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념있다는 그 말

 

 

우리 사회에서 연예인은 언제부턴가 ‘개념연예인’과 ‘무개념 연예인’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탈북자 북송반대? - 개념 〇, 종편행? - 개념 ⨉, 아프리카 봉사활동? - 개념 〇, 인종차별발언? - 개념 ⨉, 유기견 보호운동? -개념 〇, 본인사업 홍보? - 개념 ⨉...

 

 

남을 배려하고 올바른 태도를 보이면 생각은 (없을 것 같은데 ㅋ) 좀 있어 보이므로 ‘개념있다’고 한다. 반대로 주변에 민폐나 끼치고 생각 없이 행동하면 ‘개념없다’고 한다. 개념을 생각이 반영된 인식의 결과로 바라보는 태도다. 여기까진 원래 개념의 일차적 정의가 ‘어떤 사물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말하므로 수긍이 간다. 그런데 자기 생각을 소신 있게 말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 생각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대중의 동참을 요구하는 (결과적으로)정치적인 행위도 ‘개념있다’고 보고 개념연예인으로 언급한다면? 이 심리는 이미 반대쪽 의견을 가진 상대가 ‘개념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깔고 집단동의의 공감을 배경으로 잣대를 선점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대통령을 포함한 보수 여당 정치인, 자본가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 일부 기독교 우파는 적들로 보고 그들의 개념은 인정하지 않겠다가 아닌 아예 없다고 규정해 놓는 것이다. 이 암묵적 동의가 하나의 대중적 이데올로기로 표출된 것이 ‘나꼼수빠’가 아닐까.

 

 

왜냐하면 김어준은 누가 뭐래도 ‘우리 편’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이다. ‘우리 편’은 누구인가. 바로 ‘저들’을 뺀 나머지다. ‘저들’은 당연히 가카와 그 떨거지, 그리고 새누리당, 위선의 아이콘(종교인), 대기업, 보수 언론이다. 정재승은 이를 김어준의 ‘우리 편 철학’이라 했다. 나꼼수의 인기비결은 바로 저들을 뺀 우리 편 이야기, 우리끼리 하는, 우리가 제일 하고 싶고 듣고 싶은 이야기에 있는 것이다.

 

 

#2. 개념 좀 한다는 사람들

 

 

그렇다면 요즘 나꼼수에 독설을 날리고 있는 진중권은 이를 뭐라고 할까. 상상력을 통해 사실과 픽션이 자유롭게 결합하는 특성이 강하므로 파타피지컬(Pataphysical)한 태도가 밑바탕에 깔린 하나의 놀이라고 말한다. 진중권은 어떤 사회현상이 일어나면 자주 파타피지컬하다 말한다. 대표적인 예가 허경영 신드롬인데 젊은이들이 허경영 콘서트에 열광하는 것은 허경영의 허구를 진실로 믿어서가 아니다. 모두 빤한 거짓말인지 알면서도 거짓말을 진짜인 것처럼 대우해주고 믿어주는 척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실제 마음속으로는 거짓말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자각을 하며 서로 의심없이 그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진중권은 디지털 세대의 상상력을 말할 때도 파타피직스를 적용한다. 가상현실 나아가 증강현실 기반의 디지털 세대는 어떤 것이 픽션인지 뻔히 알면서도 마치 사실인 척해주는 놀이에 익숙하고 그것은 디지털 문화의 일반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진중권이 지적한 것은 픽션인지 알고서도 사실인척 믿어주고 즐기는 놀이가 정말로 사실로 받아들여질 때의 위험성이었다.(뭐 개인적으로는 더 짜릿했지만 ㅋ) 그냥 한바탕 놀고 마는 것이 아니라 뒤돌아보니 믿으라고 선동하는 일이 될 때의 사회적 파장과 영향력에 대한 경고였다.(그러니까 파타피지컬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사실 놀이는 놀이로 끝나야 한다는 속내를 담고 있는 건 아닐지 ㅠ, 이데올로기가 헤게모니가 되는 일은 지겨우니까)

 

 

그럼 여기서, 파타피직스(pataphysics)는 무엇일까? 작년 후반기에 출간된 진중권의 아이콘이 떠오른다. 그는 파타피직스 같은 ‘개념어’를 통하면 전문적 철학 지식을 완벽하게 갖추지 않아도 철학적 수준의 깊은 사유가 가능하다 한 바 있다. ‘형이상학’(形以上學)이 ‘메타피직스’(metaphysics)임을 알고 있다면 우선 파타피직스는 형이상학에서 파생된 것일까, 싶기도 하다. ‘메타’(meta)는 ‘이후’라는 뜻이고 ‘파타’(pata)는 그리스어로 ‘이상’을 뜻한다. 물리학의 이상?? 철학 그 너머? 파타피직스는 온갖 우스꽝스러운 부조리로 가득 찬 사이비 철학(혹은 과학)을 가리킨다. 이른바 과학과 철학의 설명을 넘는 무엇이다. 파타피직스라는 개념어를 기준으로 진중권은 아주 자주 파타피지컬하다, 파타피지션이다, 파타포를 활용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작년 가을 철학의 38가지 개념을 소개한다고 해서 사실 기대를 가지고 책을 펼쳐보았지만 칼럼연재를 모은 것이기에 깊이 면에서는 실망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로 사회적 현상을 예로 들어 철학적 개념을 적용해 분석하므로 어디 가서 젠체하는 신조어 주력 사용자들에 주눅들진 않을 수 있다. 결국 미학과 철학을 공부한 입장에서 자기 같은 사유의 틀을 제시하는 것인데 아무리 개념어를 쉽게 설명해주어도 우리 입에서 혹은 글에서 체화되어 사용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고 보면 된다. 진중권은 개념의 사용법을 보여주기 위해 여러 범례들을 제시했고 우리는 하나의 사건과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배우면 된다. 나꼼수를 바로 파타피지컬하다고 하는 것처럼.

 

 

철학에서의 개념은 여러 관념 속에서 공통된 요소를 뽑아 종합하여 얻은 하나의 보편적 관념을 말한다. 진중권의 <아이콘>이 개념이라기 보다는 용어 위주여서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이 책은 딱 그 지점을 보완했다고 할까. 조광제의《철학 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사전》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현상학까지, 철학을 대표하는 80개의 개념어를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제가 ‘서양철학의 역사를 움직인 주요 개념’이므로 당연히 철학사의 개괄적 이해에 도움이 된다.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 기본에 충실했다. 처음에 카오스와 코스모스로 시작하는 도입이 좋다. (결정적으로 두껍지도 않다)

 

 

개념어들은 단순한 용어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등을 둘러싼 모든 사유의 기초가 된다. 개념어를 많이 알고 있다면 그 사유의 폭과 해석의 틀이 풍부할 것이다. 문화비평가 이택광은 ‘주이상스’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주이상스는 불어로 고통스럽지만 멈출 수 없는 극치의 즐거움을 뜻한다. 그가 분석하는 대중은 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중간계급이다. 이들 중간계급은 사회구조적으로 금지된 억압을 방어하는 기제로서, 기존 질서의 붕괴를 막기 위한 대책으로 (지적인)주이상스를 끊임없이 요청하는 주인공으로 근거한다. 통섭학자 최재천은 호모 사피엔스가 자연과 공생하는 종으로 거듭나야 된다며 ‘호모 심비우스’를 주장한다. 그리고 가끔은 에드워드 윌슨이 생물다양성의 보존을 호소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대책으로 주창한 ‘생명사랑biophilia'의 개념, ’바이오 필리아‘를 제안하기도 한다. 통섭의 시대, 공감의 시대를 맞아 우리에게 ’다윈 지능(Darwinian intelligence)‘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최근에 에세이를 펴낸 소설가 김형경은 훈련하여 몸에 베개 한다는 의미에서 ’훈습‘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훈습은 '정신분석 과정을 철저히 이행하는 작업(Working-through)'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인데 엄밀히 말하면 불교에서 빌려온 용어이다. 하지만 개념적 수사적으로 그 우월한 뉘앙스가 듬뿍 실려오지 않는가.

 

 

글쓰는 입장에서 가장 짜증날 때가 사전을 찾았는데 더 짜증 날 경우다. 예를 들어 ‘대추나무’의 뜻이 뭘까 궁금해 사전을 뒤져봤더니 ‘대추가 열리는 나무’ 라고 적혀 있을 때. 이런 어이없고 민망할 때가 있나. 그런데 사전이 은근히 그런 식이 많다. 여기서 내가 대추도 모르고 나무도 몰랐다면 더 폭발할 것이 자명하다. 하나의 개념을 이해하려면 필히 다른 개념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여러 다른 개념들로 하나의 개념을 이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지식이 딸리거나 표현력이 부족하면 별수 없이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개념으로 분석틀을 만들고 그 아래에서 책도 까고 사람도 욕하고 방송도 비난하고 그러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자주 가져와 자신 있게 쓰는 개념이 바로 그 사람의 지적수준이고 인격인 것이다.

 

 

글쓰기에 자신이 없는 것도 실은 어떤 떠오르는 생각을 자기만의 개념으로 구성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개념을 구체화하고 또 상상을 개념으로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책은 많다. 이외수의 <감성사전>은 사물과 감정을 관점을 바꾸어 보는데 아주 유용하다. 사회학자 남경태의 <개념어 사전>은 인문학적 통찰이 돋보인다. 이어령의 <젊음의 탄생>은 개념 짝짓기에 그만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은 내가 아는 것이 무척이나 없구나를 알려주는데 기여한다.

 

 

 

 

 

 

 

 

 

 

 

 

 

 

 

 

 

 

#3. 개념 오가는 장소를 위하여

 

 

그렇다면,

여기 알라딘은 개념이 무엇일까. 아니 알라딘 서재는 개념이 있는 곳일까. 사회과학적으로 보았을 때 개념은 구체적인 사실들이 귀납하여 일반화된 생각이다. 예를 들어 시청자 대다수가 출생의 비밀, 불륜이 근간이 되어 배신당한 여인이 상상할 수 없는 복수를 하는 형식을 막장 드라마라고 할 때 ‘막장 드라마’의 개념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생각할 때 알라딘 서재는 공개와 비공개가 사이좋게 조화를 이루는 지역이다. 투명과 자율이 비교적 우선시 되는 개방성을 지향한다. 선택과 추천을 중요가치로 인식하는 곳이다. 분명한 건 무슨 개념이라 규정지을 순 없지만 칸트 쪽이건 마르크스 쪽이건 둘 다 개념이 있는 쪽은 맞다. 그러나 자율적 가치는 필히 균형과 책임을 수반한다. 상생의 생태계에서는 구성원 모두가 권력자이고 협력자이다. 권력이 어느 한 곳에 집중되는 헤게모니가 발생할 때 반사적으로 상응하는 가치집단이 생기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저들과 우리 편이 나뉘어 진다. 그러다 보면 뒷담화가 주담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 앞에서는 좋아요! 했다가 뒤돌아서 웃기네! 가 되는 것이다. 소박하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구리동전이 되지 말고 유리구슬이 되었으면 한다. 앞과 뒷면이 구분되어 존재하지 않고 입체적이면서도 속이 투명했으면 한다. 던져지지 않고 굴러갔으면 한다. 유리는 깨지기 쉽고 구슬은 정착하지 않으니 잃어버리기도 쉽다. 그렇기 때문에 유사품에 주의하고 취급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다. 막돼먹은 서재씨는 곤란하다.

 

 

아침에 이어령 전 장관의 딸 이민아님의 부고를 들었다. 아직 한창인 나이에 위암으로 생을 마감했으니 얼마나 눈 감기가 어려웠을까.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책도 한권 안 사봤지만 마음이 아프다. 엊그제 화이트 데이라고 동네 마트 총각이 롤리팝 캔디를 두 개나 주었다. 달달한 주말이 될지 알았는데 씁쓸하기 짝이 없다. 작가님의 명복을 빈다. 3월이 가고 있다. 성당에서 왔다고 무공해 사과 쨈 드리러 왔다고 하는 걸 야박하게 문을 닫았다. 공짜는 싫어요, 이렇게 말했다.(총각이 줄 때 낼름 받은 건 뭐고 ㅠㅠ) 

 

 

좀 더 정중하게 거절 할 걸 그랬다. 개념이 별 건가. 그 여자 참 개념없네, 나라면 그랬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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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3-16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한사람님, 이 글 참 좋다..
앞에서 좋아요! 했다가 뒤돌아서 웃기네! 가 눈에 확 들어오면서 드물게 쉬운 글인데 생각하게 해요.
예민하면 글쓰고 그림 그리고 하는 예술가로서는 도움 되지만 보통 사람으로 사회생활하기에 힘든 것 같아요. 느끼는 건 본능적이고 예민한 편인데 실생활에서 타인의 삶에는 무심한 편이라 딱히 주는 게 없으니 받는 것도 적어서 별로 상처로 돌아오지 않는 게 제 삶에서 스스로 평행을 맞추는 건지, 그래서 제가 좀 편하게 사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참.. 먹먹했어요. 살아생전 내도록 아프고 자식마저도 잃으신 분인데, 삶이 참 누군가에게 야박하구나..

그나저나 잼은 그냥 잼이었을까요?

한사람 2012-03-19 10:51   좋아요 0 | URL

문 닫고 나서 잼의 잔상이 한참 남았어요.. 사과잼이 예쁜 병에 더 예쁜 비닐로 포장이 되어 있었죠.
우리집은 일층이라 가끔 그런 분들이 오거든요 ㅠ

저는 감수성도 필요이상으로 예민하고 이성의 그물도 쓸데없이 촘촘해요.
그래서 사는게 엄청 피곤하죠 ㅠㅠㅠㅠㅠ

어제 날씨가 완전 봄날이더만 오늘은 다시 변덕이네요
(실은 오늘 제 생일이라 굉장히 우울해요 ㅠㅠㅠㅠ 엄마 생각이 나서리...)

cyrus 2012-03-16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요. '개념'을 제대로 알고 있어라고요,
언뜻 들어보면 별 것도 아니고 그냥 쉽게 지나쳐버리는 말이지만, 공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개념을 알고 있었야한다는 것은 중요한 삶의 진리인거 같아요.
그래서 우리 사회에 '개념'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왜곡된 의미로 자신의 주장을 고집한다거나
정말로 '개념'이 없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무개념한 사람들이 많은거 같아요.

한사람 2012-03-19 10:54   좋아요 0 | URL

생각이 많아도 다 개념있는 사람이 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어떻게 살고 행동하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실 생활에서는요.
물론 생각을 안했고 고민도 없었으니 그런 개념없는 행동을 하게 되는 거겠지만요 ㅠ
그런데 요즘 저 같으면 생각은 많은데
막상 실천하지 못하는 일이 더 많아요..
특히 책에서 얻은 지식들은 그것으로 끝나는 게 대부분이죠 ㅋㅋㅋ

가연 2012-03-18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 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사전은 제법 괜찮아보이네요ㅎ 그러고보면 아리스토텔레스도.. 자신의 저서 중간에 개념어 사전을 끼워넣었던 기억이 나네요ㅎㅎ 고대로부터 개념은 참 중요했나봅니다, 풋. 사실 근데 요즘 일반적으로 쓰는 개념있다, 없다와 같은 말과 독서할 때 쓰는 개념의 정립과는 좀 차이가 있는 듯도 하네요.

화이트데이가 며칠 전인데 저는 밥먹으러 갔다가 사탕을 받았.. 그리고 그 다음날 길에 서있었는데 Bar오픈한다고 왠 여성이 사탕과 명함을 주더군요. 젠장, 난 또 갑자기 똑바로 쳐다보면서 다가오기에 신종헌팅인가 했네!ㅠㅠㅠ ㅋㅋㅋㅋㅋ

한사람 2012-03-19 10:57   좋아요 0 | URL

예, 생각보다 괜찮아요.
개념정리 한 책이 좀 보편적인게 있었으면 했어요-철학쪽에서는요, 제가 좀 지식이 짧아서 ㅋㅋㅋ-
철학 아카데미에서 강의한 내용이라 기본에 충실했어요.

빠 오픈한다고 준 사탕과 명함이라...ㅋㅋ
옛날 생각나네요.
만약 그 여성이 아주 예뻤다면 십중 팔구 그 여성은 빠에 없습니다 ㅋㅋㅋㅋ
 
난설헌 -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꽃잎이 지는 것이 슬픈 이유는 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하루건 열흘이건 최고로 아름답게 피운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영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꽃이 영원히 피는 것이라면 꽃은 아름답지도 슬프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꽃은 왜 어차피 지고 말 지 알면서도 온몸을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는 것일까. 혹시 꽃이 피고 지는 건 한 번의 아름다움이 시들어 버리는 일이 아니라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거듭나기 위해 자신과 약속된 과정은 아닐까. 한번 만개하여 분분히 떨어진 꽃잎도 다음 계절엔 어느새 꽃봉오리로 다시 움트고 예전처럼 피어나는 걸 보면 꽃은 한번 피고 지는 아름다움을 단지 영원히 반복한다는 생각이 든다. 온 종이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넘기는 내내 눈시울이 붉어진 이토록 처연한 이야기를 보니 꽃은 영원하기 위해 지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져버린 생명에서도 이처럼 진하고 서러운 꽃의 향기를 맡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그미는 내게 그리움으로 눈물진 부용꽃이었고 붉은 빗줄기로 내리는 철쭉이었고 맨살로 벌거벗은 백일홍이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도 꽃으로 피고 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은 영원을 꿈꿀 수 있는 존재였다.

 

 

단지 삶의 비밀을 먼저 알아버렸기에 신의 질투를 사 생을 일찍 마감한 사람들은 많았다. 우리가 아는 요절한 시인들은 필요이상으로 고지식하거나 이상적이거나 정의로왔기에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죽음에게 내어줄 수 있었다. 천재적인 시인으로 태어난다는 건 다분 속세의 형벌이라는 전언을 내포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그미의 스승이었던 이 도사는 일찍이 ‘천재도 과하면 독이 된다’고 행여나 그미가 천재성의 대가로 불행의 늪에 빠질까봐 얼마나 염려했던가. ‘천재란 필연적으로 자신이 속한 시대와 불화하기 십상’이라는 그의 통찰이 말해주듯 그미가 요절한 이유는 범속한 세상에서 살아가기엔 너무나 고결했고 뛰어났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런데 난설헌은 여덟 살에 이미 두보와 견줄만한 시를 써낸 신동이기도 했지만 하필 조선 땅에 태어났고 여성인데다가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는 3대 악재가 겹쳐진 인물이었다. 조선의 여인은 재능도 형벌이었다. 작가는 4백년도 더 된 이 여성의 핏빛 봉우리를 무덤 속에서 꺼내어 다시 숙연하게 꽃피우도록 하였다. 내가 지금의 나이만큼 한 번 더 산다면 꼭 작가의 나이가 된다. 나는 그때 내 재능을 꽃 피울 수 있을까. 질곡 많은 한국의 근 현대사를 몸소 헤쳐 나온 작가가 발굴해낸 봉우리는 난설헌으로 상징되는 우리네 여인들의 아까운 재능의 총체, 그 모든 눈물의 진액들인지 모른다. 흰 명주 수건에 붉게 물든 그미의 피눈물이 어찌 우리 가슴에 결결이 맺히지 않겠는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공교롭게도 그미가 살았던 조선중기와 동시대를 살았던 한 명의 서양 철학자가 퍼뜩 떠올랐다. 그도 그미처럼 부유한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언어와 다양한 학문을 교육받았으며 독서에 몰두하다가 문학적 사유에 재능을 보인 사람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도 가장 친한 친구와 아버지, 남동생, 자식을 연달아 잃으면서 고독의 시간과 투쟁하는 삶을 살아갔다. 하지만 그가 그미와 결정적으로 달랐던 건 조선이 아닌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남성이었고 여자와 결혼한데 있었다. 바로 전 생애를 통틀어 수상록 <隨想錄, Essais, 1586> 한 작품을 남긴 몽테뉴이다. 몽테뉴가 극심한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상실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은 죽기직전까지 ‘자기탑’에서 글을 썼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미에게도 시를 쓸 수 있는 자유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이 허락되었다면 하는 통한의 푸념을 해본다. 틀림없이 몽테뉴보다 더 위대하고 아름답고 방대한 분량의 고전을 우리에게 남겨주지 않았을까. 작가의 넋두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고 분하고 슬픈 일이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싶어 새삼 안타까움이 복받친다. 사람과 시정을 나누며 글맥으로 세상을 배워온 그미에게 시를 쓰는 일은 물과 공기 같은 생명유지의 장치였을 터이다. 시인에게 한 줄 시를 쓰지 말라는 것은 곧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것이 아니던가.

 

 

그미는 시집이라는 억압과 남편이라는 폭력, 아버지와 오라버니, 그리고 자식의 죽음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다. 그미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방법을 철저히 차단당했기에 스스로 소복을 입고 철쭉화관을 쓴 채 자신의 장례를 치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피가 통하는 혈관을 막듯 시의 소통을 막았기에 그미는 영혼의 질식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미에게 시집은 시를 쓸 수 있는 집과는 아주 멀었다. 조선조의 수많은 여성들이 붓과 서안 대신 실과 바늘로 창조해낸 조각보의 예술성을 보라. 내 어머니는 손재주가 뛰어나 전후 시골 기와집 대청마루에 일제 미싱을 몇 대놓고 동네 처녀들에게 양장기술을 가르치셨다. 당신이 제대로 배우고 돈이 있었다면 그리고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서울 명동에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었을 거라고 늘 아쉬워 하셨다. 그래서 더욱 굴하지 않고 뒤늦게 꽃을 피운 작가의 집념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 소설에는 신분과 나이를 막론하고 자신의 산산 조각난 가슴을 기를 쓰고 이어 붙여온 여성들이 그미 주변에서 그 아픔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조선 땅에서 여자로 태어나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는 이유만으로 인권을 무시당하고 본성을 억압당했다. 남편이 먼저 죽으면 서방 잡아 먹은 팔자가 되고 과거에 낙방하면 아내의 기가 너무 세기 때문이고 자식의 돌림병은 어미가 부실한 까닭이었다.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인 그미의 외할머니는 전실 자식이 셋이나 되는 후처 자리로 시집간 딸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어머니 김씨는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남편이 밖에서 딴 살림을 차려도 말없이 방에 틀어박혀 수만 놓을 뿐이다. 시댁의 영암 외숙모는 남편을 먼저 보낸 죄로 동서시집살이가 고달프기 짝이 없다. 주인집 아들과 합방을 한 달이였지만 결혼 소식을 듣고는 종년의 딸로 태어난 신세를 비관하여 자결을 하고 만다. 친정에 있을 때 몸종이었던 덕실이는 도도한 안방마님들에 앙심을 품고 그미의 남편을 유혹한다. 오라버니를 연모해온 수연은 벼슬아치의 첩실 소생이었기에 자발적으로 기생이 된다. 동지나 단오같은 몸종은 억지로 시집보내어져 소박을 맞거나 남편의 폭력을 못 이겨 도망 나오는 신세가 된다. 따지고 보면 열등감 때문에 그미를 평생 억압해온 시어머니 송씨도 잘나지 못한 아들로 속을 썩이며 질투와 미움으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낸다. 이 책을 덮고 내가 시집갈 때 할머니, 이모님, 외숙모, 고모님이 하나같이 ‘꼭 잘살아야 한다’고 두 손을 꼭 잡으시며 눈에 살짝 눈물이 고이던 순간을 떠올렸다. 엄마의 장례식 날에도 변함없이 헤어 질 때 내 손을 당신 두 손으로 힘주어 흔들며 ‘어떻게든 잘 살아야 한다’고 눈물 훔치시던 모습이 선연하다. 여자로 태어나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자식을 낳아 기른다는 것, 시부모를 모신다는 것, 친정의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는 것이 얼마나 당신들의 가슴을 너덜거리게 하였을지 나는 미처 몰랐었다. 그들은 내게 자신들의 어머니와 자신이 겪어왔을 그 모든 상처들을 미리 어루만져 주시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 그미와 이어진 인연이라고 우리네 여인들의 슬픔만을 되새기며 울고 싶지는 않다. 작가가 이 땅의 여성들에게 원한과 절망을 안겨주려 난설헌의 영혼을 복원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작품은 대를 이어 전해지면서 세대를 초월해 교류하는 상호작용으로 모두가 한자리에서 조우할 수가 있다. 우리들 각자의 마음에 피어난 난설헌의 모습은 독자를 한마음으로 모으는데 충분 했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난설헌과 똑같은 여성으로 태어나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내 어머니와 같은 연배의 작가가 분명 우리와 같은 문제를 같은 방식으로 고민했기에 그 아픈 과정을 온몸으로 증언하고 싶었다고 믿는다. 여성철학자 뤼스 이리가라이(Luce Irigaray, 1932~)는 여성이 열 달 동안 자궁 속에 이물질과 같은 태아를 잉태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타자와 공존하며 차이를 견뎌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바로 여성적 문화란 차이를 견디는 문화, 타자를 포용하는 문화라는 것을 난설헌과 작가를 보면서 다시금 깨닫는다. 그미도 그녀도 그 차이를 견뎌내고 세상을 포용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더욱 자신으로 살기 위해 시를 쓰고 소설을 썼을 터이다.

 

 

소설의 마지막, 죽기 전에 그미는 주변의 여인들에게 아껴온 거울을 선물한다. 그미가 건네고 간 거울은 어쩐지 긴 시간을 거쳐 우리 앞에 어렵게 당도한 유품인 듯하다. 거울 앞에 하나로 모여든 우리네 심장이 유독 붉고 뜨겁다. 그것은 아마도 지난 세월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그네들의 서러운 꽃향기에 흠뻑 물들여진 탓일 터이다. 지난 겨울은 많이도 서럽고 외로웠다. 다시 꽃이 피는 봄이 그립다. 이번 봄에는 어디에서든 이름 모를 꽃이 더 많이 피어 주기를 기다려본다. 그미의 하얀 거울에 꽃이 피는 봄을 활짝 비추며 그 옆에서 난설헌이라 가만히 읊어 보리라. 뜨거운 심장이 다시 뛸 수 있어 고맙고 그 옛날처럼 활짝 피었기에 이번엔 잊지 않겠다 말하리라. 올봄의 여인들은 그렇게 모두가 아름다워지리라. 내 그미와 꼭 약속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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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3-13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산문시같은, 아름다운 리뷰입니다...

비로그인 2012-03-14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댓글도 산문시처럼 아름답네요~ :) (저도 시구 하나 보태는 건가요? 히히)
꽃은 영원하기 위해서 진다... 이 구절이 마음에 콕, 박혀버렸어요.
이제 한사람님 글을 성실히 읽는 독자가 되겠습니다! +_+
 
자본주의, 그 이후 - 승자독식 논리에서 상생의 인본주의로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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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워 즐거워서 못살겠어요

달이 가는 게 해가 가는 게 행복해서 못 살겠어요

이제 겨우 ***일 남았네 이 고통이 끝나는 날이

조금만 더 웃으면서 견뎌내어요

좋은 날이 오고 말거야

 

 

 

 

설운도의 <원점>을 편곡한 것으로 들리는 ‘나꼼수’의 트로트 로고송(신곡)이다. 봉주 8회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 이 노래가 오늘따라 슬프게 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도대체 그 날까지 몇 일이 남았는지 까마득해서 일까. ‘나꼼수’에 출연한 MBC PD는 자신들도 매체가 있고 뉴스를 전달하는 어엿한 창이 있는데 거기서는 말 못하고 지하에 와서 떠들고 있으니 잠시 울컥하는 것 같았다. 사장이 퇴진하는 그날까지 끝장파업에 돌입한다는 PD의 목소리는 결연하다기 보다 서글퍼 보였달까.


주말에 ‘무도’와 ‘나가수’를 보지 않았더니 한층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독서시간이 증가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들의 파업은 내게 여가의 파업을 유도했다. 우리야 두어 시간 웃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파업하는 당사자들은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 일 것이다. 노동자 계급은 영구적으로 파업이 불가능하다. 권력의 주체는 자본가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반드시 파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 가슴이 답답하다. 답답한 마음에 같이 무거운 책을 들고 만다.

 

 

이 책은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로 유명한 박세길의 신간이다. 500p 분량의 꽤 촘촘한 사회과학서이지만 대부분 쉬운 용어로만 단계적 논리를 펼치시는 덕에 에세이처럼 술술 넘어가는 기특한 책이다. 내가 무리 없이 모두 이해했으니 나 같은 아줌마들도 충분히 흥미롭게 펼쳐들 수 있을 듯 하다. 가장 훌륭하다 생각되는 건 궁극의 질문과 최종적 답안 사이에 치밀하게 펼쳐지는 논리의 향연이다. 아주 세세하게 쪼개어 그것을 항목마다 밀도 높게 분석했다. 각종 통계자료는 기본이다. 그리고 다시 조직적으로 완성했다. 완벽을 기울인 교과서의 느낌도 나는데 신기한건 지루하지가 않았다는 것.

 

 

쏟아져 나오는 서사와 위로의 책을 접고 이 책을 꼼꼼히 읽게 된 이유는 이게 최선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들 여기저기서 못 살겠다고 아우성은 치는데 이게 최선이 아니라면 그럼 다른 답은 있는 가였다. 적어도 내가 만나온 사람 중에 온라인이건 오프이건 자본주의가 좋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돈이 많건 적건 지위가 높건 낮건 모두 다 이건 아니라고 했다. 계속해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 절망이고 살아갈 날이 암울하다 말했다. 분단국가인 이 땅 한국에 사는 한 달리 살아갈 방법도 없고 지금처럼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야 하는데 인생이 이렇게 살다가 끝나는 것인지 생각만 하면 서글프다 말했다. 좋은 날이 언제이고 어떤 날인지는 모르겠지만 - 저 노래에서 좋은 날이 온다는 건 그들의 바램대로 정봉주가 나오고 MB가 들어가는 날일까 - 그때라면 고통이 끝나는 것일까. 과연 정권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뀌면 세상은 달라지는 것일까. 불행히도 우린, 그냥 웃고 말지요, 왜 사는지 알고 싶지 않아서요, 일 것이 틀림없다.

 

 

궁금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언제까지 인 것인지. 나는 돈이 있는 사람이었다가 망해본 사람이기 때문에 돈이 개인에게 어떤 실력행사를 하는지 잘 안다. 돈은 사람의 인격 수준까지 결정하는 위력이 있다. 돈이 많으면 보다 착하고 우아한 사람이 될 기회가 많다. 성격도 좋고 남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보일 확률도 많다. 돈이 많으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사람이 꼬인다. 어떻게든 돈 많은 자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그 앞에선 자기도 모르게 말과 행동이 틀려진다. 돈이 없으면 친구도 없어지고 친척도 멀어진다. 사람들은 돈이 없다는 것이 확실시 되는 사람 곁에 본능적으로 가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망해보면 미처 몰랐던 세상을 알게 되는 뜻밖의 수확도 있다. 처음엔 돈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돈 떨어졌음을 처절하게 깨우치는 순간은 돈 때문이 아니다. 별 생각 없이 매일 같이 하던 일을 못하게 되었을 때. 예를 들어 매일 마시던 커피가 떨어졌을 때, 머리를 감으려 하는데 샴푸가 떨어졌을 때, 눈가의 주름이 뭐 중요했다고 찍어 바르던 화장품이 떨어졌을 때, 휴지도 치약도 세제도 떨어져서 어제까지 잘 하던 일을 오늘부터 할 수 없게 되었을 때이다. 이런 것들을 생필품이라고 하던가. 선택이 아니고 필수라고 하던가. 아침에 일어나 기분에 따라 양치질을 안 해도 되는 게 아니고 치약이 없으면 이빨을 못 닦는데 돈이 없으므로 그 필수적인 생활은 할 수가 없게 되는 것. 그래서 돈이 생기게 되면 나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부터 사게 되는 것. 내가 살아가는 일이란 거창한 도덕이나 희망이나 사랑 혹은 그리움 따위의 돈 없어도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고 돈이 있어야만 가능한 아주 사소한 행위들로 이루어져 있구나, 사람이 참 별거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나를 사정없이 겁탈할 때 인 것이다. 즉, 돈이 없으면 그 없어진 돈 때문에 사람을 알게 된다. 돈 있을 땐 나부터 시작해 내 돈에 가려 잘 안 보이던 그들이 보인다.

 

 

문제는 돈이 없으면 사람이 보다 잘 보인다는데 있다. 자본주의의 유혹은 어쨌든 우리 주변에서 돈 많은 사람을 본다는데 있는 것이다. 코스닥으로 떼부자가 되어 타워 팰리스로 이사를 가는 동료를 목격한다는 것이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부동산 시세차익을 챙겨 벤츠를 사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다. 청담동 카페 골목을 지나다 보면 남편이 의사인 사모님들이 죄다 외제차를 발레파킹 하고 있는 장면을 본다는 것이다. 대기업 계열사쯤 되는 집안에 시집간 동창이 자주 간다는 (희한한 이름의)호텔은 식당이 회원제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는 것이다.(그래서 암 것도 아닌 나는 맛있다고 해서 갈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부모님이 재력이 좋아 결혼할 때 집이라도 장만해준 동료는 골프도 치고 해외여행도 자주 가는 꼴을 어김없이 보게 된다는 것이다. 기분이 씁쓸해 우연히 틀어본 TV에서도 일등한 사람에게만 상금이 왕창 몰아 터지는 서바이벌 게임을 두 눈으로 일주일 내내 보게 된다는 것이다.

 

 

다 같이 잘 살고 가진 거 나누는 나라가 될 줄 알았는데 이 놈의 엠비정부는 승자독식의 끝장판인 대기업 논리와 땅 파고 벽돌 쌓는 불도저식 개발과 등수에 집착하는 일등주의만 좇아가느라 나라를 다시 쌍팔년도 이전으로 되돌려 놓고 말았다. 원전은 일본을 의식해 수주되어야 했고 G20 의장 국가는 기어이 되어야 했고 평창은 삼수라도 해서 올림픽을 유치하는 나라가 되어야 했다. 어떻게든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선진국처럼 보이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공공디자인은 런던을 좇아가야 했고 김연아는 스케이트를 벗고 PT를 해야 했다. 유럽과 미국에 극심한 열등감을 갖고 있던 우리는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프랑스 소녀들이 피켓을 들고 우리 아이돌 공연을 연장하라고 시위를 할 때 얼마나 짜릿했던가. 여기선 삼성 욕을 열나게 하다가도 뉴욕의 타임 스퀘어 광장에 하루 종일 빛나고 있는 삼성과 LG 로고는 그런대로 기분 나쁘진 않았던 우리. 부지런히 따라가고 숨차게 도망가느라 여튼 나라의 위상이 높아지긴 한 것 같다.

 

 

근데, 그럼 뭐하나. 겉으론 번지르르해도 우린 속으로 썩었는데. 미국의 일본의 안 좋은 점은 그대로 사이좋게 복제해 썩어가고 있는데. 우린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터져도 휘청하고 일본에서 쓰나미가 닥쳐도 흔들리는데. 중국과 미국이 팽팽하면 우리가 더 긴장해 뒤돌아 호들갑인데. 우리나라는 지정학적 위치상 예부터 사대와 자주를 줄타기 해온 눈치 빠른 민족이었다. 물자와 자원은 적은데다가 성격은 조급했다. 강대국 사이에서 나름의 생존방식을 일찍 터득하느라 늘 그들의 동향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예민하게 반응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유달리 의식하고 그런 남들 눈에 나지 않으려고 자기검열을 하는 습관은 어쩌면 아주 오래된 우리 민족의 유전자일지도 모른다. 역사학자들은 우리가 전쟁이 적어 내부에서 ‘편가르기’에 치중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전쟁이나 내전이 많지 않았기에 임진왜란이나 일제침략, 한국전쟁에 제대로 대응을 못했고 그로인해 분단국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도 마찬가지다. 이분법 논리는 좁은 남한에서 다시 되지도 않는 이념싸움으로 확산되고 우리는 허구헌 날 좌와 우로 구분된 시각의 뉴스만 보고 산다.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는 걸까. 총선, 대선, 올해는 전 세계적으로 대통령이 물갈이 하는 해인데 미국은, 프랑스는 누가 대통령이 될까. 아니 박근혜는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경제는 어떻게 되고 집값은 어떻게 되고 물가는 교육은 언론은 ... 소녀시대는 언제까지 소녀로 살 것인가, 무도는 언제 방송되나, 정봉주는 언제 석방되나, 강호동은 언제 컴백하나... 아 봄은 오는 것인가. 나는 다시 재기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무리 거창한 생각을 아니 아무리 시시콜콜한 생각을 해도 역시 지난 2년 동안 내가 고민하고 힘들어 했던 것은 지금의 추락한 내 처지가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달려온 세월은 그럼 아무것도 아니었나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 그냥 공부 덜하고 일 좀 덜하고 남들 놀 때 놀고 여행이나 가고 살 것이지 뭐 하러 아득바득 열심히 살았을까, 였다. 그렇다. 나는 다시 일어서고 싶었다. 주저앉기 전에 열심히 살았던게 억울해서라도 꼭 재기 하고 싶었다. 이기는 놈이 다가지는 세상, 한 번 지면 땅 끝으로 추락하는 세상, 한 번 추락하면 인생 실패하는 세상, 돈 없으면 능력 있는 게 더 서러운 세상, 더 살아봐야 더 나을 것도 없어 보이는 세상은 끝이 나길 바랬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세상은 이제 끝난다고 말한다. 반드시, 확실히, 자본주의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고 외친다.

 

 

저자는 ‘자본주의 보다 더 나은 사회는 반드시 존재할 것이며,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했다. 2007년 홀로 나와 치악산 기슭에서 10만 페이지 독서를 하고 그는 좌우구도의 낡은 안경을 벗어야 했다. 오랫동안 좌파적 시각에서 대안을 찾겠다는 시각을 버리고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 제시하겠다는 지적 오만을 버린 것이다. 저자는 이 책 말미에 과연 좌우 대결구도는 얼마나 타당하고 어느 정도의 생명력을 지닌 것인가 자문했다. 기실 좌우대결 구도는 역으로 기득권 세력의 기반을 강화하는 기반이 되어왔기에 이대로 가다간 결국 우파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이어질 것이라 충언했다. 사실상 좌우 대결구도는 유통기한이 끝나가는 중인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신세대 창조자 -디지털 문명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세대, 80년대 이후 출생하여 90년대에 10대를 보낸 세대 -들에게도 더 이상 좌우대결구도는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좌와 우로 자꾸 이분법화 하는 것은 그렇게 좌우로 나뉘어야 자기들이 더 유리한 보수언론과 기득권층의 마지막 고집일 뿐이다. 나머지 중도자들은 좌와 우의 중간이 아니라 좌와 우가 모두 답이 아니라 생각하면서 새로운 답을 찾는 존재들인 것이다. 오죽하면 그냥 아무말도 안하고 서있기만 하던 안철수를 대안으로 보았겠나. 저자는 말한다. 이 시대 진정한 진보는 좌우구도 속에서 좌파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좌우 구도 자체를 넘어서는데 있다고.

 

 

역사의 진행방향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세대의 선택에 의해 좌우된다. 나는 사실 이 책에서 말하는 신세대라 말하기엔 늙었고 기득권 세대라 하기엔 아직 젊다. 우린 언제나 낀 세대였다.(우리가 언제 제대로 뭔 세대를 주도하긴 했나) 그러나 역사의 변곡점을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은 신세대와 기득권 세대와 마찬가지로 같다. 이 책을 좀 근사하게 리뷰를 해보려고 정리를 하면서 책을 읽었는데 다 요약하고 보니 A4로 19장이었다.(그래서 근사하고 설득력있는 리뷰는 포기한다) 이틀 동안 내가 한 일은 무슨 교양 리포트를 써내는 것처럼 사뭇 진지하고 흥분된 시간이었다. 그가 말하는 ‘상생의 인본주의’는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책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일어난 변화가 마침내 자본주의를 멸하게 하고 전혀 새로운 가치로 이행하는 과정을 빠져나갈 수 없는 논리로 펼쳐 보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절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인 승자독식의 대항가치로 상생을 내세웠고 ‘사람을 모든 것의 근본으로 삼고 상생을 앞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는 시민운동을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한 가지 개인적으로 희망으로 느낀 것은 지식근로자의 정체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처럼 생산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계급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인 것이다. 고용, 피고용의 관계에서는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못한 노동자가 결국 파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창조력기반의 경제에서 생산수단이 창조력이 된다면 그 자체가 영구 파업을 상징할 수 있다. 더 이상 노동자는 통제 대상이 아니고 협력관계의 파트너가, 나아가서는 주총의 권력자가 될 수 있다. 지배 권력은 생산요소를 가진 창조자들에게 이동할 것이고 이는 역사의 필연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좌파혁명가는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삼성의 힘은 이미 국가를 능가한지 오래다. 국가가 기업을 통제하는 것도 다시 언젠간 규제를 해제하는 것의 전 단계일 뿐이다. 국가는 자신을 지양하고 시장은 스스로 초월하고 구성원은 국가와 시장이 아닌 자신에 의지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 시장에 의지하는 ‘쫓기는 삶’이 아니고 국가에 의존하는 ‘기대는 삶’도 아닌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되는 삶으로 모두 이동하는 것. 물론 이는 상당히 추상적으로 들린다.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에서의 보편적 인간형은 ‘자유와 평등, 개인과 집단, 경쟁과 협력 등 근대 이후 분리, 대립되었던 가치들을 조화롭고 균형 있게 추구하는 사람’이니 이상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은 결국 ‘51%의 이기심과 49%의 이타심’이 조화를 이루는 아주 균형적인 인간형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차이는 2% 안팎인데 역사의 변곡점은 그 2%의 변화로 공멸이냐 상생이냐의 기로에 선 듯하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저자가 해답을 어떤 해외의 역사나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 우리 농업사회에서 찾았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찾는 과정에서 농업관련 책 <우리 농업, 희망의 대안>을 쓰면서 생태계의 무한한 잠재력을 깨달았다고 한다. 논은 같은 땅에서 똑같은 작물을 반복해 재배하므로 토양이 황폐화 되어야 하는데 왜 수천 년이나 이어져 올 수 있었을까. 저자는 논이 인공습지로서 상생하는 복합 생태계의 일부로 기능해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바로 전통사회에서 논은 지속가능한 농업의 표본이었고 논농사는 상생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학습의 장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훌륭한 전통 중 지역가치 공동체로서 ‘향약’은 상생의 가치를 생활문화로 정착시켰으며 그 토대가 다름 아닌 논농사였다. 국사책으로 잠시 기억을 돌이켜 보면 ‘환난상휼’의 가치는 공동체 성원들이 어려움을 나누는 원칙이다. 지금 내가 쌀이 떨어졌는데 우리집에서 연기가 안나니 이웃이 알아서 한바가지 퍼다 주는 형국이다. 그러나 논의 생태계가 파괴됨으로써 상생의 가치도 사라졌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상생이 아닌 정복으로 바뀌자 지속가능한 삶의 조건도 사라진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오래전부터 인간의 학명을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공생인이라는 의미의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날 것을 호소해온 통섭학자 최재천을 떠올렸다. ‘호모 심비우스’ 정신은 지구 생태계에 함께 사는 모든 생명과의 공생을 우리 삶의 최대 목표로 삼자는 것이다. 저자는 논의 생태계, 즉 상생의 원리가 사회문제 해결의 일반적 원리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는 결국 혼자만 다 가지는 게 아니고 자본도 권력도 나누자는 것이다. 손해를 보자는 것이 아니고 나누어서 성공과 결실이 더 커지고 오래가는 자연의 원리를 믿어보자는 것이다. 과학은 물론 경제도 사회도 생태계로 이어지고 통한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저자는 말미에 역시 이 모든 흐름의 장애요소로 단연 기득권에 대한 집착을 지적했다. 나누자고 하는데 극도로 싫어할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자기처럼 가지게 될까 두려워 하는 이는 누구인가. 가진 사람은 가진 게 많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사람은 욕심의 동물이므로 자기 가진 것을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그래서 무언가 가졌다 생각하면 더 이상 모험이 힘든 것이다. 가진 게 없어야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도전하기가 쉬운 것이다. 다행히 나는 가진 게 없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자본주의, 그 이후는 가진 자나 못가진 자나 두 쪽 모두에게 모험이 되는 것은 틀림없다. 다만 어떤 쪽이 더 즐겁게 모험에 뛰어 들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의 결론이 내게 아주 기쁘게 들리는 것을 보면. 마지막으로 사람과 제도와 권력의 본질을 꿰꿇은 저자의 의미심장한 몇마디를 옮겨 본다. 어느 한 명의 왕을 없애고 새로운 왕이 되기 보다는 모두가 왕이 되면 자연 한명의 왕이 사라진다는 논리는 퍽이나 마음에 든다. 모두 왕이 되려 하지 말고 평민이 되어 평등하게 살자는 불가능하고 위선적인 주장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다. 나누어 달라는 것도 실은 나도 한번쯤 왕이 되고 싶었던 속내에 대한 보상일지 모르니까. 다 같이 왕이 되어서 혹시나 또 거기서 쟁탈이 일어날지는 그때 가서 확인해도 늦지 않겠다. 일단 모두가 왕좌에 오른 다음에 둘러보아도 될 일이다. 아니 내가 왕이라면 새삼 둘러보지 않아도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어차피 다들 왕인데 누가 나보다 더하고 누가 나보다 덜하랴.

 

 

 

자본주의를 마감시키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역사의 무대에서 최종적으로 퇴장시키는 것은 자본가처럼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대중의 꿈이다. 사회구성원의 다수가 과거 자본가들이 독점하고 있던 자본과 권력을 나누어 갖는 순간 자본주의는 수명이 다하는 것이다. 모두가 왕이 될 때 왕이 사라지는 것처럼      -p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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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3-13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도 임금님이 안 되고, 누구나 평면이 될 때에도 왕 같은 사람은 사라지겠지요. 논농사이든 두레이든 농업이든, 스스로 삶을 짓고 밥을 지으며 집을 짓잖아요. 스스로 사랑하는 삶을 이루면 좋은 꿈을 이루리라 믿어요.

가연 2012-03-13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좋네요ㅎㅎ 책을 못읽어봐서 정확히 모르겠으나, 좌우대립구도에 관한 저자의 설명은 결과적으로는 옳은 말이 되겠지요. 우파에게 유리한 국면이 될 것이라는 설명말이에요, 풋. 사실 뭔가 끄적거리고 싶은 말도 있긴 하지만 책을 안읽은 상태에서는 엄밀하지 못할 것 같아서 관두렵니다, 하하. 그런데 책을 정말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글을 쓰셨군요.

이건 여담인데요, 무도가 결방한지 벌써 6주... 저는 점차 지쳐갑니다ㅠㅠㅠㅠㅠㅠㅠ 너무 힘들어요... 저도 제 무도보는시간에 책이나 끄적거리며 보고 있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 책보는게 나쁜 건 아닌데 무도가 거의 일주일을 견디는 힘이었던터라[...]

조통 2012-03-20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서평 또한 잘 읽어 보았습니다. 한 권의 새책이 나온 듯 하군요..
좋은 내용 잘 보고 갑니다~^^
 

 

 

 

 

#1. 어제 있었던 일

 

 

 

알라딘에 어제 베스트 항목이 생겼다. 하루치 판매 경향을 알 수 있는 항목인데 나와는 뭔 상관이 있을까 싶다가 우연히 눌러보니 내가 읽은 책들이 있으니 반가운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와 아주 연관이 없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내가 출간하자마자 어떤 책을 사서 읽자 마자 리뷰를 썼다고 치자. 그런데 그 책이 서평의뢰를 받은 책도 아니고 그냥 나 좋아서 내가 감동해서 내가 쓰고 싶은 어느 날 이 책이 무지 좋다고 떠들었다고 치자. 그런데 그 리뷰가 뜻밖에 추천의 몰표를 받아(아니면 열나게 비판했지만 관심을 받아) 많은 이의 공감과 궁금증을 샀다고 치자. 그리고, 그 책의 판매량에 단 몇 권이라도 일조하여(쌩쓰투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다음 날 그 책이 일일 베스트에 등극했다면?  그냥 우연의 일치일까?? 그런데 내 글을 읽고 책을 산 분이 자기도 좋다고 리뷰를 쓰고 그 글을 읽은 분이 또 책을 산다면? 그래서 어제 베스트가 주간 베스트가 되고 끝내 그냥 베스트가 된다면? 우연이건 필연이건 기분이 나쁘지 않다. 뭔가 뿌듯하기 까지 하다, 하하.

 

 

 

나는 내가 읽고 싶어 신청한 책과 출판사에서 의뢰한 책과 간혹 이벤트로 당첨된 책과 그냥 아무런 부담 없이 읽은 책의 리뷰를 여지껏 구분하지 않아왔다. 느끼지 않은 건 쓰지 않고 느낀 건 꼭 쓴다. 나만의 결론을 꼭 쓴다. 분량에 차등을 두지 않는다. 쓰는 동안만큼은 그 책에 올인한다. 저자가 이 책을 왜 썼을까 저자입장에서 최대한 생각해본다... 등등. (나도 이런 내가 기특하다가도 짜증날 때가 있는데 이제는 습관이 되어서 어느 정도만큼 쓰지 않으면 리뷰를 썼다고 생각안하는 프로세스가 뇌리에 각인 된 것 같다.) 나는 내가 그러니 남들도 그걸 일일이 구분할까 싶었다.

 

 

 

그런데 나는 (이 짓을 오래 하다보니), 다른 누가 아닌 내가 구분해서 읽고 있다는 걸 발견한다. 아니 구분해서 읽을 줄 아는 능력이 생겼다가 맞겠다. 딱 보면 이건 출판사 직원이 쓴 글, 이건 서평단 신청하여 쓴 글, 이건 출판사가 의뢰하여 홍보용 책자로 쓴 글, 이건 자신의 순수한 감동을 널리 알리고자 쓴 글, 이건 작정하고 쓴 대회용 글... 이건 정말 쓰기 싫어 죽겠는데 날짜에 맞추느라 억지로 쓴 글. 대충 목적과 의도와 상황이 파악이 된다. 그건 아마도 누구보다 내가 그러해 본적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이런 것들이 파악이 되지 않게(파악이 되더라도 큰 차이가 안나게- 사실 그렇게 쓰는 사람이 진정한 고수이지만 ㅋ) 일정한 톤으로 자기 색깔이 묻어나는 글이 좋다. 그런 글을 쓰는 알라디너가 좋다. 그래서 나는 그런 분에게 끌리고 호시탐탐 어디 그런 분 없나 찾게 된다. 그리고 누구보다 내가 그런 분이 되고 싶다.

 

 

 

여지껏 온라인 서점에 등극하는 베스트셀러와 리뷰어와의 관계를 크게 생각하지 않아왔다. 내가 쓴 글이 어디 판매력에 영향력을 주겠냐(리뷰어만 읽는다 싶었다) 싶은 것도 있었지만 독자들은 자기가 사고 싶은 책은 안 좋다 그래도 사고 안사고 싶은 책은 좋다 그래도 안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가만보면 나도 다른 분의 글을 읽고 책을 샀고 그 글 때문에 책의 장점과 단점을 알게 되었으므로 내 글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할 것 같다.(지금까진 애써 부정해왔다) 특히나 출간된 초기에는 더 하지 싶다.

 

 

 

알라딘 MD 한 분이 내게 ‘좋은 서평이 좋은 책을 살린다’는 말씀을 해주셨다.(물론 나는 내 서평이 책을 살렸다는 말로 들었다, 하하) 그렇다면 무책임한 서평이 좋은 책을 죽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비록 일개 리뷰어지만 죽을 책도 살릴 수 있고 살았을 책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어떤 공신력있는 기관에서 블로거의 서평과 책 판매량과의 관계를 조사하여 통계치를 낸다면 재미난 결과가 나올 것도 같은데. 알라디너들은 눈치가 빠르므로 주례사 서평이나 목적용 서평을 잘 구분하실 줄로 믿는다. 나같이 맨날 책하고 놀고 글하고 사귀는 분들은 내가 읽은 책과 그걸 읽었다고 하는 글이 미치는 영향을 한번쯤은 생각하실 줄로 믿는다.

 

 

 

#2. 오늘 있을 일

 

 

 

금요일이 되면 나는 주말에 읽을 책과 담주에 읽을 책을 정리한다. 살면서 국가와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온 사실이 요즘은 많이 부끄럽다. 그래서 그런 책들만 자꾸 관심이 간다. 늦바람이 무섭다. 그런 책들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는 냉정함이 생겨버린다. 냉철함이 생겨야 하는데 비판력이 자꾸 냉소쪽으로 흐르게 된다. 한 문장에서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꾸 따지게 된다. 전에 소설 읽는 분들보다 인문읽는 분들이 냉소적이라고 푸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사실과 현상, 문제점과 해결방안들을 관찰하면서 자기만의 논리체계에 근력이 붙기 때문이다.


 

 

소설은 대개 질문에서 끝이 나는데 인문은 그렇지 않다. 소설은 덮고 나서 하늘과 별을 보게 되는데 인문은 그 사이 흘러가는 구름이 지금 개는 중인지 비를 뿌릴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한쪽은 우주너머로 나가려 하고 한쪽은 내가 밟고 있는 땅을 바라보게 되는 것. 잘은 모르지만 땅바닥은 차갑고 딱딱하니까 그걸 직시하려면 매서운 눈과 예리한 판단력이 필요할 듯하다.


 

하지만 자꾸 예리해지다 보면 나는 내 감성이 자기도 좀 생각해달라고 떼를 쓴다. 그래서일까. 반사적으로 위로와 공감의 책들에 꽂히게 된다. (나는 이런게 내 맘대로 독서의 통섭이라고 생각한다 ㅋ) 부지런히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드뎌 오늘 결정을 하고 그 중에 선택된 책을 사버린다. 아... 책이 좀 쉬었다 나올 수는 없는 것인가. 무도처럼 몇주간 결방할 수는 없는 일인가...

 

 

 

 

 

 

 

 

 

 

 

 

 

 

 

 

 

 

 

 

 


이 중에서 나도 사려고 했다가 마침 양철나무꾼님의 페이퍼를 보고 결심을(?) 굳힌 책은 김형경의 에세이다. <좋은 이별>이후 몇년만인가. 심리학 전공자가 아닌 소설가라서 그런지 글이 늘 따스하다. 오늘 온다고 했는데 두고보자. 우리집은 용인이라 오늘 온다하고 내일오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냥 그러려니 한다. 직장인들은 회사에서 받으려 했다가 주말이 끼는 바람에 담주로 넘겨서 받는 경우도 있다 들었다. 처음부터 내일갈 수도 있다고 제발 말해달라.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글 쓰고 나서 걱정 말라는 듯 간다고 ㅋ 문자가 왔다.)

 

 

그외 아프다 아우성치는 제목들이 눈에 들어온다. 출판사에서 절대 제목을 양보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김난도 교수의 대박책 이후 제목에 그 여파로 다들 아프다고 한소리다. 청춘도 아프고 삼십도 마흔도 PD도 남자도 모두모두.

 

 

 

실은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기막힌 10분> 이 책을 사려고 하다가 그만 김형경으로 턴을 했다. 두 철학자가 십분 동안 피터지게 입으로 싸운 내용과 그 이유, 그 이후의 일에 관한 이야기다. 작년에 사르트르와 까뮈를 보고 느꼈지만 동시대의 라이벌 철학자는 자기 논리가 곧 자기 생명이다. 다시 말해 상대의 생각, 생활은 물론 생존과 생명까지도 위협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십분을 싸웠건 십년을 싸웠건 그들이 펼친 논리는 죽고나서도 끊임없이 평가된다. 그리고 해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누가 이 책 읽는 분이 있다면 어떤지 좀 알려주시면 좋겠다만.

 

 

 

 

 

 

 

 

 

 

3월에 어머니 생일과 내 생일, 그리고 양력으로 어머니 돌아가신 날이 모두 들어 있다. 내 생일상 차려주시고 딱 삼일후 돌아가셨다. 원래 어머니 생신 5일후가 내 생일. 그래서 우리는 늘 기브 앤 테이크 하는 사이였다. 미역국을 끓일 날이 많아서 고기를 사다 두었다. 그런데 아이가 새우 넣고 끓여 달라고 해서 고기는 냉동실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내 생일이고 어머니 기일이고 뭐고 결국 아이가 우선이구나. 역시, 살아 있는 사람이 더 중요 하다. 지금 먹어야 할 것, 아니 나 먹을 거보다 새끼 먹여야 할 것이 더 급하다. 내 어머니도 그러했겠지...

 

 

꽃샘추위가 반짝이다. 늘 그랬다. 이제 봄인줄 알면 학교는 거의 5월이나 되어야 따스해졌다. 3월은 봄이면서 아직 봄이 아니기도 하면서 그래도 마땅히 봄이어야 하는 계절. 그러니 다들 마음만은 벌써 개나리, 진달래인 주말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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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무지개 2012-03-09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의 글을 보고 얼른 달려가 어제의 베스트를 보았답니다. 그리고 느꼈습니다. 나는 역시 베스트셀러와는 영 관련이 없는 사람이구나...^^

한사람 2012-03-09 22:55   좋아요 0 | URL

하하, 역으로 베스트셀러위주의 독서가 아닌
어찌보면 주체적인(?) 독서를 하고 계시네요 !!

이진 2012-03-09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제부터 글을 쓸 때 한사람님의 눈치를 슬쩍슬쩍 보게 될것 같습니다.. ㅋㅋ
이거 혹시 한사람님께서 보시지는 않을까? 이거 너무 홍보용, 쓰기 싫어서 쓴 글은 아닐까 하고요.
저도 제 나름대로 강압적인 생각없이 글을 쓴다고는 생각하지만 대회용 도서라면 대회용으로 리뷰를 쓰기도 하고, 평가단 도서라면 어쩔 수 없이 시간에 못 미쳐 쓰기도 합니다. 오우 생각해 보니 다 그렇군요... 흐
한사람님도 봄 무사히 나시길 바래요. 저는 이제부터 생겨나기 시작할 벌레들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집 청소를 해야겠습니다!

한사람 2012-03-09 23:00   좋아요 0 | URL

뭐하러 그런걸 눈치봐요 ㅋㅋㅋ
저기 위에 쓴 글은 작정하고 제가 따진다는 게 아니라
어쩌다 지나갈때 느끼는 감상인 걸요^^(그리고 모두 심히 이해해요 ㅋㅋ)

저는 특히 책 검색하고 나서 리뷰를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저렇게 쓰기는 했지만 사실 남의 리뷸 너무 안 읽어줘요 ㅠㅠㅠ 몇몇 제 이웃님들꺼만 겨우 ㅋ)

이진님은 아직 그런거 신경쓰지 말고 성실위주로 작성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집에 벌레가 많아요??
공기가 좋아서 그런가?
여긴 공기가 독해서 그런지 벌레고 모기고 없어요 ㅠ
거기다가 공기청정기까지 틀어놔서 아마 제가 더 더러울지 몰라요 ㅋㅋㅋㅋ

가연 2012-03-11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제 베스트라는 항목이 생긴 줄도 몰랐네요ㅎㅎ 거의 알라딘 메인에서는 새로나온책 부분만 보다보니깐.. 저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논쟁 이야기는 예전에 나왔던 책의 개정판처럼 생겼네요. 만약 그렇다면 저자들이 글을 재밌게 쓰는 것 같아서.. 읽으시면 지루하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책을 정리해서 읽는 편이 아니라.. 꼼꼼하시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구먼요 ㅎㅎ

한사람 2012-03-11 09:43   좋아요 0 | URL

저는 몇권 정도 팔리면 하루 베스트가 되는지 궁금했어요 ㅋ
글구 말씀하신 책은 개정판이 맞아요. 이번에 제목에 '기막힌'과 '포커'를 넣었더군요.
책 제목에 사람 이름 들어가면 앞에 쓰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거잖아요 ㅋㅋ
저자가 이번에 <피로사회>라고 냈던데 이 책도 주장이 재밌어요.-신문엔 사진도 나왔더라구요, 하하

책은 요즘 자꾸 쌓여만 가서 사실
어떤 책을 먼저 읽자 하는 우선순위에 대한 계획이지
계획독서와는 거리가 멀다고 봅니다 ㅠㅠㅠㅠㅠ

숲노래 2012-03-12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마음으로 보낸 주말을
좋은 마음으로 월요일부터
즐기시기를 빌어요~
 
나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
박에스더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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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하필 여성인가

 

 

 

   이 책은 나름 조직생활의 처절한 부조리를 겪은 현직 아줌마의 세대 공감형 에세이가 아니다. 전직 방송국 보도부 기자 출신 고학력 인텔리 여성의 신랄한 사회비평이다. 그것도 통계조사와 학문적 연구가 아닌 본인 경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 주가 된다. 엄연한 사회과학분야의 사회비평 장르에 속하는 책을 왜 굳이 애증의 에세이라 했는지 의아스러웠지만 아시다시피 한국사회에선 이런 말을 여성이 줄기차게 해대면 잘 안 먹힌다. 같은 여성은 혼자만 잘난 척한다고 뒤 돌아서 쓴웃음 짓고 남성은 앞에선 대단하다 놀랍다 맞는 말이다 추켜세우다가도 속으로는 그래봐야 소용없지 중얼 거릴지 모른다. 그래서 추측컨대 아마 이 책을 읽는 남성 독자들은 이 책에 대해 대놓고 비판하진 못할 것 이고(특히 배운 남자들은 속으로 뜨끔해도 포용의 아우라를 잃지 않으려 애써 콘트롤 할 것이고) 여성독자들은 지지는 보내겠지만 마음으로 공감하지는 않을 듯 하다.(배운 여자들은 다 아는 이야기 혼자만 흥분한다 싶어 그러나 나는 그렇게도 못한다 싶어 적당한 열패감을 느낄 것이므로) 양쪽 다 잘 알아 들었다, 정도가 상위반응이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라디오 방송진행으로도 유명하다 들었는데 이른바 이빨과 필력에 있어선 내공이 상당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어떤 부분 여자 김어준, 여자 강준만, 여자 진중권의 뉘앙스가 감지되기도 한다. 진보가 논리에 집착한다는 꼭지는 거의 김어준의 주장 여자버전으로 인식되었다. 공감 가는 잡설과 시원한 직설과 이해갈 만한 독설이 치우치지 않게 그야말로 절묘한 배합으로 섞여 들었다. 그래서 아니, 그러다 보니 조금 진부해지는 보수적 아우라도 느껴진다. 뭐랄까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끄집어내어 치고 나가다가 끝에 가서는 나는 그리 잘난 사람이 아니다는 식. 어차피 잘나왔던데 끝까지 나는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이게 죽어도 맞다고 생각한다고 할 것이지 왜 갑자기 중용의 가치로 꼬리 내리는 것인지 그게 좀 아쉬웠다.(나는 가장 짜증나는 것이 자기는 *나게 공부해서 일류대에 서울대 대학원에 미국연수까지 다녀왔으면서 꼭 학벌을 철폐하자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사회생활 한다고 모든 걸 친정 어머니에게 일임하고 당신 남은 인생 *빠지게 부려먹어 놓고 이제와 - 다 성공 하고나니 - 이제부턴 좋은 딸 되는 거에 집착하지 않겠다고 하는 여자들이다. 생각하고 말하는 건 누가 봐도 좌파구만 나는 우파도 좌파도 아니다 그저 나일뿐이다 하는 좌파알레르기 있는 사람들이다. 참, 하나 더 교육이고 정치고 직업이고 사랑이고 뭐고 모든 예를 들어 비교할 때 꼭, 미국을 드는 사람들이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괄호 안이다. 글의 맹점은 이렇게 적어놓고 보면 이게 다인 것 같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이게 다는 아니다.)

 

 

   특히 미국을 집중적으로 예로든 중간부는 필요이상으로 반복과 부연이 많아 지루하기까지 했다. 처음엔 같은 세대이고 내가 절감하는 비슷한 문제들을 대놓고 지적질하고 있어서 머리말 읽을 때까지는 그렇지, 그거야, 하면서 기대감이 높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책을 덮고 이상하게 불쾌해지는 마음이 무엇일까 나는 한 이틀 고민해야 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밝히기 싫어서 할 말은 많은데 꾹 참았다. 그러는 동안 별수 없이 나는 저자가 지적한 그 부분에 정확히 안착되어 살아가는 사람 이었구나를 깨우쳤다. 지금 심정은 꼭 동네 아줌마들이랑 낮에 실컷 막장 드라마 작가와 작품과 공영방송의 상업성을 적나라하게 욕하다가 돌아와 밤에 다시 채널을 그 드라마에 고정시키는 기분이다. 어떤 영어학원 원장 욕을 더 없이 해놓고서 그 학원이 합격률이 높다고 슬그머니 등록하고 오는 기분이다.

 

 

   정말로 인정하기 싫고 부끄러운 마음이지만, 이유는 저자가 여성이라는데 있는 듯하다. 그것도 같은 시기에 태어나 같은 문제 풀고 그 시험점수로 대학에 붙었고 또 비슷한 시기에 직장에 들어가 조직의 쓴맛과 남자들의 구차한 맛과 사회의 더러운 맛을 똑같이 느꼈던 여성. 그렇지만 그 개성 강하다던 x세대도 이제는 배나온 학부모가 되어 이 나라의 교육현실을 한탄하며 그저 피 끓는 모정으로 쯪쯔 거리고 있는 사십대 여성.(엊그제까지 삼십대였던 ㅠ) 특히, 출산과 육아, 맞벌이의 억지스러운 현실에 할 말 많은 여성. 너만은 나같이 살지 말아라하시던 어머니의 무지막지한 희생을 업고 조직에서 인정받아 역시 한 여자의 행복은 다른 여자의 불행이 필수적이라는 원칙에 가만히 입다물어온 여성. 아마 어린 시절 고무줄하면서 ‘무찌르자 공산당’ 아니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같이 부르던 노래도 똑같았을 여성. 이 연대감 질펀한 동지의식이 나는 왜 불편했을까. 나는 왜 저자의 결론이 불쾌하게 들리는가. 김어준이 닥치고, 정치나 하라고 떠들 땐 열렬한 지지를 보냈고 강준만이 책 내었을 땐 열화와 같은 리뷰를 썼고 진중권이 신간 냈을 땐 뜨자마자 구입했건만. 얼마 전 남인숙 작가의 여자가 남자를 분석한 글에는 가슴으로 공감했으면서 왜 이 저자는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안 좋게 느껴지는 것인가 말이다. 왜 하나같이 맞는 말만 하는데도 선뜻 박수가 나오지 않는 것인가.

 

 

   나는 이 책을 읽고 잘못된 건 다른 무엇도 아닌 내 생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책 덮고 지배적으로 떠오른 생각 중 또 하나. 저자는 과연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중 일반이 아니라 정치인과 고위관료, 여성이 아닌 기득권 층의 중년남성으로 생각되었다. 특히 저자가 인터뷰 해온 이른바 뱃지나 별이 달린 사람. 라디오 인터뷰 한번 하는데 아랫 것 열 댓명이나 데리고 다니는 윗 사람. 공중파 인터뷰 좀 하겠다는데 대본 검열 들어간 후 지들이 직접 질문 적어주며 짜고 치는 고스톱 방송 하게 만드는 청와대 사람. 중요한 사안은 꼭 여지를 남겨두고 답하거나 이쪽이냐 저쪽이냐 물으면 꼭 경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자기 입장위주로 지식과 정보만 전달하는 정치인. 뭐, 아무래도 저자는 직업상 남성을 만날 일이 더 많았을 것 같아 그들에게 할 말이 많은 것으로 보였다. 이렇듯 저자가 주로 남성을 비판하고 있는데 나는 왜 기분이 나쁜가. 이 묘한 아이러니는 참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그러니까 말 안하고 사는 우리(?)만 바보 같고 따지지 않는 나만 불의에 눈감고 사는 비겁한 사람 같은 이 씁쓸한 기분. 이 무슨 삐뚤어진 피해의식이란 말인가. 누구도 쉽게 하지 않는 말을 하면 용기 있다 박수는 쳐주지 못할 망정 그럼 그동안 그거 다 받아내고 지켜본 우리는 이 현실이 좋아서 그런 줄 아느냐고 왜 당신만 혼자 정의로운 척하고 온갖 부조리를 다 파헤치는 양 잘난 척 이냐. 맞는 말만 하면 다 맞는 것이냐. 그냥 있어도 잘난 줄 충분히 아는데 꼭 이렇게 나머지(?) 동료들을 물 먹이고 혼자 정의로와야 겠느냐..... 꼭 지금 저자와 같이 직장생활하는 라이벌이나 되는 것 같다. 완전 많은 여성들을 대신해서 총대를 매었는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내가 봐도 말이 안된다. 그러니까 이건 90년대 직장 다닐 때 플랫폼이다. 조직에서 여직원 모임에 나가지 않기로 유명했던 나로선 대국민적 호소를 앞세운 이런 식의 내밀한 페미니즘엔 함께 동조할 수 없다는. 만약 공론화 하고 싶다면 차라리 여성 공동의 목소리로 솔직할 것이지 대한민국이나 사회 운운하지 말라는. 저자는 여성의 평등을 외친 것이 전혀 아니건만 어쨌든 나는 똑같이 조직사회의 쓴 맛을 보아도 남성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으므로 결국 페미니즘의 영역 어딘 가에다 저자를 분류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끼리 페미니즘 주장하면 왕따다) 그러니까 여성의 적은 여성이 맞다. 여성을 차별하는 건 여성이 더 하다. 나는 내가 남성이었다면 이 여성이 기분 나쁘지 않았을 것이고 혹시 그녀가 남성이었다면 나 역시 기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니까.

 

 

   나는 대한민국에서 나만 특별한 교육을 받고 색다른 음식을 먹고 다르게 살아오지 않았기에 분명 나같이 생각하는 여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이 책을 대하는 나의 심리를 분석할 수 있다면 왜 우리가 이 모양인지 알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그 분석은 이 책에 모조리 다 있다고 말씀 드린다. 그러니까 나는 나와 같은 여성이 이런 주장하는 게 기분나쁜 자의식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유 같은 건 묻지 말라구

 

 

 

   박 에스더 기자는 이 땅의 권위주의, 군대문화, 배타주의, 단일가치, 민족주의 가 우리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꼽았다.(물론 이렇게 구분지어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 다섯 가지가 올림픽 오륜기 처럼-아니 아우디 엠블렘처럼 -적절히 엮여있다) 그리고 그 기원을 장구한 역사속의 유교적 이념, 장유유서의 전통으로 보았다. 엉성하고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상당부분 디테일에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다.(성공한 여성들은 대개 완벽주의자다. 사소한 부분에서도 남성에게 지적질 안당하려고 발버둥치다 보니까...) 그러다 보니 반복되는 주장이 많은데 여튼 핵심은 우리의 상하 위계적 문화를 관통하는 핵심코드를 권위주의적 문화로 보고 이와 친척인 군대문화가 사회조직의 일반문화로 정착된 것을 애통해 한다. 조금이라도 차지하게 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배타주의가 만연되어 있고 이념적 분단국가의 특수성 때문에 흑백논리를 벗어날 수 없으며 오랜 세월 단일 가치를 주입하고 강요해왔기 때문에 다양성이라고는 사회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고 푸념한다. 단일민족을 강조하여 앞으로는 민족적 우월감을 고취시키고 뒤로는 민족의 번영을 위해 개인의 보편적 인권을 희생시켜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다보니 전통과 현실과의 괴리로 생기는 위선이 경쟁력이 되어 도덕은 있는데 그건 그냥 교과서에나 나오는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고 현실에선 뒤돌아 호박씨 까느라 여념이 없다. 그러면서도 모피반대나 동물보호, 낙태법, 10대 성문제, 장애인 인권, 동성애같이 민감한 문제는 답이 있는 것도 알고 무엇인지도 빤히 알면서(혹은 자기도 분명 의견이 있으면서) 다수는 반응이 없다. 우리 사회는 모든 담론이 진보냐 보수냐 혹은 성장이냐 분배냐, 수도권이냐 지방이냐 같이 대립된 가치위주로만 모아지고 무슨 대세가 아니면 이슈로 환기되지 않으면 토론의 주제로 끼지도 못한다.

 

 

   저자는 그동안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상식적 규범들에 대한 의심을 좀 터놓고 시끄럽게 공론화하자고 말한다. 민주주의가 원래 시끄럽고 과정이 피곤한데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더라도 최소한 문제제기는 해보자고 말한다. 정이 전면 부정되고 반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합이 되는데 우리는 그 무엇도 제대로 반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고 말이다. 우리는 안전이나 안정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교화된 국민으로서 본능적으로 죄의식을 느낀다. 갈등은 곧 사회불안이요, 파업은 경제불안, 시위는 정국불안 식으로 마치 우리가 불안한 틈을 보이면 금방이라도 김정일 아들이 광화문에 폭탄이라도 떨어뜨릴 것처럼 다시 하나가 되어 뭉치자 얼마나 지겹게 들어왔던가. 우리는 정부가 막강한 공권력을 가지고 시민을 억압하는 건 민주주의가 퇴보하는 현상이라 떠들면서 롯데마트가 통큰 치킨으로 소비자와 상인간의 논쟁을 불러 왔을 땐 청와대 정무수석이 트위터 한마디로 정리하는 식의 일방적 간섭을 명쾌하게 해결했다고 말한다. 각종 분쟁을 한 방에 해결해주는 전방위적으로 커다란 정부, 절대자 같이 카리스마 넘치는 제왕적 대통령을 그리워한다. 저자는 우리가 한번도 ‘국가는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 기본적인 자유와 보편적 인권을 억압해서는 안된다’는 자유민주주의적 원리가 실현되는 사회를 체험해본적도 만들어 본적도 없기 때문이라 말한다.

 

   저자는 방송국이라는 조직에서 겪었던 일, 학창시절, 서울대 대학원 시절, 미국 연수 시절, 라디오 진행자 시절에 겪었던 에피소드와 만난 사람들을 예로 들며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했으나 마지막 결론은 의외로 싱거웠다.(물론 자신은 결론내지 않겠다고 했다)

 

 

“사랑하면 동거해. 결혼이 부담되면 혼자 살아. 애는 낳고 싶을 때 낳아.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아이는 혼자  키우는 게 아니잖아. 사회가 같이 키워 줄거야.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 니까”

 

 

   이런 말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사회.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데 근본적으로 한계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문화가 진정한 민주주의라 결론 맺는다. 그러니까 너나 나나 다 똑같아야 하는 그 ‘같은’ 하나를 버리고 각자 ‘다른’ 나를 택해서 살 수 있는 그 ‘다른 대한민국’에서 살자고 말한다. 하나 되는 대한민국은 필요 없다. 이미 우리는 하나였고 하나이기 때문에 이제부턴 좀 서로 달라도 그 다르다는 걸 문제 삼지 말자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산다. 아... 너는 너 나는 나 이유 같은 건 묻지 않는다...톰보이... 나는 왜 이 옛날 광고가 생각나는 것인지...내가 90년대 뭔 세대라 그런 것인지.

 

 

 

남들 때문에 사는 나라

 

 

   박 에스더 기자만큼이나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대한민국에 대해 결론내린 진단서는 한마디로 ‘남의 눈에 죽고 남의 눈에 사는 나라’이다. 우린 어렸을 적부터 내 눈보다 남들 눈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남들 다 가는 대학, 남들 다 낳는 아이, 남들 다 하는 결혼... 남들 보기 창피하지 않냐, 남들이 뭐라 생각하겠느냐, 남들은 그렇게 안 산다, 우리도 남들처럼 떵떵거리고 좀 살아보자, 우리가 남이가 등등등. 옷 살 때도 남들 눈에 안 띄게 무난한 걸 고르고 전자제품, 가구 살 때도 남들이 제일 많이 구입하는 걸 사고 남들이 재밌다고 하면 맛있다고 하면 영화보고 식당 간다. 어디 나갈 때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옷 고르고 머리하고 액세서리 하는 건 기본이고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중형차를 사고 남들이 가봤다고 하니까 제주도 가고 남들이 다 스마트폰 쓰니까 나도 쓰는 식이다. 남들이 죽는 걸 보니 나도 죽을 수 있겠다 싶다. 남들이 다 읽는다고 하니까 덩달아 읽는 바람에 가끔 의아한 책이 베스트셀러도 되고 하는 것이다. 남들이 대체 누구고 얼마나 대단하길래 우린 사는 동안 그 남들에게 쪽팔리지 않게만 살면 마치 그런대로 잘 살았다고 생각도 하는 것 같다. 당신에겐 내가 남이고 나에겐 당신이 남이니 결국 우린 거기서 거긴데 한국 사람에게 ‘남들’은 흡사 초등학교 때 잊을만하면 한번 씩 와가지고 온 학교를 환경미화광장으로 만들어버리는 대머리 장학사나 되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 ‘남들’은 그렇게 실체가 없다가 가끔 무슨 일이 터지면 갑자기 재판을 하기도 한다. 바로 너무나 잘나고 똑똑하고 돈도 많고 외모도 우월한 특정 유명인이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재빠르게 단결하여 그들을 평가하고 단죄하기도 한다. 이 집단적 감시문화는 개인의 사생활이고 인권이고 절대 봐주는 법이 없어 꼭 누구 하나 죽어나가야 그제서야 그럴 줄 몰랐다고 잠잠해지는 특성이 있다. 그러다가 이 ‘남들’도 다 같이 진심어린 한마음이 되어 모두 같은 옷을 입고 하나의 목적으로 소리 높여 외칠 때가 있다. 바로 4년마다 한번 열리는 월드컵 땐 잘 교육받아온 공동체 운명의식으로 인해 그 남들이 하나가 되는 놀라운 마법이 시행된다. 그러니까 그 남들은 결국 우리와 하나였던 사람들, 같은 마음이었던 사람들이니까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나 비슷한 당신이고 친구고 동료에 불과하다. 내가 그런 것처럼 나 아닌 다른 사람들도 내가 자신들과 똑같길 바라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남들 만큼은 사는 한국인이 되기 위해선 저자의 말처럼 일생동안 숙제만 하다 인생 다 보내게 된다. 남들이란 혹시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는 가상의 인위적인 집단에 불과하지 않을까. 만약 손가락질 하는 남들이 있다면 그건 내가 그 남들에 속하기 때문에 그들도 그럴 것이라 짐작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내가 타자를 평가, 감시, 단죄안하면 되는 문제이다.

 

 

   진심으로 남들 때문에 있지도 않은 남들 눈치 보느라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건 오늘날 우리네 생존의 의미가 모두 경쟁과 성공 프레임으로만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성공의 문, 그 1차선은 좁아 죽겠는데 달려온 사람은 수천만이니 그런 것일 테다. 내가 살려면 나 아닌 누군가가 밀려나야 하고 패배해야 되는 서바이벌의 체제 속에선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다. 정말로 남들도 나 잘되는지 어쩐지 나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창궐하고 있는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라. 누군가 눈물을 흘려야 내가 웃을 수 있다. 이제 탈락의 쓰라림 같은 건 그저 매일 지겹게 보게 되는 cf 속 한 장면과 다름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올라간 일등은 그 행복이 얼마나 유지되는 것일까. 우린 집단적으로 생존의 의미부터 재정립해야 한다. 어쩌면 우린 아직 민주주의 나라에서 살아 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내게 다른 대한민국이란 일등 혼자만 웃게 되는 나라, 이긴 사람 혼자만 다 가지는 나라, 그렇게 지독하게 올라갔으면서도 끝까지 행복하지 못한 나라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다른 이 보다 낫다고 생각된다면 가차 없이 지금 가진 것을 나누는 나라, 나누고 사는 게 행복이고 보람이고 목적이 되는 나라, 그래서 지금 나누어 받았지만 나도 언젠가 있는 사람이 되면 그들보다 더 많이 나누겠다고 다짐하는 나라이다. 그걸 특별한 선의로 생각해 자랑도 생색도 칭찬도 하지 않고 다 같이 자연스럽게 당연히 일상이 되는 나라이다. 그게 생존이고 성공이 되는 나라다.

 

 

   나 어렸을 때 학교에서 응원가로 ‘잘 살아보세’ 이런 노래를 불렀다. 세상에 그 어린 목소리로 (다른 노래도 얼마든지 많은데)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이렇게 목청 높여 청군, 백군을 응원했다. 그 노래가 가끔 생각난다. 옛날에 못살아서 잘 살자는 게 아니고 이제는 좀 같이 잘 살아보자고. 또 하나 그렇게 운동회를 많이 하고 죽자고 응원했어도 내가 언제 청군이었고 백군이었는지 그건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그리고 이겼는지 졌는지 그런 것도 기억 안 난다. 그냥 이기면 좋았고 졌어도 그때뿐이었다. 내가 이긴다고 저쪽편이 죽는 건 아니었다. 상대편이 이겼다고 내가 실패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한쪽의 승리가 다른 한 쪽의 좌절과 절망이 되지 않았던 그때가 그립다.

 

 

   지금 졌더라도 다음에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가난해도 언제든지 회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에서 저자가 말하는 소수인권의 문제들이 여간해선 화두가 되지 않는 이유는 아마 개개인들이 단일가치를 추구하는데 익숙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다수가 아닌 것들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꼭 경제적인 문제만은 아니고 자칫하다간 나도 추락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추락하면 다시는 못 올라올 것 같은 불신 때문은 아닐까. 혹시 재수 없고 운 없어 추락하더라도 누군가 내 손을 잡아 줄 수 있다는 믿음만은 잃지 않는 나라를 기대한다. 그렇게 잡은 남들의 손이 다시 내 마음의 온기를 채워줄 것이라 믿고 싶다. 글쎄, 나는 각자 생긴 대로 살자는 저자의 ‘차이’ 프로젝트도 좋지만 지금 우리에겐 재산도, 행복도, 사랑도, 웃음도, 그리고 고통과 상처와 실패도 좀 나누는 나라, ‘같이’ 떠안는 나라가 되었음 좋겠다. 남들 때문에 못사는 것이 아니라 남들 때문에 살게도 되는 나라, 아니 남들이 나보다 더 힘이 되고 믿음이 되는 나라, 그런 남같지 않은 남들의 나라에서 좀 살아 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좀 잘되길 바란다. 만약 안 된다면 나는 그 이유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다. 부디 잘되어서 내 편견을 좀 깨뜨려 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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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3-09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전 핀커라는 사람이 쓴 <성의 패러독스>(숲속여우비) 읽어 보셨나요?
여자가 쓴 글이라지만 '남성성으로 둘러싸인 데에서 남성 못지않게(?)) 일하면, 여느 남성하고 똑같은'
생각과 삶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고,
남자가 쓴 글이라지만 '남성성 아닌 사람됨을 헤아리며 살아가'면,
이때에는 사뭇 달리 글을 쓰는구나 싶어요.

모든 것이 권력이니까
권력을 거머쥐고 나서야 글을 쓰고 기자 일을 하겠지요.

글쓴이가 스스로 방송국 그만두고 글쓰기 그만두고
아이 낳아 열 해쯤 함께 살아내고 나서
다시 방송일을 하고 다시 글쓰기를 하면
아마 아주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