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한 좌파 음유시인의 모든 노래들
모던포크 싱어 필 옥스 "명성의 코드"

장석원 객원기자
출처:<레디앙(www.redian.org)> 2007년 02월 24일


60년대 모던포크운동은 미국의 대중음악 역사에서 정치적 행동주의와 가장 밀접하게 결합했던 분야였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같은 현상은 없었다. 물론 모던포크운동에 몸담았던 음악인들이 모두 같은 정도로 정치적 문제제기에 동참했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 주제들을 노래하면서도 의식적으로 현장과는 거리두기를 했던 가수들도 물론 있고, 체면치례수준에서 집회나 노래모임에 얼굴을 내비쳤던 가수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포크싱어들은 자신들의 노래가 현실을 담아야 하고 현실은 언제나 공연장이 아니라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노력했다.

우리에게는 감미로운 스탠더드 팝송을 부른 이로 기억되는 폴 사이먼도 무대에서는 '쿠바 예스, 닉슨 노!Cuba Si, Nixon No' 같은 선동적인 노래를 불렀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 이후 미국의 혁명이 서서히 진압당하기 시작하고 미국이 베트남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파리협상도 진척되면서 '거리'에는 침묵이 번져나갔다. 동시에 그 거리에 기반했던 모던포크운동도 긴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우울한 70년대'가 시작된 것이다.

미국의 좌파들에게 60년대는 혁명의 시기였다. 반면 80년대는 끔찍한 반동의 시대였다. 반대로 우파들에게 60년대는 혼란과 분열의 시기였지만 레이건의 80년대는 찬란한 승리의 시대였다. 그러나 좌파건 우파건 70년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우울한 시대였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사실상의 패배는 미국사회의 트라우마로 남았고, 워터게이트 사건은 정치에 대한 불신을 넘어 냉소주의를 확산시켰다. 미국의 노동계급은 부유하다는 신화가 깨진 것도 이 시기였다. 60년대 공동체주의의 실패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불러왔고 가족은 이미 해체됐다. 보수건 진보건 미국사회는 전반적으로 희망을 잃고 방향을 상실한 것 같이 보였다.

그런 시대의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필 옥스는 1976년 4월 9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 *
▲ 노래하는 저널리스트 - 필 옥스Phil Ochs
필 옥스는 톰 팩스턴과 함께 모던포크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대중의 인기를 얻었던 가수였다. 1964년 음반 데뷔 후 죽기 직전까지 그는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1970년의 음악스타일 변경에도 불구하고 '전쟁', '인권', '노동'에 관해 노래한다는 모던포크의 정신을 고수했던 몇 안 되는 뮤지션 중 한 명이다.

존 바에즈 같은 포크명문가 출신과 달리 필 옥스는 1958년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포크에 별 관심도 없었고 정치는 더더욱 관심이 없는 청년이었다. 심지어 그는 미국에만 있는 독특한 형태인 군사기숙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오하이오 주립대학 입학 후 사귄 친구들과 미국여행을 통해 '세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옥스는 대학에서 언더그라운드 신문을 발행하고 기숙사 친구와 '싱잉 소셜리스트The Singing Socialists'라는 듀오를 결성하기도 했다. 졸업을 포기하고 뉴욕에 올라와 포크 뮤지션들의 집합소인 그린위치 빌리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가 1962년이었다.

이듬해에는 미국 최대의 포크공연인 뉴포트포크페스티벌 무대에 초청될 정도로 포크 팬들과 평론가 사이에서 이름이 알려졌다. 1964년에는 첫번째 앨범을 발표했다. 이후 1970년까지 매해 한 장씩의 앨범을 선보였지만 그해 3월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킨 카네기홀의 공연 이후로는 침체에 빠져 더 이상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 * *

"Chords of Fame"
Phil Ochs
1976년
Side 1
1. I Ain't Marchin' Anymore
2. One More Parade
3. Draft Dodger Rag
4. Here's to the State of Richard Nixon
5. The Bells
6. Bound For Glory
7. Too Many Martyrs
8. There But For Fortune
Side 2
1. I'm Going to Say It Now
2. Santo Domingo
3. Changes
4. Is There Anybody Here?
5. Love Me, I'm a Liberal
6. When I'm Gone
Side 3
1. Outside of a Small Circle of Friends
2. Pleasures Of The Harbor
3. Tape From California
4. Chords Of Fame
5. Crucifixion
Side 4
1. The War Is Over
2. Jim Dean of Indiana
3. Power and the Glory
4. Flower Lady
5. No More Songs
"명성의 코드Chords of Fame"는 1976년 그의 갑작스런 죽음 후 그의 가족들이 추모앨범의 의미로 편집한 것이다. 장례식을 치르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발표된 음반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정성들여 제작한 흔적이 여기저기에 묻어있다.

특히 서로 다른 두 회사로 나뉘어 있던 음악활동을 하나의 세트에 모았다는 점에서 소중한 음반이다. 필 옥스는 1967년을 기점으로 이전에는 일렉트라 레이블에서, 이후로는 A&M 레이블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명성의 코드"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발표된 필 옥스의 선집들은 모두 해당 음반사 시절의 녹음들로만 구성됐었다.

하지만 이 앨범은 그의 데뷔 무렵부터 마지막까지의 음악활동을 한 눈에 훑어볼 수 있도록 구성돼있다. 사망 직후였기 때문에 죽은 가수를 재조명하려는 유가족들의 뜻에 각 음반사들이 쉽게 동의해줘서 가능했다. 그러나 상업적인 이유로 이후로는 이런 기획과 협력이 가능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앨범은 같은 이유로 CD로는 제작되지 못했다.

앨범 커버의 안쪽과 뒷면은 동료 음악인이며 역시 사회운동가에 비트족 시인으로 유명한 에드 샌더스가 필 옥스의 일생을 길게 쓴 글이 신문 지면의 형태로 빼곡히 적혀있다. 이 디자인은 이유가 있는데 필 옥스는 자신을 빗대어 '노래하는 언론인troubadour journalist'이라고 불렀었다.

대학을 포기하고 뉴욕으로 옮겨왔을 무렵에도 필 옥스의 목표는 직업적인 포크가수가 되는 것과 함께 명망있는 저널리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두 가지를 혼합한 형태를 해결책으로 삼은 셈이다. 그의 첫 번째 앨범의 제목은 "노래할만한 모든 소식들All the News That's Fit to Sing"이었다. 이는 뉴욕타임스의 오랜 사시인 '인쇄할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뉴스All The News That's Fit To Print'를 본 뜬 것이다.

"명성의 코드Chords of Fame"는 두장의 레코드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레코드는 데뷔앨범부터 모두 3장의 앨범을 발표했던 일렉트라 레이블 시절의 녹음들을 담고 있다. 첫 곡인 '나는 더 이상 진군하지 않으리I Ain't Marchin' Anymore'는 그의 초기 반전노래 중 가장 대표적인 곡이다. 아직 베트남 반전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이전에 발표된 곡이라 '일반'적인 의미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가사를 담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밥 딜런의 대표적인 반전가요 '신은 우리의 편With God On Our Side'처럼 미국의 역사적인 전쟁을 차례로 언급하는 구성이다. 다만 밥 딜런의 노래가 반어법적인 표현을 통해 미국의 뻔뻔함을 드러내는데 비해 필 옥스는 직설적인 가사로 미국의 잔혹함과 무자비함을 노래하고 있다. 이어지는 '징병기피자 랙Draft Dodger Rag'도 당시 미국의 징병제와 군사정책을 비판한 곡이다.

'리처드 닉슨의 나라에서Here's to the State of Richard Nixon'는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자신의 초기 발표곡인 '미시시피주에서'를 개사해 다시 녹음한 곡이다. '미시시피주에서'는 당시 만개했던 흑인민권운동을 지원하는 노래였다.

'종들The Bells'는 에드가 알렌 포의 시에 필 옥스가 노래를 입힌 것이고, '영광을 향한 기차여행Bound For Glory'은 우디 거스리의 자서전에서 모티브를 따온 노래다. 모든 모던포크운동의 순례자들이 그렇듯이 필 옥스 역시 대학시절 만난 우디 거스리의 음악과 글을 통해 포크의 미학과 미국의 역사에 대해 눈을 떴다. '영광을 향한 기차여행'은 신출내기 포크 가수로서의 신앙고백이자 예언가에 대한 찬가에 해당하는 노래다.

'운이 없었더라면There But For Fortune'은 존 바에즈의 노래로 유명하지만 필 옥스가 작곡한 노래다. 이 노래부터 첫 번째 레코드의 마지막 노래인 '내가 떠날 때When I'm Gone'까지의 7곡은 모두 그의 세번째 앨범이자 일렉트라 레이블에서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필 옥스 콘서트Phil Ochs in Concert"에서 뽑은 것이다.

"필 옥스 콘서트" 앨범은 커버 뒷면에 8편의 마오쩌뚱 시를 영역으로 실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옥스는 '(이런 시를 쓰는) 사람이 우리의 적이란 말인가?'라는 문구를 함께 적어놓았다. 닉슨이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주석과 악수를 나눈 것은 6년 뒤의 일이다.

이 앨범의 수록곡으로 대중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곡은 '나는 리버럴이에요Love Me, I'm a Liberal'이다. 이후로 필 옥스의 무대에 가장 자주 등장했던 곡이기도 하다.

케네디의 죽음에는 아버지를 잃은 듯이 흐느끼지만 말콤X의 죽음은 이해하지 못하는, 흑인민권운동에는 열정적이지만 그들이 옆집으로 이사오는 것은 꺼려하는, 사회운동에 참여하지만 혁명에는 거부감을 가지는, 노동조합의 간부직에서 공산주의의자들이 축출되는 것을 지지하고 한국전쟁에서 빨갱이들에 맞서 싸우는 것을 지지하는 자칭 '민주당 진보파'들을 꼬집은 노래다.

필 옥스는 산별노조인 '미국방송예술인연맹AFTRA'의 조합원이었다.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포크가수는 많았지만 조합원증을 바지에 넣고 다니는 가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 1965년 학생운동의 중심지였던 버클리캠퍼스에서 열린 베트남반대집회에서 노래하는 필 옥스(무대 위)
두 번째 레코드는 67년 A&M 레이블로 이적한 뒤의 작품들을 담고 있다. 레이블의 교체는 음악 스타일의 변화를 가져왔는데 당시 대부분의 포크가수들이 그랬던 것처럼 포크기타 대신 일렉트릭기타와 완성된 밴드의 지원을 받은 음악으로 전환했다.

다소 저음의 목소리로 경쾌하게 노래하는 목소리가 무기였던 그의 음악은 이제 바로크 스타일의 편곡이 덧붙여졌다. 거주지도 미국 동부에서 캘리포니아로 옮겼다.

두 번째 레코드에서 가장 유명한 곡은 베트남 반전가요인 '전쟁은 끝났다The War Is Over'이다. 필 옥스가 활동에 변화를 준 67년은 미국사회운동의 주축이 민권운동에서 반전으로 이전하고 있던 시점이다. 그는 여전히 무대뿐만 아니라 각종 집회와 행진에서 기타를 메고 노래를 불렀는데 '전쟁은 끝났다'는 일반 시위대의 입에서도 자주 불리어졌던 노래였다.

1975년 4월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기 직전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열린 거의 마지막 반전집회에서 필 옥스는 10만명의 시위대 앞에서 마지막으로 이 노래를 불렀었다. 운동의 종결을 상징하는 의식으로는 손색이 없는 무대였다. 그의 마지막 무대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 앨범의 제목으로 사용되기도 한 노래 '명성의 코드Chords Of Fame'는 진실을 추구하지 않고 부와 명예를 위해 노래하는 상업적인 음악을 경계하는 곡이다. '인디애나의 짐 딘Jim Dean of Indiana'은 어린 시절 그의 스크린 영웅들 중 한명이었던 제임스 딘의 무덤을 직접 찾아가서 만든 노래다.

마지막 곡인 '노래는 이제 그만No More Songs'은 사실상의 마지막 앨범인 1970년의 "그레이티스트 힛츠Greatest Hits"의 끄트머리에 실려 있다. 앨범은 제목과 달리 새로 발표하는 곡들을 모은 역설적인 유머였다. 필 옥스는 미국의 구세대와 신세대, 보수와 진보, 과거와 미래가 정면충돌했던 1968년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가했다. 그는 집회장 안으로 진입해 항의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거리에서 체포돼 잠시 구류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은 그를 더욱 급진적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투쟁의 실패는 그를 극한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1970년 그는 초기 록큰롤을 흉내내는 음악스타일로 대중 앞에 섰다. 낡은 음악방식에 대한 회의와 대중성에 대한 고민, 운동에 대한 부담감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행동이었다. 그의 '변신'에 대해 찬반양론이 일었지만 논란보다는 외면의 비중이 더 높았다.

이런 복잡한 심경과 미래에 대한 불안한 예언을 담은 노래가 '노래는 이제 그만'이다. 이 노래는 이렇게 끝맺는다. "이봐요, 집에 아무도 없는게요? 미안합니다. (...) 목소리는 모두 사라지고, 이제 더 이상 노래는 없는 거로군요."

* * *

필 옥스에게는 중요한 일화가 하나 있다. 1972년 세게 여행을 떠났던 그는 칠레에서 빅토르 하라와 우연히 만나 몇 일간 함께 여행을 했다. 이때의 만남은 빅토르 하라의 부인 조안 하라가 쓴 전기 "끝나지 않은 노래"에 기록되어 있다.

1973년 9월 칠레 인민연합 정부가 쿠데타로 무너지고 빅토르 하라가 반란군에 의해 살해당했을 때 옥스는 아프리카를 여행 중이었다. 그해 말 귀국한 옥스는 즉시 죽은 친구와 대통령동지를 위해 자선공연인 "살바도르 아옌데와의 저녁An Evening with Salvador Allende"를 기획했다.

1974년 5월 뉴욕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자선공연에는 그를 비롯해 전 법무장관인 램지 클라크와 피트 시거, 밥 딜런, 알로 거스리 같은 이들이 무대에 올라 칠레의 투쟁에 연대하고 쿠데타군을 비난했다. 이 무대를 시작으로 세게 각지에서는 칠레연대콘서트가 개최됐다.



I Ain't Marchin' Any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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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은 가볍다. 그의 그림에는 경쾌하게 달리면서 그것을 마주한 자들을 강한 속도로 그 경쾌함 속으로 빨아들이는 마력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가볍지만 강렬하다. 그것은 아마도 삶과 예술에 대한 반 고흐의 진지함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씨뿌리는 사람, 추수하다 잠시 쉬는 농부부부, 우편배달부 등 인민들의 다양한 삶의 공간들 또는 인민들의 삶의 결이 새겨진, 그러나 결코 짓눌리거나 찌들지 않은 농부와 노동자들의 초상들을 보라. 그들의 모습에는 무엇인가 생성의 빛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손에 잡힐 듯한 검은 어둠에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의 얼굴은 너무나 밝게 보이며, 그로 인해 그들을 둘러싼 어둠조차 따뜻하고 가볍게 느껴진다.

그에게 그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래는 한국일보에 실린 "반 고흐의 삶과 예술" 그리고 "반 고흐의 연보와 어록"이다.


세계가 가장 사랑하는 불멸의 화가 반 고흐의 삶과 예술

밀레 흠모 농민화가로 화단 데뷔… 파리서 인상파 접하고 빛·색 대변화
고갱과의 예술적 영감 교류·갈등·자해·정신병 고통속 열정 화폭에



열세살의 고흐
고흐가 구애했으나 냉혹하게 거절당한 외사촌 누이 케이보스와 그녀의 아들 얀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남부 준데르트에서 태어났다. 화가가 되기 전 상업화랑의 직원, 교회의 보조교사, 책방 점원, 전도사 등 여러 직업에 종사했다. 1880년 스물일곱의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브뤼셀, 헤이그, 에텐, 드레덴 등지를 전전하며 화가 수련을 쌓아나갔다.

반 고흐가 가장 흠모한 화가는 밀레였다. 1883년 12월 경제적 어려움으로 목사인 아버지의 새 부임지 누에넨으로 돌아온 그는 밀레를 본받아 농민화가가 될 것을 결심했다. 땅에서 땀 흘리며 노동하는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꼈던 그는 노동하는 사람들의 정직한 삶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내려 노력했고, 1885년 <감자 먹는 사람들>로 그것을 증명했다.

1886년 2월, 반 고흐는 새로운 자극을 위해 파리로 떠난다. 파리에 오기 전, 네덜란드 그림과 프랑스 사실주의 회화 정도만을 알았던 그는 파리에서 인상파의 밝은 그림들을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파리에 도착한 즉시 자신의 갈색조 팔레트가 얼마나 구식인가를 깨달은 것이다. 인상파 미술을 접하면서 그의 팔레트는 점점 밝아졌으며, 붓터치는 강렬한 색채로 진동했다.

파리에서 반 고흐는 인상파의 빛과 색을 다루는 방법과 신인상파의 점묘기법을 이용해 도시의 카페, 거리, 센강 주변 풍경 등을 자유롭게 그려나갔다. 파리 시대는 그만의 독자적인 미술을 만들기 위한 예술적 실험기였다.

반 고흐에게 파리는 인상파라는 새로운 미술의 세계에 눈뜨게 해주었지만 추운 겨울과 과로, 퇴폐적인 생활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인 피로는 그로 하여금 다시 파리를 떠나고 싶게 만들었다. 인상파 미술의 극복과 자기만의 새로운 미술의 완성, 평생의 목표였던 농민미술의 추구, 자연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그는 1882년 2월 파리를 떠나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향했다.

아를에 도착한 그는 하루종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그림의 주제를 찾았고 아무데서나 그림을 그렸다. 심지어 밤에도 거리에 나가 그림을 그렸다. 식사를 주문하는 일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동생 테오와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는 일로 모든 시간을 보냈다. 아를에서 반 고흐는 밝고 강렬한 색채, 명료하고 간결한 구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자신만의 회화세계를 구축해나갔다.

아를은 반 고흐가 가난으로 고통받는 동료작가들과 함께 작업하며 예술적 영감을 나누는 화가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실현하려던 장소다.

이 꿈을 위해 그는 고갱, 베르나르 등에게 편지를 보냈다. 1888년 10월 어렵게 반 고흐의 요청을 수락한 고갱(1848~1903)이 아를에 도착했다. 세계미술사에서 가장 극적인 만남의 순간이었다.

이 빛나는 두 거장은 아를의 <노란 집(The yellow house)>에서 두 달 동안 같이 생활하면서 함께 그림을 그렸고 예술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강렬한 개성을 지닌 두 대가는 서로 다른 예술관과 생활태도의 차이로 갈등을 겪다가 급기야 1888년 12월 23일 고흐가 면도날로 고갱을 위협하고, 자신의 왼쪽 귀를 자르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귀를 자른 사건은 단순히 그를 육체적으로 괴롭히는 것에서 끝난 일이 아니었다. 이 사건은 향후 그의 일생을 결정하는 사건이 되었다. 이후 고흐는 아를 시민에게서 미치광이로 낙인찍혀 독방에 갇히고, 1889년 5월 생레미의 생폴 드 무솔 요양소에 입원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열정적으로 자연을 화폭에 담아냈다.

생의 말기, 심각한 정신병 증세를 겪던 고흐는 치료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1890년 5월 가셰 박사가 있는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향한다.

오베르의 자연에 만족한 고흐는 정신적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집중력을 지니고 작업하면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감동적인 그림들을 제작했다. 1890년 고흐가 파리의 앙데팡당 전에 <아이리스>와 <별이 빛나는 밤에>를 전시했을 때, 인상파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고흐의 성공을 확신했다.

그러나 고흐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자신의 성공을 보지 못한 채 1890년 7월 29일 오베르 쉬르 우와즈의 밀밭에서 자신을 향해 권총을 쏘았다. 세상이 그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고흐가 온다] 불꽃같았던 37년…반 고흐 연보

열아홉살의 고흐
△1853년 3월30일 네덜란드 준데르트에서 장남으로 출생

△1857년 동생 테오 출생

△1869~75년 구필 화랑의 헤이그ㆍ런던 지점 근무

△1877년 신학 공부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이주

△1878년 신학대 입시 낙방 후 벨기에 보리나주 탄광에서 전도사 재직

△1879년 광부들의 근로 조건 개선 위한 시위 선동으로 전도사직 해고

△1880~85년 그림 입문. 네덜란드 에텐ㆍ헤이그 등에서 ‘감자 먹는 사람들’ 등 어두운 색채의 초기작 그림

△1886~88년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테오와 함께 살며 인상파 화가들과 교유. 밝은 색채의 ‘자화상’ 등 그림

△1888~89년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옮겨 ‘노란 집’ 등 그림. 고갱과 함께 지내다 심한 언쟁 후 귀를 자름

△1889~90년 생레미의 생폴 요양원에 입원. ‘아이리스’ 등 그림

△1890년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옮겨 ‘까마귀 나는 밀밭’ 등 그림

△1890년 7월27일 오베르 밀밭에서 권총 자살 시도

△1890년 7월30일 사망

△1891년 1월25일 테오도 신경쇠약으로 인한 건강악화로 사망


반 고흐의 어록…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나는 풍경화가는 아니다. 내가 풍경을 그릴 때도 그 속에는 늘 사람의 흔적이 있다.(1882년 3월14~18일)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기이한 사람, 그런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주겠다. 그것이 나의 야망이다.(1882년 7월21일)

◆풍경이 나에게 말을 걸었고, 그것을 빠른 속도로 받아적었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준 방법이나 체계 안에서 습득한 인습적인 언어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에서 나온 언어다.(1882년 9월3일)

◆나는 이 세상에 빚과 의무를 지고 있다. 나는 30년간이나 이 땅 위를 걸어오지 않았나! 여기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림의 형식을 빌어 어떤 기억을 남기고 싶다. 이런저런 유파에 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진정으로 표현하는 그림을 남기고 싶다.(1883년 8월4~8일)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캔버스가 그를 두려워한다. (1885년)

◆그림을 그리는 일은 내게 구원과 같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불행했을 테니까.(1887년 여름~가을)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1888년 5월)

◆그러나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값과 생활비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1888년 10월24일)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네가 보내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1889년 1월28일)

◆요즘은 내가 아프기 때문에 너무 괴로워해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화가라는 초라한 직업을 흔들림 없이 유지해야 한다고 다짐한다.(1889년 9월5~6일)

◆화가는 눈에 보이는 것에 너무 빠져 있는 사람이어서, 살아가면서 다른 것을 잘 움켜쥐지 못한다는 말이 나를 슬프게 한다.(1889년 12월)

◆그래, 내 그림들, 그것을 위해 난 내 생명을 걸었다. 그로 인해 내 이성은 반쯤 망가져버렸지. 그런 건 좋다.(1890년 7월29일 고흐가 사망시 지니고 있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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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가 온다, 가을이 설렌다

국내 최초·최대 개인전 24일 개막
'자화상' '아이리스' 등 67점 모아… 서울시립미술관서 4개월간 전시


출처 : <한국일보> 2007/11/06 박선영 기자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1887년 작, 유화, 40.9x32.9c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 소장. 고흐가 프랑스 파리에서 인상파 화가들과 교유하며 밝은 색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던 시절 그린 대표적 작품이다.
마음껏 설레도 좋다. 보는 이의 가슴에 뜨거운 감동의 화인(火印)을 새긴 모든 미술 애호가들의 첫사랑,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그가 서울에 온다.

섬광처럼 짧은 삶을 살고 신화 속으로 걸어 들어간 비운의 천재화가 반 고흐의 시기별 대표작을 한데 모은 ‘불멸의 화가-반 고흐’전이 24일부터 내년 3월16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다.

한국일보사와 서울시립미술관, KBS가 공동주최하는 이 전시는 반 고흐의 유화 대표작 45점과 드로잉 및 판화 22점 등 총 67점을 선보이는 국내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회고전으로, 전시 보험가액만 총 1조 4,000억원에 이르는 전무후무한 전시다.

그동안 반 고흐의 전시는 늘 부분으로만 존재해왔다. 프랑스 파리의 그랑팔레에서 열렸던 반 고흐전은 고흐가 파리에 머물던 시기(1886-1888)의 작품들로만 구성됐고, 2000년 미국 보스턴미술관에서 열린 고흐 특별전도 자화상만을 모은 것이었다. 200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반 고흐전도 드로잉만으로 구성됐다.

반 고흐가 남긴 879점의 작품 중 절반이 세계 각지에 수 점씩 흩어져 있는 탓에 시기별 작품을 망라해 한데 모으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고흐 회고전의 개최는 월드컵 유치에 버금가는 국가적 경사로 평가받는다. 반 고흐의 시기별 유화 대표작을 45점이나 모은 대규모 전시가 서울에서 열린다는 것은 한국의 국가적ㆍ문화적 위상이 그만큼 제고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대규모 전시는 반 고흐의 고국 네덜란드에서 사망 100주기를 기념해 1990년 열린 회고전 이후 처음이다. 작품들은 반 고흐가 남긴 작품의 절반가량을 소장하고 있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과 오텔로의 크롤러뮐러 미술관에서 빌려왔다.

이번 전시의 질적 수준은 반 고흐의 5대 걸작에 속하는 파리 시절의 ‘자화상’과 생레미 요양소에서 그린 ‘아이리스’가 선보인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두 작품은 보험가액만 각각 1,000억원에 달하는 걸작 중의 걸작들이다. 이중 ‘아이리스’는 반 고흐 미술관의 ‘보배’로 한번도 해외에 반출된 적이 없는 작품이다. 이밖에도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 ‘씨 뿌리는 사람’, ‘노란 집’, ‘우체부 조셉 룰랭’ 등 한국 관람객의 가슴을 울렁이게 할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모든 그림에는 원작의 아우라가 있지만, 반 고흐의 유화만큼 깊은 정서적 울림을 주는 그림은 없다. 그는 눈이 아니라 가슴으로 세계를 보고, 붓이 아니라 감정으로 그림을 그렸다. 겹겹이 쌓아 올린 물감과 휘몰아치는 격정의 붓터치, 밝은 보색 속에 꿈틀대는 색채의 힘으로 반 고흐는 인간을 위로한다. 절망과 광기 앞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반 고흐의 작품을 직접 본다는 것은 그의 숨결과 손길을 함께 호흡한다는 것을 뜻한다.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바타이유는 반 고흐를 일러 “태양을 훔쳐 화폭에 옮긴 프로메테우스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태양의 화가 반 고흐는 신화 속에서 부활해 지지 않는 태양이 되었다. 그 태양이 이제 서울에서 떠오른다. 전시 문의 1577-2933


[고흐가 온다] 전세계서 러브콜 명작 67점 한자리에

24일 개막하는 반 고흐전의 의미…90년 100주기展 이후 세계 최대규모…'아이리스'는 이번이 해외 첫 나들이


고흐의 동생 테오
고흐가 귀를 자른 후 머물렀던 생레미 요양소의 신문광고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비운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가난과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자살로 삶을 마감한 그의 불우했던 생애는 이제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그는 붓과 물감이 아니라 영혼과 내면으로 그림을 그린, 지상에 유배된 천상의 화가였기 때문이다. 절망을 무릅쓰고 터져나오는 희망의 아우성, 슬픔과 고통을 품고 일어서는 생명의 약동은 반 고흐가 아니면 선사할 수 없는 지복의 선물이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24일 개막하는 ‘불멸의 화가-반 고흐’전은 한국 미술전시의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전시다. 전 세계가 가장 편애하는 화가인 반 고흐의 유화 45점과 드로잉 및 판화 작품 22점 등 총 67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국내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반 고흐 회고전이다.

이는 1990년 작가 사망 100주기를 기념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이후 최대 규모다. 미술 강국 프랑스에서도 반 고흐는 그룹전으로만 소개됐고, 일본에서도 2005년 반 고흐의 작품 35점을 다른 작가들과 묶어 소개한 기획전이 열렸을 뿐 개인전은 열린 적이 없다.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들은 반 고흐 미술관과 네덜란드 오텔로의 크롤러뮐러 미술관에서 빌려온 것들이다. 고흐는 화가로 산 10년 동안 879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절반이 이 두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나머지 작품들은 세계 각지에 몇 점씩 뿔뿔이 흩어져 있다.

전시는 반 고흐의 삶의 궤적을 따라 연대기순으로 구성된다. 가난한 농민사회의 처참한 생활상을 어두운 화폭에 담은 초기 네덜란드 시기(1880-1885), 인상파의 빛을 발견하면서 초기의 어두운 색채에서 벗어나 밝은 색채를 도입하기 시작하는 파리 시기(1886-1888), 프랑스 남부의 강렬한 채광을 통해 색채의 신비를 마음껏 구사한 아를 시기(1889), 정신병원에서 예술혼을 불태우며 자연을 묘파한 생레미 시기(1889-1890), 자살하기까지 생의 마지막 79일을 보내며 80점의 풍경화를 그린 오베르 쉬르 우아즈 시기(1890) 등 5개 영역으로 나뉘었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는 파리 시기의 ‘자화상’과 생레미 시기의 ‘아이리스’. ‘감자 먹는 사람들’, ‘해바라기’, ‘오베르 교회’와 함께 반 고흐 5대 걸작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국내 전시사상 최고인 1조 4,000억원의 전시 보험가액 중 ‘자화상’과 ‘아이리스’의 보험가액이 각각 1,000억원에 달할 정도의 걸작들이다. 특히 ‘아이리스’는 반 고흐 미술관 밖으로는 한번도 반출된 적이 없는 작품으로 서울이 최초의 해외 나들이다.

이밖에 반 고흐의 또다른 대표작인 ‘씨 뿌리는 사람’과 ‘노란 집’, ‘우체부 조셉 룰랭’,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 등도 선보인다. ‘감자 먹는 사람들’과 ‘슬픔’은 판화로 소개된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서순주 전시 커미셔너는 “반 고흐전은 전 세계에서 항상 대여요청이 쇄도하기 때문에 한 국가에서 100년에 한번 열릴까말까 한 미술 전시의 월드컵”이라며 “반 고흐의 삶과 예술을 총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뜻 깊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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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성과 대중, 갈림길에 서다

대학신문 2007년 11월 04일


진중권 “근대성의 부족”, 천정환 “근대성의 포화”
한국 대중, ‘파시스트적 군중’과 ‘자율주의적 다중’의 양면성 보여

지식인, 현상의 원인을 끝없이 합리적으로 보여줘야
계몽의 시대는 끝났지만 계몽의 과제는 계속된다



지난해 발생한 일명 ‘황우석 사태’는 한국 문화의 병리적 측면을 총체적으로 보여준 문화적 ‘거울’이었다.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인 올해 8~9월에는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워」와 관련된 논쟁이 벌어져 평론가들에 대한 대중의 거센 비판이 일기도 했다. 이처럼 외국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현상, 대중현상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 현상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최근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두 사람의 문화평론가, 진중권과 천정환이 이 물음에 답하고자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한국의 근대성과 대중, 그리고 지성을 열쇳말 삼아 대담을 진행했다. 지난달 29일 서울대 두레미담에서 열린 대담은 근대성에 대한 이견으로 초반부터 후끈 달아올랐다.

사회 : 원선우 편집장
정리 : 서형준 부편집장
사진 : 서유경 사진부장
속기 : 장서연 수습기자


▲ 지난 29일(월) 서울대 두레미담에서 진행된 대담장면.


▲ 진중권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좁은 의미의 미학을 넘어
사회학적 존재미학을 탐구 중이다.


▲ 천정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의 근대 문학에 대한
문화론적 연구가 주된 관심사다.


사회(원선우 편집장): 오늘날의 한국 문화에 대해 논의하려면 한국의 근대성 전반에 대한 평가가 선행돼야 할 것 같다.

천정환(이하 ‘천’) : 근대를 합리적인 것, 인권과 보편적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 더불어 타자에 대한 폭력과 제국주의, 인종주의 등의 이면도 갖고 있는 것이라 정의한다면 한국의 근대성은 포화 수준이라고 본다. 포화된 근대성의 폐해가 최근에 발현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시 말해 근대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와 국민국가의 권력이 도를 넘어서 (사람들의) 자치에 대한 생각을 빼앗아 버렸다. 그것이 가장 문제라고 생각한다.

진중권(이하 ‘진’): 나는 근대성의 개념을 제국주의로까지 확장하지 않고 철학적 프로젝트로 한정해서 본다. 바로 자율적 인간을 만드는 프로젝트다.

서구에서는 자본주의의 발달과 시민의식의 성숙이 함께 일어났지만 한국은 물적 토대와 상부구조의 발달이 따로 진행됐다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정치사회에서 근대성은 4ㆍ19, 5ㆍ18 등을 통해서 차츰 성장해 지금은 상당한 수준에 다다랐지만 더 높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들은 민주화 혁명을 이뤄냈지만 아직도 산업화시대의 군사독재의 잔재, 즉 집단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해 개인이 충분히 자유롭지 못하다.

미디어의 관점에서도 볼 필요가 있다. 근대는 기본적으로 문자문화인데, 한국은 문자문화로의 진입이 비교적 늦었다. 해방 이후에도 문맹률이 90%에 달했지 않나. 또 서구에서는 500여년에 걸쳐 서서히 이뤄진 문화 변화가 한국에서는 50여년 만에 압축적으로 이뤄졌다. 이 때문에 문자문화가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영상문화 시대에 도달하면서 문자문화가 쇠퇴해 버렸다.

천: 1930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문맹률은 78% 정도였으며, 해방 이후 조사에서는 60% 정도로 변화했다는 점은 먼저 지적하고 싶다. 문자문화 전통이나 서구의 개인주의적 전통이 한국에 결여돼 있었다는 점은 수긍한다. 하지만 이는 근대성의 결여나 결핍 때문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근대성의 이면들, 그늘들 때문이다.  (월드컵 응원에서 보듯) 사회 전체적인 동시성이 무척 높다든지, 계속되는 개발과 중앙집중, 한국적인 가족주의, 민족주의 등 한국사회가 계속 처할 수밖에 없는 질곡들이 근대성의 부정적 측면들을 증폭시키고 있다. 시민사회를 형성시켰던 서구의 근대조차도 사실 내면을 살펴보면 다른 사회나 식민지에 대한 폭력이라든지, 여성이나 노동자 계급에 대한 폭력을 수반하면서 이뤄졌다는 점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

진 : 가장 근대적인 현대 서구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현상을 가리키면서 그것을 왜 근대성이라고 표현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근대성 자체가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한다거나 폭력으로 연결된다거나하는 식의 탈근대 담론에 찬성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근대의 탓으로 돌려버리면 안 된다. 칸트나 데카르트, 경험주의 철학에 꼭 제국주의가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제나 나치를 보면 자신들은 근대적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철저하게 구술문화와 같은 봉건적인 이데올로기를 이용했다. 야만적인 문화가 근대적인 기술과 결합해서 제국주의가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시대는 잘못이 없다. 사람이 잘못한 것이다.

천 : 자본주의와 그에 결합하는 국민국가가 문제 아닌가?

진 : 국민국가와 자본주의 자체도 식민주의를 함축할 필요는 없다. 로마는 자본주의 이전의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복전쟁, 노예, 속주(屬州)가 있지 않았나. 중국도 마찬가지다. (19~20세기에는) 서구에서 식민주의 경향이 기술과 결합돼 전세계적으로 확대됐다는 차이만 있다. 따라서 제국주의나 야만성의 문제를 근대성의 포화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됐다고 본다.

▲ 지난 2002년 한ㆍ일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팀을 응원하는 사람들. 한국의 근대성과 대중은 ‘군중’과 ‘다중’의 길 중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사진제공 : 로이터 통신)



사회: 이제 다른 열쇳말인 대중으로 넘어가보자. 근대성의 문제성과 대중은 불가분의 관계인데, 2007년 한국의 대중은 어떤 사람들로 이뤄져 있고, 대중의 속성은 무엇으로 볼 수 있는가?

진 : 인민ㆍ민중과 다르게 대중은 대중매체와 더불어 등장했다고 본다. 하나의 원본으로 수십만의 복사본을 만들 수 있는 기술, 그리고 그런 복사본을 소비ㆍ향유하는 사람들을 대중으로 정의한다. 한국의 경우 대중이 인터넷과 더불어 부각된 것 같다.

대중을 흔히 엘리트 그룹과 분리시키는데, 나는 모든 사람이 대중이라고 본다. 나도 특정 부문에서는 전문성을 갖고 있지만, 내 분야를 넘어서면 대중이 된다.

천 : 그 말에 동의한다. 실제로 대중현상의 ‘외부’는 존재하기 힘들다. 대중현상은 미디어, 국가 ,자본에 의해 사람들이 군집화된 현상, 어느 순간 특정 사건에 쏠리는 현상을 말한다. 이때 대중 안에는 노동자, 여성, 청소년, 많이 배운 사람, 재산이 많은 사람 등 다양한 사람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계급이나 젠더의 차이를 흐린 채 대중이란 말을 사용한다면 이 개념을 잘못 쓰고 있는 것이다.

진 : 대중은 하나의 본질만을 갖는 집단이 아니다. ‘황우석 사태’ 때나 이번 「디-워」 논쟁에서 볼 수 있듯, 대중은 두 가지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듯하다. 엘리아스 카네티가 말한 파시스트적 ‘군중’의 길과 안토니오 네그리가 원하는 자율주의적 ‘다중’의 길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어 ‘황우석 사태’ 때의 브릭(BRIC, 생물학연구정보센터)은 인터넷이 갖고 있는 집단지성의 위력을, 대중의 다중으로서의 가능성을 정확하게 보여줬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항상 소수라는 게 문제다. 다시 말해 다수의 군중화와 소수의 다중화로 대중이 분리되고 있다.

천 : 대중현상에는 항상 위험성이 내포돼 있다. 한 방향으로 확 쏠리는 현상 속에서 희열을 맛보는 사람들, 그리고 그 배후에서 대중을 이용해 자기 권력이나 자본의 이해를 실현시키려는 사람들 때문에 대중현상에는 폭력성이 늘 잠재돼 있다.

진 : 미국에서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 미국인들은 한국인들처럼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행동하지 않았다. 외려 한국인들에게 “너희가 왜 미안해하느냐”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가. 이외에도 독일, 프랑스 같은 나라는 우리 못지않게 발달한 대중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들 나라와 비교해 볼 때 한국사회의 대중현상을 일반적인 대중론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한국적인 습성이다.

사회: 대중의 위험성과 가능성에 관해서는 두 분이 생각을 함께 하는 것 같다. 그러면 한국 대중의 위험성의 사회문화적 배경은 무엇인가?

천 : 한국사회에는 개인이 비판적 이성으로서 역할하는 것을 막는 구조가 있다. 민족주의, 가족주의 같은 집단문화가 바로 그런 구조인데, 이것이 한국의 자본주의 전개과정과 만나 악화된 측면이 있다. 대학 입시에서 자녀가 떨어졌는데 (비판적 개인으로 행동해야 할 자녀 대신)  어머니가 학교에 전화해 “우리 딸 왜 떨어졌죠?”라고 말하는 식이다. 두 번째는 민족적 측면으로, 식민지로서의 피해자 경험이 변형ㆍ재생산되는 것을 이유로 들 수 있다. 세 번째는 지정학적 측면으로, 한국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라는 소위 ‘슈퍼파워’에 둘러싸여 있다. 한국은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우리는 항상 불안해 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온다. 이런 것들이 대중의 위험성을 초래하는 요인들이라고 본다.

진 : 나는 국가권력이 정치적인 통제를 위해서 물적 토대의 근대화만 허용하고 개인의 자유화는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유화된 개인보다는 집단으로 묶어 관리하는 것이 편하니까. 이런 습속이 아직도 남아서 진행되고 있다.

세 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단순히 지정학적으로 판단한다면 우리가 벗어날 길은 없다. (강대국인 러시아 옆에 위치하고 있지만 시민적 합리성을 성취한) 핀란드와 같은 해법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사회: 대중의 위험성에 대한 해법은 무엇인가?


진 : 한국인의 신체 구조를 잘 보는 것이 해법이다. 한국인은 근대적인 군사문화와 전근대적 신화적 의식으로 무장하고 탈근대적인 매체를 이용한다. 그것을 해체시켜야 한다. 이것은 습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싸움이 필요하다. 내가 ‘「디-워」  논쟁에서 대중의 욕을 먹으면서도 끝까지 버텼던 이유는, (집단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개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디-워」 에 대한 부정적인 평들이 등장하지 않았나.

천 : 동의한다. 작은 자치들도 중요하다. 현재 한국사회는 대학이든 회사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적인 장소에서 보수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굉장히 큰 문제이기 때문에 (회사와 학교 같은) 작은 단위에서 자치를 만들어내고, 그들과 연대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젊은 세대들은 경험이 없어서 어떻게 싸워야 할지, 어떻게 연대해야 할지 모른다. 큰 집단을 이뤄서 싸우는 것이 당장 가능할 것 같지는 않고, 작은 싸움을 계속 벌여나가고, 연대의 가치를 만들어 나가는 방향이 좋다고 생각한다.


사회: 그렇다면 대중의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지성(인)이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

진 : 대중들은 뭐가 문제인지에 대한 자기의식이 있어야 한다. 지식인은 “내가 옳다. 내 말 들어라”라는 말 대신에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를 끝없이 합리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우리 신체가 어떻게 구성돼 있으며, 우리는 왜 특정한 행동양식을 보이는 가에 대한 분석들이 대표적인 예다. 이를 통해 대중들이 앞으로 (자신의 신체와 행동양식을) 어떻게 바꿔나가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의식을 심어줘야 한다. 나는 그것을 ‘존재미학적 제시’라고 표현한다.

지금은 예전처럼 지식인이 존경받는 시대가 아니다. 옛날처럼 지식인이 포괄적이고 넓은 층위에서 지성을 대변해서 말하기보다는, 자기 전공분야에서 대중들에게 자기의식을 매개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천 : 계몽의 시대는 끝났지만 계몽의 과제는 계속되고 있다는 말인 것 같은데, 동의한다. 지식이 널리 개방ㆍ공유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지식의 공유를 막는 힘들이 계속 작용하고 있다. 또한 현재 지식인들이 자기 전공지식 외에는 잘 알지 못하고, 지식을 통합하는 능력도 낮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지식 자체나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존경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본다. 진정한 생각들, 진지한 모험들은 존경을 받지 않는가. 진 선생님이 「디-워」 사태에서 다른 한편으로 받았던 많은 격려도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지식인상이나, 레닌주의처럼 외부로부터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의식성을 주입하는 것은 불가능해진 것 같다. 하지만 계속적인 생각의 깨우침이나 연대, 자기의식 가지기는 계속 진행돼야 할 것이다.

진 : 미래의 문맹은 영상을 못 읽는 사람이다. 대중들은 황우석이 제시하는 그림들, 심형래가 제시한 영상들을 다 그냥 믿어버렸다. 그 밑에 어떤 프로그램이 깔려있는지를 보지 못했다.

이제 세계는 이미지가 구성한다. 이미지는 실사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구체적이다. 반면 그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기술은 문자에 기반한다. 복잡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하는 거다. 문자는 점점 더 추상적이 된다. 둘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다. 대중은 이미지만 보고 문자로 된 토대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대중은 이미지를 더 진실한 것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지식인의 역할이 생긴다. 이미지 아래에 숨어있는 의미, 의도, 프로그램 등을 읽어내 대중에게 알려줘야 한다. 황우석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사실 포토샵으로 거짓 영상을 만들어냈다. 포토샵이라니 얼마나 허탈한가? 브릭이 거짓을 밝혀낸 것이다. 이것이 지식인이 해야 할 일이다.


사회: 근대성과 관련한 문제를 살펴봤으니, 근대성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도 성찰해 볼 필요가 있겠다.

진 : 포스트모더니즘, 더 정확히 말하면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철학은 무책임하게, 이론적 섬세성 없이 한국에 들어왔다. 우선 그 이론 자체도 문제가 많다. 독일에서는 비판적 이성(Vernunft)과 도구적 이성(Verstand)을 구분한다. 전자는 목적의 설정에 관한 합리성, 후자는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에 관한 합리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프랑스의 사유체계에서는 레종(Raison)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수렴된다.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이 프랑스에서는 합리성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나가는 거다. 독일 사람이나 독일에서 공부한 나로서는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이 이론은 근대 그 자체, 합리성 그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빠져버렸다.

말하자면 격이 있어야 파격을 할 것 아닌가? 하지만 한국에서는 격을 세워야 하는 상태에서 한국적 상황과는 다른 상황에서 탄생한 파격을 들여왔다. 이러면 격이 없는 것과 같아져버린다. 전근대와 근대가 혼동돼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대결해야 할 지점이 근대를 넘어선 탈근대적인 가치로 설정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실천적 보수로 변했다. 전근대적인 가족주의를 근대 개인주의 극복에 대한 해결책으로 둔갑시키고, 전근대적인 감성을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난센스가 일어난다.

천 : 탈근대주의, 탈식민주의는 아시아ㆍ아프리카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 시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탈식민주의 이론가인) 사이드, 바바, 스피박 같은 사람들이 미국에서 활동은 했지만 그들의 논리는 서구적 중심성을 전복한다는 의의가 있었다. 이는 인정해야 한다. 

진 : 이론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이것이 옳다’는 강한 관념으로 우리와 맞지 않는 이론을 한국에 대입하려 하면 보수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론을 나이브하게 수용한 사람들, 그리고 그 이론을 (불순한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이론의 보수적 수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천 : 한국에서는 박정희식 근대화를 반성하는 탈민족주의, 평화운동론, 생태주의와 같은 흐름들이 탈근대론의 영역에서 이뤄지고 있다. 탈근대론이 갖고 있는 비판적 핵심들을 식민주의나 폭력적 근대화, 국가 폭력의 문제를 반성하는 힘으로 이해해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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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유효한 사르트르의 지식인론
서평 - 변광배 교수(한국외대 불어과)

대학신문 2007년 11월 03일 (토)

▲ 삽화 : 박혜빈 기자  

지식인을 위한 변명
장 폴 사르트르 지음┃박정태 옮김┃이학사┃165쪽┃8천원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Plaidoyer pour les intellectuels)』이 새로 번역ㆍ출간됐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데리다, 푸코, 들뢰즈 등의 이름에 거의 짓눌리다시피 한 상황에서, 20세기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사르트르의 저서 한 권이 드물게 출간됐기 때문이다. 이 책의 출간은 또한 시의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의 발달, 교육환경의 개선, 매체의 발달 등으로 인해 지식인 환경에 커다란 변화가 이뤄진 오늘날에도 과연 40여 년 전에 정립된 사르트르의 지식인론이 유효한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원래 사르트르가 1966년 9월에 일본에서 세 번에 걸쳐 했던 강연을 정리한 것이다. 강연 제목은 각각 「지식인의 위치」, 「지식인의 기능」, 「작가는 지식인인가」였고, 이 세 강연에 후일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지식인의 위치는 애매하다. 지식인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중간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괴물’로서의 특징은 바로 이 위치로부터 도출된다. 물론 지배계급이 지식인에게 거는 기대는 비교적 명료하다. 한 사회의 지배를 목표로 하는 지배계급은 지배 수단의 연구를 위해 전문가들을 양성해야 한다. 하지만 이 전문가들은 지배계급의 ‘필요악’이 될 수도 있다. 그 내력은 이렇다. 지배계급은 전문가들이 될 자들을 선발하고 교육시키는 일을 담당하게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의 선발과 교육 과정은 전적으로 지배계급의 통제 하에 이뤄진다(가령 최근 국내에서 일고 있는 로스쿨 정원 조정 문제를 생각해보자). 지배계급에 의해 부과되는 교육 과정을 거쳐 그들은 점차 각 분야의 ‘지식 전문가들’로 변모하게 된다. 지배계급은 그들에게 지배를 위한 효율적인 수단을 개발하고, 또 그들이 오로지 통치 수단으로만 존재해 줄 것을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이 지식 전문가 중 일부는 지배계급의 기대를 등지고 자신들의 사회적 모순을 깨달으면서 점차 위험한 인물, 곧 지식인으로 변해간다. 그러니까 지식인은 지식 전문가들로부터 탄생하는 것이다. 지배계급에 의해 선발돼 이 계급의 보존과 강화를 위한 ‘집 지키는 개’가 되는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일부 지식 전문가들은, 점차 자신들이 발견하는 진리와 법칙이 갖는 ‘보편성’이 지배계급의 ‘특수성’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가령 의사는 자신의 의학 지식이 전 인류를 위한 것이지 지배계급의 구성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물론 지식 전문가들이 진정한 지식인이 되지 못하고 ‘사이비 지식인’이 되어 지배계급의 주구(走狗) 노릇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부 지식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연구 영역에서 발견한 보편적 법칙과 진리를 사회와 모든 인간들에게 확대하려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진정한 지식인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지식인은 이와 같은 태도 속에서 그 자신의 모순이 한 사회 전체가 당면한 객관적 모순의 한 특수한 계기임을 깨닫게 되고, 자기 자신과 타인을 위해 이러한 모순과 투쟁하는 모든 인간들, 가령 피지배계급에 속하는 자들과 연대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피지배계급은 자기 계급 출신의 지식인 ―사르트르는 이 지식인을 ‘유기적 지식인(intellectuel organique)’이라고 부른다― 을 아직까지 확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지배계급이 주축이 된 억압과 폭력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인식’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 있다. 즉 피지배계급은 이른바 자기 계급에 대한 ‘계급의식’과 ‘객관적 정신’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피지배계급과 진정한 지식인과의 연대 가능성이 자리하고, 이에 따라서 지식인의 임무가 설정된다. 피지배계급은 지식인을 당연히 불신한다. 왜냐하면 지식인은 지배계급의 앞잡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지식인은 항상 자기가 속한 사회적 위치에 대해 반성적 성찰을 하면서 피지배계급과 연대하고, 나아가서는 지배계급에 맞서 공동으로 투쟁해야 한다. 또한 피지배계급에서 자생적으로 유기적 지식인이 배출되도록 도와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지식인은 피지배계급이 자기 계급에 대해 ‘객관적 정신’을 확보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식인은 자신의 보편주의가 어떤 한 계급의 특수주의에 종속되는 것을 극구 거부해야 하고, 또한 자신의 보편주의가 미래에 실현될 보편주의가 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의 편에 서서 투쟁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지식인은 ‘인간의 해방, 인간의 보편화’라고 하는 ‘근본적인 목표의 수호자’가 돼야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사르트르는 제3강연 「작가는 지식인인가」`에서 바로 이와 같은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갈등이라는 시각을 중심으로 지식인으로서의 작가의 위치를 규정하고 있다. 작가는 보통의 지식 전문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한다. 지식 전문가들이 정확한 정보 전달을 위한 소통(communication)을 중요시하면서 언어를 사용하는 반면, 작가는 소통 불가능한 것(l’incommunicable)의 소통을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 ‘전체’를 전달해야 한다는 ‘보편적 욕구’와 이 욕구를 오직 자신의 ‘체험’이라는 ‘특수적 차원’으로밖에 전달할 수 없다는 사실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된다. 결국 사르트르가 보기에 작가는, 글쓰기라는 행위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보편주의와 특수주의라는 갈등에 노출돼 있다는 면에서, 뼛속까지 지식인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한 권의 책이 여러 차례 번역되면 더 나은 번역본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은 그만큼 커진다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나중에 번역하는 사람은 기존 번역본을 참고할 수 있으며, 또한 그 동안 이뤄진 연구 성과 역시 참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2007년판 『지식인을 위한 변명』 역시 상당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기존 번역본에서 가끔 눈에 띄었던 오역을 바로 잡으려고 한 점, 새로운 번역어를 채택하려고 한 점, 원문의 편집을 그대로 따르려고 한 점, 그리고 자연스러운 번역 문체를 바탕으로 가독성을 한껏 높이려고 한 점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더해 2007년판에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이 눈에 띈다. 우선 이 2007년판은 저작권을 얻어 정식으로 번역된 최초의 판본이라는 점이다. 그 다음으로 이 책이 강연회의 소산이라는 점을 감안해 강연회의 현장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하고자 ‘강연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많은 주(註)가 첨부돼 있다는 점이다. 이 주는, 독자들이 얼마 안 되는 분량이지만 결코 녹록치 않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분명 이 점이 2007년판의 최대 강점일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장점과 특징에도 불구하고 2007년판에서 한두 가지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첫째, 이 저서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인 ‘l’universel singulier’에 대한 것이다. 역자는 이 용어에 대해 ‘특이한 보편자’라는 역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개별적 보편자’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당하지 않을까 한다. 둘째, 주(註)와 관계된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주를 달아준 것은 분명 이 2007년판의 최대 강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들에 대해서는 정작 주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개별적 보편자’도 그렇거니와 ‘내화된 외성의 순간과 내성의 재외화의 순간’ 등이 그것이다.

2007년판의 ‘옮긴이의 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세계화의 물결이 아무리 도도하다 할지라도, 또한 산업기술이 아무리 발달했다고 할지라도, 지금 지구상에는 지배ㆍ피지배계급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에 대한 억압은 이 저서가 씌어졌던 1966년보다 더 음흉하면서도 더 폭력적으로 자행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모순 위에 지식인의 존재론적 지위를 마련하고 있는 사르트르의 지식인론은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이며, 또한 그런 만큼 이 책의 새로운 번역 출간의 의의는 더욱 크다고 하겠다.



필자 변광배 교수
한국외대ㆍ불어과
프랑스 몽펠리에3대학에서 「사르트르의 극작품과 소설에 나타난 폭력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랑스인문학 연구모임 ‘시지프’를 이끌고 있다. 주요 저서로 『사르트르와 20세기』, 『장 폴 사르트르 -시선과 타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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