인간에 관한 물음으로 귀착된다. 인간이 인간을 극복할 수 있는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죽음을 욕망할 수 있는가. / 위버멘쉬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기', 혹은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변신하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2/331쪽)

가끔씩 어떤 책을 대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왜 좀더 일찍 이런 책이 나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 참 우스운 생각이지만 스스로 모든 걸 깨우치는 천재가 아닌 이상 타인의 안내를 받아 자신의 앎의 영역을 넓혀가는, 필자 같은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언젠가 소개한 적이 있는 니체에 대한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니체 이해의 어려움에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던 필자 같은 사람들에게 고병권의 니체에 관한 책이나 논문들은 참으로 신선하게 다가오는 그 '무엇'이다.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하 <니체의 위험한 책  >)는 '맑스에게로 가는 길을 찾다 니체에게 걸려 넘어진' 한 철학도의 '니체 사랑하기'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여기서 감히 '결정판'이라고 속단하는 이유는 "객관성이나 비판적 거리란 오히려 사랑 능력을 상실한 학자들의 불임증"이라는 강경한 말까지 동원하며 니체에 대한 그 어떤 판단이나 비판도 유보한 채, '니체-되기'를 주장하던 그의 전작 <니체, 천개의 눈 천 개의 길>과 비교했을 때 필자가 느끼는 인식 때문에 그렇다.

물론 지은이가 <니체의 위험한 책>에서 니체에 대한 자신의 어떤, 확고한 판단이나 비판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작에서는 어느 것이 니체의 생각이고 어느 것이 지은이의 생각인지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물론 구별하려는 것 자체가 넌센스지만!) 지은이가 니체가 되고 니체가 지은이가 되어 니체를 말하고 있었다면, <니체의 위험한 책>에서는 어느 것이 니체의 생각이고 어느 것이 지은이의 생각인지를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다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 책과 전작의 구성 및 스타일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니체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조명하며 '입문서' 내지는 '해설서'라는 형태를 취하는 전작과 달리 이 책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시 쓰는' 형태로 니체의 저작을 복원해낸다.

그런데, 니체를 위한 입문서 내지는 해설서라는 형태로 쓰여진 책에서는 철저하게 니체의 입을 빌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니체의 책을 '다시 쓰는' 이 책에서는 어느 정도 '거리두기'를 시도하며 자신의 생각을 가미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뒤바뀌어야 할 구성과 스타일일 것 같은데 말이다. 왜일까?

<니체는 언제 눈물을 흘렸는가>라는 다소 '진부한'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니체의 질병-소설에서는 '편두통'이라고 묘사하는-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 진료와 루 살로메라는 여인과의 사랑이라는 얼개로 진행된다.

시간때우기용으로 읽은 소설이라 크게 남아 있는 것은 없는데, 다만 니체가 이렇게 심하게 편두통을 앓았었나, 하는 정도의 의문만은 지금도 머리 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아마도 <니체의 위험한 책>을 읽어보시면 필자가 왜 이 소설 이야기를 꺼내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지은이는 <차라투스트라>를, 스스로 고통과 치유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니체를 창조해가는 니체의 정점에 있는 책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이 과정을 이 책의 제 1부 "니체와 차라투스트라"에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보통의 책에서라면 저자의 전기 부분에 해당하거나 특정한 저작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책에서는 다소 독특하게 묘사되고 있다.

병을 병으로만 보지 않는 니체의 독특함이랄까. '건강한 사람만이 앓을 수 있는 질병'이라는 테제로 압축되는, '생의 결핍 때문에 겪는 고통이 아니라 생의 과잉 때문에 겪는 고통'이라는 니체의 말로 압축되는 <차라투스트라>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

니체의 그 어떤 전기보다도 간결하고 함축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진 이 과정은 니체의 생애와 사상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시사점을 던져 준다. 말하자면 <차라투스트라>라는 책을 쓰기까지의 니체 사상의 변화의 모티브를 찾아가는 구성을 취하고 있지만 그 어떤 니체 전기보다 니체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를 '다시 쓰는' 제2부는 모두 15개의 소주제로 나뉘어져 있다. '신은 죽었다', '노동이 아니라 전쟁을 권한다', '새로운 우상인 국가를 조심하라', '여자의 해결책은 임신이다', '순수한 인식을 꿈꾸는 자는 음탕하다' 등등 언뜻 보아서는 "이게 뭔 소리야?"라는 의문이 저절로 나올 만한 주제들이다.

이 소주제들은 지은이가 임의로 만들어낸 분류이긴 하지만, 니체가 실제로 말했던 것을 끌어내 소제목으로 차용한 것이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천하에 둘도 없는 파시스트요, 여성차별주의자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2차대전 당시 나찌 병사들의 배낭에 들어 있던 책이 <차라투스트라>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이 '노동이 아니라 전쟁을 권한다'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니체에 대한 그간의 이런저런 오해들은 사실 니체 자신이 아니라 니체의 사상을 제멋대로 해석한 사람들의 몫이겠지만 나치즘과의 연관성 문제는 오해 치고는 너무나 지독한 오해이다. 그토록 '자유정신'의 위대함을 노래하며 독일 제국주의의 문화를 비판했던 니체를 독일의 파시스트들이 자신들의 우상으로 숭배하는 아이러니. 하기사 루카치조차도 '니체를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및 파시즘의 옹호자'라고 했을 정도니, 파시스트들이 니체를 이해하지 못했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앞에서 <차라투스트라>를 다시 쓰는 과정에서 지은이가 니체와 구별되는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했는데, 2부의 본문들을 꼼꼼히 읽어나가면서 느낄 수도 있겠지만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2부의 15개의 소주제마다 붙은 도판들이다. 채플린 영화의 한 장면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홉스의 <리바이어든> 책표지를 인용하기도 하고 그림이나 포스터 등을 인용하면서 각 소주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도판들과 그 주해가 주는 암시는 이제 지은이가 본격적으로 니체를 '해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실제로 이 책 2부의 마지막 '위버멘쉬'(기존에 '초인'이라는 말로 알려진)에 대한 장에서는 적극적으로 지은이의 해석이 시도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해석'한다는 것은 어떤 '판단'을 하는 것이라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지은이는 '아직도 자신에게는 니체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엔 분명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섣부른 예단이라는 위험부담을 줄여 말한다면 '전작과 비교했을 때'라는 단서조항을 달 수도 있지만, <니체의 위험한 책>이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이미 충분히 니체를 사랑한 지은이였기에 이러한 '거리두기'를 시도한다는 것은 그 사랑에 대한 결실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이것은 어쩌면 지은이가 자신을 걸려 넘어지게 한 니체를 딛고 일어설 준비를 마쳤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어찌 됐건 지은이가 애초에 가고자 하던 길이 있었을 것이므로 그 길을 다시 가기 위해서라도 '니체로의 여정'은 동반자를 구하기 위한 잠깐의 '외도'라고 봐야 할 것 같기에 말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니체를 동반자로 받아들인 그 새로운 여행은, 그가 애초에 가고자 한 맑스로의 길이든지 전혀 다른 길이든지 간에 무엇인가 새로운 삶을 생성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만든다. 지은이의 건투를 기원한다.

덧붙여 지은이에게 개인적인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10여년 전, 니체 원전에 울었고 '들뢰즈의 니체'(<니체와 철학>)에 또 울었던 필자에게 다가온 지은이의 니체에 대한 책 2권이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글의 서두에서 '왜 좀더 일찍 이런 책이 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빈말이 아닐 정도로 그의 안내에 따라 니체에게로 가는 길은 명료하고 행복한 길이었다. 물론 지난 10여 년의 이런저런 '잡학'들을 통해 내공이 쌓인 탓도 있을 테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니체에게로 가는 길을 다시 시도해보지도 않았을 게 확실하므로 그에 대한 필자의 고마움은 충분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고병권,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린비(2003/13,900원)

목차


· 책머리에

1부 니체와 차라투스트라

1. 니체 - 질병과 치유의 체험
2. 차라투스트라 -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3. 니체 이후의 니체

2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신은 죽었다
2. 너희는 너희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3. 사랑을 가르친다, 벗을 가르친다
4. 삶을 사랑하라
5. 신체야말로 큰 이성이다
6. 노동이 아니라 전쟁을 권한다
7. 새로운 우상인 국가를 조심하라
8. 여자의 해결책은 임신이다
9. 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다
10. 순수한 인식을 꿈꾸는 자들은 음탕하다
11. 인간만큼 큰 귀를 보았다
12. 춤추고 웃는 법을 배워라
13. 세상은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들의 탁자다
14. 사자가 못한 일을 어린아이가 한다
15. 위버멘쉬를 가르친다

3부 <차라투스트라>의 구성과 스타일

1. <차라투스트라> 여행 가이드북
2. 차라투스트라 - 질병과 치유의 체험
3. <차라투스트라>의 스타일

· 니체를 알고 싶을 때 도움이 되는 책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원목차

 

<오마이뉴스>에 게재되었던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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