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오늘과 내일](40) 한국에 온 노동자들을 품어야하는 이유

이평래 | 한국외국어대 연구교수·몽골사
출처 : <경향신문> 2007 11 30


-84년전, 몽골에 진 빚이 있다-

얼마 전 한 신문에서 몽골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몽골에도 외국인을 적대시하는 극우단체가 있는데 현금을 많이 지니고 다니는 한국인들이 주로 피해를 본다는 내용이다. 기자는 현지 교민의 입을 빌려 여러 피해 사례를 보고하면서 상황이 이런데도 대사관에서는 팔짱만 끼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사람을 때리고 금품을 뺏는 것은 물론 몹쓸 짓이다. 대사관도 교민 보호라는 고유의 업무를 게을리했다면 마땅히 비판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는 한국인들이 극우단체의 표적이 된 것은 꼭 현금 소지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깝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과 몽골과의 교류가 활발해면서 오히려 몽골인의 한국인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의 골은 점점 더 깊어가고 있는 듯 하다. 사진은 몽골 테를치 국립공원에서 연주하고 있는 몽골마두금합주단. /경향신문 자료사진


몽골 사람들은 원래 한국 사람에 대해 참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내가 처음 몽골에 간 1991년 무렵만 해도 분명히 그랬다. 한국인과 몽골인은 한 뿌리에서 나왔으니 잘 지내야 한다고 그럴 듯한 설명까지 늘어놓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호감은 확실히 같은 동아시아에 속한 중국인과 일본인에 대한 감정과는 차이가 있다. 무슨 특별한 이익도 없는데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무조건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덕분에 나는 대접도 잘 받고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도 잠깐 1990년대 중반 이후 한-몽 교류가 활발해지고 한국인들이 대거 몽골에 진출하면서 몽골인들의 한국에 대한 감정이 꼬이기 시작했다.

국내 언론에 자주 보도된 것처럼 울란바토르 시내를 질주하는 승용차 절반 이상이 한국 차다. 몽골을 찾는 외국 관광객 가운데도 한국 사람이 가장 많다. 몽골에 투자한 외국 업체도 회사 숫자로만 따지면 한국이 수위 그룹을 형성한다.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는 선교사도 숫자나 활동 반경에서 한국 출신이 가장 많고 가장 넓다. 당연하지만 1990년대 초 몇 십 명에 불과하던 교민 수도 1000여명으로 늘어났다. 다른 나라 교민에 비하면 턱없이 적지만 270여만 몽골 인구에 비하면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몽골 체류 한국인 중 절대 다수는 중소 상공인들이나 선교사 또는 선교 목적의 봉사단체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학교, 병원, 복지 시설을 건립하여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척박한 환경에 자본을 투자하여 막 시작된 몽골의 시장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선교사들의 공격적인 선교 활동이 불교의 나라에서 나고 자란 가난한 몽골인들의 마음에 상처를 안겨준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상공인들의 불법 탈법 행위는 기가 찰 정도다. 몽골에 퇴폐 유흥업소를 도입한 장본인들도 다름 아닌 우리 동포들이다. 그 주인들도 대부분 한국에서 간 사람들이다. 심지어 몇 년 전에는 한 대학 강의실에서 누드 사진을 찍다가 발각되어 몽골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몽골 정부에서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가라오케에 대한 일제 단속을 벌였다는 보도도 있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해서일까? 나는 매년 몽골에 갈 때마다 한국 사람에 대한 반감을 피부로 느낀다. 이는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니다. 최근 몽골을 다녀왔다는 이주노동자 센터에서 일하는 한 활동가도 그렇게 보고하고 있다. 자신이 탄 택시 운전사들이 모두 한국인을 싫어하더라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반감을 가진 몽골인 중에는 한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두들겨 맞고 욕먹고 비인간적인 대우에 대한 서러움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금부터 정확히 84년 전인 1923년 7월5일이다. 그 당시 몽골의 국가수반인 보그드 칸에게 한 통의 청원서가 도착했다. 자신을 소련 거주 한인노동자연맹의 위원장이라고 소개한 최치언이라는 사람이 보낸 글이다. 사연은 소련에 사는 한인 3000명의 몽골 이주를 허락해달라는 내용이다. 몽골 정부는 처음에 이 청원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모스크바 주재 대사에게 진상 파악을 지시하고 각료 회의까지 열어 사태에 신속하게 대처했다. 그러다 모스크바 주재 대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사건을 종결해버렸다. 소련의 압력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 더 이상 자료가 없어서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몽골 각 기관 국립공문서 보관소에는 최가 올린 청원서 말고도 1920년대 몽골에서 살았던 한인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다. 대부분 일제의 압제를 피하여 중국이나 러시아를 떠돌다가 살길을 찾아 몽골에 간 사람들의 생활에 관한 기록이다. 주로 몽골에 귀화를 신청하거나 과태료 비용의 탕감을 요청하거나 호구지책으로 아편을 밀매하다가 적발되어 구속된 사람들이 선처를 청원하는 내용이다. 청원서에는 현지 몽골인들이 보증자로 등장한다. ‘몸이 다쳐 일을 못해 과태료를 마련하지 못했으니, 귀화만 허락해주면 국법을 준수하고, 추운 겨울이니 추방만을 면해주시기를’ 등 사연도 하나 같이 애절하다. 그들의 생활이 어땠을지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그중에는 더러 좋은 상전(몽골인)을 만나 그럭저럭 입에 풀칠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못된 주인의 구박과 굶주림에 허덕이다 제 명을 채우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천지가 개벽하여 80여 년 전 한인들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몽골인 후손들이 이제 돈벌이를 위해 한국에서 궂은일을 하고 있다. 물론 그 때 몽골 땅의 한인들과 지금 한국 땅의 몽골인들은 처지가 다르지만 먹고 살기 위해 남의 나라에서 살았거나 현재 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하는 일도 현지 사람들이 꺼리는 3D 업종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아쉬운 사람들이라 별 도리가 없겠지만 두 나라 사람들이 시간을 사이에 두고 왜 그리도 똑같은 운명을 주고받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이 세상살인가 하는 묘한 생각마저 든다.

몽골인들이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오기 시작한 것은 한국인들이 본격으로 몽골에 들어가는 1990년대 중반부터다. 현재 한국 각지에서는 몽골 전체 인구의 1% 정도가 불법 또는 합법적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 동대문구 광희동 일대에 가면 아무 때나 몽골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 어느 한 건물은 말 그대로 한국 속의 작은 몽골을 방불케 한다. 그곳에 가면 음식점에서 미장원, 전화, 국제 우편물 취급소, 환전 등 몽골과 관련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몽골 세상을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현재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몽골 노동자 수는 다른 나라 노동자에 비하면 결코 많지 않다. 그러나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따지면 높은 편이고, 당연히 이들이 고국으로 보낸 돈은 몽골 경제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이주노동의 폐해도 적지 않다. 지금 한국에 와 있는 몽골인들은 전체 이주노동자 중에서 학력이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 자기 나라에서 뭔가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몽골에서 당장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렵고 구해봤자 임금이 낮아 그렇다고는 하나 지금 같은 추세는 몽골 장래를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다.

아무리 돈벌이라고 하지만 한국에서 생활하는 몽골 사람들의 삶은 고달프다. 이 땅의 모든 이주노동자들이 그렇듯이 몽골 친구들도 작은 공장이나 건설 현장 막일 또는 이삿짐센터 등에서 도우미 일을 한다. 대부분 몽골에서는 해보지도 생각해보지도 않은 일이다. 고달플 수밖에 없다. 사람대접은 고사하고 임금을 떼이는 일도 흔하고, 혹시 불법 체류자라면 불시에 들이닥치는 반속반의 눈을 피해야 하니 그 인생이 얼마나 팍팍하겠는가? 더구나 몽골 사람들이 한국에 오기 위해서는 상당한 돈을 들인다. 나는 그 메커니즘을 알 수 없지만 중간 브로커를 경유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벌써 오래 전이다. 나는 몽골을 공부하면서 잊을 수 없는 비극을 경험했다. 한밤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경기도 일산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음주 운전을 하여 큰 사고를 낸 몽골 노동자가 붙잡혀왔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좀 와 달라는 부탁이었다. 급하게 택시를 타고 일산경찰서에 도착하자 남루한 옷을 입은 한 중년 남자가 하얗게 겁을 먹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한국에 온 지 1주일밖에 안 되는 쓰레기 처리장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 일이 끝나면 한국 노동자들과 함께 매일 술을 마셨다고 한다. 사고 당일도 술을 마시고 숙소로 돌아가는 차에 탔는데 한국 운전사가 물건을 사려고 잠깐 비운 동안 운전대를 만지다가 차가 전진하여 바로 앞의 승용차를 박살내 버렸다. 무면허에 음주운전이니 도리가 없었다. 구속되었다. 잘못을 했으니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나 그의 처지가 너무나 딱했다. 한국에 온 지 1주일, 그것도 거금을 주고 왔다가 고된 일에 시달리다 음주로 사고를 내고 철창 신세까지 지고 추방되었다. 그 사람 개인으로 보면 엄청난 비극이다.

그래서 글을 마치면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이 땅에서 일하는 몽골 노동자들에게 좀더 따뜻한 인심을 베풀어 보자고. 인간 평등 인권 등 거창한 구호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지금 한국의 몽골인들은 일제 때 시베리아를 떠돌던 한인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 사람들의 후손이다. 따라서 그들은 선조들이 베푼 선행에 대한 보은을 향유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역시 이렇게 해야 과거 우리 동포들이 진 빚을 갚을 수 있다. 그래야 이 글 서두에 언급한 한국인에 대한 표적 테러도 사라질 것이다. 돌고 도는 것이 사람의 운명인데 100년 후 우리 후손들이 몽골에 가서 신세지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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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정복자로 찾아온 ‘운명의 사랑’
잉카(전 3권)… 앙투안 B. 다니엘 | 진인혜 옮김 | 각권 1만2000원 | 문학동네

한윤정기자
출처 : <경향신문> 2007 11 30


스페인 병사 180명에게 쓰러진 남아메리카 최대제국 잉카의 비극적 역사를 배경으로 스페인 청년 가브리엘과 잉카 공주 아나마야의 사랑을 그린 소설. 철저한 기획과 전문지식, 공동집필로 만들어진 ‘블록버스터’다. 소설이 태어난 경위는 이렇다. 1998년 여름, 프랑스 엑소 출판사 사장이자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를 비롯한 역사소설 개척자인 편집인 베르나르 픽소는 페루 쿠스코를 방문했다. 그곳에 매료된 그는 잉카 이야기를 써줄 작가를 찾는다. 그러나 한 사람으로는 역부족이다. 잉카에 남다른 열정을 지닌 페루 문명사가 베르트랑 우에트, 편집자였다가 소설가로 변신한 앙투안 오두아르, 페루 정복을 주제로 한 소설 ‘사생아들’을 발표했던 중견소설가 장 다니엘 발타사가 앙투안 B 다니엘이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이들의 분업을 통해 역사·문화·기후를 고려한 잉카제국의 배경과 실존인물들의 전기, 그리고 상상 속의 사랑 이야기가 결합됐다.

피사로의 정복 이후 잉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스페인령 쿠스코 자치구.
신비한 푸른 눈의 소녀 아나마야는 잉카족의 습격을 받아 엄마를 잃고 생포된다. 노쇠한 잉카왕은 아나마야에게 제국의 미래에 관한 비밀을 알려주고 숨을 거둔다. 죽은 잉카(태양의 아들이란 뜻으로 왕을 가리킴)의 분신형제가 된 아나마야는 왕의 미라를 쿠스코의 신전으로 옮기는 여정에 오른다. 신탁이 내려지고 아타우알파가 13대 왕에 등극한다. 그러나 이복형제인 우아스카르의 반란으로 피의 물결이 잉카제국을 휩쓴다. 그 사이 툼베스항에는 피사로가 이끄는 스페인 정복대가 도착하고 아나마야는 운명의 사랑인 가브리엘을 만난다.

잉카왕 아타우알파는 1532년 카하마르카 전투에서 180명의 스페인 오합지졸에게 어이없이 패배해 생포된다. 뒤를 이어 망코가 허울뿐인 왕이 되지만 그의 대관식날, 피사로 총독은 스페인의 잉카 통치를 선포하고 약탈을 자행한다. 아나마야는 현자 빌라 오마와 함께 전사들을 모아 전쟁을 준비하고, 가브리엘은 빌라 오마를 좇아 사막으로 들어섰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아나마야와 재회한다.

소설은 잉카제국의 내분과 갈등, 제국주의자들의 악행과 거기에 저항해 잉카 전사들을 돕는 가브리엘과 아나마야의 활약을 따라간다. 가브리엘과 아나마야는 전쟁 통에 헤어졌다가 만나기를 거듭하고, 피사로 총독이 반대파의 손에 죽음을 당한 뒤 비밀의 도시 마추픽추로 향한다.

줄거리도 중요하지만 당대의 고증에 눈을 돌릴 만하다. 투석기를 돌리고 강철 활을 쏘고 도끼를 휘두르는 전투장면, 잉카족의 종교의식, 잉카왕들의 생활모습, 잉카족의 의식주생활, 페루의 자연환경 등 영화를 염두에 둔 장중한 장면이 펼쳐진다. 13세기쯤 티티카카호에서 발원해 세력을 확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잉카제국은 1571년 스페인에 완전히 정복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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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의 열광 끌어낸 재발매 앨범

[세상을 바꾼 노래]⑧ 프랭크 시나트라의 〈올 오어 너싱 앳 올〉(1939년)

박은석/대중음악평론가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1월 30일


» 프랭크 시나트라의 〈올 오어 너싱 앳 올〉(1939년)
 
 
자본주의의 가장 첨예한 전선인 미국에서는 예술분야 종사자들도 노조활동을 통한 이윤추구에 적극적이다. 최근 미국작가노조의 파업이 그 단적인 예다. 음악계라고 다르지 않다. ‘미국음악가연맹’은 1896년 설립된 이래 지금까지 두 차례의 대대적인 파업을 감행한 바 있다. 1942년 8월부터 1943년 말(일부 레코드회사와는 1944년)까지 이어진 1차와 1948년의 2차 파업이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노조위원장 제임스 페트릴로가 매번 파업을 주도했고, 그때마다 노조 소속 음악가들의 연주 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그 때문에 음악가 노조의 파업은 이른바 ‘페트릴로 금지령’이라 불린다.

1차 ‘페트릴로 금지령’은 음반판매량의 증가가 레코드회사와 라디오 방송국의 배만 불린다는 주장에서 시작하였다. 공연활동의 기회와 방송에서의 라이브 연주가 줄어들면서 연주인들의 기회가 제한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파업의 여파로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새로운 음반제작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기출시작의 재발매가 속출했고 악기 연주자가 필요없는 아카펠라 음악이 유행했던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레코드회사들의 궁여지책에서 비롯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또다른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요컨대, 프랭크 시나트라의 경우가 그렇다. 1943년 당시 프랭크 시나트라(1915~1998)는 메이저회사인 컬럼비아와 계약을 맺으면서 스타덤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음악가노조의 파업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몸이 단 시나트라와 컬럼비아는 고심 끝에 기존 음반이라도 재발매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시나트라가 해리 제임스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1939년 발표했던 〈올 오어 너싱 앳 올〉이다. 처음 발표했을 당시 유명 라이브클럽(빅토르 위고 카페)의 매니저로부터 “파리 한 마리의 관심도 끌지 못할 것”이라는 혹평을 받기까지 했던 곡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이 앞섰다.

인생이 흥미로운 것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1939년 녹음을 손끝 하나 대지 않고 고스란히 재발매한 〈올 오어 너싱 앳 올〉은 누구도 기대하지 못한 대히트를 기록했다. 경쟁상대가 많지 않았다는 정황적 요인이 작용하기도 했지만 시나트라의 개인적 매력이 새로운 세대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는 점이 더욱 주효했다. 평이한 스탠더드 팝 스타일의 〈올 오어 너싱 앳 올〉은 시나트라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통해 좀더 로맨틱한 경지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힘입어 프랭크 시나트라는 소녀 팬들의 폭동에 가까운 열광을 끌어낸 최초의 스타로 등극했던 것이다.

〈올 오어 너싱 앳 올〉은 프랭크 시나트라의 전성시대 개막을 알린 ‘슬리퍼 히트’(예상치 않은 성공작)였다. 더불어 “사랑에 관한 한, 모든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중간이란 있을 수 없다”는 노랫말은 악명 높은 바람둥이로서 프랭크 시나트라의 개인사를 예견한 것이기도 했다. ‘세기의 목소리’로 불린 ‘20세기 최고의 엔터테이너’의 화려한 경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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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땅밑 ‘1800년’이 살아 있다

‘시멘트’ 광화문 걷어내니 대원군 중건한 광화문터 나오고
그 밑엔 태조때 축조물 온전…뻘흙 메운 기법은 백제때 것


임종업 선임기자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 11 30


» 광화문 본래 자리로 추정되는 곳 아스팔트를 70cm 가량 걷어내자 고종 때 중건한 ‘1867년 광화문’ 터가 드러나고 다시 70cm를 걷어내자 태조 때 창건한 ‘1395년 광화문’ 터가 발견됐다. 애초의 광화문은 수천년 쌓인 뻘층에 말뚝을 촘촘히 박고 그 위에 흙을 시루떡처럼 여섯 켜를 쌓아올려 터를 닦은 것으로 드러났다. 뻘층에서 터까지는 3m가 훨씬 넘는다.
 

29일 오전 11시,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금강송 숲. 요란한 전기톱 소리가 적막을 깬다. 100년은 족히 넘었을 아름드리 금강송 한 그루가 쓰러졌다. 가지를 쳐내 매끈해진 나무는 산림청 헬기에 달려 인근 야적장으로 옮겨졌다.

» 광화문 본래 자리로 추정되는 곳 아스팔트를 70cm 가량 걷어내자 고종 때 중건한 ‘1867년 광화문’ 터가 드러나고 다시 70cm를 걷어내자 태조 때 창건한 ‘1395년 광화문’ 터가 발견됐다. 애초의 광화문은 수천년 쌓인 뻘층에 말뚝을 촘촘히 박고 그 위에 흙을 시루떡처럼 여섯 켜를 쌓아올려 터를 닦은 것으로 드러났다. 뻘층에서 터까지는 3m가 훨씬 넘는다.
 
 
이렇게 강릉과 양양에서 공수한 수령 80~250년 금강송 스물여섯개는 서울 경복궁에서 1년여 동안 건조 과정에 들어간다. 나무가 마르는 한편으로 다듬은 화강석재를 쌓아올려 무지개문을 만든다. 2009년께 마른 금강송이 기둥과 대들보가 되어 누각으로 우뚝 서면 광화문은 비로소 제 모습을 찾을 터이다.

광화문 복원작업이 후반으로 치닫고 있다. 한켠에서는 이렇게 광화문에 새로운 역사를 더하고 있고, 한켠에선 시간을 거슬러 광화문에 쌓인 옛 역사의 켜를 들춰내고 있다. 복원사업을 계기로 발굴팀이 들여다본 광화문 터 땅속은 수백년 세월이 타임캡슐처럼 고스란히 담겨 세월의 역순으로 역사의 층위를 이루고 있었다.

■ 1968년 광화문

박정희 대통령때 만든 이 구조물은 ‘광화문’이란 현판을 빼면 온통 돌과 콘크리트다. 철거를 위해 지하 10m까지 굴삭기를 내려 기초를 뽑아냈다. 현재 고궁박물관 옆 공터에 진열된 잔해를 보면 기둥과 천장은 물론 공포와 서까래도 콘크리트로 만들었다. 당시 정부가 녹화를 위해 벌채를 금하면서 시범케이스로 목재를 전혀 쓰지 않은 공법을 채택했다. 1억5000만원의 공사비가 들었는데, ‘5대 궁궐 및 능원 보수’ 비용이 1100만원이었던 것과 견주면 들인 공이 비친다. ‘현지 목조 복원’(문화재관리국), ‘원래 자리 콘크리트 복원’(서울시)으로 의견이 갈렸으나 대통령 지시로 결판났다. 1968년 12월12일치 신문을 보면 3월15일 기공해 272일 동안 연인원 12만8천명이 투입돼 완성한 구조물은 길이 88.6m(양쪽 담장 포함), 높이 15.4m, 무게 7800t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1968년 광화문’은 콘크리트 덩어리인 점 외에 터에 대한 고증을 거치지 않았다. 1927년 일제가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헐어 없애려다 마지못해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현재 민속박물관 정문자리)으로 옮겨놓은 원래의 광화문 건물은 한국전쟁(1951년) 중 폭격으로 소실됐다. 터 역시 일제가 싹뚝 깎아 평평하게 다듬고 전찻길로 내주어 잊혀졌다. 1968년 광화문은 안으로 들여세운 총독부 정문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아 총독부 건물을 승계한 중앙청 건물과 함께 옛 남산의 신궁자리를 향하게 된 것이다.

1867년 광화문

광화문 발굴팀의 추정은 옳았다. 원래 광화문, 곧 고종 4년인 1867년 만든 ‘1867년 광화문’은 ‘1968년 광화문’보다 1 정도 앞에 있었다고 본 발굴팀은 두 달 간의 발굴 끝에 지난 9월 남쪽으로 11.2m, 서쪽으로 13. 떨어진 곳의 도로 아래 70cm 지점에서 동서 34.8m, 남북 10.2m(총14.7m) 크기의 ‘1867년 광화문’ 기단부를 찾아냈다. 일제가 흩뜨리고 ‘1968년 광화문’을 지으면서 일부를 파먹었지만 홍예문 자리가 분명했으며 정문의 위엄을 위해 돋운 월대와 임금이 다니던 어도를 일부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

»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광화문. 출처 : <신궁궐기행> (대원사)
 

‘1867년 광화문’은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작업 가운데 일부. 그해 5월17일 공사를 시작해 9월18일 기둥을 세우고 10월11일 대들보를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공사기간이 농번기와 겹치는 것은 서울이 도시화하면서 노임노동자가 형성됐음을 반영하고, 비교적 짧은 다섯 달만에 완공한 것은 민간 목재상의 출현, 조립식 가공기술 발달, 기술자의 직능분화 등의 결과라고 김동욱 교수(경기대)는 분석한다. 당시 총감독은 스물네살 김수연. 전문가 기술자인 그는 근정전 설계도 감독했다.

1395년 광화문

원위치를 확인해 1차 목표를 이룬 발굴팀은 욕심을 더 냈다. ‘1968년 광화문’이 파먹어 어차피 훼손된 ‘1867년 광화문’ 기단부 북쪽 면을 절개해 보자는 것. 흙을 걷어내며 아래로 파들어가자 70cm 바로 아래서 태조 이성계 때 축조한 원래 광화문 곧 ‘1395년 광화문’ 기단부 층이 드러났다. 이와 함께 1867년 광화문 문설주 자리 아래를 파보니 1395년 광화문 문설주가 1곳만 일부 파손되고 나머지 5곳은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1395년에 지어져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까지 200여년 동안 무수한 발길에 반들반들 닳은 흔적이 뚜렷했다. 발굴팀은 1867년 태조 때와 고종 때의 광화문 터가 70cm 높이의 차이가 있을 뿐 완전히 일치한다고 추정했다.

중건한 1867년 광화문을 태조 때 터 위에 그대로 세웠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된 바 없다. 발굴팀 최인화 학예연구사는 “‘특이한 것만 기록한다’는 일반적 기술원칙을 준용하면 기획자인 대원군 이하응이나 총감독 김수연은 ‘중건하는 궁궐은 원래의 자리에 세운다’는 의식을 당연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화재청 궁릉관리과 조규현씨는 “통상 100년마다 지표가 1m 정도 상승하는데 중건하면서 기존 터를 활용하면 튼튼한 터를 얻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말하자면 의도하지 않은 타임캡슐인 셈이다.

1800년 깃든 ‘타임캡슐’

타임캡슐은 1395년 기단부 아래에도 있었다. 잡돌과 사질토를 시루떡처럼 여섯켜로 쌓은 지층이 드러났고 또 그 아래에는 10cm 굵기의 80~140cm 말뚝을 30~50cm 간격으로 촘촘히 박은 뻘흙층이 드러났다. 1395년 광화문 기단은 뻘흙 자리를 메우고 세웠다는 얘기다. 본래 경복궁 자리는 북악산 양쪽 계곡에서 발원해 청계천과 합류하는 개천의 중간 지점 선상지로, 퇴적토가 쌓이고 습지처럼 축축한 땅이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습지를 판축해 튼튼한 터로 활용하는 것은 2세기 때의 백제 몽촌토성, 부여외성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전통기법이다. 뻘흙에 촘촘히 박은 나무기둥이 빨대가 되어 습기를 위쪽 시루떡 흙층으로 뽑아올리면 뻘흙층이 단단히 굳어 완벽한 기초구실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광화문 터는 1800년의 시간을 머금은 타임캡슐인 셈이다. 베어온 금강송이 마르기 전에 타임캡슐을 어찌할 것인가 현명하게 결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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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전기를 다루는 서평을 읽으면서 책이 왜 이렇게 두껍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올해 들어와 읽은 다른 전기들에 생각이 미쳤다. 그 책들을 펼쳐보니 <빌헬름 라이히> 787쪽,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 1,055쪽 , <존리드 평전> 701쪽, <노신 평전> 421쪽, <이탁오 평전> 589쪽, <밥 말리> 507쪽(이 책은 활자가 다른 책들에 비해 1포인트 정도 작은데, 보통의 활자로 치면 600쪽이 넘는다) 등이다.

그러고 보니 철학자나 정치사상가들에 관한 전기는 대부분 엄청난 분량이었던 것 같다. 2권으로 나누어 번역된 미셸 푸코나 비트겐슈타인의 전기도 800쪽 분량이었고, 호치민 전기도 1,000쪽 가량 됐으니...

하지만 대부분 책값은 2~3 만원 정도였었는데(제일 두꺼웠던 <괴벨스>가 35,000원이었다), 한나 아렌트 전기는 신기록을 세운다. 할인받아도 50,000원이다. 완전 허걱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정치철학자의 삶
한나 아렌트 전기 번역출간 / 홍원표 옮김 / 955쪽 / 5만5천원

김승욱 기자
출처 : <연합뉴스> 2007년 11월 29일


(서울=연합뉴스) = "이 책은 대작이다", "그는 마르크스와 견줄만 하다". 1951년 출간된 '전체주의의 기원'에 쏟아진 비평가들의 찬사는 대단했다.

   1963년 출간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한 악(惡)의 본질을 해부했다. 이 책은 '악의 문제에 대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기여'로 평가받았다.

   '전체주의의 기원'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저자이자 '제2의 로자 룩셈부르크',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정치철학자'로 불리는 한나 아렌트(1906-1975)의 전기가 최근 번역.출간됐다.

   미국 컬럼비아대 정신분석재활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중인 엘리자베스 영-브륄이 펴낸 '한나 아렌트 전기(인간사랑 펴냄)'는 1천 쪽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으로 아렌트의 일생과 사상을 풀어냈다.

   아렌트는 독일 하노버 근교에서 태어났다. 그의 몸에는 아버지 파울 아렌트와 어머니 마르타 아렌트로부터 물려받은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렌트는 일생동안 유대인임을 의식했고 이는 그의 사상에 바탕을 이뤘다.

   18살이 되던 해 마부르크대학교에 진학한 아렌트는 평생 동안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칠 한 남성을 만난다. 아렌트는 자신을 가르친 마르틴 하이데거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유부남이면서 17살이나 연상인 하이데거는 아렌트의 사랑을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25년 여름 아렌트는 아무리 깊은 관계를 맺더라도 하이데거가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당신은 왜 나에게 손을 내미는지요?/ 부끄럽게, 그것이 마치 비밀이라도 되나요?/ 당신은 우리의 포도주를 알지 못할 만큼/ 먼 나라에서 온 사람인가요?'
비록 하이데거와의 사랑은 지속되지 못했지만 하이데거와 아렌트는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훗날 하이데거는 "아렌트가 없었다면 '존재와 시간(1927년 출간된 하이데거의 대표작)'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아렌트는 공부를 계속해 1928년 칼 야스퍼스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독일 생활은 전체주의의 광풍에 휘말려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1933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됐다 풀려난 아렌트는 파리로 도피했으며 1941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51년은 아렌트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된 해였다. '전체주의의 기원'이 출간된 해이기도 했지만 바로 그 해에 아렌트는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1933년 이후 아렌트는 18년 간 무국적자였다.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유명세를 탄 아렌트는 놀람과 불편함이 뒤섞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스승인 야스퍼스에게 "일주일 전 저는 신문의 표지인물이 됐다는 것과 신문 판매대에서 제 자신을 목격한 것에 대해 선생님께 어떤 편지를 써야 하는지요?"라고 물었다.

   아렌트는 텔레비전 대담에 출연할 때도 등 뒤에 카메라를 설치할 것을 요구할 정도로 얼굴이 공개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피했다. 자신의 기질과 성향은 정치행위나 공적인 삶에는 부적합하다는 이유에서였다.

   1960년 5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에서 이스라엘 비밀경찰은 아이히만이라는 남자를 체포했다. 그는 유대인 대량학살의 집행자였다.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으로 이송돼 특별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교수형을 선고 받는다.

   아이히만의 재판 소식을 들은 아렌트는 대학 강의를 모두 취소하고 '뉴요커'지의 재정지원을 받아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의 재판을 참관했다.

   아렌트가 관찰한 아이히만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전혀 깨닫지 못한 자였다. 그는 전혀 도착적이지도, 가학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머리에 뿔난 괴물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

   미국으로 돌아온 아렌트는 뉴요커지에 악의 평범성을 파헤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5차례 연재했으며 이를 정리해 같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1975년 아렌트는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으며 자식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몰려들었지만 지적인 동료라 부를 만한 사람은 열렬하게 사랑했던 하이데거 정도였다. 나치에 협력한 이유로 곤경에 처해있던 하이데거는 아렌트가 세상을 뜬 지 1년 뒤인 1976년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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