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 있었던 일
알라딘에 어제 베스트 항목이 생겼다. 하루치 판매 경향을 알 수 있는 항목인데 나와는 뭔 상관이 있을까 싶다가 우연히 눌러보니 내가 읽은 책들이 있으니 반가운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와 아주 연관이 없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내가 출간하자마자 어떤 책을 사서 읽자 마자 리뷰를 썼다고 치자. 그런데 그 책이 서평의뢰를 받은 책도 아니고 그냥 나 좋아서 내가 감동해서 내가 쓰고 싶은 어느 날 이 책이 무지 좋다고 떠들었다고 치자. 그런데 그 리뷰가 뜻밖에 추천의 몰표를 받아(아니면 열나게 비판했지만 관심을 받아) 많은 이의 공감과 궁금증을 샀다고 치자. 그리고, 그 책의 판매량에 단 몇 권이라도 일조하여(쌩쓰투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다음 날 그 책이 일일 베스트에 등극했다면? 그냥 우연의 일치일까?? 그런데 내 글을 읽고 책을 산 분이 자기도 좋다고 리뷰를 쓰고 그 글을 읽은 분이 또 책을 산다면? 그래서 어제 베스트가 주간 베스트가 되고 끝내 그냥 베스트가 된다면? 우연이건 필연이건 기분이 나쁘지 않다. 뭔가 뿌듯하기 까지 하다, 하하.
나는 내가 읽고 싶어 신청한 책과 출판사에서 의뢰한 책과 간혹 이벤트로 당첨된 책과 그냥 아무런 부담 없이 읽은 책의 리뷰를 여지껏 구분하지 않아왔다. 느끼지 않은 건 쓰지 않고 느낀 건 꼭 쓴다. 나만의 결론을 꼭 쓴다. 분량에 차등을 두지 않는다. 쓰는 동안만큼은 그 책에 올인한다. 저자가 이 책을 왜 썼을까 저자입장에서 최대한 생각해본다... 등등. (나도 이런 내가 기특하다가도 짜증날 때가 있는데 이제는 습관이 되어서 어느 정도만큼 쓰지 않으면 리뷰를 썼다고 생각안하는 프로세스가 뇌리에 각인 된 것 같다.) 나는 내가 그러니 남들도 그걸 일일이 구분할까 싶었다.
그런데 나는 (이 짓을 오래 하다보니), 다른 누가 아닌 내가 구분해서 읽고 있다는 걸 발견한다. 아니 구분해서 읽을 줄 아는 능력이 생겼다가 맞겠다. 딱 보면 이건 출판사 직원이 쓴 글, 이건 서평단 신청하여 쓴 글, 이건 출판사가 의뢰하여 홍보용 책자로 쓴 글, 이건 자신의 순수한 감동을 널리 알리고자 쓴 글, 이건 작정하고 쓴 대회용 글... 이건 정말 쓰기 싫어 죽겠는데 날짜에 맞추느라 억지로 쓴 글. 대충 목적과 의도와 상황이 파악이 된다. 그건 아마도 누구보다 내가 그러해 본적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이런 것들이 파악이 되지 않게(파악이 되더라도 큰 차이가 안나게- 사실 그렇게 쓰는 사람이 진정한 고수이지만 ㅋ) 일정한 톤으로 자기 색깔이 묻어나는 글이 좋다. 그런 글을 쓰는 알라디너가 좋다. 그래서 나는 그런 분에게 끌리고 호시탐탐 어디 그런 분 없나 찾게 된다. 그리고 누구보다 내가 그런 분이 되고 싶다.
여지껏 온라인 서점에 등극하는 베스트셀러와 리뷰어와의 관계를 크게 생각하지 않아왔다. 내가 쓴 글이 어디 판매력에 영향력을 주겠냐(리뷰어만 읽는다 싶었다) 싶은 것도 있었지만 독자들은 자기가 사고 싶은 책은 안 좋다 그래도 사고 안사고 싶은 책은 좋다 그래도 안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가만보면 나도 다른 분의 글을 읽고 책을 샀고 그 글 때문에 책의 장점과 단점을 알게 되었으므로 내 글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할 것 같다.(지금까진 애써 부정해왔다) 특히나 출간된 초기에는 더 하지 싶다.
알라딘 MD 한 분이 내게 ‘좋은 서평이 좋은 책을 살린다’는 말씀을 해주셨다.(물론 나는 내 서평이 책을 살렸다는 말로 들었다, 하하) 그렇다면 무책임한 서평이 좋은 책을 죽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비록 일개 리뷰어지만 죽을 책도 살릴 수 있고 살았을 책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어떤 공신력있는 기관에서 블로거의 서평과 책 판매량과의 관계를 조사하여 통계치를 낸다면 재미난 결과가 나올 것도 같은데. 알라디너들은 눈치가 빠르므로 주례사 서평이나 목적용 서평을 잘 구분하실 줄로 믿는다. 나같이 맨날 책하고 놀고 글하고 사귀는 분들은 내가 읽은 책과 그걸 읽었다고 하는 글이 미치는 영향을 한번쯤은 생각하실 줄로 믿는다.
#2. 오늘 있을 일
금요일이 되면 나는 주말에 읽을 책과 담주에 읽을 책을 정리한다. 살면서 국가와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온 사실이 요즘은 많이 부끄럽다. 그래서 그런 책들만 자꾸 관심이 간다. 늦바람이 무섭다. 그런 책들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는 냉정함이 생겨버린다. 냉철함이 생겨야 하는데 비판력이 자꾸 냉소쪽으로 흐르게 된다. 한 문장에서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꾸 따지게 된다. 전에 소설 읽는 분들보다 인문읽는 분들이 냉소적이라고 푸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사실과 현상, 문제점과 해결방안들을 관찰하면서 자기만의 논리체계에 근력이 붙기 때문이다.
소설은 대개 질문에서 끝이 나는데 인문은 그렇지 않다. 소설은 덮고 나서 하늘과 별을 보게 되는데 인문은 그 사이 흘러가는 구름이 지금 개는 중인지 비를 뿌릴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한쪽은 우주너머로 나가려 하고 한쪽은 내가 밟고 있는 땅을 바라보게 되는 것. 잘은 모르지만 땅바닥은 차갑고 딱딱하니까 그걸 직시하려면 매서운 눈과 예리한 판단력이 필요할 듯하다.
하지만 자꾸 예리해지다 보면 나는 내 감성이 자기도 좀 생각해달라고 떼를 쓴다. 그래서일까. 반사적으로 위로와 공감의 책들에 꽂히게 된다. (나는 이런게 내 맘대로 독서의 통섭이라고 생각한다 ㅋ) 부지런히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드뎌 오늘 결정을 하고 그 중에 선택된 책을 사버린다. 아... 책이 좀 쉬었다 나올 수는 없는 것인가. 무도처럼 몇주간 결방할 수는 없는 일인가...
이 중에서 나도 사려고 했다가 마침 양철나무꾼님의 페이퍼를 보고 결심을(?) 굳힌 책은 김형경의 에세이다. <좋은 이별>이후 몇년만인가. 심리학 전공자가 아닌 소설가라서 그런지 글이 늘 따스하다. 오늘 온다고 했는데 두고보자. 우리집은 용인이라 오늘 온다하고 내일오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냥 그러려니 한다. 직장인들은 회사에서 받으려 했다가 주말이 끼는 바람에 담주로 넘겨서 받는 경우도 있다 들었다. 처음부터 내일갈 수도 있다고 제발 말해달라.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글 쓰고 나서 걱정 말라는 듯 간다고 ㅋ 문자가 왔다.)
그외 아프다 아우성치는 제목들이 눈에 들어온다. 출판사에서 절대 제목을 양보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김난도 교수의 대박책 이후 제목에 그 여파로 다들 아프다고 한소리다. 청춘도 아프고 삼십도 마흔도 PD도 남자도 모두모두.
실은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기막힌 10분> 이 책을 사려고 하다가 그만 김형경으로 턴을 했다. 두 철학자가 십분 동안 피터지게 입으로 싸운 내용과 그 이유, 그 이후의 일에 관한 이야기다. 작년에 사르트르와 까뮈를 보고 느꼈지만 동시대의 라이벌 철학자는 자기 논리가 곧 자기 생명이다. 다시 말해 상대의 생각, 생활은 물론 생존과 생명까지도 위협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십분을 싸웠건 십년을 싸웠건 그들이 펼친 논리는 죽고나서도 끊임없이 평가된다. 그리고 해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누가 이 책 읽는 분이 있다면 어떤지 좀 알려주시면 좋겠다만.
3월에 어머니 생일과 내 생일, 그리고 양력으로 어머니 돌아가신 날이 모두 들어 있다. 내 생일상 차려주시고 딱 삼일후 돌아가셨다. 원래 어머니 생신 5일후가 내 생일. 그래서 우리는 늘 기브 앤 테이크 하는 사이였다. 미역국을 끓일 날이 많아서 고기를 사다 두었다. 그런데 아이가 새우 넣고 끓여 달라고 해서 고기는 냉동실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내 생일이고 어머니 기일이고 뭐고 결국 아이가 우선이구나. 역시, 살아 있는 사람이 더 중요 하다. 지금 먹어야 할 것, 아니 나 먹을 거보다 새끼 먹여야 할 것이 더 급하다. 내 어머니도 그러했겠지...
꽃샘추위가 반짝이다. 늘 그랬다. 이제 봄인줄 알면 학교는 거의 5월이나 되어야 따스해졌다. 3월은 봄이면서 아직 봄이 아니기도 하면서 그래도 마땅히 봄이어야 하는 계절. 그러니 다들 마음만은 벌써 개나리, 진달래인 주말들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