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심적 역사의 해체를 위하여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3>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프레시안> 2007-10-30

 
<1> : "역사는 객관적으로 쓰여지지 않는다"
<2> : 유럽중심주의 역사학은 누가 만들었나

4) 과장하거나 감추거나 왜곡시킨 세계사

서양사 체계는 어떻게 짜여졌나
  
  이렇게 서양사는 기본적으로 근대에서의 유럽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형태로 짜여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고대로까지 확장된다. 서양 사람들이 근대에 이룬 자신들의 우월성을 고대로까지 확대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은 고대부터 다른 대륙과는 무엇인가 달랐고 우월한 문화를 갖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것이 중세, 근대를 지나 현대까지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서양 고대사에서 중요한 것은 물론 그리스 · 로마 문명이다. 그리스는 인간중심적이고 합리적인 문명으로 인류사를 새로운 단계로 올려놓았다고 생각한다. 철학이나 문학, 예술, 정치 등 모든 면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루었고 그것이 근대 서양문명의 정신적 기초를 만들었다.
  
  로마는 대제국을 이루고 번영하는 경제와 높은 문화수준을 이루었다. 로마는 사유재산권을 확립함으로써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고 로마법을 통해 서양에 법의 지배를 가져오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로마의 공화정도 근대 유럽의 민주정치 발전에 공헌을 했다. 기독교의 수용도 그 후 유럽 문화의 발전과 관련해 중요한 요소이다.
  
  중세에서는 자유로운 도시의 성립이 중요하다. 그것이 근대 유럽에 정치적 자유를 가져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을 성장시킴으로써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데에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중세에는 기독교가 중요하나 근대에 들어와서는 세속적 합리성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먼저 14-16세기의 르네상스는, 중세의 기독교 문화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고대 문명을 재발견함으로써 근대 유럽문명의 모태를 만든 사건으로 높이 평가된다. 그것이 근대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도 중요하다. 그것이 개인성의 감각을 가져다주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신교파의 하나인 칼뱅파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발전시킴으로써 자본주의의 정신적 기초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의 발전은 유럽인들의 창의성, 합리적인 태도, 근검절약에 의한 자본축적과 관련하여 설명된다.

▲ 종교개혁을 시작한 독일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 1546)

  17세기의 과학혁명은 근대 과학을 발전시킨 혁명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과학의 발전과 그에 다른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근대에 와서 유럽이 다른 세계보다 우월해지는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계몽사상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유럽인들을 무지와 몽매, 종교의 광신에서 벗어나게 하여 세속적이고 합리적이며 자유로운 세계관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사회를 더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형태로 조직할 수 있게 되었다.

▲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그림의 하나로 알려진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1831년작. 캔버스에 유채 260 ×325cm. 루브르 미술관 소장, 그러나 이 그림은 프랑스의 1830년 혁명을 그린 것이나 보통 프랑스 대혁명을 그린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프랑스 혁명은 유럽의 정치와 사회, 경제, 문화 모든 것을 근대적인 형태로 재조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다. 말하자면 프랑스 혁명은 근대사로 넘어가는 분수령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산업혁명은 기계와 동력을 결합시킴으로써 인간의 물질적 생산력을 크게 확대했고 현대의 물질문명을 이루는 기본적인 바탕을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이 모든 사건들은 전적으로 유럽인의 창의성과 노력의 산물이며 이것들에 의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찬란한 서양문명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사실의 과장, 은폐, 왜곡
  
  위에서 말한 사건들은 서양 역사가들에게 유럽중심적 서양사나 세계사를 쓰기 위해 반드시 고려해야만 하는 전략적인 거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설명들이 반드시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이 과장, 은폐, 왜곡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경우들을 하나씩 들어 보자.
  
  프랑스 혁명은 그 역사적 의미가 과장된 좋은 예의 하나이다. 전통적인 서양역사가들이 프랑스 혁명의 의미를 크게 부풀려 근대 세계사의 정점에 놓으나 그것은 실제의 역사 현실과는 잘 맞지 않는다.
  
  혁명은 공화정을 수립했으나 민주주의적은 아니었고 초기부터 공포정치의 독재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혁명이 봉건적 지배계급을 일소한 것도 아니다. 프랑스의 토지귀족 계급은 나폴레옹 시대인 1806년 이후 다시 힘을 되찾았고 19세기 내내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혁명과 자본주의의 발전은 별 관계가 없다. 혁명이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근대적 요소들도 장기적인 과정의 일부이다.
  
  또 프랑스는 전 세계에 자유와 평등을 가져오기는커녕 1960년대까지도 저질의 식민주의를 통해 알제리, 베트남 등 식민지인의 자유를 빼앗았고 그들을 노예화했다. 프랑스혁명의 세계사적 의의를 자랑하려면 이런 부끄러운 사실들도 정당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은폐되고 있는 대표적인 예가 인종주의이다. 사람을 우월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으로 구분하여 사람 사이의 지배와 예속을 합리화하는 이념인 인종주의는 그야말로 서양 사람들의 창조적인 발명품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비유럽세계의 식민지인을 죽이거나 노예화하고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인종주의는 독일의 유대인 학살의 밑바탕에도 깔려 있다.

▲ 스페인인의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 그 바탕에는 인종주의가 깔려있다.

▲ 나치 독일의 참혹한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 (Holocaust))도 인종주의의 기초해 있다.

  이렇게 인종주의가 도덕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운 이념인 것을 잘 알므로 그들은 그것을 철저히 은폐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전문적인 책 외에는 잘 다루지 않는다. 서양인이 쓴 개설서에서는 뺀 경우가 많고 집어넣는 경우에도 비중을 상당히 축소시키고 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서양 사람들의 생각에서 차지하는 인종주의의 큰 비중을 생각한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식민주의 문제는 왜곡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유럽중심주의적 역사가들이 식민지의 억압이나 착취 같은 명백한 부정의까지도 가능한 한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식민 지배가 식민지에 피해를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는 식으로 접근한다.
  
  발전된 근대문화와 과학기술을 이식해 주었다는 것이다. 서양인들이 식민지배를 하지 않았다면 과거의 식민지역인 제3세계는 지금보다도 더 못한 상태에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 식민지배는 서양 식민자들만의 책임이 아니라 식민지인의 협력에 의해서만 가능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식민지배의 책임을 식민지인과 나누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이 문제들에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서양사의 거의 모든 주제들에 이런 요소들이 숨어 있다. 따라서 이런 문제들이 없나 서양사의 서술들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불균형한 세계사
  
  유럽사를 미화한다는 것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비유럽을 낮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문명을 치켜세움에 따라 그 상대방인 오리엔트 문명은 저평가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리스 문명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문명으로, 다른 쪽은 전제적, 노예적 문명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 후 전체 역사에 걸쳐 유럽과 비유럽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된다. 유럽은 고대에서부터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또 그리스를 잇는 헬레니즘적 문명의 의미와 비중은 축소된다. 알렉산더에 의해 그리스 문명이 오리엔트문명과 결합함으로써 고전 그리스 문명의 퇴화단계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헬레니즘적 문명은 고전기에 못지않은 문화수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에 의해 계몽된 2류 문명으로 부당하게 격화된다.
  
  중세 시대에 들어오면 유럽만이 부각되고 비잔틴 제국이나 이슬람 문명권의 비중은 축소된다. 실제로 중세시대에 이들 지역의 문화수준이 유럽보다 훨씬 높았는데도 그렇다. 그리하여 고대 그리스 문명의 전통을 물려받은 비잔틴, 이슬람, 유럽 문명 가운데 그리스와의 연결고리가 가장 약한 유럽이 그 권리를 독점적으로 주장하게 된다. 오늘날 근대 유럽문명을 그리스 문명과 직접 연결시키는 일반적인 태도는 이런 역사왜곡의 직접적 결과이다.
  
  15세기 말 이래 유럽인들이 정복한 아메리카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던 곳같이 취급된다. 그리하여 유럽인의 발견과 정복에 의해서만 세계사 속에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도 마찬가지이다. 아프리카는 문명이 없는 야만적인 곳으로 '검은 대륙'으로 규정된다.
  
  아시아라고 다를 것도 없다. 아시아는 오리엔탈리즘에서 규정하고 있는 대로 야만적이고 무지몽매하고 법과 윤리, 창조성도 없는 정체된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쓴 세계사라는 것이 얼마나 뒤틀리고 불균형한 것이 될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런 서양사 지식은 서양 사람의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비서양 세계의 역사인식에까지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세계사의 인식체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서양 역사학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양사 나아가 세계사의 많은 부분이 이렇게 서양학자들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5) 서양 역사학을 신주단지 모시듯 해서야
  
  유럽중심적 역사의 해체를 위하여
  
  1990년대에 들어와 유럽중심적으로 씌어진 세계사를 해체하고 세계사의 바른 모습을 회복시키려는 노력이 점차 본격화하며 다양한 연구 성과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잘못 알려지거나 의도적으로 왜곡된 아시아의 모습을 고치는 일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로도 확대되고 있다.
  
  이런 작업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 중심의 세계사를 다중심주의로 대치하는 작업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유럽을 세계사의 중심 지위에서 밀어내어 다른 지역과 역사적 비중에서 비슷한 지역사로 낮추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이전에는 유럽이 세계사의 중심이 아니었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이런 작업은 세계사를 바르게 쓰기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유럽중심주의적 서양사나 세계사가 엉터리로 적당 적당히 꾸며낸 그런 역사서술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 200년에 걸쳐 서양 역사가들이 사실들과, 그것을 설명하는 수많은 이론들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쌓아 올린 것이다. 그러니 간단하게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해체를 위해서는 유럽중심주의적 세계사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기본적인 생각의 틀이나 이론들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에 맞추어 온갖 역사적 사실들을 재해석하고 또 그것을 전체적으로 체계화해야 한다. 그러니 그 작업이 쉬울 리가 만무하다.
  
  더구나 그 대안이 되어야 할 비서양세계의 학문 체계와 전통은 식민지 시대를 지나며 거의 무너져 버렸다. 우리 조선시대의 유교를 중심으로 한 학문전통이 흔적만 남은 채 거의 사라져 버린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는 비서양세계 다른 나라의 경우도 비슷하다.
  
  사실 지금 시작되고 있는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도 대체로 제3세계 출신이기는 하나 서양학자들이 주도하고 있고, 서양 학문체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비서양 세계가 아직 지적인 독립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런 지적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은 장기간에 걸쳐 큰 노력이 필요한 어려운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서양 학자들의 권위에 감연히 맞서야
  
  그렇다고 이런 일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쉬운 일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면 된다. 우선 서양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식민주의 문제 같은 것이 대표적이지만, 이해관계에서 차이가 나는 부분이 많다. 따라서 뚜렷하게 관점이 달라질 수 있는 이런 곳에서부터라도 서양학자들의 기존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우리의 관점을 세울 필요가 있다. 그 위에서 다른 작업들이 차츰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또 당장은 서양 사람들이 해 놓은 자기반성의 수준이라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 우리의 수준이 그 정도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책인 경우는 좀 나으나 개설서 같은 일반적인 서양사 책 가운데에는 이미 서양에서도 수십 년 전에 페기 처분된 이론들이 실려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이는 그 동안 우리 연구자들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으나 학문에서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비교적 적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서양사에만 한한 것은 아니다. 우리 학계 전체가 대체로 이론이나 이데올로기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다. 또 서양학자들의 주장을 옳은 것으로 생각하는 한 그럴 필요 자체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자주적인 학문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르페브르나 브로델, 홉스봄 등은 서양에서 대표적인 역사가로 평가 받는 사람들이다. 또 그들이 수준 높은 일급 학자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의 주장이 반드시 보편타당성을 갖는 것도, 옳은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의 인식이나 판단은 다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의 주장이나 이론에 지레 겁을 막고 주눅이 들 것이 아니라 감연히 맞서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그러려면 보다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그들의 지적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어려운 일이기는 하나 노력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 자신의 학문적 전통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서양학문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시대는 이제 영원한 과거로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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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마지막 식민지 아일랜드의 노래

앨리어스 어쿠스틱 밴드 <아일랜드 저항의 노래>

출처:<레디앙(www.redian.org)> 2006년 11월 18일 / 장석원


"1798-1998 Irish Songs of Rebellion, Resistance And Reconcilliation"
The Alias Acoustic Band
1998년
CD 1
1. Easter 1916/Caoimhneagdh Roisin 
2. To Welcome Paddy Home 
3. Boolavogue 
4. Shan Van Vocht 
5. Erin's Lovely Lee 
6. Boys Of Bar Na Strade 
7. Johnny I Hardly Knew Ya 
8. Brennan On The Moor 
9. Wind That Shakes The Barley 
10. Reconcilliation 
11. Grand Aul' Dame Britania 
12. Glory-o To The Bold Fenian Men 
13. Pursuit Of Farmer Michael Hayes 
14. James Connolly 
15. Roddy McCorley 
16. Dunlavin Green 
17. Reobert Emmett's Last Words / Scaffold Passage 
18. Cry Cry Cry 
19. Kitty/Tadie O'Neill 
CD 2
1. Force Of Argument/Lament Of Limerick 
2. Wearing Of The Green 
3. Patriot Game 
4. Skibereen 
5. Home Fire/Beyond The Pale 
6. Foggy Dew 
7. Boys Of County Cork 
8. Follow Me Up To Carlow 
9. Four Green Fields 
10. God Bless England 
11. Boys of Mullaghbawn 
12. Praties The Grow Small 
13. Truth and Understanding 
14. Mountains Of Pomeroy 
15. Sands of Time/Kesh Jig 
16. Rocks of Bawn 
17. Sea Around Us 
18. A Nation Once Again / Amhran Na Bhfiann
 
800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지배는 아일랜드의 모든 노래를 저항가요로 만들었다. 굳이 노랫말에 영국에 대한 증오를 담지 않더라도 아일랜드의 자연경관에 대한 노래조차도 ‘빼앗긴 들’에 대한 탄식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19세기 중반의 아일랜드를 덮쳤던 대기근이나 1972년 ‘피의 일요일’ 학살 사건처럼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지배는 인도나 다른 영국 식민지들과 비교해도 잔혹한 편이었다.
이탈리아 남부에 대한 북부의 태도나 유태인, 슬라브인에 대한 나치의 태도처럼 백인들의 식민주의와 인종주의는 종종 백인들 내부로 향하기도 한다. 아일랜드는 가장 좋은 예이다.

비록 1922년 아일랜드 공화국이 수립되지만 북아일랜드는 여전히 영국의 지배하에 놓여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아일랜드는 분단국가인 셈이다.

영국인들의 눈에야 북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이 테러리스트의 음모와 가톨릭교회의 분열책동으로 비춰지겠지만 아일랜드인들에게는 독립과 자유가 여전히 추구해야할 미완의 과제인 것이다.

오래된 독립운동은 거리의 투사들뿐만 아니라 노래하는 전사들을 태어나게 했다. 특히 북아일랜드에는 걸출한 좌익 뮤지션들이 많은데, 사회주의자이며 포크싱어인 크리스티 무어는 시네이드 오코너, U2같은 우리 귀에도 익숙한 아일랜드의 아티스트들에게 정신적인 지주로 추앙받고 있다.

총 대신 기타를 든 IRA라고 불리는 테리 오닐이나 북아일랜드의 왕당파들에게는 알카에다 취급을 받는 울프톤즈도 있다. 이들은 다음 기회에 자세히 소개하기로 하겠다.

오늘 소개할 앨범은 “앨리어스 어쿠스틱 밴드”가 아일랜드의 대표적인 저항가요 37곡을 모아 지난 1998년에 발표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앨리어스 어쿠스틱 밴드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구하질 못했다.

심지어 CD 안에도 밴드에 대한 언급이 없다. 아마도 이름을 보건데 실재하는 밴드가 아니라 무슨 이유에서인가 실명을 밝힐 수 없는 아티스트가 사용하는 가상의 이름이 아닐까 추측한다.

이 앨범은 아일랜드의 저항 노래들을 모아놓은 최고의 작품은 아니다. 더 많은 곡과 더 훌륭한 연주를 모은 CD들은 북아일랜드 신페인당의 홈페이지에 마련된 온라인 서점을 통해서 구할 수 있다. 다만 앨리어스 어쿠스틱 밴드의 이 CD가 아일랜드 바깥의 지역에서는 가장 구하기 쉬운 최선의 선택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일랜드의 민요나 저항가요를 담은 음반이 유독 미국에서 꽤 많은 종류가 발매돼 있고 또 구하기도 쉬운 편이다. 미국 내에 존재하는 아일랜드계 이주민 공동체의 영향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가지만, 아무래도 뉴욕을 비롯한 미국 동부연안의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 IRA의 자금줄이라는 영국 정보당국의 주장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미국의 온라인 서점 아마존에 올라있는 앨리어스 어쿠스틱 밴드의 CD 소개란에도 보면 “미국에 있는 모든 아일랜드 가톨릭계 가정은 반드시 이 음반을 한 장씩 갖고 있어야 한다”는 한 구매자의 평이 붙어 있다.

* * *

앨범에 수록된 첫 곡 ‘1916년의 부활절Easter 1916’은 제목에서 보여지 듯 1916년 아일랜드 공화군이 더블린의 중앙우체국을 점거하고 아일랜드 공화국을 선포한 ‘부활절 봉기’를 다룬 노래다.

비록 봉기 자체는 실패했지만 봉기의 대담함은 영국 식민당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6년 뒤 영국으로 하여금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지역의 독립을 인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영국인들에게는 3.1만세운동에 비유될만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 봉기의 자세한 과정은 국내에서도 개봉된 영화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에서도 다루고 있다.

‘제임스 코널리James Connolly’는 부활절 봉기를 사실상 입안했던 인물에 관한 노래다. 코널리는 사회주의자로 노동운동과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부활절 봉기 당시 사실상의 총사령관 역할을 맡았던 그는 봉기가 진압된 후 사건의 주모자로 영국군에 의해 처형당했다.

코널리는 제2인터내셔널 안에서도 좌파, 그러니까 1차세계대전에 반대했던 반전파에 속했던 인물이다. 비록 러시아 혁명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아일랜드 사회주의 운동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은 레닌이나 트로츠키보다도 더 크고 뛰어났다.

아일랜드 독립운동에서 그의 영향력은 살아 있을 때 그가 관여한 적이 전혀 없는 정당이나 단체들조차도 코널리를 자신들의 사상적 지도자로 선포하고 있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오죽하면 영국인들조차도 지난 2002년 BBC가 100명의 ‘위대한 영국인’을 선정할 때 64위에 코널리의 이름을 올렸다. IRA는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이 앨범에는 들어있지 않지만 아일랜드 저항가요를 모은 선집에는 스페인내전때 국제 의용군이 부른 ‘제5여단 만세Viva La Quinte Brigada’이 포함된 경우가 많다. 조지 오웰의 종군기록인 “카탈로니아 찬가”에 보면 당시 국제의용군에 IRA 출신이 많았다는 구절이 있다.

처음 이 글을 읽을 때는 어찌됐건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가 표방한 것이 ‘공화군’이었으니까 같은 ‘공화주의자’로서 연대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쉽게 추측했다. 그러나 후에 아일랜드의 역사를 알게 되면서 IRA와 그 정치조직인 신페인당이 단순한 공화주의자들이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또한 많은 학자들이 IRA와 신페인당을 맑스주의에 입각한 노동자정당으로 정의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우리에게는 낯선 이야기이다.

‘애국자 놀음Patriot Game’은 헐리우드에서 만든 영화 제목으로도 사용됐었다. 50년대 IRA가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의 통합운동을 밀어부칠 때 만들어진 노래인데 노랫말에는 맹목적인 애국주의의 위험을 경고하는 듯한 구절이 들어있다. 이런 이유로 아일랜드의 무정부주의자들이 특히 애창했던 노래라고 한다. 후에 밥 딜런이 미국의 역사를 비꼰 ‘신은 항상 우리 편에With God On Our Side’를 작곡할 때 곡조의 일부를 빌려오기도 했다.

이 앨범에 들어있는 노래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798년 ‘아일랜드 반란’을 다룬 ‘불라보그Boolavogue’다. 프랑스 대혁명에 영향을 받아 아일랜드에서도 혁명적 공화주의가 태동하고 그 혁명적 공화주의를 표방한 그룹이 일으킨 봉기가 아일랜드반란이다. 존 머피 신부는 공화군의 일원으로 참여해 불라보그에서 봉기를 지도했는데 영국군에 진압당한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 노래는 존 머피 신부와 불라보그의 반란군을 추모하고 있다.

앨범의 마지막 곡은 두 개의 노래(‘Nation Once Again’와 ‘Amhran Na Bhfiann’)를 하나로 이어 부른 것이다. ‘국민이여 다시한번Nation Once Again’은 아일랜드의 저항가요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다.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만큼 역사도 오래된 편이고 가사도 좀 구식이지만 아일랜드인들에게는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독립에 대한 영감이 새롭게 떠오르는지 집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이기도 하다.

얼마나 유명하냐면 대부분의 영국인들조차도 어렵지 않게 부를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런던 거리를 걸어가면서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되는 노래기도 하다.

‘Amhran Na Bhfiann’은 영어로는 ‘군인의 노래A Soldier's Song’라고 불리는 곡으로 현재 아일랜드공화국의 국가이며 북아일랜드의 공화주의자들에게는 사실상의 국가로 불리는 노래다. 물론 북아일랜드의 독립에 반대하는 왕당파들은 기를 쓰고 반대하는 노래다. 이 두 곡의 또 다른 공통점은 아일랜드의 축구경기장에서 가장 쉽게 들을 수 있는 노래들이라는 것이다.

* * *

아일랜드인들의 노래에는 아일랜드 현대사의 순간 순가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앨리어스 어쿠스틱 밴드의 이 앨범은 노래로 듣는 아일랜드 현대사 혹은 독립운동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노래들에 얽힌 이야기를 일일이 다 소개하지는 못하지만 후에 다른 아일랜드 뮤지션들을 소개할 때 다시 이야기할 것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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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중심주의 역사학은 누가 만들었나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2> 헤겔에서 홉스봄까지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프레시안> 2007-10-25


  유럽중심주의 역사학의 성립

  유럽중심주의적 생각은 역사학뿐 아니라 대부분의 근대 유럽 학문에서 나타난다. 이들 학문이 18세기나, 또 유럽의 우월이 확실해진 19세기에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강력한 모습을 갖고, 또 체계적으로 나타나는 분야가 역사학이다. 유럽 사람들이 유럽문명의 창조성과 독특성을 주로 역사학을 통해 보여 주려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관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앞에서 말했지만 18세기부터 유럽에서 발전한 진보와 문명이라는 개념이다. 진보는 인간의 지적이거나 물질적인 능력이 커지며 인간의 역사는 무한히 발전하여 세상은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된다고 믿는 것이다. 이는 17, 18세기에 유럽이 이룬 커다란 정신적, 물질적인 성장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문명은 진보의 결과로서 당시 유럽인이 이룬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생각하는 수준의 문화를 말한다. 그러니까 진보와 문명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셈이다. 이리하여 서양인에 의해 19세기에 널리 받아들여진 역사관이 진보사관이다.
  
  결과적으로 진보를 대표하는 유럽의 역사는 유럽 지역의 역사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를 중심에서 이끌어가는 보편사의 지위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비유럽 세계의 역사는 유럽인에 의해 발견되거나 정복됨으로써만 역사의 주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유럽에서 진보사관이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세계의 역학 관계 변화이다. 17, 18세기만 해도 인도나 중국은 강력한 힘을 갖는 아시아의 대제국으로 유럽 국가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이후 아시아 국가들이 쇠퇴한 반면 유럽 국가들의 힘이 산업혁명으로 급격히 커지며 상황이 달라졌다. 인도는 1757년의 플라시 전투로 벵골 지방을 빼앗기며 점차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중국도 1840년의 아편전쟁으로 무장해제를 당하고 유럽 국가들의 반식민지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유럽인들이 아시아의 대제국들에 대해 갖고 있던 존경심이나 동경은 모두 사라졌다. 대신 아시아에 대한 경멸적인 고정관념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유럽이 우월한 이유
  
  따라서 19세기 이후의 서양 역사학에서는 유럽이 이룩한 성과를 설명하고 비유럽 지역에서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종교, 인종주의, 환경, 문화 등 여러 가지 설명 방식이 동원되었다.
  
  유럽인들은 그들만이 진정한 신인 여호와 신을 믿고 있고 그 신이 유럽인들의 역사를 진보로 이끈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적 원리가 다른 종교에 비해 우월하며 더 윤리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19세기 초에 특히 널리 믿어진 주장이나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인종주의적인 설명은 인종에 따라 사람의 능력에는 우열이 있다는 관점에서 역사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는 18세기 후반에 인종주의가 이론화하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백인종은 황인종이나 흑인종에 비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우월한 자질을 유전적으로 갖고 있고 따라서 더 우월한 문화를 건설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런 식의 주장을 공공연하게 할 수 없는 분위기이지만 그래도 서양의 많은 역사학자들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자연환경과 결부하는 설명 방식은 역사가 매우 오랜 것이다. 그리스의 자연을 찬양한 헤로도토스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을 근대의 유럽인들이 빌려온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의 토질이 특히 비옥하다든가, 기후가 따뜻해 농사짓기에 좋다든가 비가 계속 적당히 내린다든가 자연재해가 적고 질병도 적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한다.
  
  문화적 설명방식은 유럽인의 문화적 창조능력을 특히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이 오랜 옛날부터 독특하게 진보적이고 창조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는 것이다. 사유재산제나 자본주의, 자유로운 도시의 발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 개인주의, 민주주의는 모두 그 창조성의 산물로 생각된다.
  
  이런 주장들은 많은 경우 사실과 맞지 않기도 하지만 역사의 설명방식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종교나 인종과 결부시키는 설명은 오늘날 거의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유럽의 자연환경이 특별히 좋다는 주장은 사실과 맞지 않는 내용이다. 또 유럽인의 문화적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는 주장도 독단적인 주장으로 증명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런 주장들은 유럽인들이 만들어낸 매우 잘못된 편견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3) 유럽중심주의 역사학은 누가 만들었나
  
  헤겔과 '자유'로서의 역사
  
  그러면 먼저 유럽중심적인 역사가 서양 역사가들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간단히 살펴보자. 19세기 사람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독일의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헤겔과 사회주의 이념의 창시자인 칼 맑스, 역시 독일의 사회학자이자인 막스 베버이다. 베버는 20세기 초까지 활동했다.

▲ 프리드리히 헤겔

  프리드리히 헤겔 (F..Hegel, 1770 - 1831)은 독일의 유명한 관념론 철학자이지만 <역사철학>이라는 책을 써서 19세기 사람들이 역사를 보는 눈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이다. 그는 그 책에서 역사의 진보가 어떻게 근대 유럽에 와서 그 가장 꼭대기에 도달했는가를 보여주려 했다.
  
  그의 역사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자유이다. 그에게 자유란 사람이 생각하는 힘인 이성을 통해 자연이 주는 한계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세계사란 자유라는 이념이 스스로를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자유가 고대 세계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확대되어 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는 인간이 세계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라는 정신적인 작용이 스스로를 그렇게 발전시켜 나간다고 믿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잘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래서 그를 관념철학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역사의 발전 단계를 셋으로 나누었다. 오리엔트 세계, 그리스 · 로마 세계, 게르만적 세계가 그것이다. 오리엔트 세계가 가장 낮은 단계에 있고 그리스 · 로마세계가 그것을 넘어선 다음 단계이고 게르만 세계가 그것을 넘어선 가장 높은 단계라는 것이다. 그는 그 가운데 오리엔트 세계, 즉 동양 세계는 고대나 현대나 별 차이 없는 상태에 있다고 믿었다. 즉 그 문화가 정체되어 있다고 믿은 것이다.
  
  따라서 이성과 자유를 스스로 실현시켜 나아가는 세계사는 자연히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세계사의 전체적인 흐름인 '보편사'의 운동은 아시아에서 시작되었으나 서쪽으로 움직여 마침내 유럽이 그 절대적인 종착점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칼 맑스와 아시아적 생산양식론
  
  칼 맑스(K.Marx : 1818-1883)는 사회주의 사상을 만들어냄으로써 19세기 후반 이후 세계사의 움직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은 최근에 러시아나 동유럽에서 사회주의 체제들이 무너질 때까지도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자로서 억압받는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해 평생 학문적, 실천적인 노력을 쏟았고 그래서 그의 사상에서 인류애적인 요소는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서 비유럽이 차지하는 역할은 그런 것과는 전연 관계가 없다. 그가 자신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자본주의인데 자본주의는 유럽에서만 발전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의 역사 발전을 사회에서 생산이 이루어지게 하는 방식인 생산양식에 따라 원시공동체 사회, 고대노예제 사회, 중세봉건제 사회, 근대 자본주의 사회,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로 구분했고 한 생산양식에서 다른 생산양식으로 넘어가는 것은 그 생산양식 내부의 모순에 의해서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사회는 봉건 사회라는, 유럽에서 나타난 생산양식 자체 내의 모순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었다.

▲ 칼 맑스

  반면 아시아의 생산양식은 고대노예제 생산양식의 변종인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다. 아시아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 고대적인 생산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정체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봉건적 생산양식을 경험하지 못한 아시아는 자본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을 아예 갖고 있지 않은 셈이다.
  
  맑스는 이렇게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유럽의 경험에 의존하여 역사의 발전 단계를 구성하고 그것을 비유럽지역에도 적용했다. 그러니 유럽의 경험과 다른 아시아 등 다른 지역은 보편적인 역사과정에서 벗어난 것으로 평가 절하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그의 정신적 스승인 헤겔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막스 베버와 합리성
  
  사회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막스 베버( 1864 - 1920)는 약 한 세기 전에 활동한 사람이지만 지금까지도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다. 그것은 그가 출중한 능력을 갖고 많은 훌륭한 학문적 업적을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다. 그가 대표적인 유럽중심주의적 이론가의 한 사람으로서 서양인들에게 큰 우월감과 자부심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 막스 베버
  사실 그가 평생토록 한 학문적 작업은 왜 유럽에서는 진보와 근대화가 가능했고 비유럽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종교, 봉건제, 도시, 관료제, 법제도, 국가형태, 자본주의 등 온갖 주제를 통해 증명하려 했다.
  
  이때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개념이 합리성이다. 유럽에는 합리성이 있어 그것이 가능했고 비유럽에는 그것이 없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즉 유럽의 합리성과 비유럽의 비합리성, 전통성을 대비시켜 비유럽 세계의 후진성을 증명하려 하는 것이다.
  
  그는 유럽은 이런 합리적 경향을 고대 그리스로부터 발전시켜 왔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은 유럽인들이 그렇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발전만 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합리적이라고 믿은 프로테스탄트(신교파)윤리와 결합시켰다.
  
  즉 열심히 일하고 낭비하지 않고 돈을 모으려는 프로테스탄트들의 합리적인 태도에 의해 자본 축적이 가능했고 그것을 이익이 남는 건전하고 윤리적인 사업에 투자함으로써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이런 합리성에 의해 그는 서양에서만 보편적인 의미와 가치를 갖는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고 서양에서만 과학이 발전했으며 체계적인 신학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발전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반면 비유럽세계에서는 이런 합리적인 태도가 불가능했다. 아시아 사람들만 하더라도 그들은 고대로부터 초월적인 종교나 미신에 빠져서 스스로의 자신을 의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자신과 외부 세계를 나누어 구분하는 자의식(自意識)이 없으니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고 따라서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시아는 서양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주장이 온통 유럽문명에 대한 찬양으로 뒤덮여 있으나 그런 주장들이 정당한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주장들의 많은 부분이 비유럽세계에 대한 잘못된 정보, 무지, 편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역사가들
  
  이런 태도는 20세기 후반의 역사가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가운데 몇 사람의 예를 들어보자. 페르낭 브로델은 프랑스에서 사회경제사를 주로 연구하는 '아날학파'라고 하는 유명한 역사학파의 대표적인 역사가이다. 그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서양 역사가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 페르낭 브로델
  그러나 비유럽 세계에 대한 그의 생각은 19세기 사람들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는 아시아 문화가 너무나 고대적이고 어디에서나 꼭 같다고 말함으로써 헤겔적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또 중세도시가 자유로웠다는 베버의 주장, 르네상스를 근대적인 시기로 보는 부르크하르트의 주장 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근대적인 유럽과 전근대적인 아시아를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아시아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조르즈 르페브르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기존 해석의 대표적인 역사가이다. 맑스주의자인 그는 프랑스 혁명을 계급투쟁으로 보아 부르주아 계급이 귀족계급을 타도하고 부르주아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았다.
  
  부르주아 혁명으로 왕의 전제가 무너지고 민주적인 질서가 수립될 수 있게 되었고 봉건적인 신분제도가 파괴되며 모든 사람들이 법 앞에서 평등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또 중상주의적 제약에서 벗어나 자본주의를 자유롭게 발전시킬 수 있었고 합리적인 근대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우애가 전 세계를 일주했다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한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이 근대사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전형적인 유럽중심주의 해석이다.

▲ 에릭 홉스봄 (Eric Hobsbawm, 1917 ~ ),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맑스주의 역사가
  영국의 대표적인 역사가의 한 사람인 에릭 홉스봄은 최근 민족주의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민족주의의 주류적 해석이라고 할 '근대주의적 해석'의 주도 인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는 민족이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고 민족이 민족주의를 만든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민족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적 정체성은 대수로운 것이 아니며 쉽게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많은 민족주의는 반동적인 지배계급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시킨 것이므로 관제민족주의의 성격이 강하고 따라서 억압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제 지구화 시대에 들어섰으므로 민족과 민족주의는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민족이 전근대 역사 속에서 발전해온 과정을 경시한다. 또 민족주의가 내부적 요인이 아니라 국가 사이의 경쟁이라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발전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더 나아가 민족주의가 선진국의 억압에 저항하는 힘으로서 제3세계인들에게 아직도 큰 도덕적인 힘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전형적인 유럽중심주의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만이 아니다. 그 정도는 다르지만 서양 역사가들의 거의 대부분이 알게 모르게 유럽중심적인 역사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 사람들이 쓴 역사책에서 이런 점들을 주의하지 않으면 문제가 많이 생긴다. 그들의 잘못된 주장에 세뇌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 역사가들이 어떤 주장을 할 때 그 주장이 어떤 전제 위에 서 있는지, 그들의 주장 가운데 혹시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지나 않은지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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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도 얘기 안해준 스웨덴 좌파 음악
프리덤 싱어즈 "반제국주의의 노래"


장석원 객원기자
출처:<레디앙(www.redian.org)> 2007년 01월 06일


1968년 해병대를 전역한 척 오난Chuck Onan은 조국인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엘리트 부대인 장거리정찰대LRRP 대원으로 베트남에서 복무한 그는 대신 스웨덴으로 가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 스웨덴의 사민당 정권은 그를 정치적 난민으로 받아들였고 스웨덴어 교육과 함께 정착지원을 제공했다.

척 오난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전쟁을 벌이는 동안 탈영하거나 징집을 피해 스웨덴과 캐나다, 프랑스로 망명한 미국인은 3만명에 달한다.

사민당 소속의 총리 올로프 팔메는 1972년 유명한 크리스마스 연설에서 닉슨정권의 하노이폭격을 맹비난했다. 이 연설로 야기된 스웨덴과 미국의 외교 갈등은 1974년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 <포린 어페어즈> 같은 보수적인 저널에는 스웨덴을 ‘사회주의 국가Socialist State’라고 지칭한 대목이 자주 눈에 보인다.

물론 스웨덴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다. 사민당이 정권을 장기독점하긴 했지만 때때로 우파정권이 들어서기도 하는 나라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기업도 있고 또 무시무시한 조직률을 자랑하는 노조도 있다. 다만 좀 특별한 나라인 것은 사실이다.

영국인들이 독일에 한번 갔다 오면 자기네의 낮은 복지수준을 보고 삶의 의욕을 잃는데, 정작 독일인들은 스웨덴에 한번 갔다 오면 "독일은 참 지옥 같은 나라야"하고 한탄을 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유럽 안에서도 진보적인 사회문화를 일군 나라가 스웨덴(과 주변의 북유럽 국가들)이다.

북유럽이 얼마나 살만한 동네인지는 지난 수년간 박노자 교수가 생생하게 전해준 '염장성' 현장보고를 통해 익숙하게 들은 만큼 여기서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신 박노자 교수는 이야기한 적이 없는 60~70년대 스웨덴 좌익들의 음악을 앞으로 한달간 소개할 계획이다.

스웨덴의 음악하면 제일 쉽게 연상되는 거야 물론 스웨덴의 국민밴드이자 한 시대를 상징했던 ‘아바ABBA’의 주옥같은 멜로디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스웨덴에는 아바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 * *

"Antiimperialistiske songar"
Freedom singers
1970년
Side A
1 Wall Street
2 Å Sentab å ja
3 Visan om Gunnar Myrdal
4 Vårt Sagoland
5 Rövarvisan
6 Vi sår vårt ris
7 Visan om Ho Chi Minh
Side B
1 Befria Södern
2 Bläckfisken
3 Hur ser friheten ut?
4 Visa om Olof Palme
5 Kafferepet
6 En liten quisling
7 Richard Dollarhjärta
8 CIA-visan
 
스웨덴의 포크 그룹인 프리덤 싱어즈The Freedom Singers는 두 장의 음반을 남겼다. 첫 번째 것은 1968년에 “68”이라는 단순한 제목으로 발표됐고,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앨범이 오늘 소개할 “반제국주의의 노래Antiimperialistiska Sånger”이다. 이 앨범은 1970년에 발표됐다.

프리덤 싱어즈는 단일한 밴드가 아니라 스톡홀름과 예텐보리 두 도시에 기반한 음악인들이 느슨하게 결합해 있는 형태였다고 한다. 아마도 각기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던 음악인들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구성했던 그룹이 아닌가 이해한다.

정치적인 목적이란 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NLF와의 연대다. 프리덤 싱어즈는 60년대 후반 스웨덴에서 활발하게 전개됐던 베트남연대운동(FNL-rörelsen)의 일원이었다.

투쟁하는 베트남 인민들에 대한 지원과 연대는 60년대 각국 좌익들의 공통된 주제였지만 스웨덴에서는 특별하다 싶을 정도로 베트남연대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앞서 이야기한 망명이나 올로프 팔메의 연설등도 모두 대중적인 연대운동이 정치권에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프리덤 싱어즈가 불렀던 노래들도 모두 ‘베트남’을 주제로 한 것들이다.사실 프리덤 싱어즈는 1962년 미국에서 결성된 포크 그룹의 이름이다. 흑인민권운동단체의 전국순회에 동행하면서 노래로 운동을 대변했던 유명한 팀이다.

멀리 떨어진 스웨덴이지만 포크와 사회운동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원조’ 프리덤 싱어즈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다. 음악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계몽을 실천한다는 의미에서 의식적으로 프리덤 싱어즈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그룹을 구성했던 이들의 명단이나 이력은 알 수가 없다. 다만 “반제국주의의 노래”에서 청아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여성 메인 보컬은 마리에 셀란네르Marie Selander이다.

프리덤 싱어즈 이전부터 가수로 활동했고 이후에도 음악활동을 계속한 셀란네르는 70년대 바라빈테르Vargavinter라는 밴드를 통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984년 밴드가 해산한 후에는 공부를 시작해 대학교수가 됐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반제국주의의 노래”에 실려 있는 곡들은 모두 베트남의 투쟁을 직접적으로 노래하거나 아니면 미국을 조롱하는 것들이다. ‘호치민의 노래Visan om Ho Chi Minh’, ‘남부를 해방시켜라Befria Södern’ 같은 곡들은 제목만으로 내용이 짐작이 간다. ‘월 스트리트Wall Street’는 펜타곤과 자본의 결합을 풍자한 곡이고 ‘CIA발라드CIA-visan’도 풍자의 대상이 쉽게 짐작이 간다.

   
▲ 마리에 셀란네르Marie Selander
 
눈에 띠는 것은 스웨덴 정치인들의 이름이 들어간 두곡 ‘군나르 뮈르달의 노래Visan om Gunnar Myrdal’와 ‘올로프 팔메의 노래Visa om Olof Palme’이다. 뮈르달은 사민당의 경제정책을 정립한 이론가고 팔메는 사민당의 지도자다.

스웨덴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굵직한 흔적을 남긴 거목들이다. 우리 현실에서는 그저 부럽기만 한 진보적인 정치인들인데 정작 같은 스웨덴사람인 프리덤 싱어즈에게는 베트남에 대한 입장과 행동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 * *

이 앨범의 곡들은 전형적인 모던포크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프리덤 싱어즈’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60년대 미국 포크부흥운동의 형식까지 고스란히 빌려온 셈이다. 덕분에 언어의 장벽으로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음악 그 자체만으로도 어떤 공감대가 형성된다.

모던포크의 장점은 그 보편성에 있다. 각 나라의 진짜 포크, 즉 민속요와 융합하기 어렵다는 약점이 있지만 모던포크의 보편성은 기타와 화음만으로 이루어진 음악이 60년대 전 세계로 퍼져 나간 이유를 설명해준다.

“반제국주의 노래”를 들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음악은 서울대학교 노래동아리 '메아리'의 1979년도 공연 복각음반이었다. 메아리의 공연은 군가를 연상시키는 노동가요와 북한식 노래들이 도입되기 이전 모던포크의 문법에 충실한 노래들을 들려준다.

하지만 프리덤 싱어즈나 메아리나 지금은 모두 과거의 유산이 됐다. 차이가 있다면 한쪽은 운동 자체가 시들해지면 함께 힘을 잃은 반면, 다른 한쪽은 포크가 민중의 삶을 흉내내는 지식인의 형식미학이라는 자기비판 속에서 포기를 강요당했다는 점이다.

우리의 민중가요는 음악이면서 동시에 음악을 부차적인 것으로 돌리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 너무 단순화시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김광석이 노래모임 '새벽'을 떠나야 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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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좌파음악이라기보다는 반전음악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아마도 김광석이 '새벽'을 떠났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더욱 풍부해진 대중음악을 향유하고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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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객관적으로 쓰여지지 않는다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1> 유럽중심주의 역사관의 해악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프레시안> 2007 10 23


연재를 시작하며

  오늘날 우리가 보고 배우는 서양사나 세계사는 유럽중심적 시각에 의해 크게 왜곡되어 있다. 유럽 내지 북미지역을 포함하는 서양 세계를 세계의 중심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은 탁월한 문명을 발전시킨 우월한 지역으로, 비서양 세계는 야만적이고 정체된 지역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서양의 우월이라는 것은 19세기, 정확히는 1840년의 아편전쟁 이후의 일이고 그 전까지의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양인들은 근대에 있어서의 유럽의 우월을 고대까지 소급시키려는 잘못된 태도를 갖고 있다. 서양은 그리스시대부터 어디에도 비견할 수 없는 뛰어난 문명을 이루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계사라는 것이 왜곡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사 나아가 세계사의 이렇게 잘못된 점을 바로 잡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야 우리가 세계에 대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고 서양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오늘날 미국에 대해 정신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것도 모두 이런 상황의 결과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강철구 교수의 '한국인의 정신을 깨우는 세계사 다시 읽기'는 그런 점에서 우리의 학문적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다. 그는 약 10년간 서양사와 세계사를 우리 눈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매달리고 있으며 이 연재물은 그 성과의 일부이다. 이와 관련된 강 교수의 책으로는 <역사와 이데올로기 1, 용의 숲, 1994>가 있다.
  
  이 시리즈는 매주 2회(화, 목요일) 게재된다. <편집자>
  
  
필자 약력
  
  1979-1988: 청주사범대학(현 서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1989-현재 : 이화여대 인문대 사학전공 교수
  민족주의 연구회 회장 역임
  계간 <민족현실> 발행인 역임
  현 민족미래연구소 이사장
  
  
1. 세계사를 어떻게 바로 볼 수 있을까
  
  1) 역사는 객관적으로 쓰여지지 않는다
  
  '역사'의 쓸모 있음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끊임없이 역사와 접하기 때문이다. 역사책은 말할 것도 없지만 TV나 영화에서의 사극이나 역사 다큐멘터리, 나아가 어른이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까지도 모두 역사의 일부이다.
  
  역사소설도 마찬가지이다. 다빈치 코드 같은 베스트셀러 소설책도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씌었지만 예수의 성배 전설을 현실로 끌고 온 일종의 역사소설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에 매우 친숙하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람들은 전문 역사가는 아니지만 큰 열정을 가지고 역사 연구에 평생을 바치기도 한다. 단군이나 고구려 등 우리 고대사를 공부하고 책을 펴내는 적지 않은 수의 아마추어 역사학자들이 그런 예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일반인 수준에서는 역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한 역사 '읽기'나 '공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학'을 이야기하려면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그럼에도 지적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E. H.카의 널리 알려진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기도 하고 그 책에 나오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되뇌며 자신의 역사 지식을 과시하기도 한다. 역사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역사는 중요하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온 오랜 경험을 기록한 것으로 인간과 그 사회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사람들이 행동하는 방식은 수천 년 전의 옛날이나 지금이나 거의 차이가 없으므로 옛날 사람들의 행적을 살펴 오늘날의 교훈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 사마천의 <사기>, 서양에서는 기원전 5세기에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나온 후 수많은 역사책들이 세대를 이어가며 정치가나 군인들, 학자와 지식인들, 또 공부하는 학생들의 필독서가 된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 중국 한대의 대표적인 역사가로 <사기>를 쓴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년? - 기원전 86년?)

  역사의 이런 유용성은 특히 역사학이 갖고 있는 구체적인 성격에서 비롯된다. 역사적 사실은 항상 언제, 어디서라는 구체적인 상황과 연결된다. 이렇게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의 구체적인 인간의 행위를 다루기 때문에 그 지식이 다른 학문의 경우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현실적인 유용성을 갖는 것이다.
  
  근대 역사학과 객관성
  
  이렇게 역사가 유용한 지식이기는 하나 그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그대로 전달해 준다는 전제 위에서이다. 정확한 사실 위에 서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구에 바탕을 둔 소설이나 진배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역사의 진실성 문제가 나온다. 역사는 어떻게 진실성을 갖게 될까?
  
  서양 사람들도 18세기까지는 역사를 단순히 실용적인 학문으로 생각했으므로 과거에 일어난 일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책에는 사실과 역사가의 상상이 뒤섞여 있었다.
  
  이런 사정이 바뀌는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서양학문들은 19세기에 들어와서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아 점차 객관성을 중시하게 되는데 역사학도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역사학에서 그 일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는 독일사람 레오폴트 랑케이다.
  
▲ 랑케 (Ranke, Leopold von), (1795~1886), 근대 역사학을 처음 시작한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역사가

  그는 역사를 쓸 때 역사가의 상상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고 엄격한 기준에 의해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역사 연구란 '그것이 원래 어떠했던가'를 밝히는 일이라고 말한 것이 그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역사를 쓰기 위한 재료인 사료를 잘 다루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옛날 문서나 책, 비석, 고고학적 유물 등 사료들을 아무렇게나 이용해서는 안 되고 쓸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엄격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료 가운데에는 쓸모없는 것도 많고 또 의도적으로 날조된 것들도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랑케의 이런 태도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가 당시의 사람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역사적 사실 그 자체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많은 역사가들이 랑케를 본받으며 19세기 말에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역사학이 근대적인 객관적 학문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20세기에 들어와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역사학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이라는 사실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자연과학과 같이 역사학도 보편적인 과학적 원리에 따른 학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역사 쓰기와 객관성의 한계
  
  그러면 객관적인 역사 쓰기는 정말 가능할까? 엄격하게 말해서 그것은 불가능하다. 불행히도 인간이 한 모든 일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일부만이 요행히 살아남을 뿐이다. 이는 개인들이 일기를 써 놓지 않는 한 시간이 지나면 자기가 한 일들을 거의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남아 있는 사료 가운데에는 일부러 남긴 것들이 있다. 어떤 왕을 기리기 위해 그의 치적을 비석에 새겨두는 경우가 그것이다. 반면 무덤 속에서 발견되는 여러 부장품들과 같이 후세에 남기려고 한 것은 아니나 우연히 남은 것도 있다. 또 옛날 책이나 문서들도 좋은 사료가 된다. 역사가는 남아 있는 이 사료들을 가지고 과거에 일어났다고 생각되는 일을 다시 엮어 낸다.
  
  
▲ 삼국사기, 삼국사기는 역사책으로 쓰인 것이나 오늘날에는 훌륭한 사료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역사가의 사관(史觀)이다. 사관이란 말 그대로 역사를 보는 눈이다. 사관은 처음 사료를 골라내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해석하여 역사를 재구성하는 전체 과정에 간여한다.
  사료가 너무 많으면 그것을 다 이용할 수 없으니까 그 가운데 필요한 것만을 골라내야 한다. 이때 무엇을 골라낼까를 결정하는 데 사관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그 사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데도 영향을 준다. 심한 경우에는 같은 사료를 놓고도 사관의 차이에 따라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사관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개인의 기호나 욕망, 편견, 또 그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 등 여러 가지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지방색이나 민족의식 같이 그가 속해 있는 집단의 영향도 받는다. 현재라는 시점이 주는 영향도 크다. 누구나 현재에 서서 과거를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가가 이런 한계들을 넘어서서 엄격하게 객관적인 역사를 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역사를 쓰려고 해도 자신의 편견이나 세계관, 이념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관적'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일 뿐이다.
  
  유럽중심주의 역사관의 해악
  
  이것은 랑케의 경우를 보아도 확실히 알 수 있다. 랑케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쓰기 위해 자기 자신을 '없애버리고 싶다'고까지 이야기할 정도로 이를 중시했다. 그래서 그와 그의 제자들이 독일 역사학을 객관적인 학문으로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럼에도 그가 기초를 놓은 독일 역사학은 매우 이데올로기성이 강한 역사학으로 19세기 이후 독일의 발전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이 독일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프러시아의 권위주의적 국가를 받듦으로써 독일인이 배타적인 성격을 갖게 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이는 객관성이라는 것이 역사를 쓰는 방법상의 문제일 뿐이고 그것이 역사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서술되는 것을 막아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독일 역사학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서양의 역사학은 19세기 이래 크고 작은 수많은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아 왔다. 자유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인종주의, 식민주의 등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폭 넓은 영향을 미친 것은 유럽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인 유럽중심주의이다.
  
▲ 트라이치케 (Treitschke. Heinrich von )의 초상. 트라이치케는 랑케의 계승자로서 19세기 독일 대표적인 민족주의 역사학자이다.

  그것이 다른 이데올로기들을 그 밑에 집어넣든가 함께 결합하며 서양사 나아가 세계사의 해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근대 서양인들이 유럽이 우월하다고 하는 관점에서 외부 세계를 보려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서양 사람들이 쓴 많은 서양사나 세계사 책들은 대부분 노골적이든 아니든 유럽중심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는 비서양인들 입장에서 보자면 심각한 문제이다. 서양만을 중시하며 비서양 세계의 발전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거나 또 서양세계에게 예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비서양 역사가들이 서양 역사가들이 쓴 이런 유럽중심주의적 서양사나 세계사를 객관적인 학문으로 생각하여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서양 역사학을 선진 학문으로 생각하는 탓이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많은 경우 서양 역사가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 들일뿐 아니라 서양 사람들의 유럽중심주의적인 관점을 서양인들보다 더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웃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 결과는 말할 필요도 없다. 유럽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세계의 중심이고, 모든 합리적이고 진보적이고 과학적인 것은 유럽과 미국의 산물이다. 반면 아시아나 아프리카는 고대로부터 문화가 정체되어 온 후진적인 지역으로 근대성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근대에 들어와 서양국가들이 비서양 지역을 식민 지배한 것이나 오늘날의 불평등한 세계질서는 힘의 우열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서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인식이 객관적인 역사연구의 결과라면 문제 삼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서양사나 세계사의 실제 사실과 상당 부분 맞지 않는다. 또 그것은 상당 부분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그러니 그것을 그대로 받아 들여서야 되겠는가? 먼저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부터 잠깐 살펴보자.
  
  2) 유럽중심주의와 그 역사학
  
  '유럽'은 근대의 산물
  
  요사이 유럽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학생 때 배낭여행을 갔다 온 사람도 많고 관광여행을 다녀오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가보지는 않았다 해도 매스 미디어를 통해 자주 접하니 친숙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럽 하면 그 이미지가 대체로 머리에 떠오른다.
  
  유럽은 지리적으로 보면 서쪽 끝의 섬나라인 영국이나 이베리아 반도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폴란드와 우랄 산맥까지의 러시아를 포함하고, 남동쪽으로는 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들까지 포함하는 상당히 넓은 대륙이다. 그래서 아시아나 아프리카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지리적 단위로 생각된다.
  
  그러나 유럽은 지리적으로만이 아니라 혈통이나 문화적으로도 크게 하나의 단위로 생각된다. 유럽 사람들이 백인이며, 또 생활양식, 언어, 문화, 종교 등 문화적 면에서 공통된 요소들을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유럽연합이 만들어졌으니 이제 경제적, 정치적으로도 하나의 단위로 생각될만하다.
  
▲ 현대의 유럽

  그러나 우리가 그리는 이런 모습의 '유럽'은 고대에는 있지도 않았다. 그것이 최근 몇 세기 사이, 즉 근대에 들어와서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이 지명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기원전 7세기부터이나 그리스 시대에 유럽은 그리스 반도 전체이거나 그 일부를 의미했다. 오늘날의 유럽과는 상관이 없다.
  
▲ 고대 로마의 판도

  로마시대에도 오늘날 유럽의 경계선은 별 의미가 없었다. 로마의 영토가 라인 강 서쪽과 도나우 강 남쪽의 유럽 지역뿐 아니라, 오늘날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속하는 북아프리카 해안지역, 이집트, 팔레스타인, 터키 지역까지도 포함했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에 유럽은 기독교가 믿어지는 지역을 의미했다. 이런 생각은 7세기에 이슬람교가 모하메드에 의해 창시되고 그 후 두 세력권이 경쟁하는 가운데 이슬람 세력권에 대치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11세기 이후 성지인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에게서 빼앗으려 한 십자군 전쟁 때에 강화되었다.
  
  그러나 같은 기독교권에 속하지만 그리스 정교를 믿는 발칸 반도나 러시아 같은 지역은 카톨릭 지역과는 다른 곳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유럽이라는 말은 15세기까지도 잘 사용되지 않았다.
  
  유럽이 오늘날과 비슷한 지리적 단위로 생각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이후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과, 그 뒤를 이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치열한 종교전쟁으로 하나의 통일된 기독교세계라는 생각이 깨지고 대신 세속적인 가치들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18세기의 계몽사상은 그럼 점에서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계몽사상가들이 세계를 문화의 발전 단계에 따라 구분하고 유럽을 그 최고인 '문명' 단계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다른 지역은 지역마다의 차이는 있으나 '야만'적인 단계에 있었다.
  
  그래서 이제 유럽이 합리성, 근대성, 자유, 진보를 상징하는 문화적 단위로 생각된 반면 비유럽은 비합리성, 야만성, 부자유, 정체(停滯)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프랑스 혁명이나 산업혁명에 의해 증명된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유럽'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내용은 절대적으로 근대의 산물이다. 특히 18세기 이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중심주의는 무엇인가
  
  그러면 유럽중심주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런 유럽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태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유럽 문명이 모든 비유럽 문명에 비해 독특하고 우월하다는 생각이나 가치관, 나아가서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뜻한다.
  유럽이라는 생각이 근대에 만들어졌으니 유럽중심주의도 당연히 근대의 산물이다. 유럽문명이 우월하다는 18세기 사람들의 생각이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발전, 그 결과인 비유럽세계의 지배로 현실적으로도 증명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럽문명이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며 인류사 전체가 근대 유럽문명이라는 최고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인 것처럼 생각하는 유럽중심주의적 태도가 자연히 만들어졌다.
  
  그러니 비유럽의 다른 모든 문명들은 근대 유럽문명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사의 통일된 과정에서 각자 부분적인 역할만을 하는 것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비유럽 문명들의 비중도 크게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중심주의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유럽예외주의이고 하나는 오리엔탈리즘이다. 유럽예외주의는 말 그대로 유럽문명이 특수하고 예외적이라는 주장이다. 유럽 외에 어디에서도 이렇게 합리적이고 진보적이고 근대적인 문명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유럽은 비유럽 세계와는 다른 길을 선택한 세계사의 예외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많은 역사가들이 유럽예외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며 유럽이 성취한 것을 '유럽의 기적'이니 뭐니 하며 치켜세운다. 중세도시, 산업화, 자본주의의 발전, 민주주의 등등 유럽이 이룩한 것은 모두 '기적' 같은 성과라는 것이다.
  
▲ 사이드 (Said, Edward W,)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1978)>이라는 책을 통해 오리엔탈리즘의 논의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이와 달리 오리엔탈리즘은 대체로 18세기 이후 유럽 사람들이 아시아 세계를 본 독특한 관점을 말한다. 16세기부터 시작되나 특히 식민주의가 본격화된 18세기 이후에, 선교사 · 관리 · 학자 · 상인 · 여행자 등 많은 유럽인들의 생각이나 글이 그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시아 세계에 대해 공정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모습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를 안고 있다. 현지인들에게서 박해받은 선교사, 식민지를 다스려야 하고 그 행위를 정당화해야 하는 식민지 관리나 어용학자들이 아시아를 공정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시아 문명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가치나 독자성, 창조성은 대체로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인정하면 아시아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유럽과 비교하여 비합리적이고 낡은, 전통적인 성격만 강조되었다.
  
  결과적으로 유럽은 진보와 문명을 보여주는 반면 아시아는 덜 성숙하고 미개하여 스스로는 발전이 불가능한 곳으로 그려졌다. 그러니 세계사가 당연히 인류의 진보를 대표한다고 믿는 유럽 중심의 것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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