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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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작가는 미겔 스트리트를 미치도록 떠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책을 덮고 가장 마음을 사로잡았던 주인공의 행위는 ‘탈출’이었다. 현실 회피나 도피, 인간 외면이나 부정이 아닌 합법적 탈출. 그런데 작가는 지금 이 탈출을 다행한 추억으로 여길까 아님 행운이나 필연으로 평가할까.

 

  이 소설은 그가 열여덟에 트리니다드 섬을 떠나 옥스퍼드 대학을 마친 후 작가로 생활하기 시작한 초반기에 쓴 작품이다. 그러니까 지긋지긋한 그곳을 떠난 지 채 십년이 되지 않은 불같은 청춘의 시기에 그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 작가는 떠나면서 항아리가 깨지는 것이 혹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징조이냐고 어머니에게 확인하면서까지 비행기에 올라탔던 것일까. <내가 미겔 스트리트를 떠난 경위>에서도 언급되지만 작가는 무엇을 특별히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이곳을 떠나기 위한 생각뿐이라 답한다. 미겔 스트리트를 떠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곳에선 꿈을 가질 수 없고 가졌다 하더라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그 거리의 사람들처럼 살고는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그 곳의 어른처럼 어른 되기는 다시 아이가 되는 것보다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끔찍하게 여기는 트리니타드에서의 비참한 어린 시절을 벗어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서 쉽게 하지 못하는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그 시절은 그에게 어떤 시절이었던 것인가. 결국 쓰레기 수거원이 된 엘리아스에게 웃으며 자랑할 만한 시절이었는가. 결코 성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실패만 약속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성공적이었다 떠들 수 있었던 것일까. 내가 얻은 해답은 바로 주인공 내가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는 애틋한 시선에 있었다. 나는 작가가 회고하는 그 시절의 그 사람들을 ‘그리움’이라 칭하고 ‘고마움’이라 부르고 싶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꾸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웃겨도 웃을 수 없는 인생을 살아내었음에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작가는 여러 인터뷰에서 50년대 영국의 엘리트 사회에서 이민자로서의 열등감, 외모 콤플렉스 등에 시달리며 힘겨운 유학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트리니다드 가디언>지의 기자였는데 아마도 그가 작가가 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지 싶다. 탈출을 했지만 그후 영국에서의 청춘은 부친도 사망하고 자살을 시도할 만큼 작가는 정신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시기를 보내었던 것 같다. 지난 시절 그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쓸모없는 일을 하면서도 그 쓸모없음에 매달리고 삶을 의존해왔다. 목수는 가구를 만들지 않았고 재단사는 옷을 만들 수 없었고 정비공은 자동차를 고칠 수 없었으며 이발사는 머리를 제대로 깍지 못했다. 남편은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아내는 바람을 피웠고 자식들은 밥먹듯이 맞고 자랐다. 미치거나 취하지 않은 제정신의 사람은 늘 누군가를 흉보고 이웃의 불행에 그 만큼의 위로를 받았다. 그렇지만 내가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진 누군가를 자랑스러워 하기도 했다. 경쟁이나 비교가 의미 없던 시절이었다. 그렇다면 쓸모있는 것을 만들고 제 역할을 하며 사는 것이 부질없기만 한 그 거리를 떠나 변화된 환경에서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가장 많이 고민하지 않았을까? 인도에서는 ‘이방인’이고 영국에서는 ‘식민지’이고 조국 트리니타드에서는 ‘유랑민’인 그가 왜 그렇게 전 세계를 여행하며 돌아다녔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광활하고 폭넓은 사회는 개인이건 집단이건 변화의 가능성이 많아요. 반면에 비좁고 한정된 사회는 어떤 것을 변화시킨다는 게 무척이나 어려워요. 정체성이란 넓으면 넓을수록 좋아요.”

 

  조그만 식민지 마을 출신의 작가가 앞으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작가가 되기 위해 미겔 스트리트는 가장 먼저 추억하고 기록함으로써 극복되어야 할 치명적인 유산은 아니었을까.

 

  열 일곱 편의 단편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경계심>의 주인공 볼로였다. 볼로는 신문에 난 기사를 불신하면서도 신문에 집착하는 유형인데 하이라이트는 바로 자신의 복권 당첨을 믿을 수 없다며 복권을 찢어버린 장면이다. 이 부분은 꼭 그토록 매번 거절당한 상대를 기다리다 지친 여자(혹은 남자)가 마침내 상대가 자신 앞에 돌아왔을 때 현실을 믿을 수 없어 매몰차게 차버리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상징하는 것 같아 가장 짜릿했다. 복권 당첨의 사실여부보다 신문불신에의 믿음이 무너지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돌아오지 않음에 대한 믿음이 그를 기다리게 하는 - 안 돌아옴을 견디게 하는 - 힘이 되는 인생의 역설. 복권이 당첨 될 리 없고 그 당첨되지 않을 진실이 실릴 리 없는 신문이 나를 절망케 하는 사실은 바로 오랜 시간 기대온 불신에 대한 광신을 한 번에 저버리는 순간일 것이다. 복권이 얼마나 당첨되고 싶었으면 복권을 찢어버릴 것이며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를 밀쳐내는 것일까.

 

  신기하게도 소설속의 여자들은 허구한 날 두들겨 맞고 욕을 얻어 먹으면서도 또 애를 가지고 낳고 기른다. 남자들 역시 현실에서의 몸부림을 가장 가까운 배우자에게 토해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웃들도 아내와 자식을 구타하는 것을 큰 일로 여기지 않으며 묵인, 방조, 외면, 구경하곤 한다. 작가가 여성들을 야만적으로 학대한 경험이 있다고 하는데 소설 속에서 화자는 남자 어른들보다 여자 어른들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시선이 냉철해서 그런지 눈에 보이는 피해를 당하면서도 여성들은 그다지 피해자로 인식되지 않았고 외려 확연하게 실패한 인생을 살아가는 남성들이 희생자로 남겨지는 인상을 받았다. 미겔 스트리트를 떠나야 한다고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기는 것도 화자의 어머니인데 중요한 결정은 여성이 하고 출산, 양육, 교육의 역할 역시 어머니 쪽에서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작가로서는 불운속의 행운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청소년기 7,8년을 살았던 나의 스트리트를 떠올려 보았다. 서울 와서 가장 오래 살았던 동네이기도 하고 그 시기 나의 가치관이 많이 형성된 기간이라 나는 그 동네가 사실상 제 2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땐 저층 아파트에 엘리베이터, 자가용도 없었던 시절이라 이웃 간 왕래가 활발해 서로 어제 저녁 반찬이 무엇이었는지 훤히 들 알고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도 캐릭터로 기억될만한 인물은 손꼽아 다섯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나에게 영감을 주었던 어른, 친구들, 이웃들 삶의 풍경이 몇 장의 사진처럼 고정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내가 이웃으로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의 인생을 생각하고 그 사람의 기쁨과 슬픔을 상상해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각각 짧은 이야기지만 대상이 되는 한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이토록 풍부하고 흥미롭게 펼쳐낼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위대하고 놀라와 보였다.

 

  요즘은 주변 어떤 사람도 자세히 관찰해보면 누구하나 소설이 되지 않는 캐릭터가 없다는 걸 느낀다. 사연이 없는 사람이 하나 없고 문제가 없는 사람도 하나 없다. 사람이 문제고 인생이 곧 사연이고 그래서 모두 소설이다. 그런데 이 작가는 서늘할 만큼 그 모든 인간과 그들의 사연에 냉정하다. 너무 할 말이 많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듯 너무 힘들었기에 별일 아니었다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오. 내 삶은 글을 쓸 뿐, 그게 다요. 쓰는 게 종교요. 그게 존재할 수 있는 종교들 중에서 가장 높은 종교요.”

 

  쓰는 게 종교란다. 거 참, 웃음도 눈물도 멈추게 하는 말이 아닐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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