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평전 -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의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자크 아탈리,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이름이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미테랑 프랑스 사회당 당수의 경제 브레인으로 참여한 이력이 있는, 정통 학자 출신과는 약간 상이한 길을 걸었던 사람. 유목주의 운운하는 형태로 들려오는 그에 대한 이런저런 평가들, <인간적인 길>에 대한 이러저러한 평가들은 어느 정도 접하고 있었기에 그의 책을 제대로 읽은 것도 없으면서 내 나름대로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나에게 마르크스 평전이란 게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다. 20년도 더 지난 시절에 이미 마르크스 원전을 읽었던 사람으로서 그의 평전 한 두개쯤은 이미 오래 전에 섭렵했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자크 아탈리의 <마르크스 평전>은 나에게 그리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건 아니다. 그러기에 한 달에 한번 꼴로 방문하는 대형서점 안에서 잠시 짬을 내어 머리말과 제일 마지막 7장을 읽고 접었었다. 그리곤 별다른 생각없이 지났는데, 며칠 전 <한겨레신문>에서 손석춘 칼럼을 읽고 기절할 뻔 했다.

손석춘씨는 ‘세계지식포럼’에 참석한 아탈리와  KBS의 ‘TV, 책을 말하다’에서 그의 유토피아 저서 <인간적인 길>을 두고 대담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손석춘씨와 자크 아탈리 간에 논쟁이 오간 모양인데, 그 전말을 보면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잠시 그 문제의 문구를 인용해보자.

하지만 저는 대담의 끝자락에서 결국 아탈리와 얼굴을 붉히고 말았습니다.  그가 <인간적인 길>에서 “핵무기를 통한 (전쟁)억제력”을 강조하고 있기에 북핵문제를 물었습니다. 아탈리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프랑스처럼 핵무기를 정당하게 갖게 되면 문제가 없지만 북핵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그는 “북한 정권의 붕괴가 북핵 문제를 해결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며 “북한으로 들어가는 모든 물자를 통제하면 어렵지 않게 (북한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입니다. 물었습니다.

  “아탈리 박사의 저서들을 읽으며 프랑스에서만 살아온 지식인 일반이 지니는 한계를 느꼈는데 오늘 대담을 통해 그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핵을 가질 정당성이 있는 나라 가 따로 있고 없는 나라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나, 북쪽 정권을 붕괴시키는 게 당위라는 생각이 그것인데요.  그런 논리와 제국주의자들의 논리는 얼마나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유엔 안전보상이사회 국가들이 지닌 핵무기는 정당하다면서 사뭇 결연히 말했습니다.

  “한 나라의 정권을 붕괴시킬 권리는 그 나라의 국민에게만 있다는 손 박사의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어 저에게 반문하더군요.

  “히틀러를 보세요. 그렇다면 우리가 히틀러를 패배시키지 말아야 했나요?”

  황당했지만 되물었지요.

  “그게 어떻게 같습니까? 히틀러는 다른 나라들을 침략한 전범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는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미국은 침략 당하지 않았지만 참전했습니다.”

방송 녹화 중이었고 사회자의 만류로 다른 주제로 넘어갔습니다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아탈리는 끝내 답하지 않았습니다.  “국제 문제에 미국과 프랑스는 대체로 견해를 같이 한다”고 말을 흐렸을 뿐입니다.

(<인터넷 한겨레 www.hani.co.kr> 2006년 11월 6일자 "필진 네트워크"에서 인용)

아탈리의 <마르크스 평전> 그 자체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책일 것이다.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변화된 현실에서 조금은 새로운 각도로 해석하려 했다는 의도를 제7장에서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현실 정치에 대해 발언하는 그의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긋남이 아닌가?

현존하는 프랑스 최고의 석학? 그놈의 '석학'이란 게 뭔지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 이 손석춘 칼럼을 읽은 뒤에는 나에게 대체로 우호적인 감정으로 남아 있던 아탈리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워야만 했다. 이럴 땐 내가 경제학 전공자라는 게 후회스럽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탈리라는 이름에 연연해 책을 집어들고 읽지도 않았을 것이고, 세계적 석학 운운하며 그가 한국에 왔다고 호들갑 떠는 언론을 쳐다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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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7 12: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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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 하
디디에 에리봉 지음 / 시각과언어 / 199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광기와 성의 철학자, 그 고통과 투쟁의 삶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광인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 미셸 푸코
ⓒ2003 차재업
'푸코'라는 이름은 참 다층적으로 다가오는 이름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라는 소설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라마 크리슈나'와 같은 요가 명상가로서의 '샤를 드 푸코'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는 철학자로서의, 사회운동가로서의 푸코는 보지 못하고, <성의 역사>의 푸코만 떼어내 윤리적 인문학자로서의 푸코만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뿐만 아니라 철학자, 정치학자로서의 푸코를 영유하는 방식도 사람들에 따라 너무나 편차가 심하다. 어떤 이는 그에게서 무정부주의자를 발견하고, 어떤 이는 위장된 마르크스주의자를 발견하며, 또 다른 이는 노골적인 반(反)마르크스주의자를 찾아내기도 한다.

실제로 사르트르는 푸코의 <말과 사물>을 "부르주아지가 마르크스에 대항해 세울 수 있는 마지막 장벽"이라고 혹평했다. 물론 이것은 <말과 사물>에 대한 사르트르의 몰이해에 근거한 비난에 불과한 것이긴 하지만. 또 사르트르와는 다른 차원에서 데리다와 그 유명한 '푸코-데리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지적 논쟁의 차원에서뿐만이 아니라 푸코는 드골주의의 선전자이자이자 동시에 교활한 신자유주의자라는, 푸코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비판을 받기도 했다.

▲ 1975년 9월 22일, 11명의 반체제 인사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스페인 정부에 항의하기위해 마드리드로 갔던 푸코와 지식인들이 스페인 정부로부터 추방당한후 루아시 공항에 내려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2003 차재업
이런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다가온 그의 죽음(1984년)은 보수 부르조아 언론이 보기에는 또 하나의 정치적 가십거리로 이용하기 딱 좋았던 재료이기도 했다. 당시 세상에 막 알려지기 시작한 '에이즈'라는 병명을 두고서 말이다. 분명 우리는 학자로서의 푸코를 기억해야 하겠지만, 그는 평생을 '마이너리티'를 위한 저항의 현장에서 보낸 실천가이기도 하다. 곧 푸코는 명시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해 어떤 정치적, 이념적 깃발도 내세우지 않았지만, 정치적 반대자, 노동자, 죄수, 이민자, 동성애자(그 자신도 동성애자였다) 등 사회적 소수자들이 핍박 받는 곳에 늘 저항적 태도로 일관했던 '투사'였던 것이다..

'저기 푸코가 있다.'

기자 출신의 저자 디디에 에리봉은 이런 푸코의 삶을 치밀한 자료를 토대로 역동적인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실제로 에리봉은 푸코가 죽기 5년 전부터 푸코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그의 삶을 기록해왔던 터이기도 했다). "저기 푸코가 있다."는 말로 압축할 수 있을 만큼 푸코는 68년 5월 혁명 이후 84년 에이즈로 사망하기까지 '언제나' 거리에 있었다. 스페인, 폴란드는 물론 브라질이나 이란 등지를 무시로 드나들면서 이민자 운동, 감옥정보그룹, 사형제도 폐지, 동성애 권리 투쟁 등 그 자신이 필생의 과제로 연구하던 근대권력의 폭력성에 맞서 온몸으로 싸웠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말과 사물>을 펴낸 뒤 맑시즘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사르트르와 실천의 현장에서 모든 종류의 반파시즘 투쟁을 함께 하는 장면은 차라리 감동으로 다가온다. 논쟁은 논쟁이고 실천은 실천이었던 것이다. 8~90년대 대한민국의 소위 운동권의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감동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 1972년 11월 27일, 이민자를 지지하는 데모를 벌이는 푸코(마이크를 든 사람).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사르트르다.
ⓒ2003 차재업

현대 유럽 지성사를 좌지우지 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던 천재철학자 푸코와 이민자, 죄수, 동성애자 등의 온갖 이질적 존재들과 함께 거리의 바리케이드 위에 서 있는 투사 푸코.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이런 푸코의 이론적, 실천적 이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광기의 역사>에서 <감시와 처벌>에 이르는 동안 푸코가 파헤치고 있는 '근대'라는, 우리가 흔히들 '합리성'이니 '이성'이니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서구 근대사회의 폭력성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보이지 않는 권력이 작동하는 주류사회의 통제 메카니즘

▲ 1971년 르몽드지 기사. "미셸 푸코가 경찰에 항의하다"라는 제목.
ⓒ2003 차재업
푸코에 따르면,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근대 이성의 성립과정은 눈물겨울 정도의 폭력이 수반되어 있다. 단적으로 예를 들어, <감시와 처벌>의 분석에 따르면 17세기 파리 시민 100명당 1명 꼴로 정신병원이라는 거대한 집단 수용소에 감금되어 길들여지는 과정을 겪었다고 한다.

이들이 감금되어진 이유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에 포섭되어지길 거부하는 '부랑자'라는 것이었다. 곧 경작할 농토를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 과정'을 거쳐 빼앗긴 중세의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집시처럼 부랑자가 되고 이것은 근대 부르조아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부려 먹을 노동력 부족의 근본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을 잡아들여 근대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 곧, 떠돌지 말고 가족을 이루어 노동력 재생산의 구조를 이루고 먹고 살 만큼이라도 주는 대로 받고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해야 한다는 그 '잘난' 도덕으로 길들여지는 과정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합리성'이니, '이성'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은 이렇듯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 이후에 확립된 사회통제 메커니즘에 다름 아닌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시대가 변하면 새로운 도덕, 새로운 메카니즘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렇게 변할 수 밖에 없는 도덕이라는, 윤리라는 이름 뒤에 숨어있는 사회적 위선이라는, 사회적 업압(장치)들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주류 사회의 '사회통제 메커니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범위하고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감옥이나 군대, 경찰 등 눈에 보이는 억압기제의 문제보다는 사회적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자기검열'이라는 세뇌교육의 집요함 같은 것.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기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존재. 곧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규율과 규칙에 길들여짐으로써 생성되는 무의식적 자기 검열.

▲ 1978년 1월, 베를린의 한 집회에서.
ⓒ2003 차재업
마치 기계장치처럼 무의식적으로 각인되어 신체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이런 통제 메커니즘을 푸코는 '생체권력'이라고 부른다(미셀 푸코, <성의 역사1:앎의 의지>). 이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개개인의 의지와 사고를 규칙과 규율에 따르게 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정의되는 '주체' 내지는 '인간'으로 만들어지게 되고, 이렇게 '생산된' 주체들은 마치 자기 자신이 가장 합리적이고 평균적인 사고를 하는 존재들로 인식되어지게 된다고 한다.

하여 이 범위를 벗어나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자로 간주되어 '아웃사이더'로 낙인 찍히고, 이들 아웃사이더들은 주류사회에서 배척되고, 심하면 감금되어 인간으로 '갱생'하는 처벌을 받기도 한다. 적어도 이 '아웃사이더'의 존재는 우리 사회와 체제를 위협하는 가장 암적인 존재로 낙인 찍히게 되는 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근대사회의 모습, 곧 몇 백년 전의 역사자료에서 보여지는 것을 질료로 삼아 눈 앞의 현실문제에 연결하는 천재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푸코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했을 때 그가 왜 '감옥반대운동'이나 '동성애자 권리 운동' 등 당시 주류 좌파세력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아웃사이더적 실천들에 깊숙히 개입했던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1983년 자기 서재에서.
ⓒ2003 차재업
어쨌던 푸코의 세계는 온갖 해석을 허용하되 어떤 하나의 해석적 틀도 거부하는 '천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푸코에 대한 하나의 해석은 엄밀히 말해 '푸코의 세계'가 아니라 '푸코들의 세계'다. 예컨대 들뢰즈의 푸코 해설서가 통용되는 방식인 <들뢰즈의 푸코>처럼(지난 번에 소개한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역시 이와 같은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디디에 에리봉의 푸코 전기 <미셸푸코>는 이러한 투사로서의 푸코, 콜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로서의 '예술작품' 같은 푸코의 삶이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의 삶이나 철학과는 달리 결코 무겁지만은 않은 필체로 또 하나의 푸코(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한 번쯤 빠져들어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그런 세계이다.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上 下), 박정자 역, 시각과언어(1995)

위 사진들은 이 책의 역자이기도 한 상명대학교 불어교육과 박정자 교수의 홈페이지(http://deer.sangmyung.ac.kr/~cjpark/)에서 양해를 구하고 인용한 것들입니다. 박 교수의 홈페이지에는 본문에서 언급한 '푸코-데리다' 논쟁 등 푸코와 사르트르에 관해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본인이 오마이뉴스에 게재했던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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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하 까치글방 151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지음, 박여성 옮김 / 까치 / 199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인공지능은 과연 인간을 능가할 수 있을까?


D. 호프스태터,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의미는 일련의 역설들, 내부적인 역설들 속에서 스스로 전개되어야 한다."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한길사, P.87)



 

▲ <괴델 에셔 바흐> 표지

 

ⓒ2003 차재업


<괴델, 에셔, 바흐>. 사실 이 책은 좀 난해하지만 아주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물론 그다지 대중적인 책은 아니라서 누구나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은 아니겠지만 이른바 '잡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한 번 도전해볼 만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잡학'이라고 하니까 뭔가 쓸데없는 지식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는데, 현대 철학에서 '잡학'이라는 요소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예를 들어 들뢰즈의 <천의 고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학, 정신분석학, 음악, 미술, 물리학 등을 아우러는 잡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는 것처럼.

이런 측면에서 이 책 역시 여러 각도로 독해할 수 있다. 현대철학의 핵심을 건드리는 이론서로도, 예술적인 문체를 자랑하는 고급 에세이로도,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다양한 지식영역을 횡단하는 설명서로도, 배타적인 과학자 집단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저작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이 책의 제목이 되고 있는 '괴델, 에셔, 바흐'. 좀더 정확히 말하면, 바흐의 카논, 에셔의 그림, 괴델의 정리는 서로 무슨 관계가 있을까?

호프스태터는 음계(바흐의 카논), 계단(에셔의 폭포), 역설(괴델의 정리)에서 이상한 고리 현상이 발생되고 있음을 설명하면서 시작한다(서장:음악-논리학의 헌정).

무한히 상승하는 카논

이상한 고리의 첫 번째 예로 든 것이 바흐의 '카논'이다. 근대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1685-1750)는 1747년 프로이센 제국의 프리드리히 대왕으로부터 주제를 받아 '음악의 헌정' 이라는 작품을 작곡한다. 알려진 대로 프리드리히 대왕은 굉장한 음악애호가여서 궁정의 실내악 연주회 때에 직접 플루트를 연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카논'과 '푸가'로 구성된 이 '음악의 헌정'에는 일반적인 카논과 전혀 성격이 다른, 무한히 상승하는 순환고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 포함되어 있다.

이 카논은 키(음조)가 C 마이너임에도 다른 카논과 달리 종결될 때 D 마이너에 있다. 조바꿈이 일어난 결과이다. 조바꿈이 연속적으로 몇 번 진행되면 처음 키로부터 그만큼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카논은 끝이 처음으로 다시 연결되도록 구성되었기 때문에 처음 키인 C 마이너로 되돌아가야 한다. 신기하게도 이 카논은 여섯 차례의 조바꿈을 통하여 본래의 키로 복귀하게끔 작곡되어 있는 것이다.

마치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종지부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도입부로 연결되며, 이 과정을 통해 바흐는 한시적인 기호 속에서 '신의 음성'을 들려줘야하는 음악의 시간적 한계를 초월하고자하는 비밀을 드러낸다. "바흐는 의심할 여지없이 이 상승하는 카논은 무한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논리적 결과에 매료되었"다고 하면서 '푸가의 기법'이 전회(轉回)로 연주되어도, 역행(逆行)으로 연주되어도 똑같은 화성적 기법을 풀고 있다는 사실은 이 출발점과 소실점이 같다는 '헝클어진 고리'로 이뤄진 진리의 모순성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처음에 C 마이너에서 출발하여 키의 계층 구조를 따라 더 높은 키로 올라갔으나 다시 처음 키인 C 마이너로 돌아온 것처럼, 우리가 계층구조를 가진 체계에서 어떤 수준을 따라 위쪽(또는 아래쪽)을 향해 이동하다가 느닷없이 본래 출발했던 곳에 다시 돌아와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이상한 고리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이동한 행적은 '고리' 모양이며 출발했던 곳에 되돌아온 것은 '이상한' 일이기 때문에 이상한 고리라고 명명한 것이다.(pp4~14)

에셔

에셔의 석판화 '폭포'에서도 이상한 고리 현상이 발생한다. 에셔(1898-1972)는 패러독스를 주제로 여러 편의 걸작품을 남긴 화가이다. 현대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은 알든 모르든 그의 그림들, 정확히는 석판이나 목판화들을 한두 개 쯤은 보았을 것이다. 그가 1961년 발표한 '폭포'(p15, 아래 그림 참조)는 불가능한 물체라 불리는 삼각형을 3개 연결하여 그린 석판화이다.



 

▲ 폭포(Escher, 석판, 1961)

 

ⓒ2003 차재업


위 그림에서 보듯 폭포의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놀랍게도 처음에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고리의 각 부분에서는 한 곳도 잘못된 부분이 발견되지 않지만 전체적인 시각으로 보면 고리 전체가 분명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패러독스를 느끼게 된다. 폭포의 물길을 따라 가다 보면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오게 되기 때문이다(pp14~19). 에셔는 이 <폭포> 뿐만이 아니라 '두 개의 손이 서로 다른 손을 그리고 있는 그림'(p888, <손을 그리는 손>, 1948)이나 'ABCD 네 꼭지점을 가진 사각형에서 A에서 B로 올라가는 계단 B에서 C로 올라가는 계단, C에서 D로 올라가는 계단 그리고 D에서 A로 올라가는 계단 그림'(p16, <올라가기와 내려가기>, 1960) 등 에셔가 그린 대부분의 그림은 이런 '재귀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호프스태터는 이를 無限自己再歸性이라고 이름붙이고 있다.

불완전성의 정리

이상한 고리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의 증명을 위해 사용된 에피메니데스 패러독스에서도 발견된다. 괴델(1906-1978)은 25살의 나이에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했다. 괴델은 "나는 증명될 수 없다"라는 자기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논리식을 구성하여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했다. 이 논리식은 에피메니데스의 패러독스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기원전 6세기 경 크레타 섬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진 에피메니데스는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다"라는 불멸의 명제를 남겼다. 이른바 '거짓말쟁이의 패러독스'이다. 패러독스는 본디 그 자체는 모순이 없지만 참도 되고 거짓도 된다. 예를 들어 에피메니데스가 한 말이 진실이라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다. 그러나 에피메니데스 역시 크레타 사람이므로 그의 말은 거짓말이 되고 만다. 한편 에피메니데스가 한 말이 거짓이라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그렇다면 에피메니데스 역시 크레타 사람이므로 그의 말은 참말이 된다. 이와 같이 에피메니데스가 한 말은 동시에 참도 되고 거짓도 된다.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다"라는 명제는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명제로 바꿀 수 있다. 이 명제는 다시 "A : 다음 문장(B)은 거짓이다""B : 앞의 문장(A)은 참이다"의 두 명제로 분리 가능하다. 두 명제는 제각기 의미가 완전하며 패러독스가 없다. 그러나 두 명제가 합쳐지면 에피메니데스 패러독스와 똑같은 효과를 나타내므로 이상한 고리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나는 증명될 수 없다"라는 괴델의 논리식은 거짓이라면 증명이 가능하지만 참일 경우에는 증명이 불가능하다. 요컨대 참이지만 증명이 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하므로 모든 수학적 체계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이다.(pp20~29)

이 불완전성의 정리에 대해서 필자가 설명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테고, 이 명제는 사실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내놓은 <수학원리>를 겨냥한 것이었다는 게 통설이다. 모든 수학적 진리를 자신의 체계 안에서 입증하고자 한 <수학원리>의 야심찬 포부는 괴델의 정리로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이 <수학원리>는 너무나 난해한 책이라서 다 읽은 사람이 저자 두 사람과 괴델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수학계의 정설(?)이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수학의 이러한 '무모순성'에의 추구의 역사에 대해서는 이진경, <수학의 몽상>, 푸른숲 참조). 결정적인 것은 이 <수학원리>의 '허점'을 증명하는데 <수학원리> 내부의 방법론만이 쓰였다고 한다. 여기서 또다시 '이상한 고리'가 형성된다.

어쨌든 이러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한계, 나아가서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이성 스스로의 힘에 의해 밝혀낼 수 있었다는 측면에서 20세기 수학 아니, 전학문적 성과를 통털어 첫손가락 꼽히는 업적으로 평가받게 되는 것이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사이의 경계

이렇게 음악, 미술, 수학에서 이상한 고리의 사례를 발견한 호프스태터는 이것을 사람의 두뇌와 마음에 대한 견해로까지 밀고 나아간다. 그는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이원론적 접근방법으로는 사람의 마음이 뇌에서 출현하는 이유를 결코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뇌와 마음을 서로 다른 수준으로 구분시키는 방법론에 의해 뇌 속에서 의식이 생성되는 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런 맥락에서 마음을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두뇌를 하드웨어에 비유하고 두뇌가 떠받들고 있는 마음에서 의식이 출현하는 것처럼 컴퓨터 역시 하드웨어의 지원을 받는 소프트웨어에서 의식을 만들어내는 이상한 고리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컴퓨터가 사람처럼 마음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제 10장 '기술층위와 컴퓨터 체계').

그의 이러한 관심은 음악, 미술, 수리논리학은 물론이고 인공지능과 분자생물학, 나아가 선불교까지 동원하는, 한마디로 모든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넘나들며 언급된다. 워낙에 방대한 분량이고 깊이 있게 파고드는 부분도 많은지라 100% 다 이해하고 넘어가기 힘든 측면이 많다. 개인적으로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 이율배반, 또는 무모순성을 언급하는 부분에 나오는 재귀순환, 혹은 재귀준거의 수학적 증명이다. 수학적 지식이 얕은 입장에서는 복잡한 기호(처음 보는 수학적 기호도 많다)만 쳐다봐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니 말이다.

인공지능

어쨌던 이런 과정을 거쳐 결론 부분인 제 19장 '인공지능 : 전망'에 이르러 컴퓨터 프로그램이 음악을 작곡할 수 있을까?, 정서를 기계에 프로그래밍해 넣을 수 있을까?, 천하무적의 체스 프로그램이 나올까?,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인간과 동일해질까? 등등과 같은 열 개의 질문을 던져 놓는다.

이 질문들 중에서 일부는 이미 우리 생활에서 보편화되고 있는 형태로까지 나아간 것(이미 체스는 컴퓨터가 인간을 이기는 상황에 도달했다. 물론 이것이 컴퓨터의 연산방식이 인간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뜻하는 건 아닐 것이다. 컴퓨터보다 훨씬 복잡한 논리적 연산을 요구하는 바둑의 경우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도 있지만 이 책이 쓰여진 게 1979년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의 이 질문들은 꽤나 선구적이었던 셈이다.


처음 이 책이 출판된 건 1979년인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20세기가 다 끝나가던 1999년에야 번역본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다. 좀더 젊은 시절에 읽었더라면 내 인생이 좀더 풍부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그 동안 필자는 이 책을 두 번 정도 숙독했지만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숱하게 있다. 모든 걸 다 소화하고 넘어갈 순 없겠지만 언젠간 그럴 수 있을 거란 기대를 안고 기꺼이 또다시 안개속 미로를 헤엄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책이다.

필자의 이런 바램을 이해하기라도 하는 듯, 호프스태터는 국역본 <괴델, 에셔, 바흐>의 '한국어판에 부쳐'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던져 놓는다.

인생에 남아도는 시간이란 없습니다. 인생은 별도의 공간과 사치를 허용할 정도로 길지 않습니다. 그 짧은 일부분에서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세상을 보는 아름다운 시각이 전해진다면, 그것은 저의 가장 큰 기쁨일 것입니다.(p. xix)

하지만 그의 세상을 보는 아름다운 시각을 '제대로' 읽어내기까지는 상당한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충분히 해볼만한 노력이 아닐까 생각된다.

 
 


i) 글의 모두에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은 "의미란 그 어떤 진리에 '담겨지는' 게 아니라 진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의해 '나타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이 책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또한 호프스태터나 들뢰즈가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하나의 중요한 철학적 텍스트로 취급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ii) D. 호프스태터,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까치(1999) 본문의 괄호안 페이지 표시는 모두 이 국역본의 페이지입니다. 역시 아쉬운 점은 번역의 어색함입니다.

iii) 그러나 번역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이 책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마이뉴스>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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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의 계약 (양장본) - Learning Fable Series 데이비드 허친스의 학습 우화 시리즈 6
데이비드 허친스 지음, 박선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우화로 배우는 '시스템 사고'
데이비드 허친스, <펭귄의 계약>
"시스템 사고는 이 세상의 복잡한 인과관계 유형들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합니다. 즉, 사물,사람,사건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인식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이 어떤 의외의 결과를 초래할지 예상하고, 우리의 에너지와 자원을 어디에 집중시켜야 할지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행위를 이끄는 근본적인 원인을 밝혀내어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두록 도와줍니다. 전략적 관점에서 볼 때, 시스템 사고는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여 우리가 희망하는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현명한 전략을 구상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데이비드 허친스, <펭귄의 계약> p.84)

ⓒ2003 차재업
사고가 발생한 지 보름이 지나가지만 아직도 충격과 슬픔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대구 지하철 참사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생각해볼 거리를 만들어준다. 어떻게 보면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뒷처리보다는 책임회피를 위한 사건조작 의혹에서부터 사고의 책임을 기관사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모습들은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더군다나 이창동 신임 문화관광부 장관의 국무회의 석상에서의 광주민주화항쟁 비교발언을 두고 <오마이뉴스>를 비롯한 인터넷 게시판 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들을 보면 문제의 근본적 원인과 해결책을 지향하기보다는 눈앞에 드러나는 단편적 현상에만 주목하고 그것이 마치 사건의 전부인 양 몰아가는 목소리들은 새삼 우리들의 인식수준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데이비드 허친스의 학습우화 시리즈(Learning Fable Series) 가운데 하나인 <펭귄의 계약>은 이런 점에서 우리들에게 하나의 명쾌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펭귄의 계약>은 이 세상의 다양하고 복잡한 인과관계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변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하나의 사고틀로 '시스템 사고'(System thinking)를 제시한다. 단선적인 사고를 지양하고 시스템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는 명제를 쉽고 재미있는 설명을 통해 명쾌하게 풀어나가는 우화인 것이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남극지방의 빙산 위에서 살던 펭귄들이 인근의 뭍에 살던 바다코끼리와 협정을 맺었다. 대합이 많은 빙산에 살고 있지만 폐가 너무 작아 깊은 바다에 잠수하지 못해 대합을 많이 따올 수 없는 펭귄과 대합을 많이 딸 수 있지만 자기가 사는 곳에는 대합이 별로 없는 바다코끼리가 협약을 맺은 것이다.

'바다코끼리는 펭귄을 위해 대합을 채취하고 채취한 대합을 나누어 먹는다'는 내용이다. 이 협약은 대성공이었고 그 빙산에는 맛있는 대합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듣고 더 많은 펭귄들이 몰려오고 계속해서 더 많은 대합을 따기 위해 더 많은 바다코끼리들이 건너오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육중한 바다코끼리한테 펭귄이 깔려죽는 사건이 잇달았고 펭귄과 바다코끼리 간의 분쟁이 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웃 빙산에 온 펭귄들은 이 풍요의 섬을 떠나게 되고 남은 펭귄들은 문제의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스파키'라는 영리한 펭귄이 드디어 원인을 찾아냈다. 너무 많은 펭귄과 바다코끼리 때문에 빙산이 가라앉고 있었던 것이다.

펭귄들이 문제의 원인을 찾아낸 것이 바로 이 시스템 사고 덕분이라는 설명이다. 문제가 발생하자 펭귄들은 바다코끼리,대합,펭귄 간의 순환관계를 따져본 끝에 빙산에 살 수 있는 펭귄과 바다코끼리의 수에는 한계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모두가 원하는 대합 수확량을 늘리면서도 빙산이 가라앉지 않도록 생산된 대합을 다른 빙산들로 실어나르는 등의 대책을 마련한다.

그렇다면 이런 시스템 사고를 하려면 시스템의 특징부터 알아야 한다. 허친스는 시스템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렇다면 시스템이란 무엇일까요? 시스템이란 특정한 목표 아래 각 부분들이 복잡하고 통일된 전체를 구성하기 위해 모여 있는 집합입니다. 각 부분들은 상호작용하고 상호관련되어 있으며 상호의존합니다. 이 중에서 기억해두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각 부분들이 상호작용한다는 점입니다. 각 부분들이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부분들을 모아놓은 당순한 덩어리일 뿐입니다."(p.84)

곧, '시스템'이란 특정한 목표 아래 각 부분들이 복잡하고 통일된 전체를 구성하기 위해 모여 있는 집합체라는 것이다. 이 시스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각 부분들은 상호작용하면서 상호 관련되어 있고, 상호의존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체나 동식물의 조직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시스템에서는 각 부분이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어야 건강한 모습을 유지한다.

어느 한 부분이라도 제 역할 수행이 어려워지면 건강을 잃게 된다. 또한 시스템의 특징은 조직의 어느 한 부분이 문제가 된다면, 사전에 어떠한 형태로든지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는 것이다. 어떠한 조직이든 그러한 경고의 메시지에 무감각해지면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이렇듯 시스템 사고의 출발점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들을 찾아내는 작업에서 출발한다. 살아가면서 시스템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사물, 사람, 사건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인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노력은 어떠한 행위를 하게 될 때 어떠한 결과가 일어날지를 예상할 수 있게 함으로 에너지와 자원을 효과적으로 배분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가 쉽게 감정적으로 취하게 되는 단선적 사고는 현실에 숨어 있는 복잡한 인과 관계를 거의 드러내지 못한다. 다른 요인들을 배제한 채 한 가지 요인만을 강조하면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되고 효과가 없는 것뿐만 아니라 때로는 해가 되는 해결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대구 지하철 참사를 두고 기관사나 사령실의 탓으로 몰아가는 일부의 감성적 주장들은 문제해결과 재발방지에 하등 도움도 되지 않는, 단세포적 사고의 극치일 뿐인 것이다(이 말을 '기관사는 책임없다는 말이냐',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단선적 사고의 한 유형일 뿐이다).

바로 이 지점이 우리가 허킨스의 이 책에 주목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지은이는 우리들에게 지나치게 간단한 인과관계에 근거한 편협한 단선적 사고를 지양하고, '시스템 사고'를 받아들이라고 충고한다. 이것이 우리가 급변하는 세상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으며 희망찬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라는 것이다. 한 번쯤은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데이비드 허친스, <펭귄의 계약>, 바다출판사(2002)

이외에도 <레밍 딜레마>, <늑대 뛰어넘기>, <네안데르탈인의 그림자>와 같은 데이비드 허친스의 '학습우화시리즈'가 있습니다.
<오마이뉴스>에 게재했던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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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6 02: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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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상 까치글방 150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지음, 박여성 옮김 / 까치 / 199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인공지능은 과연 인간을 능가할 수 있을까?
D. 호프스태터,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의미는 일련의 역설들, 내부적인 역설들 속에서 스스로 전개되어야 한다."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한길사, P.87)

▲ <괴델 에셔 바흐> 표지
ⓒ2003 차재업
<괴델, 에셔, 바흐>. 사실 이 책은 좀 난해하지만 아주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물론 그다지 대중적인 책은 아니라서 누구나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은 아니겠지만 이른바 '잡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한 번 도전해볼 만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잡학'이라고 하니까 뭔가 쓸데없는 지식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는데, 현대 철학에서 '잡학'이라는 요소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예를 들어 들뢰즈의 <천의 고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학, 정신분석학, 음악, 미술, 물리학 등을 아우러는 잡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는 것처럼.

이런 측면에서 이 책 역시 여러 각도로 독해할 수 있다. 현대철학의 핵심을 건드리는 이론서로도, 예술적인 문체를 자랑하는 고급 에세이로도,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다양한 지식영역을 횡단하는 설명서로도, 배타적인 과학자 집단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저작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이 책의 제목이 되고 있는 '괴델, 에셔, 바흐'. 좀더 정확히 말하면, 바흐의 카논, 에셔의 그림, 괴델의 정리는 서로 무슨 관계가 있을까?

호프스태터는 음계(바흐의 카논), 계단(에셔의 폭포), 역설(괴델의 정리)에서 이상한 고리 현상이 발생되고 있음을 설명하면서 시작한다(서장:음악-논리학의 헌정).

무한히 상승하는 카논

이상한 고리의 첫 번째 예로 든 것이 바흐의 '카논'이다. 근대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1685-1750)는 1747년 프로이센 제국의 프리드리히 대왕으로부터 주제를 받아 '음악의 헌정' 이라는 작품을 작곡한다. 알려진 대로 프리드리히 대왕은 굉장한 음악애호가여서 궁정의 실내악 연주회 때에 직접 플루트를 연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카논'과 '푸가'로 구성된 이 '음악의 헌정'에는 일반적인 카논과 전혀 성격이 다른, 무한히 상승하는 순환고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 포함되어 있다.

이 카논은 키(음조)가 C 마이너임에도 다른 카논과 달리 종결될 때 D 마이너에 있다. 조바꿈이 일어난 결과이다. 조바꿈이 연속적으로 몇 번 진행되면 처음 키로부터 그만큼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카논은 끝이 처음으로 다시 연결되도록 구성되었기 때문에 처음 키인 C 마이너로 되돌아가야 한다. 신기하게도 이 카논은 여섯 차례의 조바꿈을 통하여 본래의 키로 복귀하게끔 작곡되어 있는 것이다.

마치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종지부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도입부로 연결되며, 이 과정을 통해 바흐는 한시적인 기호 속에서 '신의 음성'을 들려줘야하는 음악의 시간적 한계를 초월하고자하는 비밀을 드러낸다. "바흐는 의심할 여지없이 이 상승하는 카논은 무한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논리적 결과에 매료되었"다고 하면서 '푸가의 기법'이 전회(轉回)로 연주되어도, 역행(逆行)으로 연주되어도 똑같은 화성적 기법을 풀고 있다는 사실은 이 출발점과 소실점이 같다는 '헝클어진 고리'로 이뤄진 진리의 모순성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처음에 C 마이너에서 출발하여 키의 계층 구조를 따라 더 높은 키로 올라갔으나 다시 처음 키인 C 마이너로 돌아온 것처럼, 우리가 계층구조를 가진 체계에서 어떤 수준을 따라 위쪽(또는 아래쪽)을 향해 이동하다가 느닷없이 본래 출발했던 곳에 다시 돌아와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이상한 고리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이동한 행적은 '고리' 모양이며 출발했던 곳에 되돌아온 것은 '이상한' 일이기 때문에 이상한 고리라고 명명한 것이다.(pp4~14)

에셔

에셔의 석판화 '폭포'에서도 이상한 고리 현상이 발생한다. 에셔(1898-1972)는 패러독스를 주제로 여러 편의 걸작품을 남긴 화가이다. 현대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은 알든 모르든 그의 그림들, 정확히는 석판이나 목판화들을 한두 개 쯤은 보았을 것이다. 그가 1961년 발표한 '폭포'(p15, 아래 그림 참조)는 불가능한 물체라 불리는 삼각형을 3개 연결하여 그린 석판화이다.

▲ 폭포(Escher, 석판, 1961)
ⓒ2003 차재업
위 그림에서 보듯 폭포의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놀랍게도 처음에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고리의 각 부분에서는 한 곳도 잘못된 부분이 발견되지 않지만 전체적인 시각으로 보면 고리 전체가 분명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패러독스를 느끼게 된다. 폭포의 물길을 따라 가다 보면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오게 되기 때문이다(pp14~19). 에셔는 이 <폭포> 뿐만이 아니라 '두 개의 손이 서로 다른 손을 그리고 있는 그림'(p888, <손을 그리는 손>, 1948)이나 'ABCD 네 꼭지점을 가진 사각형에서 A에서 B로 올라가는 계단 B에서 C로 올라가는 계단, C에서 D로 올라가는 계단 그리고 D에서 A로 올라가는 계단 그림'(p16, <올라가기와 내려가기>, 1960) 등 에셔가 그린 대부분의 그림은 이런 '재귀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호프스태터는 이를 無限自己再歸性이라고 이름붙이고 있다.

불완전성의 정리

이상한 고리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의 증명을 위해 사용된 에피메니데스 패러독스에서도 발견된다. 괴델(1906-1978)은 25살의 나이에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했다. 괴델은 "나는 증명될 수 없다"라는 자기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논리식을 구성하여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했다. 이 논리식은 에피메니데스의 패러독스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기원전 6세기 경 크레타 섬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진 에피메니데스는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다"라는 불멸의 명제를 남겼다. 이른바 '거짓말쟁이의 패러독스'이다. 패러독스는 본디 그 자체는 모순이 없지만 참도 되고 거짓도 된다. 예를 들어 에피메니데스가 한 말이 진실이라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다. 그러나 에피메니데스 역시 크레타 사람이므로 그의 말은 거짓말이 되고 만다. 한편 에피메니데스가 한 말이 거짓이라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그렇다면 에피메니데스 역시 크레타 사람이므로 그의 말은 참말이 된다. 이와 같이 에피메니데스가 한 말은 동시에 참도 되고 거짓도 된다.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다"라는 명제는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명제로 바꿀 수 있다. 이 명제는 다시 "A : 다음 문장(B)은 거짓이다""B : 앞의 문장(A)은 참이다"의 두 명제로 분리 가능하다. 두 명제는 제각기 의미가 완전하며 패러독스가 없다. 그러나 두 명제가 합쳐지면 에피메니데스 패러독스와 똑같은 효과를 나타내므로 이상한 고리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나는 증명될 수 없다"라는 괴델의 논리식은 거짓이라면 증명이 가능하지만 참일 경우에는 증명이 불가능하다. 요컨대 참이지만 증명이 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하므로 모든 수학적 체계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이다.(pp20~29)

이 불완전성의 정리에 대해서 필자가 설명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테고, 이 명제는 사실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내놓은 <수학원리>를 겨냥한 것이었다는 게 통설이다. 모든 수학적 진리를 자신의 체계 안에서 입증하고자 한 <수학원리>의 야심찬 포부는 괴델의 정리로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이 <수학원리>는 너무나 난해한 책이라서 다 읽은 사람이 저자 두 사람과 괴델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수학계의 정설(?)이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수학의 이러한 '무모순성'에의 추구의 역사에 대해서는 이진경, <수학의 몽상>, 푸른숲 참조). 결정적인 것은 이 <수학원리>의 '허점'을 증명하는데 <수학원리> 내부의 방법론만이 쓰였다고 한다. 여기서 또다시 '이상한 고리'가 형성된다.

어쨌든 이러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한계, 나아가서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이성 스스로의 힘에 의해 밝혀낼 수 있었다는 측면에서 20세기 수학 아니, 전학문적 성과를 통털어 첫손가락 꼽히는 업적으로 평가받게 되는 것이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사이의 경계

이렇게 음악, 미술, 수학에서 이상한 고리의 사례를 발견한 호프스태터는 이것을 사람의 두뇌와 마음에 대한 견해로까지 밀고 나아간다. 그는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이원론적 접근방법으로는 사람의 마음이 뇌에서 출현하는 이유를 결코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뇌와 마음을 서로 다른 수준으로 구분시키는 방법론에 의해 뇌 속에서 의식이 생성되는 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런 맥락에서 마음을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두뇌를 하드웨어에 비유하고 두뇌가 떠받들고 있는 마음에서 의식이 출현하는 것처럼 컴퓨터 역시 하드웨어의 지원을 받는 소프트웨어에서 의식을 만들어내는 이상한 고리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컴퓨터가 사람처럼 마음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제 10장 '기술층위와 컴퓨터 체계').

그의 이러한 관심은 음악, 미술, 수리논리학은 물론이고 인공지능과 분자생물학, 나아가 선불교까지 동원하는, 한마디로 모든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넘나들며 언급된다. 워낙에 방대한 분량이고 깊이 있게 파고드는 부분도 많은지라 100% 다 이해하고 넘어가기 힘든 측면이 많다. 개인적으로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 이율배반, 또는 무모순성을 언급하는 부분에 나오는 재귀순환, 혹은 재귀준거의 수학적 증명이다. 수학적 지식이 얕은 입장에서는 복잡한 기호(처음 보는 수학적 기호도 많다)만 쳐다봐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니 말이다.

인공지능

어쨌던 이런 과정을 거쳐 결론 부분인 제 19장 '인공지능 : 전망'에 이르러 컴퓨터 프로그램이 음악을 작곡할 수 있을까?, 정서를 기계에 프로그래밍해 넣을 수 있을까?, 천하무적의 체스 프로그램이 나올까?,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인간과 동일해질까? 등등과 같은 열 개의 질문을 던져 놓는다.

이 질문들 중에서 일부는 이미 우리 생활에서 보편화되고 있는 형태로까지 나아간 것(이미 체스는 컴퓨터가 인간을 이기는 상황에 도달했다. 물론 이것이 컴퓨터의 연산방식이 인간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뜻하는 건 아닐 것이다. 컴퓨터보다 훨씬 복잡한 논리적 연산을 요구하는 바둑의 경우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도 있지만 이 책이 쓰여진 게 1979년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의 이 질문들은 꽤나 선구적이었던 셈이다.


처음 이 책이 출판된 건 1979년인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20세기가 다 끝나가던 1999년에야 번역본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다. 좀더 젊은 시절에 읽었더라면 내 인생이 좀더 풍부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그 동안 필자는 이 책을 두 번 정도 숙독했지만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숱하게 있다. 모든 걸 다 소화하고 넘어갈 순 없겠지만 언젠간 그럴 수 있을 거란 기대를 안고 기꺼이 또다시 안개속 미로를 헤엄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책이다.

필자의 이런 바램을 이해하기라도 하는 듯, 호프스태터는 국역본 <괴델, 에셔, 바흐>의 '한국어판에 부쳐'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던져 놓는다.

인생에 남아도는 시간이란 없습니다. 인생은 별도의 공간과 사치를 허용할 정도로 길지 않습니다. 그 짧은 일부분에서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세상을 보는 아름다운 시각이 전해진다면, 그것은 저의 가장 큰 기쁨일 것입니다.(p. xix)

하지만 그의 세상을 보는 아름다운 시각을 '제대로' 읽어내기까지는 상당한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충분히 해볼만한 노력이 아닐까 생각된다.

i) 글의 모두에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은 "의미란 그 어떤 진리에 '담겨지는' 게 아니라 진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의해 '나타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이 책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또한 호프스태터나 들뢰즈가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하나의 중요한 철학적 텍스트로 취급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ii) D. 호프스태터,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까치(1999) 본문의 괄호안 페이지 표시는 모두 이 국역본의 페이지입니다. 역시 아쉬운 점은 번역의 어색함입니다.

iii) 그러나 번역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이 책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마이뉴스>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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