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찾은 금전산

순리적으로 흘러야 할 일상이지만, 유독 심하게 앓았던 '일상 탈출'의 바람 때문이었는지, 개인적으로는 근 10년만에 산에 오를 생각에 내심 설레었던 주말이다. 계획하고 있던 일정이었음에도 때 없이 도사리고 있던 복병은 부산에서 충동적으로 날아든 한 무리의 친구들과 그 가족이었다. 다수가 설왕설래 하는 가운데 여수에서 근거리인 '지리산 피아골의 단풍 - 제암산 갈대숲 - 만만한 광양의 백운산'을 거쳐 결국 최종 목적지로 천년고찰 송광사와 선암사를 함께 품고 있는 조계산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승주IC를 빠져 나와 선암사 들어가는 2차선 도로의 초입을 지나니 얼핏 단풍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플랭카드가 보인다. 일말의 불안감을 안고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좁은 도로에 차량 행렬이 긴 꼬리를 물고 있었다. 한참 가다서다를 반복하던 중 선두의 남편이 운전대를 나에게 맡기고 주차장 상황을 살피러 간 사이, 주목받지 못한 잎 진 감나무 가로수에 올망졸망 달린 유난스레 작은 감들이 생뚱맞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다 수원에서부터 신고 온 새 등산화까지 생뚱맞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마저 일었다. 결국 예상대로 주차장까지 다녀온 남편의 가위표 손짓에 차를 돌렸고, 아이들을 이끌고 산행후 낙안읍성에서 합류하기로 한 팀을 따라 호수를 끼고 도는데, 산빛 물빛이 너무 고와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이 자꾸만 건들거린다.

막상 낙안읍성 주차장에 이르니, 등산에의 미련을 못 버린 일행은 일제히 산이름도 모른 채 바위들이 올망졸망 박혀 있고 그리 험해 보이지 않는 뒷산을 올려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남편은 이미 산행을 포기하여 옷과 신발을 평상복으로 갈아 입은 후였지만, 일행의 성화로 다시 채비를 서둘렀다.



낙안온천 앞에 주차를 하고 등산로 입구를 찾아 신발끈을 재차 고쳐 묶으며 뗀 첫걸음이 사뭇 활기차다. 아침부터 우왕좌왕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무렵이었고, 남들 하산 할 즈음 오른 길이지만 따스한 날씨는 가벼운 옷차림에도 금방 몸에 땀이 배였다. 당당히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건강함이 새삼 감사한 순간이다.

예전에 엄청 폼 재고 다녔던 이력을 살려, 산 중턱까지는 일정한 폭으로 바삐 가는 남자들의 보무를 잘 맞추었지만 그기까지였다. 숨가쁨의 강도가 심해짐에 따라 걸음이 차츰 느려지니, 어느 순간 앞서 가던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일행 중 뒤처져 오는 부부가 있었으니 부끄러운 수준은 아니어서 다행스럽지만 갈수록 힘겹다. 자연스레 몸이 낮춰지며 땅만 보고 걷게 되고, 발끝으로 하산하는 사람들의 인기척을 느끼며, 성큼 앞서간 남편에게 같은 페이스를 기대하는 건 어쩌면 앞으로도 요원한 일이란 생각을 했다.



이왕 뒤처진 걸음 위아래를 살피기 시작한다. 정상 가까이 병풍 같은 벼랑을 올려다 보는 재미가 나쁘지 않았고, 발 아래에는 옹기종기 낙안읍성의 초가들과 낙안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혼자 가는 내가 다소 안스러웠던지 하산하던 남자분이 귤 두 개와 오이 하나가 든 봉지를 손에 들려준다. 고맙기도 하지...



경사각이 있는 소나무숲 길을 따라 얼마간 오르니,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로 막았다. 이곳이 극락으로 가는 관문이기라도 하듯 머리를 낮추고 이 문을 통과하니, 제법 운치 있는 좁은 돌계단 길이다. 흠씬 땀을 흘리고 난 후라 시원한 바람에 현기증을 느끼며 아슬하게 걸음을 옮겼더니, 작은 산장 같은 느낌의 절집이 나타났다. 바로 '금강암' 이다. 부처님께 인사 드리는 것보다 일행을 찾는 게 급하여, 왼편 바위를 살짝 돌았더니 확 트인 시야가 옹골차다.



자연석불인 줄도 모르고(?) 바위에 기댄 남편의 '고생했다'란 인사를 받으며, 땀도 식히고 자랑겸 손에 쥔 봉다리를 풀려는 찰나, 작대기를 들고 나타나신 스님. 그의 첫 마디가 불경스럽게도 금지구역에 들어간 남편에게 하는 꾸지람이다. 암자에 혼자 기거하시는 진성스님은 대화가 깊어질수록 겉모습과는 다르게 스님 같지 않는 편안한 느낌을 준다. 대구 파계사에 적을 두시다가 이곳에 온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단다. 불청객인 우리 일행에 대한 몇 가지의 질문과 이 산 주변 정세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더불어 선암사와의 불편한 관계를 풀어내신다.



간밤에 보성의 대한다원 제2농장의 매점에서 구입한 녹차 막걸리 한 통을 얼려서 베낭에 넣고 왔는데, 이 또한 부지런한 남편 덕이다. 안주로는 아침에 해장국을 먹으며 덜어 온 김치 조각. 혹시나 하여 스님께 잔을 권했더니,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면 서운했을 만큼 시원하게 목을 축이신다. 근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등산객이 단감을 가지고 와서 막걸리 한 잔을 청했다. 땀 흘리고 난 후 소 잔등 같이 부드러운 주변 산들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들이키는 한 잔 막걸리의 맛을 음미하니, 신선이 따로 없다.

스님과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을 잊고 있었지만 하산해야 할 시간이다. 이런 우리들에게 스님은 라면을 끓여줄테니 먹고 가라고 몇 번을 재촉하신다.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애써 자리를 터니 제법 아쉽다. 금강암까지 다시 걸어나오며, 목이라도 축이고 가라는 스님의 말씀을 따라서 좁은 마당에 들어서니, 물이 귀하여 반나절을 받았다는 흰 생수통이 놓여 있다. '아, 스님! 저 바위 아무리 봐도 석불 같지 않은데...' 란 의문을 전하니 다시 가서 자세히 보라고 한다. 이조차 다음을 기약하며 하산을 서두른다. 오를 때와는 달리 달리 하산하는 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2005/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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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 갈대밭 전경



바라보는 것이 서로 다를 때 피하기 어려운 것이 '충돌'이 아닌가 싶다. 불가결한 감정의 골 끝이 어젯밤 베인 손가락 상처 만큼이나 아리고 불편하다. 날씨도 지랄맞게 끈끈하군. 이런 기분일 때 문득 가고 싶고, 생각나는 곳이 있지만 너무 멀다. 바로 순천만.

완도 다녀오는 길에 한창 졸다가 곧장 여수로 들어가지 않고 운전자가 옆길로 살짝 빠진 걸 알았을 때는 이미 2번 국도를 벗어나 있었다. 순천만 일대를 기웃거리고 있다는 것만 짐작할 뿐 굳이 어디 가냐고 묻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제한속도 만큼의 바깥 바람을 맞으니 그 자체로도 무진장 기분이 좋다. 어디나 호젓하고 인적이 드문 길이기는 마찬가지. 남편은 순천만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를 찾고 있는 와중이다.

사전 정보도, 이정표도 없이 한참을 헤매다가 그나마 익숙한 와온해변 못 미친 지점에서 긴가민가 시동을 꺼고 땅에 내려서니, '코리안 향수(?)'가 숨 쉬기 힘들 정도로 코를 찌른다. 더불어 비까지 살짝 뿌리니 갯내음 풀내음이 더 짙어지고, 이 길인가? 저 길 인가? 짐작으로 야트막한 산길을 중간쯤 오르니 땀이 비오 듯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정경으로 제대로 오긴 한 듯.

가쁜 숨을 고르며 9부 능선쯤에서 광활한 순천만을 한 눈에 굽어보니 가슴이 확 트인다. 커다란 'S'자 획을 그으며 가로지르는 물길이 있고, 원형의 갈대숲 사이사이로 붉은빛을 띤 것은 칠면초. 저 멀리 왼편으로 길게 누운 산자락의 끝이 방금 다녀온 '화포'라는데 갑자기 들쑥날쑥 방향 감각이 무디어진다. 땀을 식히며 담배를 꺼내 무는 남편이 부럽다. 맛은 모르지만 한모금의 담배가 참 맛있게 보인다. 날씨 만큼이나 밧대리가 오락가락하여 겨우 건진 몇 장의 사진들.









2004/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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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오랜꿈 2002/04/11


그녀도 벌써(?) 마흔 살이다. 90년인가? 처음 장필순의 이름 석자를 머리 속에 기억했을 때가... 서른 살에 가까운 신인(?)의 데뷔 앨범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후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97년에 발표된 5집을 대하고선 역시!, 하는 감탄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장필순에 대한 추억 가운데 색다른 게 하나 있다. 내가 태어나고 나서 이른바 연예인이라는 사람한테 받은 '사인'이라고는 유일하게 받아본 사람이라는 것. 98년 초인가, 수원에 경기FM방송이 개국했었는데 그때 수원 사무실이 경기FM방송이 입주해 있는 건물에 있었다. 그것도 같은 2층에...

아마 어떤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했었던 거 같은데, 방송을 마치고 난 뒤 같은 층에 있던 치과에 이빨 치료를 하러 들렀던 모양이다. 평소 치과원장은 우리 사무실에 자주 놀러와서는 컴퓨터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도하고 저녁엔 같이 소주도 한잔씩 하곤 했었다. 나하고 나이도 비슷하고 해서 자주 어울렸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빨을 치료해주고 나서는 쑥스러운 듯 사인을 청하니 선뜻 해주기에, 나한테도 달려와서는 '장필순이 왔다'고 하길래 엉겹결에 사인을 받게 되었다. 아마 내 책상 어딘가에 아직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자잘한 인연(?)을 떠나서라도 그녀의 음악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도시적 삶의 외로움이나 우수를 잔잔하게 곱씹어보게 만드는, 편안한 목소리의 주인공인 것이다.

특히 5집은 꼭 소장하고 있어도 좋을, 그런 음반이다.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제비꽃


어느새

장필순
Best('98)
5집-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때('97)
4집-하루('95)
장필순 Best Collection ('93)
3집-이 도시는 언제나 외로워('92)
2집-외로운 사랑('91)
1집-어느새('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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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의 봄 - 광양 매화마을과 화개장터



3월의 첫날, 늦은 아침을 먹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딱히 목적지를 정하고 출발한 것은 아니지만 섬진강을 보고싶다는 잠재의식이 방향을 광양 쪽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 남해고속도로 옥곡 나들목을 빠져 나와 2번 국도에 들어서자 군데군데 피어있는 매화꽃 정경이 섬진강보다 먼저 반긴다. 예년보다 열흘 가량 이르다는 꽃소식을 뉴스를 통해 듣긴 했지만, 봄이면 일부러 눈으로 즐기러 가는 꽃놀이 보다 산이나 들에서 쑥이며 달래며 봄나물을 캐는 걸 익숙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런 꽃나들이가 그다지 익숙한 모습은 아니다.


실제의 이름보다 '매화마을'로 더 잘 알려진 광양 '섬진마을'이 가까워질수록 차들의 움직임이 더뎌진다. 그래서 이름 모를 나루터 위 정자가 가까운 곳에 차를 주차시켰다. 앞쪽 공용주차장으로 걸어가보니 그리 긴 꼬리는 아니지만 연신 호각을 불러 제끼는 순경들의 바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들이 때 어지간하면 시끌벅적한 곳을 피하는 터라, 순간적으로 '후회'의 감정이 잠깐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 어떤 '때'가 아니면 보지 못할 풍경을 눈 앞에 두고 이 정도 댓가를 치루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쪽으로 타협을 보며, 그 행렬 속에 묻혔다. 아마도 입장권을 끊어야 하는 곳이었다면 여지없이 발길을 돌리고 말았으리라.

그리 심한 경사도 아닌 '청매실 농원'을 오르니 가벼운 옷차림에도 연신 땀을 훔쳐야 할 정도다. 그러고보니 조금 전에 차 안에서 감지한 외부온도가 20도에 육박했었다. 3월초에 20도는 분명 이상기온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따뜻한 강바람을 타고 예년 보다 일찍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매화가 만개하려면 몇일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아마도 다음 주말이면 때를 맞춰 한바탕 축제가 열릴 것이고, 매화향 또한 지금보다 더 깊어지리라.


먼저 만개한 매화나무와 함께 눈도장에 열심인 여행객들
아이보리로 은은하게 톡 터진 백매화 / 농염한 때깔로 미소를 머금은 홍매화

9달 산모의 배만큼이나 풍만한 자태의 장독. 몇개나 될까?

'청매실농원'에서 마을 쪽으로 바라본 섬진강 풍경

농원 안 한편에서는 진돗개 비슷한 개가 여행객들을 무심히 쳐다보고 있다. 이놈과 열심히 놀아주고 있는데 아내가 윗쪽으로 올라가잔다. 조금 윗쪽으로 올라 가면 섬진강을 좀더 높은 곳에서 조망할 수 있고, 더불어 조만간 매화 꽃비가 흩날릴 즈음, 영화 <천년학> 촬영을 위해 지어졌다는 세트장도 어떤가 궁금하단다. 안 가겠다고 하니 혼자 올라간다.


매실을 첨가한 이천원 짜리 아이스크림은 조금 달콤하다. 섬진마을 주민들일까? 매실을 이용한 다양한 상품 외에 봄나물들로 길다랗게 난전을 펼쳤다.



날씨가 덥다는 느낌이 들 정도라 농원 안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올라갈 때와 다르게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내려오는 길을 선택했다. 한적하기 그지 없다. 그 한적함 사이로 눈에 띄는 것이 문패다. 아마도 이 '섬진마을'은 단체로 문패를 제작하면서 부부 이름을 같이 쓰기로 했나 보다. 그러고보니 우리는 한번도 문패를 가진 적이 없는 것 같다. 한시라도 빨리 우리 부부의 꿈인 전원생활로 돌아가, 나란히 이름 석자 올리기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곧장 섬진강을 끼고 861번 도로를 달리던 중, 산 중턱의 매화마을 보다 더 화사하게 만개한 도로변 매화에 마음을 빼앗겨 차를 세웠다.


이런 곳의 정류장이라면 버스가 시각을 지체한다손 치더라도 용서가 될 듯.

자연의 섭리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이 괜히 생긴 말이 아닌 듯, 마침 오늘이 하동포구 80리길의 종점인 화개의 오일장(1일,6일)이었다. 그 옛날 구례, 하동, 쌍계사로 갈리는 세갈래 길목에 전라도와 경상도의 산, 물, 섬사람들이 어울리며 일용 물산들을 교환하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이제는 연중 상설 장터로 관광객을 상대로 한 상품들이 태반이다.


지역 감정의 경계이자 영호남 화합의 다리라는 구분이 다소 억지스런 남도대교.

남도대교 위에서 바라본 하구 방향의 물길. 하동포구 80리 길의 시작쯤 되겠다.

다리 건너편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 오길 잘했다. 화개장터의 한 국밥집에서 생막걸리와 도토리 묵 무침를 놓고, 아내와 여러 가지 것들을 이야기 하다보니 두어 시간이 훌쩍 가버린다. 식당을 나와 장터를 구경하다가 매실즙을 한통 샀다. 매화마을 보다 이천원 값싸게...


묵묵히 정을 쫓는 대장장이

개인기 퍼레이드를 벌이며, 손님 발목잡기에 여념없는 엿장수 쪽은 야단스럽다.





뇨자 광대(?)의 흥겨운 연주에 술 한잔 거나하게 걸친 한 아저씨가 나서더니, 일행들을 서서히 끌어들인다. 나중엔 좌판에서 나물 팔던 할머니까지 어깨춤을 덩실거리고. 흥이 많은 우리의 어머니, 어버지들이다.



장터를 나와서 다시 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줄배는 언제 없어졌다냐? 구례 방향으로 달리니 건너편에 우리 현대사의 아픈 생채기가 선연한 피아골이 코앞이다. 그렇게 3월 첫날의 나들이가 마무리된다.


좋지 아니한가 - 크라잉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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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ㆍ젠더ㆍ섹슈얼리티, 제도담론의 권력 효과일 뿐


[연재] 21세기의 사유들 ② 주디스 버틀러 - 조현준 연구원 (한국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7년 09월 08일 (토) 18:22:42

대학신문 snupress@snu.ac.kr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에서 수사학과 및 비교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레즈비언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페미니스트이자 소위 ‘퀴어 이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버틀러의 철학사적 공헌은 페미니즘 담론의 고정관념으로 여겨졌던 ‘억압자 남성’, ‘피억압자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양식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데 있다.

버틀러의 퀴어 이론은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젠더 자체의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을 토대로, 동성애와 이성애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제도담론의 권력 효과임을 폭로하고자 한다. ‘퀴어’는 원래 동성애자들을 경멸적으로 부르던 호칭이었으나, 버틀러에 이르러 ‘퀴어 이론’은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의미를 고정하는 모든 담론적 권력에 저항하는 전복의 표어가 된다.


버틀러의 주저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은 시몬 드 보부아르, 지그문트 프로이트, 자크 라캉, 자크 데리다, 그리고 미셸 푸코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현대 철학자들을 ‘퀴어 이론’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조망한 책이다. 이 책은 많은 논쟁을 일으키며 각국의 언어로 번역돼 세계적으로 십만 권 이상 팔렸고 인터넷 상에 ‘주디’라는 국제 팬진(fanzine)까지 탄생시키면서 버틀러를 영미 지성계의 떠오르는 아이콘, 학계의 주목받는 스타로 만들었다. 이후 버틀러는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격분하기 쉬운 말』, 『권력의 심리 양태』, 『젠더 허물기』, 『자신을 말하기』 등의 저작을 통해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뿐 아니라 정치 철학과 윤리학까지 관심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많은 사람들을 『젠더 트러블』에 열광하게 만든 것일까? 이는 크게 두 가지 논의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여성 없는 페미니즘’의 가능성 제기다. 다시 말해 본질적인 정치 주체가 없는 정치학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다. 예컨대, 일상에서의 일탈을 꿈꾸며 이따금씩 화장과 여장을 즐기는 씨름신동 동구(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나 언제나 자신을 여성이라고 생각하며 성전환 수술비를 저금하는 여장남자 두눈박이(영화 「다세포소녀」)는 페미니즘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혹은 남자로 태어났지만 성전환 수술 후 소송을 통해 2002년 법적으로 성별 정정을 받은 하리수는 어떤가?

페미니즘이라는 성 정치학의 정치 주체가 여성이라면, 이 때 성을 지칭하는 것은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가 될 것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이 섹스, 후천적으로 사회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교육받은 성이 젠더라면, 섹슈얼리티는 인간의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이다. 그런데 섹스라는 생물학적이고 해부학적인 특성도, 섹슈얼리티라는 원초적인 욕망도 사실은 애초부터 그렇게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제도담론이 그렇게 명명하고 인식하도록 지식 체계를 동원한 결과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모두 사회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의미에서 젠더로 수렴되며 규범이 만든 허구이기 때문에 분명한 정의가 불가능해진다.

   
 

▲ 조현준 연구원

 

두 번째는 욕망과 법 간에 발생하는 인과론의 전도다. 즉 근원적 욕망은 애초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억압해야 할 어떤 대상을 가정하고 있던 규율권력과 지배담론이 만든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욕망이 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 법이 욕망을 만들었다는 ‘인과론의 전도’는 당연하다고 생각돼 온 기존 담론이 어떤 권력의 역학 관계에 의해 구성되고 조작됐는지를 면밀히 살피는 ‘계보학’의 관점을 부각시켰다.

결국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규범이 만든 허구이자 규제가 만든 이상이라는 의미에서 어떤 본질적인 내적 특성을 갖는 것이 아닌, 다양하고 산포된 관점을 가진 제도, 실천, 담론의 효과가 된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의미에서 광의의 젠더로 수렴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젠더는 모방을 통해 원본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패러디’, 행위를 통해서만 의미를 발현하는 ‘수행성’, 재의미화의 가능성을 안고 반복되는 규범에의 ‘복종’, 자신 안에 타자를 품고 있는 ‘우울증’의 양식으로 발현된다. 이제 진정한 남성이나 여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기존 규범 속에서 원본의 권위를 허물면서 수행적 행위를 통해 언제나 재의미화된다. 그것은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대상을 떠나보내지 못해서 자신의 일부로 합체한 우울증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요점은, 근본적으로 결정된 ‘본질적인’ 여성은 없다는 것이다. 젠더의 표현물이라는 가면 뒤에 본질적인 젠더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젠더 정체성은 외관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수행을 통해서만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집합이나 범주 없는 ‘여성 없는 페미니즘’의 가능성이고 자신 안에 타자의 가능성을 노정하는 ‘퀴어 이론’의 출발점이다. 타인과 나의 구분과 경계에서 모든 차이가 나오고, 그 차이가 차별을 낳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정치주체를 심문하는 버틀러의 젠더 정체성 이론이 현실의 문화정치학과 접목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남자와 여자가, 남성성과 여성성이, 이성애와 동성애가 분명한 자기 정의를 할 수 없다면, 그리고 언제나 규범 안의 패러디로서 수행적 행위를 통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에 사실상 나와 타인의 경계조차 불분명한 것이라면, 남자가 여자를, 남성성이 여성성을, 이성애가 동성애를 억압하거나 천시할 근거가 없다. 그것이 인류의 절반인 여성뿐 아니라 인구의 십 퍼센트에도 못 미친다고 평가절하되는 소수자의 섹슈얼리티를 인정하고 평등한 공존을 모색하려는 ‘퀴어 이론’의 현실적 정치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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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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