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바도르 달리 - 어느 괴짜 천재의 기발하고도 상상력 넘치는 인생 이야기, human RED 001
살바도르 달리 지음, 이은진 옮김 / 이마고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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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괴짜 천재의 기발하고도 상상력 넘치는 인생 이야기
살바도르 달리 자서전
"작가들은 보통 일생을 다 산 다음에 말년에 가서 회고록을 쓴다. 모든 사람들과 반대로 가는 나는 회고록을 먼저 쓰고 그 다음에 그 내용을 사는 것이 더 지적인 것으로 보였다. 산다는 것! 그것을 위해서는 인생의 반을 다 청산할 줄 알아야 한다. 경험으로 풍성해진 나머지 절반의 인생을 계속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뱀이 허물을 벗듯이 과거를 죽여서 벗어버렸다. 이 경우 나의 허물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내가 살아온 혁명적 무정형의 삶을 말한다." (『살바도르 달리 』, 이마고, p385)

ⓒ2003 차재업
어느 괴짜 천재의 기발하고도 상상력 넘치는 인생 이야기." 책의 부제로 달린 이 말만큼 36살 달리의 인생을 정리한 달리 자서전을 한 마디로 압축하는 표현을 찾기란 힘들다.

개인적으로 달리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건 초현실주의 화가라는 것, 따라서 당연히(?)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들의 목록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솔직한 말이리라. 그런데도 별 망설임 없이 이 책을 집어들고 읽어내려간 이유는 영화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알게된 『안달루시아의 개』(1929)와 『황금시대』(1931) 때문일 것이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과 함께 만든 이 '전위영화'들의 강렬한 인상은 살바도르 달리란 이름에 대해서 알 수 없는 친밀감의 끈을 이어왔기 때문이다(이 자서전에서도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를 찍을 당시의 상황과 스스로 내린 평가를 언급하고 있다).

어쨌거나 달리의 이 자서전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달리에 대해 가지고 있던 여러 단편 지식들, 예컨대 부정적인 이미지로서의 광인, 괴짜, 방탕... 긍정적 이미지로서의 천재, 초현실주의 운동의 시각언어화, 무의식을 현대 회화에 도입한 사람 등등의 이미지들이 완전히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달리의 이 자서전은 여느 보통의 자서전-그게 달리 못지 않은 '괴팍한' 예술가의 자서전이라 할지라도-이 보여주는 침착한 자기응시나 평안한 회고조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달리의 원래 성격이 그러하기라도 한 것처럼,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어려운 도발적인 문장과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정념이 쉴새 없이 이어지기에 서술하고 있는 상황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파악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작품을 일러 아무런 거리낌 없이 '걸작'이라고 평가하는가 하면, 자신이 '세계의 배꼽'이라는, 그러니까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몽환적 선언에 이르게 되면 읽고 있는 내가 잘못된 것인지 서술하는 그가 미친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그러나 확언하건대 그는 결코 미친 것이 아니다. 이게 그의 삶이고 그의 현실인식인 것이라 믿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자서전의 도입부에서 태아상태였을 때 어머니 뱃속에서 '보고 겪었던' 것들을 묘사하는 장면 등은 누가 봐도 비현실적이고 몽상적이다. 하지만 달리는 이 책에서 "비밀로 남아야 할 운명"이었으나 "가감없이 들려줄 이 일화들은 진짜로 진짜이고, 나 자신의 이미지를 이루는 속살, 나의 자화상을 이루는 석회질"(p29)이라면서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말살시켜버리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다. 곧 단순한 자아도취나 오만이 아니라 그의 작품들의 일관된 경향처럼 그의 삶 자체가 '초현실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또 하나 달리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그의 평생의 '연인'이자 '뮤즈'였던 엘레나(갈라)이다. 러시아 태생의 시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 엘레나에게서 운명적인 만남을 직감한 달리는 극도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녀야말로 그를 치유해 줄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녀에게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1929년, 파리에서 작품전이 열리는 도중, 홀연히 그곳을 잠적, 사랑의 도피 여행을 떠나게 된다. 달리는 이때 폐쇄된 호텔의 방 속에서 갈라와의 생활을 통해 태아의 요람 속 기쁨을 느낀 것처럼 그 세계를, '거기는 정말 성스러웠다. 그야말로 천국이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달리는 이 일로 인해 아버지로터 의절하자는 편지를 받게 된다. 타인의 아내를 가로챈 아들의 부도덕에 분노한 아버지는 결국 그에게 절연장을 보내기에 이르렀고 달리는 그 충격으로 삭발한 채, 먹다 남은 성게 껍질과 함께 그 살발한 머리카락을 흙 속에 묻어버리게 된다. 이 '매장'은 곧 그를 낳고 기른 아버지와 가정이었던 셈이다. 결국 그는 혈연을 잃은 대신 운명적인 갈라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술가로서의 참다운 달리가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살바도르 달리. 20세기의 가장 특이한 화가로서 그의 작품 속에는 인간의 회의나 고뇌, 압도하는 무의식의 위력 등이 내재되어 있다고 평가받는 사람. 즉, 그의 작품 속에는 통속적 경험과 상식으로써는 전혀 파악하기 어려운 기묘한 것들로 이루어진,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초현실의 세계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를 두고 어떤 비평가들은 병적인 그림, 또는 광인의 그림이라고까지 평가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지금은 당시의 평자들이 달리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것이었다는 평가가 주종을 이룰만큼 이제 그의 그림을 두고 광인의 그림이라고 평할 수 있었던 시기는 이미 지났다.

자서전을 서술하던 1941년의 상황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달리 역시 자신의 자서전을 읽고 나면 독자들이 자신의 그림들을 잘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그네에 매달린 미지근한 우유 컵 50개가 왜 달리에게는 나폴레옹의 포동포동한 허벅지와 동일한 것인지, 어떻게 해서 그것이 만인에게 보편적인 진실이 되는지"(p23)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의 확언해도 불구하고 여전히 달리는 나에게 이해하기 힘든 예술가 중의 한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여러분들은 이걸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이길 수 없는' 내기를 한 번 시도해 보시기 바란다.
『살바도르 달리 - 어느 괴짜 천재의 기발하고도 상상력 넘치는 인생 이야기』, 이마고(2002. 11) : 읽고 나면 번역의 깔끔함과 매끄러움에 다시 한 번 역자의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오마이뉴스>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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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몽상
이진경 / 푸른숲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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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경계, 혹은 불완전함의 미덕
"사람도 저마다 다른데 사람과 사과와 책과 개가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여러분은 이런 등가관계를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등가라는 것을 확신하는가? (…) 보신탕에 흥분하는 브리지트 바르도와 동물애호가협회 회원들은 사람과 개가 등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개와 소, 개와 돼지가 등가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채식주의자는 개와 소, 개와 닭 등 모든 동물이 등가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개와 사과, 개와 양파가 등가일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 수학은 이런 등가관계를 가장 철저하게 이해한다. 수학에서는 사람과 개, 사과, 책, 자동차와 코기리가 모두 등가적이다. 수로 추상을 한다는 것은 이처럼 철학자나 사상가, 운동가 등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등가관계를 보게 해준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생물이나 무생물이나, 그것이 어떤 모양을 했든 간에, 각각의 개체는 하나라는 점에서 등가적이다. 이 얼마나 혁명적인가!"(pp.27~28)

수학의 본질은 자유다

▲ <수학의 몽상> 표지
ⓒ2003 차재업
80년대를 대학이란 사회에서 보내며 한국 사회의 변혁의 현장에 서 있었다면, 이진경이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일명 '사사방'이라 불린, <사회구성체 방법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란 책이 가져온 파문과 충격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할 수 있다. 그 이후 <한국사회와 변혁이론>, <철학과 굴뚝청소부>, <맑스주의와 근대성>,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7편의 영화>, <노마디즘> 등 학문간 가로지르기를 시도하며 끊임없이 '철학의 외부'를 유목하고 있는 그가 펴낸 수학 관련 책은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어느 날 멀리 떨어져 살던 어머니가 아들을 찾아왔다. 서로가 바쁜 삶들이라 이튿날 헤어져야 했다. 아들은 힘들게 사시는 어머니를 생각해 자신도 힘들지만 월세를 내려고 찾아두었던 20만원을 몰래 어머니 지갑에 넣어드렸다. 어머니를 배웅하고 돌아온 아들은 어머니가 책갈피에 끼워놓고 간 20만원과 '방값 내는 데라도 보태라'는 편지를 발견했다."(p.294)

지은이가 독일 작가 케스트너의 소설 내용을 빌려 수학의 다면성을, 수학의 외부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단순하게 '경제방정식'으로 보자면 모자간의 교환은 이익도, 손해도 없는 교환이다. 그러나 여기에 '윤리방정식'을 대입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 20만원을 쓴 뒤 20만원이 생겼으니 40만원의 이득이 생긴 것이다. 이는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다.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서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할 때, '경제방정식'으로는 나타나지 않는 순이득이 발생한다. 이런 계산법은 물론 통상적인 수학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수학의 몽상>은 '자유로워지기, 다르게 생각하기, 스스로 생각하기' 등 새로운 유목적 사유를 실험하고 있는 사회과학자 이진경 씨의 작품이다. 단순히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수학을 쉽게 해설하는 차원이 아니라 "수학적 발상 - 수학하기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파고듦으로써 "수학이 인간의 사고 확장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를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수학의 몽상>은 수학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뒤집어 놓았으며, 수학적 발상/수학적 사고의 흐름과 예증을 근대 이후의 수학사에 대한 풍부한 이해와 다양한 접근 방법을 통해 보여준다.

특히 캘큘러스 박사와 메피스토가 영혼을 걸고 내기하는 미적분학의 탄생 설화(4장),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세계를 여행하는 부분(6장), '모든 점에서 미분불가능한 함수'로부터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까지를 꿰뚫는 칼리가리의 예언(7장) 등은 분명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오는 장면들이 아닐 수 없다. 학교에서 이렇게만 수학을 가르쳐 준다면 필자처럼 '수학에 한맺힌' 많은 사람들이 수학을 충분히 가까이 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깊게 다가오는 책이다.

무너진 보편수학에의 꿈

<수학의 몽상>은 근대과학혁명에서 수학이 수행한 혁명적 구실을 설명하는 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근대 문명의 기초가 되는 근대 과학은 '자연을 수학화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자연에 수학의 주문을 건다는 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자연과 세계를 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자연과 세계는 신의 원리가 아니라 객관적인 대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그 세계가 어떻게 운동하는가를 찾아내는 주체가 된다. 그리고 수학이나 과학이 제공하는 인식이 넓어질수록 자연에 대한 지배와 통제는 수월하게 된다. 한마디로 수학적 지식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가능하게 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pp.49~51)

근대과학의 핵심은 이처럼 "자연을 수학화하는 것", 다시 말해, 자연의 운동이나 원리를 수학적 공식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무엇이든 계산 가능한 수학적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야말로 근대과학의 욕망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곧 모든 것을 계산가능한 공간으로 끌어들이려는 수학의 끊임없는 노력 속에서 수학의 혁명 가운데 하나가 일어났다. 기하학을 대수학으로 번역하게 된 것이다. 이집트 그리스에서 기원한 기하학이 인도 아라비아에서 발전한 대수학으로 수렴됨으로써 수학의 통일이 이루어졌고(3장), 여기에서 근대수학의 비약적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한 미적분학이 탄생했다(4장).

그러나 통일된 것처럼 보인 수학의 체계는 심각한 내적 허점을 안고 있었고, 이 허점으로부터 다시 새로운 수학들이 분화돼 나갔다. 지은이는 근대수학사는 이 통합의 흐름과 분열의 흐름이 서로 다투고 갈등한 역사였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자체 모순 없는 완전한 체계를 갖추려는 수학의 욕망은 1931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마침내 무너지게 된다. 수학을 단일한 본질로 환원하려는, 하나의 보편수학을 확립하려는 모든 시도가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이다.(10장).

"괴델의 정리는 새로운 공리계에 대해서도 또다른 결정불가능한 명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어떠한 공리계도 완전히 닫혀지고 완결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어떠한 공리계도 불완전하다. 이는 공리계의 경계가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다는 것을 뜻한다. 불완전성, 그것을 열린 경계를 뜻하는 것이고, 새로운 명제가 공리로서 들어와 않을 수 있는 여백을 뜻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불완전함의 미덕이기도 하다."(p.275)

수학은 하나의 철학이다

집합론의 창시자 칸토어는 "수학의 본질은 자유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수학적 발상과 수학적 사고는 계산이 맞는가 확인하는 식의 편협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리나 전제, 혹은 출발점 자체를 의심해도 좋을 만큼 근본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수학은 비판적 사유의 가장 근본적이고 철저한 사례를 제공한다.'(p24) 수학은 자명해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이유를 묻고 적절한가 여부를 따진다.

이러한 수학은 사실 근대 세계의 모든 곳에 깊숙이 침투하여 자리잡고 있기에 수학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가까이 있고, 그렇게 가까이 있기에 우리는 이미 무의식적으로도 충분히 수학적으로 사고하고 수학적으로 판단한다. 이런 의미에서 수학은 하나의 '사고방식'이고 '삶의 방식'이다. 이는 근대 초기의 중요한 수학자가 모두 과학자인 동시에 철학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으로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수학을 통해서 자신의 새로운 사유를 발전시켰다는 것 역시 수많은 사례로 입증된다.

"이런 의미에서 수학은 이미 하나의 철학이다. 그것은 당연시된 모든 것에 대해 다시 의문의 화살을 쏠 수 있는 용기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 사이에서 어떤 연관을 찾아내는 시적 상상력까지 포함하는, 그런 만큼 종종 뿌리까지 뒤집어버리는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사유의 양상들을 담고 있다. 수학은 이처럼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사유의 흐름들이 모이고 분기하며 흩어지고 다시 모였다가 또다시 갈라지는 사유의 선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점에서 수학은 그러한 사유의 선들, 그 궤적들을 탐색하고 추적하며, 그 집중과 분산의 양상을 포착하려는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기도 하다."(p7)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학을 통해 철학을 사유하는 것 만큼이나, 철학을 통해 수학을 다시 사유하는 것 역시 중요한 작업이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하고자 했던 것 역시 이러한 작업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계산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 수학입니다. 운동을 계산하는 것이 근대 과학혁명의 출발점이 되었지요. 하지만 그것은 전혀 상이한 것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를 찾아내며, 여기서 독창적 사유가 발전합니다. 그것이 수학의 강력한 힘일 겁니다. 그렇지만 그것에 형식적인 틀을 씌우려는 노력 또한 공존했어요. 특히 19세기 이후 '엄밀성'이란 말은 다양한 모습의 수학들을 어떤 형식요건에 따라 가위질하는 재단사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수학을 가두려는 시도는 결국 실패해요. 저는 근대 수학사를 통해서 수학의 그런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출처:"이진경 선생님과의 인터뷰", www.transs.pe.kr)

곧 일부 수학전문가들이 이 책에 대해 비판하는 것처럼 지은이가 근대 수학에 행하고 있는 비판들이 수학에 대한 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90년대 이후 줄곧 화두로 붙잡고 있는 근대를 넘어서자는 뜻의 근대 비판이 근대적인 모든 것에 대한 적대가 아닌 것처럼.

지은이의 바람처럼 이 책을 읽는 모두가 단번에 '수학의 외부'를 깨우칠 수는 없겠지만 어렵고 엄격하고 근엄한 수학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이 책은 충분히 제 구실을 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마이뉴스>에 게재했던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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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 상 그린비 인물시리즈 he-story 9
디디에 에리봉 지음, 박정자 옮김 / 시각과언어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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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성의 철학자, 그 고통과 투쟁의 삶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광인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 미셸 푸코
ⓒ2003 차재업
'푸코'라는 이름은 참 다층적으로 다가오는 이름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라는 소설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라마 크리슈나'와 같은 요가 명상가로서의 '샤를 드 푸코'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는 철학자로서의, 사회운동가로서의 푸코는 보지 못하고, <성의 역사>의 푸코만 떼어내 윤리적 인문학자로서의 푸코만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뿐만 아니라 철학자, 정치학자로서의 푸코를 영유하는 방식도 사람들에 따라 너무나 편차가 심하다. 어떤 이는 그에게서 무정부주의자를 발견하고, 어떤 이는 위장된 마르크스주의자를 발견하며, 또 다른 이는 노골적인 반(反)마르크스주의자를 찾아내기도 한다.

실제로 사르트르는 푸코의 <말과 사물>을 "부르주아지가 마르크스에 대항해 세울 수 있는 마지막 장벽"이라고 혹평했다. 물론 이것은 <말과 사물>에 대한 사르트르의 몰이해에 근거한 비난에 불과한 것이긴 하지만. 또 사르트르와는 다른 차원에서 데리다와 그 유명한 '푸코-데리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지적 논쟁의 차원에서뿐만이 아니라 푸코는 드골주의의 선전자이자이자 동시에 교활한 신자유주의자라는, 푸코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비판을 받기도 했다.

▲ 1975년 9월 22일, 11명의 반체제 인사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스페인 정부에 항의하기위해 마드리드로 갔던 푸코와 지식인들이 스페인 정부로부터 추방당한후 루아시 공항에 내려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2003 차재업
이런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다가온 그의 죽음(1984년)은 보수 부르조아 언론이 보기에는 또 하나의 정치적 가십거리로 이용하기 딱 좋았던 재료이기도 했다. 당시 세상에 막 알려지기 시작한 '에이즈'라는 병명을 두고서 말이다. 분명 우리는 학자로서의 푸코를 기억해야 하겠지만, 그는 평생을 '마이너리티'를 위한 저항의 현장에서 보낸 실천가이기도 하다. 곧 푸코는 명시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해 어떤 정치적, 이념적 깃발도 내세우지 않았지만, 정치적 반대자, 노동자, 죄수, 이민자, 동성애자(그 자신도 동성애자였다) 등 사회적 소수자들이 핍박 받는 곳에 늘 저항적 태도로 일관했던 '투사'였던 것이다..

'저기 푸코가 있다.'

기자 출신의 저자 디디에 에리봉은 이런 푸코의 삶을 치밀한 자료를 토대로 역동적인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실제로 에리봉은 푸코가 죽기 5년 전부터 푸코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그의 삶을 기록해왔던 터이기도 했다). "저기 푸코가 있다."는 말로 압축할 수 있을 만큼 푸코는 68년 5월 혁명 이후 84년 에이즈로 사망하기까지 '언제나' 거리에 있었다. 스페인, 폴란드는 물론 브라질이나 이란 등지를 무시로 드나들면서 이민자 운동, 감옥정보그룹, 사형제도 폐지, 동성애 권리 투쟁 등 그 자신이 필생의 과제로 연구하던 근대권력의 폭력성에 맞서 온몸으로 싸웠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말과 사물>을 펴낸 뒤 맑시즘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사르트르와 실천의 현장에서 모든 종류의 반파시즘 투쟁을 함께 하는 장면은 차라리 감동으로 다가온다. 논쟁은 논쟁이고 실천은 실천이었던 것이다. 8~90년대 대한민국의 소위 운동권의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감동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 1972년 11월 27일, 이민자를 지지하는 데모를 벌이는 푸코(마이크를 든 사람).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사르트르다.
ⓒ2003 차재업

현대 유럽 지성사를 좌지우지 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던 천재철학자 푸코와 이민자, 죄수, 동성애자 등의 온갖 이질적 존재들과 함께 거리의 바리케이드 위에 서 있는 투사 푸코.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이런 푸코의 이론적, 실천적 이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광기의 역사>에서 <감시와 처벌>에 이르는 동안 푸코가 파헤치고 있는 '근대'라는, 우리가 흔히들 '합리성'이니 '이성'이니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서구 근대사회의 폭력성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보이지 않는 권력이 작동하는 주류사회의 통제 메카니즘

▲ 1971년 르몽드지 기사. "미셸 푸코가 경찰에 항의하다"라는 제목.
ⓒ2003 차재업
푸코에 따르면,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근대 이성의 성립과정은 눈물겨울 정도의 폭력이 수반되어 있다. 단적으로 예를 들어, <감시와 처벌>의 분석에 따르면 17세기 파리 시민 100명당 1명 꼴로 정신병원이라는 거대한 집단 수용소에 감금되어 길들여지는 과정을 겪었다고 한다.

이들이 감금되어진 이유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에 포섭되어지길 거부하는 '부랑자'라는 것이었다. 곧 경작할 농토를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 과정'을 거쳐 빼앗긴 중세의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집시처럼 부랑자가 되고 이것은 근대 부르조아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부려 먹을 노동력 부족의 근본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을 잡아들여 근대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 곧, 떠돌지 말고 가족을 이루어 노동력 재생산의 구조를 이루고 먹고 살 만큼이라도 주는 대로 받고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해야 한다는 그 '잘난' 도덕으로 길들여지는 과정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합리성'이니, '이성'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은 이렇듯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 이후에 확립된 사회통제 메커니즘에 다름 아닌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시대가 변하면 새로운 도덕, 새로운 메카니즘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렇게 변할 수 밖에 없는 도덕이라는, 윤리라는 이름 뒤에 숨어있는 사회적 위선이라는, 사회적 업압(장치)들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주류 사회의 '사회통제 메커니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범위하고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감옥이나 군대, 경찰 등 눈에 보이는 억압기제의 문제보다는 사회적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자기검열'이라는 세뇌교육의 집요함 같은 것.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기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존재. 곧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규율과 규칙에 길들여짐으로써 생성되는 무의식적 자기 검열.

▲ 1978년 1월, 베를린의 한 집회에서.
ⓒ2003 차재업
마치 기계장치처럼 무의식적으로 각인되어 신체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이런 통제 메커니즘을 푸코는 '생체권력'이라고 부른다(미셀 푸코, <성의 역사1:앎의 의지>). 이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개개인의 의지와 사고를 규칙과 규율에 따르게 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정의되는 '주체' 내지는 '인간'으로 만들어지게 되고, 이렇게 '생산된' 주체들은 마치 자기 자신이 가장 합리적이고 평균적인 사고를 하는 존재들로 인식되어지게 된다고 한다.

하여 이 범위를 벗어나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자로 간주되어 '아웃사이더'로 낙인 찍히고, 이들 아웃사이더들은 주류사회에서 배척되고, 심하면 감금되어 인간으로 '갱생'하는 처벌을 받기도 한다. 적어도 이 '아웃사이더'의 존재는 우리 사회와 체제를 위협하는 가장 암적인 존재로 낙인 찍히게 되는 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근대사회의 모습, 곧 몇 백년 전의 역사자료에서 보여지는 것을 질료로 삼아 눈 앞의 현실문제에 연결하는 천재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푸코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했을 때 그가 왜 '감옥반대운동'이나 '동성애자 권리 운동' 등 당시 주류 좌파세력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아웃사이더적 실천들에 깊숙히 개입했던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1983년 자기 서재에서.
ⓒ2003 차재업
어쨌던 푸코의 세계는 온갖 해석을 허용하되 어떤 하나의 해석적 틀도 거부하는 '천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푸코에 대한 하나의 해석은 엄밀히 말해 '푸코의 세계'가 아니라 '푸코들의 세계'다. 예컨대 들뢰즈의 푸코 해설서가 통용되는 방식인 <들뢰즈의 푸코>처럼(지난 번에 소개한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역시 이와 같은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디디에 에리봉의 푸코 전기 <미셸푸코>는 이러한 투사로서의 푸코, 콜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로서의 '예술작품' 같은 푸코의 삶이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의 삶이나 철학과는 달리 결코 무겁지만은 않은 필체로 또 하나의 푸코(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한 번쯤 빠져들어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그런 세계이다.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上 下), 박정자 역, 시각과언어(1995)

위 사진들은 이 책의 역자이기도 한 상명대학교 불어교육과 박정자 교수의 홈페이지(http://deer.sangmyung.ac.kr/~cjpark/)에서 양해를 구하고 인용한 것들입니다. 박 교수의 홈페이지에는 본문에서 언급한 '푸코-데리다' 논쟁 등 푸코와 사르트르에 관해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본인이 오마이뉴스에 게재했던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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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푸른숲 필로소피아 3
이진경 지음 / 푸른숲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시간은 우리의 행동과 말, 사고를 제약하고, 그 흐름을 적당한 단위로 절단하여 채취하는 '시간-기계'다. 학교에나 작업장에나, 또 많은 경우에는 공부하는 아이들의 방에도 어김없이 달라붙어 있는 시간표는 매시간, 혹은 이미 주어진 분량의 시간마다 우리의 할 일을 정해준다. 시간표-기계. (초판 '서문' 중에서)

▲ 그림 1-14 채플린, <모던타임즈>, 1936
채플린은 나사를 돌리는 동작이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가면서 점점 미쳐가는 신체를 통해서 이를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적절하게 보여준다. 더 나아가 그는 컨베이어 벨트 위의 나사를 따라 거대한 기계적 신체 안으로 끌려들어감으로써 기계의 움직임에 사로잡힌 인간의 신체를 극적으로 가시화한다. (69쪽)
시계를 타이틀백으로 시작하는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즈>는 제목 그 자체가 뜻하는 것처럼 근대적 시간성에 대한 예리한 묘사와 풍자를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채플린은 화장실에 드나들 때나 경찰에 쫓겨 공장에 들어올 때나 시간체크기 누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부인의 가슴에 달린 단추를 보고 너트로 오인해 쫓아가는, 정신병적인 상황에서도 잊지 못하고 시간체크기를 누르는 동작을 보여줌으로써, 근대적 시간성이 이미 (사람들의) 무의식의 내면 깊숙히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진경의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은 근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 근대인들의 삶을 조직하고 통제하는 조건으로 작용하는 근대적인 시간, 근대적인 공간에 대한 연구서다. 1997년에 나왔던 같은 책을 초판 이후의 연구 성과를 추가하고 기존의 글에 첨삭을 가해서 나온 개정증보판이다.
초판과 비교해보면 우선 본문 중 4개의 글을 새로 추가했고 많은 도판과 주석도 추가했다. 결론에 해당하는 글도 따로이 독립된 장으로 새로 썼다. 그 결과 초판의 두 배에 이르는 분량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초판이 주던 딱딱하고 전문적인 연구서의 성격에서 어느 정도는 대중적인 교양서(?)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번 <들뢰즈와 문학-기계>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언급한 적이 있듯이 지은이는 들뢰즈/가타리의 이론적 틀을 빌려, 시간과 공간을 하나의 기계로 파악한다. 하지만 이는 사회적, 역사적으로 달라지는 기계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시간-기계' 와 '공간-기계'를 다룬다. 근대적인 시간·공간 개념의 탄생, 나아가 근대인들의 삶을 조직하고 통제하는 조건으로서 근대적인 시간-기계와 공간-기계의 탄생에 대해 100여 개가 넘는 도판들을 삽입하고 주석을 달아 시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끔 유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집이나 학교, 공장 등 근대의 사회적 장에서 우리를 일상적으로 근대인으로 생산하는 '배치'를 탐구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식하든 못하든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는 어떤 식으로든 이러한 근대적 시간-기계와 공간-기계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고, 이 지긋지긋한 근대적 삶을 넘어서는 것조차 이러한 근대적 시간-기계와 공간-기계를 극복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원시사회의 삶이나 중세사회를 언급할 것도 없이 농촌생활이 주를 이루던 우리의 부모님 세대의 시간 개념은 어떤 것이었을까? 해 뜨면 일어나 논밭을 갈고 해지면 들어와 잠을 자던,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살았을 것이다. 그들이 시계를 보며 9시까지 논에 나가고 6시까지 집에 들어오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13세기 말 발명되었다는 시계는 16세기경에 이르러 폭넓게 보급되는데, 시계를 통해 비로소 시간은 등질적인 어떤 양으로서 측정되고 분할될 수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근대적 시간은 근대적 노동의 탄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다.

리카도를 거쳐 마르크스에 의해 체계화된 근대적 노동 개념의 핵심은, 그것이 무엇을 생산하는 어떤 노동이냐, 곧 노동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이냐에 상관없이 추상적인 양으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농사를 짓는 일이나 공장에서 나사를 조이는 일이나 고기를 잡는 일이나 모두가 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노동이란 것이다. 이때 이 추상적인 노동의 크기를 재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이러한 근대적 시간과 근대적 노동의 결합은 테일러주의에서 보이듯이 초 이하의 세분된 단위로 노동자의 활동을 통제하려는 메커니즘의 축을 이루면서 근대인의 삶과 행동을 제약하기 시작한다. 이제 시간은 상인들의 계약에서 공장의 규율로, 마침내는 기차의 선로를 따라 민중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와서 손목시계를 통해 우리의 신체에 직접 부착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근대적 시간-기계는 우리의 신념이나 의지보다 먼저 작동하는 신체적 습속이 되어버린 것이고, 우리 신체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듯 분·초와 같은 미소한 단위시간으로 분할할 수 있는 근대의 추상적 시간에 익숙한 사람들과, 우리의 부모님 세대처럼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살던 근대 이전의 사람들 혹은 여전히 그러한 소농민들의 경우에 대해 우리는 동일한 방식의 행위를 기대하기 어렵다. 해뜨면 일어나 밭을 갈고 해지면 자는 그들로서는, 밤새 일을 해야하는 근대적 노동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며, 자연의 리듬을 벗어난 반복적인 단순노동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모던타임즈>에서 시계를 부수는 채플린의 행동은 근대적 시간성에 대한, 아니 그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근대적 삶의 양식과 통제방식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시간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변화되는 것이며, 사회적 변화가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고 영향을 미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인 것이다. 곧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달라질 수 있으며, 정확히는 사람들의 집합적인 삶의 변화를 통해서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가 <느림>에서 '한가로움'과 '여유로움'을 대비시키는 것도 정확히 이런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일한 행동의 양상이 이전에는 한가로움으로 간주되고 종종 멋과 미덕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면, 시계의 초침 안으로 삶이 끌려들어간 지금 그것은 결코 멋이나 미덕이 될 수 없는 빈둥거림이 된 것이다. 이러한 양상의 변화는 분명히 시간의 변화로 요약되는 사회적 삶의 변화와 긴밀히 연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좋으나 싫으나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 행동하며, 그 형식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 속으로 던져진다.

▲ 그림 1-16 달리, <기억의 고집>, 1931년
달리는 다른 방식으로 시계적 시간, 근대적 시간의 외부를 사유하려고 했다. 치즈처럼 부드러운 시계, 아니면 그림에서처럼 축 늘어지고 휘어진 시계를 통해서 시간의 비균질성과 '부드러움', 혹은 '휘어짐'을 가시화하는 것이었다. (73쪽)
그렇다면 지은이의 이러한 작업이 가지는 실천적 함의는 무엇일까? 단순히 시간은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요소로 자리잡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지은이는 항상 우리 사회의 변혁, 진보를 생각한다.

그 변혁이란 게 단순히 국가권력을 대체하고 사회적 관계만 바꾸면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제 그것만으로 사회변혁을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세기 현실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삶의 양식, 삶의 관계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 단순한 국가권력의 대체는 언제든 다시금 그런 국가권력을 재건할 수 있는 것이기에….

결국 이런 시간-기계와 공간-기계를 바꾸지 못한다면, 다른 종류의 배치로 변환시키지 못한다면, 근대적 삶을 넘어선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근대적 생활양식, 근대적 관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근대적 시간-기계와 공간-기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은이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그가 왜 근대적 시간, 근대적 주거공간 연구에 천착하는지를 잘 설명해준다고 할 수 있다.

"'혁명', 그것은 단지 국가권력을 해체하고 새로운 것을 대체하는 것만으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새로운 공간에서 활보하고,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들이 동일한 것을 재건할 수 있을 것임은 너무도 분명하지 않을까?" (이진경,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7편의 영화>, p31)

하지만 그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이미 '기계'로서 선험성으로서 우리의 신체를 사로잡고 있으며, 우리의 삶을 사로잡고 있는, 저 불변의 확고한 힘을 갖고 있는 시간-기계와 공간-기계를 대체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지은이가 '진보'라는 개념을 시간의 구조 속에서 파악하며 전개하는 5장이 그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이것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는 사람들 모두가 함께 풀어가야 할 숙제일 것이다.

(본인이 <오마이뉴스>에 게재했던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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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범우사상신서 19
콜린 윌슨 지음 / 범우사 / 1997년 7월
평점 :
품절


"환상을 보는 인간(visionary)은 반드시 아웃사이더다. 그것은 같은 공동체에 사는 다른 인간의 수에 비해 환상을 보는 인간이 소수이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쥐잡는 일꾼이나 굴뚝 소제부도 아웃사이더여야 한다. '비저너리'는 보다 다른 이유에서, 즉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에서 시작해 이내 일반이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곳으로 뛰어올라 버린다는 이유에서 '아웃사이더'다."(콜린 윌슨, <아웃사이더> 제2판, 범우사, 1988, p.240)

ⓒ2003 차재업
영미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 20세기의 가장 문제적 작가를 꼽으라면, 아마도 대다수는 제임스 조이스를 입에 올릴 것이다. <율리시즈>나 <더블린 사람들>에 대한 독해로 한 학기를 낭비(?)한 사람들일 테니까(보르헤스를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비영어권 문학에 대해 영미문학계는 아주 완곡하다).

이어 20세기의 가장 문제작을 꼽으라면 아마도 상당수는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언급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처음 대학에 들어와 문학을 전공한답시고 깐죽거리다 맨 처음 접하게 되는 충격이 이 <아웃사이더>를 읽으면서 느끼는 경외감 내지는 절망감(?)일 것이기에 그 충격은 오래 가기 마련인 것이다.

아마도 '아웃사이더'에 관한 논의가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문제 제기되기 시작한 건 90년대 중반 이후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80년대적 꿈과 이상이 담긴 메타담론으로서의 사회변혁론이 쓰러져간 자리를 다양한 문화담론들이 메워가는 과정에서 소수자, 사회적 약자로서의 아웃사이더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말이다. 어쨌거나 번역되어 나온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낡은'(?) 책을 새삼 소개하는 이유는 하나의 연상작용이랄까, 얼마전 비디오로 나온<오아시스>를 다시 한 번 보면서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니 소외와 소수자에 관한 생각으로 옮아가게 되고 끝내는 2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절의 추억으로까지 시간여행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대학이란 데를 들어가 독서토론회에 가입하고서 '절친한' 술친구를 하나 사귀게 되었다. 말이 친구지 서열상으론 엄연히 1년 선배였다. 고등학교 동기 하나가 그녀와 같은 과(영문과)였고 그 친구와의 술자리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합석하게 된 것이 내가 그 동아리에 가입하게 된 이유였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동아리 모임보다 먼저 만났다는 이유로 난 그녀를 별로 선배대접 해주지 않았고, 이런 나를 그녀도 크게 괘념치 않았던 것이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가 고백한 것이지만, 좀 건방지게 생각하긴 했는데 대학 1학년생이 자신이 하늘같이 생각하는 이문열을 열라 씹어대는 그 '패기'에 자신의 친구로 등록해줬다는 말을 하긴 했었다.

그후 이런저런 건수로 함께 하는 술자리가 많았었는데, 여자치고는 꽤 잘 마시는 술이었다. 기억에 막걸리 두 주전자 정도는 비우는 실력이었던 거 같다. 자연히 이야기 주제가 시대상황과 문학에 관련된 것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즈음에 그녀로부터 꼭 읽어보라며 선물받았던 책이 바로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였다. 자신이 소설가가, 평론가가 되겠다는 꿈을 접게 만들었던 책이라는 부연 설명과 함께...

과연 어떤 책이길래 한 젊은이의 꿈까지 포기하게 만들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건 경외감에서 오는 충격이었던 것이다. 24살 밖에 안 된 지은이가 쓴 평론(?)은 그만큼 '나는 이런 글을 결코 쓸 수 없을 거야.'라는 자괴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할 수 있었을테니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특별한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25살의 젊은이가 쓴 이 '아웃사이더적' 비평서는 문학, 철학, 신학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탁월한 분석력을 뽐내며 우리가 알고 있는 무수한 예술가와 철학가들을 불러들이고 쫓아내기를 반복하며 그들에게서 '아웃사이더'라는 동일성과 차이를 찾아내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콜린 윌슨은 이 과정에서 문학, 철학, 역사, 신학을 아우르는 고전 작품 속에서 발굴해낸 주인공들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대우하며 상호간의 관계를 질문하고 그 답을 유도하는 방식을 통해 16살 이후 생활전선에 뛰어든 와중에 기록한 노트들 속에서 끊임없이 대치되는 두 가지 질문들-예컨대 '존재와 무', '현실과 비현실' 등-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아웃사이더의 문제란 본질적으로 '실천의 문제', '사고의 문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역시 어느 정도는 사회적 금기(≒도덕)와 개인적 가치관의 불일치 그리고 평범하게 되풀이되는 일상의 지루함에 대해 고민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의 원인이나 문제점에 대한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보통의 소시민들과 아웃사이더의 차이가 명확하게 대비되는데 아웃사이더란,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집요하게 또는 너무 깊게 그리고 너무 많이 보려 하는 종류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를 오늘 우리 사회에 적용시켜 풀어보자면, 자신의 이해와 상관없으면 '무임승차' 하기를 서슴치 않는, 사회적 실천에 뛰어들어 문제해결에 동참하고 그 열매를 나누어 가지려 하기보다는 뒷짐진 채 파리한 얼굴로 방관만 하는 사람이 아닌, 오늘의 불합리한 사회체제를 합리적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간 발전된 사회를 꿈꾸고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 아웃사이더라는 것이다.

이쯤에서 짐작하겠지만 콜린 윌슨이 사용하는 '아웃사이더'란 말의 용법은 지금 우리가 흔히 문화적 정치적 소외자들을 일컫는 용어로 쓰는 '아웃사이더'란 용법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단순히 약자, 소수자란 의미보다는 그 파장이 깊고 넓은 것이다. 글의 모두에 인용한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에 대한 정의에 나타난 것처럼. 어떻게 보면 니체의 '위버멘쉬(초인)'와 같은 이미지로 다가오기도 할 정도로...(실제로 <아웃사이더>에서 니체는 여러 번 불려 나와 콜린 윌슨의 대화 상대가 되어야 한다.)

어쨌든 나 역시 그 당시에 이 책을 읽고 받았던 충격은 꽤 컸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성문종합영어> 공부하듯이 여백에 촘촘하게 코멘트를 달아가면서 몇 번인가 읽었던, 대학시절 최초의 책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러나 그때 그 책은 어떤 후배 녀석이 가져가서는 내 손에 돌아오지 않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책은 1988년에 나온 2판이다. 이후 문학보다는 철학이나 미학으로 관심이 옮아가면서 논리적 글쓰기라는 측면에서는 다소 문제가 있는 책이라는 나름대로의 평가를 할 만큼 이 책의 충격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마지막으로 재작년인가? 어떤 신문에서 이 책에 대한 소개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소개글을 쓴 사람(기자?)의 표현 역시 내가 아는, 평론가가 되기를 포기했다는 그 친구의 것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한국일보로 기억하는데, '나를 움직인 책'인지 '내 인생의 책 한 권'인지, 하는 코너에 어떤 기자가 쓴 글의 제목이 이랬다.

"나는 감옥에 가고 싶다. 오로지 이 책을 읽는 일만을 하기 위해서."

지금이야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아마도 20살의 나였다면, 충분히 이 말에 동의했을 것이다.
다음은 전자신문 2001년 4월 14일자에 실렸던 <아웃사이더>에 관한 글입니다.

주어진 하나의 세계를 바라보는 데도 다양한 시각과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단지 주어진 대로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한 알의 모래나 단풍 든 잎사귀 하나에서도 '세계'를 보고 느끼는 이가 있다. 찰흙 같은 암흑 속에서 더 나아갈 수 없는 좌절감에 신음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희붐하니 밝아올 새벽의 징후를 알아채고 앞질러 희망을 노래하는 이가 있다. 우리는 어떠한가. 거리엔 미취업자와 실직자들이 늘어나고, 가정엔 한숨만이 쌓인다고 한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발빠르게 움직이며 희망을 낚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위기가 곧 기회'임을 아는 자들도 그들에게 다가온 위기를 위기 그 자체로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 위기라는 포장 속에 감춰진 '기회'라는 선물을 꿰뚫어본 자들이다. 하루 하루의 삶에 급급해 일상의 흐름에 아무 생각 없이 갇혀 버린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많은 선물들을 몰라보고 불평하고 한탄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표피적으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의해 좌우되거나 왈가왈부하지 않는,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 너머를 볼 수 있는 '비전의 아웃사이더'들이 너무나 아쉽기만 하다.
<오마이뉴스>에 게재했던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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